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9.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일본 고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은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왜와 관련된 내용들 중 일부입니다.

- 한서지리지(반고)

기원전후 왜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100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왜에서 낙랑에 조공을 바쳤다

- 후한서 동이전 : 1-2세기 묘사

왜의 노국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 광무제에게 인수 받다

왜의 스이쇼 국왕이 안제에게 노예 160인을 바치다

소국간 다툼이 심하여 전국적인 대란이 일어나다

- 삼국지 위지 왜인전(진수) : 3세기 묘사

왜의 대란에서 살아남아 30여개 국을 지배할 정도로 __________의 여왕 히미코가 성장하다

히미코는 위에 사신을 파견하고 다시의 구리 거울과 친위왜왕의 칭호를 얻다.

히미코 사후 __________은 혼란에 빠지나 여왕 이요가 왕위에 오른 후 안정을 찾다

이요는 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위 국가는 여러 호족들과 연합한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띄었다.
② 위 국가의 위치는 야마토라는 설과 규수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기록의 부재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③ 일본 서기에서는 위 국가의 히미코 여왕을 신공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④ 일본 서기에 따르면 위 국가는 한반도에 진출해서 임나일본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⑤ 히미코 여왕은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하려고 했다.

 

2. 다음은 일본 고대 불교에 대한 설명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538년, 백제의 성왕이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보내었다. 그러나, 모노노베 가문은 <조상신의 분노를 산다>는 이유로 불교의 공인을 거부하였다. 상대적으로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소가 가문은 불교를 통한 중앙집권과 가문 독재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소가 가문이었지만, 이단자였던 (1)________ 태자는 최초의 일본 여제였던 스이코 천황을 대신하여 셋쇼정치를 하였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의 스승을 모시고, 불교와 율령을 받아들여가며 소가 가문이 아닌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가야가 멸망한 이후, 가야 유민 및 삼국의 불승들이 일본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정착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불교 문화였던, (2)________ 문화였다. 호류사의 백제관음상은 7c 일본 불교의 절정을 보여준다.

8c에는 당과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3)_________ 문화가 유행하였다. 국제적이고, 힘있는 국가들의 문화는 일본 문화에도 활기를 주었다. 이후, 진무 천황은 주변국의 국제적, 귀족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활기찬 불교문화를 이끌어갔다.

헤이안 시기엔, 헤이안 천도를 반대한 구카이가 밀교(진언종)를 들여와 만다라상, 부동명왕상 등이 유행한다. 그러나 10c 후지와라 가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독자적인 일본의 불교 문화를 추구하면서 그동안 15회나 파견했던 (4)_________ 도 폐지하였다.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 불교는 11세기 이후, 아미타 신앙이 확대되면서 지방에 까지 퍼지기 시작한다. (5)____________ 은 지방세력들에게 유행하면서, 선종과 함께 새로운 시기를 준비하는 종교였다.

 

2.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용어가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쇼토쿠
② 아스카
③ 하쿠호
④ 견수사
⑤ 정토종

 

3.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1) 645, 다이카 개신 : 나가노 오에 황자의 쿠테타로 소가 가문을 제거하고 천황중심 신정부가 건립되다.

(2) 646, 개신의 조 : 호족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의 토지로 규정하다.

(3) 672, 진신의 난 : 호족세력을 이용하여 즉위한 덴무 천황이 호족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하기 위해 고사기, 일본서기를 편찬하다.

(4) 701, 다이호 율령 : 중국식 조용조 제도를 실시하여 백성을 국가에 귀속시키려 하다.

(5) 743, 간전영년사재법 : 개간한 모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다.

