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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14 러시아사 9 -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2세(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전왕대 크림전쟁의 비참한 패배를 구경하였기에 내정개혁의 필요성 및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모든 것을 시도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유럽에 대한 여행을 완화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합니다. 또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완화합니다.

특히, 그는 농노해방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모든 농민을 해방시키고, 각 농가는 일정한 토지를 할당받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민중이 정말 오랜 시간 투쟁한 결과의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냐면 종래 가진 토지는 이미 지주에게 빼앗긴 경우가 많았고, 새로 할당된 토지는 장기간 상환금이 부담되어 있는 토지라서 매입금 부담이 큰 것이었습니다.

또 할당된 토지가 농촌공동체(미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미르는 토지를 주기적으로 공평하게 재분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실제 농민들의 보유지라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즉 농민이 되었지만, 자유는 없었습니다. 종전의 지주에게 예속당하던 농민들은 미르에 예속당하게 되었으며, 분배받은 토지에 대한 상환금만 많았습니다. (물론 이유야 어찌되었든 형식적으로라도 자유라는 것이 농민에게 주어졌으며, 러시아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황제는 농노해방으로 새로운 법제도 만듭니다. 지주가 가진 영지의 사법권과 경찰권은 사라졌습니다. 즉, 영주권의 소멸이지요. 지방의회(챔스트보)를 만들어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도시에는 시의회를 설치하였으며, 사법제도에 배심제를 도입합니다. 또 대학에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군대도 계급 구분없이 모두 징병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보기엔 이 개혁은 너무 미흡하였습니다. 속도도 더디고, 전제정치라는 틀 자체는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불만많은 개혁 때문에 여러 대응책을 찾았습니다. 먼저, 농민속으로 파고들어 적극적으로 계몽운동을 하자는 <나로드니키>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또 일단의 지식인들은 바쿠닌식의 무정부주의와 폭력혁명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폭력혁명을 주장하면서 농촌사회를 사회주의의 전진기지로 만들고 차르를 살해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민의 의지>라는 테러단을 만들어 차르를 살해하였는데, 하필이면 이 때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사회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개혁안을 승인한 직후라서 러시아 근대화는 또 다시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러시아는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1877년의 러투전쟁이 있는데, 이 때 개혁을 추진하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습니다. 내용은 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루마니아가 독립하고, 불가리아가 자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영국,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해 이 조약을 축소하기 위한 새로운 조약을 <베를린 회의>에서 맺게 됩니다.

베를린 회의의 내용은,
   1. 새로 독립한 나라들의 영토는 대폭 축소한다.
   2. 영국은 키프로스 섬을 확보한다.
   3.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한다.    -  입니다.

이 조약은 이후 세계대전까지 영토상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러시아, 발칸반도국가들은 이 조약내용에 불만이 많았고, 세계대전에 기름을 붓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