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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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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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불교 수용과 불교 전파

2년 여름 6월에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고구려본기(삼국사기)에 이런 말이 있다. 소수림왕 즉위 2년 임신(372)년에 전진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에도 아도가 동진에서 왔다. 이듬해인 을해 2월에는 초문사를 지어 순도를 그곳에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를 있게 하였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인 것이다.

- 삼국유사 3권, 순도조려 -

8년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우호를 약속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을 인질로 보내왔다. 3월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게 하였다. 담당관청에 명하여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

진나라 지둔법사(동진의 고승 지둔도림)가 망명(고구려 승려로 추정)에게 글을 보내 이렇게 말하였다.

<상좌 축법심은 중국 유공의 제자로서 성품이 곧고 빼어나 도와 속을 종합하였고, 지난날 서울이나 시골에 있을 때 법강을 유지함으로써 나라 안팎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도를 크게 한 거장이었다.>

둔공(지둔도림)은 중국에서 덕망이 뛰어난 분으로 둔공과 더불어 말을 나누고 사귀는 이들은 반드시 훌륭한 인재와 뛰어난 학자들이었을 텐데, 망명이 외국 선비로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 같은 글을 보냈으리요. 또 불교가 이미 중국 진나라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퍼졌으니, 송나라와 제나라 사이에도 당연히 호걸들이 많이 있어 함께 때를 떨쳐 일어났을 텐데, 아쉽게도 기록해놓은 책이 없으니 슬프기만 하다.

- 해동고승전 권 1, 망명 -

사료해석 : 7차 교과서에 실려있는 순도에게 불교를 전파받아서,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라는 대목의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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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교육제도와 불교 수용

2년 여름 6월에 진나라 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太學)을 세우고 자제(子弟)를 교육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

습속에 문지기와 말먹이 따위의 집에 이르기까지 서적을 매우 좋아한다.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경당이라 부르는데, 자제(子弟)들이 결혼할 때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활쏘기를 익힌다. 책은 오경(五經)과 사기(史記), 한서(漢書)와 범엽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와 손성(孫盛)의 진춘추(晋春秋), 그리고 옥편(玉篇)· 자통(字統)· 자림(字林)이 있다. 또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를 가장 귀중하게 여긴다.

- 구당서 열전 동이 고려 -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고사(古史)를 축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만들어 이름을 <유기>라 하였는데, 이때 와서 깎고 고쳤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

자료 참조 : 고구려 교육에 대한 사료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대 율령반포, 불교수용을 하면서 태학을 설립하여 왕권강화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태학은 우리 나라 최초의 대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당은 초등에서 고등까지 다양한 교육을 책임지는 기관이었는데, 특히 독서, 습자, 활쏘기 등 다양한 서민교육을 하였습니다. 신집 5권은 이전의 유기를 간략히 축약하여 영양왕대 고구려의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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