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국을 반포하는 고종의 조서와 광무의 의미

- 대한 제국의 반포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1. 조정에서 높은 벼슬과 후한 녹봉으로 신하들을 대우하는 것은 원래 그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라의 안위(安危)는 전적으로 관리들이 탐오한가 청렴한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관리들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면 뇌물이 판을 치게 되어 못나고 간악한 자들이 요행으로 등용되고 공로가 없는 자들이 마구 상을 받으며 이서(吏胥)들이 문건을 농간하므로 백성들이 해를 입는 등, 정사가 문란해지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금년 10월 12일 이후부터 서울에 있는 크고 작은 아문(衙門)과 지방의 관찰사(觀察使), 부윤(府尹), 군수(郡守), 진위대(鎭衛隊) 장관들과 이서, 조역(皂役)으로서 단지 뇌물만을 탐내어 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들은 법에 비추어 죄를 다스리되 대사령 이전의 것은 제외한다.

1. 조관(朝官)로서 나이 80세 이상과 사서인(士庶人)으로서 나이가 90세 이상인 사람들은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라.

1. 지방에 나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은 수고가 많은 만큼 그들의 집안에 대해서는 해부(該府)에서 후하게 돌봐 주라.

1. 재주를 갖고서도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로서 현재 쓸 만한 사람과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대체로 그들이 있는 곳의 해당 관찰사가 사실대로 추천하고 해부(該部)에서 다시 조사해 보고 불러다가 적절히 뽑아 쓰라.

1. 은혜로운 조서(詔書)에 ‘묵은 땅은 세금을 면제해 주고 장마와 가뭄의 피해를 입은 곳은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에게 부과된 일정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 있으니, 다시는 시일을 끄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간혹 이미 다 바쳤는데도 지방관이 별개의 항목으로 지출해서 쓰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착복함으로써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제하라.

1. 각 처의 주인 없는 묵은 땅은 해당 지방관이 살펴보고 내용을 자세히 밝혀서 보고하면 관찰사(觀察使)가 다시 살펴보고 판단한 다음에 허위 날조한 것이 없으면 즉시 문서를 주어 돈과 곡식을 면제하여 주며, 그 땅은 백성들을 불러다가 개간하도록 하라.

1.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서 조관은 7품 이하에게 각각 한 품계씩 올려 주라.

1. 사람의 생명은 더없이 중하므로 역대로 모두 죄수를 세 번 심리하고 아뢰는 조목이 있었다. 죄보다 가볍게 잘못 처리한 형관(刑官)의 죄는 죄보다 무겁게 잘못 판결한 경우보다 가볍다. 대체로 형벌을 다루는 관리들은 제 의견만을 고집하지 말고 뇌물을 받거나 청탁을 따르지 말며 범죄의 실정을 캐내는 데 힘쓰라.

1. 모반(謀叛), 강도, 살인, 간통, 절도 등 여섯 가지 범죄를 제외하고는 각각 한 등급을 감하라.

1. 각도(各道)의 백성들 가운데 외롭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로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해당 지방관이 유의하여 돌보아 주어 살 곳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1. 큰 산과 큰 강의 묘우(廟宇) 가운데서 무너진 곳은 해당 지방관이 비용을 계산해서 해부(該部)에 보고하고 제때에 수리하며 공경하는 도리를 밝히라.

1. 각 도의 도로와 교량 가운데 파괴된 것이 있으면 해당 지방관이 잘 조사하여 수리함으로써 나그네들이 다니는 데 편리하게 하라.

1. 조서 안의 각 조목들에 대하여 해당 지방의 각 관리들은 요점을 갖추어서 마음을 다하여 행함으로써 되도록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힘써서 백성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짐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만약 낡은 틀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한갓 겉치레로 책임이나 때우고 있는 데도 해당 관찰사가 잘 살펴보지도 않고 되는 대로 보고한다면 내부(內部)에서 일체 규찰하여 엄히 처리하라.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었다.】

- 고종 실록, 고종 34년 10월 13일 -

- 광무의 뜻은 무엇일까요?

고종은 일제가 압박하는 구한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광무라 하면서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의미는 <삼한을 계승하여 황제가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조선 - 삼한 - 삼국시대 -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삼한정통론>을 계승하여 국호를 정한 것이지요.

여기서 뜻하지 않게 미심쩍은 것은 연호인 <광무>입니다. <대한>이야 <삼한의 큰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광무는 뭘까요?

