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를 보는 창 20 - (03) 아는 것이 힘, 책 속에 길이 있다!

 

근대를 보는 창 20에 대한 도서퀴즈 2회 문제입니다.

도서퀴즈는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선정한 뒤
각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풀어보는 퀴즈입니다.

학교시험처럼 성적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무심코 넘어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퀴즈랍니다.

70점 이상일 경우, 축하 메시지가,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격려의 메시지가 나온답니다.
다음 회차는 근대를 보는 창 2회차분입니다.
역사도서 <근대를 보는 창 20> 은 제목 그대로 총 20회분으로 퀴즈를 구성했습니다.

만약 문제를 풀어보시는 분이
역사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시거나
공무원 또는 교원 준비를 하고 계시는 수험생이시라면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되시는 분들은 책을 읽지 않고 도전해 보세요~


**** 도서 정보 ****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최규진
출판 : 서해문집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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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보는창20인간을둘러싼여러이야기묶음이곧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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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은 사회 복지 운동가였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공부였던 천재

이지함 하면 <토정비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그가 특출한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지함은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조선 시대를 살아간 일종의 <기인>이었다.

일단,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오해를 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토정비결이란 책에는 저자가 나와있지 않다. 토정비결이 운수와 풍수 등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감안해볼 때, 다른 어떤 풍속서에도 이지함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함(1517-1578)은 당당히 역사 속을 살아간 인물이며, 그의 인생 행적들을 추적해 볼때 토정비결을 그가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가 토정비결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단지, 인간 이지함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이단아였으며, 개혁적 사상을 가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지함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색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중종 때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14살때 아버지가 16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밤에도 책에 빠져 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지함의 눈이 나빠질까봐 등불의 기름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지함은 장작에 불을 지펴 책을 보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끝까지 읽었다. 장작마저 사람들이 치워 버리자, 이번엔 직접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공부를 하였다. 연기에 숨이 막히고 컥컥 거리면서도 꼭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온 이지함은 왕족인 이성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지함이 과거를 단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필요한 사서 삼경이나, 제자백가, 각종 경서 들을 통달했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도 스승조차 없었다. 책이 그의 스승이었고,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였다. 양반들이 꺼려하는 음악과 산수, 의학, 천문과 지리학 등의 책도 잡으면 손에서 놓질 않았다.

책에서 진리를 구하던 청년 이지함은 직접 자신의 공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유적 탐방은 문화와 지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곳 저곳의 풍속과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유통되는 물자들과 지리적 여건에 따른 생활 양식들도 보게 된다. 인간과 지리를 접하고, 민중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면서 토정은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 곳곳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2. 기인과 기인의 만남.

지함이 살았던 이 당시 까지의 조선은 유교적 문화와 함께 불교, 도교의 사상도 용인되던 시기였다. 율곡은 지함보다 19살이나 아래였으며, 이황의 성리철학도 막 정리되어가던 시기였다.

지함은 중국의 죽림칠현과 같이 자연을 돌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연 속을 여행하다가 서울에 올 때면,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대 이율곡은 지함보다 후학이었기에 토정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토정은 딱딱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풍류와 농담, 익살 같은 표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정치적 모순과 사회 비판에 대한 정확한 칼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성혼, 조식, 이항복 등은 토정과 토론하면서 그의 박학함에 놀라곤 하였다.

훗날, 조식은 마포에서 빈민과 생활하는 이지함을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곤 이렇게 말하였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실제 이지함은, 고대 청담 사상가들이 꿈꾸어왔던 도사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벼운 옷 한벌을 걸치고 버티는 수련이라던가, 오랫동안 서서 명상을 한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학문이란, 유교만을 고집할 것이 못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곧 학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던 지함은, 당시 이름이 높던 <서경덕>을 찾아 개성으로 떠났다. 서경덕은 정치와 담을 쌓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유생이었기에 지함의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졌다.

서경덕과 성혼, 이율곡의 철학은 이황과 달리 주기론 철학이었다. 당시 주기론은 이황의 주리론과 달리, 다른 학문에 포용력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주기론자들은 주자의 철학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훗날,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 양병을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이지함이 풍수지리와 천문지리를 토대로 예언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유교적 철학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로서 더 넓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역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인접학문을 총정리하여 구성된 것이었기에, 이지함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에 더욱 능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말을 적어 제출하는 등 기인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왜 과거 시험에 흥미를 잃었을까?

3. 서경덕을 떠났으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는....

어느 날, 이지함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의 부인이 지함을 유혹하려고 했다. 지함은 그 부인을 달래다가 지쳐 결국 그 부인에게 인륜을 설명하였다. 집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서경덕에게 사실을 말하자, 서경덕은 지함의 공부는 이미 인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서경덕은 스승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높은 학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친구인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안명세는 사관으로서 당대 큰 사건인 을사사화를 바탕으로 <시정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들은 그 기록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안명세를 죽여 버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

그는 죽장에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북쪽의 오지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옷차림은 정말 남루하였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

당시에 제주도는 어떻게 갈수 있었을까? 당시 기술로 제주도를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들을 달아두어 균형과 함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45살이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함의 가문을 고려하여 그에게 포천현감 자리를 주었다. 지함을 알고 있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이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자, 어찌보면 낙하산일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출세의 기회였다.

그는 현감이 되어서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향리들의 접대는 모두 거부했고, 평소 식사도 잡곡밥과 소금국을 먹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똑같거나 못해야 그들의 삶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 지함의 철학이었다.

지함은 고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낚시대와 그물을 보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고기를 잡아 경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현감 자리 조차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4. 빈민의 삶을 이해한 방랑자

지함은 오랜 여행을 통해 빈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하층민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신념으로 삼은 것 같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아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떠난 일화도 있다. 노예의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면 자신이 아끼던 책을 주고 그 아이의 부역을 빼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자 중에는 상인과 노예들도 꽤 많았다.

지함은 어느 날, 한적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 그 박을 팔아 곡식을 사니 그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먹을 만큼 많았다. 지함은 곡식을 마포로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빈민촌 한가운데 조그만 땅을 얻었다. 빈민들은 그가 빈민촌에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산다고 하여 <토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왜 하필, 박을 팔아 곡식을 만들어 빈민을 도왔을까?

그것은 빈민들에게 단순히 곡식을 나눠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유통경제는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강 자체가 물자 운송의 핵심이었다. 배를 통해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유통을 통한 이익은 빈민들이 구걸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막대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큰 수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조선 초기에 등장한 양반 계급 출신의 상인이라고 할까?

5. 통상무역론을 주장한 혁신적인 사상가

57살의 늦은 나이, 그는 드디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정치를 혐오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화의 시대가 끝났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서경덕, 성혼, 이율곡, 조식 계열의 학자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지함을 추천하였다.

이지함은 빈민을 위한 복지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국가에 많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 사업은 부유층의 재산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과 부유층의 부동산을 국유지로 설정하여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시기에는 조선 건국 세력인 훈구세력이 어느 정도 척결되었고, 그들의 불법 보유지를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상태였다.

이지함이 생각한 것은,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었다. 산림과 해양은 지배층의 것이 아니라 국유 재산이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왕토사상과 고대 정전법의 토지공유사상을 도입하면 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토지와 바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광산의 금, 은과 바다에서 나오는 수산자원은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다. 그 자원을 통해 국고가 충당하면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지함은 <국제통상>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금, 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산림자원과 광업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비싼 가격으로 자원을 팔아 무역체계를 확립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간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섬에서 만든 박을 가지고, 섬사람들이 나눠 먹는건 비효율적이다. 넓은 시장에서 다양한 물자와 교역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지함의 이론은 당대 유럽의 <중상주의 정책>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6. 조선 시대 복지 사업의 선구자

이지함은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고향은 충청도로 돌아와 아산 현감 자리를 맡았다. 그는 상인 신분의 친구들, 노예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원할하지 못했던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생각한 빈민 구제 개혁안은 <걸인청>의 설립이었다. 국왕은 백성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에서 말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왕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쌀 한바가지를 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일까?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진정한 복지는 백성들 스스로가 굶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철학으로 시작된 <걸인청> 사업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사업과 연결되었다.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만 계속 제공해주면, 지원이 끊겼을 때 그들은 죽고 만다. 따라서 먹고 잘 곳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본 자금이다.

걸인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대여해주고, 값싼 이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 이자로 다른 이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다.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당 기관에서 일을 하여 수입을 얻는다.

힘없고 늙은 노인들은 짚신을 만들거나, 작은 나무를 깎도록 한다. 관청에서 그것을 사서 판매한 후, 이들에게 쌀을 대가로 지급한다. 일하지 않고 구걸만 하는 자는 처형하지만, 일을 하겠다는 자에게는 최대한 협조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2008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사회 사업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빈민들을 위한 이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하였고 성과도 얻었다. 문제는, 이지함이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못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포의 토굴에서 <토정>으로 살아갈 때부터 시작했던, 빈민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빈민들이 결혼날짜를 잡아달라던가, 좋은 일이 있을 지 점을 쳐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비결>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토정비결을 단순한 <운수책>, <점보는 책>으로 여기곤 한다. 만약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 본인 맞다면, 이 책은 빈민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면서도, 일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이들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 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 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의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함의 경고가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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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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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21 - 역사의 흐름은 유통경제의 발달이었다.

