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7  목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고등학교 한국사 문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 금일의 출제 범위는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입니다. 학교 시험 문제에서 골라보았습니다.

1.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 서쪽으로는 압록강이요,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1. 위 금석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조선에서 영토 분쟁이 일어난 지역을 지도에서 바르게 고른 것은?
① 가        ② 나        ③ 다        ④ 라        ⑤ 마      

 

2. 다음 표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위 도표는 고려 시대 전시과의 토지 지급 액수입니다. 다음 중 맞는 설명을 골라주세요.
① 전지가 시지보다 감소되는 폭이 더 크다.
② 관리의 업적을 기준으로 하여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③ 지급량이 감소한 것은 관료의 수가 줄어들었고, 토지는 남아서 왕실에서 토지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④ 개정 전시과 때부터 하급 관리는 시지를 받지 못하였다.
⑤ 곡물을 수취하기 위해 토지만을 지급하였고, 시지는 원칙적으로 전시과 항목에서는 제외된 상태였다.

 

 

3.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 그림과 같은 형태로 도시를 정비한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고르세요.
① 중국식 문화를 일체 배제한 채 고구려의 문화만을 받아들여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② 행정구역 중 15부는 피지배층인 말갈족의 향촌 지배를 인정한 결과였다.
③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물을 남겼다.
④ 국가 기본 이념으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⑤ 호류사 금당 벽화는 이 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4. 다음 자료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위 자료는 일제 강점기 농가 호수 비율의 변화를 나타낸 표입니다. 표와 같은 현상이 나타난 원인이 되는 일제의 정책을 2가지 골라보세요.
① 토지 조사 사업
② 회사령
③ 산미 증식 계획
④ 물산 장려 운동
⑤ 병참 기지화 정책

 

 

5. 다음 사진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위 사진과 관련된 종파에 대해 바르게 설명한 것을 고르세요.
① 고대 인도의 신분차별과 관련있는 종교이다.
② 신라의 전제 왕권 강화에 기여한 종파이다.
③ 경전의 이해를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였다.
④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신라 말기에 발달하였다.
⑤ 고구려와 백제 초기에도 이 종파가 유행하였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서태지 - 발해를 꿈꾸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뮤직비디오 - 발해를 꿈꾸며


이 뮤직비디오를 다시 보니 신기한 장면들이 있네요. 1분 20초 쯤에 보면 역사 사료들이 몇개 나옵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확실히 있군요. 무슨 사료들인지 시력 좋은 분은 맞춰보세요... ㅎㅎ

  이 뮤직비디오는 다운로드, 태그복사, 소스복사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티스토리 역사블로그 -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고대의 전쟁이 공성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통한 전쟁 역시 항상 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영역 사이에 바다라는 것이 역사에 씌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민족과 항쟁을 벌인 경로를 보면 <교과서가 고대사에 대하여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과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지침용 3차 사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자세한 내용과 중요한 사료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교과서에 빠졌거나, 1단어만 기술되어 빠져 버린 바다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는 동해와는 달리, 서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쪽 바다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황해>입니다. 아니 왜, 동쪽 바다는 일본해도, 청해도 아닌 <우리 영토로서의 동해>이면서 서쪽 바다는 <황해>라고 해야되나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역사적인 이유만 말해보도록 하죠. 동해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지배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다입니다. 일본이 동해바다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라고 인식한 이후부터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의 경제력이 성장한 이후부터입니다. 즉, 근대 이전까지 이미 역사적으로 <동해>는 우리 영역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황해>는 다릅니다. 이 바다는 중국민족과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바다였고, 이 바다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따라 고대 천하관이 바뀌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 바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바다였죠.

실제 고조선, 고구려와 대중국 항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육로에서의 전쟁만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서해바다를 이용했고, 수,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항상 바다를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해바다라는 것은 실제 한, 수, 당이 우리 국가를 침공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나라별로 차근히 보도록 하죠.

2. 한무제는 왜 고조선을 1년간이나 공격해야만 했는가?

