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노트 (2)

근대 출발기의 세상 변화 - 제국주의 이야기

1. 제국주의 시대의 도래

자, 그럼 한국 근현대사를 이야기 해 봐야겠지?

근데, 헛소리 한번만 더 하고 넘어가자. 지난 시간에 말했지? 우리 근대사의 기준이 바로 <자본주의 국가의 성립>과 <근대민족주의 국가의 성립>이라구... 그런데, 아시아의 국가들이 식민지 상태로 출발한 이상, 이 2가지 근대적 요소는 <서양의 영향력>을 제외하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 말야....

그럼, 아시아를 점령한 서양 국가들은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는 소리네? 특히, 자본주의가 최고 수준에 오른 가가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후진국을 점령하는 걸 <제국주의>라고 불러.... 그럼, 근대 자본주의를 알기 위해서 제국주의가 뭔지부터 살펴볼까?

2. 제국주의 경제적 배경 : 산업혁명

제국주의를 알려면 먼저 서양의 <산업혁명>부터 알아야 돼.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들어 봤지?

영국애들이 어느 날, 기계를 만들었어. 기계로 물건을 만들다보니, 물건이 많이 많이~ 생기는 거야.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어. 여기 저기 공장들은 많은데, 기계들이 물건을 팍팍 만들다보니 물건이 남아돌기 시작하는 거야. 영국애들은 고민에 빠지게 되지. 해결 방법은 2가지야. 첫 번째는, 경쟁력이 딸리는 공장이 망하고 돈많은 대기업이 모두 인수하는 방법, 두 번째는 인구가 엄청 많은 다른 나라에 남아도는 물건을 팔아먹는 방법....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해서 나타난 현상이 <독점 자본주의>야.

기계로 물건을 만들다보니, 물건이 너무 많아졌어. 전문 용어로 과잉공급이라고 하지. 그럼, 시장에 물건이 너무 많아지니까 서로 싸게라도 팔려고 하겠지? 물건 가격이 팍팍 떨어질거야. 가격이 떨어지다보니, 자본이 부족한 기업들이 순서대로 망하게 되지. 결국 살아남는 건? 대기업이야.

자.. 이제 대기업 혼자 살아남았으니, 시장을 독점하겠지? 원래 18세기 영국의 자본주의는 <자유 방임주의>였거든? 기업들끼리 알아서 경쟁하게 내 버려두면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믿었어. 가격이 너무 비싸면 사람들이 안 사니까 가격이 내려갈거고, 가격이 너무 싸면 파는 사람들이 가격을 알아서 올릴 거구... 가격이 곧, <보이지 않는 손>이 되서 알아서 시장가격을 조절하는 거야.

그런데,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하면 지 맘대로 가격을 정하고, 상품의 생산량이 지멋대로 정하게 되는거야. 이렇게 되니 국가가 기업의 눈치를 보게 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게 된 거지.

대기업은 이제 이렇게 외치겠지? 내 말 안들으면 다 <빵구똥구야~>... 내 말 들으면 친구, 아니면 적이거든... <내놔.. 내놔... 다 내꺼야...다 내꺼라구...> 하이킥에 나오는 악동 해리처럼 막무가내가 되 버린거지.

야 이 빵구똥구야... 어디서 내 물건에 손대... 다 내꺼야... 다 내꺼야...  해리 vs 신애.... ㅋㅋㅋ

<독점 자본주의>와 함께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은 <금융자본주의>야.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했으니, 물건을 더 많이 만들어 팔 <자금>이 필요하겠지? 당연히 은행, 증권회사 등은 대기업에 돈을 빌려주고, 이익금(이윤)을 나눠먹으려고 할꺼야. 그렇게 기업과 같이 커간 금융기관들은 기업의 주식을 사기 시작하고, 기업의 핵심 사업에 투자를 시작하지.

기업은 더 많은 물건을 만들고, 더 큰 사업을 벌이다가 해외까지 진출해서 물건을 팔아먹게 되. 은행은 끊임없이 돈을 빌려주고 기업의 주식을 틈나는대로 사게 되고.... 이렇게 사업이 커지다 보면 문제가 생겨... 갈수록 어마어마해지는 돈을 <은행>이 아니면 빌릴 곳이 없게 된 거야.

이제 기업은 큰 사업을 하나 할 때마다 은행이 돈을 얼마나 빌려줄까나... 하는 눈치를 보게 되고, 결국 은행이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등장하게 되지. 이렇게 금융자본(은행, 자사)이 산업자본(기업)을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의 독점자본주의를 <금융자본주의>라고 부르는거야.

자, 그럼 국내 시장도 독점했겠다, 든든한 은행줄도 있겠다.... 이제 국내 산업혁명을 마친 영국의 독점 기업들이 진출할 곳은? 바로, 인구가 많아서 옷을 사입을 사람도 많았고, 나름대로 아시아의 문명 지역이었던 <인도>였지. 물건을 팔아먹으려고 세운 회사가 바로 <동인도 회사>야.

결국, 제국주의를 경제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돼. 산업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유럽국가들이 독점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고, 후진 지역에 상품을 팔려는 거지. 근데, 아시아 애들이 유럽 물건을 잘 안사주니깐, 아싸리 식민지로 만들어서 강제 매입을 시키는 거야. 물건을 팔아먹은 뒤에, 다시 원료를 착취해서 또 물건을 만들고, 또 팔아먹고... 그러다 보니 기업이 더 커져서 다른 지역에 또 진출하고, 또 점령하고 또 팔아먹고....

경제적으로 제국주의를 정의하다 보면, 뭐든지 삼켜 버린다는 구약성경의 괴수 <리바이어던>이 생각나게 되지. 선두주자 영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전세계를 다 삼킬 기세였거든.

여왕 3종세트(엘리자베스 앤 + 빅토리아) : 자자... 이왕 땅따먹기 하는거 알짜베기 땅들을 우리 영국이 먼저 먹어야겠지? 어디가 좋을까?

15세기 드레이크 : 저기, 일단 돈이 좀 필요하니깐 제가 해적질좀 해올까요? 스페인 무적함대 몇대 박살내면 여행 자금좀 벌거 같은데.....

16세기 윌터롤리 : 그럼 저는 그 돈으로 황금 찾으러 신대륙 탐험좀 할께요. 뭐 <엘도라도>, <아틸란티스> 이런 데 좀 찾다보면 뭔가 금은보화가 좀 걸리지 않겠어요?

17세기 크롬웰 : 그럼 난, 요즘 세계무역에서 좀 힘좀 쓰는 네덜란드 배들 좀 몇대 격파하고, 항해조례를 만들어볼께... 이제 우리 영국의 시대가 다가오는 거 아니겠어?

