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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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I S T O R I A > 환타스티아 (6장)

서구의 신화에 대한 깊은 환상 - 드루이드

드루이드에 대한 세가지 관심

<드루이드>는 유럽의 신화에서도 특별한 존재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신화 속의 신화>로 자리잡고 있는 존엄한 사제라는 이유 때문이죠. 환타지물과 같은 유럽 중세의 이야기 속에서 드루이드는 유럽 주류와는 다른 <신화 속에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로 다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록이 거의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신화를 이야기할 때,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외감이나 공포심을 갖고 이야기를 바라봅니다. 알려지지 않은 그 이야기에는 어떤 숨은 뜻이 숨어있을까 하고... 그러나 고대 신화의 큰 맥락은 인류가 살았던 비슷한 시기의 다른 곳 이야기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드네요.

드루이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최근에는 크게 3부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연구자들입니다. 신화와 민속학, 유럽에 대한 언어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드루이드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중세 유럽에 나오는 문건들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죠. 특히 문학과 시가에 많이 나오니까요.

두 번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게임매니아>들입니다. 환타지 소설에 드루이드는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하는 이중적인 사제로 등장합니다. 또 <와우>와 같이 대중화된 RPG 게임에서도 드루이드는 자연 속에서 치유의 힘을 갖는 사제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소설과 게임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역사와 완전히 일치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드루이드의 배경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는 듯 합니다.

세 번째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드루이드라는 단어에 대한 관심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일반화 되면서 신화적 존재인 드루이드 사제나 고대 종교에 대한 왜곡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중세 교부철학자들은 가톨릭 교리와 다른 모든 신들의 역사를 이교의 역사로 단정했기 때문이죠. 왜곡된 종교적 공포심은 그 종교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드루이드>에 대해 진실을 알 수 없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이 <드루이드>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초기 사회에서 <신관>의 존재

드루이드가 무엇인가를 정의내리는 부분을 저는 다른 서적들이 접근하는 것처럼 신화, 종교적인 접근이 아닌 역사적인 (개인적인) 생각으로 적어볼까 합니다.

인류 역사 단계상 국가가 성립한 단계는 (대부분이) 청동기 시대였습니다. 청동기 때 금속기 문명이 등장하면서 <금속기는 무기 용도>로 가장 크게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의 물질 문명이 시작된 것과 달리 초기 금속문명 시대의 정신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못하였습니다. 부족을 다스리고 국가를 세워 나라를 통합하려는 시기에도 여전히 석기시대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남아있었습니다. 실제 유럽에서 크리스트교가, 아시아에서 불교가, 중국에서 유교이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석기시대의 종교는 개별적으로 그 지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석기시대의 종교적 이념은 그 지역에 따라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자연환경과 사회구조에 따라 숭배하는 대상이 각기 달랐죠. 그러나, 초기 국가시대에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종교적 특장인 <신관>, 즉 <무당>이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삼한 기록으로 자주 나오는 종교적 제사장 <천군>, 인도 신화의 <신관>, 유럽 신화에서의 <사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초기 국가 시대에는 <종교적 계급>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초기 국가단계의 사회에서 종교적 지배자가 중요시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류의 사회발전단계를 설명한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종교>의 근본 원인을 <공포>에서 찾았습니다. 인류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불합리한 문제를 가장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알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무엇인가를 <신의 이름으로>라는 말 한마디면 간단히 해결되니까요. 초기 국가 사회에서는 동북아의 무당(샤먼)이나 인도를 경계로 서부의 사제(신관)계급이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매개체였고,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신성을 상징하는 매개체였다는 것이죠.

초기 사회에서의 <사제>란 계급은 어느 지역이든 <경외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주는 절대자였습니다. 그러고, 그 중 북유럽와 브리튼 지역에서 활동했던 켈트족의 사제가 바로 <드루이드>입니다. 드루이드는 신화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실제 초기 사회에 볼 수 있었던 <사제> 계급이었을 뿐입니다.

인도 신화에서 유럽, 북유럽 신화로...

학자들은 드루이드의 기원을 인도 문화권의 <사제>의 개념이 전파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기 국가시대 중화권-만주, 요녕-한반도를 아울러 신관계급이 존재했던 것처럼 인도 문화권에서도 사제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인도 문화권에서의 초기 사제는 하늘과 땅을 중제하는 <무당 : 샤먼>의 개념이었습니다.

초기 인도 신화의 원형으로서 <아그니>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신과 인간을 중제하는 샤먼이었습니다. 이 신은 신들의 사자로 인간을 방문하고,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하늘의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초기 국가시대 각 국의 신관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짐승이나 인간 자체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와 비슷한 <제천행사>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니는 인간으로서의 샤먼이 아니라 우주의 도처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생활을 지켜보는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샤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니라는 말 자체가 <불>을 뜻하는 단어로서 인류를 지켜주고 문명을 발전시켜준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그니와 같은 인도의 신은, 아시아 유목계 민족의 이동과 함께 인도-유럽문화권의 사제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예로, 동양에서의 힌두교 신은 브라만이 사제 계급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서양 켈트족의 드루이드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제로 발전했다고 보는 관점이죠. (실제 기록은 없고, 단지 고대 민족의 이동경로연구나 종교적 유사성을 근거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갈리아 전기에 등장한 드루이드...

