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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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진흥왕대 화랑도의 개편 -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 화랑도에 관한 사료부터 읽어보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명주(강원도 강릉)에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악을 고쳐 선으로 옮기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오상과 육예와 삼사와 육정이 널리 행하여졌다.

(참고 - 오상 : 인, 의, 예, 지, 신 / 육예 : 예, 악, 사, 서, 어, 수의 6가지 과목 / 삼사 : 태사, 태부, 태보의 3가지 최고 관직 / 육정 :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의 6가지 바른 신하)

-삼국유사 권 3,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전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뽑아 300여명 이나 되는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로 인해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다시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의를 닦거나 서로 가악으로 즐겁게 하면서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현좌와 충신과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라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라고 하였으며,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의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국인이 모두 높이 섬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

공(김유신)은 나이 열다서에 화랑이 되어 다이 사람을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이를 용화향도라 일컬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

2. 화랑도의 용어를 정리해보자!

위 사료에서 보면 알겠지만, 화랑이라는 단체의 기원은 도교적, 유교적 영향으로 여성을 선발하던 단체였으나, 점차 남성단체로 전환된 것에서 비롯됩니다. 화랑이란, 국선, 풍월주라고도 하며 진골 중에서 으뜸인 젊은이들을 뽑아 사회에 필요한 교양과 국가 교육을 동시에 하는 단체였습니다. 화랑이 진골 귀족출신이라면 낭도는 화랑을 쫒던 일반 1-6두품 출신의 무리였습니다. 6두품이 등장할 무렵 1-3두품은 평민화 되어가는 것으로 볼 때, 낭도는 평민층도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랑이란, 무리인 <랑>을 이끄는 자들 중 가장 아름답다(화)는 뜻입니다. 여기서 화랑이 여성단체인 원화의 <화>, 즉 꽃에서 유래된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화랑도를 이끄는 <랑>은 최고의 귀족출신입니다. <낭도>란 <랑>을 따르는 자(도)라는 뜻입니다. 화랑 + 낭도라는 의미에서 <화랑도>라고 합니다.

향도는 이렇게 화랑(랑)과 낭도(도)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향도란 무리를 따르는 <도> 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인다. 위 사료에서처럼 김유신의 용화향도가 대표적인 단체입니다.

3. 신채호가 생각한 화랑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화랑도를 우리 전통의 선 사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신라의 선(군선)은 고구려의 조의, 선인제도, 삼한시대의 소도를 수비하던 무사의 개념에서 내려오는 전통 사상으로 중국 당나라 초기에 국교화된 도교에서 말하는 <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중국의 선 사상과 다른 우리 고유의 선 사상을 <낭가사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채호는 이러한 전통사상을 잘 지켰을 경우 우리 민족이 흥하였고, 전통사상을 무시하고 내분을 일으킬 경우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초기의 국풍이 후기 내분으로 멸망단계에 이르고, 신라 후기에 낭가의 전통이 약해진 경우 등은 모두 국가가 문란한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특히, 묘쳥, 정지상 등이 이끈 서경천도운동은 낭가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중흥할 수 있는 계기였는데, 김부식 등의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진압당한 것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고려 개경 보수파 김부식에 의해, 진보적 낭가주의 사상가들인 사경파가 진압당함으로서 우리 역사는 더 이상 북방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한반동에 갖혀 역사가 어그러지는 과정을 맛보았다는 것이지요.

4. 화랑도의 기원은?

화랑도는 원시 사회 청소년 조직에서 유래된 사회 유지 단체로, 성년식 등을 통한 청년 교육, 비밀 결사로 이루어진 군교육, 연령에 따른 계급적 교육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원시적인 성격을 띄는 집단이었으나, 진흥왕이 화랑도를 국가 체제 속에서 공적인 단체로 규정한 이후 국가 군사 엘리트(명망군)를 보충하기 위한 특수조직으로 거듭납니다. 진흥왕기 진흥왕의 모후로서 섭정했던 김씨부인은 이 청소년 집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즉, 화랑도는 진흥왕기에 불교교단의 정비와 더불어 국가 행정체제에 포섭된 단체가 되었고, 이후 풍월도, 풍류도라 불리던 전통 사상체계 및 중국 도교 사상 등과 연계되어 유, 불, 선 3교를 포함한 정치, 사회, 사상적인 제도로 자리잡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청소년 단체를 넘어 사회 교화까지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5. 진흥왕대 화랑도가 정비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신라사회를 살펴볼 때, <부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진흥왕 이전까지 신라 사회는 왕도 소속부를 가지고 있었고, 왕의 하교는 6부의 소속부와 같이 명령을 내리는 공동하교였습니다. 공동하교란, 왕과 주요 6부가 화백회의와 같은 회의체를 통해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왕족은 왕과 6부에 흩어져 공동의 정치를 했다는 것을 의미해줍니다. 신라 왕도 탁부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증왕 대 우경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면서 국호와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법흥왕 대 율령과 불교의 수용, 골품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강해진 것을 계기로, 진흥왕 때는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추진하면서 왕 혼자 국정을 총괄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독하교>입니다.

