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전 : 누구의 영향력이 더 클까?

칼 포퍼 VS 토마스 쿤 : 역사이론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들

-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야기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역사철학에 너무 지대한 영향을 미친 두 <과학자> 이야기이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칼 포퍼>와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과학분야에 <패러다임>이라는 명제를 던진 <토마스 쿤> 이야기이다. 그럼 두 인물의 상반된 이론을 이해해보고, 후대 역사학자들이 왜 이들의 이론을 역사에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보자.

칼 포퍼가 1902년, 토마스 쿤이 1922년에 태어났으니까 두 학자는 20년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인지 토마스 쿤이 이미 <유명한 이론가>였던 칼 포퍼의 이론을 반박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칼 포퍼가 전성기를 누렸던 시기는 서양의 제국주의 시기였다. 그래서인지 칼 포퍼는 관용이나 열린 사상과 같은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하지만, 두 철학자의 역사관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바로 19세기 사상에 대한 <수용>이라고 볼 수 있다.

토마스 쿤은 학창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빠진 인물이다. 노동운동이나 자본에 따른 사회의 변화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그 학창시절이 바로 <세계 2차대전> 중이었다. 반면, 칼 포퍼는 제국주의를 직접 경험한 세대인 만큼 서구의 미덕과 도덕정신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유명한 저서에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반감을 보였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두 철학자의 핵심 이론의 배경이 엇갈리기 시작한다. 칼 포퍼는 스스로 <계몽주의>자이기를 원한 인물이다. 그는 문명국가인 서구사회가 미개한 <비문명사회>를 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리고 그 서구사회의 길잡이는 <미국>이라고 생각한 듯 하다. 그의 글에는 미국과 서구에 대한 자부심이 많이 들어가있다. 어떤 경우에는 역사가 특정한 법칙과 사회진화사상에 따라 <발전>한다는 담론까지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토마스쿤은 <계몽사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예 더 나아가 과학이 우리에게 진리를 제공하고 진보를 준다는 생각자체를 오류라고 말해 버렸다. 그래서 토마스쿤은 기존의 과학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이 기존의 사상을 대체한다고 말해 버렸고,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준 19세기 최고의 사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850년대 동시에 등장한 혁명적인 이론 2가지였다. 하나는 바로 다윈의 진화론이 포함된 <종의 기원>이라는 과학사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또 하나의 책은 사회주의의 아버지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이었다. (마르크스는 종의 기원과 자본론이 같은 시기에 출판된 것을 두고, 최고의 역작들이 동시에 탄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칼 포퍼는 마르크스는 철저히 비판했고,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어느 정도 수용했다. 반면, 토마스쿤은 과학이론에서의 진화는 불신했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변증법>은 어느 정도 인정했다. 토마스 쿤이 주장한 <패러다임 이론>은 사회현상이 일반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전혀 새로운 사회나 문화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자 그럼 이 두 과학자를 왜 역사 이야기에서 다루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의 이론이 과학 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역사, 사회 전반에 너무나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역사철학에서도 이 두 학자의 이론을 완전히 배재한 채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기가 버겁다.

그럼 먼저 <칼 포퍼>의 이론과 역사철학을 한 번 볼까?

- 칼 포퍼와 <과학적 검증>

19세기 독일의 랑케를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랑케가 <역사학>을 다른 인문과학분야에서 독립시켰기 때문이다. 랑케는 국가의 공적인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해석해서 과거의 사실을 밝히는 것을 역사학이라고 말했다. 역사학은 역사가의 편견이나 해석이 들어가서는 안된다고도 말했다. 과거의 정치, 제도, 문화를 밝히는데 있어서 편견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정치학이나 사회학이 될 것이다. 역사학의 임무는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그럼 과거 그 자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방법은 무엇일까? 20세기 역사학자들은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리고 랑케의 역사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시도를 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아날 사학자들은 인간의 역사를 아주 오랜 기간동안 관찰하면서 일상적인 부분에서 이루어지는 변화까지도 심층적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한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대처하는지에 대한 법칙을 찾고, 전체적인 역사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지중해의 어떤 섬에 인간이 살게 된다면 그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여 생활하게 된다. 하지만 다양한 시도와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그 섬의 모든 인간은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하면서 의식주를 해결하게 된다. 결국 그 섬에 사는 인간들은 일정한 패턴을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구조사학자들은 인간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 온 모든 유산들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만들어서 구조화시키려고 했다. 예를 들어, 머리모양의 역사, 방부제의 역사와 같은 시시한 것들도 하나의 역사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머리카락의 역사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과거부터 현재까지 밝혀낸 뒤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가 무엇을 밝혀야 하고, 어떤 방법을 활용해야 하는지는 역사학자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칼 포퍼>의 과학 법칙을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칼 포퍼>는 <논리주의> 또는 <경험주의>와 과학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면서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예를 들면, 근대인들은 점성술을 믿거나 신에 대한 믿음, 별자리와 같은 것을 통해서 운명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칼 포퍼는 말한다. <신은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인간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는가? 당연히 증명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과학이 아니다.

과학이 되려면 제일 먼저 그것이 아니다라는 <반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은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반증가능성>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신>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신을 믿는 사람은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한다. <교회에서는 불경이 아니라 찬송가를 부른다>는 증명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가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논리나 경험만을 따지는 <논리학, 경험주의, 실증주의>에서의 신은 과학도 아니고, 의미도 없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신이 과학은 아니라고 해도 <의미>는 있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건전한 보수주의자이자, 서구학자인 포퍼의 <도덕적 논리>인 것이다.

반면, <앞으로 비가 올 것이다> 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건 <과학>적인 것일까? <논리주의>에 따르면 이것은 맞는 명제이다. 비는 언젠가 올 것이니까.... 하지만 포퍼는 이것이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첫째, 이것은 과학을 모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도 비온다는 말은 할 수 있다. 단지, 그게 장마철에 올지, 3년 뒤에 올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둘째, 이것은 <반증>이 안된다. 앞으로 천년간 비가 안왔다고 해서 저 명제가 틀릴까? 아니다. 만년 뒤에, 혹은 백만년 뒤에 비가 올 수도 있다. 따라서 지구가 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과학이 안되는 것이다.

즉, 포퍼에게 과학이란 <100% 완벽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럼 검증이란 어떻게 해야 과학이 되는 것일까?

카르납이라는 과학자가 검증이란 <확률>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최고의 투수가 연속으로 스트라이크를 1000개를 던졌다. 그럼 100% 검증은 못하더라도 저 투수는 다음 번에 스트라이크를 던진다는 법칙은 거의 맞을 것이다. 즉, 신뢰도가 무지 높아지기 때문에 검증이 곧 <확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포퍼는 아니라고 말한다. 아무리 만개의 스트라이크를 던져도 반증가능한 확률이 0.00001% 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확증>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논리를 중요시하는 <햄펠>이라는 실증주의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과학적 명제나 지식을 일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기호(원자명제)로 바꿔서 번역해 버리면 <확률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이다. 예를 들면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반드시 물이 이루어진다.>는 100% 확증일 수 없지만, <H2 + O = H2O> 라고 과학적으로 바꿔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는 말한다. 그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어떤 과학적 실험에서 <반증>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과학인가, 아닌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즉, 포퍼가 생각한 과학이란 <100% 완벽한 검증>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검증의 문제를 놓고 포퍼와 햄펠이 격론을 벌였는데, 여기서 바로 <역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난제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 칼 포퍼와 <역사의 법칙>

칼 포퍼는 위에 언급한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의 연구방법이 역사의 핵심을 밝히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랑케처럼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원문을 번역하듯이 밝혀놓기만 하면 어떤 역사가 중요하며, 그것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숨어있으며, 그것이 정당한지를 판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포퍼는 역사학을 자연과학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자연과학이 <100% 옳은지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을 밝히는 학문이라면, 역사학은 어떤 과거의 사건들을 전후관계(인과관계)를 따져서 100% 법칙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 그럼, 알기 쉽게 포퍼가 생각한 법칙을 정리해보자.

조건(Control) : 2월 혁명의 원인은 왕정의 무능력함이었다.

법칙(Low) : 지배층이 무능력할 경우 혁명은 발생한다.

결과(Effect) : 2월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포퍼는 어떤 조건이 제시되었을 때, 그것이 역사법칙과 맞아떨어진다면 100% 결과가 도출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사회과학이 발달하면서 역사를 규칙 속에서 바라보려는 역사학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이와 비슷한 조건이 있었는데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포퍼는 간단히 말한다. 법칙에 해당하는 어떤 조건이 빠진 것이라고.... 한마디로 빠진 걸 알아서 잘 찾아보라는 이야기다.