 

3. 위 지문의 1-5번까지의 내용을 설명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다이카 개신 이후에도 당의 율령체제를 답습하기 위해 수차례의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② 개신의 조는 통해 행정, 군사, 교육, 세법, 호적작성 등 백성들을 제민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변법과 같은 성격이였다.
③ 일본서기는 천황가의 개인 서장용으로, 고사기는 국가통치지침으로 만들어졌으며, 공통적으로 천황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④ 다이호 율령 때 양천제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인 반전수수법을 시행하였다.
⑤ 간년영전사재법으로 토지사유화가 인정되어, 일본식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를 실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4.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4. 위 그림은 간전영년사재법 이후 성립된 10-12세기 장원입니다. 위와 같은 장원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골라보세요.
① 황실과 연관된 유력 귀족들이 직접 토지를 경영했다
② 조정의 관리들은 장원에 출입할 수 있었고, 세금을 걷었으므로 서양과 같은 불입권, 불수권은 없었다
③ 유력농민들은 명목상으로 귀족들에게 개척 토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국가의 간섭을 피하려고 했다.
④ 토지를 직접 경작한 하층민은 모두 노예였다
⑤ 토지를 개발한 재력을 가진 자들은 사무라이 계급과 대립하였다

 

5. 다음은 일본 초기 막부에 관련된 용어입니다.

- 정의 : 가마쿠라 막부에서 비롯된 쇼권과 주종관계에 있었던 무사의 총칭

- 등장 배경 : 초기엔 쇼군 미나모토와 일반무사사이의 개인적 쌍무관계였으나, 가마쿠라 막부 성립 되면서 제도로서 고정되었다.

- 내용

1. 자신의 영지를 개간해 토지가 있는 개발영주가 충성을 맹서한 뒤, 영지 소유권에 대한 공문서를 받는다.

2. 교토에서 황실의 경비, 쇼군 저택 경비, 쇼군에 대한 노역, 전시 군역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부역을 담당할 만큼의 영지와 재력이 있어야만 했다.

3. 분할상속 원칙으로 점점 영지가 영세화 되어 무로마치 막부 이후 본래의 취지가 사라져갔다.

4. 에도 막부에서는 쇼군을 직접 만날 수 없는 막부의 하급 신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5. 위 지문과 관련된 용어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쇼군         ② 고케닌         ③ 셋쇼         ④ 칸바쿠         ⑤ 원청         ⑥ 다이묘         ⑦ 사무라이
⑧ 지토         ⑨ 슈고            ⑩ 신판         ⑪ 후자이         ⑫ 도자마      ⑬ 죠닌            ⑭ 고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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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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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고대 역사서 - 고사기, 일본서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목적은?

고사기는 최초로 일본 역사를 체계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고사기는 712년, 그리고 얼마후에 720년경에 일본서기가 편찬되었지요. 이 2권은 모두 덴무 천황의 명으로 제작됩니다. 덴무천황이 누구인지는 일본사이야기 7번에서 얘기했죠? 가장 유약한 왕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력을 획득하여 일본 천황가를 중앙집권화 시킨 그 인물입니다.

보통 중앙집권화가 완성되면 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역사서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가까이 우리 나라만 한번 찾아볼까요? 신라에서 편찬된 국사는 진흥왕이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할 때 신라 왕실의 권위를 알리고, 진골귀족의 계보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도 고구려의 기상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었고, 백제의 서기도 백제가 동아시아 상권을 주름잡고, 중국 2군에 영향력을 펼칠 때, 왕실계보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도 덴무천황이라는 가장 강력한 천황권 밑에서 편찬됩니다.(시작은 덴무찬황 때이지만, 워낙 방대한 사업이라 끝나는 것은 후대의 천황대일입니다.) 덴무천황은 황실의 계보를 남기기 위해 전승자를 찾아서 황실계보를 암기시킵니다. 이 황실 계보를 <제기>라고 합니다. 또 <구사>라고 불리는 신화와 설화도 전승자에게 암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기시킨 내용이 이후 유실될 것을 염려하여 암기한 내용을 책으로 적으로 명하였는데, 이것이 <고사기>라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입니다.

