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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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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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3화. 정토종 : 정통 미륵에서 벗어난 아미타 부처

1. 복잡한 인도 철학을 벗어나 민중의 신앙으로...

자, 지금까지 우리는 중국으로 전파된 대승불교 철학을 살펴보았다. 위진시대의 불교 수준은 노자 사상으로 부처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인도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었던 <공>, <반야>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불교와 도교는 선후 논쟁을 벌였고, 그 결과 수, 당의 통일국가에서는 여러 종파 불교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에서는 많은 종파의 이념을 하나로 묶으려는 화엄종이 성행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은 모두 <공> 사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즉, 인도 불교의 참뜻을 알기 위해 철학적으로 불교를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 <공>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적으로 접근한 종파들을 묶어 <교종>이라고 한다.

<교종>은 민중들에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알았지만, 그 복잡한 <공> 사상을 민중들보고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인가? 책 한권 읽을 돈도 없고, 농사짓기 바빠서 경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는 이들에게 <교종>의 심오한 철학은 먼 나라 불교였다.

반면에 쉬운 교리와 민간 신앙을 융합하여 백성들에게 쉽게 다가서려고 노력한 종파들이 있었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정토종과 선종이 그것이다. 이 종교들은 어떻게 생겨나 민중속으로 파고 들었는지 볼까나?

2. 정토종에서 만날 수 있는 부처 - 아미타

원래 <정토, 선> 등의 용어는 대승불교의 수행방법일 뿐이었다. <선>이란 말 자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참선>을 뜻한다. <정토>란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말로 <정토>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강조한 용어였다.

<교종>이란, 정통 교리인 <공> 사상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종파를 말한다. 반면 <선종>은 체계적인 <수양방법>을 우선시한 종파를 말한다.

정토종은 넓은 의미에서는 선종이지만, 실제 다른 선종과 수양체계가 완전히 다른 독자적인 <정토사상>을 가진 종파이다. 오늘은 정토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정토종은 정토삼부경이라 불리는 3권의 경전에서 출발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

이 3권의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사상은 <아미타> 사상이다. 무량수경은 아미타 부처가 되기 전 인간이었던 법장 스님이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을 쓴 <드라마>이다. <아미타경>은 아미타불의 세계인 서방극락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 민중들이 아미타 세계로 가는 방법을 설명한 책이다. <관무수경>은 부처도 아미타 세계인 <정토>을 알고 있었으며, 비구니들에게 수행방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내용의 책이다.

그럼 이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아미타>는 누구인가? 아미타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있던 인도의 보살승 <법장>을 말한다. 법장은 부처가 되기 위해 서원을 세우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선행을 시작하였다. 부처가 되기 위해 세우는 서원을 <본원>이라 한다.

법장은 많은 중생들에게 착한 일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었으므로, 48살때까지 48개의 서원을 세웠다. 그 서원들이 곧 서방극락정토의 설계도가 되어 훗날, 아미타 세계의 10만억 국토가 된 것이다. 이 <서방극락세계>는 고통도 번뇌도 없다. 오로지 즐거움과 진리만 있을 뿐이다. 누구든 이 곳에 초대 받으면 끝없는 기쁨 속에서 살 수 있다. 기독교로 따지면 <영원한 구원>을 받은 것이랄까?

<아미타>란 부처의 이름도 <영원한 구원>을 뜻한다. 아미타(阿彌陀)는 원래 아미타바(Amitabha)라는 인도어의 발음으로 <무한>이란 뜻이다. 발음으로는 아미타로 번역하지만, 의미로 해석하면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이 된다. 무량수불이란, <무한 대의 수명을 가진 자>, 무한광불은 <무한 대의 밝음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자, 법장스님이 깨달음을 얻어 <아미타불>이 되었다. 그가 세운 낙원이 바로 <극락정토>이다. 그 극락정토는 서쪽으로 수천만의 불국토들을 넘어야 겨우 보이기 때문에 서방극락정토라고도 한다. 그런데, 극락정토는 하늘에 있는 도솔천과 달리 지상에 있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수양을 했고, 지금은 미륵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다는 <도솔천>은 어디일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중심을 <수미산>으로 보고 있다. 그 수미산에서 하늘로 12km 정도를 가면 도솔천이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는 법장스님이 48개의 서원을 세운 그 곳에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십만억불의 세울을 지나가면 보이는 것이다. 어짜피 살아 생전에 갈 수 없는 것은 똑같다.

그러나 죽은 뒤 극락에 가는 방법은 <도솔천>에 가는 방법보다 훨씬 쉽다. <도솔천>은 <고급 보살>들이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가는 곳이다. 즉, <공>이 무엇인지 알고, 선행을 많이 한 선택된 자들이 간다는 뜻이다. 도솔천은 확실히 <교종>적이다. 그러나, <정토>는 누구나 쉬운 방법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기본 인성이 있기에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극락에 가는 것을 <왕생>한다고 말하는데, 왕생(往生)이란,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다. 즉, 가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 죽은 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장 쉽게 가는 방법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염불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10번을 외치는 것이다.

3. 말법의 시대를 예고한 정토종의 종말 사상

정토종이 처음 등장한 것은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였다. 남북조 시기는 <공> 사상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 종파 교단이 성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반면, 백성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쉽고 빠르게 <천국>가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혼란기에 민중들이 <천국>가는 방법으로 숭배했던 것은 <도가>였다. 도교는 민중들 사이에 뿌리가 깊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은 도교의 신선술을 숭배했던 <오두미교>의 민중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전쟁에 지쳐 속세를 떠나고자 했던 청담 사상가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도 <도가> 이야기였다. 신비한 <도사> 이야기는 민중들의 시름을 달래주며, 새로운 세상의 희망을 주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도사들이 천살까지 수명을 누리며, 세상을 유유자적하며 산다는 이야기였다. 천살까지 수양을 마친 도사는 하늘로 올라가 구름과 학을 벗삼아 자유를 누린다. 얼마나 멋진 이야기인가?

남북조 시기, 또 하나 유행했던 사상은 <종말사상>이었다. 중국의 전통 종말사상엔 추연의 <음양오행가> 사상이 들어있다. 세상은 화,목,금,수,토의 오행이 돌고 돈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상극이 있다. 화(불)은 수(물)에 의해 제압당한다. 그러나, 수(물)은 토(흙)에 의해 제압당한다. 서로가 돌고 돌면서 상극을 이룬다.

그것을 정치에 도입하면? 앞 왕조에 상극인 새로운 사상의 왕조가 탄생한다. 그러나 왕조의 종말이 되면 또 다시 상극인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 세상은 돌고 돌며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음양오행에 의한 종말 사상은 한계가 있다. 우주가 계속 돌고 돈다는 원리를 지향히기 때문에, 영원한 종말과 평화는 오지 않는 것이다. 이 한계점을 메운 것이 도교와 불교이다. 도교에서는 왕조가 몰락하고 민중의 세상이 오면 도법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말한다.

남북조의 혼란기, 불교는 종말 사상을 <말법사상>으로 체계화시킨다. 말법사상은 불가의 역사를 3단계로 나눠 인간의 종말이 있다는 것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불법이 체계적으로 잡혀가는 시기를 <정법의 시기>, 불법이 유지되는 시기를 <상법의 시기>, 불법이 사라지는 시기를 <말법의 시기>로 분류한다. 원래 3법의 시기를 나눈 것은 철학을 논의하던 <교종>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토종은 이 말법 사상을 확대하여 <불교식 종말 사상>으로 바꿔 버린다.