1. 막부의 중농정책과 떠오르는 상인들

 

에도막부는 다른 막부들 보다 훨씬 더 철저한 중농정책을 실시한 막부였습니다. 이전 가마쿠라 막부가 국내외 무역을 통한 재정 확보를 중시한 것과는 달리, 에도막부는 사회 분위기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어느 정도 잉여생산물이 축척된 농업 자본을 막부의 재산으로 삼았습니다. 직업의 근간은 농업이었고, 성리학적 분위기에 의해 상공업은 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발전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막부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중국, 조선에서 선진 농법이 계속들어오면서 농경지의 면적은 계속 증가하고, 개간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시대 후기에 광작(넓은 영토를 가지고 농사짓는 것)이 성행하고, 농촌경제의 발달로 토지를 확보한 부농과 토지가 없는 빈농으로 신분이 분화되어 가죠? 에도 막부 역시 같은 시기 같은 상황을 겪게 됩니다.

정부가 농업을 강조하면서 농업 생산력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그 결과 농업을 통해 거대한 이윤을 창출한 부유한 농민(부농)과 토지를 잃고 농업 노동자로 전락한 빈곤한 농민(빈농)이 등장합니다.

조선 시대 농업경제 발달이 양반층에도 부유한 양반과 몰락한 양반을 초래했듯이, 일본에서도 무사층의 분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부유한 무사들은 영주가 되어 엄청난 재력을 축척하지만, 빈곤해진 무사들은 사회에 불만을 갖게 됩니다.

또 빈곤해진 무사들은 조금밖에 없는 토지에서 최대한 세금을 쥐어짜기 위해 농민들에게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게 되어, 사회가 동요하고 농민반란이 많아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임술민란이나 홍경래의 난과 같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세요.

반면, 농업경제의 발달로 남는 생산물을 시장에 유통하려는 세력이 등장하면서 5일장이 확대되고, 재산을 축척한 상인집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대상인 집단은 농촌경제를 이끌어간 부농출신도 있었고, 처음부터 상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시작하여 유통경제의 신화를 이룬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농업을 중시하는 막부의 경제정책이 점차 무너지고, 도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에도 막부의 전통적인 카스트적 신분질서를 위협하기 시작합니다.

 

2. 대상인이 출현하였으나, 정부는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조선, 명, 에도막부 후기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각 국가들은 이렇게 축척된 상업자본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동아시아 국가의 당시 관학은 모두 성리학이었습니다. 3국가 모두 후기에 좀더 실용적인 양명학이 성행하고 실학과 국학이 등장했지만,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하거나, 지배집단에서 소외된 이들이 받아들인 학문이였습니다. 전통적인 농업주의의 유교이념에서는 <중농주의>를 근간으로 토지에서 세금을 걷는 것이 경제의 원칙이라는 입장을 계속 고수하였습니다.

에도 막부 역시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었습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미쓰이 등 재벌가가 등장하였고, 이 재벌가들은 금융업을 통해 막부, 번보다 더 큰 경제적 위세를 떨치게 되었죠.

대상인들은 동업자 조합을 만들고 물품에 대한 독점권을 얻어 상품 가격을 통제하였습니다. 서양식 길드 체제와 비슷하다고 할까요? 상공업자들은 도시의 대상인들과 결탁하여 서로간 상업규칙을 마련하고 동업조합의 운영절차를 작성하였습니다. 서로간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상업의 운영방식을 정하고 정해진 규칙 안에서 도시내 상공업을 완전 독점 장악하였습니다.

에도 막부는 중농정책을 고집하면서도 이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국가 경제권은 상업자본이 가지고 있었고, 쇼군과 다이묘도 금융업자들에게 많은 부채를 지고, 상업자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막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업이 근본산업이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전통 농업경제이념인 성리학을 백성들에게 계속 주입하는 정도였습니다. 또, 지나친 상공업에 의한 <사치>는 위험하다는 입장에서 <검약령>을 내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소상인들을 농업으로 복귀시키는 <귀농령>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에서 등장한 상업자본 역시 명, 조선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로의 경제적 근대화에 성공한 사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일부 일본학자들은 명, 조선과 달리 일본의 자본주의는 이미 에도 막부 말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그 자본이 사회전체의 유통경제를 장악하고 자본에 의한 새로운 신분질서와 경제질서가 확립되어야 합니다. 비록, 에도막부에서 이전과 다른 상업자본이 등장했다고는 하지만, 그 자본은 도시내 동업조합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자본으로 근대적 독점 자본주의와는 성격이 다른 자본인 듯 합니다.

또, 축척된 상업자본은 막부의 군사력에 의해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는 위태로운 것이었고, 실제 막부는 상업자본이 막부에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언제든지 상업자본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즉, 에도 막부의 상업자본은 막부와 결탁하거나, 막부 재정에 협조하는 형태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진정한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본학자들이 주장하는 에도 막부기 일본의 근대화론은 아직 시기 상조의 이론같습니다. (에도 막부가 일본에서 경제적 근대화를 이루었다면, 신해통공이 이루어지고 상공업이 활성화된 조선 정조 때도 근대화 기점으로 생각해 볼만 하네요.)

 

3. 도시 중산층의 문화가 등장하다.

에도 막부 후기, 급격하게 발달한 상공업은 무사계급과 다른 <중산계급>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산계급이란, 도시 상인계급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도시 상인들은 기존 무사 계급의 문화와 차별되는 좀더 서민적인 문화를 만들게 됩니다.

보통 도시를 거점으로 성장한 도시 상인 집단을 <죠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도시 중산 문화를 <죠닌 문화>라고 부르죠.

죠닌 문화의 핵심은 상인과 농민들에게 글과 예절 등을 가르치는 학교가 전국적으로 등장하여 <교육의 기회 확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중산층들은 더 높은 문화와 신분 상승을 위해 장남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고, 차남 이하는 상인교육을 시켜 가문을 유지하였죠.

이 죠닌 문화는 서민적인 통속소설, 가부키 등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로 발전합니다. 18세기 이후 일본의 겐로쿠 문화, 가세이 문화 등 새로운 문화가 등장하면서 무사 중심의 상층 문화가 점차 상인 계급의 문화로 이동하였습니다. 특히, 돈 있는 상인들은 일본 풍속화가 들의 그림을 집안에 보관하는 것이 문화의 척도라 생각해서, 풍속화(우키요에), 목판화(니시키에) 등의 회화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또, 중국 당나라 시기 견당사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한 차를 마시는 예법(다도)이 지배층을 넘어 죠닌층에게 확대되어, 다도 예법은 일본인 모두에게 교양을 판가름 하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4. 성리학보다는 실학이 필요한 시기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의 이념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탈피하여 새롭운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보고, 백성과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학문을 연구하자는 경향을 역사학계에서는 <실학>이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실학은 <토지 경작자에게 토지를 맡긴다>는 이념의 중농학파, <상공업을 통한 부국강병을 실현한다>는 중상학파, <우리 것을 알아 실사구시로 활용한다>는 국학론 등이 있었죠.

일본 역시 새로운 경향의 사회이념이 유사한 시기에 등장합니다. 일본 에도 막부의 국가 유학은 조선에서 건너간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 중에서도 군신상하의 대의명분과 사무라이 윤리에 활용하기 좋은 <주자학>이었죠. 막부 지배층은 막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의 충성, 의리, 대의명분, 국가 윤리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막부 후기가 되면서 양명학자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우선이라는 성리학의 <격물치지>보다, 실천과 수양이 먼저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학문이었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사회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변화하면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죠. 그러나, 막부는 사회 동요를 막기 위해 양명학을 금지하고, 국가 관학은 오로지 성리학이라고 강조합니다.

양명학은 책을 읽는 깨달음보다 실천이 우선이라는 간명한 논리로 지배계층에서 소외당한 하층 무사나 도시 상공업자에게 환영받습니다. 또 성리학이 강조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논리와 다르게, 지역의 자율성이나 도시의 상공업 활동에 관대한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양명학을 <반체제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였답니다.

명대의 양명학이 조선을 거쳐 일본에 들어왔다면, 청대의 고증학도 일본에 수입되었습니다. 고증학은 중국 청조 시기에 사물의 참 뜻을 깨닫고, 원전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신유학이었습니다. 중국 청나라가 이민족인 만주족 왕조이기 때문에 유학 활동이 철학적이지 못하게 된 것에서 비롯된 학문이지요. 일본에서도 이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공자, 맹자 등 중국 선진 유학자들의 원전을 연구하는 파가 등장하는 데, 이러한 파를 <고학파>라고 합니다.

