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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이자겸의 난 -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다 이자겸의 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게 되어 귀족사회 붕괴를 촉진시키다 ." 고려 귀족사회는 문종대를 전후하여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상호대립하는 양상이 심화되어갔다. 그러한 귀족세력 중에 경원이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80여 년 간 계속 외척으로서 강력한 세력을 굳혀오고 있었는데, 이자겸은 이러한 경원이씨 가문의 출신이었다. 1094년 문종의 아들인 선종이 죽고 병약하고 11세밖에 안 된 어린 나이의 헌종이 즉위했다. 이때 경원이씨 출신인 이자의(李資義)는 자신의 여동생인 원신궁주(元信宮主)와 선종의 사이에서 태어난 한산후(漢山侯)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거사를 도모했으나 왕의 숙부인 계림공(鷄林公:숙종)이 이자의 일파를 주살하고 중서령이 되었다가 그해 11월에 헌종의 선.. 더보기
왕규의 난 - 고려 초기 휘몰아치는 호족간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어난 난 왕규의 난 "고려 초기의 상황은 너무나 어지러웠다.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왕규의 난은 아직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왕규의 난의 기본적인 상황 배경은 태조 정책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가 호족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호족들의 딸과 결혼한 것만 29차례이며, 역분전 등의 공신 지급, 사성정책, 중앙과 지방 호족들을 위한16관계제의 마련 등은 수많은 호족들에게 태조 사후 분란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혼란을 정리하자면, 먼저 태조 사후 왕비가 연계한 호족들의 왕권에 대한 개입이 잦았다는 점입니다. 혜종기의 박술희 가문의 보호 아래 혜종 외척인 오씨 집안(전라도 나주집안)의 미약함은 왕에게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종시 서경세력인 왕식렴의 보호, 왕실내 근.. 더보기
원종과 애노의 반란 -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농민 반란 원종과 애노의 난 "한국사에서 볼 수 있는 기록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최초의 농민 반란.... 민중이 새로운 세상을 추구하다." 통일신라 말기에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중앙정부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권력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중앙에서는 전골왕족의 왕위계승법칙이 붕괴되어 실력위주의 왕위 계승이 시도되었습니다. 거기에 폐쇄적 골품제와 고대적 수취제도의 모순으로 진골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불만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골품제 자체의 모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귀족들은 단지 골품제도의 운영상의 문제로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실제 신라말은 농업생산력이 발전한 시대였습니다. 북방의 간척사업, 예성강 유역 개발, 중국 선승들의 선진농법 수용 등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골품제는 이것을 수용.. 더보기
장보고의 난 - 능력있는 자가 귀족 사회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회 장보고의 난 "청해진의 사병을 바탕으로 귀족 사회의 권력에 도전하다." 신라 말기 신라사회는 골품제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창출할 수 있는 세력들이 호족으로서 등장하였습니다. 호족의 유형으로는 촌주, 해상세력, 군진세력, 초적, 낙향귀족 등 여러 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독자적 관직과 행정체계를 갖고 대토지와 사병을 소유하였으며, 새로운 사상을 수용하고, 지방의 향도조직을 장악하는 등 준국가적인 체계를 갖추어 나갑니다. 이 후 후삼국도 이들 호족세력들에 의하여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이 중 해상군진세력으로 거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이 청해진의 장보고입니다. 드라마 해신 보셨죠?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입니다. 실제 기록인 입당구법순례행기〉라는 책에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죠. 그의.. 더보기
김헌창의 난 - 신라의 골품적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의 족적 변동, 사회적 변화, 골품제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회 내부의 반란'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가 붕괴되어가자, 진골 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지요.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에 오른 이후 이제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진골 내부에서는 누구나 실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선덕왕 대에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다음 왕에 오르며 원성왕계를 형성한 것이 그 예이죠.. 더보기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신라가 무너져가다 - 96 각간의 난 96각간의 난 "신라가 점차 귀족연립사회로 접어들면서 친왕파와 반왕파의 치열한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신라중대의 전제 왕권이 무너지는 시기적 상황에서 일어난 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라 중대의 강력한 왕권은 신문왕과 성덕왕을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는데요. 신문왕 때 실시한 관료전과 성덕왕 대의 정전제도 등 일련의 조치들은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사게 됩니다. 경덕왕 대에는 결국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왕과 귀족집단과의 타협접을 찾게 됩니다. 경덕왕 대의 한화정책도 그런 측면이 가미되어 있고, 녹읍이 부활된 것도 그러한 시대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후 혜공왕대의 상황입니다. 점차 왕권이 약해지는 상황속에서 친왕파와 반왕파의 대립이 있게되는데, 이 것이 96각간의 난의 시작입.. 더보기
가야에서의 반란 - 포상 8국의 난 포상 8국의 난 "중계무역권이 붕괴되고 찾아온 가야의 위기.... 그들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의 장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 삼국육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2년에 김수로왕이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고 하면서, 또한 금관가야를 포함하여 6 가야가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6 가야는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연맹체를 이루고 있었지만, 강력한 왕이 등장하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가야는 초기 변한지역에서 철기 문화와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등장한 나라입니다. 2세기에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일종의 군장 연합체인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금관가야가 발전한 이유는 철의 중계무역과 이를 통한 정치적 연대로 맹주의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금관가야의 전성기는 4세기에 막을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