자 그럼 정토종의 종말사상을 한 번 볼까?

말법시대는 불법이 사리지고 무법천지가 되는 세상을 말한다. 무법천지의 세상에 무슨 경전이니, 말씀을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믿음> 뿐이다. 믿음의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에 부처가 있고, 인간이 부처가 되겠다는 믿음만 있다면, 불법이 있고 없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믿음>이 있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믿음이 없는 자는 불법이 사라지면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 누구에 대한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인가? 바로 <아미타>인 것이다. 인간으로서 태어나, 인간을 위해 살다가, 인간을 위해 지상 세계에 천국을 만든 이가 아미타이다. 멀리 있는 천국, 어려운 경전을 공부해야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니라 모든 <인간 부처>들을 위해 10억만 국토를 준비한 아늑한 천국이 지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락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려운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명호를 계속 되새기면서 극락을 꿈꾸는 것이다. 아미타의 후배가 관세음이기 때문에, 아미타 신앙과 아미타를 도와 지상에 온 관세음도 믿음의 대상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것이 민중들을 끌어모은 정토종의 가볍고도 명쾌한 불교 진리인 것이다.

4. 미륵과 미타는 뭐가 다를까?

불가에서는 미륵이 인도의 4세기 경에 실존한 인물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증거는 없다.) 미륵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유식철학의 시조이다. 전통 대승 철학에서는 공사상과, 반야(지혜) 사상을 가장 중요시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철학을 <공부>하라는 것이다.

미륵은 그 철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지상과 하늘 사이에 있는 도솔천에서 보살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의 제자인 무착은 삼매경에 빠져들어 미륵을 만났고, 그 때 미륵보살은 훗날 민중을 위해 내려올 것이란 믿음을 말하였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미륵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올 것이다.

원래 세상에 내려와 정의(정법)을 실현하고 민중을 구원할 패왕은 전륜성왕이다. 그 때 미륵은 성왕의 오른팔로서 어려운 세상의 민중을 구원한다는 것이다. 즉, 미륵은 <구원자>인 것이다. 기독교로 따지면, 예수와 같은 존재랄까?

미륵 신앙은 백성들에게 하늘에 있는 <절대자>를 떠올리게 했다. 백성들은 스스로 부처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거나 포기했다.

미륵 신앙은 왕과 귀족들이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국왕이 전륜 성왕이라면, 신하인 귀족들은 미륵이다. 왕은 곧 부처요. 왕에 대한 충성이 곧 <구원>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특히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는 수많은 국가에 국왕이 있었고, 불교의 미륵 신앙은 왕권 강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불교가 본 뜻을 주장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면 국왕은 불교를 금지시키는 <폐불>을 일삼았다. 불교, 도교, 유교라는 종교의 세력 균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불교의 심오한 참뜻이 이해되면서 미륵신앙의 정치적 이용도 줄어들었다. 대신에 지배층이 직접 하늘로 올라간다는 새로운 미륵 신앙이 생겨나기도 한다.

위진남북조 시기에 미륵이 구원하러 내려온다는 사상을 <하생 미륵신앙>이라고 해보자. 통일국가인 수, 당 시기에 미륵이 되서 올라간다는 사상을 <상생 미륵신앙>이라고 하면 되겠다.

<상생 미륵신앙>은 불교의 참 뜻을 이해하면서 생긴 기이한 현상이다. 지배층은 스스로가 미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현생의 보살>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마음을 닦고 수양을 하면 훗날 미륵이 되어 <도솔천>에 올라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층>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일반 불신도들은 귀족들이 <보살 출신>이라고 믿어야 했다. 어찌되었던 <교종>의 철학은 지배층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민중들이 직접 부처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될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준 것이 바로 <미타신앙>이었다.

귀족들처럼 경전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불교 철학이 뭔지도 모른다. 그냥 <마음> 자체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 <나미아미타불>을 외치면 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을 10번 외우라>는 구절이 있다. 이 10번의 정성스런 외침이 반복되면 <극락정토>의 문이 열린다. 아미타는 10억단위의 극락을 준비해놓고 모든 민중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요즘으로 따지면, <우리 행복하게 잘 살께요>만 외치면 모든 국민에게 아파트 무료 분양을 해주는 것과 같다.

마음을 염(念)이라고 한다.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하는 것을 염불(念佛)이라 하며, 염불을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를 세는 도구를 염주(念珠)라고 한다.

<교종>의 핵심이 경전이라면, 정토종 미타신앙의 핵심은 염불과 염주이다.

염불을 대중화한 사람은 정토종을 종파로 일으킨 수나라의 도작이다. 도작은 <아미타불>을 얼마나 말했는지 콩을 세면서 잊지 않도록 했다. 나중에는 염주를 만들어 염불의 횟수를 세면서 마음을 가다듬도록 했다. 원래, 염주는 초기 불교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도구이다. 초기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의 번뇌를 잊는 수양법으로 염주알을 세도록 했으나, 본격적으로 염주를 중요시 한 것은 정토종부터이다.

5. 정토종을 이끌어 간 사람들.

중국에서 미타신앙을 이끌어간 사람들을 알아보자.

본격적으로 미륵, 미타 신앙이 알려진 것은 위진시대 <도안>부터이다. 도안 이야기는 8장에서 다루었다. 도안은 노자와 부처를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불교 수준을 한심하게 여기며,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중국인들은 미륵신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도안은 <노장사상>에 있는 <제천사상>을 <제석천>과 결부시켜 미륵 신앙을 강조하였다. 격의불교와 종파불교의 중간쯤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도안의 제자인 혜원은 미타신앙으로 돌아선다. 미륵이 머무는 근거지인 <도솔천>보다 <서방극락정토>가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백련사라는 염불 결사 단체를 만들어 아미타불 앞에서 염불을 외웠다.

그러나 혜원의 백련사는 그들만의 염불이었다. 아미타 신앙의 사상적 체계는 남북조 북위의 <담란>에서 시작된다. 정토종의 시조인 담란은 염불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번뇌가 없는 무아 상태에 이르고, 그 상태에서 아미타불을 외치면 훗날 극락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초기 도작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정토에 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사회에서 백성들을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종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작의 생각을 정리한 사람이 제자인 선도이다. 선도는 염불을 외우고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들었다. 극락정토에 가기 위해 미타불에게 공손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정토종의 간략한 수행방법과 예배 의식이 만들어졌다.

이 수행 방법에서 한가지 더해진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철학인 <나눔>이다. 염불을 외워서 자기 혼자만 극락에 가면 소승불교랑 다를 바가 없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만민의 구제이다. 따라서 선도는 수행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이며, 수행에는 서로간의 예절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서로의 수행 상태와 성취감을 서로 공유하고, 그 아름다운 공덕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로서 정토종은 민중적 불교 사상으로 토대를 잡았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가지 논쟁이 발생한다. 아미타불만 외치면 민중들도 극락에 간다는 정토종 사상과, 누구나 <즉시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사상은 그 본 뜻이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이질적인 사상인가?

