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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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4화. 인도 불교의 대중화 - 대승 불교 이야기

1. 일반민에게 친숙한 석가 - 석가의 불상이 만들어지다.

자, 이제 한반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대승 불교쪽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소승불교나 티벳 불교는 우리와 큰 상관이 없으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핵심을 짧게 정리하자면 <만민구제>, <속가불교>, <보살신앙>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 하나 하나 정리해볼까나? 대승이란 말 자체가 <큰 수레>라는 뜻이다. 그럼, 소승은 <작은 수레>겠지?

석가시대의 불교는 출가자들이 문답을 통해 진리를 얻고, 수양과 고행을 적절히 섞어 깨달음을 알아내는 불교였다. 불교를 믿는 출가자들의 목표는 <자신의 구제>였다. 즉, 깨달음을 위해 정진을 계속하고, 그 결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가의 이념을 인정한 마가다 왕국이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역시이러한 불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는 <호법왕> 역할을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기 불교 자체가 <소승 불교>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쇼카 왕의 석주 : 정법실현>

<석주 머릿기둥>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무렵, 소승 불교는 성격이 바뀌게 된다. 당시에는 새로운 사회사상으로 힌두이즘의 바크티 사상이 유행하였다. 바크티란,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총>이란 뜻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신의 은총이 내린다는 초기 힌두 사상이었다.

불교도들은 이 사상이 자극을 받았다. 석가는 출가자와 일반 신도를 차별하지 않았는데, 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출가자들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을 얻기 힘든 일반인들은 <도솔천>에 오르기 힘든 것인가?

거기에 계속 유입되는 철학들도 불교의 폐쇄성과 대립하였다.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도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는데, 불자들은 왜 출가자들만의 <열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해결한 것이 바로 <대승 불교>였다. 붓다는 더 이상 선택받은 출가자들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교가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함께하는 구원이었다. 기원 전후로 인도에는 안드라 왕조가 성립하여 이민족을 몰아내고 인도 남부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왕조는 브라만교를 신봉하면서 바르나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했다.

불교도들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혼자만의 <열반>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한다는 명분이 필요할 때였다. 자신의 깨달음의 결과를 많은 이들에게 돌려 수많은 <불도>들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수많은 중생들을 <불제자>로 만들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석존의 가르침에 앞서 석존의 인격과 신성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원래 초기 불교에서는 석탑이라는 것이 없었다. 부처조차 죽음(입적) 후에는 화장을 하여, 몸에서 나온 다비를 세는 정도에서 죽음을 정리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석가의 유물들로 각지에 불탑을 세워 보호하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은 그곳을 찾아와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닌 일반인 중심의 불교가 시작됨을 뜻한다. 일반인들은 복잡한 불교의 가르침보다는 석가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 석가의 불상 조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석가의 불상 조각을 처음 만든 것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인도를 접하게 된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석가라는 인물을 합리적으로 알기 위해 어떤 형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모방한 형태로 석가의 불상을 조각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치던 인도 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간다라 미술)

<간다라 미술의 불상들>

2. 부처의 비서실장 - 보살들의 등장

다음, 불제자 양성 프로젝트는 <보살>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초기 소승 불교의 <개인 구제> 방법은 듣고, 고행하고, 깨닫는 방법이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암송한 뒤, 석가의 고통을 스스로 느껴보고, 석가의 깨달음을 명상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언제 암송하고, 고통받아보고, 한가로이 명상하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열반>에 들어간 석가가 다시 나와서 <전 중생>과 일일이 악수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살>이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다니는 예비 부처들이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행을 쌓아야 하는데, 선행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일반민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야만 했다. 이 수행자들은 부처의 사상을 알리는 홍보실장과도 같았다.

<보살>들의 수행방법은 <육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이것은 6개의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 불교의 최초 경전인 <반야경>의 핵심이었다. <반야>란, 6개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를 말한다.

육바라밀 : 보시(베풀어 주는 것), 지계(바르게 사는 것), 인욕(참고 사는 것), 정진(노력하는 것), 선정(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반야(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이 6가지를 실천하면서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곧 보살들인 것이다. 보살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자비로움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인물들이었다.