중국과 고조선의 치열한 항쟁이 시작된 것은 중국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진시황제도, 한고조 유방도 고조선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이후 통일된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 등 북방민족과 영역 싸움을 하였지만, 고조선과의 직접적인 큰 대립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고조선이 직접적으로 대결구도에 들어간 것은 위만조선 때부터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에 철기 기술이 도입되었고,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중개무역>입니다. 위만 조선이 시작한 중개무역이란, 한반도 남부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여 그 차액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중개무역이란 A국과 C국사이에서 B국이 물품을 운송해주고 중간에서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합니다. 중계무역이란, A국의 물건을 B국이 자국에 가져와 가공하거나, 물품 표지를 한 다음에 C국에 넘기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2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합쳐서 중간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위만이 남방국가들의 물품을 중국에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이용한 루트는 바로 <대동강>이라는 고대 상업 해상망이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 때 철기를 이용하여 정복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기사도 대부분 이 대동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동강 루트를 통한 중개 무역은 위만조선이 곧 중국의 골치거리인 흉노와도 무역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게 하는 했습니다. 보통 중국이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을 <고조선과 흉노와의 차단>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사정에는 이런 경제적 문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단순히 요동성을 중심으로 육로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육로에서는 좌장군이 침입하였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누선장군이 대동강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1년여간의 항쟁끝에 무너집니다.

3. 대동강 루트와 서해 북부를 일시 중국이 장악하다.

중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한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 한사군은 현토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이후 나타난 조선유민들의 저항으로 거의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그곳이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과 대방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고대 황해안 루트를 이어주는 상업권의 맥으로서 그 중심지가 <대동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과서와 개론서들을 보면 변한에 철이 많이 생산되는데, 그 철은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으로 수출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대가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 고구려, 백제의 협공에 망하게 되면서 <중개무역 루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지요. 즉, 금관 가야는 일본 - 가야 - 낙랑군을 이어지는 고대 상업 루트를 통해 발전한 나라였지만, 낙랑군이 망하게 되면서 그 교역 대상국을 일본 - 가야 - 백제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자극하게 되어 광개토 대왕이 일본, 가야, 백제를 동시에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게 되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대동강 무역로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지요?

4. 백제와 고구려의 초기 싸움은 강과 강을 두고 무역권을 쟁탈하려 하였다.

이제 대동강을 일시 점령했던 낙랑군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황해안 무역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낙랑군이 멸망한 것은 백제, 고구려 군의 협공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공은 곧 영역 확보와 중국 민족 축출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고대 무역권 확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낙랑이 사라져 서로 국경을 마주보게 된 백제,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끼고 큰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초기 전쟁은 한강 - 예성강, 재령강 - 대동강 이라는 황해안 루트를 두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대동강 연안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보통 삼국시대의 4세기 하면,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왜 - 황해안 - 중국 남조, 북조 - 요서 점령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상업권 확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상업권의 확보는 결국 당시 가장 중요한 고대 무역로인 대동강 연안과 황해안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5세기 이후 황해안 무역권은 대동강이 아닌 한강을 두고 벌어졌다.

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전은 이제 한강을 두고 벌어집니다. 광개토대왕은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인 한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운을 걸고 사투를 벌여 사수합니다. 대동강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선진지역이고, 평양평야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자원이었습니다. 반면, 한강 역시 백제의 중심지로서 김포평야의 농업중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가치가 말로 할 수 없었죠. 실제 황해안 유역의 금강 - 한강 -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모두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습니다. 사실 황해안 루츠를 이용할 수 없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삼국간 항쟁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 중 2- 3세기 가장 체제 정비가 빨랐던 나라가 백제인 이유도 활발한 중국과의 대외교역으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 정치제도를 빨리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한강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이제 금강이 되어버립니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가 기반은 고조선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물산이 집약된 대동강 연안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은 남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되었는데, 그 가장 선봉지역이 남한강 하류의 충주지역입니다. 즉, 남한강 하류를 장수왕이 경영하면서 한강의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이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보통 개론서들에서는 <장수왕의 충주경영설>이라고 합니다.