2. 고사기의 내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고사기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본 덴무천황기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일본 천황가의 역사라고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는 3권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 중, 하의 권은 각각 중심 줄거리가 있습니다. 상권은 전설속의 신들의 이야기입니다.(이 신화이야기는 일본사 이야기 2번에서 다루었습니다.) 중권과 하권은 그 신이 천손강림을 하여 지상의 천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천황가의 계보와 황태자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와 비슷한 맥락으로 구성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단군신화와 다른 점은 당시 천손의 후예라는 천황가에서 직접 자신들의 이야기를 약간 객관적 근거가 없이 적었다는 점이 좀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초기에는 고사기를 사서로 다루었지만, 지금은 스스로도 상, 중, 하 전체를 한데 묶어 일본 신화이야기로 보는 관점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 고사기의 편찬 목적은 진신의 난(일본사 이야기 7편 참조)을 넘긴 덴무천황이 지방 호족들의 도전을 사전에 차단하고, 천황의 신성함을 대외에 과시할 목적으로 만들었죠. 따라서 이 책은 정사라기 보다는 천황가의 개인적 소장물로 만든 책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이 천황권의 전성기이자, 불교문화의 전성기라는 점입니다. 특히, 한반도에서 불교를 전래한 이래로 한반도 불교에서 전래된 설화들이 일본에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러한 측면들이 고사기에는 많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또 이 고사기에 나오는 일본 신화는 각종 세계 신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유입되어 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합니다. 즉, 중국, 한반도, 태평양, 그리스 신화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도 많다고 주장하는데, 일본이 주장하는 그리스 신화까지의 지역확대는 좀 무리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반도 설화가 재일 많다고 보는게 타당하죠.

3. 고사기의 실제 내용

상권의 내용 요약 - 일본의 신화 이야기

천지가 처음 태어날 때 시작인 어둠이었고, 무질서였다. 이 어둠과 무질서 속에서 양과 음이 생겼다. 이 양과 음은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천상계가 있어 세 명의 신이 출현하였는데, 이 신들은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라는 남매 신을 낳았다.

이 남매 신은 결혼하여 새로운 섬들을 많이 만들었다. 이들이 결혼하면서 낳은 섬들이 바로 지금의 일본 열도가 되었다. 이들은 일본 열도를 만든 뒤 태양의 신(아마테라스), 달과 역법의 신(츠쿠요미), 전투의 신(스사노)를 낳았다. 이자나미는 불의 신도 낳으려 했지만, 그 뜨거운 불의 열기 때문에 호히려 죽고 말았다.

이자나기는 아자나미가 죽자 실의에 빠져 그녀를 만나러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지옥에서 무서운 모습으로 변해있는 이자나미를 보고는 놀라서 도망가 버린다. 이자나기는 실의에 빠져 천상계를 아마테라스에게 넘긴다.

아마테라스는 천상계를 잘 다스렸지만, 스사노가 악행을 저지르며 형의 말을 듣지 않자 분노하여 숨어 버렸다. 그래서 태양의 신이 사라진 지상에서는 밤이 계속된다. 신들은 당황해서 아마테라스에게 돌아오라고 사정하였고, 아마테라스는 신들이 주선한 잔치에 감동받아 돌아오게된다. 그리고 아마테라스는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던 동생 스사노를 천상계에서 추방하였다.

스사노는 일본열도로 내려왔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하던 야마타노오로치를 퇴치하고 영웅이 되었고, 지상은 스사노의 후손인 오쿠니누시가 지배하게 되었다. 오쿠니누시는 지상국가 건설에 힘쓰며 백성들을 잘 다스렸지만, 천상계의 아마테라스는 그 자손인 히노호니니기에게 명하여 지상을 다스리라고 하였다. 히노호니니기는 지상으로 내려와 오쿠니누시의 국가를 물려받고 지상을 다스리게 되었다.