정토종 사상이 확립된 당나라 이후, 정토종은 선종과 최고 <선> 자리를 놓고 논쟁에 들어가게 된다. 그것은 수양방법상의 논쟁이었다. 아미타불에게 수양하는 것과, 좌선과 명상으로 수양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자, 그럼 다음 장에서 선종 이야기를 해보자. 선종의 역사적 배경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정토사상과 선 사상이 같은 것일지 다른 것일지 이야기해 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아미타경 사경 및 해설(상)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정여 (혜성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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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을 꿈꾸다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지은이 김정희 (보림,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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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모든 것을 이루는 힘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원영 굉오 (불광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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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정토에 왕생하는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이태원 (운주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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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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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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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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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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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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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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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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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0화. 천태종과 화엄종의 라이벌 1라운드

1. <교> 사상에 치우친 삼론종 이야기

위진남북조의 길고 긴 혼란기가 끝났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모든 국가 체제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이민족과 한족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하려고 했다. 대운하를 건설하여 강남의 경제권을 북방으로 끌어오려고 하였다. 사상 역시 통일되고 있었고, 불교의 수많은 학파들도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고 있었다. 수나라의 통일된 불교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태종>이었다.

천태종은 불교 각각의 종파 특징을 하나로 아울려 통일하려고 하였다.  <교>와 <관>을 통일한다는 것이다. <교>란 가르침, 즉 지식을 말한다. <관>이란 깨달음과 실천을 말한다.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와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파는 같은 불교라 해도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태종은 <교관일치>를 주장하여 각 종파를 하나로 끌어안으려 했다.

먼저, <교>를 강조하는 종파를 한번 볼까?

혼란기 중국의 불교 학파는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구마라집의 영향을 받았다.(8-9화 참조) 최고의 고승이라 불리는 구마라집이 다양한 불경을 해석하여 다양한 학파가 탄생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존재론>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파가 <성실학파>이었다. 그러나, 구마라집의 정통 제자인 승조는 <공> 사상은 심오한 사상이기 때문에 <존재를 분석>해서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성실학파>는 구마라집이 아끼던 제자 승조에게 비판받게 된다.

승조는 <공> 사상 자체의 심오한 뜻을 인도철학인 <반야> 자체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삼론학파>는 <삼론종>으로 발전하였고, 주변국에 전파된다. 고구려의 <승랑>은 삼론종에 정통하였고, 안식국의 <길장>은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원래 <삼론>이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이라는 3가지를 지킨다는 뜻이다. 삼론종의 핵심 사상은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인도의 <공 사상 체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공>이 무엇이지 파악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 언어에 집착하는가? 말이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편안한 상태가 <공>인 것이다. <공>은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와 논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허무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다.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과 실체가 없는 것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없는 것이 되며, 생성된 것은 어느 순간 죽는다. 결국 만물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하나를 집착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 조차 버리는 것이 바로 <중도>이다.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 : 탁자의 모서리>인 것이다.

결국 삼론종은 인도 대승불교의 <공>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공>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하려고 한 <성실종>을 논리적으로 때려부순 것이다.

그러나, 삼론종은 큰 약점이 있었다. 첫째, 인도 불교 사상을 이해했으나, 중국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철저한 인도 불교의 <공> 사상을 이해한 것은 좋았으나, 그것이 중국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그 고민이 부족하였다.

둘째, 너무 학문적이다. 지식체계는 훌륭하다. 그래서??? 그 다음이 없다. 지식은 곧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들까리 지식을 공유했다고 해서 훌륭한 불교 종파가 될 수 있겠는가?

셋째, 국가에 도움이 안된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는 교리가 통일한 수나라의 전제왕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성실종과의 지식 논쟁에서 훌륭하게 이긴 삼론종이 허무하게도 천태종에게 흡수당한 것은 당시 통일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훗날, 삼론종은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 시기엔 삼론종의 이론이 먹히지 않았다.

2. <선> 사상에 치우친 열반종 이야기

열반종은 지난 장에서 이야기(8화)한 도생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구마라집의 수제자였던 도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중국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럼 도둑놈도 죽기 전에 깨달음만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인가? 도생의 이론은 범죄자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기존 <불가론자>들에게 탄압받았다.

그러나, 법현 스님(7화)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14년간 서역을 유랑하며 구해온 <대열반경>에는 어떤 사람이나 부처가 될 <인간성>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도생은 자신의 불성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종의 <불성 이론>은 천태종의 기본 이론으로 정착된다. 천태종은 누구나 마음을 갈고 닦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열반종은 개달음과 지식의 두 가지를 동시에 공유한 천태종에게 흡수당하게 된다.

3. <지의>의 교, 선 일치

천태교의 시조는 지의이다. <지의>는 법명이고, 천태산에서 수양을 하여 <천태대사>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시호로 <지자대사>를 내렸기 때문에 다양하게 불린다.

지의는 남북조시기 양나라에서 태어나서 7살때 불가에 입문하였다. 남북조의 전쟁시기에 그가 했던 일은 <구걸>이었다. 구걸하고 걸식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탁발승>이라고 한다.

그는 23살 때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석가의 세계에 들어가 버렸다.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졌으나 꿈은 아니며, 천년 전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는 석가모니가 법회를 여는 장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리를 체험하는 것을 <삼매경>에 빠졌다고 말한다. 법화경에 빠져 과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법화삼매>를 체험한 것이다.

법화삼매는 꿈이 아니다. 꿈과 비슷하지만, 실체 과거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심령현상을 이용하여 신통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른다.

천태종은 지의가 공부한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일승론>이다. 초기 대승불교는 글을 읽는다는 <성문승>, 깨달음을 얻는다는 <연각승>,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보살승>으로 나눠 이것을 <3승>이라고 했다.

법화경에는 이 3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결국 글을 읽던(지), 깨닫던(관) 간에 결론은 부처가 되려는 것 아닌가? 결국 3승은 모두 <수행승>인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들이 <보살>이므로, 모든 스님은 <수행승> 또는 <보살승>으로 통일하여 1승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식과 깨달음은 하나이기에,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종파>인 것이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한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핵심이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인 것이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지식)이던, 관(깨달음)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삼제원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이라고 주장한다.

4. 화엄인가, 천태인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대승불교 경전이 가장 부처의 말씀과 일치하는 가를 놓고 순위싸움을 하였다. 이것을 <교상판석>이라고 한다. 이건 각 불경을 중요시하는 종파간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위세를 자랑하던 종교는 천태종, 화엄종, 열반종, 성실종, 삼론종이었다. 그러나, 아까 말했던 성실종, 삼론종은 천태종에 흡수당했으니 제외하자.

일단, 인도에서 전래된 <공>사상의 핵심인 <반야경>은 무조건 1등이다. 부처의 진리 자체가 들어있는 경전인데 어디 순위를 매기는가?

그럼 2등이 무엇인가가 싸움의 핵심이다. 천태종의 <법화경>, 화엄종의 <화엄경>, 열반종의 <열반경>이 순위 다툼에 들어갔다. 그런데, 열반종도 천태종에 통합될 정도로 세력이 약하니 4등으로 내려주자.

남은 것은 천태종과 화엄종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쉽지가 않다. 이 두 종교는 모두 통일 종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일된 수나라에서 종교 통합을 이룬 천태종과, 수나라 이후 당나라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화엄종은 모두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한 학파이다.