18세기 멘델 : 일단, 쓰레기들좀 청소하구요. 제가 법칙 하나 만들었거든요. 우성이 열성을 지배한다물학적 칙은데유.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한다, 독점 기업이 노동자들을 지배한다.... 어디나 적용되는 만능입니다유...

19세기 스펜서 : 다원의 진화론 아시죠? 그것도 좀 적용해보려구요. 진화론의 약육강식...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 속의 진화론이다. 찌질이는 완소남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그럴 듯 하죠?

20세기 세실로즈 :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아프리카를 영국의 색으로 칠할 것을 인정하는 신일거야. 온 지구가 영국의 깃발로 나부끼는데, 얼마나 영광스러워? 다 영국꺼야~~~

자, 이런 이론까지 무장해서 영국은 여기 저기를 점령하고 다닌다. 그럼 어디를 점령하는 게 제일 효율적일까?

바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와 그 주변을 완전 정리하는 거야. 산업혁명 전까지는 세계 4대 문명 지역이 유럽에 뒤지지 않는 세계 거점지들이었지. 유럽은 그 쪽의 발달한 문명과 어마어마한 인구를 쪼옥쪼옥~ 다 빨아먹을 생각이었어.

먼저, 유럽에 문명을 전파해 준 이집트 문명... 여기를 점령해서 아프리카를 아래로 쭈욱~ 점령하려구 했어.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영국의 종단 정책, 또는 3c 정책이지.

다음, 인더스 문명의 인도...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세웠다가 훗날 영국 직속령으로 만든 땅이지. 인도는 옷감 수요가 많아서 영국의 핵심 식민지였고, 여기를 바탕으로 동쪽으로 쭈욱 가서 미얀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을 모두 점령했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중국... 여기는 굳이 영국 혼자 점령할 이유가 없었어.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주도권을 영국이 가졌지만, 워낙 인구가 많잖아. 걍, 다른 서양 국가들이랑 중국을 나눠먹으면서, 중국의 왕조는 유지시켰지. 
  
  미국이 주장한 이론 중에 이런 게 있어... <공평한 점령의 원리>, 즉 <균등 분점의 원리>라는 건데... 이런거야. 너무 큰 빵을 혼자 먹으면 배탈나잖아? 그럴 땐 친구들을 불러서 파티를 하면서 나눠먹으면, 빵도 처리하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아지겠지? 중국이 그거야... 너무 크고, 인구가 많으니깐 똑같이 나눠먹자는 거지. 중국이 왕조를 유지하면서도 망하지는 않은 이유가 그거야. 중국은 여러 국가들이 나눠먹는 빵이였거든. 빵가게 사장이 있어야 약탈자들이 재미있게 즐기면서 빵을 약탈해먹을 수 있잖아. 그래서 중국은 참 다양한 나라가 여기 저기를 뜯어먹었지.

마지막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여기는 대대로 유럽을 괴롭힌 강력한 <투르크> 족의 본산지야. 영국은 서아시아를 평정한 오스만 투르크의 광대한 제국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면서, 오스만의 모든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정책을 사용했어. 훗날, 오스만과 이란 지역은 영국과 러시아가 나눠먹게 되거든.

3. 제국주의 정치적 배경 : 민족주의

제국주의가 19세기 전세계에 열병처럼 퍼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민족주의> 때문이야. 말했었지? 근대화의 2가지 핵심 배경이 <자본주의 + 민족주의>라구 말야. 그럼 유럽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가 뭘까?

사실 유럽 역사에서 <민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건 최근의 일이야. 그들이 말하는 <고대>라는 시대에는 <로마>라는 제국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국가였잖아. 또 중세 시대에는 프랑크 왕국과 교황으로 대표된 봉건적 사회 질서가 있었구...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건 바로 <르네상스> 이후, 유럽인 스스로가 <근대인>이란 말을 사용하면서 부터야.

그럼, 르네상스 시대에 <민족>이란 개념이 있었을까? 아니지... 당대에는 신분질서가 견고했고, 루이 14세니, 엘리자베스니 하는 강력한 절대 왕이 나타났어도, 그건 귀족과 성직자층을 대변하는 신분제 국가였지, 민족국가는 아니였거든. 뭐,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이념이 있었지만, 그것도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불만을 희석시키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고 보면 되.

럼 <민족>이란 개념은 어디서 나타났을까? 그건, 바로 <시민혁명>이 발생하고 부터야. 우린 모두가 같은 국가안에서 살아가는 같은 <백성>인데, 왜 귀족, 성직자 니들만 잘먹고 잘사니?

그 대표적은 불만의 폭발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지. 성직자, 귀족, 일반 시민이 공존하는 프랑스에서 1, 2계급인 성직자, 귀족만 우대받는 게 얼마나 짜증났겠어? 시민들이 다 때려부서고, <우리도 같은 인간이다>를 외쳤던 그 사건부터 <우리 모두가 같은 민족일 뿐이다>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거야.

그 개념을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면서 곳곳에 퍼뜨리기 시작했지. 프랑스에게 정복당한 민족들은 이런 생각을 했던거야.

합스부르크인 : 와... 저렇게 단합하니깐 나름 강하네... 저것들. 뭐? 귀족과 평민이 같은 세금을 내고,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돈만 있으면 되는거야? 오오.... 우리도 한번 혁명을 일으켜볼까?

프로이센인 : 아나.. 짱나... 나폴레옹 저게 뭔데 자유로운 우리 프로이센을 점령한 거야? 자, 우리 자유 프로이센 국가안의 모든 사람들이 단합해야겠다. 저 웬수같은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우리의 자유를 되찾자...

베네치아인 : 어? 동방무역으로 좀 사는 것 같은 우린데.... 프랑스 떨거지들한테 완전 밀리네. 왜지? 왜지? 그래... 우리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 국가들이 힘을 모으지 못해서 그래... 우리가 연합만 하면 저것들은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데... 우리 이제 통일해야 되지 않겠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된 거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직접 전파했다기 보다는, 나폴레옹이 침략하자 유럽의 사람들이 프랑스인들의 <민족의 단합>을 보게 되었고, 나폴레옹과 독재 군주에게 벗어나기 위해 자유를 외치기 시작한거다. 그것이 바로 유럽인들이 말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본질이었지.

나폴레옹은 자신이 황제가 되어 유럽에 엄청난 제국을 세워서 가문의 영광을 누르고 싶어했을 거야...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겼지 아마? 근데, 나폴레옹은 몰랐을 거다. 불가능이란 말이 없는 사전은, 인쇄가 잘못된 불량 짝퉁 사전일 뿐이라는 것을.... 아니면, 나폴레옹의 어휘실력이 딸렸다거나... ㅋㅋ

근데, 나폴레옹의 유럽 제국은 왜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없을까? 그건 너무나 당연하다. 제국주의가 뭔지 위에 설명했잖아? 제국주의란, <독점자본주의>체제를 갖춘 나라가 타국을 식민지로 삼는 거라구.... 나폴레옹의 어느 구석을 봐서 <자본주의>가 있니? 나폴레옹의 제국은 <민족주의>에는 일부 해당될 수 있지만, <자본주의>가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가 없는 거다.