히노호니니기가 천상계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것을 천손강림이라고 한다. 천손강림 이후 일본열도는 하늘의 아들이 지배한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국가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후예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가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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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권의 내용을 우리 나라 사람들 중에서는 한국 신화를 가져다 베낀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조신 아마테리스는 해모수로, 천상계 이야기는 환인이야기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인데, 이렇게 까지 비약하는 것은 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동아시아 신화는 다 비슷비슷하거든요. 일본신화가 우리나라 신화를 베낀 것이라고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우리 신화는 중국이나 러시아 신화를 베낀 것이 됩니다. 사실 시기를 막론하고 동아시아 설화는 다 공통적으로 천손의 강림, 인수교혼(동물과 사람이 결혼하는 것), 곰이 등장하는 설화가 대부분 다 나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런 설화를 유도했다고 보는 편이 좋지요. 또는 북방에서 설화가 차츰 남방으로 전승되었다는 견해도 있구요.

중권의 내용 요약 - 진무천황과 신공황후(4대 천황 ~ 15대)

중권의 내용은 천손강림 이후 4대 진무천황이 신의 후손으로서 일본열도에 실력을 행사하였고, 일본 열도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은 이후 천황가가 발전해 나간다는 내용입니다. 진무천황 이후 후손들 얘기는 그저 그렇고, 중요한 것은 야먀타이국의 히미코(신공황후)의 이야기입니다. 고사기에서는 진구우라는 여자로 나옵니다만, 몇 년뒤 편천된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로 격상시킵니다. 신공황후는 일본에서의 강력한 세력을 구가한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이라는 나라를 동아시아에 각인시켰고, 한반도 남부를 점령해 200년 동안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여기서 고사기의 허황된 면을 발견합니다. 일본 천황가 이야기야 허구이든 진실이든 무시하면 되지만, 한반도 자체를 일본이 점령했다는 이야기는 우리로서는 이 책이 뭐하는 책인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충분한 소재거리가 됩니다. (일본사 이야기 2편의 야마타이국을 참조하세요)

하권의 내용 요약 - 16대 천황 ~ 33대 천황

하권의 내용은 16대 천황에서 33대 천황까지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관심가는 부분은 이 하권의 주요 줄거리가 야마토 정권에서의 천황가 이야기라는 점인데, 야마토 정권은 일본의 소국들이 뭉쳐서 만든 지방 호족들의 연합국가였다는 점입니다. 천황은 그 연합정권의 수장 성격이었지요. 따라서 천황가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세력과의 끊임없는 사투를 벌였고, 또 지방 유력 호족의 가문에서 천황이 나오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즉, 당시 호족가문과 천황가는 권력구도에 따라 상호 결혼을 하였고, 당시 남매간에 결혼까지 있었을 정도였기 때문에 유력호족가문에서 천황과 이어지는 핏줄만 있으면 그 기문소속의 천황을 배출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가문으로 천황가를 휘어잡고, 불교를 수용하여 강력한 유력가문이자 천황가를 겸했던 가문이 바로 소가씨였습니다. (일본사 이야기 6 - 소가씨 이야기 참조) 특히 소가씨의 33대 천황인 스이코(소가노 아마코) 천황은 쇼토쿠 태자(소가노 쇼토쿠)와 함께 아스카 문화를 주도하면서 일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후 소가논 집단의 멸망 부분은 나오지 않고 끝납니다. 다이카 개신 이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4. 그럼 일본 서기는 왜 편찬한 거야?