6. 고구려의 무역권 독점과 반고구려 체제의 형성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영토 확장으로 대동강 무역권, 한강 무역권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북방으로 넓힌 영토를 통하여 말갈, 거란, 돌궐 등에 대한 무역로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패권주의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의 핵심 내용은 한강 무역권의 탈환이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적대 이유는 흉노 이래 중국이 지배해오던 조공경제 무역 질서를 고구려가 빼았아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거란, 말갈, 돌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북아시아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확보한 광대한 상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 부산물을 차기 하기 위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고, 수나라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요동성 등 공성전과 함께 대동강을 통한 바닷길 싸움도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청천강에서 크게 대패하고 맙니다.(살수대첩) 이후 수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대군은 육로였지만, 실제 큰 격전지는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등 강 하류에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전쟁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수가 망해 버리자, 당나라는 고구려보다는 고구려와 무역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서역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돌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거란과 말갈족의 주요 상업 중심지를 당이 장악하면서, 당은 다시 중국식 조공 경제 무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하여 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은 고구려의 동북아 상권과 황해안 상권마저 빼앗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안시성 싸움의 패배등으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7. 신라가 지키려고 했던 대동강 까지의 확보

당은 이후 나당동맹을 통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당동맹에서 신라가 요구한 것은 <대동강 유역까지의 영토 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대동강까지 진출하여 황해안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게 대동강은 절대 줄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신라 전체를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으로 <나당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끝까지 사수하여 대동안 연안을 확보하였지만, 당은 이후 150년 이상 <대동강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동강 연안의 황해를 자국의 근거지로 생각합니다. 실제, 대동강 연안에서 중국의 동부지역까지는 많은 신라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부아시아의 가장 활성화된 무역로로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신라의 영토로 당이 인정한 것은 신라 성덕왕 때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무역권을 인정한 이유는 발해 때문이었습니다. 발해가 북방 상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로 성장하자 당은 신라를 회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 해상왕 장보고의 상권 확보

그러나 8세기 이후 안사의 난 당으로 당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동북아의 상권과 황해안의 상권은 점차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중국 - 신라 - 일본과의 해상 루트를 장악하고 거대한 상권 루트를 재건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일본 - 신라 - 중국 동부의 상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인들은 중국 동부 해안가에 무역로를 개척해두고 있었고, 장보고가 중국, 신라, 발해의 약세를 틈타 그 무역로를 완전 장악하여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 속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은 곧 고대가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은 송으로 넘어가 중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건국되어 중세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후 중세시대로 넘어갔으며, 고대의 영광을 재현한 발해도 이 무렵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 상업권에 대하여 쭈욱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상업이라는 한쪽 시각에서만 적은 글이라 편협하긴 하지만 그냥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글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주세요.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기존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있거나, 숨어있는 한줄의 문장이 눈에 띄면 정리해서 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서의식, 강봉룡 지음, 2003, 솔출판사
  8.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1992
  9. 한국역사입문 제 1권,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도서출판 풀빛, 1979
  10. 한권으로 읽는 중국의 사상, 권순우 편역
  1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1993)
  12.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글 내용중에 잘못된 내용, 오탈자가 있으면 댓글을 주세요 by history>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플래시 자료 - 발해의 길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TAG 발해

플래시 자료 - 발해는 우리의 민족국가이다.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TAG 발해

박은식의 한국통사 <결론 부분 전문>

발췌부분  : 박은식 선생님의 한국통사 중 결론 부분 전문

발췌자 : http://historia.tistory.com/(히스토리아)

자료 원문 서적 : 한국통사(박은식 저,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0)

1. 운영자의 해석

한국통사는 백암 박은식 선생님이 상하이에서 망명하던 시절에 쓰신 책입니다. 이 때 박은식 선생님은 스스로 나라를 잃은 미친 노예(태백광노)라는 이름으로 이 책을 쓰셨습니다. 한국통사는 서언, 1편(대강편), 2편과 3편(1-51장, 1-61장), 결론, 후서, 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개할 부분은 유명한 <국백, 국혼>에 대한 말이 나오는 결론 부분입니다. 박은식 선생님의 역사관이 집약된 부분이라 이 부분을 오늘 포스팅 하려 합니다.