대표적인 보살은 <미륵>이다. 미륵은 석가시대부터 존재했던 보살이다. 많은 역사서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던 보살이다. 미륵은 당대 실존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장 부처에 가까운 보살로서 인간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보살로 알려졌다. 미륵은 언젠가 중생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다시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보살들이 등장했다. 자비로움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세음보살>은 훗날 동아시아에서 <아미타불>과 연관된 대중적 보살이 되었다.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반야경>과 관련있는 <문수보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살이 되었다. 죽은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지장보살>, 티벳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자정하는 <집금강보살> 등도 시기는 달리하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원래 보살은 수행자를 뜻한다.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원에서 수행을 하면 보살이 될 자격이 있다. <보살>은 불교 대중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반인들 자체가 보살이 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사원을 세울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보살은 수행자가 아니라, 숭배자가 되었다. 백성들은 미륵보살, 관세음보살과 같은 이들을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로 보고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힘들 때마다 <보살>들이 바쁜 부처를 대신하여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과 종말>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대중 스스로가 부처가 된다는 인식은 이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든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니까...

<관세음보살 : 불상화>

<문수보살>

<미륵보살 입상>

3. 대승불교의 아버지 - <용수>

대승불교의 철학인 육바라밀 사상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3세기 용수(150-250)였다. 용수를 범어로 <나가르주나>라고 하는데, <나가>는 용을 말하며, 아르주나는 그의 모친이 태어난 나무 이름이다.

용수의 핵심 철학은 보살의 육바라밀 중 <반야>에서 출발한다. 다른 것은 다 실천하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지혜(반야)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가? 지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머리 속 구조와 관련있는 인식체계이다. 용수의 이 질문으로 대승불교는 수백년에 걸쳐 인간의 인지구조(지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용수가 생각한 지혜란 <공>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 등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여기서 부처의 철학을 다시 복습해보자.

부처는 인간의 번뇌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의해 돌고 돌기 때문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무상), 나란 존재도 결국 순간적인 변화물의 일부로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것(무상)이라고 말한다.

고대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생명(아트만)은 우주의 본질(브라만)과 같은 것으로 영원 불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는 본질이란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데, 확고한 본질이라는 것이 어디있는가? 모든 것은 순환 과정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연기설)

부처의 이 교리를 용수는 <공>으로 해석하였다. 부처가 말한 돌고 도는 인연(연기)는 결국 아무 본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공>을 말하는 것이다. 세속 세계는 부처 세계와 인연으로 닿아있어서 두 세계는 돌고 돈다. 세속이 없으면 부처 세계도 없고, 부처의 은혜가 없으면, 세속 세계의 아름다움도 없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공>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두뇌와 눈, 코, 입, 장기, 손, 발 등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인간의 절대적 본질은 없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이며,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눈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각각의 기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란 본질은 무의미해진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일 뿐이다. 언어로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지 그 본질은 각각의 연결점을 떼어놓고 설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전생의 업에 의해 다른 무엇인가로 윤회한다. 어찌 인간의 절대적 본질이 있을 수가 있는가?

용수의 대승철학의 핵심은 <공>이다. 용수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를 <중관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논리는 철학적 논쟁을 낳게 된다.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들은 무엇인가? 이름뿐인가? 본질이 없는 것인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에서 기원후 10세기가 넘어 유명론과 실제론의 논쟁이 가속화되었다면, 불교에서는 5세기 무렵,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훗날 <공유논쟁>으로 불붙어 대승불교가 전파된 인도와 중국, 한반도 등 전 지역에서 논쟁거리가 된다.

<나가르주나 : 용수의 불상화>

4. 용수의 이론에 대한 제자들의 논리 논쟁

3세기 용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기본 <공>사상은, 5세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어떻게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것인가? 철학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중관학파>의 내부에서는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사물의 본질이 <있다, 없다> 자체가 인간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럼,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대승 불교는 <논리>가 핵심 주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논리를 따지면서 등장한 학파를 <논증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 사상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에 대입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 속에서 느낀 깨달음들을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규명하여 <공> 사상이 일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귀납법이라고 할까?

반면, 논리적 철학 체계보다는 오류의 수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들은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굳이 앞장서서 논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완벽한 철학도 오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완벽해졌다고 믿지만, 그 속에서도 잘못된 오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보완해준다면 자연 <공>사상은 점점 완벽한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파로 분리되었지만, 용수의 기본 철학인 <공>사상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던 분파였던 것이다.