자 그럼,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를 벗어난, 유럽 애들의 상황을 한번 보자.

프로이센인들과 베네치아인들은 뭉쳐야 살아남는 다는 걸 뼈져리게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독일과 이탈리아는 오랜 분열을 끝내고 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뭐,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이런거 교과서에서 본 적 있지?

결국, 나폴레옹은 유럽에 <민족>들이 뭉쳐야 살아남는 다는 걸 보여주고 만 것이다. 그리고, 통일한 국가들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지. 영국과 프랑스도 여기 저기 식민지를 늘리는데, 우리는 왜 못해?

그리하여, 독일, 이탈리아 등 후발 주자들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민족의 위대함>을 널리 알리기 시작하는 거지. 나중에 히틀러가 이렇게 외치잖아? 우리 독일인은 게르만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게르만인이다. 우리는 바로 <아리아인>이다... 뭐 이렇게... 그리고 유태인 학살하고, 영국이랑 프랑스 애들 째려보잖아.

바로 그거다. 제국주의가 여러 나라 사이에 퍼져서 열병처럼 번진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민족의 영광과 자부심>을 알리겠다는 거였다. 특히, 이제 막 통일한 국가들은 국민들에게 <우리 민족만의 뭔가 한방>을 꼭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 <한방>이 세다는 걸 보여주려고 두 국가가 같이 완전 오버했다가 나중에 세게 2차대전에서 나란히 박살나게 되지... 아시아의 오버국 일본과 함께... ㅋㅋ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1차대전은 바로 이 <제국주의> 때문이었지. 영국, 프랑스 같이 먼저 땅따먹기를 시작한 국가에게 독일, 이탈리아 등 나중에 땅따먹기에 참여한 국가들은 밀릴 수밖에 없었거든.

모로코 사건 아나? 영국,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먼저 땅따먹고 있었는데, 독일이 나중에 아프리카에 가서 <한입만~ 한입만~>을 외치면서 모로코라도 달라고 때쓰다가 영국, 프랑스 양쪽한테 맞을 뻔 했잖아...

사실, 1,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계속 영국, 프랑스에게 덤빌 수밖에 없었던 건, <민족주의>가 무너지면, 위대한 아리아인이라는 국가 이념이 쓰러진다는 절박감도 작용했던 거지.

4. 제국주의 사회적 배경 : 사회진화론

자, 이제 근대화의 2대 동력인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유럽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럼, 다음장부터는 그 2대 동력이 아시아와 한국 근현대사에 어떻게 유입되었는지를 설명하면 되겠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가지를 더 알고 넘어가야되. 유럽애들이 자본주의니 민족주의니를 외치면서 아시아 각국을 점령하잖아? 근데,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무작정 쳐들어가서, 내가 니들 점령할거니까 조용히 점령당해 주세요... 우리가 니네 박살내고, 삥뜯으러 왔지만, 우리 나쁜 넘들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어?

그래서 유럽인들, 특히 산업혁명을 가장 먼저 끝내고, 여기 저기를 점령한 영국은, 자신들의 정복사업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식민 국가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라고 광고하기 시작해... 그 방법은 뭘까?

첫 번째는 종교를 이용하는 거야. 침략과 동시에 선교를 하는 거지. 니들같이 떨거지 후진국 못난이 원시인 같은 아시아인들에게 <하나님>이 누군지, <천국>이 뭔지를 가르쳐주는 은혜를 베풀고, 봉건적인 후진국에게 근대화된 서양 문물을 전파해 준다는 거지. 산업혁명 이후 개발된 선진적인 유럽문물을 접하게 되면, 당연히 유럽 사회를 동경하게 될 것이고, 식민지인들도 뭔가 배우는게 많다고 생각할 거 아냐.

두 번째는, 식민지배가  give and take 라는 걸 강조하는 거야. 영국이 아시아에 물건을 팔아먹으면, 영국도 너네한테 원료를 사줄 거고, 그럼 너네도 공장도 생기고, 산업혁명 노하우도 배우고, 서로 발전한다는 거지. 뭐 근데, 그렇게 생각한 아시아인들은 별루 없다고 보면 되지만...

세 번째는, 식민지배 자체가 당연하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진화론>이야. 이게 제일 중요하지. 뭐 설명보다는 그냥 영국인들이 했던 이 말들이 팍 와 닿을껄?

맬서스 : 산업혁명으로 먹을 게 좀 늘었지만, 그래도 너무 너무 식량이 모자랄 거 같은데... 식량은 산술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구는 더 많이 많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잖아? 그럼 방법은 한가지야. 띨띨한 넘들이 좀 죽어줘야 돼. 빈민촌에 방역작업하는 건 정말 돈 낭비거든? 널리고 널린게 빈민 노동자인데, 저것들이 좀 죽어줘야 영국 사회가 발전할 거 아냐? 모자란 띨띨이들은 식민지에 널리고 널렸거든?

멘델 : 맞아. 우성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인자는 도태되고, 우성인자가 살아남아야 되지. 원래 노동자가 가난한 건 노동자 수준의 유전자 밖에 안되기 때문이지. 어디서 감히 도시 중산층과 똑같이 선거권을 달라고 그래? 저것들... 완전 미친거 아냐?

스펜서 : 다윈의 진화론 읽어봤어? 거기 보면 이런 말도 있잖아. 약육강식, 적자생존. 그걸 세계사회에 적용하면 딱 답이 나온다구. 평생 노동자는 자본가의 밥일 수밖에 없어. 그게 세상의 진리야~ 또,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 영국이 나쁜 나라일까? 아니지... 사자가 배고프다고 사슴을 잡아먹는게 나쁜 걸까? 그건 그냥 세상의 이치을 뿐이야... 약한 나라는 이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이야... 영원히~

그래 ,바로 이거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 진화론을 강한 국가에게 적용시킨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 이것이 바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국가들을 점령하고,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를 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문제는, 한국 근대사의 여러 사건에서 <사회진화론>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점이 곳곳에서 보인다는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갑신정변, 친일개화운동, 애국개몽운동 등등등 많은 운동들은 사실 <사회진화론>을 모델로 하고 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사자같은 일본을 이길 원피스의 당당한 사슴 <쵸파>같이 되려면, 일본보다 강해져야 한다는 것... 그것을 암묵적으로 깔고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다.

일본이 나쁜 넘이라서 우리가 점령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강했기 때문에 우리가 졌으니 일본보다 강해지기 위해 발버둥쳐야 한다는 논리... 우리의 초기 독립 운동은 바로 이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인 것이다.