두 종교는 모두 지관일치, 즉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깨달음을 얻는 <대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불성논쟁>이었다. 화엄종과 천태종은 둘다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는 <도생>의 열반 철학을 인정하였다. 화엄종은 딱 <인간>까지 불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태종은 거기서 더 나간다. 만물은 돌고 돈다. 모든 사물은 훗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른다. 따라서 풀과 나무,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으므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고, <돌맹이> 조차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에서는 <인간>만이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성>은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의 문제이므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면 불성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오점오>의 문제였다. 화엄종의 <화엄경>은 <돈>를 강조한다. <돈>이란 깨달음을 뜻한다. 문득 깨닫음을 얻은 뒤 진리를 알았다는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 화엄경이었다. 반대로, 법화경은 <점>을 강조한다. <점>이란 <점진적>이란 뜻이다. 즉, 깨달음을 얻는 과정 속에서 부처를 만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럼, 깨달음의 과정과 깨달음을 안 기쁨 중 어떤 것이 우선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야 두 종교의 우위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셋째 두 종교의 차이는 <부처>의 품성 문제였다.

흔히 두 종교는 모두 <바다>에 비유된다. 다른 종파들이 물고기, 게, 미역 등 바다에 살아가는 종파라면, 화엄이나 천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바다> 자체이다. 다른 종파가 지식, 깨달음, 수행법, 율법 등 하나를 강조한다면 화엄과 천태는 모든 것을 강조하는 통일 국가의 통일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를 구성하는 물이 문제이다. 화엄은 모든 것은 형태가 변하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같다고 말한다. 바다의 물이 있다. 물은 물방울도 되고, 파도도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물이다. 따라서 어떻게 변해도 결국 물인 것이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의 <본질>은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고 말한다. 물이 화가 나면 파도가 되고, 물이 갈라지면 물방울이 된다. 본질과 별도로 물의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의 품성 논쟁으로 전개된다. 화엄에서는 <물>의 본질은 결국 깨끗한 물이므로 <부처>는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도 성난 파도가 될 수 있으므로, <부처>도 태어날 때 가진 악한 품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악을 누르고 선을 실현했기 때문에 더 위대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화엄종의 논리는 부처은 이미 성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악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태는 성불한 부처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악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종교는 이론논쟁을 계속하였다. 수나라 시기에는 <천태종>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로 넘어가면서 천태종의 힘은 약해진다. 강력한 국왕이 다스리는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돌맹이에 불성이 있다>가 아니라 <부처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천태종은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역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천태종은 맹렬한 기세로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천태종과 화엄종은 라이벌로서 2라운드를 전개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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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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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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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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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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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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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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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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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시간 구조대. 4: 붓다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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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 석가모니:그 생애와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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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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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담마빨라 (열린경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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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2화. 아리아인의 시대와 인도 초기의 종교들

1.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든 것이 아닌가?

자,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 역시 크리스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열망>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인간들의 이야기이듯, 신과 종교의 탄생 역시 인간들의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 내린 <고난>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일 수도 있다. 신과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가 확립되는 것 역시 당대의 <사회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여호수아>의 강림을 바랬던 열망은, 철기 시대에 접어오면서 심해진 핍박 때문이었다. 지금 인도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종교 역시 당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홍수나 번개 등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많은 열망들이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그럼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라는 나라의 종교부터 한번 살펴볼까?

2. 초기 인도 원주민들의 신앙

인도 지방의 초기 문명을 흔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초기 문명에 대해 우리는 약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곧 인도 문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틀렸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철기 시대 이전에 등장하였다. 인더스 문명 역시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 체계가 없었던 초기 문명 시대였다. 문명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생길리는 없지 않는가?

기원전 2500년경 등장한 최초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가>의 작고 초라한 문명을 말한다. 천년간 계속된 이 문명은 작은 도시국가 단위의 문명이었다. 우리가 고대 문명 유적지로 말하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문명은 국가 문명이 아니라 작은 도시 문명을 뜻한다.

<초기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

이 문명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토착민인 <인더스인>들이었다. 인더스 인이란, 최초로 인도에 거주한 <드라비다인, 문다인> 등을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문명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성곽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홍수를 대비한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들이 우선 만들어진 것은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이었다. 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제공하면서도, 큰 홍수 한방으로 주변 문명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최초의 원주민들은 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항상 홍수라는 큰 변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초기 원주민들은 큰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목욕탕은 물(강)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큰 곡식창고를 만들어놓고, 커다란 범선을 이용하여 주변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던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숭배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생식기였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의 <정자>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미 존재했었다.

<모헨조다로
족장집에서 나온 동상>

<모헨조다로의 춤추는 소녀상>

<하라파에서 나온 인장과 유물>

<하라파의 공동 시설물>

<하라파의 주거지>

<하라파의 사원>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흔적>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모헨조다로의 목욕탕과 배수시설>

3. 청동기 민족을 정복한 철기인들

크리스트교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세기라고 했었다. 기원전 12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이유는,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줜 13세기무렵 히타이트 인으로부터 시작된 철기 문물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인도에 내려온 철기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아리아> 인들이었다. 아리아 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히틀러는 순수한 <게르만>인은 <아리아인>의 핏줄이라면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히기도 했었다.

반면,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들과 충돌하였다. 청동기 문명의 백성들이 철기 부족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인더스 강 유역(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땅을 찾아 끝없이 진출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갠지스 강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 시절의 수많은 부족들이 이들에게 굴복하였다. 인도에 진출한 아리아인들을 유럽의 아리아인들과 구별하여 <인도-아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인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화려한 도시 국가를 건설한다. 아리아인의 부족 족장은 <라진 : rajan)이라고 불렀는데, rajan은 <종교 : region>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아 인의 국가는 농경을 주로 하는 철기 국가였는데, 수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각각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부족의 <신> 역시 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리아 인들은 정복민만 노예로 삼았을 뿐, 각 부족간의 전쟁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5세기 까지는 이런 부족단위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족간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전쟁을 참았기 때문에, 아리아의 각 부족들이 믿는 신은 모두 평등했다.

초기 아리아인의 브라만교를 보면 하늘, 지상, 공간의 3 구역에 모두 33명의 신(데바)이 있었다. 이 33명의 신은 모두 평등하다. 결국 33명의 자연신이 훗날 브라만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는 이 33명의 자연신을 찬양하는 찬양가와 기도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원래 <베다>는 <지식을 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것은 33명의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신관>은 당연히 최고 지배층이었다.

<베다>는 500년간 계속 이어진 찬가들을 모으고 모아 4개의 찬가집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기원전 900년경에는 거의 정리가 끝나간 듯 싶다. 이 찬가집인 베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찬가 자체는 <본집>으로 정리된다. 제사를 위한 찬송가 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제사 규칙을 적어둔 <브라흐마나>가 있다. <브라흐마나>를 알고 있는 자는 <신>과 접촉하는 자로서 지배층이 된다. 다음으로 숲속의 비밀을 적은 <아란야카>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우파니샤드>가 있다.

물론, 베다 자체에 이 4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다>는 이 4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진정한 베다로 인정된다.

4. 바르나 제도의 엄격함

브라만교의 근본 철학은 <우파니샤드>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이 완성된 것은 베다가 완성되고 한참 후인 기원전 5세기 경이다. 즉, 베다 문학보다도 400년 정도 이후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굳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관>은 최고 계급이고, <노예>는 마지막 계급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끝이다. 뭐하러 복잡한 철학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겠는가?