5. <공>사상의 라이벌인 <식>의 등장

기원후 5세기,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맞선 또 다른 대승불교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식> 사상이었다.

유식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대승불교의 중관파 학자들이 공 사상을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를 말하는 것인가? <공>이 단순히 있고, 없고의 문제인가?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 형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바뀌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은 우리의 머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유식론>의 입장이다.

어둡고 무서운 곳에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을 보면, 사람들은 귀신으로 여기고 소리를 친다. 그것이 귀신인가? 마음이 귀신을 느낀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밧줄을 보면, 뱀인 것처럼 느끼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밧줄이 뱀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원효 대사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맛있게 먹었지만,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핏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정말 깨끗한 물이었지 않는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뿐이지, 물질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유식론>의 기원은 최고의 보살로 추앙받는 미륵에서 시작된다. 미륵은 <유가사지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식론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실존인지 전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훗날 미륵이 도솔천에 올라가 보살이 되었을 때, 제자인 무착이 대중들에게 <유식론>의 <마음 : 식>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럼 유식론의 핵심 사상인 <식>을 자세히 알아보자.

불교의 핵심인 업설과 윤회설을 유식론은 어떻게 이해할까? 윤회란, 전생의 업을 바탕으로 한다. 전생에 착한 일을 하면 인간으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축생으로 태어난다. 그럼, 나쁜 짓의 정도를 어떻게 알까?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달린 것이다. 나쁘다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므로, 업은 착하고 나쁘게 살았던 자신의 행동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각이란 <순간>적인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감정이 다르고, 마음 가짐도 다르다. 따라서 <한>이란, 주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탐욕과 번뇌는 가슴 깊숙히 쌓인다.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주머니에 모인 <죄업>들은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숨어있다. 당장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릿 속에 기억이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때 그 사건을 이야기 해주면 기억 날 수 도 있는 것들이 <아뢰야식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이 깊을수록 <한>에 의해 지배당할 확률도 높다. 내가 공포에 지배당했다면 가로등도 귀신으로 느낄 수 있다. 숨어있던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현상은 외부로부터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외부적인 관점이 아닌 <인식>의 작용인 것이다.

그럼 번뇌는 왜 생기는가? 보이는 사물을 실제 사물로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유심조>를 안다면, 완전한 세계인 <진여>의 세계로 다가갈 것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5.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

유식학파의 근본원리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식>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식>의 원리를 보는 관점에 따라 2개의 종파가 생겨난다.

철저하게 모든 것은 마음이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는 이론이 무상유식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종파는 <섭론종>이다. 섭론종은 <밧줄을 보고 놀래서 귀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실제 현상을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학문 체계로 정리하려는 유식학파의 정통 학자들이 있다. 진나에 의해 창시된 이 유샹유식론은 인간의 머리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인간은 감각의 단계 - 지각의 단계 - 자각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그 다음에는 사물의 실체를 느끼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지각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그 사물의 실체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결국 <마음> 속으로 느낀 것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결국 사물의 실체에 집착한 중생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 인식론은 훗날 현장(삼장법사)의 노력으로 중국(당)으로 넘어가 중국 <법상종>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 이제 딱딱했던 인도 불교 이야기를 접고, 인물 중심의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음 편 부터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가져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해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진언 다라니 수행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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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불학연구소 (조계종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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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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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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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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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도에서 불교는 멸망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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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형중 (운주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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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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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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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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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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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평천창 외 편 (경서원,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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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108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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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금표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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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경의 십팔공법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형희 (경서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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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 -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은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과 이견이 많고, 사람들간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라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글을 쓰기가 어렵네요. 3편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적으면서 각 편마다 약간의 다른 관점들을 제시해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편은 동학의 초기 활동, 2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3편은 3.1운동기까의 동학활동과 동학운동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제 글재주로 어디까지 명료하게 적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설과 정설에 의거해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적어볼께요.

1. 동학이 밝음을 주장한 것은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1859년경입니다. 동학의 교조(교조 : 종교창시자)는 수운 최제우 선생입니다. 최제우는 백성들이 세도 정치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민중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어느 선인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그럼 동학이 창시된 배경을 하나 하나 볼까요?