자 그럼, 재미없는 서양 이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마치고, 우리 근대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겨보자. 그럼 한국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쓩~~~~

http://historia.tistory.com/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 시대구분은 누가하는 거야?

한국 근현대사 낙서장 첫 이야기이다. 근데 말이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용어부터 맘에 걸리네. <근현대사>라니... 그럼 근대, 현대라는 건 뭐고, 누가 기준을 정한거야? 먼저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끄적거려보자.

뭐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사실 말이지.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 알지?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말야.

서양의 근대인들은,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그 시기는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웠잖아.

그런데,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신항로 개척이니 하면서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거야.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였지.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단다.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해 쳐먹은 거 많던데, 이게 야~ 대체, 교황이 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랑크 제랑 따먹고, 치자금 주고 이런 거래 다메? 료 다 았다.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을 좀 죽여놓아야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쓰실거에요. 교황불신 귀족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그 말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돼?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어 본 거야.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고대>라고 기준점을 잡고,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박살난 시대를 <중세>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로 파악한거지. 이 시대 구분법이 여러 서양의 역사 학자들을 거치면서 <현대>라는 살까지 더해서 4단계 시대구분법이 나왔어.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지. 뭐 19세기 이후에 서구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하긴 했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일본 : 되었네 이 사람아..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었고, 니네 발전이랑 조금 다른 면이 많거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안 맞는다. 우린 근대랑 현대 사이에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거든? 오..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하여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일단, 한국사 교과서부터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거든.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많으니, 그걸 참조로 근현대사가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자.

2. 한국 근대와 현대의 기준점

자, 그럼 한국사에서 근대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밝혀보자.

사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서양인들이 구분하는 기준과는 완전 달라. 서양애들의 근대 기준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시기야. 뭐,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가 기독교인들은, <돈 잘 벌어도 천국가유~>라고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는 말을 했다나 뭐래나... 또 로마제국의 울타리에서, 교황의 울타리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잡고 절대왕정이라는 걸 만든 것도 바로 이 <르네상스> 이후야.

아시아의 <근대 기준>은 사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언제 생겼냐는 거야. 근데, 아시아는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거나, 강제로 개항했잖아.

따라서 아시아의 <근대화>란, 거의 대부분 유럽인들이 협박~해서 강제로 <자본주의>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근대란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제적인 개방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서 <민족의 생존>을 생각하게 된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어.

뭐, 유럽과 좀 다른 점이라면, 걔네들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민족의 영광을 널리 알리려는 거고, 아시아인들은 꼴보기 싫은 유럽민족들이 식민지를 넓히자, <니들 짱난다~>면서 저항했던 민족주의라는 거 정도지.

자, 그럼 한국사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준이 감잡히지? 정치적으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립>이 바로 근대화의 기준인 거지.

그럼, 민족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대체 언제야? 이걸 가지고 많은 학자분들께서 싸웠는데, 뭐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거야.

18세기 주장파 : 일본이 안 쳐들어왔어도 우린 스스로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거든? 특히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파들 중에 <북학파> 있었잖아. 우리 민족이 강해지기 위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사람들. 특히, 조선후기에 영조, 정조 시기를 봐봐. 거의 서양의 루이 14세 안 부러울 도로 대군주잖아. 그 때 자본주의가 발달할 딱... 찬스였는데. 박지원의 양반전 보면 양반이 장사하는 방법도 나오구...

흥선대원군기 주장파 :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격파, 미국 격파하고 침략전쟁을 다 막았잖아요... 일본, 청나라 간섭도 다 막아 버리고... 그것만큼 민족적인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대원군기에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서울 등 근기지방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하잖아요?

강화도 조약 주장파 :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이거든? 그 조약으로 우리가 비로소 세계사에 눈뜨고, 자본주의가 먼지 경험하게 된 거잖아. 비록, 일본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조선이 개항하고 자본주의를 배운 건 1876년이야. 또, 일본 덕분에 외세에 저항하려는 <민족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갑오개혁 주장파 : 강화도 조약은 그냥 문서일 뿐이구요. 실제로, 양반, 싱민, 노비같은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건 1894년 갑오개혁 아닌가요?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죠. 솔직히 조선시대에 노비가 <우리는 같은 민족, 평등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겠냐구요.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정치, 사회 개혁이 선행되야 근대화든 뭐든 하죠. 그리고 갑오개혁 때 조세 개혁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국가권력이 성립된 거 아닌가요?

음... 다 조금씩 맞는 말인거 같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나 일반 서적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같다. 뭐... 강화도 조약을 챙기려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략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짜피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럼 현대의 기준은 어디지?

그건, 만장일치야.... 일본이 핵무기 꽝~ 하고 맞아서 망하고, 아시아 전체가 이 날만 되면 모두 모두 기념하고 행사를 치루는 1945년 8월 15일.... 즉 광복절 날이지.

현대가 되려면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국가의 발달>이나, <독점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거잖아. 뭐... 친일파의 국가라면 모를까.... 혹... 요즘 친일을 애국으로 바꿔주시는 뉴라이트 분들이라면 새로운 시대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ㅋㅋ

자, 그럼 재미없는 시대 구분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본격적인 근현대사 낙서에 돌입해보자. 그럼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입과 독자적 발전을 이루려 했던 조선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http://historia.tistory.com/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3)

역사학과 사회학이 싸우던 낡은 시대를 뛰어넘어...

1. 18c :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다.

익숙한 문화 코드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계속 이론 이야기만 해서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 이야기는 이 편만 끝나면 시작될 것이니, 좀 참고 견뎌보자. 자, 오늘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과연 역사학에 가까운지, 사회학에 가까운지 간단히 짚어보자.

역사학과 사회학의 처절한 결투는 18세기 이래 계속되었다. 서양 연대기로 따지자면 프랑스 혁명 전후부터랄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수많은 학문이 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사>와 <사회>라는 항목이었다.

혁명의 기록은 역사이나,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계는 <사회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역사학자같은 사회학자들 이였으니....

사실 서유럽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역사라는 독립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 싶다. 고대라 불리던 사회에서는 과거와 관련된 모든 학문이 다 역사였고, 철학이었다. 중세에는 <신의 역사>가 곧 신학이으로서 역사와 동의어였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역사다운 역사물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서유럽의 <절대왕정>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기록을 현재의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것 뿐이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학, 사회학>을 논의할 뿐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시민정부론도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올바른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밀러의 <신분론>은 사회계급현상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체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를 인용할 뿐이었다.

아담스미스가 <중상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중상주의보다 자율적 가격합의에 의한 시장경제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뿐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원시사회부터 상업사회까지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인구 증가와 자원의 한계>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하지 못한 혁명기 철학자들은 역사는 당연히 <사회>를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자체만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렸을 것이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 19c : 랑케가 뜰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현실 속에서 <아마추어 같은 역사>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랑케였다. 랑케는 1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의 이론은 생략하고 이야기하자.