또 하나, 에도 막부기 유행한 사상 중의 하나는 <난학>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펼친 까닭에 교류했던 서양 국가는 네덜란드 뿐이었습니다. 난학은 네덜란드의 학문이라는 뜻으로, 서양 의학서 등을 일본식으로 해석하면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 후기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국학>입니다. 국학은 조선으로 말하면 <실학>이라고 볼 수 있는 학문이죠.

에도 막부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서민 문화가 널리 보급된 반면, 쇄국 정책으로 외래 문화와 사상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양명학이나 고학, 난학 등이 들어왔지만 지배층 일부의 학문이었고, 서민들 개개인이 인식할 만한 학문은 아니였죠.

국학은 서민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이 전파되면서 이 일련의 사상들을 묶어 <일본 고유의 학문>이라며 부르는 말입니다.

일단 번학, 향학 등 서민교육기관이 증가하면서 서민적인 유학 교육으로 <도덕과 윤리 교육>이 등장하였고, 서민적인 오락이자 문학인 일본 고유의 가부키 양식이 완성됩니다. 또 풍자소설(센류)와 돌림노래(연가), 쿄카 등이 유행하였죠. 안도 쇼에키는 무가사 농민들을 수탈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사회인가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서민적인 학문 전통 속에서 일본 고전과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서 독자적인 일본사를 완성하고 서민들에게 전파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들을 흔히 <국학론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중국식 이념인 유교와 불교를 배격하고 일본 자체에서도 고대부터 내려온 사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고대부터 내려온 고유 사상이란, 국수주의적인 관점에서의 <존왕왕이 사상>입니다. 천황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강림>을 이념적으로 정리하여, 왕권의 강화가 일본 역사의 발전방향임을 강조합니다. 또 일본 고유의 사상인 <신도>를 복고해서 일본인의 정신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이 국학사상이 일본에 미친 영향은 너무나 지대하였습니다. 일본 근대기 왕을 중심으로 모이자는 <근왕운동>, 조선을 쳐들어가 일본의 우월함을 증명하자는 <정한론> 등의 기초 이념이 국학 사상에서 이미 보여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동요하면서 막부타도운동이 전개되는 시점의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성공한 그 다음 이야기는 메이지 유신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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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막부 공통의 관심사 : 재정문제

일반적으로, 일본의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막부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막부시대의 막부는 국왕이 아니라 막부의 군사지도자 쇼군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이미 군사정권으로 역사를 쭈욱~ 이어오네요. 어쩌면 근대 일본사에서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열망이 왜곡되고 군국주의로 나간 것도 천황 이데올로기와 막부정권의 전통이 일본인들 머릿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나라의 역사라는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투영된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중세에서 막부의 영양분은 <재정>이었습니다. 막부는 직접 국왕가로 불릴 수 없었고, 천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정통성>보다는 힘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재정이 필수였습니다.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것도 재정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써 싸운 무사들이 전쟁 이후 재정난에 허덕이며 보상을 해주지 못한 막부에 대하여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았거든요.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의 공무역을 재개하고, 조선과의 교린 무역, 류쿠 및 동남아시아와의 활발한 무역로를 개통함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초기 막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명, 조선의 등장 등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상황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시대 흐름을 무역로 확보로만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즉, 성장하는 농민층의 힘을 끌어안을 능력이 없었죠. 농민층의 잉여생산은 막부가 아닌 지방 다이묘들에게 넘어갔고, 성장한 다이묘들이 독립국을 세우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막부의 존립 근거인 재정을 원활히 통제하지 못한 것이죠.

2. 에도 막부 : 확실한 농민 통제로 조세를 확보하다.

반면,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들과 달리 가장 확실한 농민통제를 실시합니다.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실시했던 <변법>과 같은 부국강병책을 도용한 것이죠. 에도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가 확실한 조세 증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국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단, 농민층을 엄격한 신분으로 묶어버립니다. 에도 막부의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 이라는 신분 공식은 아주 엄격해서 농민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농민은 국가에 부역, 조세 등을 납부해야만 했죠.

농민들은 연대책임제인 <고닌구미>에 묶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한 <오가작통법>과 같은 것이었죠. 누군가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 이웃이나 친척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특히 사치하는 자들은 주변인들을 같이 처벌함으로서 서로 서로 엄격하게 감시하도록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 성리학의 토지 이념을 강조하여 토지는 하늘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고, 농민이라는 직업이 다른 2, 3차 산업의 직업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토지를 중요시하는 사회의 특징인 <가부장권>을 중요시하여 가장에 대한 항명은 쇼군에 대한 가신의 항명과 동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보다 높은 계급의 무사들은 농민들보다 우월하는 이념으로 <무사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일명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불리는 무사도는 무사가 해야할 일들을 규제하면서, <무사는 힘써 일하는 농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이념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제도적으로 막부는 <토지영대적 매매의 금지령>과 <분지제한령>을 법적으로 반포하여 농민을 보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가진 토지는 헐값에 매내할 수 없고, 상속도 법에 의한 것으로 제한한 것이죠. 이것은 소농민을 보호하면서, 국가에 내는 세금 공급자들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정책이었습니다.

3.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가 달라지다.

무로마치 막부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막부 재정을 확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보다 대외 무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쇄국이란, <서양에 대한 쇄국> 및 <농업상품에 대한 쇄국>입니다.

에도 막부는 중국,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무역은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서양과의 무역은 단절하고, 단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에도 막부의 정통성 문제와 막부 유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활발하게 일본에 진출한 것은 신항로 개척기인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상으로 크리스트교를 적극 수용하고,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에서 대포 등의 문물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설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을 막부 재정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무사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카톨릭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카톨릭 국가들과는 성격이 다른 네덜란드라는 신교 국가가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자 일본은 카톨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유롭고 활발한 무역 분위기는 엄격한 카톨릭과는 사뭇 달랐죠. 네덜란드를 이용하여 이전 카톨릭을 막아볼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에도 막부와 멀리 있는 규수 지방의 다이묘들과 무역을 계속하였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서양과의 무역을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는 카톨릭 국가들을 누르고 일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카톨릭 세력을 모략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세력들을 모두 배척하는 <쇄국정책>이 탄생한 것이죠.

이제 에도막부는 막부 재정의 근간을 무역에서 찾으려는 이전 막부의 재정책을 버리게 됩니다. 일본은 나가사키 항구 하나만을 열고, 네덜란드 및 중국하고만 무역을 했습니다.

조선과는 전통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던 대마도(쓰시마섬)에서 무역을 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대마도주가 거의 독자적으로 주도했고, 대마도주의 태도에 따라 무역의 어감이 달라지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의 존재를 거의 막부 실력자의 존재와 대등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막부가 다른 막부와 달리 오래 지속된 것은 이 쇄국정책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막부의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와 달리, 에도 막부는 일본 국내 상품을 타지방, 또는 해외에 유통시키는 것 자체까지 제한하였죠.

즉, 에도 막부의 사회는 농업기반의 자연경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막부체제는 동요없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쌓이고 쌓인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터져나오면서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새로운 부자와 상인들에 의해 도시에 <죠닌 문화>라는 중산층 문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쇄국정책으로 에도막부는 오랜 기간동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초, 중반은 일본의 평화시대이면서 일본 고유의 국학이 발전한 시대입니다. 외국 사상은 네덜란드의 <난학> 정도였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쇄국정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전 막부에서와 같이 활발한 문물 교류가 줄었고, 서구와의 교류도 원할하지 못하였죠. 미국과의 교류도 서구인들을 통해 몇 번 왕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재정이 부족하다~ - 막부의 재정확보 노력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초기 쇄국정책과 농업 안정책으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4대 쇼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정착시키면서 막부의 성격과 재정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리학의 탄생한 중국 송나라의 문치주의, 조선의 문반 우월주의가 무신정권인 막부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에도 막부에서 성리학이 국가 관학으로 정착된 것은 4대 쇼군기부터입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정권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문이죠. 충효윤리와 국가 윤리가 지배층의 이념과 절묘하게 일치하니까요. 특히 이황이 주장한 이기론과 군신관계론은 막부 지도자들의 입맞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막부 지도자들은 서양에서 넘어온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일본 전통 지배층인 불교세력을 다시 옹호하였습니다. 특히, 무가 정권에 딱 맞는 선종 계열을 중시했죠. 일본의 선종은 가마쿠라 막부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문제는 이렇게 막부 정권이 무신적인 기풍을 잃어가고 <문치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서 국가 재정이 약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초기 정책인 자영농 육성, 강력한 중앙집권, 무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제가 흔들리고, 막부가 원하지 않았던 <상인계급>이 점차 뜨게 된 것이지요. 특히 지방에서 돈좀 벌었다 싶은 자들이 장사에 나서고, 무사들마저 고리대의 맛을 알게 되면서 막부의 튼튼한 재정줄이 흔들리게 됩니다.