그러자, 햄펠이 포퍼의 이론에 바로 반박하였다. <미국독립혁명>과 같은 경우에는 프랑스 혁명의 원인과 상관없는 <조세문제, 식민지 문제> 등이 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역사를 설명할 때는 굳이 어떤 법칙이나 증거를 들이대지 않고, 원인과 결과만 나열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 또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 때문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2월 혁명에서 지배층들은 왕정의 무능함으로 많은 피해를 보고 있었다. 피지배층들은 왕정의 재정파탄으로 생계가 어려웠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혁명을 일으키는 게 맞다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가만 있다가 피해를 보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기 때문에 혁명은 당연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햄펠은 과학적 <기호>를 이용하여 이런 공식을 만들어낸다.

a : 지배층 / b : 피지배층 / c : 왕정의 무능 / d : 혁명

c라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a + b는 아주 은 률로 d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포퍼는 햄펠의 기호논리에 대해 부인한다. 기호를 이용한 수식은 <과학>적이지 못할 뿐더러, 100% 확증이 없이 <확률>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증명> 하거나 <반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높은 확률>은 실험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느 정도가 높은 확률인지 증명을 할 수 없지 않는가?

위에서도 계속 말했지만 포퍼의 핵심 주장은 <반증>이 가능한가였다.

하지만 포퍼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었다. 역사라는 학문은 인간의 과거를 다루는 데, 과연 100% 확고한 법칙으로 역사를 설명할 수 있을까?

포퍼는 여기서 한발 물러난다. 모든 역사적 사실을 100% 법칙으로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법칙으로 생각한 것은 누구나 너무나도 당연해서 법칙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것들이거나, 당연히 법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증명하는 과정이 난해해서 대부분 그냥 넘기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동설을 주장하는 교회세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을 받았다.> 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빠진 법칙이 있다.

<기득권 세력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언행을 하면 제재를 받는다> 라는 법칙이 있지만, 너무 당연해서 그냥 원인과 결과만 설명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 칼 포퍼의 <계몽주의>

자, 그럼 칼 포퍼의 역사이론을 통해 <역사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살펴보자. 포퍼는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하나의 사건은 반드시 하나 이상의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법칙들은 반드시 선후관계(인과관계)를 가진다고 믿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도 러시아에 진격한 것도 반드시 그 원인이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사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법칙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 사회는 19세기 서구 문명이 이루어낸 문명 이기의 총합이다.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라는 조건(Control)이 있었고, 진보한 문명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칙(Low)이 있었다. 그 결과 서구사회는 진보의 정신으로 발전해왔다. 아프리카 등 제 3세계는 같은 조건과 법칙을 적용하여 서구 문명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다윈이 생명체의 세계에서 진화의 법칙을 찾아냈듯이 서구사회는 다른 사회에 그러나 이러한 진화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 주의와 파시즘적 공산주의는 그러한 진보의 과정에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칼 포퍼는 자연과학이든,사회과학분야에서든, 역사에서든 변화와 발전에는 법칙이 있으며, 그것의 결과로 사회는 발전해나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포퍼의 과학연구가 <과학이 역사적으로 전개해 온 방식>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 학자가 있다. 그는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았더니 변화나 발전이라는 말보다 <전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에서 법칙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다른 세계>들이 공존한다고 말하였다.

토마스쿤은  이런 주장들을 묶어 <패러다임>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용어는 과학사 뿐 아니라 모든 인문사회과학과 역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럼 다음장에서 토마스쿤의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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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근현대사 이야기 (NO.8)

번외편 : 마르크스로 <독일철학>과 <사회주의> 이해하기 (3)

- 마르크스 이전의 독일 역사 : 헤겔의 인생극장~

18-19세기 독일의 철학을 <관념철학>이라고도 하고, <고전철학>이라고도 부르곤 하지.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두 사람의 영향력 때문이야. 자... 여기서 유명한 말 한마디를 읽으면서 그 2명의 철학자가 누군지 한번 보자.

고대 <로마제국>은 유럽의 호수였다. 모든 고대의 문화를 흡수한 뒤, 유럽문화의 원형을 만들어 곳곳에 흘러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있었다. 그 호수는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서양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바로 이 두사람이다. 칸트 & 헤겔...

그럼 지금부터 칸트의 철학을 종합하여 <방대한 철학>을 완성시킨 헤겔이란 인물의 일생에 대해 알아볼꺼야. 물론, 헤겔 이야가 끝나면 제자인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일단, 아이유부터 보면서 안구 정화를 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고고...

헤겔, 이 철학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세무국 재무관이었어. 뭐, 공무원 집안이니 학비 걱정은 없이 학교를 다닐 정도는 되었겠지.... 웃~ 돈 좀 있는 중산층이닷...

처음에, 헤겔은 신학 대학에 진학해서 신을 섬기며 살겠다고 생각했었나봐.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오히려 철학이 더 재미있다는 걸 느낀거지. 점점 어렸을 때의 맹세는 사라지고... 이제 이런 자기 합리화를 하겠지?

저기 굳이 신학을 안해도요... 철학을 하면서도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되지 않나요??? 아,, 어쩌나...

그래서 청년 시절 신학할까, 철학할까... 무진장 갈등했다고 하더라구... 아무튼, 이 사람이 철학을 하더라도, 신앙심을 완전 버리지 못했을 거라는 정도는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깐, 정말 당대에 잘나가는 대박~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어. 일단, 동갑내기인 유명한 문학가 <휄더린>.... 또, 음악가 베토벤과도 동갑이었구. 또, 5살 아래인 천재 철학자 <셸링>도 헤겔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지... 암튼, 잘나가는 친구들은 주변에 무조건 많아야돼.

청년 헤겔은 휄더린이랑 같이 책을 읽고 논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어. 피끓는 문학을 접하다보니, 자유니, 혁명이니, 세계시민이니.... 이런 말들도 많이 듣게 되었지. 그래서인지 소위 말하는 <좌파동아리>도 가입하고, 거기서 술먹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했었지. 소위 말하는 낭만적인 대학생? 뭐, 그런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아니 어느 1789년.... 프랑스에서 엄청난 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헤겔은 그 말을 듣고 <굿굿굿~>을 외쳤겠지. 헤겔이 평소에 생각하던 자유니, 평화니, 인간존중이니... 그런 단어들이 <프랑스>에서 막 따끈따근하게 날아왔거든....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어. 그래서 소년구락부... 아니 아니 정치클럽의 회원이 되서 혁명을 찬양하고 다니기 시작한거야.

음... 보통 서양사 하는 분들 중 나이드신 분들이 <구락부>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건 그냥 <클럽>이라는 말이니깐 역사 공부하다가 <구락부>라는 말 나오면 걍 <단체, 클럽> 뭐 그런 뜻으로 해석하길 바래... <구락부>는 일본식 표현의 잔재거든...

암튼 말야. 헤겔은 친구들과 모여서 <루소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쳤지.

지가 무슨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주인공도 아닌데, 들판에 자유의 나무를 심어놓고 막 흐뭇해 했던 거야. 또,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스스로 <자유인>이라는 감상에 젖어 있었겠지. 헤겔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로운 정신이 곧 <세계정신>이라고 믿었던거야.

 

<프랑스의 국가 : 라 마르세예즈>

헐... 근데 그 <프랑스 자유군>이 헤겔의 청춘에 태클을 걸었어.

프랑스 혁명군이 독일 예나 지역으로 진격하자 헤겔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게 되었거든. 일단 혁명군이 헤겔의 집을 약탈했지. 안그래도 공부한다고 아버지 유산을 다 까먹었는데, 약탈까지 당하니 헤겔은 점점 거지가 되가는 거야. 거기에 문교부 장관인 괴테가 주던 생활보조금도 전시중이라 끊겨 버렸어. 에휴... 그게 헤겔에게 닥친 현실 생활의 <세계정신>이었던거야.

그 와중에 출판사에서는 헤겔을 압박하고 있었어. 포탄이 날아오든, 약탈이 자행되던 간에 쓰고 있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은 빨랑 완결하라는 거였지. 에구... 헤겔은 그 전쟁 중에도, 본인이 약탈당하면서도 19세기 최고 대작이라고 불리는 <정신현상학>을 완성하고, <세계정신>이 어쩌구... 하는 책을 출판한거야... 그리고나서 출판료 올려달라면서 편집장이랑 대판 싸우고 돌아다녔다나.... 하는 일화가 있지. 뭐, <정신>이 어쩌고 뭐고... 고상한 말도 중요하지만 돈은 받아야 굻어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지.

이런 헤겔의 상황을 불쌍하게 여긴 친구가 헤겔에게 고등학교 교장 자리를 던져 주었어. 이 때부터 헤겔 인생이 역전되기 시작한거지. 일단, 삐까번쩍한 직장이 있으니, 사람들 대우가 달라지지 않겠어?  나이 마흔에 명문가 딸과 결혼해서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구, 몇 년뒤부터 교수직도 얻게 된거야. 인생 역전~ 대박~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자마자 2년만에 인기 강사가 되었어. 뭐, 대학 강사 이전에 미리 공부 많이하고 준비한 게 있으니 인기가 쑤욱~ 올라가기 시작했지. 거기에 운좋게도 철학자 피히테가 죽게 된거야. 그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까지 되면서 최고 철학자 반열에 오르게 된 거지. 나중에 베를린 대학의 총장까지 하게 되니, 뒤로 갈수록 대박 인생이 된 인물인거지.