그럼 왜 뜬금없이 <역사 독립선언>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각국이 새로운 철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 철학은 <계몽 사상>이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철학은 <민중이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긍정하였다. 루소, 로크 등의 시민철학은 왕정을 박살내고 민중의 정부가 가능하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이런 혁명의 시대를 겪은 유럽의 각국은 혁명이 끝나자 새로운 철학을 찾기 시작한다. 이젠 유럽의 각국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일체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등장한 철학이 바로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낭만주의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민족적 자긍심, 끓어오르는 열정과 애국심, 폭발적인 사랑의 힘> 등 내면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었다. 국가는 애국심, 민족의 위대함, 공동체의 단합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수많은 유럽 국가들 안에서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같이 분열된 국가에서는 특히 이 <낭만주의>가 유행하였다. 랑케와 달타이 등은 독일 역사가였고, 크로체는 이탈리아 역사가였다. 이들 분열된 국가에서 <역사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훗날 이 두 나라에서 낭만주의적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 사상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나폴레옹 이래 <국민 교육>과 <시민 교육>을 실시하였고, 역사는 민족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필수교과로 채택되었다. 랑케가 국가 공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 교육이 <본질적 역사>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인 것 이다. 사실, 정부와 역사학자가 가장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상호협조했던 지역이 바로 랑케가 살았던 <분열된 독일>이었다.

이제 역사는 연대기를 보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는 수준의 역사를 벗어나, 국가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학교>라는 지식주입소는 새시대 인력들의 머릿속에 과거의 정치적 지식을 콸콸 쏟아부었다. 역사는 독립했지만, 그 지식의 선택권은 국가에게 있었다. 역사는 국가에 의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한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었다.

역사는 사회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이야기(내러티브)가 되었다. 랑케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랑케의 역사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였다. 서민들의 이야기는 없었으며, 정작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3.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역사 만들기...

19세기 랑케가 역사학의 독립을 부르짖을 때,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콩트가 <사회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있었다.

콩트는 과거를 아주 간단히 정의하였다. 과거란 <종교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발전하였다고 말이다. 콩트 이래, 과거를 간단히 정의하는 사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이 뚜렷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 <사관>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이들 사회학자들의 사관은 <진화론>에 의거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한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으며, 우성은 살아남고 열성을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자연에 적용된다>는 이론을 사회학과 역사학에 인용한 것이다.

진화론을 사회학에 인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스펜서이다. 그는 <노동자는 열성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가난은 자신의 탓이다>라고 말하여 산업 사회의 약자가 무능하다는 것을 진화론으로 증명한다. 또,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한 것은 사자가 배고픔에 양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법칙이다.>라고 말하여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제국시대를 살아간 자랑스런 영국인이었으니까... 그가 생각한 역사는 야만적 무력 사회에서 제국의 산업자본사회로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을 가진 역사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관>은 역사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관이었다.

헨리 메인은 역사를 <노예사회에서 신분사회로,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이동한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화는 인류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라고 본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역사란 원시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본능을 누르고 문명사회로의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는 원시적 유전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명인들 역시 내면 속에는 <성적 본능과 원시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장 역사적으로 유용한 <사관>을 뽑으라고 한다면 <마르크스 사관>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과정을 <원시공동체 - 고대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산업자본주의 - 공산주의 사회>의 단계로 설정하고, 각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의 필연성을 증명하였다. 다음 단계가 전단계가 진화한 결정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딴지를 건 학자들도 있다. 튀니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의 발전 단계는 퇴보할 수도 있다면서 공동체 사회보다 후진적인 <익명성을 가진 사회>를 말하기도 하였다. 

베버는 아예 죽은 마르크스를 평생 비판하면서 살아간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이란 단순한 대립구조에 불과할 뿐, 실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세분화 된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기독교 계층의 힘이 근대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을 바탕으로 아예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껨>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 과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사회의 구성 요소를 <기능론> 입장에서 제시한다.

사회는 우리 몸과 같은 유기체이며, 몸의 각 기관은 맡겨진 기능을 담당한다. 머리, 가슴, 손, 발 등이 모여 하나의 몸을 구성하므로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단, 머리가 손, 발 보다 중요한 기능이므로 그 기관이 우대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머리에 해당하는 엘리트, 손과 발에 해당하는 노동자, 심장에 해당하는 정치인 등등....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다르므로 엘리트와 노동자의 급여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이 전부 존재해야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역사도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과거의 질서를 유지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훗날, 수많은 세부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편에서 이야기 했던 아날 사학의 아버지 <브로델>도 역사 자체를 심층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속에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았다. 역사란, 사회학에서 말하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우연스러운 행동 역시 그 법칙에 제시한 과정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우리는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생각은 다시 18세기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 자체를 알아서 어디다 쓰려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본다. 역사가 마르크스나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결말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 과학이 되는 것일까?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 모든 인간들의 삶을 집어넣어 버린다면 수없이 많은 <다양성>을 가진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은 <역사가 가진 위대한 힘>과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었고, 인간의 미래는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결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주변 이야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역사는 과거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화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4. 랑케를 넘어 역사를 <인문학>으로 만들어 버린 역사학자들...

진화론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일련의 사회학자들 때문에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역사를 사회학과 분리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어 제시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칼을 뽑아든 사람은 <크로체>였다.

도대체 <발전 사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의 동력이니, 역사의 목표니, 역사의 발전과정이니...> 하는 거대한 틀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사회학자들의 역사관은 역사도, 과학도 아닌 어중간한 발전 법칙이라고 비난하였다. 사이비 역사를 넘어,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으로 정립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딜타이>이다.

그는 사회학을 사이비로 몰아세우며 역사학과 분리시켰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과정을 법칙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는 다른 사이비 과학이다. 과학은 외적인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역사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회학과는 학문 체계가 다른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역사학을 <인문학> 관점에서 서술한 학자가 <콜링우드>였다. 그는 과거의 일들은 법칙이 아닌 <과거인의 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로마로 진군한 것은 법칙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 뿐이고, 그 결과는 그의 사상에 비추어 가장 있을 법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살았던 시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역사일 뿐, 그의 행동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 행동 패턴의 일반화를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콜링우드가 생각한 역사는 과거인의 <생각>을 과거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거대한 법칙이나 틀을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학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할 수 있는 이론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또 다시 역사학의 본질을 놓고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5. 20c : 랑케의 정치사를 깨고 다양성을 찾는 역사학자들...

20세기 사회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독립성에 대해 큰 의문을 품게 된다.