<브라만의 모습 : 알타이 벽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 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브라만교의 철학을 위협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만든 아리아인들은 사회 계급을 4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신>이 나눈 것 처럼 행동하였다. 즉, <제사> 규칙을 아는 자들이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된다. 브라만은 곧 신이거나, 신의 대리자이다.

왕족과 귀족은 브라만보다 낮은 제 2계급이다. 2계급은 정치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크샤트리아라고 부른다. 일반 백성들은 3계급이며 바이샤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원주민들은 <노예>계급으로 수드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4계급으로 사회를 나누고, <바르나> 제도라고 불렀다. <바르나>란, 색깔을 뜻하는 단어이다. 원래 아리아인이 유럽인과 같은 계통인 백인이기 때문에,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과 구분하기 위해 바르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도의 신분 제도를 <카스트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쓴 말이다. 카스트란, 바르나 제도의 4계급에서 계급마다 <출생> 족보를 따져서 수많은 계층으로 다시 분화한 것을 뜻한다. 즉, 직업, 결혼관계 등을 따져 여러 종족(종성)으로 분화되는데, 이것을 카스트(종성)이라고 다시 부른 것이다. 카스트는 바르나와 쟈티(JATI : 출생)이란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카스트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로 지금 인도의 신분계층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할까?

   지금 말하고 있는 제도는 21세기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고대 4계급이 존재했던 바르나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바르나>제도의 특성은 철저한 신분 차별에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자체를 막아 버렸다. 제사계급과 아리아인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2계급(크샤트리아)이 제 1 계급인 브라만의 권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철기시대의 보편적 현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작은 부족들은 큰 부족에게 통합되었고, 중앙집권국가의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 부족간의 전쟁과 부족간 통합은 물자 부족을 가져왔고, 3계급인 바이샤들이 상공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계급은 통일된 국가가 필요했다. 커다란 국가에서 통일된 상업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통일은 다양한 관세나 규제 등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기도 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보다 국제적 무역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정복사업과 상공업의 발전은 2,3 계급이 브라만 계급에 도전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드디어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왜 브라만이 위대한지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만 족들은 급해졌다. 왜 브라만이 지배계급인지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브라만은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우파니샤드 철학을 실제 사회에 맞는 철학체계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비로소, 브라만교의 걸맞는 사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5. 우파니샤드 철학의 <업그레이드>

브라만교의 철학인 우파니샤드는 <신관>들이 자신의 제자들엑게 입으로 전하곤 했다. 즉, 그들만의 구전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 철학은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어 <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 철학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철학의 기본 사상들의 영향을 받거나 반발하면서 석가모니의 <불교 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알다시피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제 2계급인 왕족이었다. 1계급의 독주를 막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 2계급인 석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 그럼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한 번 살펴보자.

이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인성의 일치>이다.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그 브라만은 개인의 인성(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원래의 아트만은 myself라는 재귀대명사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인간은 우주의 법칙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데, 우주에 음양오행이 돌듯이, 인간 역시 끊임없이 돈다. 만약 착한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음 세상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난다. 즉, 브라만이 제 1계급인 이유는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생까지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대표적인 윤회설로는 <오행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은 자는 흙과 물이 된다.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흙을 적셔주면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흙과 물이 만나 곡식을 이루고, 남과 여는 그 곡식을 먹는다. 남자가 먹은 곡식은 정자가 되고, 여자가 먹은 곡식은 아기집이 된다. 정자와 아기집이 다시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즉, 개인의 생명(아트만)은 죽은 뒤 우주의 법칙(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윤회하여 생명(아트만)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브라만으로, 나쁜 일을 하면 수드라로 윤회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회의 예외로 <신도>가 있다. 신도란, 신의 길로 가 버린다는 뜻이다. 윤회의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이 숲속의 비전을 찾아 산 속으로 숨어 버리면 윤회하지 않고 <신의 영역>으로 가 버린 다는 것이다. 이미 윤회를 알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을 <업>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브라만이 잘난 것은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이고, <신>의 세상에 가는 것도 브라만 뿐이라는 것이다. 전생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드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수드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철학은 브라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철학이었지만, 다른 계급의 반발을 불러오는 철학이기도 했다. 자, 그럼 2, 3계급이 어떻게 우파니샤드에 대해 반항했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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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할 만한 책들

영혼의 스승들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게하르트 베르 (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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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오브 미스터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김기태 (판미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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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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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태승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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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서문. 넌 대체 어느 지역의 종교니?

1. 시작은 인도였지만, 그 끝은 우리 이니라...

불교의 역사를 간략히 적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우린 불교의 창시자가 석가모니라고 알고 있다. 그는 인도 어느 부족의 왕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종교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숭배하는 신이 뭔지 딱히 알기가 어렵다. 본인이 성불한다고? 뭐, 불교에서 신은 여러 가지 있지만,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주신은 누군지 모르겠다.

그럼, 불교는 종교야~ 사상이야?

우리가 불교를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역사> 때문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종교이다. 비록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무제 때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삼국시대 성립기 쯤 우리 역사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종교가 아닌데다가 그 사상이 심오하고 철학적이여서 종교 성향을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에, 아주 쉬운 교리로 대중들 사이에 빠르게 파고 든 종교도 불교이다.

그럼, 불교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아주 옛날 인도의 공화국 시대부터 출발한다. 석가모니는 왕자출신으로서 인도의 <공화정>을지지하는 부족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훗날 하나의 종파를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전파된 종교는 딸랑 <불교>였다. 어느 종파, 어느 사상체계가 아닌 불교 자체가 들어온 것이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 불교의 <참뜻>이 뭔지 알기 위해서 중국인들은 나름대로 끝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결론은 없다. 왜냐구? 그들은 석가모니를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결국 중국인들은 직접 석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찾아 <인도>로 떠난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인도로 불법을 찾아 떠났다나 말았다나.... 뭐 그런 이야기들이 유명하다.

삼장법사는 결국 책을 찾아왔다. 번역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번역서들을 보면서 더욱 고민에 빠진다. 화엄종, 법상종, 법성종, 계울종, 선종.... 뭐 저리 많어? 석가가 말한 참뜻은 이중에 뭐여?

중국도 당황하고,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도 당황한다... 뭐, 참뜻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왕>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선다.... <왕이 곧 부처다....> 불교의 참뜻을 많이 알수록, 불교는 정치에 덜 휘둘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오랜 세월 동안 불교는 왕권에 밀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불교 이야기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걸친 불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이 종교가 어떻게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종교적 관점이 아닌 역사적 줄거리로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적 줄거리로서 불교를 설명하다 보면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화는 전체 줄거기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자, 그럼 석가의 시대부터 한번 출발해 볼까? 이 이야기는 2009년이 시작되면 적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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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 -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은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과 이견이 많고, 사람들간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라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글을 쓰기가 어렵네요. 3편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적으면서 각 편마다 약간의 다른 관점들을 제시해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편은 동학의 초기 활동, 2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3편은 3.1운동기까의 동학활동과 동학운동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제 글재주로 어디까지 명료하게 적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설과 정설에 의거해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적어볼께요.

1. 동학이 밝음을 주장한 것은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1859년경입니다. 동학의 교조(교조 : 종교창시자)는 수운 최제우 선생입니다. 최제우는 백성들이 세도 정치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민중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어느 선인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그럼 동학이 창시된 배경을 하나 하나 볼까요?