- 칸트 철학의 정리자 : 헤겔의 <정신현상학>

앞 시간에 정리했던 칸트 알지? <헤겔>은 칸트 철학을 연구해서 논문을 썼던 사람이야. 독일 관념론의 계보는 칸트 - 헤겔로 이어지고, 이 헤겔 철학을 유물론으로 전환시킨 사람이 바로 뒤에 다룰 <마르크스>인거지.

당연히 헤겔은 칸트 철학의 위대함을 몸소 배운 사람이야. 그런데 말야.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핵심> 부분인 <현실세계와 신앙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달랐어.

칸트는 기성 종교인들이 오랜시간동안 쌓아온 종교 교리들을 <도덕>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고 말했지? 다시 한번 칸트가 생각한 현상과 종교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볼까나?

칸트 : 솔직히 말하자면 말야.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는 이성적인 사람이였거나,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거야. 얼마나 온화하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많아?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는 참 따뜻한 사람이잖아.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면을 쏙~ 빼 버렸어. 예수가 떠난 뒤, 교회가 만든 많은 내용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고, 교회에 복종하라고 하잖아. 그리고, 그런 절대적인 복종이나 믿음을 <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도덕이라는 건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증명할 수 없잖아? 교황이 만든 법이 하나님이 만든 법이라는 걸 누가 증명할건데?

생각해봐. 철학은 <지상>에서의 일을 탐구하는 거야. 인간이 알 수 있는 유한한 세계의 것들만을 <지식>이라고 생각해야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이 알려주실 거니, 우리가 고민할 필요도 없어. 한마디로 신앙은 단지 믿음일 뿐이지,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서 알아낸 것들이 <지식>일 뿐이야. 지식은 우리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인 거지.

자,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헤겔은 신학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할만큼, 종교적인 마인드가 강한 인물이었지? 칸트를 아무리 존경했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좀 달랐을거야. 그럼 헤겔의 생각을 한번 볼까?

헤겔 : 칸트 형님의 말이 맞는 말인데 말야. 종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면, 문제가 하나 생길거야.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서 무한하고 궁극적인 실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잖아.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아?  내 스스로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하는 것도 <철학>이 해야 할 일이야. 그리고 그렇게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끝에 <종교>가 있는 거구...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잖아? 그니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생각하면서 살 수밖에 없어. 신의 존재를 믿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것들도 생각하기도 하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람들은 이 두가지를 모두 생각하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나 : 자아>를 생각하곤 해. 그런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철학>이 아닐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정신>이야. 현실, 도덕, 종교와 같은 것이 진리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우리의 <정신>이지.

에구... 너무 심오하다. 헤겔의 말이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그럼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을 인용해서 좀 체계적으로 이야기해 봐야겠다. 헤겔은 <정신>이 3단계를 거쳐가면서 완벽한 정신, 즉 <절대정신>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어.

정신 1단계(무의식적인 도덕성) : 예를 들면 이런거야. 누군가 <사랑>하고 사세요... 라고 말할 때, 어린 아이들은 사랑이 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자신을 아낄 때 그냥 그게 사랑이라고 느끼지. 즉, 감각적으로 도덕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거야. 이게 원시적인 정신, 즉 <감각적인 정신>이지.

정신 2단계(도덕성의 자각) : 그러다가 학교에 다니고, 공동체 문화를 익히고 하다보면 점점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게 되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의식적으로 실천하려고 할거야.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되지. 이 때의 정신은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정신>이 되는 거지.

정신 3단계(종교적 충만함) :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가슴에 뿌듯함과 충만함이 채워지고, 절대자에게 다가가는 단계, 즉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단계를 알게 되지. 그게 바로 <진리>의 단계이며, <정신>이 현실과 통일되는 단계야. 이렇게 절대적 진리를 깨닫게 된 정신를 <절대정신> 이라고 해.

자, 헤겔이 말한 정신인가 뭔가를 3단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좀더 압축하면, 인간의 <정신>은 무의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 절대적인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거지. 그럼 헤겔식으로 따지면 역사나 문화, 종교도 <정신이 발달하는 것> 이 되겠지? 이 부분에서 헤겔의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헤겔 :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정신>이 발달해가고 있는 과정이야. 그런데, 인간 <정신>의 최종 3 단계는 <절대자에게 다가가서 절대적 진리를 아는 것> 이라고 했지?

그니깐, 역사의 목적은 결국 <신의 목적>을 따라가는 거야.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발전하면서 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점점 더 잘 알게 되었지. 신이 원하는 건 인간이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거야. 그 절대적 진리는 도덕일 수도 있고, 자유일 수도 있지.

근데, 아주 옛 사회에서는 그런 걸 몰랐어.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구속해서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만들기도 했지. 또, 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도 했어.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신의 섭리>를 알 정도로 발전하면 그런 구속들을 점점 사라지게 되지. 신이 진정 원하는 건 인간의 <자유>일테니까... 그럼 현실 세계에서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인간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거야.

그럼 모든 인간이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제도를 가진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건 모든 개인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국가가 그것을 지켜주는 나라야. 따라서 왕이 있어도, 왕이 국민의 법을 지키는 <제한된 군주제>가 필요해.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어야 하고, 법은 자유민들에게 관대해야 하지. 재판도 다양한 배심원들이 함께 진행해야 하며, 국가의 중요한 일도 의회에 모인 국민대표가 함께 결정해야해.

물론, 역사가 다시 <발전>하면 기존의 제도에 뭔가 더 첨가되고 바뀌어서, 더 좋은 제도들이 등장하겠지.

뭐, 헤겔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역사>와 <국가>를 생각했던거야. 솔직히 프랑스 혁명의 세계정신이나 자유를 이야기하다가, 또 <군주제>를 인정한다는 식으로 말 바꾸기를 하니깐, 이 인간이 좀 이중적으로 보이기도 하겠네.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써 놓은 책이 <법철학강요>라는 책이었어.

- 고전 철학의 종결자 : 변증법적 발전 이론

자, 이번에는 헤겔하면 떠오르는 단어, <변증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변증법이란 이런거야. 하나의 현상이 존재(정명제)하는데 그것에 반대하는 현상(반명제)이 있다면 이 두가지를 절충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해답(합명제)을 찾는 거지. 대체 뭔 소리여? 오늘 아이유 스페셜이라고 했으니, 아래 아이유를 예로 들어 한번 살펴보자.

자, 조금은 이해되겠니...

원스 업펀어 타임 코리아... 쉽게 말해서 한 때... , 까칠, 도도, 블랙, 막말 서인영이 (스스로 우기기로는) 예능의 대세였지. 그게 기존의 대세인 정(正)이야.

근데, 갑자기 귀염둥이 아이유가 가요계를 평정하고 50억 소녀가 되서 대세가 되었어. 헐...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네. 새롭게 등장한 아이유가 반(反)이야.

자! 그럼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서인영의 선택은? 어느 날 신상 도도 까칠녀 서인영이 알록달록 아이유 잠옷을 입고 마시멜로우 춤을 추고 있었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거지. 이게 바로 합(合)이야.

하지만, 내년, 내후년이 되면 아이유 스타일은 시대흐름에 밀리고 또 다른 컨셉의 가수가 예능의 대세가 되겠지? 그럼 또 반(反)이 나오고, 또.... 합(合)이 나오고... 뭐, 약간 억지스런 예이지만 쉽게 얘기할려고 가져다 붙여본거야...

자 그럼 이제, 진짜로 우아하게 변증법을 정리해보자.

정(正) : 칸트라는 철학자가 <인간의 경험>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어. 이게 기존의 이론이고, 이게 처음에는 맞는 말 같다고 해봐. 맞다는 걸 한자로 정(正)이라고 하자.

반(反) : 근데, 종교론자들은 경험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진리>와 같은 개념은 더 중요하다고 고 생각한거야. 이걸 반대된다는 뜻의 한자인 반(反) 이라고 할께.

이 <정>과 <반>을 어떻게 정리해야 더 나은 철학적 해답이 나올까?

합(合) : 그래서 헤겔은 <정>과 <반>이 합(合)쳐서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 이 두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를 <절대 정신>이라고 표현한거야.

변증법은 이런 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식(정)이란, 새로운 상태의 지식(반)을 만나면서 변할 수밖에 없게 되는거지. 그럼 이 정과 반이 논쟁을 하면서 새로운 단계의 해답을 제시(합)하는데 그 속에서 사회는 <발전> 한다는 거야.