동학이 창시될 무렵의 185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흔히 이것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삼정이란 백성들에게 걷었던 조선 후기 세금의 통칭으로 토지에서 걷는 전세, 군포를 내는 군정, 곡식종자를 빌리고 이자를 내는 환곡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제도는 일정한 기준이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였습니다. 전세는 일정한 기준없이 많은 세금을 걷는 남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정은 원래 군대를 가야할 사람이 군포 1필을 내면 일정기간 동안 군을 면제해주고, 대신 납부(대납)한 군포로 직업군인을 모집하는 모병제가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법을 확립한 것이 영조 때의 균역법이었죠.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군포는 1필만 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 문란한 사회에서의 탐관오리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군포를 더 많이 걷어갑니다.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여 군포를 걷기(백골징포), 16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군포걷기(황구첨정), 이웃에게 대신 군포를 받기(인징), 친척이 대신 내기(족징),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라 호적을 속여 군포를 걷기 등등 이였죠.

환곡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래 환곡은 춘궁기 때 쌀이나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 때 돌려받는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이자를 받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반중 손실분이나, 곡식 종자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의 손실비용만을 이자로 받는 <일분모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백성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이자를 받았죠. 하지만 조선말기 사회가 어려워지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가자 지방 관리들은 이 환곡을 고리대처럼 이용하여 아자놀이를 시작합니다. 요즘 사채 광고의 이자 66%는 이 때로 보면 애교일 정도입니다. 고려 시대 이래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면 더 이상은 받지 말라>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원금보다 비싼 이자를 받았고, 빌리지 않겠다는 사람을 협박하여 거액의 이자로 대출을 해주기도 합니다. 거짓 장부를 만들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렸다고 하고, 대출금의 담보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잡아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군전(군역세)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세금담당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 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균전사 : 토지세 관리자)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보조 사무관)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참고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 오하기문 -

이러한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량을 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 쪽으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의적단을 만들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이란 종교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종교였습니다.

2. 동학이 받아들인 사상들

1860년대 조선의 상황은 탈선 직전의 사춘기 학생과 같았습니다. 서양의 열강들은 이양산을 보내 조선과 통상을 하자고 성화였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청이 서양열강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같이 하기엔 너무 멀리간 나쁜 친구>라는 표현으로 멀리하였는데, 이 때 조선은 스스로 어떤 성장의 길을 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망국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동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의 근간을 <유교에서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유교의 경천사상이란, 성리학이나 고증학 같은 신유교가 아니라 중국 고대 한나라의 훈고학이나, 더 멀리 중국 주나라 때의 이상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유교 사상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중국 고대 사상 중 천자가 하늘과 감응한다는 동중서의 <천인상응론>과 같은 <하늘, 사랑, 애민> 등의 이론을 그 사상의 근간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전통 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하늘, 사랑>의 이념을 도입합니다. <부처>가 주장한 인간 평등사상, 민간에서 말하는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한 하늘과의 만남> 등이 모두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종래의 모든 전통사상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경전으로 작성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개편한 사상이 곧 동학인 것이지요.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천주교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인간평등과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기에 최제우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수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동학에 들어가 있는 사상은 놀랍도록 방대하고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조선 후기 집권층의 사상인 주기철학에서의 개방성도 수용합니다. <이가 불변한다는> 주리론보다는 <기가 가변적이라는>주기철학이 보다개방적이죠.

주역에서의 시세와 오행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국 고대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정리하고 한대 유학을 정리하면서 완성하였던 개념입니다. 천자와 하늘이 감응하고,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이며, 오행은 순행한다는 중국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이죠. 동학에서는 이중 우리 현실에 적합한 사상인 <시류에 따른 오행의 순행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변화는 순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입장이었죠.