사회가 세분화 되면서 역사, 정치, 지리,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분야가 제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학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 학문들은 서로 인접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학과 역사학, 그리고 수많은 학문들은 서로 교류하면서도 독자성을 내세우는 모순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역사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맞게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20세기 역사학의 특징은 랑케가 말한 <국민 공통의 정치사>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인데, 왜 정치사만 다루어야 하는가? 왜 영웅의 일대기만 역사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나라는 랑케의 고향 독일이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패하고, 국가집단의 무서운 광기를 맛본 독일은 의도적으로 정치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가, 왜 히틀러라는 지도자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는가 등의 근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역사는 랑케가 만든 역사의 독립성을 다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회 구조와 변화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사건이 발생한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경향을 묶어 사회구조사 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며, 전쟁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유태인들의 이주와 독일에서의 정착생활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원인을 먼 과거부터 추적하여 <탐문 수사>하듯이 파헤치는 것이다. 이 역사인식론은 랑케를 반발하는 과거 학자들로부터 이어져 세계 대전 이후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발맞추어 등장한 또 하나의 역사 철학은 프랑스의 <아날 사학>이었다. 1편에서 이야기 말했듯이 역사를 오랜시간 동안 서서히 변하는 <지중해>에서의 삶과 같이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도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학은 랑케 사학의 <정치사> 뿐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들의 아주 작은 이야기>들도 역사의 분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랑케의 역사 보다 훨씬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은 것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전쟁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식을 넘어 군사학과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전문 역사가나 사회학자, 군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역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각종 사회학 이론과 통계학 등을 기초로 만들어낸 역사는, 일반인들이 비판하기 어려웠다. 또, 쉽게 쓴 동화책이나 영상물 등 이야기(내러티브)로 만들어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해조차 쉽지 않았다.

또, <인간들의 작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미시사>를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선택을 법칙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불과했다.

<지중해>라는 표본지역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랜시간 살펴보면, 자신의 자연환경에 맞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인간들이 그곳에 살아간다고 해도 아마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고유성을 바라보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 서구유럽에서 보여준 새로운 역사적 흐름은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사회과학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인간 자체>를 연구해야 하는가?

6. 이들의 논쟁을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과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시각은 <구조냐, 인간이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 차이점을 모두 융합하면서 역사의 <세밀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역사를 <진화론>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법칙과 사관은 필요가 없다. 역사가 어떤 형식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주관성>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건, 베버건, 뒤르껨이던 간에 그들은 역사와 사회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포스트모던>일 뿐이다.

랑케가 주장한 <정치사>도 허구이다. 영웅이란 것은, 국민교육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더구나 영웅에 대한 과거의 자료들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은 20세기 역사가들이 보여준 <아주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는다. 왜냐면, 역사란 과거를 살아간 하나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역사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심은 포스트모던과 달랐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인간들이 집단 구조 속에서 살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뒤르껨의 유기체론과 기능론에 입각해서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정하고, 사회 속에서 의의를 갖는 인간을 연구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것을 반박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일률적으로 똑같이 종속되지 않는다. 똑같은 노비가 존재하더라도 신분에 적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이념에 저항하고 새 시대를 지향하는 인물도 있는 것이다.

또, 사회 구조 속에서만 찾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야만 살아있는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아날 사학>은 연역법과 같다. 미리 사회 구조의 특징을 정해놓고, 그 정해진 패턴에 따라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런 사회였으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포스트모던>은 귀납법과 같다. 인간들이 그 사회와 문화의 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하나 하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해 나간다. 이미 정해진 사회 구조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보고, 내 관점에서 구축된 작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는 이런 삶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역사는 과거인들의 일상 생활에 자신을 집어넣어 보기도 한다. 내가 과거인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단, 사회 구조 속에 가두어진 과거인이 아닌,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공유하는 깨어있는 과거인으로 말이다.

역사에 있어 법칙이란,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의 <자료>란 완전한 것도 아니고,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 토대로 삼는 일종의 <참고서적>일 뿐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 의지와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내가 정치사가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 소수 인종들의 이야기, 이색적인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 과거에 파고 들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공유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한 포스트모던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지금부터 그 가능성을 한국 사회 각 분야의 문화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지겹도록 재미없는 이론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고 실제 <문화>를 가지고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해보자.

다음 이야기는 문학에서의 영웅 서사 구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졌길래 <게임 바람의 나라>와 <드라마 주몽>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포스트모던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이 이야기에 나온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법, 제도, 인물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해당되는 입장의 내용들만으로 씌여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혁명 : 자유부터인가, 평등부터인가...

서구 역사가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찾곤 한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하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실제, 근대 유럽의 자유와 평등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였다.

프랑스 혁명을 처음 일으킨 것은 <귀족>세력에 반발한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그들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첫 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의회의 자본가들은 1791년 샤플리에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려 했고, 재산이 있는 자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헌법을 만들었다. 자본가들을 믿고 <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한 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년 뒤, 민중들은 8월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은 <자본가>들의 세상을 다시 부수고, 프랑스 제 1공화정(국민공회) 시대를 열었다. 자본가들을 위주로 하는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았으며, 국왕인 루이 16세마저 사형에 처한다. 93년 헌법에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재산권 위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기준으로 하는 혁명적인 헌법을 다시 만든다. 또, 모든 사람이 직접 선거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평등파>와 대결하려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방토즈>법을 만들어 <재산가>들의 재산을 <혁명군과 애국시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한다. 서구의 근대사 최초로 <자유>가 <평등>에 의해 억압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파 의원>들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 공포정치로 자유를 탄압한 평등주의자 로베스피에르는 죽었고, 부르조아지들은 다시 <재산권>을 최고의 기치로 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 대립했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긴 하였다. 예로 1796년 혁명을 통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추구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의 아버지 <바베프>이다. 그는 재산권 자체를 부정하고, <자유>는 <평등>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곧 바로 <사형> 시킨다. 그 이후 자유주의는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락한 프랑스 경제의 부활>과 <혁명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발표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는 이 것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오로지 혁명의 성과를 <자유>로만 규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유주의 이념을 평등주의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말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성과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조아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을 프랑스의 위대한 국민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통하여 <재산권과 자유권>을 유럽 대부분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등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은 바로 군부에 의한 <탄압>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위대한 법전으로서 법적인 평등과 신앙, 재산, 직업의 자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전의 모든 조항은 개인을 위한 자유보다는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유, 재산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이념은 <자유이념>이 모든 이념을 포괄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자유주의 이념>이었고, 이 자유주의 이념은 유럽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최초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원이 된 혁명에서부터 <자유>가 <평등>을 누르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며, 이 후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 계급의 <평등>이념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시도들은 대부분 <자유라는 인간의 절대 기본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두 좌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이념은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과 맞물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절대적 지원사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극단적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반자유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역사는 이러한 투쟁을 모두 실패로 기록하고 만다.