사실 변증법은, 서양 고대부터 있었어. 뭐, 소크라테스니 소피스트들이니 하는 사람들도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중 하나였지. 물론, 서양 중세시대에도 <변증법>이란 건 있었어. 특히, <아벨라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시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해.

중세 시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했어. 아니, 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거지. 그래야 교회 활동이 정당하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겠어? 그런데, 그걸 증명하려고 했더니 서로 모순되는 2가지 사상이 있어서 좀 힘들었어. 그 2가지 사상이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진리(이데아)를 강조했던 플라톤의 사상이야. 또 하나는 현실 세계의 경험(중용)을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었지.

이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구해.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 라고... 

하지만, 그 절대적 진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상세계에 있느냐, 아니면 현실세계이냐... 라는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절충하기가 매우 어려웠지.

이런 모순되는 생각들을 종합해서 신의 존재를 합리화 시킨 사람이 중세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였다나 뭐래나... 그가 <신학대전>이란 책에서 써 먹은 변증법의 내용을 한 번 보면서 중세시대 변증법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까나... 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도들에게 써먹기 위해 질문과 답변을 해놓은 말들을 짧은 변증법으로 풀어보자.

질문 1 : 저기... 인간의 경험과 신의 섭리 중에 무엇이 더 현실 세계에서 유용한 것일까요?

1. 정 : 지상에는 감각적인 경험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은 중요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실재론 수용)
   2. 반 : 하늘에는 신의 섭리가 있는데 이것은 지상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이다.(신플라톤 학파의 유명론 수용)
   3. 합 :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신의 섭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으므로 2가지는 모두 중요하다.

질문 2 : 저기... 그럼 자연적인 경험과 신의 은총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요?

1. 정 : 자연적인 경험과 진리는 항상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
   3. 합 : 자연의 진리는 초자연의 진리에 의해 보완되는 것으로, 신의 은총은 자연과 대립(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다.

질문 3 : 그럼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행복인가요, 천국에서의 행복인가요?

1. 정 : 인간의 행복은 지상의 행복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행복>은 인간 삶의 목표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카톨릭에서는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플라톤)

   3. 합 : 자연속의 행복도 중요하나 신앙과 자애라는 카톨릭의 덕목은 더욱 중요하다

질문 4 : 그럼 교회는 세속의 일과 영적인 일 중에 어떤 목적을 갖고 운영되는 것일까요?

1. 정 : 국가권력은 세속의 필요에 의해 합리적으로 결정될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교회는 영적인 필요에 의해 인간을 신심으로 인도한다. (플라톤)

   3. 합 : 신과의 생활이라는 더 높은 초자연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교회는 초자연적 목적에 더욱 힘써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정, 반, 합을 이용해서 교묘히 교회 이론을 정당화 시킨거지.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변증법에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내용은 없지? 그냥~ 두 철학자의 사상을 박수받을 만큼 논리적으로 햡쳐놓은 것 뿐이잖아.

반대로 생각해보자. 헤겔의 변증법이 다른 사람들의 변증법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이유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역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라는 뉘앙스의 단서를 박아놓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단서를 바탕으로 역사의 발전 단계를 명확하게 구분해놓은 제자가 바로 <마르크스> 이거든. 그럼 다음 장에서 드디어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한번 다루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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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관념론 철학 (양장)
국내도서>인문
저자 :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 박만준역
출판 : 지만지고전천줄(지만지고전선집) 20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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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독일관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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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권기철
출판 : 철학과현실사 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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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베르너 바이어발테스 / 조규홍역
출판 : 누멘 201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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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로타 엘라이 / 백훈승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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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근현대사 이야기 (NO.7)

번외편 : 마르크스로 <독일철학>과 <사회주의> 이해하기 (2)

- 마르크스 이전의 독일 역사 : 칸트, 피히테, 헤겔 -

자, 그럼 이제 <마르크스>가 깊게 감명을 받았다는 <헤겔>의 철학을 한번 살펴볼께요.

마르크스는 <본> 대학에 입학했지만, 헤겔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 헤겔이 몸 담았던 <베를린> 대학에서 두 학기 동안 공부를 할 정도로 헤겔의 광신도였답니다. 학위도 헤겔이 교수였던 <예나> 대학에서 받을 정도였죠.

자, 그럼 이제, <헤겔>을 좀 알아야 마르크스 철학을 좀 쉽게 이해하겠죠? 근데, 말이죠... 이넘의 헤겔철학은 피히테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고... 피히테 철학은 칸트에서 영향을 받았고.... 에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르크스> 철학을 알기 위해, 쫌쫌쫌~ 위로 올라가서 헤겔 - 쉘링 - 피히테 - 칸트... 등등의 독일 철학자 계보를 좀 살펴봐야겠어요. 하지만 <독일>, 당시에는 <프로이센>이라고 불린 이 동네의 심오하고 방대한 모든 철학을 다 이야기할 수 없으니, 간단히 훝고 지나가볼께요.

그럼, 칸트, 헤겔, 마르크스가 살았던 <독일> 동네 이야기를 한번 간단히 해보죠.

이 동네는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분열... 분열... 분열... 의 연속인 지역이였습니다. 도무지, 이 동네 아이들은  정상적으로 통일국가를 이룬 적이 없었답니다. 19세기 전에는 <독일 제국>이란게 없었죠. 휴....

독일 지방은 고대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영토에 있었답니다. 그리고, 중세 초기에는 중부유럽을 통일했던 <프랑크 왕국>에 속해 있었던 지역이죠. 중세시대, <기사도>니, <장원>이니 하는 말 들어봤나요? 독일 지역이 바로 수많은 영주, 기사들이 각각 내 땅이요~ 라고 영토를 나눠가져서 분열되어 있었던 지역이랍니다.  그 영주들 중에서 그나마 힘이 좀 있는 제후가 나라의 짱 역할을 하면서 리더 역할을 했답니다. 그 리더가 이끄는 독일 지역의 나라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나라였죠.

하지만 분열은 끝이 없었답니다. 15세기가 되었더니, 루터라는 인물이 짠 하고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한답시고 전쟁을 일으켜서 독일 지역의 영토가 풍비박살이 났어요. 에휴... 또 얼마 안되서 칼뱅이 종교개혁한다고 하더니만, 이번엔 30년 짜리 전쟁을 하는거에요. 그것도 유럽에서 잘나가는 국가가 다 건너와서 막장 전쟁을 해버렸으니... 전 유럽이 독일 땅에서 피터지게 전쟁을 하는 <1차 유럽 대전>?... 뭐 이런 걸 해 버렸지요.  그러니 이 땅에 평화란 남의 이야기가 되 버린 거랍니다.

그러고 백년 후... 종교 전쟁을 쫌~ 정리하고, 흩어진 동네 기사들이 쫌쫌 제발~ 뭉쳐야지.. 라고 생각할 무렵 동네에서 힘 좀 쓰는 <프로이센>이라는 국가가 독일 지역의 작은 연방국가들을 통솔해서 짱~을 먹으려고 했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죠. 나폴레옹이라는 걸출한 영웅을 배출한 프랑스와 틈틈이 전쟁을 했기 때문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뭉치기만 하면 잘 나갈 것 같은 지역인데도, 맨날 전쟁만 하면서 피곤하게 살고 있으면 짜증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 동네 <지식인>들은 <프로이센>을 무능력한 국가로 생각하기 시작했답니다.

실제로, <프로이센>의 관리들은 상대적으로 도덕적이지 못했어요. 19세기 프로이센이라는 나라의 관리들은 선진국인 <영국, 프랑스>에 비해서 제도나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수준이 많이 낮았거든요. 나폴레옹이 독일 지역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이란 나라를 멸망시킨 후, <프로이센>이란 국가의 관료들은 개판 5분전 상태였죠.  

그래서인지, 독일 지방의 <지식인>들은 도덕, 양심, 이성, 법률, 국가통일... 이런 단어들을 많이 사용했답니다.  그런 지식인 중에서 <도덕과 이성>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던진 사람은 18세기 <칸트>라는 철학자였죠. 자, 그럼 칸트가 생각한 <도덕, 이성, 양심, 국가>라는 말을 <칸트>의 생각으로 한번 읽어볼까요? 

칸트 : 거참... 왜 <국가의 역사는 위대하다>라는 교과서의 내용을 그대로 외워야하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서 무조건 <외워고 믿어라> 라고 말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을 왜!!! 들어야하지?

무조건 충성해라, 무조건 믿어라... 라고 말하는 건 <도덕적>인 것이 아냐. 그건 그냥 <절대 복종>하는거지.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있잖아? 즉,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이성적>인 존재야. <도덕>이란 것은 우리 스스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걸 지키는 거잖아?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믿고,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민중에게 알리는 것...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 라는 거야.