도쿠가와 8대 쇼군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코호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개혁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18세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인층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막부의 쇼군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검약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검약령의 중요 내용은 <식산흥업>이라는 구호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이 많이 외쳤던 그 구호네요. 식산흥업이란, 농업 생산량을 늘려 국가 기반을 단단하게 하자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식산흥업의 핵심은 토지개발과 농업장려, 품종개량, 비료개발 등이었죠.

그런데,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상품작물들은 많은 세금으로 인해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고, 국가는 세금을 미곡(쌀, 콩)으로 받아가면서 성장하던 농민층의 생산력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농민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한 만큼의 생산물을 국가가 가져간 것이죠. 이러한 정책은 짧게는 막부 재정에 도움이 되나, 장기적으로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막부 후기로 넘어가고 19세기가 되면서 막부는 더욱 더 재정 부족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19세기에 막부는 막부 존속을 위한 결단으로 <간세이 개혁>과 <톈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성장하는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같이 커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잉여생산물을 수탈하여 막부의 창고를 채우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단,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인정하여 상업자본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동업자 조직인 자를 인정하면서, 이들이 남기는 이윤은 철저하게 세금으로 걷어갑니다. 일본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일본학자들이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업자본의 수탈로 일본 자본주의가 에도막부기에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19세기 개혁의 내용은 <귀농령>입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이 살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채무를 모두 없애줍니다.(채무파기령) 그리고, 어중간한 상인들은 모두 농촌으로 돌아가라며 협박을 합니다.(구리귀명령)

이것이 에도 막부 후기의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겪은 후였고, 아시아에서도 각 국의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상업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찍어누르거나 수탈하면서 상인들을 농촌으로 돌려 보내려 한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이었죠.

실제, 막부의 재정이 몇 년간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상인과 농민을 쥐어짜고 탄압하는 정책은 무사, 농민, 상인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최하급 정책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재정 정책 실패로 가난해진 무사와 농민들은 결국 막부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사에서 막부의 패망은 모두 재정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배층인 무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막부 불만 세력들은 막부가 아닌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전통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의 이념 중 하나였던 <존왕양이론>으로 연결됩니다. 해석하면, 왕을 받들어 서양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막부가 아닌 왕이라는 개념이 일본인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 <상공업의 발달과 자본주의 논쟁>을 다루고, 일본 상업발달로 등장한 <죠닌 문화>와 막부의 대응을 살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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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9 - 에도막부의 등장과 문물 정비

1. 에도 막부의 철저한 신분제도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자손들은 막부를 창립하고 바로 영주(다이묘)들에 대한 통제정책에 들어갔습니다.

일단, 막부 자체를 에도라는 수도에 세움으로서 중앙에서 막부가 지방을 총괄하는 식으로 통제하고, 반발하는 자들을 찍어눌러 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죠. 1,2,3대 막부의 쇼군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철저한 통제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일단 에도막부는 일본판 카스트 제도라고 할 만큼 철저하게 신분과 계급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막부의 계급은 4계급으로 최고 계급은 무사, 다음으로 생산자인 농민, 그 밑으로 수공업자, 상인층이 존재하는 계급구조였죠.

무사는 지배층, 농민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생산자였지만, 수공업자와 상인은 농업생산물을 부수적으로 이용하는 계급이라고 인식하여 천대하였습니다. 실제 막부 재정의 핵심이 농민들이 내는 세금이었거든요.

2. 막번체제 : 명목상 중앙통제와 실제적인 지방 분할의 조화

에도막부를 창립한 도쿠가와 가문은 막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을 추구했지만, 전국시대 이후 성장한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모두 찍어누를 수 없었습니다.

실제, 막부 집권 초기에 다이묘들을 모두 막부에 굴복시키려는 의도로 다이묘들을 탄압하였다가 엄청난 반란인 <유이 쇼세츠의 난>이 발생하기도 했거든요. 초창기 쇼군들은 다이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는 <산킨고타이 제도>라던가, 다이묘들의 토지세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지만 반발만 사고 맙니다.

막부의 4대 쇼군부터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권한을 인정합니다. 다이묘에 대한 산킨고타이 제도를 완화하고, 다이묘(영주)들의 영지를 인정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쇼군이 전국토의 1/4 정도만 지배하고, 나머지 영지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각각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 체제라고 합니다.

막은 중앙집권을 하는 쇼군의 <막부>, 번은 지방 다이묘들의 <영지>를 말하는데, 합하여 <막번>이라고 부르죠.

그러나, 한없이 지방 세력에게 권한을 주면 막부가 오래가지 못합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는 대신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가장 유명한 제도는 참근교대제도라고 한자로 읽는 <산킨코타이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에도 막부기 실시된 가장 강력한 다이묘 통제책이었죠.

그 내용은, 다이묘의 반란을 막기 위해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본국 : 번)과 수도(에도 : 막)를 1년씩 교대로 왕복하면서 머물게 하는 제도입니다. 다이묘는 식구들을 중앙에 머물게 하면서 지방과 중앙의 물자 유통을 원할하도록 책임지게 됩니다.

이 제도는 구두 계약이 아니라 에도와 번 사이를 오가며 군역을 한다는 조항을 성문법으로 만든 제도입니다. 신라시대에 본인이 수도에 머문 상수리 제도, 고려시대에 호족의 아들을 중앙에 머물게 한 기인제도와 비교가 되네요.

다음으로 막부의 지방 통제책은 <공역부담제도>입니다. 원어로는 <후신야쿠제도>라고 하죠. 이것은 국가가 원하는 공공 시설을 지방에서 돈을 부담하여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댐이나 치수공사, 군사거점의 구축 등을 지방 다이묘가 책임지고, 그 성과를 판단함으로서 중앙의 재정 부담을 덜고 지방은 중앙의 위세를 확인하게 되죠.

또 <일국일성령>제도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지방 다이묘가 자신의 본성을 제외한 그 어떤 곳에서도 성벽을 지을 수 없다는 제도로, 성벽을 지어 중앙에 위협을 주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제도입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지방 다이묘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군사활동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없게 되었고, 중앙에 대한 반란이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가신고소의 관례>도 있었습니다. 원래 막부의 위계질서와 사무라의 정신에서는 절대 가신이 주군을 고발하거나, 부하가 장군을 모함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백성이나 향리가 수령을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법>이 있었죠.

그러나, 조선에서의 부민고소법은 성리학 윤리를 어긴 강상죄와 국가반역죄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부모건, 수령이건 고발할 수 있었죠.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도막부에서 관학화된 성리학 윤리에 의해 다이묘를 고발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앙에 반역을 꾀하는 다이묘는 누구든 고발할 수 있게 조치한 것입니다. 에도 막부에서는 이 조항을 이용하여 많은 정적들을 죽이는 행위에 이용하기도 합니다.

3. 건국 초기 : 행정 조직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다.

일본에서의 새로운 정권의 등장은 건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역사처럼 신라 건국, 고려 건국, 조선 건국이라는 용어는 낯선 말이죠.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왕조가 바뀐 적이 없고, 천황가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뀐 것은 지배층으로 권력을 가진 쇼군의 가문이 계속 바뀐 것이지요. 무사 가문인 막부가 바뀐 것일 뿐, 왕조의 변화라는 우리 식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에도 막부는 아예 천황이 있는 수도인 에도에 살림을 차리고, 이전 막부와는 다르게 강력한 중앙, 지방 통제 정책을 실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일단,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쇼군입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는 쇼군 밑의 호죠씨 가문이 다 해먹었고, 무로마치 막부는 지방 다이묘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쉽게 망했습니다. 즉, 가마쿠라 막부는 중앙체제가 부실했고, 무로미치 막부는 지방 통제가 부실했죠.

따라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도 막부는 <산킨고티이 제도>등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려고 무척 노력하였습니다. 그럼, 중앙은 어떻게 통제했는지 볼까요?

일단, 쇼군은 있으나 쇼군이 모든 정무를 처리하지 않습니다. 쇼군은 행정 전문가인 <로츄>를 등용하여 그가 중요한 정무를 처리하고 쇼군의 허락을 받게 하였죠. 조선으로 보면 재상, 현대 개념으로는 대통령 밑에 총리같은 거죠. 로츄는 쇼군의 두뇌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 쇼군의 일을 돕는 와카도리요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현대개념으로 공무원, 일선 비서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국가 행정의 일선에서 뛰는 장관직이나 차관, 공무원 같은 다양한 직함들을 말하죠.

또 쇼군에게는 쇼군을 지키면서 행정관들을 감시하는 <하타모토>의 직책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청와대 비서실과 같은 역할을 했죠. 하타모토는 행정관 뿐 아니라 유력 영주인 <고케닌>들의 동향을 쇼군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지방 영주 무사인 <다이묘>들의 근황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게 쇼군에 충성하는 부하들이 한 직책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집착하게 될 쯤에서 자리를 옮기게 했다는 점입니다. 중앙 고위직들은 모든 직위를 서로 돌아가면서 담당하고, 국가의 중요한 정책은 같이 모여 <합의>로 결정하였습니다.