봉건귀족 세력의 역사적 역할 :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악마세력>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유럽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금기어가 되었다. 유럽의 봉건 왕조들은 빈회의를 통해 혁명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 유럽을 <보수화>하려고 하였다. 유럽의 왕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평등보다는 <자유>이념이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은 산업혁명 등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보았으며, <자유주의>는 이들 자본가 계급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럽의 <정통 왕실>과 성장하는 <자본가>들은 서로 적으로서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 이 때 <지식인과 민중>은 누구 편을 들어야 했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평등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 과거 세력>들인 왕실과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시위에 들어간다. 독일 대학생들은 부르센샤프트 운동을 벌였고, 나폴리에서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결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왕실 질서는 또 다시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규탄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사후의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과 자본가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등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티에르 등 <자유주의자>들은 <민중>과 연합하여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평등주의자>들을 버린다. 민중이 원한 평등선거는 없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부도 없었다. 단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샤플리에법>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모두 적으로 여긴 봉건귀족은 이 둘의 연합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정 : 계속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이 이야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혁명을 이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혁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을 이끈 선구적인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이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또 다시 <평등>의 기치를 잃어 버렸다. 이 때부터 프랑스 민중들은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자유>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주장했던 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편이 되어서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또 한 차례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을 폐위시키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다시 수립하게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 혁명 공화정에 이은 <제 2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제 2 공화정>은 <자유주의>와 극심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급진 평등파>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인 <재산권>을 제한하려 하였고,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온건한 공화파>들 조차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다시 극단의 혁명을 몰고왔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6월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제 2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은 불법이라면서 강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화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도>를 실시하여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체제안으로 포섭해야 했다. 특히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국내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민중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국민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 계급을 떠나 하나이다. 모든 계급의 통일체가 민족이고, 민족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이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 그는 이 <민족>개념으로 국민들의 <냄비같은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평등을 요구했고,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창립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강력한 리더쉽 앞에 <평등주의>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묻혀 버렸다.

영국 :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이념으로 전환되다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국의 <자유주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부터 진행된 우리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들 나라의 문물을 먼저 수입한 청과 일본에 의한 것지만 말이다. 이건 다음 회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을 목격한 <조용한 섬나라>는 이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젠트리들에게 수많은 권리를 주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이다. 그만큼 자본가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나라였다. 무론 의회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본가 위주의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명칭까지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귀족들은 <보수당>에 집결하여 정당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세기 영국은 곡물법을 폐기한다던가, 항해조례를 폐기하면서 자본가들이 해외무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세기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은 <평등>이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이 산업자본가와 같은 권리를 차츰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 유럽 어느 나라이든 19세기 <여성의 평등>을 거론한 나라는 없다. 여성에게 똑같은 보통선거를 준 것은 선진적인 영국도 <20세기>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영국의 자유주의적 발전은 <자유주의 만능 이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자본가들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했던 분야가 바로 애덤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 분야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에 절대 간섭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가격>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내 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유>는 주되, <평등>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은 노동자 책임이므로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는 없다. 빈민촌에는 소독도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정립한 사람은 <스펜서>이다. 스펜서는 이 모든 이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정립시켰고, 유럽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먹이사슬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다. 사자는 강하고, 양은 약하다.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을 사회 법칙에 대응하면?

노동자는 가난한데 그것은 유전자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은 도태되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학자 리카도는 한가지 증명까지 시도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성경이다. 경제는 지대, 이윤, 임금의 3가지로 유지되는데 지대가 커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임금은 그만큼 준다. 노동력이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날 수 없다. 결국 노동자는 항상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진화론을 국가간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먹이감을 구하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한 탈출구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거나 식민지를 만둘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사상은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당위성>으로 설명해야할 사상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나라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서 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약자의 변명은 사회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서 참신한 혁명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타락과 협상을 거쳐 다양한 사상과 연결된 결과, <제국주의>의 호수까지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제국주의를 부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개화기에는 <근대 사상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개화기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도 수용하였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역시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서 <제국주의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제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기에는 <제국주의적인 군사실력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평등주의>의 반격...

사회진화론까지 나아간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평등주의>자들은 수많은 반격을 하고, 저항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이념을 계승한 이들은 중산계급의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급진주의>를 주장하였다. 생시몽과 같은 이들은 폭력혁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자본가와 협력하여 타협을 이끌어내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푸리에는 한발 나아가 현존 제도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결혼조차 부정하면서 성적인 자유까지 주장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생각하게 된다. 무정부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 권력은 모두 <평등>을 억압한다고 본다. 경찰, 군대, 학교, 법원 등은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들 도구는 <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국가의 완전 소멸>이 평등을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국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진 뒤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평등한 노동의 세상을 말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접 코뮌(자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평등>사회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러시아의 바쿠닌은 아예 폭력 혁명으로 모든 것을 부수자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포티긴은 바쿠닌의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것의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그 새로운 세상은 <평등>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수고 민족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대립

독일의 자유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가 통일과 자본가 계층의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지만,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표하여 평등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독일의 현실 때문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 된 이후 동독일의 토지귀족(융커)들과 서독일의 산업자본가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철저한 단결을 주장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은 이렇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 평등함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또 깨드린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현 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단, 이 변증법은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하부구조는 경제력인데, 상부구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독식한다. 역사는 그러한 모순(정)에 대한 투쟁(반)이었으며, 그 투쟁은 항상 새로운 결과(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자유주의(자본주의 : 정)에 대한 평등주의(반)의 투쟁으로 새로운 세상(공산주의 : 합)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의 주체인 빈민층(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해 제 1, 2 인터네셔널을 만들었고 이 국제 평등기구에는 독일계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의회>에 진출하여 <자본주의>가 붕괴될 대를 기다리자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적 기구로 단결하여 훗날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서 이들은 해산하였다.