자, 생각해봐. 우리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리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을 가진 사람들이 <도덕>적인 사람들이야. 내가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적었는데, 그 핵심도 바로 이거야. <이성>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거야. 즉, <도덕>이란 말은, <권력이나 신앙> 이라는 말보다 <이성>이라는 말에 더 가까운거야.

한마디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의 이야기는 그냥 <신앙>일 뿐이지, 도덕은 아니야. 그리고, <신앙이나 천국>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이야기니깐, 이 세상 이야기가 아니지? 따라서 <신앙>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배워나가는 <철학>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야.

자, 이런 칸트의 생각에 좀더 살을 붙여볼까요? 

<영혼, 우주, 신의 사랑>과 같은 단어들은 우리가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단어들입니다. 그런 고차원적인 것들을 연구하는 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데, 그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우리의 생각, 즉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이죠? 그래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답니다.

우리가 과학적(이성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 되었든 그건 <철학>이 될 수 없다.

그럼, 우리가 직접 알 수 있는, 즉 이성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공간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경험들>이랍니다.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 약속하고, 행동하고, 경험한 것들이 곧 내 <이성>으로 판단한 것들이고, <도덕>적으로 옳은지 판단할 수 있는 행동들이지요.

그래서인지, 칸트는 아주 엄격하게 시간을 지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답니다. 그는 항상 매일 아침 정각 5시에 일어났고, 오후 3시 30분이면 산책로를 뛰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요. 그리고 자신에게 맹세한 것은 꼭 지켜야 했고, 자신이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옳은지 판단하는 시간>이 있었답니다.

그럼, 칸트의 생각대로라면 철학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신에 대한 복종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 같은 건 절대 아니겠죠? 칸트가 생각한 철학은, 그의 책에 따르면 최소한 3가지가 있어야 한답니다. 그럼 이 철학자의 이야기를 가상으로 엮어서 들어볼까요?

no 1 :  음... 철학이란 말이지...인간의 생각, 즉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한단다. 우리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수학이나 물리학처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지. 따라서 철학의 첫 번째 조건은 <과학 또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 현상을 아는 거야.

no 2 : 그럼 철학의 두 번째 조건은 무엇일까?

철학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거야. 그럼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신의 공간이 아닌 현실의 공간이겠지? 그럼 이 현실 공간에서 우리가 <도덕>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그건 우리 스스로 <양심적인 것이다> 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말해. 즉, 도덕적 판단은 신이 아닌 인간이 하는 것이지.

no 3 : 마지막으로, 철학은 <천국이나 신앙>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돼. 따라서 현실에 대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판단하는 학문들도 철학의 범위에 들어가는 거지.

그럼 칸트의 말대로 과학적으로 무엇인가를 증명하고, 도덕적 양심을 지키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인간 자신이겠죠. 그래서 칸트의 철학에서는 <자아>라는 말이 나온답니다. 자아, 즉 내 자신이 바로 철학적 삶을 살아가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원리가 되는 거죠.

자, 이런 칸트의 철학은 그 이전에 세상을 살았던 <기독교 철학자>들의 주장과는 많이 다르답니다. <신의 은총>이나 <천국과 지상의 조화> 등등의 말들은 칸트 철학에서 빠져 있죠. 그냥 있는 현실을 말하고 비판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을 <계몽주의>, <비판주의> 사상가라고 말한답니다. 또, 이 사람부터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철학의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칸트를 <독일 고전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죠.

자, 이번에는 칸트 철학을 좀더 확장시킨 철학자를 한번 볼께요. 이 사람의 이름은 <피히테>랍니다.

피히테는 칸트를 너무나 존경해서, 칸트의 관심을 끌어보겠다고 4주일만에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적 시론>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랍니다. 요즘 말로 칸트 빠~돌이었죠.

근데 말이죠. 출판업자의 실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저자 이름이 찍히지 않고 출판되었답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책의 내용만 딱~ 읽고 <아~ 칸트가 쓴 책이구나>라고 생각해 버린 거죠. 책을 읽을 사람들은 다 읽고, 이 책이 칸트 책이 아닌 피히테 책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피히테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 버렸답니다.

이 책의 핵심은 이거에요. 피히테의 주장을 한번 살펴볼까요?

피히테 : 나는 <종교>는 철학이 아니니깐 일단 빼고, 현실 속에서 인간 스스로 <이성>을 갖고 판단해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을 믿고 있어.

근데 말야. 한가지 궁금한게 있어. 대체, 종교라는 건 현실적인 이야기도 아닌데, 어떻게 긴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었을까? 아마도, 죽은 뒤에도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믿음이나 계시가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하나님의 계시가 정당하다는 믿음은 어떻게 갖게 된 것일까? 실제로 신을 만났기 때문에? 신은 무조건 옳기 때문에? 아냐. 그건, <하느님의 말씀> 즉, 종교의 내용이 우리 현실에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과도 딱 맞기 때문이야. 신이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법칙에도 맞아야만, 우리가 믿을 수 있을 거야. 신이 세상을 법칙을 무시하고,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 준다면 우리는 그것을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부르지 않겠어?

결국, 하나님이란 존재를 인간들(자아)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도덕적이고 정의롭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계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즉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피히테는 칸트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었답니다. 피히테는 교회에 대해 칸트보다 더 비판적이었죠. 종교를 순수한 믿음으로 파악하지 않고, 현실 <윤리>라는 틀에 집어넣어 버린거에요.

잘 생각해보세요. 피히테는 종교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종교도 결국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도덕>에 맞아야 한다.... 그거잖아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도덕(윤리)>이고, 인류의 존재 근거나 모든 지식의 근거가 바로 <도덕>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 절대적인 윤리를 실천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아이기 때문에, 모든 절대적 진리의 출발점은 나 자신, 즉 자아인 것입니다. 즉, 칸트가 말하는 <순수이성비판>이니, 피히테가 말하는 <이성국가>니 하는 말에서의 <이성>이란 말은 걍... <하늘의 종교>보다는 <현실의 도덕>이란 말 쪽에 훨씬~ 가깝답니다.

그래서일까요? 그 말이 맞아요~ 라고 믿은 피히테의 제자 한명이 <모든 믿음은 순전히 도덕일 뿐이다>라고 논문을 적어 버린거에요. 그래서 피히테는 제자 덕분에 종교인들에게 비난을 듣게 되죠. 피히테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들었고, 그를 옹호하려고 했던 문교부장관 <괴테> 선생만 <피히테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라고 말하면서 고생을 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그 무렵.... 독일연방을 이끌던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박살이 났어요.

피히테를 비롯한 독일의 철학자들은 부패한 조국이 전쟁에 진 것을 오히려 환영했답니다. 왜냐면, 부패한 조국 <프로이센>보다도,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으로 무장한 프랑스 혁명군이 좀 더 <도덕적>인 군대라고 생각했거든요. 베토벤이라는 음악가도 나폴레옹을 인류의 자유, 평등을 실현해주는 영웅이라고 생각하고 <영웅 교향곡>을 지었다는 일화가 있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인류의 구원자 나폴레옹이 자유와 평등 사상과는 전혀 관계없이, 지가 직접 황제가 되겠다고 왕관을 써 버렸답니다. 독일인들을 분노했죠. 결국,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가에 불과한 인간일 뿐이었으니까요. 뭐, 베토벤도 짜증을 내면서 <영웅 교향곡>을 찢어 버렸다나 하는 일화가 있어요.

구체제와 부패한 귀족관리들을 무찌른 줄 알았던 프랑스의 영웅이 사실은, 욕심에 가득차서 조국 프로이센을 침략한 망나니에 불과했던 거죠. 그리하여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고, 부인과 제자들을 이끌고 <프랑스에 대한 해방전쟁>에 참여했답니다.

그러다가 부인이 전쟁중에 장병들 간호하다가 장티푸스에 걸렸는데, 그걸 극진히 간호하던 피히테는 오히려 자신이 병에 전염되서 죽고 말았어요....

이 무렵 피히테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세상의 절대적인 <자아>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 꼭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류의 해방을 위해서는 참된 국가가 필요하다는 생각 말이죠. 부패한 프로이센 관리의 국가가 아니라, <도덕>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국가말입니다. 칸트와 피히테는 도덕이나 윤리를 인간의 <이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피히테는 <이성국가>만이 독일인들의 국권회복과 민족의 영광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랍니다.

그래서 일까요? 피히테는 <자아, 윤리, 이성, 개인해방>이라는 칸트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성국가, 국가주의>라는 이야기도 동시에 하게 되었네요. 모순적인 철학자가 되고 만 거죠.