즉, 이전 막부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쇼군이 최고의 위치를 점하고 중앙 정치를 통제하는 효율적인 제도였죠.

다음장에서는 에도막부의 쇄국 정책과 농업정책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이야기로 에도 막부기 상공업 정책을 다뤄보기로 하죠. 일본사는 깊이 있게 들어가지 않고, 핵심적인 것들만 간단간단하게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볍게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조선역사와 깊이 있게 관련된 부분들이 있어서 그 부분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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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7 - 무로마치 막부의 경제정책과 막부외 붕괴
2007/10/13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6 -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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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08 - [동양사정리/일본사이야기] - 일본사 이야기 11 - (중세입문) 일본 중세사회의 특징과 봉건제도의 성격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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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슈고>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지토>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슈고>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하죠.

슈고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영주(다이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 슈고다이묘들이 점차 쇼군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기도 하였죠.

그 결과 1467년 발생한 슈고들의 반란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무너집니다. 이 난을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실력자들과 토지를 가진 세력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각각 자신의 지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죠.

오닌의 난으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새롭게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다이묘들을 <신흥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 신흥 다이묘들과 군사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스스로 영토를 지키려는 자치 마을 등 일본 내 많은 세력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다.

전국시대를 이끌어 간 각 지방의 대표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주변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부국강병책과 제가백가들이 등장하죠? 신라말 고려초에 골품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죠?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었죠?

마찬가지의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세력들은 분열된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한 주역으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전국시대의 각각 영주(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가신단을 통제하며 영지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데 이 법을 <분국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내 땅에서는 내 법으로 통치할테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있는 법이지요.

또 다이묘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략으로 중국에서 왕권강화에 기여한 이념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훗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 유학의 장점을 찾아 국가 권력과 군신관계 이념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일본 전국시대는 혼란기 같지만, 유학이 널리 보급되고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획기적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3.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 문물 수입에 불을 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었죠. 보통 유럽말로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멀고 먼 유럽인들이 일본에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아시아의 최강국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혀 동방무역이 원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은 인도의 문물과 특산물을 유럽에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를 뺑돌아 항로를 개척하였죠. 아메리카도 발견했구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강국들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하나님의 나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끌었던 전설의 나라 <아틸란티스>를 찾는다던가, 이슬람을 물리칠 구원자인 <존 왕>이 사는 지구 반대편 기독교 국가를 찾기를 원했죠. 그래서 유럽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새로운 문명을 가진 동쪽 끝의 국가(해가 뜨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팡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1부는 아주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 2부는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나오고 3부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옵니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3부에 나오는 나라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지팡구>였고, 일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걸리버 여행기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세기 동해바다를 일본과 서양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만하죠?

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화약과 화포술을 바탕으로 만든 대포를 일본에 전래하였죠. 당시 중국 대포의 제조법은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최무선이 염초(화약원료)만드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생난리를 치다가 기술을 배워 일본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죠. 일본은 대포와 총포의 주력 화술을 유럽에서 역수입한 것입니다.

신항로 개척기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교(개신교) 국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방 선교에 주력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장들은 크리스트교와 카톨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give and take였던 것이죠.

4.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하면 중국의 삼국지 만큼 유명한 인물 3명이 등장하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다른 인물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가 아닌 만큼 이 3명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나면 정리해 보죠.

이 중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하면 <천하포무 : 천하통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오와리의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와 공격할 상대를 잘 찾아 행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 주변국인 미노와 친선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미노를 공략하는 등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죠.

노부나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류를 잘 볼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식 총포를 도입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철포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 소규모 전투가 아닌 화포를 이용한 전술은 노부나가의 든든한 성공 전략이었죠.

또 새로운 종교인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도입합니다. 카톨릭의 도입은 포르투갈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서, 일본 고유의 기득권층인 불교세력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죠.

노부나가는 서양식 화포로 토지 영주였던 승려 세력을 억압하였고, 혼란기를 틈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죠. 노부나가의 전략은 통일을 위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신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것이여서 그 파장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를 앞세워 노부나가의 세력을 모두 끌어안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식 계승자로서 전국시대의 <통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집권은 많은 골수 노부나가 추종자들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정책이었던 카톨릭 보호 정책을 폐기하고 카톨릭과 연관된 세력들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쟁을 통하여 막부 세력의 결속을 단단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을 놓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쇼군이 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인내한 자였습니다. 그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훨씬 넘긴 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는 이전과 달리 수도명을 막부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막부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쇼군의 자격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비교해, 에도 막부는 수도에서 직접 중앙집권정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부 자체가 수도에서 전국을 통괄하는 체제로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지고 안정적인 막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에도막부는 일본 막부사상 가장 긴 시기를 지속한 막부입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어떻게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장의 키워드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과 사회통제정책>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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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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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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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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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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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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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2 -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오늘 적을 내용은 동학에 대한 2번째 이야기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럼 한번 출발해 볼까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동학은 1850년대 후반부터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죽고난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필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동학은 점차 사회, 정치 운동까지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1870년대의 동학은 흥선대원군 대신 친일적인 성향의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봉건 운동을 일으킬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정부에 의해 크게 진압당해본 경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분히 교세를 확장하고,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이가 2대 교주 최시형이었습니다.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이후 동학의 구조를 양반중심에서 농민중심으로 개편하고, 농민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갑신정변이 농민층을 배제하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동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논리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4년은 뭔가 한번쯤 사건이 터질 만한 국내외적 분위기였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나면서 농민층의 불만이 쌓일만큼 쌓인대다가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농민들은 이미 부패한 나라를 씻어낸다는 반봉건의 이념에,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청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불만까지도 가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시형은 참고 또 참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상은 최시형의 온건노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동학에서 당시 큰 세력은 전봉준, 황하일 등의 남접과 보은 집회를 연 최시형, 손병희 등을 북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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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동학의 확대 지역

2.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집회로 발전해가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예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집회에서의 요구사항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1893년 서울 집회에서도 최시형 등 동학대표 40여명이 광화문 앞에서 <농민들은 동학이 결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운동적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93년 3월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달라졌습니다. 농민들이 많이 모이면서 요구사항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일본의 축출과 탐관오리들의 숙청>으로 바뀐 것이지요. 물론 교조신원운동도 하였구요. 농민들의 요구는 이제 <척양척왜 : 서양도, 일본도 적이다>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정부는 1893년의 집회가 보은, 금구 등에서 계속되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종교운동이라면 달랠 수 있겠지만, 이제 주체세력이 현실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농민층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죠. 동학의 운동은 점차 운동을 넘어 <개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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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880년대 이후 농민항쟁의 증가 추이

특히 전봉준 등의 남접 우두머리들은 최시형, 손병희 등의 북접의 우두머리들이 연 보은 집회와는 별도로 금구집회를 열어 집회 후 1만명의 농민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고도 하였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아니였어도 동학농민운동은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1880년대 이후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농민봉기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에, 그 무리 4000여 인들은 전라도 전주 근방에 모여 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첫째, 국인 가운데 우리 당을 지목하여 사악함을 주창한다고 하면서 경멸하는 이가 있으니, 명령을 발하여 그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속히 쫒아낼 것

섯째, 요즈음 지방 관리들이 포악하게 거두고 억지로 빼앗아 생민이 도탄에서 고통을 당하니, 마땅히 이들 지방 관리를 쫒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3개조를 들어주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들 4000여인은 한 걸음도 이 곳에서 물러날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1893. 4. 18, 전봉준의 요구와 금구 집회-

3.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되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전라도 고부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 하류에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가혹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전봉준 등 고부 군민들은 2차례나 고부관아에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강제로 쫒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을 죽이고 봉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일으킨 횡포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만연한 시기였죠. 문제는 그 횡포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3년의 집회를 여러차례 경험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많았던 농민들인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때 농민들의 봉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달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다시 커졌습니다. 이용태는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 등에게 역적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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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가운데 사람이 전봉준

결국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농민 대표들은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1차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합니다.전봉준이 농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만든 아이디어는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원으로 이름을 적어 누가 지도자이고 주동자인지를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름이 원으로 둘러 적혀있어서 누가 주동자인지 모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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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사발 통문의 원본

사발통문의 내용(판독된 부분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집행본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감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바로 향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전략에 능하고 만사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

이제 농민들을 모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럼 백산의 격문과 농민들의 행동 강령을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義)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축멸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밑에서 굴욕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호남창의대장소, 백산봉기문 -

첫째,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마라!

둘째, 충과 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하라!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는 자들을 모두 박멸한다.

-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 대한계년사 권 2, 갑오조 -

백산격문을 보면 전봉준 등이 봉기한 이유가 단지 고부라는 한 마을의 사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라를 제 자리에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지역문제였다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두 모이는 대규모 전쟁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고을 단위의 봉기가 아니라 각 지역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정부에 항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군은 민란을 일으킨 후 당황하는 정부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의 공정한 부과와 잡다한 세금 혁파>가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또 균전사의 수탈을 시정하라는 것도 요구사항의 내용이었습니다.