고사기가 편찬된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서기가 편찬됩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고대 신화부터 서술하여 고대 신화가 천황가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으로 서술 방향을 잡아 천황가에 신성성을 부여해 지방호족가문보다 우월함을 과시하고, 국민을 지배함에 있어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역사책의 차이점은 정사인가, 개인적 장서인가의 차이입니다. 고사기는 천황가가 개인적으로 보존할 개인적 장서이므로, 그 후속편이 없고, 이야기도 고대신과 천황가의 족보 연결차원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당시 중국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는 분위기에서 중국식 정사와 같이 공식적으로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일본서기 이후에는 속일본기, 일본후기 등등이 계속 편찬되었고, 이러한 일본의 정사들을 한번에 묶어 <육국사>라고 부릅니다. 이 책은 중국사서와 마찬가지로 편년체입니다. 일본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이러한 육국사는 <신의 책>으로 여겨지면서, 심지어 역사가들까지도 이 책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전까지는 이 육국사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없이 그저 신성한 책으로서 이 일본서기를 바라보게 된 것이지요. 그 이유는 일본의 천황가의 영향력이 너무 거대하고, 신성화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냥 신화수준인 고사기는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수 있지만, 정사인 일본서기는 우리 한반도의 역사서술 부분에서 우리나라 및 중국측의 기록과 너무 달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본서기가 우리 역사서 및 중국사서를 참조하면서 천황가에 불리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눈에 많이 띄는데, 일본측에서는 그 부분에 대하여 우리 역사서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주장합니다.

5. 그럼 일본 서기에 기록된 한반도 관련 역사의 논쟁점들...

신공황후기 설화 이야기도 연대 차이가 심하다.

고대 일본 천황가의 기록들은 기원후 150년 이전의 기록들이 우리 사서나 중국사서에 비해 그 연도차가 너무 큽니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가 일본 서기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나오는 세오녀는 잔잔한 사랑이야기 인데, 일본서기에서는 영웅의 면모를 가진 여걸로 나오죠.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시기의 왕들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거의 5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우리 설화에 나오는 망부석 이야기도 삼국유사와 일본서기의 기록이 200년 이상 차이나고, 신라와 일본이 전쟁을 했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맞는 연대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기록들이 거의 다 연대가 안 맞습니다. 대체 이 일본서기는 무슨 책을 근거로 연대를 상정한 것일까요?

신공황후의 신라 정복설

일본 서기 신공황후기에는 일본이 신라, 백제를 평정하고 고구려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으로 거의 말이 안되는 해석인데요. 또, 일본은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하여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위조하기도 했습니다.(이 이야기는 고구려사 편에 아주아주 자세히 기록할 것이구요, 또 광개토대왕릉비 전문을 한국사 사료방에 전문 다 옮겨 놓았습니다.)

즉, 광개토대왕이 백제와 일본을 공격했다는 비석 내용을 글자 몇글자 바꾸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신라를 정벌했다는 이야기로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일본은 그들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삼습니다. 미칠 노릇이지요.

칠지도 문제

칠지도 문제는 고대 한국과 일본사에서 큰 논점이 되는 문제중 하나입니다. 칠지도(일곱가지가 난 칼)라는 칼을 백제 부흥기 때 성왕이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이 전해주었다는 부분의 용어가 과연 <하사하였다>인가 <바쳤다>인가라는 해석을 둘러싼 논쟁입니다. 한자로 <공공>이라는 글자는 주었다라는 뜻인데, 이것은 해석하기 따라서 하사도 되고, 바친 것도 되거든요.

우리는 당연히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지만, 일본에서는 이것을 당시 중앙집권화 하던 일본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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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논점들을 살펴보면 고대 일본서기에서 최소한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를 볼 때, 신공황후기 이전의 기록은 잘 인용안하는 것이 최근의 추세라고 하는군요. 일본에서는 국가가 편찬한 정사에서 조차 고대 신화와 실제 역사가 섞여 있으니, 역사가들은 일본 사서를 읽을 때 그 내용을 잘 판단하고, 인용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일본 사서의 문제점을 심도있게 따지지 않고, 그냥 객관적 시선에서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편에서 다룰 때는 조목조목 학술적인 근거를 들어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환단고기와 같이 신화적 성격으로 비판하지는 않을 것이며, 역사적 근거와 자료를 가지고 잘못된 점들을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이만 적고 공부하러 가야겠네요... 오늘은 휴가라 직장을 쉽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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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씨 이야기