동학이 창시될 무렵의 185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흔히 이것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삼정이란 백성들에게 걷었던 조선 후기 세금의 통칭으로 토지에서 걷는 전세, 군포를 내는 군정, 곡식종자를 빌리고 이자를 내는 환곡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제도는 일정한 기준이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였습니다. 전세는 일정한 기준없이 많은 세금을 걷는 남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정은 원래 군대를 가야할 사람이 군포 1필을 내면 일정기간 동안 군을 면제해주고, 대신 납부(대납)한 군포로 직업군인을 모집하는 모병제가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법을 확립한 것이 영조 때의 균역법이었죠.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군포는 1필만 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 문란한 사회에서의 탐관오리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군포를 더 많이 걷어갑니다.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여 군포를 걷기(백골징포), 16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군포걷기(황구첨정), 이웃에게 대신 군포를 받기(인징), 친척이 대신 내기(족징),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라 호적을 속여 군포를 걷기 등등 이였죠.

환곡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래 환곡은 춘궁기 때 쌀이나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 때 돌려받는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이자를 받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반중 손실분이나, 곡식 종자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의 손실비용만을 이자로 받는 <일분모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백성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이자를 받았죠. 하지만 조선말기 사회가 어려워지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가자 지방 관리들은 이 환곡을 고리대처럼 이용하여 아자놀이를 시작합니다. 요즘 사채 광고의 이자 66%는 이 때로 보면 애교일 정도입니다. 고려 시대 이래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면 더 이상은 받지 말라>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원금보다 비싼 이자를 받았고, 빌리지 않겠다는 사람을 협박하여 거액의 이자로 대출을 해주기도 합니다. 거짓 장부를 만들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렸다고 하고, 대출금의 담보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잡아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군전(군역세)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세금담당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 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균전사 : 토지세 관리자)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보조 사무관)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참고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 오하기문 -

이러한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량을 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 쪽으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의적단을 만들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이란 종교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종교였습니다.

2. 동학이 받아들인 사상들

1860년대 조선의 상황은 탈선 직전의 사춘기 학생과 같았습니다. 서양의 열강들은 이양산을 보내 조선과 통상을 하자고 성화였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청이 서양열강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같이 하기엔 너무 멀리간 나쁜 친구>라는 표현으로 멀리하였는데, 이 때 조선은 스스로 어떤 성장의 길을 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망국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동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의 근간을 <유교에서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유교의 경천사상이란, 성리학이나 고증학 같은 신유교가 아니라 중국 고대 한나라의 훈고학이나, 더 멀리 중국 주나라 때의 이상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유교 사상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중국 고대 사상 중 천자가 하늘과 감응한다는 동중서의 <천인상응론>과 같은 <하늘, 사랑, 애민> 등의 이론을 그 사상의 근간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전통 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하늘, 사랑>의 이념을 도입합니다. <부처>가 주장한 인간 평등사상, 민간에서 말하는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한 하늘과의 만남> 등이 모두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종래의 모든 전통사상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경전으로 작성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개편한 사상이 곧 동학인 것이지요.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천주교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인간평등과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기에 최제우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수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동학에 들어가 있는 사상은 놀랍도록 방대하고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조선 후기 집권층의 사상인 주기철학에서의 개방성도 수용합니다. <이가 불변한다는> 주리론보다는 <기가 가변적이라는>주기철학이 보다개방적이죠.

주역에서의 시세와 오행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국 고대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정리하고 한대 유학을 정리하면서 완성하였던 개념입니다. 천자와 하늘이 감응하고,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이며, 오행은 순행한다는 중국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이죠. 동학에서는 이중 우리 현실에 적합한 사상인 <시류에 따른 오행의 순행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변화는 순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입장이었죠.

동학에서는 종래 샤먼적인 귀신신앙과 예언을 중심으로 한 도참사상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예언적인 도참사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무당신앙, 귀신신앙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되어 동학의 사상을 현실개혁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예언사상은 조선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였다는 운수사상과 연결되는데, 이 운수사상은 오행의 순환에 의해 화-목-수-금-토의 순환논리 상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오행순환설과 연결됩니다. 모든 전통신앙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중국에서 말하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는 아니였습니다. 최제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이었죠. 이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꿈꾸는 사상이었습니다. 동학의 새로운 세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고(인내천), 모두가 평등하며(만민평등), 침략적인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를 보호하며(보국안민),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감싸안는(제폭구민)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후천개벽),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알리는(광제창생)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현세의 문제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적 성격을 띈 것은 교리 자체부터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동학은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반봉건적 운동), 우리의 자주적 개혁을 방해하는 침략적인 외세를 규탄하는(반외세적 운동) 운동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의 교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시된 것이 1857-59년 사이이고, 교조인 최제우가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죽은 것이 1864년이므로, 동학이 등장에 정부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최시형이 동학운동을 마치고 눈을 감을 무렵의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동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해월(2대 교주 최시형)에게 물었다. "개벽이 언제 이루어지리이까?"

해월은 말했다. "산이 검어지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의 병마가 이 땅에 왔다가 물러갈 때니라."

아래의 글은 1863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2대 교주를 최시형으로 임명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을 교주로 임명하고, 1년 뒤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합니다. 아마 이 때 이미 최제우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으나 오히려 힘이 있나니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3. 동학의 체계를 확고히 한 최시형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미처 기틀도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30년 이상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인물입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펴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전이 2권인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처럼 시대가 달라서가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2원화하여 동학의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동경대전은 성리학을 공부한 어느 정도 지식있는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와 일화를 수록하여 작성하였죠. 그러나,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시조, 창가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책과 대중가요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도 2원화하여 체계적인 틀을 잡습니다. 흔히 말하는 포접제(抱接制)가 그것이죠. 동학에서는 촌락마다 포라는 조직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동학의 최고 수장은 교주인데, 그 교주 아래에 향촌마다 포가 있어 그 포의 소교주를 대접주라고 합니다. 또 대접주 아래 향촌 말단 사회인 <면, 리>에는 접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교황 - 교구(대사제) - 사제로 이어지는 교구제와 비슷하네요. 교구제와 포접제의 공통점은 종교적 위계단위가 국가행정구역의 단위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단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동학교단은 국가 행정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봉기할 때에는 동학의 지휘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것이지요. 또 대규모의 봉기가 있을 경우에는 포접제를 통하여 농민군이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대 이 포접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치를 하는 <집강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포접제를 통해서입니다. 실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였을 때 포접제를 통하여 전라도에 53개의 민정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이 집강소가 지방 행정과 치안의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4. 동학운동이 점차 정치운동화 되어가다.

최제우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하여 처형된 후, 1860년대의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 차원의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이 현실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종교운동적인 특징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최제우가 죽은 이후 교단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1862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임술농민봉기 이후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지휘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은 그것에 적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63년부터 10년간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을 괴롭힌 원흉인 세도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에게 동학이 굳이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들의 1순위 요구인 환곡의 폐단 등 삼정의 문란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대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이 시작되자 동학교단에서는 정치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 것은 흥선대원군기 이필제의 난 부터입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출신으로서 자신과 같은 몰락양반들과 함께 군현단위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성격이 다른 민란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민란이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교조신원운동을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면, 이필제의 난은 지방관아를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는 반국가적 반란이었습니다. 이필제는 자신이 백성을 구원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이 <정감록> 등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인물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이필제의 난은 이필제 외에 곳곳에서 동지들이 같이 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 밀고로 실패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이필제 뿐이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종교 재건작업이 한창인 때에 정치적 변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필제의 주장에 설득되어 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성공하여 경상도 일부를 점령하고 관청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란에 의아해하는 농민들은 이 난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이 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필제는 죽었고, 최시형은 이렇게 지식인 중심, 몰락양반중심의 정치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후 동학의 정치 운동은 철저히 농민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880년대 최시형은 개화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묵묵히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써갔으며, 포접제, 용담유사의 간행 등으로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계속 진행합니다.