자, 그럼 이제,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철학을 완성시킨 위대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께요. 다음 장에서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 이야기를 하다보면, 독일 철학의 계보가 어느 정도 완성될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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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이야기 (NO.6)

번외편 : 마르크스로 <독일관념론>과 <사회주의> 이해하기 (1)

번외편은 근현대사의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구성된 주변 이야기들입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중간에 흐름이 끊긴다고 생각한다면, 번외편과 문제편을 뛰어넘고 본문만 계속 읽어주시면 되요~


  - 마르크스 이야기 <시작> -

자, 오늘부터 번외편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해 이야기할거에요. 시대 구분을 이야기하다 보니깐 <마르크스>라는 철학자 이야기가 많이 나왔죠? 잠깐~ 그런데 왜 이 <사회주의자> 이야기를 <번외편>에서 다루는 것일까요?

먼저, 이걸 이해해줘요~ 이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람이 만들려고 했던 <세상>이나 <이념>을 옹호하거나 비판하려고 하는 건 절대!!! 아니랍니다.

이 사람은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에요. 단지 19세기 혁명의 시대에 태어나 한 시대를 꿰뚫어보려고 노력했던 지성인일 뿐이죠. 이 사람의 철학 역시 다른 철학자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답니다. 그냥 놀랍고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장점도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이 사람을 다루지 않고서는 <근현대사>의 큰 흐름중에 하나인 <무정부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립혁명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답니다. 마르크스는 19세기의 큰 흐름인 <자본주의, 근대화>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거부하고, <인간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려고 했던 사상가에요. 그리고, 이 사람의 사상은 우리 역사에서도 너무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죠. 지금도 우리 민족은 <이념>의 차이 때문에 남북이 갈라져 있잖아요.

하지만, <자본주의>가 정착한 우리 남쪽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람의 사상을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았답니다. 20년전만해도,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금기된 책이었죠. 또, <마르크스>를 알려고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반정부적인 운동권이나 빨갱이들이라는 누명을 써야 했던 시기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 <근현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생각과 시대 흐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답니다. 자, 그럼 이 철학자를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추구했던 <근현대>의 철학을 알아볼까요?

그럼, 소위 <빨갱이> 철학이라고 불렸던 이 철학자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 청년 시절의 마르크스 -

과거의 혁명은 세계사의 기억에 의존해 왔다. 그 혁명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각성된 상태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19세기의 혁명은 죽은 자들의 손으로 죽은 자들의 시신을 묻게 해야 한다. 과거엔 번지르르한 말이 내용을 앞섰지만, 이젠 <내용이 말을 앞서야> 할 때이다.

                               칼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무월 십팔일>중에서...

자, 그럼 마르크스라는 사람의 인생을 팍팍~ 파해쳐보면서 근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제대로 이해해봅시다.

마르크스는 독일 라인지방 트리어에서 태어났답니다. 아버지는 유태인이었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변호사였죠. 19세기 유럽에서는 낭만주의니, 계몽주의니 하는 생각들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특히, <지식인들이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간다>라는 생각이 많았었는데, 마르크스의 아버지도 그런 생각을 가진 <지식인>이었던 거죠.

그럼, 마르크스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지 대충 감이 잡히죠? 잘 사는 지식인이 되서 <민중>들을 이끌어 가려면 가장 필요한 공부는? 당연히 <법률>공부였죠. 19세기 유럽에서는 <기독교 집안의 법률가> 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아버지도 아들이 <법조인>이 되기를 원했답니다.

그런데, 이 철부지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했답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본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입학한 뒤에는 <법학>보다는 <헤겔> 철학에 더 관심이 많았죠. 당시 대학생들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젊은 시절, 인생의 큰 뜻을 펴는데 도움이 많이된다고 생각했답니다. 또, <철학>에는 인생의 낭만이 있다고 생각한 젊은이들도 많았거든요.

이 젊은 청년은 아버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모범생 역할을 하지 못했겠죠? 자, 그럼 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고 다녔는지 한번 가상의 친구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들어보죠.

마르크스요? 쫌~ 과감한 친구였죠. 이 인간이 얼마나 잘난 척을 하는지, 이것저것 주워들어서 아는 건 많아 보이더라구요. 근데, 가끔 거만한게 도를 지나쳐서 왕짜증날 때가 있어요. 뭐, 친구들을 확실하게 챙겨주는 것만 아니면, 완전 왕따감이죠....

거기다가 자기 생각이 얼마나 확실한지... 불의를 보면 못 참는다고 친구들과 맞짱을 뜨고 결투 신청해서 얻어터지질 않나.... 뭔 철학얘기를 한다고 술 퍼마시고 소리를 크게 질러서 경찰에 끌려가질 않나... 뭔 넘의 술값은 맨날 지가 내는지.... 또 가방에 사시미칼은 왜 넣어가지고 다녀? 호러 영화 알바하나?

지 개똥철학엔 또 자부심이 있어서 지가 교수인줄 알고 다닌다니깐요. 헤겔 철학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헤겔이 교수를 했던 대학이 지 대학인줄 안다니깐요. 어떤 친구는 그 넘을 천재라고도 부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똥고집도 장난 아니에요.

뭐, 이 정도 이야기를 들을 만한 위인이었던거죠. 심지어 아버지도 아들을 보면서 이렇게 짜증을 내었다고 하네요.

망할 넘의 자식이, 실컷 <법대> 나오라고 뒷바라지 해주었더니 <철학> 나부랭이에 빠져서 뭐하는 거야? 철학이란게, 이것 저것 찌끄레기 학문들을 모아서 뭉쳐놓은 건데, 그런 걸 공부라고 하고 있으니...

거기에 지가 무슨 교수인 줄 알고 이넘 저넘 모아놓고 토론질만 즐기지 않나... 사회발전이니 역사발전이니 헛소리를 하면서 사회 개혁을 하겠다느니, 뭐니 헛소리를 하지 않나... 지 똥고집 때문에 사람들에게 예의도 지키지 않는 미친 놈 아닌가.... 니 집에만 와봐라... 다리 몽둥이를 뿌려뜨려 버릴기다.

하지만, 아버지가 곧 돌아가셔서 마르크스의 다리몽댕이는 멀쩡했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죠.

자, 이렇게 철학에 심취한 마르크스.... 그의 목표는 <헤겔>과 같이 위대한 <철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죠. 그런데 말이죠. 그는 결코 죽을 때까지 교수가 될 수 없었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헤겔 좌파>의 사상을 가졌기 때문이고, 그 사상은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금기시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자, 그럼 마르크스의 일생을 바꾸고 그를 가난에 몰아넣었던 <헤겔 좌파>의 사상이란 무엇일까요? 다음 페이지에서 헤겔 좌파의 사상과, 독일 철학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해 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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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의 민족 운동(비밀결사) 
  일제의 남한 대토벌(1907)로 인해 국내에선 실질적인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의 전개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된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을 규합하여 만든 독립 의군부는 국권 반환을 위해 편지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및 일본을 향해 요구하였다. 또한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의 명령을 받아 결합된 비밀 결사였으므로 주된 목표는 황실의 부활, 즉 복벽적인 것이었다(왕실부활, 복벽주의).
  또한 대한 광복회군대식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독립운동, 무관학교 설립비 등을 모금하였다. 공화정을 주장하였으며,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속해있었던 단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무관학교, 김좌진 등의 키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독립 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성 비밀 결사 조직인 송죽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등이 있다.

 2)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에선 실질적인 항일 운동이 불가능 하였다. 때문에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무장 독립 투쟁의 대안이었다. 해외의 독립 운동 기지는 크게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네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만주 역시 서간도 북간도 북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서간도에는 삼학사의 경학사(후에 부민단으로 개칭), 신흥 무관학교,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으로 개칭, 김좌진 장군), 서진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등이 있었고, 북만주에는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결성하게 되는 한흥동(韓興洞 : 한족이 흥하는 동네)가 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성명회, 권업회와 같은 항일 결사를 비롯하여 유인석의 13도 창의군(정미 의병의 이인영의 13도 창의군과 다름, 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대한 국민 의회(1919, 손병희, 무장독립론) 등이 있었다.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1918, 안창호, 외교독립론)이 후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주에는 대한인 국민회(1909, 안창호, 이승만),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조직한 군대인 조선 구민군단(1914)이 있다.