1. 불교 수용과 소가씨의 주장

일본 고대 초기인 6-7C를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는 소가씨입니다. 일본 고대 초기의 야마토 정권은 유력 호족들이 연합한 상태에서 서로간의 합의에 의해 천황을 가장 신성한 권력자로서 모시는 구조였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이러한 유력 호족들에 의한 정권을 탈피해서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싶어했지요. 그 당시 국제 정세는 중국, 백제, 신라, 고구려 모두 불교 수용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구축했으므로, 천황은 백제 성왕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불교를 통한 국가통합을 추진하려 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도 카스트 제도를 초월한 만민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교리가 국민 통합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 불교에서의 절대적인 구원의 신인 미륵불, 전륜성왕을 왕에게 대입하여 왕 자체가 부처가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는 사상을 백성에게 주입하여 왕권을 신성시 하였죠. 즉, 불교의 수용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인 야마토 정권을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때 절대 안된다며 반대한 유력 귀족이 모노노베씨 가문 이였습니다. 반대로 이러한 정책을 찬성하며 선진불교문화를 수용하자는 유력귀족은 소가씨 집단이었습니다. 소가씨 집단은 천황의 후원을 받아 모노노베씨 집단을 압도하여 그들을 몰아내고 일본 조정의 실권을 장악합니다. 소가씨의 노력으로 일본에서는 불교가 공인되고, 국가가 중앙집권화되었습니다.

2. 소가씨 집단과 쇼토쿠 태자 사이의 비극

실권을 잡은 소가씨 집단은 여자를 천황으로 임명한 뒤 그 가문이 모든 정치를 독재하려 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소가씨의 실력자는 소가노 우마코였습니다. 소가노 우마코가 천황으로 임명한 여자가 소가노 집단 출신의 일본 최초의 여제 스이코 입니다. 그리고 소가씨는 자신들의 친척 중에서 유력자인 쇼토쿠 태자를 황태자로 삼아 소가씨의 영원한 집권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쇼토쿠 태자는 고구려인과 백제인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소가씨와 다른 사상을 배워갑니다. 고구려, 백제가 강해진 이유는 중앙집권화를 빨리 이루어 국왕권이 강했다는 생각에, 쇼토쿠는 소가씨 집단보다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고구려, 백제를 모방한 관등제(12관등제)와 율령(헌법17조)를 만들었습니다. 또, 견수사를 수나라에 파견하면서도 수와 왜가 대등한 관계임을 주장하는 등 자주적인 국왕권을 추구한 인물입니다. 또, 쇼토쿠 태자는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라는 전설도 전해져 오는데, 이것은 그의 총명함과 천황가의 신성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입하려는 후세의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쇼토쿠 태자의 정책은 소가노 가문의 영광을 추구하는 가문 이념과 맞지 않았고, 태자는 결국 소가씨와 대립 끝에 정권에서 밀려나 불교 공부를 하면서 살다가 자살했다라고 합니다. 기록에는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건 신빙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다이카 개신과 소가씨 가문의 몰락

소가노 가문은 점점 견제할 세력도 없이 독자적으로 너무나 성장했습니다. 그들을 견제할 세력은 아무도 없었고, 천황마저 그들의 가문에서 독점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독재는 다른 귀족 가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결국 소가노 가문은 다른 귀족들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쟁이나 다른 공적인 방법을 통한 것이 아니라 암살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가노 가문의 유력자들은 쿠데타를 일으킨 나카토미노 가문에 의해 하나하나 암살로 제거된 뒤 결국 몰락하게 됩니다.

다시 일본의 정권은 천황에게 돌아왔으며, 천황인 나카노 오예 황태자는 <개신의 조>라는 것을 발표합니다. 이것은 토지공전제를 표방하는 법인데, 그 내용이 당시 호족 가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즉, 호족은 모든 토지를 가질 수 없으며, 토지와 모든 백성은 천황의 것이라는 법입니다.(공지공민제) 과연 당시 그것이 잘 시행되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법이 천황권 강화에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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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로 통해 총체적으로 보는 일본 고대사

1. 일본 고대 불교를 정리해보자.