1890년대에는 본격적인 동학교도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서 교주 최시형은 정치적 변란 보다는 조직의 강건함을 바탕으로 정부에 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봉준 집단 등 지역 농민 집단은 이미 반정부적인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주 긴 포스트가 될 것 같네요. 실제 동학농민운동은 수십개의 다양한 사료를 정리해서 사료 위주의 포스트를 구성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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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8장. 당나라 종파불교의 발전

지금까지 전개한 위진남북조와 수대의 불교사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이 가져와서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기도 전에 왕법에 의해 불법이 위축되었던 시기의 불교를 포스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나라 시기의 불교는 다릅니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문화를 가진 개방성을 큰 특징으로 하는 만큼, 불교에 대한 입장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불교는 이제 왕법에 의해 탄압받기만 하는 호국불교를 뛰어넘어 불법의 참 뜻 자체를 연구하고, 불법에 따라 석가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식으로 완성해가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삼장법사)입니다.

또 당나라 이전 불법에 대한 대탄압인 <폐불사건>을 여러번 거치면서 불교계는 이전 단계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불교계는 호국적인 성격으로 왕권에 봉사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불법의 독립성과 불교계 혁신운동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의 본 뜻인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체계적인 불법을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불법 완성 속에서 여러 교단 종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1.수많은 종파가 과연 진정한 석가의 참 뜻을 아는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는 사실 모두 석가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우물안에서 싸우던 개구리들아였습니다. 우물에서 바라본 하늘이 어떤 하늘이고, 어떤 크기인지 알 수 없듯이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석가의 삶과 불법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7장에서 자세히 다룬 지의의 천태종은 수많은 불교종파를 통합하여 하나로 융합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 역시 대립하는 불법을 융합하려는 시도의 종파였지, 불법의 참 의미를 찾던 종파는 아니였습니다.

실제, 당 초기까지 어떤 종파도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석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의 경전을 번역하여 읽는 것만으로는 그 심요한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석가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서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진국에 유학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울에서 아무리 혼자 영문법책을 읽어도 영어발음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석가의 참 뜻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경전만을 읽고 석가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던 것이죠.

따라서 당대에는 서역의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보다는, 직접 서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한 것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현장법사)입니다.

2. 현장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 수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말하는 경전을 석가의 참 뜻이라고 주장할 뿐,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문파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불경이 너무나 부족하고, 사상적인 체계도 완벽하지 못하며 불경의 해석도 제 각각인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현장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중국 불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인도에 가는 것은 너무도 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국외로 출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라고 말하며, 인도로 향합니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소설인 <서유기>의 시작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고승으로서 환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불법을 생각하다가, 인도 난타사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여 구마라왕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6년간의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구라마습과 현장의 불경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구라마습 이전의 경전을 고역경, 구라마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경, 현장이 번역한 경전을 신역경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이 완성한 불법의 요체는 <나의 본체와 불법의 본체는 모두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실체는 실제 존재하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린 아집과 법집을 깨뜨리고,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식론>이라고 합니다.

유식론의 특징은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과 대립하는 <유식사상>으로, 부처의 진정한 말씀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한다는 유사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현장의 교리는 <법상종>이라는 종파로 체계화되고, 현장은 법상종의 시조가 됩니다. 이 법상종은 오랜 기간동안 종래 <공사상>에 기반을 둔 다른 종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훗날 <공유논쟁>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일대 유학생이라고 보기에는 인도,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인도에서도 수백년에 나올까말까한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중국에서는 진정한 불법을 전파한 종파 불교의 아버지격이었으니까요. 명나라 오승은인 이러한 현장의 유학 생활을 소설로 발전시켜 <서유기>를 저술하였습니다.

3. 선종이 등장하다.

(이미 전에 선종을 설명했지만, 당대 혜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포스팅 합니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4. 혜능에 와서 북종선, 남종선이 완성되다

선종의 5대조인 흥인선사기에 제자를 뽑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어>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총명한 제자인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라는 게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일하는 소공인 혜능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는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명경 또한 집이 아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티클이 생간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소공인 관계로 글을 아는 자가 이 말을 옮겨적어 게어로 만들었습니다.

홍인선사는 혜능의 말에 감동받아 그에게 선종 6대조의 의발을 물려주었습니다. 선종이 비록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마음 수양만을 강조하는 종파>라고는 하지만, 글을 모르는 소공이 선종 조사가 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후 선종은 가장 총명한 후계자였던 신수의 북종선과, 글을 모르는 소공출신인 혜능의 남종선으로 갈리게 됩니다. 북종선은 선종교파 중에 비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였고, 남종선은 오로지 <마음 외에는 없다>라는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파였습니다. 북종선은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성장하였고, 남종선은 글을 모르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종 중 대중적인 남종선은 우리 나라 선종에 큰 영향을 줍니다. 나말 여초의 호족세력과 6두품, 그리고 반신라 지식인들의 종교가 선종이었고, 고려 불교의 큰 흐름도 왕권의 교종과 민중적인 성향의 선종이 대립하며 주도해 나갑니다. 이 혜능의 남종선은 훗날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며, 시문 등 감정이 필요한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남종선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실천도덕이 지배층에도 환영받았으며 행사규칙인 백장청규를 마련하여 대중적 토대를 확실하게 합니다.

5. 법장의 화엄종 :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 세계로 통한다.

법장은 당나라 최고의 여걸 여황제 측천무후기에 활동하면서 <화엄종>이라는 교단을 완성한 고승입니다. 화엄종은 법장이 주장한 <진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종파입니다. 이러한 진심을 정리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법장은 현장의 <유식론>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는 다르고, 실체는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닐 수 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법장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진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 말은 법장이 화엄의 원리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한 글입니다. 즉, 금사자의 눈도, 코도, 입도 금사자라고 부를 수 있고 금사자 전체를 금사자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금덩어리라는 본질로 이루어진 실체이며, 녹으면 본질인 금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진심>은 영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그 본질인 영혼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원리 속에 흘러갑니다.

예로 산이 있으면, 그 산에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돌맹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 나무를 본 사람은 나무가 진실이고, 토끼를 본 사람은 토끼가 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종파를 만듭니다. 그러나, 산 전체를 보고 산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산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며, 그 변화에 따라 나무와 토끼는 어떻게 될 지를 포괄적으로 보는 종파가 바로 화엄종입니다. 화엄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둥근 원 속에서 파악한다는 <원융 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당대 이러한 종파 불교의 성립이 중국사 전체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후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불교가 중국에서 단절되듯 침체되고, 한반도에서 융성하게 되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불교사로 넘어갈 때가 된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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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2장. 연기설이 등장하다

두 번째 페이지에서는 석가가 불교를 전파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인도 사회의 도시국가체제 등장>을 통해 이야기하겠습니다.