2. 한국 통사의 결론 부분 <전문>

옛날에 대씨가 지배했던 발해는 그 영토가 5천리나 되고 약 300년간의 영화를 누렸다. 그들은 무공이 뛰어났던 데다 문물이 번창하였기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멸망한 다음에는 발해의 역사라는 것이 명확히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일찍이 용천이라는 곳에 와서 그들의 고적들을 답사하며 보았더니 잡초만이 우거져 있어 씁쓸하기 짝이 없으니 힘차게 흘러가는 강물소리처럼 무예가 드높고 문장이 세상천지에 알려졌던 그 찬란한 위업들이 이제는 모두가 바람에 날려 버린 듯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발해가 문장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는 발해의 문인학사들이 당나라에 가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많은데 어찌 문헌상에 간략하게나마 남아있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왕자와 왕족 그리고 그들 유민들이 요나라의 노예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무기를 들고 고려로 들어온 자들이 만여 명이나 됐는데도 그들의 기록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그것은 그들 민족이 마한 동족이고 그들의 영토가 고구려의 옛 영토이기 때문에 고려인이 볼 때는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방문하여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옛사람들이 발해사를 편수하지 않았던 것은 이를 고려로 알고 정리하지 않았던 것이니 이를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인류가 이 지구의 땅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야만스럽고 무지함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제도를 정하고 도덕윤리와 정치, 교육, 법제 등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역사인 것이다. 역사가 있다는 것은 국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다. 아시아 최대의 또는 가장 오래된 나라들을 예로 하여 이를 말하자면, 중국의 혼은 문학에 있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시대에 따라 흉노, 강족, 금원, 몽고족 등에 의해 침략을 받아 지배당하기도 하였으나 5천년에 이르는 문학의 연원이 단절되지 않았던 까닭은 타민족에 동화되지 않았던 것이고, 오히려 타민족이 중국에 동화되게 되었고, 돌궐은 국세가 미약하여 강토도 점점 축소되어 감으로써 오래도록 열강들의 제재를 받아야 했지만 1억이나 되는 교도들의 세력이 언제나 강성했기 때문에 그들은 곧 국권을 회복하고 했으니 이는 바로 국혼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비, 거란, 몽고는 모름지기 한때는 극성하여 많은 지역을 정복함으로서 천하에 그들의 무공을 빛내기도 했으나 일순간에 그들의 국명이 다하고 말았으니 이들 나라는 백이 강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에 속하고, 전곡, 졸승, 성지, 함선, 기계는 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혼이 있는 자는 백에 따라서 죽고 살지 않으므로 나라에서 국사를 가르체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게 된다. 오호라 지금의 한국은 이미 백은 죽었다고 할 수 있으나 소위 혼이라는 것이 남아 있는가, 아니면 이미 없어져 버렸는가?

나는 단군이 개국한지 4100년(1863년) 만에 황해도 해변가에서 태어났으므로 점점 더 국권이 실추되어 가고 있는 지금에 있어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국민적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늙어 백발이 된 지금 국가가 존망에 처하게 되어 이제는 조상에 제사조차 지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 큰 죄를 지은 내가 어찌 편안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루는 애양이라는 곳에서 우리 동포를 찾아 묵게 되었는데, 다음날 그 집 주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자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써야할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우리 선조님들이 묵묵히 소자에게 명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이 문치를 시작한 이래 500년 동안 많은 문사들을 배양했고 그로 인해 베풀어진 은덕 또한 깊고 넓기만 하니 글을 아는 문재들도 각 시대마다 그득하다 아니할 수 없다. 나는 그들만큼의 큰 그릇이 아니니 어찌 내가 그런 계통을 이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계통을 이을 사람이 나타나기를 오래도록 기다렸으나 이미 수년동안 그러한 글을 썼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세월이 이미 이처럼 흘러 나도 나이가 적지 않게 되었고, 나의 맡은 바 직분도 또한 그만두게 되었으니, 4천년 문명부국이 발해국의 흥망사와는 다르므로 비록 천하 사람들이 내가 비록 부족하다고 질책하더라도 나는 이제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4천년 전체의 역사는 쓰는 일은 보다 유능한 자가 나타나서 해야 할 일이고, 이는 세월이 알아서 할 일이라고 보며 또한 반드시 그런 인물이 나타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목격했던 근대사는 쓸 수가 있을 것 같으므로 갑자는(1864)에서부터 신해년(1911)까지의 역사를 총 3편 100여장으로 나누어 서술하여 이를 통사라고 하였지만 감히 정사라고는 할 수 없다. 이제 이 글을 통해 우리 동포들이 다행히 국혼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바라며, 절대로 이를 저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전문 끝>