일본 고대사는 불교로 정리하면 편합니다. 따라서 일본 고대사에서 중요한 불교부터 일단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2. 5-6C 야마토 정권 초기 불교

초기에는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C 백제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때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그 유명한 일본의 쇼토쿠 태자이죠. 쇼토쿠 태자는 실제, 아직기와 왕인 등 백제인들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6C 무렵 초기의 일본 불교는 한반도의 삼국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아스카 문화>라고 하는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를 수립하였습니다. 담징 들어보셨죠?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나 석가삼존상 등이 이 때 일본 초기의 불교문화를 대표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삼국문화를 넘어 중국문화를 직접 수입하기 위해 견수사(수나라에 파견), 견당사(당나라에 파견)와 같은 사신들을 중국에 보내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항해술이 별로라 가다 죽는 경우가 절반이상이라고 하네요. 그래도 일본인들은 목숨걸고 갔답니다.

3. 7C 다이카 개신과 율령

7C가 되면서 이제 일본은 한반도에서 문화를 받아들일 통로가 막히게 됩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백제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이제 일본인은 통일신라와 교류하면서 신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하쿠호 문화>입니다. 일본에서는 이 문화를 당나라 초기 문화라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보면 통일신라의 문화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건 한일양국의 주장이 달라서 이 정도에서 넘어가겠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제 백제가 사라지자 적극적으로 중국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불교를 넘어서서 당나라의 율령체제 자체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이라고 합니다. 다이카 개신의 특징은 국왕 중심의 유교적 중앙집권체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중앙집권화를 일본은 이제서야 하는 것이지요. 이 일본식 중앙집권화의 특징은 천황중심의 중앙집권체제라는 점입니다. 천황이 고대 신화와 선민사상을 가진 특수한 존재로 나서면서, 유교를 통해 중앙집권을 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율령의 수용과 불교 사상의 심화로 일본은 이 때부터 동아시아 문화를 제대로 수용하는 국가가 되었지요. 다이카 개신은 곧, <동아시아 문화권>으로의 편입을 뜻합니다.

4. 8C 나라시대

나라시대는 약 50년정도 되는 짧은 시기입니다. 자세한 것은 뒤에 다루겠지만, 이 시대의 특징은 신라, 발해, 당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헤이죠코로 천도한 시기입니다. 이 때 일본은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불교와 승려세력이 너무 강해졌고, 불교와 승려세력이 나라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강한 시대라고 파악하시면 됩니다. 또, 불교세력을 등에 업은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면서, 고사기, 일본서기 등 역사책을 제작하는 등 변혁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5. 9C- 12C 초기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의 특징은 이제 점차 한반도,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 일본이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는 시기입니다. 이 때 일본은 가나 문자가 제정되었고, 귀족 계급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나로 표현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도 만들어 갑니다. 이 귀족들의 시가를 <와카>라고 합니다. 또 중국에 보내던 견당사의 파견을 완전히 중단합니다. 그리고, 일본 자연과 풍속을 아름답게 그리는 풍속화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 시대의 분위기는 중국에서 받아들인 율령체제를 동요시키면서, 천황의 신성함을 크게 훼손시키는 시기입니다. 지방 호족들이 성장하면서 장원(호족들의 대토지)이 확대되고, 이들이 귀족사회를 이끌면서 왕권을 약화시킵니다. 또, 외척들이 천황권에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황제권이 많이 약화되지요. 즉, 불교에서의 부처라고 주장하던 왕권을 더 이상 귀족들과 무사들은 인정하지 않게됩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천황권이 몰락하게 되고, 일본은 무사들이 막부를 열어 다스리는 무가정권시대로 넘어갑니다. 이게 일본의 중세시대지요.

불교를 위주로 보니, 일본 고대사의 흐름이 환히 보이지요? 자 그럼 다른 파트에서 일본 고대사를 한번 바라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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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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