1. 씨족공동체 사회의 해체

인도에 석가가 등장했던 5세기 무렵의 사회는 인도 사회의 변혁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역사 발전 단계로 보면 원시적인 씨족공동체 사회가 무너져 가고, 도시 국가들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그리스로 말하자면 폴리스 성립기 정도이고, 중국으로 보자면 은왕조가 도시국가들을 모아서 왕조체제를 갖추는 수준이라고 하면 될까요?

문제는 씨족공동체 사회에서 가장 큰 정치적 기능을 담당했던 <제사> 기능이, 도시국가의 <정치기능>으로 넘어가는 변혁기라는 것에 있습니다. 즉, <하늘에 반항하면 벌이 내린다>는 고대적 관념으로 사회를 지배했던 브라만들에게, 이제 크샤트리아 계급이 <현실정치의 논리>도 <신성함>과 똑같은 정치기능을 내려야 한다고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 크샤트리아 계급은 도시국가의 왕족과 귀족이었고, 이들이 성장한 것은 씨족공동체적인 부락들을 통합하면서 정복전쟁을 활발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 영토를 넓힌 것은 크샤트리아 계급이었고, 이 크샤트리아 계급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하였던 것은 바로 상공업 계급인 바이샤였습니다.

바이샤와 크샤트리아는 새로운 사회에 새로운 이념 수립을 원하였습니다. 따라서 기존 브라만 교는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라만 내부 개혁을 추진하는 우파니샤드 철학의 등장, 고행을 강조하는 자이나교의 등장, 평등과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의 등장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계급은 바로 <크샤트리아 계급>입니다.

실제 자이나교는 나타족 왕자인 바르다마나, 불교는 카빌라 공화국 출신인 고타마싯다르타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모두가 크샤트리아 계급이지요.

약 2500년 전 인도의 석가족의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 왕자로 태어났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태어날 때, 한 선인이 찾아와 "집에 있으면 왕위를 계승하여 전 세계를 통일하는 왕이 되고, 만약 출가하면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는 태어난지 7일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모에 의해 양육되어 왕족의 교양에 필요한 학문과 기예를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16세에는 결혼을 하여 아들을 두기도 한다. 왕자로서 아주 유복한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의 허무함과 고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성문 밖으로 나가 병든 사람이 괴로워하는 모습과 죽은 사람을 보고, 인생의 괴로움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다 29세에 성을 나와 진리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떠났다. 오랫동안의 고행과 수도하면서도 진리를 깨우치지 못하여 괴로워하던 그는, 어느 날 보리수나무 밑에 앉았다. 거기서 그는 진리를 깨치지 못하면 떠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사색과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부처가 되었다. 그는 인간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후 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제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제자들과 함께 중생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한 설법을 베풀어 불교를 널리 퍼트리다가 80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중학교 2학년 도덕 교과서, 석가모니 -

석가모니라 칭할 때, 석가(釋迦)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 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이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가 세상의 진리를 깨달아 성 자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며, 같은 취지에서 세존(世尊:또는 釋尊)으로도 불리는 등 많은 호 칭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것이 `붓다`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음사하여 `불타`(佛 陀)라 하고, 더 약칭하여 `불`(佛)이라고도 부른다. 불교 특유의 용어로서 붓다는 `깨달은 자 `를 뜻하며, 교리의 전개 과정에서는 신앙의 대상이 되는 구제자로서 다수의 붓다를 상정하 여 소위 `부처`로 통용된다. 남방불교에서는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는데, 고타마(Gotama: 산스크리트로는 Gautama)는 석가모니의 성이다.

- 출처는 모르겠음, 그냥 노트속 끄적... -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 상황에서 그는 브라만교의 차별성을 반대하고, 크샤트리아와 바이샤의 신분 성장을 추진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는 상공업에 대하여 호의적인 입장이었고, 계급 차별을 부인하였으며, 공동체 생활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2. 석가는 공화주의자였다.

석가가 태어날 당시 기원전 5세기 정황을 볼까요? 서양은 로마( Rome)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발판을 구축하던 시기였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동방 페르시아와 맞먹을 정도로 소아시아 진출이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이란에서는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가 있었구요.  중국에서는 공자라는 이가 출현한 시기로 중국이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5세기 무렵 인도사회는 씨족공동체 사회가 점차 통합되어 <통합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국이 대표적인 통합국가(갠지스강 유역을 통합함)였지요.

문제는 당시 도시국가체제에 대한 논쟁이었는데, 인도의 도시국가는 왕국과 공화국 중 어느 체제가 더 어울리는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석가는 공화국가 체제를 지지합니다.

당시 인도는 아리아인이 내려와 바르나 제도를 성립시킨 이후, 수많은 부족들이 난립하는 씨족공동체 사회였는데, 이들 씨족 공동체 부족들은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사이에 쭈욱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중 갠지스강 중류에는 코살라국과 마가다국이 대립하고 있었고, 갠지스강 남쪽에는 밧사국과 아반트 국이 있었습니다. 석가의 카빌라국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강한 국가들 사이에서 자치세력을 형성한 공화국국가였습니다. 이것은 공화국이 필요해서라기 보다는 생존의 방법으로 택한 공화국 형태의 자치국가였죠.

석가는 이러한 강국들 사이에서 평등한 부족적인 전통을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석가모니의 불교 교단 조직인 <승가> 역시 만장일치제도의 공화국을 모델로 한 교단 조직이었습니다. 이 석가의 교단 조직 자체가 씨족적 혈연 대립 감정 보다는 동일한 불교도, 동일한 공화국인 이라는 공동체적 생활을 강조하는 것이었죠.

3. 개체는 전체속의 한 인자로서 활동한다. - <연기설>

석가의 핵심적인 교리 내용중의 하나인 연기설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도 바로 이 초부족적인 부족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석가의 연기설은 <개체를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전체 속의 하나의 인자>로 파악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입니다. 즉, 개체란 홀로 존재하는 독립 존재가 아니므로 상호 연계된 수많은 생-멸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부족원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부족을 넘어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도 초부족적인 통합을 할 수 있는 근본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연기설(緣起說)은 직역(直譯)하면 인연(因緣)으로 일어난다(起)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연이란 <원인>속에서 <자연스러움>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 자체도 원인과 결과에 따른 인과관계를 중시하는 것으로, 부처는 모든 생멸의 변화에는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전체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설은 <윤회사상>을 다시 한번 크샤트리아식으로 재해석한 사상입니다. 모든 인연이 원인과 결과가 있다면, <윤회> 역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여기에서의 윤회란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윤회개념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위해 석가는 8가지 수행 방법을 제시합니다. 이것을 팔정도라고 부릅니다.

올바른 견해(正見)로 올바르게 사유(正思)하고,

올바른 말(正語)로 올바르게 행동(正業)하고,

올바른 생활(正命)로 올바르게 노력(正精進)하고,

올바른 기억(正念)으로 올바른 명상(正定)을 하라.

이러한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마음의 번뇌와 속박에서 해방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마음에 의하여 진리를 깨우치는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크샤트리아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새로운 도시국가>들에게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론이었습니다. 즉, 초부족적인 이념으로 부족을 통합하고, 그 통합원리로서 초부족적인 정신을 키울 수 있었으니까요. 따라서 기원전 5세기 북인도 갠지스강 유역을 통합한 마가다국은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로서 불교를 보호하면서 지역을 통일하였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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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