왕이 단독하교로서 왕권을 중앙집권화하려 하자, 인재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왕은 소속부를 초월하여 진골 인재들을 자신의 밑에 직접두려고 했죠. 이러한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불교교단의 정비와 골품제의 시행입니다. 불교 교단의 정비란,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치시켜 불교를 국가 지배체제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불교 세력을 각 부가 아닌 왕이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지요. 또, 화랑도를 국가 단위로 개편하여 소속부와 계층을 뛰어넘어 왕이 진골인재를 직접 선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흥왕의 이 정책으로 탄생한 세력이 바로 <진골세력>, <6두품>세력입니다. 과거 부체제 속에서 각 부의 혈연집단이었던 혈연 귀족들은 이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골들은 왕과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 1-5두품 세력을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진골에 의해 6등급 아찬중위제 등 고위 관료직까지 진출한 새로운 두품을 <6두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진골 계급을 우두머리로, 성장하고 있는 두품 세력을 낭도무리로 하여 계급적 지배체제로 재탄생한 제도가 진흥왕기 화랑제도입니다.

그러나 화랑제도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랑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지만, 그 인재를 소숙부와 계급을 초월하여 선발함으로서 <사회통합>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화랑과 낭도에 계급을 부여하고 그 계급윤리를 준수하게 함으로서 사회 규범과 윤리를 유지하는 역할도 하였고, 국가 긴급시에 활용할 수 잇는 군대(명망군)의 역할을 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으로도 활용됩니다.

이러한 화랑도의 발전으로 화랑도는 자체 체계도 갖추게 됩니다. 예로, 승려 원광이 작성한 세속오계는 화랑의 성격이 유교, 불교, 도교 등을 통합한 종합적 사상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살생유택은 불교적 이념이, 사군이충과 사친이효, 교유이신 등에는 유교적 가치좐이 보입니다. 그러나, 충성, 우애, 효도 등은 유불선을 떠나 어느 사회에서나 강조하는 이념으로서 화랑도가 신라사회의 <보편적 이념>을 따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 화랑의 역할

실제 화랑은 삼국통일에 앞장선 자들입니다. 사다함, 반굴, 관창 등의 화랑은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유신과 같은 가야계 진골들도 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웁니다. 화랑은 자신의 낭도를 철저히 보호하고, 그 공훈을 인정하여 높은 보상을 보장하였기에 화랑을 따르는 낭도, 특히 6두품 낭도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합니다. 실제로 삼국통일기에 화랑 아래에서 활약한 위대한 낭도들은 6두품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도기라는 점은 큰 메리트로 다가왔고,  두품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으로보면 화랑도가 골품적 한계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계층을 넘어선 사회통합에 기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화랑은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효녀 지은전을 보면 효종랑과 그 낭도들은 어렵게 살아가는 효녀 지은을 지극 정성으로 도우면서, 이것을 당연한 화랑도의 도리라 여깁니다. 즉, 화랑도는 <진골>이라는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 지를 제시하는 지배층의 <교과서>같은 역할도 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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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글) 이하의 아래 글은 화랑도에 대한 이기동 교수님의 글입니다. 참조하세요.

[기원과 제정]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인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전해갔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전에는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입문(入門)·입사(入社)의 뜻인데, 이는 아마도 성읍국가시대 마을의 젊은이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에 들어가 단체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6세기초에는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함에 따라 지금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당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조정에 의해 제정된 것이 원화(源花:또는 原花) 제도였다.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원화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인재를 양성·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6세기 전반기가 되면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 나아가서는 고구려·백제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이에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에 국가는 화랑도를 정식으로 제정했는데, 이때 조정은 화랑도조직을 통해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결국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이었다.

[조직상의 특징]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상의 특징]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의 이행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기간이 3년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18세의 청소년이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흔히 6세기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5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 간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화랑도가 즐긴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놀이는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그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랑도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를 미륵을 쫓는 무리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국난기에 즈음하여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하루 빨리 이상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위에 조국수호, 나아가서는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기를 약속할 정도의 사우(死友)·맹우(盟友) 관계였다.

[기능과 역할]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에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武士道)의 화신이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화랑집단의 무사도가 화랑도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국가에 기여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약하던 시기는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 귀족, 일반 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같았는데, 그 이유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변천]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종전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전사단으로서 화랑도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화랑도의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의 성격이 강해졌다.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은 유교·불교·도교 3교의 융합에서 나온 풍류도(風流道)라고 규정한 것도 이처럼 삼국통일 후 변질된 화랑도에 대한 정의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도의 도풍(道風)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고, 민간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도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같은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조합적(歌舞組合的) 기능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화랑이라고 하면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비롯해 〈훈몽자회 訓蒙字會〉·〈속대전 續大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의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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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