동학에서는 종래 샤먼적인 귀신신앙과 예언을 중심으로 한 도참사상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예언적인 도참사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무당신앙, 귀신신앙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되어 동학의 사상을 현실개혁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예언사상은 조선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였다는 운수사상과 연결되는데, 이 운수사상은 오행의 순환에 의해 화-목-수-금-토의 순환논리 상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오행순환설과 연결됩니다. 모든 전통신앙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중국에서 말하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는 아니였습니다. 최제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이었죠. 이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꿈꾸는 사상이었습니다. 동학의 새로운 세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고(인내천), 모두가 평등하며(만민평등), 침략적인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를 보호하며(보국안민),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감싸안는(제폭구민)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후천개벽),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알리는(광제창생)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현세의 문제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적 성격을 띈 것은 교리 자체부터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동학은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반봉건적 운동), 우리의 자주적 개혁을 방해하는 침략적인 외세를 규탄하는(반외세적 운동) 운동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의 교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시된 것이 1857-59년 사이이고, 교조인 최제우가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죽은 것이 1864년이므로, 동학이 등장에 정부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최시형이 동학운동을 마치고 눈을 감을 무렵의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동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해월(2대 교주 최시형)에게 물었다. "개벽이 언제 이루어지리이까?"

해월은 말했다. "산이 검어지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의 병마가 이 땅에 왔다가 물러갈 때니라."

아래의 글은 1863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2대 교주를 최시형으로 임명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을 교주로 임명하고, 1년 뒤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합니다. 아마 이 때 이미 최제우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으나 오히려 힘이 있나니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3. 동학의 체계를 확고히 한 최시형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미처 기틀도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30년 이상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인물입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펴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전이 2권인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처럼 시대가 달라서가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2원화하여 동학의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동경대전은 성리학을 공부한 어느 정도 지식있는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와 일화를 수록하여 작성하였죠. 그러나,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시조, 창가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책과 대중가요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도 2원화하여 체계적인 틀을 잡습니다. 흔히 말하는 포접제(抱接制)가 그것이죠. 동학에서는 촌락마다 포라는 조직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동학의 최고 수장은 교주인데, 그 교주 아래에 향촌마다 포가 있어 그 포의 소교주를 대접주라고 합니다. 또 대접주 아래 향촌 말단 사회인 <면, 리>에는 접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교황 - 교구(대사제) - 사제로 이어지는 교구제와 비슷하네요. 교구제와 포접제의 공통점은 종교적 위계단위가 국가행정구역의 단위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단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동학교단은 국가 행정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봉기할 때에는 동학의 지휘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것이지요. 또 대규모의 봉기가 있을 경우에는 포접제를 통하여 농민군이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대 이 포접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치를 하는 <집강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포접제를 통해서입니다. 실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였을 때 포접제를 통하여 전라도에 53개의 민정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이 집강소가 지방 행정과 치안의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4. 동학운동이 점차 정치운동화 되어가다.

최제우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하여 처형된 후, 1860년대의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 차원의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이 현실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종교운동적인 특징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최제우가 죽은 이후 교단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1862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임술농민봉기 이후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지휘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은 그것에 적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63년부터 10년간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을 괴롭힌 원흉인 세도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에게 동학이 굳이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들의 1순위 요구인 환곡의 폐단 등 삼정의 문란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대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이 시작되자 동학교단에서는 정치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 것은 흥선대원군기 이필제의 난 부터입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출신으로서 자신과 같은 몰락양반들과 함께 군현단위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성격이 다른 민란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민란이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교조신원운동을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면, 이필제의 난은 지방관아를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는 반국가적 반란이었습니다. 이필제는 자신이 백성을 구원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이 <정감록> 등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인물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이필제의 난은 이필제 외에 곳곳에서 동지들이 같이 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 밀고로 실패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이필제 뿐이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종교 재건작업이 한창인 때에 정치적 변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필제의 주장에 설득되어 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성공하여 경상도 일부를 점령하고 관청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란에 의아해하는 농민들은 이 난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이 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필제는 죽었고, 최시형은 이렇게 지식인 중심, 몰락양반중심의 정치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후 동학의 정치 운동은 철저히 농민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880년대 최시형은 개화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묵묵히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써갔으며, 포접제, 용담유사의 간행 등으로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계속 진행합니다.

1890년대에는 본격적인 동학교도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서 교주 최시형은 정치적 변란 보다는 조직의 강건함을 바탕으로 정부에 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봉준 집단 등 지역 농민 집단은 이미 반정부적인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주 긴 포스트가 될 것 같네요. 실제 동학농민운동은 수십개의 다양한 사료를 정리해서 사료 위주의 포스트를 구성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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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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