사실 고종이 정한 광무란, 후한의 건국자인 <광무제>를 염두에 두고 지은 연호입니다. 광무제는 한무제 때의 전성기였던 <전한>의 부활을 꿈꾸면서 <후한>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무제 역시 한무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위대한 제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고종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국운을 보았고, 일제의 침탈로 인해 명성황후가 비참히 죽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자신도 죽을 위기를 넘겼고 이미 <조선>이라는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가 어떤 종말을 맞을 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광무>라는 이름을 쓰게 됨으로서 불가능해 보였던 <전한>의 영광을 다시 재현한 광무제와 같이 한반도의 국운을 되살려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의 광무개혁은 그 뜻과는 다르게 <국운의 부활>을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광무제가 살았던 시기와 고종이 살았던 시기의 사회가 너무 달랐던 탓일까요, 아니면 고종의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요? <광무>란 연호는 그저 고종의 개혁 때 사용했던 연호라며 교과서에 1줄 실리는 정도에서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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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삼한 정통론 주장

1. 이익의 삼한 정통론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 해석은 한문사료를 임의적으로 하다보니, 약간 맞지 않는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2. 삼한 정통론의 사회적 배경

이익이 삼한정통론을 주장한 것은 당시 사회가 <중화의식>이라는 것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중국에서는 명이 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섰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등을 통해 청에게 굴복하면서 북벌론, 북학론 등 다양한 대청 대응방식을 보였고, <청>이란 왕조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를 놓고, 호락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익은 이러한 시기에 <명>의 멸망으로, 중화적 전통은 중국에서 단절되었으며, 그 전통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소중화 의식>에 입각한 삼한 정통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청이 중국의 지배권을 가진 이상 청의 중국 지배 자체는 인정하고, 청의 문화는 수용해야 하지만, 국가의 정통성 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익이 말한 소중화 의식이란, 청을 유학체계로 보았을 때 오랑캐 국가로 보고 중화전통은 어디서 보존하고 있는가라는 의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3. 단군이 정통이고, 기자는 전통을 보조한 인물이다

위 사료를 보면 일단 기자조선의 전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가자조선은 인정하지만, 기자가 조선의 개창시조라는 부분은 부정한 내용입니다. 즉, 기자는 문명의 상징일 뿐이지, 조선의 민족시조는 아닙니다. 결국 조선의 시조는 단군을 시작으로 합니다. 기자 이전에 이미 고조선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조선의 기원을 중국 전설 시대인 <요, 순> 시대로 상정함으로서 우리의 기원이 중국의 기원보다 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익 이전의 정통론 중에는 사림의 유학적 학풍에 따라 <기자-삼한-삼국>의 정통설을 주장하여, 기자를 아주 높이 숭상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익은 이 기자 전통보다는 <단군전통>을 강조하였고, 기자는 단군조선의 보조적 역할로 축소합니다.

4. 기자전통은 삼한으로 이어지다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익은 위만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고조선의 전통은 단군과 그를 이은 기자가 이어갔기 때문에, 위만의 등장은 왕조찬탈로 간주한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를 빼앗긴 준왕이 남쪽에서 왕조를 개창하여 삼한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조선의 전통은 단군 - 기자 - 삼한 으로 이어집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자세히 적혀있습니다. 신채호는 신조선 - 불조선 - 말조선의 3조선이 <고조선>으로 존재하였으며, 말조선의 후예가 다른 2조선을 후에 받아들여 <신한 - 불한 - 말한>이라는 삼한을 형성하였다는 체계적인 논리를 변증법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사이트내에서 신채호를 검색하면 관련 기사를 여러 포스트 보실 수 있습니다.)

5. 삼국은 무통의 시대이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익은 준왕이 남하하여 남부에서 왕조를 개창하였기 때문에, 삼한과 삼한을 이은 삼국에 정통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삼국 중 어느나라가 고조선의 정통인지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모두가 단군의 후예이고, 모두가 단군의 핏줄입니다. 제왕운기에서 삼한 70여국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말하였듯이 이 문제에서 이익은 삼국의 어느 한 나라에 정통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중국 위진남북조의 시대의 선례에 따라 각기 전통을 가진 나라가 병존하는 <무통>의 시대로 처리하였습니다.

6. 역사는 도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은 고조선의 계승의식과 민족의 전통의식을 주장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성의 폭을 상당히 넓혀놓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익이 종래 사림 유학자들이 주장하던 <도덕사관>을 뛰어넘어 역사를 교훈으로 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는 소중화 의식은 단순히 명이 망하고 오랑캐 왕조가 들어섰으니,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물려받은 <소중화>이다는 차원이 아니고, 화이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관점도 아닙니다. 그는 유교적 명분론이 무리한 북벌론과 지배층의 보수화를 가져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산림세력을 대표하는 송시열의 주자학 이념에 학문적으로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송시열의 유학이 명분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익의 유학은 명분을 현실에 이용하는 유학입니다.