균전사는 1890년대부터 정부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서부(군산, 익산, 고창, 정읍을 잇는 황해 루트)의 11개 고을의 개간사업을 위해서 파견한 관리를 말합니다. 균전이란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균전사들은 왕실의 힘을 등에 업고 농민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개간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관리하고, 지대를 걷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나쁜 탐관오리들이 잡다한 세금을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때문이었죠.

농민들은 장성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싸울 의욕이 없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실제 전라도 지방의 정부군은 농민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방군 자체가 농민들 중에서 착출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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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정부군에 잡혀 있는 동학농민군

4. 농민들이 전라도를 스스로 다스리다.

농민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군대가 농민군에게 연전연패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정부는 바로 청에게 연락을 하여 원병을 요청합니다. 1894년 5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입성하였습니다.

문제는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군도 같이 충병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때 길게 서술한 톈진조약 기억하나요? 청과 일본은 조선에 출병과 철수를 상의하여 같이 처리한다는 조약이었죠.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군이 조선에 오자 또 다시 당황합니다. 청을 통해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일본이라는 여우새끼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정부는 청과 일본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고, 농민군과는 타협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과 타협하기 위해 고종이 농민들에게 했던 따끔한(?) 한마디를 살펴볼까요?

관리의 탐학과 살상은 내 반드시 엄하게 징치하리라. 세상에는 대의가 있는 것이요 조정에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어찌 진을 치고 기를 꽂아 창의라 내세우며 대의를 어지럽히는가?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집으로 돌아가 업에 편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펴게 하리라.

- 고종 황제의 글 -

농민들 역시 청, 일본이 조선에 와서 설치는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농민군은 전쟁 50일만에 정부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타협의 조건은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일부를 들어주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농민들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도 추가되었죠. (전주화약)

이제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처럼 모든 사회를 뒤집어 엎어 버린 혁명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싸워 자신들의 요구를 현실로 바꾼 것입니다. 농민들은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53곳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국가적인 개혁 사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1894년 같은 해의 갑오개혁으로 일부 계승됩니다.

집강소 정강

1.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일
  1.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일
  1.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일
  1.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일
  1. 잔민 등의 군안을 불지를 일
  1. 종 문서는 불지를 일
  1. 백정의 머리에 폐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일
  1. 무명 잡세 등은 혁파할 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을 일
  1.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일
  1.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일
  1.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일

농민들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발표하고 전근대적인 <구제도의 모순>을 바꿔나갑니다. 12개조의 내용은 대부분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12개조의 내용도 한번 볼까요? (내용 분석은 동학농민운동 4부할 때 몰아서 하겠습니다.)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자 이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났습니다.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몇 달도 가지 못합니다. 일본 때문이었지요. 다음 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인 <일본군과의 전쟁>을 한번 다루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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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 -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은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과 이견이 많고, 사람들간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라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글을 쓰기가 어렵네요. 3편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적으면서 각 편마다 약간의 다른 관점들을 제시해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편은 동학의 초기 활동, 2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3편은 3.1운동기까의 동학활동과 동학운동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제 글재주로 어디까지 명료하게 적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설과 정설에 의거해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적어볼께요.

1. 동학이 밝음을 주장한 것은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1859년경입니다. 동학의 교조(교조 : 종교창시자)는 수운 최제우 선생입니다. 최제우는 백성들이 세도 정치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민중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어느 선인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그럼 동학이 창시된 배경을 하나 하나 볼까요?

동학이 창시될 무렵의 185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흔히 이것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삼정이란 백성들에게 걷었던 조선 후기 세금의 통칭으로 토지에서 걷는 전세, 군포를 내는 군정, 곡식종자를 빌리고 이자를 내는 환곡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제도는 일정한 기준이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였습니다. 전세는 일정한 기준없이 많은 세금을 걷는 남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정은 원래 군대를 가야할 사람이 군포 1필을 내면 일정기간 동안 군을 면제해주고, 대신 납부(대납)한 군포로 직업군인을 모집하는 모병제가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법을 확립한 것이 영조 때의 균역법이었죠.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군포는 1필만 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 문란한 사회에서의 탐관오리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군포를 더 많이 걷어갑니다.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여 군포를 걷기(백골징포), 16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군포걷기(황구첨정), 이웃에게 대신 군포를 받기(인징), 친척이 대신 내기(족징),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라 호적을 속여 군포를 걷기 등등 이였죠.

환곡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래 환곡은 춘궁기 때 쌀이나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 때 돌려받는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이자를 받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반중 손실분이나, 곡식 종자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의 손실비용만을 이자로 받는 <일분모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백성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이자를 받았죠. 하지만 조선말기 사회가 어려워지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가자 지방 관리들은 이 환곡을 고리대처럼 이용하여 아자놀이를 시작합니다. 요즘 사채 광고의 이자 66%는 이 때로 보면 애교일 정도입니다. 고려 시대 이래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면 더 이상은 받지 말라>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원금보다 비싼 이자를 받았고, 빌리지 않겠다는 사람을 협박하여 거액의 이자로 대출을 해주기도 합니다. 거짓 장부를 만들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렸다고 하고, 대출금의 담보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잡아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군전(군역세)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세금담당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 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균전사 : 토지세 관리자)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보조 사무관)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참고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 오하기문 -

이러한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량을 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 쪽으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의적단을 만들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이란 종교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종교였습니다.

2. 동학이 받아들인 사상들

1860년대 조선의 상황은 탈선 직전의 사춘기 학생과 같았습니다. 서양의 열강들은 이양산을 보내 조선과 통상을 하자고 성화였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청이 서양열강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같이 하기엔 너무 멀리간 나쁜 친구>라는 표현으로 멀리하였는데, 이 때 조선은 스스로 어떤 성장의 길을 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망국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동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의 근간을 <유교에서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유교의 경천사상이란, 성리학이나 고증학 같은 신유교가 아니라 중국 고대 한나라의 훈고학이나, 더 멀리 중국 주나라 때의 이상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유교 사상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중국 고대 사상 중 천자가 하늘과 감응한다는 동중서의 <천인상응론>과 같은 <하늘, 사랑, 애민> 등의 이론을 그 사상의 근간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전통 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하늘, 사랑>의 이념을 도입합니다. <부처>가 주장한 인간 평등사상, 민간에서 말하는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한 하늘과의 만남> 등이 모두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종래의 모든 전통사상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경전으로 작성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개편한 사상이 곧 동학인 것이지요.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천주교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인간평등과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기에 최제우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수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동학에 들어가 있는 사상은 놀랍도록 방대하고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조선 후기 집권층의 사상인 주기철학에서의 개방성도 수용합니다. <이가 불변한다는> 주리론보다는 <기가 가변적이라는>주기철학이 보다개방적이죠.

주역에서의 시세와 오행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국 고대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정리하고 한대 유학을 정리하면서 완성하였던 개념입니다. 천자와 하늘이 감응하고,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이며, 오행은 순행한다는 중국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이죠. 동학에서는 이중 우리 현실에 적합한 사상인 <시류에 따른 오행의 순행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변화는 순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입장이었죠.

동학에서는 종래 샤먼적인 귀신신앙과 예언을 중심으로 한 도참사상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예언적인 도참사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무당신앙, 귀신신앙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되어 동학의 사상을 현실개혁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예언사상은 조선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였다는 운수사상과 연결되는데, 이 운수사상은 오행의 순환에 의해 화-목-수-금-토의 순환논리 상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오행순환설과 연결됩니다. 모든 전통신앙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중국에서 말하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는 아니였습니다. 최제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이었죠. 이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꿈꾸는 사상이었습니다. 동학의 새로운 세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고(인내천), 모두가 평등하며(만민평등), 침략적인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를 보호하며(보국안민),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감싸안는(제폭구민)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후천개벽),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알리는(광제창생)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현세의 문제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적 성격을 띈 것은 교리 자체부터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동학은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반봉건적 운동), 우리의 자주적 개혁을 방해하는 침략적인 외세를 규탄하는(반외세적 운동) 운동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의 교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시된 것이 1857-59년 사이이고, 교조인 최제우가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죽은 것이 1864년이므로, 동학이 등장에 정부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최시형이 동학운동을 마치고 눈을 감을 무렵의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동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해월(2대 교주 최시형)에게 물었다. "개벽이 언제 이루어지리이까?"

해월은 말했다. "산이 검어지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의 병마가 이 땅에 왔다가 물러갈 때니라."