----------------------------------------------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역사로서 우리의 혼을 일깨우려는 마음... 박은식 선생님의 역사 사랑이 마음에 팍팍 와 닿는 글입니다. 이런 분들의 후손들이 잘사는 세상이 진정 아름다운 세상 아닐까요? 친일파 재산 환수도 안되는 나라, 애국자들의 후손들을 냉대하여 이후 전쟁에 총들고 나갈 사람들이 없는 나라... 어떤 나라로 가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로서 좋은 것인지 박은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봅니다.

박은식 선생님의 손자인 박유철 선생님이 지금 독립기념관의 관정으로 계신다고 합니다. 애국자들이 잘사는 나라,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 오타나 잘못 표기된 부분은 댓글을 달아주세요.
이글은 운영자의 글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 사료인 <한국통사>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티스토리 역사블로그 - 히스토리아>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발해사 연구의 현황
한 규 철(경성대 교수)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네 나라 사람들은 근대적 발해사 연구가 시작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총 1,972편의 글이 발표하였다. 물론 1,972편 중에는 부분적으로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것까지를 포함하여 숫자상의 의미는 크지 않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해사 연구와 관련되어 이만한 글들이 발표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발해사 연구가 한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 4국이 공동의 관심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4개국의 연구를 계량적으로 분석해 보면 中國이 894편 45.3%로 다른 나라에 비해 가 장 많았고, 日本이 435편 22.1%, 韓國이 380편 19.3%, 러시아가 263편 13.3%였다. 또한, 그동안 글을 남긴 사람들을 중심으로 볼 때에, 中國은 269명, 日本이 193명, 韓國이 170 명, 러시아가 78명으로 전체 633명의 학자나 기관들이 글을 발표하였다. 이 통계로 보자 면, 러시아가 가장 소수의 사람들이 많은 업적을 남긴 셈이다. 1인당 평균 3.37편의 글이 나왔다는 것이다.

분야별 연구 현황을 보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이 발해국의 현장에서 현대사 가 전개되는 이유로 인하여 고고학 관련 발표문들이 많았고, 현장이 없는 한국은 문헌사 적인 면에서, 연구사나 외교관계, 유민관계 및 종족과 사회관련 발표가 다른 나라에 비 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4개국 전체를 집계한 결과, 전체 1,972편 중 考古一般, 遺蹟, 紀行 관련 논저를 비롯해서(320편 16.2%), 都城·建築·寺院·聚落址(188편 9.5%), 古墳·古墓 (85편 4.3%) 관련 글까지를 포함하면 593편 30%가 고고학 관련 글들이라는 점이다. 이 러한 결과가 나온 이유는 발해사 연구가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고고.발굴에 기대하는 바 가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가장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언어, 문자에 관 한 것으로 6편 0.3%이며, 다음이 사상, 종교 등으로 15편 0.7%, 인물, 교육 등은 17편 0.9%에 그쳤다.


중국보다 오히려 활발한 연구가 있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모두 1909년의 간도협약과 1860년의 북경조약으로 인하여 만주지역과 연해주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나타난 현 상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이후에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연구자의 국적은 중국이다. 문 화대혁명이 지나고 난 이후의 현상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한국에서 80년대 이후 급 격하게 발해사 연구를 많이 하였던 것은, 중국과 러시아의 개방과 함께, 한국 경제의 발 전으로 인한 학문 저변의 확대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韓國·中國·日本·러시아의 渤海史 硏究 推移


우리나라 발해사 연구에 대한 현황 자료입니다.

원문 사이트 : http://www.koguryo.org(사단법인 고구려 연구회)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