18.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1 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 선언이 촉매가 되어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본래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중국집에서 임의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수해버리는 바람에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학생들과 종교인 등은 계획되로 진행이 되지 않자, 스스로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처음 운동이 시작했을 때는 참가자들은 학생, 종교인,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비폭력주의를 표방하고 힘차게 태극기만 휘날렸지만, 점점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상인, 노동자, 교사, 학생, 농민 등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특히 농민들 같은 경우 전에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이 점점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 등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운동은 3.1운동 그 자체보다 3.1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3.1운동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독립운동 관리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국내에선 실력양성운동이, 국외에선 무장독립투쟁이 활성화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이 대중화 되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영향으로 몇몇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걷고 있던 대한 국민 의회연해주에 있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 정부국내에, 안창호가 외교활동을 위해 만든 훗나 임시정부가 되는 신한청년단상하이에 있었다. 이러한 3개의 임시정부를 안창호가 '임시 정부 통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임시정부가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한성 정부의 조직과 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한성 정부가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특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노인네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위치는 상하이로 한다.
  -> 외교독립론(외교 > 무장) / cf. 만주, 연해주는 무장 투쟁론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조직이었던 연통제와 통신을 담당했던 교통국을 통해 활동하였다(행정). 만주에 이륭 양행, 부산에 백산 상회 등과 함께 애국 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군대조직으로는 육군 주만(住滿 ; 만주에 있는) 참의부와 훗날 만들어지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종영, 한국 광복군이 있다(군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미주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립 신문(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다르다)과 사료 편찬소 등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또한 실리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외교독립론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이승만은 또라이짓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제연맹과 미국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한 사실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과연 독립운동은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명제로 머리를 맞댄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자들(개조파)과 아예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무장독립투쟁론자(창조파)들이 대립하기에 이른다. 끝내 창초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 체제를 개편하고, 김구가 사(私)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1926)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바이다.


 Tip. 독립 운동론

  1. 무장 투쟁론 :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노선

   -> 신채호, 이동휘, 손병희 등

  2. 실력 양성론(준비론) : 힘을 길러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선

   -> 안창호

  3. 자치론 :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얻자는 노선 -> (삐꾸) 이광수, (찐따) 최린

  4. 외교독립론 : 국제 연맹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자는 노선

   -> (또라이) 이승만

  5. 계급 투쟁론 : 계급 투쟁을 통한 일제의 지배 계급 타도(사회주의계) -> 박헌영

 19. 의열 투쟁
 1) 의열단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만주 길림에서 비밀 결사인 테러조직을 조직하게 된다(190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외교론, 자치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직접 혁명을 촉구)」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김익상(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나석주(동척에 폭탄 투척)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비밀 결사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정당(政黨)과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열단원 전체가 중국의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1932)하기도 하였다. 후에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단을 결성(1935)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항일 운동의 최전방에 나섰다.

 2) 한인 애국단
  국민 대표회의 이후로 침체된 임시정부의 재활을 꿈꾸며 김구가 조직한 사조직이다. 이봉창(일왕의 마차에 폭탄 투척), 윤봉길(훈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여 중국 국민당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Tip.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비교

 의열단 : 국내에서 활동

 한인 애국단 : 외국에서 활동

 20.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순서, 장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혹은 대표자 등은 꼭 알아두자. 요즘 많이 나오는 추세다(거의 2문제 정도).
  1920년,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북간도 지방의 봉오동에서 대파하였다. 분노한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간도 훈춘에 있던 군벌에게 자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부리도록 자작극을 의탁하였다. 이것을 '훈춘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간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옮길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번에도 참패를 겪게된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보복(1920)하였고,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좌절되어 독립군들은 북만주에 있는 한흥동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독립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변을 당하게 된다(자유시 참변, 1921). 수많은 독립군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부대, 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소위 3부를 성립하게 되며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자치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이것 마저 만주 군벌과의 미쓰야 협정(1927)을 통해 독립군에게 현상금을 걸고 만주 군벌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3부를 지역중심으로 통합하여 남만주에는 국민부북만주에는 혁신의회를 세웠다. 후에 국민부혁신의회는 각각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으로 발전하여 휘하에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을 두었다. 단체의 이름으로 봐선 다분히 사상을 중심으로 통합한 듯 하나, 실은 사상과 관련없이 지역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3부의 통합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손꼽는다.
  1931년 일제가 드디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만주를 침략하고 괴례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만보산 사건(한중 물꼬 싸움) 이후로 민족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국과 한국인 사이가 만주 사변 이후 상호 협력적인 형태로 바뀌어가며 윤봉길 의사의 서거 또한 한 몫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에선 앞에서 만들어진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등에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5년 의열 투쟁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김원봉의열단,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의 산하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활발한 항일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의 하수인 노릇(찌라시 뿌리기, 항복 권고 등의 잡일)만 하게 되자, 분노한 대다수의 조선 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월북하여 중국 국민당 등지고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동북 지방에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 동북쪽에서 일본에게 대항하는 군대)은 국내의 민족 유일당 조직 중 하나였던 조국 광복회의 도움을 받아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해방후에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을 '갑산파(김일성 포함)'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국민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 의용대의 몇몇 사람들은 공산당이 있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연안 지방에서 손을 잡게 된다. 조선 의용대는 화북 지방에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 청년 연합회와 연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도 중국의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맨 마지막으로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해방 북한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940년 임시 정부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당(3부가 통합된 한국 독립당과 다름, 주의.)을 중추로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시될 당시만 하여도 30명 남짓의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1942년 김원봉을 비롯한 남아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힘을 보탬으로써 조직다운 면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대독,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여 한 나라의 국군(國軍)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국민당 산하에서 독자적인 지휘권 없이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게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Tip. 무장 독립투쟁 전개도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 (훈춘사건), 청산리 전투(김좌진) - 승리

        간도참변(경신참변) - 시련

        대한독립군단 - 극복 의지

1921년 자유시 참변 - 시련

1923~1925년 3부 성립 - 극복 의지

1927년 미쓰야 협정 - 시련

1928년 3부 통합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1년 만주 사변 - 시련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 극복 의지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조직 - 극복 의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 시련

        동북 항일 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조선 의용대 창설(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 주의)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 극복 의지

1942년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 - 민족 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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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 H I S T O R I A >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이 이야기에 나온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법, 제도, 인물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해당되는 입장의 내용들만으로 씌여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혁명 : 자유부터인가, 평등부터인가...

서구 역사가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찾곤 한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하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실제, 근대 유럽의 자유와 평등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였다.

프랑스 혁명을 처음 일으킨 것은 <귀족>세력에 반발한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그들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첫 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의회의 자본가들은 1791년 샤플리에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려 했고, 재산이 있는 자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헌법을 만들었다. 자본가들을 믿고 <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한 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년 뒤, 민중들은 8월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은 <자본가>들의 세상을 다시 부수고, 프랑스 제 1공화정(국민공회) 시대를 열었다. 자본가들을 위주로 하는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았으며, 국왕인 루이 16세마저 사형에 처한다. 93년 헌법에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재산권 위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기준으로 하는 혁명적인 헌법을 다시 만든다. 또, 모든 사람이 직접 선거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평등파>와 대결하려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방토즈>법을 만들어 <재산가>들의 재산을 <혁명군과 애국시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한다. 서구의 근대사 최초로 <자유>가 <평등>에 의해 억압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파 의원>들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 공포정치로 자유를 탄압한 평등주의자 로베스피에르는 죽었고, 부르조아지들은 다시 <재산권>을 최고의 기치로 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 대립했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긴 하였다. 예로 1796년 혁명을 통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추구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의 아버지 <바베프>이다. 그는 재산권 자체를 부정하고, <자유>는 <평등>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곧 바로 <사형> 시킨다. 그 이후 자유주의는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락한 프랑스 경제의 부활>과 <혁명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발표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는 이 것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오로지 혁명의 성과를 <자유>로만 규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유주의 이념을 평등주의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말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성과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조아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을 프랑스의 위대한 국민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통하여 <재산권과 자유권>을 유럽 대부분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등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은 바로 군부에 의한 <탄압>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위대한 법전으로서 법적인 평등과 신앙, 재산, 직업의 자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전의 모든 조항은 개인을 위한 자유보다는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유, 재산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이념은 <자유이념>이 모든 이념을 포괄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자유주의 이념>이었고, 이 자유주의 이념은 유럽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최초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원이 된 혁명에서부터 <자유>가 <평등>을 누르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며, 이 후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 계급의 <평등>이념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시도들은 대부분 <자유라는 인간의 절대 기본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두 좌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이념은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과 맞물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절대적 지원사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극단적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반자유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역사는 이러한 투쟁을 모두 실패로 기록하고 만다.

봉건귀족 세력의 역사적 역할 :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악마세력>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유럽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금기어가 되었다. 유럽의 봉건 왕조들은 빈회의를 통해 혁명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 유럽을 <보수화>하려고 하였다. 유럽의 왕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평등보다는 <자유>이념이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은 산업혁명 등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보았으며, <자유주의>는 이들 자본가 계급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럽의 <정통 왕실>과 성장하는 <자본가>들은 서로 적으로서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 이 때 <지식인과 민중>은 누구 편을 들어야 했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평등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 과거 세력>들인 왕실과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시위에 들어간다. 독일 대학생들은 부르센샤프트 운동을 벌였고, 나폴리에서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결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왕실 질서는 또 다시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규탄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사후의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과 자본가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등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티에르 등 <자유주의자>들은 <민중>과 연합하여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평등주의자>들을 버린다. 민중이 원한 평등선거는 없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부도 없었다. 단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샤플리에법>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모두 적으로 여긴 봉건귀족은 이 둘의 연합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정 : 계속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이 이야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혁명을 이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혁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을 이끈 선구적인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이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또 다시 <평등>의 기치를 잃어 버렸다. 이 때부터 프랑스 민중들은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자유>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주장했던 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편이 되어서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또 한 차례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을 폐위시키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다시 수립하게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 혁명 공화정에 이은 <제 2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제 2 공화정>은 <자유주의>와 극심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급진 평등파>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인 <재산권>을 제한하려 하였고,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온건한 공화파>들 조차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다시 극단의 혁명을 몰고왔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6월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제 2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은 불법이라면서 강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화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도>를 실시하여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체제안으로 포섭해야 했다. 특히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국내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민중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국민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 계급을 떠나 하나이다. 모든 계급의 통일체가 민족이고, 민족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이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 그는 이 <민족>개념으로 국민들의 <냄비같은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평등을 요구했고,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창립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강력한 리더쉽 앞에 <평등주의>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묻혀 버렸다.