아래의 글은 1863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2대 교주를 최시형으로 임명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을 교주로 임명하고, 1년 뒤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합니다. 아마 이 때 이미 최제우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으나 오히려 힘이 있나니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3. 동학의 체계를 확고히 한 최시형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미처 기틀도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30년 이상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인물입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펴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전이 2권인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처럼 시대가 달라서가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2원화하여 동학의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동경대전은 성리학을 공부한 어느 정도 지식있는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와 일화를 수록하여 작성하였죠. 그러나,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시조, 창가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책과 대중가요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도 2원화하여 체계적인 틀을 잡습니다. 흔히 말하는 포접제(抱接制)가 그것이죠. 동학에서는 촌락마다 포라는 조직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동학의 최고 수장은 교주인데, 그 교주 아래에 향촌마다 포가 있어 그 포의 소교주를 대접주라고 합니다. 또 대접주 아래 향촌 말단 사회인 <면, 리>에는 접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교황 - 교구(대사제) - 사제로 이어지는 교구제와 비슷하네요. 교구제와 포접제의 공통점은 종교적 위계단위가 국가행정구역의 단위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단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동학교단은 국가 행정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봉기할 때에는 동학의 지휘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것이지요. 또 대규모의 봉기가 있을 경우에는 포접제를 통하여 농민군이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대 이 포접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치를 하는 <집강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포접제를 통해서입니다. 실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였을 때 포접제를 통하여 전라도에 53개의 민정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이 집강소가 지방 행정과 치안의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4. 동학운동이 점차 정치운동화 되어가다.

최제우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하여 처형된 후, 1860년대의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 차원의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이 현실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종교운동적인 특징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최제우가 죽은 이후 교단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1862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임술농민봉기 이후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지휘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은 그것에 적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63년부터 10년간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을 괴롭힌 원흉인 세도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에게 동학이 굳이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들의 1순위 요구인 환곡의 폐단 등 삼정의 문란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대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이 시작되자 동학교단에서는 정치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 것은 흥선대원군기 이필제의 난 부터입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출신으로서 자신과 같은 몰락양반들과 함께 군현단위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성격이 다른 민란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민란이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교조신원운동을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면, 이필제의 난은 지방관아를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는 반국가적 반란이었습니다. 이필제는 자신이 백성을 구원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이 <정감록> 등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인물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이필제의 난은 이필제 외에 곳곳에서 동지들이 같이 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 밀고로 실패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이필제 뿐이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종교 재건작업이 한창인 때에 정치적 변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필제의 주장에 설득되어 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성공하여 경상도 일부를 점령하고 관청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란에 의아해하는 농민들은 이 난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이 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필제는 죽었고, 최시형은 이렇게 지식인 중심, 몰락양반중심의 정치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후 동학의 정치 운동은 철저히 농민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880년대 최시형은 개화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묵묵히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써갔으며, 포접제, 용담유사의 간행 등으로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계속 진행합니다.

1890년대에는 본격적인 동학교도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서 교주 최시형은 정치적 변란 보다는 조직의 강건함을 바탕으로 정부에 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봉준 집단 등 지역 농민 집단은 이미 반정부적인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주 긴 포스트가 될 것 같네요. 실제 동학농민운동은 수십개의 다양한 사료를 정리해서 사료 위주의 포스트를 구성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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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1-9장. 중국에서도 불교의 전성시대가 끝나다!

- 불교이야기에 대하여...

8장까지 동아시아 불교전파사로 연재하던 이야기의 제목을 <불교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인도, 중국 불교 이야기가 끝나고 한국, 일본 불교 이야기를 전개하려니 제목의 뉘앙스가 별로인 듯 해서 바꾸었습니다. 앞으로의 불교이야기는 1부의 인도, 중국 이야기를 이번 포스트에서 끝내고, 한국과 일본의 불교에 대하여 글을 써볼까 합니다. 이 포스트를 사상 속 역사여행에 넣은 이유는 불교이야기 이후, 유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종교 외 사상까지 한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1. 마지막으로 중국 불교의 끝을 보며... 복습이나 할까요?

중국 불교의 전성기는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였음을 지금까지 설명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불교가 왕권을 위해 기여한다는 <왕즉불 사상>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많은 고승들은 자신만의 이론을 내놓기도 하고, 인도에 구법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위진남북조가 끝나가면서 중국 불교는 <왕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진정 불법을 위한 민중의 종교로 거듭나려는 몸짓을 계속 보여왔습니다. 그 때 마다 왕권을 <불법이 왕법에 도전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교를 탄압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폐불사건>이라고 하죠.

중국의 불교도 인도와 마찬가지로, 그 종교의 참뜻을 밝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이념을 갖는 순간 국가에 의해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불교를 몰아낸 새로운 사상들은 불교 사상에서 특정한 부분을 채용한 신사상들이었습니다.

예로 인도에서 진정한 인도인의 종교를 자청한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한계점을 불교 사상으로 극복하여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물론 불교 역시 브라만교의 윤회설이나 업설을 통해 탄생한 종교라는 것도 예전에 설명했었지요. 중국의 성리학이라는 신유학 역시 중국 종래의 훈고학의 문제점을 신불교인 <선종>의 수양사상을 빌려 극복했던 종교였습니다. 자 그럼 서론을 이만하고, 중국에서 불교가 밀려는 상황을 한번 볼까요?

2. 썩은 종교에는 핏물만이 고일 뿐이다.

당나라는 전통적으로 도교를 신봉한 국가이지만, 불교 역시 존중하였습니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불교의 교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불교 교단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난 장에서 설명한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불교 교리를 설명한 것도, 불교 자체를 국가에서 인정해 달라는 하나의 메시지이자 국가와 불교 교단의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었죠.

하지만, 불교가 불교의 참뜻을 추구하는 순간, 인도, 중국, 한국을 막론하고 큰 문제점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내세에 의지하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문제점이었습니다. 또한 국가불교가 아닌 종파불교가 성립되면서 사원경제가 발달하고, 불교교단이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당나라 중기 이후 불교 교단의 세가 전 중국을 덮을 정도로 위세가 강해지고, 수많은 종파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습니다. 이 때부터 생각있는 유교주의자들은 유교의 위기를 생각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여말선초에 신진사대부들이 불교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죠.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사람은 수나라 시대의 <왕통>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수나라 시대는 아직 불교교단이 정립되지 않았을 시기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격하기 시작한 사람은 당나라의 유교 선구자 <한유>입니다. 한유의 <진학해>에 나타난 생각을 한번 볼까요?

입으로는 끊임없이 육예의 문장을 읆고, 손으로는 그침없이 백가의 서적들을 뒤적였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등잔불 아래에서 쉼없이 공부하였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도 단 하루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이처럼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을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유학을 선양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을 배척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행동은 모두 도리에 합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의 찬동이나 상사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한번 입을 열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되어 귀양살이를 가기 일쑤였다.

운명은 나를 종롱하여 마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수 같구나. 여러 차례 일에 실패하여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겨율에는 아이들이 춥다고 울어대고 풍년이 드는 해에도 처자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어댄다. 나 자신은 또 늙음에 쫒기어 머리칼과 이가 빠졌으나 어니 한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구나.

한유는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황제와 신료들을 끊임없이 질타하였습니다. 헌종 때 석가문불의 뼈 한마디가 궁내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그것에 제사지내기에 바빴습니다. 한유는 죽음을 각오하고 글을 적기를 <동한의 군주들이 불교를 신봉한 이후부터 모두 단명하였구나>라고 적었고, 그것을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까지 불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는가. 황제와 정치를 위해서는 불교의 폐단을 없애야만 한다. 구름이 큰 봉우리를 가리고 있어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눈은 온 땅을 덮고 있어 말이 앞으로 가려하지도 않는구나. 내 조양으로 귀향을 가게 되더라도 뜻은 꺽을 수 없겠구나. 후세에 나의 말을 전하려면 책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한유는 불교의 잘못된 점을 말하기 위하여 많은 글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적은 글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화려하기만 한 심오한 말이 아니라, 한나라 훈고학 이래 잘 쓰이지 않는 옛 글(고문)으로 글을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고문부흥운동>의 선구자라고도 합니다.

이 후 그의 뜻을 이어받은 송의 인물들은 적극적인 불교 배척운동을 시작하면서, 진정한 유교를 부흥할 것에 매진하였습니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상, 중, 하의 삼품으로 구성되었다는 <성삼품설>을 주장합니다.

불교에서처럼 윤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여러개이므로,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며, 어떤 사람은 어떤 길로도 스스로 갈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후 유학자들은 불교 배척운동을 하면서도 한나라 훈고학과는 다른 사상적 체계를 만들어 갑니다. 송대 만들어진 성리학은 한나라 시기 훈고학의 <자구해설>을 넘어서서 인간의 <심성>이 무엇인가까지 연구하는데, 사실 이것은 불교의 <선종>에서 강조하는 <이심전심>의 본체와 연관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리학의 인간과 우주 심성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인간의 마음은 깨달음으로 통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요.

오늘은 지난 여덟 장의 인도, 중국 불교사를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별 할말도 없는 당 중기 이후의 불교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한국 불교사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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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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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안자묘를 다녀와서...