그가 소중화를 주장한 것은 중화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라는 거대 국가의 탄생에 대하여 국가적 자존을 지키기 위해 <소중화 의식>이라는 유교 이념을 채용하여 실리를 챙기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실제, 그는 농업부분 등에 있어서 한전법 등 실학적인 개혁의지를 가진 실학자였죠.

그는 교훈으로서의 역사가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다고 보고, 교훈보다는 운수(행, 불행)이, 운수보다는 시세(권력)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명분과 교훈은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이 불과한 것이라는 획기적이고, 사회적 이슈가 될 사상을 말한 것입니다.

위 지문에서 문헌에 없는 것도 추론하면 알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러한 사상의 연장일 것입니다. 굳이 사실만을 밝히여 그 시대의 상황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 문헌에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세력과 상황을 추론하여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역사학자 콜링우드가 말한 재현이나, 역사학에서 말하는 보간, 삽입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요? 콜링우드는 역사가가 과거인의 사상에 직접 개입하여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조선 시대 이익의 사상에서도 이러한 추론적 역사학을 논했다는 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좀더 다양화되고, 개방화되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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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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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의 3조선설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상제 환인은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였다고 한다.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명을 거느려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이라 이론다고 한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니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이사달에 들어가니 신이 되어 죽지 않은 연고이다.   

                                                             - 제왕운기 전조선기 -

사료해석 : 제왕운기는 3조선설을 제시합니다. 단군은 전조선기의 시조요, 기자는 후조선기의 시조라는 것이지요. 이중 단군은 민족의 동원성, 유구성, 독자성의 상징이며, 기자는 문명화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3조선에서의 위만조선은 그 정통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즉, 전조선과 후조선의 <조선전통>은 위만의 찬탈이후 삼한과 삼국으로 정통이 이어졌다고 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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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삼한 정통론

동국의 역대흥망은 대략 중화와 서로 시작과 끝을 같이한다. 단군과 요임금은 같은 시기에 일어났으며, 무왕이 천명을 받을 때 기자가 봉군으로 정해졌다. 그 뜻은 무엇인가? 단군이 후에 쇠퇴하고 약해지고, 군왕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자 기자가 다시 그것을 이어 업을 다시 일으킨 것이다. 기자는 8조의 조목(교화)가 있었는데, 그중에 지금 3가지만 전해지고 있다.(8조법 내용은 중략)

무릇 어질고 현명함의 문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니 후에 자손들의 업이 끊기지를 않았다. 위만은 사이한 방법으로 그것을 훼손하였으니, 준왕은 오히려 그 사람들을 이끌고 남으로 달려가 강역을 다시 개척하였고, 50여국이 복속하였다. 이것은 즉 동방의 전통이 끊기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삼국의 설명은 중략)

저 삼국은 동서로 나뉘어 서로 할거하고 있으며, 전통이 미약하니 마땅히 (중국)남북조의 선례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경주는 옛 삼한의 옛터이다. 그 땅의 기운이 바르고 그 풍속이 미흡하지 않으니, 오찌 황량한 오랑캐의 풍속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옛날에 말하기를, 이것은 필히 기자의 문명이 이룬 하나의 것이라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있다면 즉 나는 능히 증거를 밝힐 수 있으며, 문헌이 부족하면 역시 그 뜻을 추론하여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중략) 어찌 단군으로부터 이어진 전통이 끊기지 않았음을 추론하지 못할 것인가?

                                                                                         - 이익, 성호사설  -

사료해석 : 이익의 삼한정통론의 배경은 청의 성립과 명의 멸망 속에서 우리 스스로가 작은 중화라는 소중화의식의 성립과 관련있습니다. 또 양난이후 민족의식이 성장하면서 단군을 중국의 전설왕조(요, 순)과 동격으로 만들어 문명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면도 보입니다. 내용을 보면 종래 전통론에서 주장한 기자 시조설을 부정하고 단군시조설을 적극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은 전통이 없는 무통으로 시대로 보아 중국의 선례에 따를 뿐이며, 진정한 조선계승은 통일신라고 보고 있네요.

또한 추론을 통하여 역사를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성리학 사회에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입니다. 유교적 명분론을 탈피하고 주자를 벗어나 도덕보다는 시세(세력)이 더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즉 그는 시비(도덕)은 사회를 바꾸는데 별 영향력을 못지며 그것보다는 차라리 운수(행, 불행)이 더 큰 역할을 차지한다고 보았고,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시세(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붕당정치가 점점 변질되어 사사(죽임)이 많아지는 시기에 날카로운 사회적 안목이라고 생각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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