영국 :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이념으로 전환되다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국의 <자유주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부터 진행된 우리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들 나라의 문물을 먼저 수입한 청과 일본에 의한 것지만 말이다. 이건 다음 회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을 목격한 <조용한 섬나라>는 이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젠트리들에게 수많은 권리를 주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이다. 그만큼 자본가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나라였다. 무론 의회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본가 위주의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명칭까지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귀족들은 <보수당>에 집결하여 정당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세기 영국은 곡물법을 폐기한다던가, 항해조례를 폐기하면서 자본가들이 해외무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세기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은 <평등>이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이 산업자본가와 같은 권리를 차츰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 유럽 어느 나라이든 19세기 <여성의 평등>을 거론한 나라는 없다. 여성에게 똑같은 보통선거를 준 것은 선진적인 영국도 <20세기>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영국의 자유주의적 발전은 <자유주의 만능 이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자본가들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했던 분야가 바로 애덤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 분야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에 절대 간섭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가격>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내 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유>는 주되, <평등>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은 노동자 책임이므로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는 없다. 빈민촌에는 소독도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정립한 사람은 <스펜서>이다. 스펜서는 이 모든 이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정립시켰고, 유럽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먹이사슬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다. 사자는 강하고, 양은 약하다.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을 사회 법칙에 대응하면?

노동자는 가난한데 그것은 유전자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은 도태되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학자 리카도는 한가지 증명까지 시도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성경이다. 경제는 지대, 이윤, 임금의 3가지로 유지되는데 지대가 커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임금은 그만큼 준다. 노동력이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날 수 없다. 결국 노동자는 항상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진화론을 국가간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먹이감을 구하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한 탈출구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거나 식민지를 만둘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사상은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당위성>으로 설명해야할 사상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나라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서 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약자의 변명은 사회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서 참신한 혁명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타락과 협상을 거쳐 다양한 사상과 연결된 결과, <제국주의>의 호수까지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제국주의를 부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개화기에는 <근대 사상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개화기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도 수용하였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역시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서 <제국주의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제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기에는 <제국주의적인 군사실력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평등주의>의 반격...

사회진화론까지 나아간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평등주의>자들은 수많은 반격을 하고, 저항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이념을 계승한 이들은 중산계급의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급진주의>를 주장하였다. 생시몽과 같은 이들은 폭력혁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자본가와 협력하여 타협을 이끌어내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푸리에는 한발 나아가 현존 제도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결혼조차 부정하면서 성적인 자유까지 주장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생각하게 된다. 무정부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 권력은 모두 <평등>을 억압한다고 본다. 경찰, 군대, 학교, 법원 등은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들 도구는 <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국가의 완전 소멸>이 평등을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국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진 뒤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평등한 노동의 세상을 말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접 코뮌(자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평등>사회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러시아의 바쿠닌은 아예 폭력 혁명으로 모든 것을 부수자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포티긴은 바쿠닌의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것의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그 새로운 세상은 <평등>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수고 민족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대립

독일의 자유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가 통일과 자본가 계층의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지만,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표하여 평등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독일의 현실 때문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 된 이후 동독일의 토지귀족(융커)들과 서독일의 산업자본가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철저한 단결을 주장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은 이렇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 평등함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또 깨드린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현 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단, 이 변증법은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하부구조는 경제력인데, 상부구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독식한다. 역사는 그러한 모순(정)에 대한 투쟁(반)이었으며, 그 투쟁은 항상 새로운 결과(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자유주의(자본주의 : 정)에 대한 평등주의(반)의 투쟁으로 새로운 세상(공산주의 : 합)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의 주체인 빈민층(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해 제 1, 2 인터네셔널을 만들었고 이 국제 평등기구에는 독일계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의회>에 진출하여 <자본주의>가 붕괴될 대를 기다리자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적 기구로 단결하여 훗날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서 이들은 해산하였다.

프랑스.... 왕정과 공화정의 반복 :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프랑스는 제 2공화정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평등>요구로 기득권과 자본가들이 <재산권>을 빼앗긴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재권을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헌법의 큰 줄기였다. 나폴레옹 3세는 기득권을 위한 <쇼>를 많이한다. <자유주의>의 옹호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행설립, 철도 건설, 중공업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워 자본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특히 파리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많았다. 나폴레옹이 실시한 노동자를 위한 <평등> 정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다. 실업자가 늘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평등이란 말 대신 <민족의 영광>이란 말로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점차 불만이 많아졌다. <민족>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부르조아>를 위한 정책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정책은 간단하였다. 나폴레옹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발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을 달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전쟁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화, 연예인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확실한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국민적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샤르데냐 전쟁), 멕시코 원정, 오스트리아 전쟁 등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전쟁을 수많은 이유를 들어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농간으로 패함으로서 <국민적 영광>은 상처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파리 자치정부>가 추진된다.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자, 블랑키 주의자들은 <평등주의>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연합하였고, 파리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혁명 자체가 아니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평등주의>로 국가정책을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전투>라고 역사는 부른다. 자치정부군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항쟁하였다. 국가는 그들을 잡아 바로 바로 총살시켰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죽이지 못한 이들을 파리 시내에 가뒤 굶겨 죽였다. 쥐를 잡아먹으며 항쟁했던 <자치정부>의 모든 이들은 엄청난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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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부에서 다룰 이야기 : 사회주의의 성장 드레퓌스 사건, 카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의 관계, 미국노예해방은 자유주의인가 평등주의인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버린 제국주의, 세계대전 중 평등사상, 히틀러와 자유주의, 냉전시대와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의 등장배경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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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양장본) 상세보기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무역의 특징을 갖는 제도적 틀 내에서 개인의 자유 및 기능을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복지가 가장 잘 개선될 수 있으며,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행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데 있다고 제안하는 정치적ㆍ경제적 실행에 관한 이론이다. 이 책은 세계적 담론과 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용어가 된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알아본다. 신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상세보기
강상구 지음 | 문화과학사 펴냄
문화과학 이론신서 19번째권. IMF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지 2년이 지난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의 태동과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저서. 1950-60년대 신자유주의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고 신자유주의 등장과 현대자본주의의 특징을 고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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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펴냄
15년 전 항소이유서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인용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저자의 정치문화 에세이. '이 땅에서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나는 국론통일이 싫다',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극' 등 45여 편을 엮었다.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 상세보기
장동진 지음 | 동명사 펴냄
정치의 본질을 다룬 정치철학서. 정치철학의 정의부터 분배의 정의와 평등, 국제사회 정의에 관한 모색 방안 및 자유주의와 한국정치에 관한 내용까지 담았다. 지난 10년간 학술지 및 학회나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와 일부 현대정치 이론가들의 이론을 담았다.
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상세보기
황경식 지음 | 철학과현실사 펴냄
'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란 물음에 깊이 있게 고찰해 본『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자유민주 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왔고 철학공부를 한 저자는 롤즈의『정의론』을 접하게 되면서 잠재의식적 자유정신을 의식화하고 자유주의를 향한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이 나름대로 구상해 온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총 5부로 나누어 마음껏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와 그 적들, 2부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상세보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 나남 펴냄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책.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필자의 생각을 상상의 공동체라는것을 통해 접급했다.

프랑스혁명과 베르트랑 바래르 상세보기
서정복 지음 | 삼지원 펴냄
근대적 민주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프랑스 대혁명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의 추진자 겸 관찰자 역 할을 했던 베르트랑 바래르의 활동과 증언을 통해 살 핀 책. 혁명 이전 새로운 사상의 흐름과 베르트랑, 자코뱅 시대, 테르미도르 사건 등 6개 장으로 설명했다.

자유주의적 평등(한길그레이트북스 73) 상세보기
로널드 드워킨 지음 | 한길사 펴냄
로널드 드워킨의『Sovereign Virtue』를 번역한 책. 미국의 롤스 이후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자유주의 평등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평등권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구좌파가 지나친 평등을 추구했다는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구좌파가 추구하였던 평등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현대 정치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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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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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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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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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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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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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