1. 성리학을 우리 땅에 알린 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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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은 우리 나라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알린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에 성리학이 전래된 것은 송나라에서 발흥 성장한 것과 때를 같이한 인종 전후기입니다. 그러나 고려 초기, 중기의 성리학이 발전하는 것은 고려 중기에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벌귀족이나 무신정권기에 굳이 성리학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몽골의 침략이 있은 이후, 원나라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초기 주자 성리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원나라가 중국 성리학을 변형시켜서 북방 민족적 성격을 가미한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 북방 성리학은 송나라 주자 때의 <수기>를 강조하는 개인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치인> 즉,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안향은 충렬왕 대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입니다. 안향은 주자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는 뜻에서 주자의 호가 회암인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회헌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늘 답사는 안향의 신주가 있는 의왕시 안자묘를 다녀왔습니다. 그럼 안자묘에 대한 이야기를 몇가지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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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향의 초상화, 소수서원>         <사묘재실 :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전남문화재자료 제29호>

2.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영정

위 왼쪽 그림을 보세요. 안향의 초상화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기를 소개해야 하는데... 여긴 너무 유명한 곳이니, 저는 남들이 안가는 안자묘를 중심으로 설명하렵니다. 안향 초상화를 한번 볼까요? 이 초상화는 비단에 채식하였고, 충숙왕 5년에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충숙왕은 안향이 성리학을 소개한 공로가 크다고 생각하여, 원나라 출신의 화가를 불러 안향의 모습을 자세히 그리라고 지시했다고 하네요. 이 그림은 반신상으로서 머리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습니다. 국보 111호입니다.

실제 조선시대의 최초의 서원이었던 백운동 서원은 안향을 추모하는 서원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은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강직함과, 제사를 지내는 부분을 당시 왕인 중종에게 알렸고, 중종은 백운동 서원에 <소수서원>이라고 하는 간판을 다시 내려주면서 노비, 토지, 서적을 주었답니다. 왕이 현판과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는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합니다. 이 때부터 안향은 조선 성리학의 아버지로서 곳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오른쪽 그림은 안자를 모신 대표적인 곳인 전남에 있는 사묘재실입니다.

3. 이제 안자묘를 찾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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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왕역에서 내린다                       2. 도깨비시장을 가로지른다                  3. 부곡중학교를 찾는다.

안자묘를 찾아가려면 재일 먼저 지하철 1호선 의왕역에서 내려야 합니다. 의왕역에서 내려서 안쪽으로 쭈욱 들어가면 의왕역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도깨비 시장이 나옵니다. 사람들도 많고, 인심도 좋은 곳이지요. 여기서 시장을 가로질러 쭈욱 10분쯤 걸어가봅니다. 시장도 구경하면서요... 근처에는 철도대학과 철도박물관이 있는데, 여기도 구경하면 금상첨화... 안자묘는 체육공원이라는 교통푯말만 쭈욱 따라가면 됩니다.

안자묘는 부곡중학교 사거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부곡중학교 학생들은 정작 학교 앞에 있는 건물이 안자묘라는 것을 아는 학생이 별로 없더군요. 호기심에 모르는 척 계속 물어보았는데, 아는 학생이 없었습니다. 다들 수행평가는 멀리있는 문화재로만 하나봐요. ^^

안자묘는 안향의 후손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시는 집 안쪽에 있었습니다. 밖에서 일단 사진을 몇 장 찍고, 벨을 살포시 눌러봅니다. 안 계시네요... 어쩔 수 없이 옆집 식당은 <보릿골>로 간 후, 사진 촬영을 허락받고 식당 2층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유리가 두꺼워 사진이 잘 안찍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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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 모든 사진을 더블클릭하시면 크게 원본으로 보여집니다.>

4.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촬영하다.

다시 벨을 눌렀더니, 할머니가 <학생이십니까?>라고 바로 물어보십니다. 학생들이 문화재 탐방으로 많이 왔다가나보네요. <아뇨, 선생님입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들어가서 안자묘를 몇장 사진찍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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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차분히 읽고 싶었는데, 이런... 옥편이 없군요. 걍 나중에 인터넷에서 찾아서 아는 부분만 읽어볼랍니다. 할머니께서는 친절하셨습니다. 안자묘에 대해서 설명해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예 안자묘에 관련된 유인물을 먼저 주시더군요. 안자묘도 많은 분들이 찾아오나 봅니다. 후손이신 할머니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신주가 있는 건물들 사진을 찍었습니다. 평일에는 건물 내부 공개는 안된다고 하시네요. 외부만 찍고, 내부 사진은 나중에 안자묘 제사 때나 찍을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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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친회에서 관람객에게 배포하는 안자묘 소개글

저희 회현 안향 선생의 24대 종손 안재찬 인사드립니다. 오늘 이곳 안자묘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안자묘에 대한 말씀을 간단히 소개합니다.

안자묘는 고려시대 명현유학자 문성공 회헌 안향 선생의 신주(위퍠)를 모신 사우이며 부조묘라고도 합니다. 부조묘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분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어 영구히 제사를 지내게 하는 외례의 특전입니다. 안자묘는 원래 한양(서울 도동)에 모셔져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종손이 황해도 연백군 백천땅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 사우를 재건하고 수백여년 동안 봉안하고 있었습니다. 이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국토가 양분되어 1947년 가을에 선생의 신주만을 모시고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소규모 사우를 짓고 제사를 모시던 중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977년 가을에 여기 의왕시 월암동에 부지를 마련 안자묘를 신축 이전하였습니다. 현재 도시 계획 관계로 부지가 일부 도로에 편입되어 협소해졌습니다.

안자묘의 <자>자는 예로부터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 성현에게만 부여되는 최고의 존칭입니다. 1917년 우리나라 유림들이 공자의 고향인 중국 궐리, 연성부(우리나라 성균관)에 가서 안향 선생의 신도비명을 요청하니, 공자 76대 사손 연성공 공영이 선생은 비문을 지어 말하기를, "성인의 도를 밝혀 600여년 동안 빛나게 한 사람은 실로 우리 회헌 안자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도학이 높으신 안향 선생이 안자라는 최고의 호칭을 받게 된 시초입니다.

고려시대 최초로 주자학을 도입한 선생은 고려시대 대학자이며 명신이셨고, 고려 고종 30년 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홍면 석교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처음 이름은 유요 후에 이름은 향자로 개명하였으며, 호는 회헌, 본관은 순흥 안씨, 시호는 문성공입니다. 안향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셨으며 18세 원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곧 교서랑으로 관직을 시작하셨습니다. 선생은 33세에 상주 판관으로 부임하셨을 당시 민중을 혼란시키는 즉, 혹세무민의 미신을 타파하여 민풍을 쇄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하였습니다.

이후 선생은 충렬왕 15년 고려 유학제가가 되어 왕과 공주를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가셨을 시에 주자전서를 보시고 기뻐하시며 손수기록하고 또 공자, 주자화상과 문묘에 사용할 제기, 악기, 육경, 제자사 등을 구해오셨습니다. 그리고 주자학 연구에 전념하시고 신유교문호를 부흥케 하셨습니다.

유교는 조선조 500년 동안 윤리도덕의 통치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로 인해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습니다.

한편 선생은 인재양성을 위해 섬학점(장학금)을 마련학여 많은 학자와 인재를 베출하였으며, 유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선생은 도첨의중찬, 즉 영의정 정일품을 하시고 향년 64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장지는 경기도 장단군 전서면 대덕산 명승지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이북입니다. 선생은 주자학을 전래하여 발전시킨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서 이제는 성균관 대성전에 배향되고 서원, 향고, 사에도 배향되어 춘추로 유림이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안자묘는 전국 자손들이 매년 음력 9월 12일 기신제를 드리는 곳입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올해(2007년)로 701주기가 됩니다.

선생은 유국자제생문에 즉, 성균관 학생들에게 밝히신 글에서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에 있어 인륜 도덕을 잘 지키는 데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첫째,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도하고

둘째, 국민은 국가에 마땅히 충성하고

셋째, 예의 범절로 가정을 다스리고

넷째, 신의로써 벗(친구)를 사귀며

다섯째, 몸가짐을 반드시 삼가고 조심하며

여섯째, 무슨일이든지 시작하면 반드시 정성을 다하라

선생님은 위 여섯가지 덕목은 항상 우리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간단히 소개를 마치며 모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 425 안자묘 보존회>

5. 종친회에서 제사지내는 광경

안자묘는 매년 음력 9월 12일이 되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종친분들이 큰 규모의 제사를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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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에 제사지내는 모습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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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순흥안씨 다움 사이트>

첫 번 째 기행으로 집 근처에 가까운 곳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곳이 안자묘인데, 너무 대책없이 갔다와서 쓸 말이 거의 없군요. 다음부터는 좀 계획적으로 연구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역사 유적지 돌아보려고 엄청난 거금을 털어서 천만화소짜리 삼성 디카도 샀는데, 아직 찍는 방법도 서툴러서 사진들도 맘에 안드네요. 틈틈이 관심있었던 여기저기를 다녀보고 글을 올려볼 예정입니다. 글과 사진이 서툴러도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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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