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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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이야기 1번째

1. 초기 로마의 종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인 탓에,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한 부분이 많죠.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합니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로마 제정 초기까지는 고유 신앙이 견고하였고, 그 고유신앙이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였습니다.(그리스인 이야기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했었습니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가 도입되어 로마 신앙은 다양한 신앙이 각 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난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로마 특유의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의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의 사회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죠.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2. 크리스트교의 성립

크리스트교가 등장한 것은 로마의 제정 초기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일단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유대교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상이라는 것에서 탈피하려고 했습니다. 즉,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약성경을 새로이 정립하여 더 많은 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도덕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 바울 등이 로마에 크리스트교를 적극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유대교의 특징이 율법주의, 선민사상이라면, 크리스트교의 특징은 그것을 벗어나 사랑주의, 인류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종교로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출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전도가인 후계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당시 세계제국인 로마라는 전파 매개체가 있었으며, 그리스 사상이라는 민주주의적 사상 기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실제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이후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선민사상과 구원주의, 메시아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탄생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테두리를 거부하는 것이였죠. 예수가 유대교를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 선민사상을 가지고, 민족적 우월성을 따지던 사두케인, 파리세인을 모두 비판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민족주의라는 테두리는 결코 유대인에게 이롭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자신은 구세주로서 부활의 믿음을 유대인에게 보여주어 민족주의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의한 크리스트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역사상으로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바울>에 의해서입니다.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로마 황제들은 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인들의 교세가 날로 늘어났고, 이들이 사랑과 세계구원을 주장하면서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 가장 황제가 싫어했던 것은 병역거부문제, 황제숭배거부(우상거부)문제입니다. 제정시대 황제들은 로마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크리스트교의 소행으로 돌려 그들을 죽임으로서 황제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죽였으며, 이후 황제들 역시 비슷한 방법을 자주 동원합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가 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황제들을 생각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로마 후기에 오면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세금 납부을 꼬박꼬박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크리스찬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경건함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밀리노 칙령(313)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합니다. 단, 집권층과 황제 자신도 그들의 종교는 제우스교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크리스트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훗날, 테오도스우스는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면서 모든 지배층에게 크리스트교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정치적인 목적이였기에,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황제와 기존 신앙(제우스교, 디오니소스교 등)을 옹호하는 원로원파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배교자라 불리는 초기 신앙 옹호파들이 정권을 잡기도 하였고,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파가 정권을 잡기도 하면서 상대파를 죽이기도 합니다. 실제, 로마가 동서로 갈리는 시기에 동서로마에는 각각 종교적인 대립이 극심하였고, 이것이 황제로 하여금 로마 분열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쟁과 대립을 통하여 황제들은 반 크리스트적 계파를 완전 제압하였고,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남아있는 한 로마 제국의 전역에 교회조직을 성립시켜 퍼지기 시작합니다.

3. 로마 교회의 조직 구성

로마 교회의 교세 성장은 교회 관리자가 도시와 주변농촌에 행정 기능까지 관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로마 교회는 단순히 <장로>가 다스리는 지역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로마황제에 의해 핍박받고 음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교세는 급격히 확장됩니다. 특히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과 일원화하는 방식은 크리스트교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구성 방식을 한 번 볼까요? 크리스트교 구성방식은 로마 행정조직에 따라 3단계로 설정됩니다.

1. 도시와 주변 농촌 지역 : 가장 기본적인 교리 전파 지역으로 주교가 책임을 집니다.

2. 로마의 속주지역 : 로마의 속주는 몇 개 도시와 농촌을 포괄하는 식민지로서, 이 지역의 총책임자는 대주교입니다. 대주교가 주교들을 총괄합니다.

3. 로마제국의 5교구 : 로마제국의 가장 거점이 되는 5개의 수도에 각각 수좌대주교가 있어 대주교들을 총괄합니다. 이 5개의 5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5개의 교구 중 가장 상위의 교구가 <로마>로서 로마의 교황은 다른 교구 및 모든 크리스트교 지역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 로마교구를 책임지는 자는 교황으로 불리며, 서방교회의 책임자이입니다. 로마가 가장 상위를 차지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수도였으며, 로마교회가 예수의 직계인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하게 되면서 5개의 교구중 로마(서방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동로마교회의 중심지)만 남게됩니다. 이 2곳이 동, 서 유럽의 종교 중심지가 되며, 나머지 3곳은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가 교회중심지로서 구심점은 잃게됩니다. 나머지 3곳을 탈환하려는 노력은 훗날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자, 다음장에서도 로마 교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교부철학 부분을 역사적으로 논해봅시다. 고고 싱!!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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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