드루이드라는 사제 계급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이후 환타지 등 문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바로 유명한 로마의 정복자 시저(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 캘트와 게르만의 존재를 적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시저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캘트족들은 전사계급과 사제 계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자유민들은 <전사단>을 구성하여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전사단은 국가적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단순한 수준의 <민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민화는 정치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토론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의 단체였다고 합니다. 캘트인 중 하류 계급은 전사계급을 위한 식량 조달이나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캘트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계급은 <사제계급>인 드루이드였습니다. 이들은 <신의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샤먼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심판은 절대적이었고, 신의 심판에 불복종하는 사람은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당시 원시 사회에서 종교적 자유의 박탈은 신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 가장 큰 형벌이었다고 볼 수 있죠. 이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기 때문에 영혼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루이드>는 당시 가장 큰 특권층이었습니다. 삼한의 <소도>와 같이 제정이 분리된 사회에서 자신들만의 성지를 가지고, 신탁을 받았는데 이러한 신탁이나 법적 해석은 당시 사회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범죄자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산채로 제물로 바치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재적인 풍속은 훗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교도>라고 탄압받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드루이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면서 신의 명령을 지상에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관, 인도의 브라만, 동아시아의 신관이 모두 그런 역할을 하였죠. 이러한 초기 사회 신관들의 특징은 단순히 제사만 지내는 신관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층이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드루이드 역시 마찬가지였죠. 세습적인 계급으로서 드루이드는 사제이자, 신의 심판을 맡는 재판관이었고, 신의 명령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이자, 사회적 불만세력을 제거하는 조직체의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천제를 보고 천기를 읽거나, 달력을 제작하는 역할도 하였고 예언가로서의 역할도 했으며, 병자를 고치는 치유술사에서 마법사의 역할까지도 하였습니다. 판타지 소설에 나올만 하죠.

캘트족의 멸망과 드루이드 죽이기의 시작

쇠락한 민족은 그 종교성도 의심받기 마련입니다. 기원전후를 기점으로, 로마가 유럽 북부지방까지 세력을 떨치면서 켈트족의 종교인 드루이드교도 심한 타격을 받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갈리아 지방 통제 정책으로 개별적인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황제숭배>와 <로마교>가 유럽 북부지방에 들어온 것이죠. 제우스신을 정점으로 한 로마교는 무당역할을 하는 드루이드의 이념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드루이드가 사교도로 규정된 것은 유명한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때 부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종교도 부정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크리스트교를 위한 유명한 저서인 <신국론>에서 <하느님> 이외의 신을 인정하는 이교도의 사제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생활에 대해 이전과 다른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교도들은 사람을 산 채로 묻어 죽인다던가, 심장을 먹는다던가, 난잡한 섹스를 즐긴다던가, 야만인같은 행위를 즐긴다던가 하는 내용들이 추가됩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문명인들인 로마인을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공포심>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종교의 근원을 <공포>라고 했듯이 교부 철학자들은 야민인들의 종교가 가진 <무서움>을 극대화하여 그 종교에 대한 반대 개념의 선으로 <크리스트교>를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로마 시대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던 아일랜드 지방의 드루이드 사제들 조차 <하늘과 지상의 연결자>로서의 신성한 권한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빼앗기고, 드루이드는 이제 <공포를 낳는 이교도>로 낙인찍혀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원시종교인 샤먼과 토템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원시 종교인 드루이드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드루이드에 대한 환상과 두려움의 양면성

중세시대 캘트의 문학을 미화하는 여러 작품들은 드루이드를 신화적 소재로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는 아일랜드와 브리튼, 캘트 전설에 종종 등장하는데, 그 신비함은 환타지적인 소재로 딱이었죠. 온라인 게임인 <와우>에 등장하는 드루이드는 자연 속에 은둔하는 판타지 속 신화의 존재로 등장하면서 드루이드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환타지 속의 드루이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루이드는 치유의 힘을 사용하여 밝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반면 강력한 어둠의 힘을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굴복시킨다고 표현합니다. 절대 선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설정이라는 것일까요?

반면, 중세이래 그리스도교, 특히 기독교에서는 드루이드를 마녀사냥의 도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사탄의 힘을 이용하는 심령술을 행하는 자, 악령을 부르는 제사의식을 행하는 자 등을 드루이드로 설정한 것이지요. 할로윈 행사에 등장하는 각종 기괴한 호박머리와 가면 등은 드루이드의 악마성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이용됩니다. 물론 드루이드 뿐 아니라 각종 초기 종교들이 중세 이래 <사탄의 종교>로 낙인이 찍혀 있기도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가 사람의 공포심을 극대로 자극한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드루이드를 닉인찍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류 종교의 반대 개념으로 역사에 묻힌 종교를 꺼내 <악마의 종교>로 낙인찍어 버리면 주류 종교의 신성함이 돋보이게 된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죠. 실제 <악마의 종교>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중세시대 교황에 대한 믿음과 의존도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드루이드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2가지입니다. 게임매니아들이 생각하듯이 재미있는 신화적 존재이자 즐길 수 있는 소재거리로서의 존재, 또 하나의 관점은 <악마의 속삭임>을 전해주는 오컬트 종교... 어느 쪽의 입장이던지 서구적 신화인 드루이드는 그냥 서구 사회 역사 속의 산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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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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