프랑스.... 왕정과 공화정의 반복 :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프랑스는 제 2공화정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평등>요구로 기득권과 자본가들이 <재산권>을 빼앗긴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재권을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헌법의 큰 줄기였다. 나폴레옹 3세는 기득권을 위한 <쇼>를 많이한다. <자유주의>의 옹호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행설립, 철도 건설, 중공업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워 자본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특히 파리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많았다. 나폴레옹이 실시한 노동자를 위한 <평등> 정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다. 실업자가 늘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평등이란 말 대신 <민족의 영광>이란 말로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점차 불만이 많아졌다. <민족>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부르조아>를 위한 정책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정책은 간단하였다. 나폴레옹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발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을 달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전쟁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화, 연예인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확실한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국민적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샤르데냐 전쟁), 멕시코 원정, 오스트리아 전쟁 등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전쟁을 수많은 이유를 들어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농간으로 패함으로서 <국민적 영광>은 상처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파리 자치정부>가 추진된다.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자, 블랑키 주의자들은 <평등주의>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연합하였고, 파리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혁명 자체가 아니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평등주의>로 국가정책을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전투>라고 역사는 부른다. 자치정부군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항쟁하였다. 국가는 그들을 잡아 바로 바로 총살시켰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죽이지 못한 이들을 파리 시내에 가뒤 굶겨 죽였다. 쥐를 잡아먹으며 항쟁했던 <자치정부>의 모든 이들은 엄청난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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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부에서 다룰 이야기 : 사회주의의 성장 드레퓌스 사건, 카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의 관계, 미국노예해방은 자유주의인가 평등주의인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버린 제국주의, 세계대전 중 평등사상, 히틀러와 자유주의, 냉전시대와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의 등장배경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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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무역의 특징을 갖는 제도적 틀 내에서 개인의 자유 및 기능을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복지가 가장 잘 개선될 수 있으며,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행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데 있다고 제안하는 정치적ㆍ경제적 실행에 관한 이론이다. 이 책은 세계적 담론과 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용어가 된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알아본다. 신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상세보기
강상구 지음 | 문화과학사 펴냄
문화과학 이론신서 19번째권. IMF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지 2년이 지난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의 태동과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저서. 1950-60년대 신자유주의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고 신자유주의 등장과 현대자본주의의 특징을 고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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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항소이유서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인용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저자의 정치문화 에세이. '이 땅에서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나는 국론통일이 싫다',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극' 등 45여 편을 엮었다.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 상세보기
장동진 지음 | 동명사 펴냄
정치의 본질을 다룬 정치철학서. 정치철학의 정의부터 분배의 정의와 평등, 국제사회 정의에 관한 모색 방안 및 자유주의와 한국정치에 관한 내용까지 담았다. 지난 10년간 학술지 및 학회나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와 일부 현대정치 이론가들의 이론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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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식 지음 | 철학과현실사 펴냄
'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란 물음에 깊이 있게 고찰해 본『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자유민주 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왔고 철학공부를 한 저자는 롤즈의『정의론』을 접하게 되면서 잠재의식적 자유정신을 의식화하고 자유주의를 향한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이 나름대로 구상해 온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총 5부로 나누어 마음껏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와 그 적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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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책.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필자의 생각을 상상의 공동체라는것을 통해 접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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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복 지음 | 삼지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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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드워킨 지음 | 한길사 펴냄
로널드 드워킨의『Sovereign Virtue』를 번역한 책. 미국의 롤스 이후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자유주의 평등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평등권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구좌파가 지나친 평등을 추구했다는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구좌파가 추구하였던 평등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현대 정치철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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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사회진화론 2장> 노동자는 진화가 덜되었기 때문에 가난하다.

1. 강한 나라는 강하기 때문에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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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화론에 대한 2번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장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은 <다원의 생물학적인 진화론>에서 강조된 개념 중의 하나인 <적자생존의 법칙>을 사회현상에 도입한 것이었죠.

자, 그럼 어떻게 <진화론>의 개념을 <사회적으로 도입>할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인 진화론의 개념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대표적인 학자는 영국의 사회경제학자인 <스펜서>였습니다. 그리고 스펜서가 <진화론>을 사회현상으로 도입하려고 한 이유는 19세기 유럽의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스펜서가 영국 학자라는 점은 사회진화론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될 수도 있겠네요.

19세기 유럽의 정치, 경제적 사상은 큰 2가지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식민지를 늘리고,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었죠.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결과 개인의 재산소유와 사회경제의 발전을 <고전 경제학>으로 정리해가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영국은 가장 식민지가 많았던 국가 중 하나였고, 산업혁명이 시작된 국가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사상에 가장 관심이 많은 국가였죠. 그럼, 어떻게 영국의 제국주의 사상과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신질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것을 스펜서는 <진화론>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진화론을 제시한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은 <인류의 진화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책입니다. 생물은 각 세포와 기관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로서 유기체가 살아가기에 가장 적합한 구조로 끊임없이 발전해 나갑니다. 그 발전을 효과적으로 이룬 유기체는 <우성>이 되어 진화하지만, 그렇제 못한 유기체는 퇴보하게 됩니다. 이것을 다윈은 <자연의 선택> 또는 <개체의 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펜서는 이 진화론의 개념에서 <적자생존>이라는 부분만을 크게 강조하였습니다. 자연 속의 생물들이 살아가고, 진화하고, 변이하는 모든 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적자생존>이라는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죠. 즉, <잘난 개체는 살아남는다>는 부분을 강조함으로서, 영국과 같은 강한 나라가 약소국가에게 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정당한 행위로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보다는 <강한 나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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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윈>의 이론이 <애덤스미스>의 이론으로 전환되다.

스펜서의 이론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키워도는 사회진화론이 <자유방임주의>를지지하는 핵심 사상이었다는 점입니다.

18세기 애덤스미스가 국가 경제현상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이것을 <고전 경제학>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가격>을 말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물건의 가격이 비싸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죠. 어떤 물건의 가격이 너무 싸면? 돈을 벌 수 없으니, 물건을 만들지 않죠. 즉, 가격이 비싸면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기 때문에 가격은 자동으로 내려갑니다. 물건값이 너무 싸면 사는 사람만 많고 만드는 사람이 부족하여 물건이 부족해지므로 물건 값은 올라갑니다. 이렇게 <가격>은 가만 내 버려 둬도, 너무 싸지도 비싸지도 않게 책정됩니다. 따라서 <가격>은 자동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른다는 개념입니다.

또, 가격이 알아서 결정되는 만큼 국가는 시장가격에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국가는 최소한의 <작은 정부>여야 하고, 모든 경제 현상은 <개인들이 알아서>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고전 경제학>이죠. 고전 경제학은 세계경제공황기에 캐인즈의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하여 국가가 경제활동에 일부 관여할 때까지 제국주의 전 시대를 통털어 경제학의 <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전 경제학의 핵심은 국가의 간섭없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는 자유방임주의였죠.

스펜서는 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식민지를 확보하는 <제국주의>이론에도 알맞은 사상을 <진화론>에서 찾은 것입니다.

자연상태의 생명체는 스스로 진화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자는 강하고, 사슴은 빠르며, 도마뱀은 꼬리를 자를 수 있고, 고슴도치도 자신만의 무기가 있죠. 각 개체는 가장 알맞은 생존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러한 생명체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되면서 자연이 유지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가 이 적합한 자연상태를 인위적으로 흔들어 버린다면? 만약, 사납다고 해서 모든 사자를 죽인다면? 자연의 균형이 유지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속의 모든 개체들은 자신들만의 생존방식과 사회적 성장 욕구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소방관이 있고, 경찰이 있으며, 선생님도 있습니다. 하나 하나의 개체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적으로 상태로 구성되어 있죠. 상인은 적절한 가격에 물건을 팔아야 인정받고, 소비자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물건을 구입합니다. 즉, 자연상태와 마친가지로 사회 속에서 모든 개인들도 <자유>를 인정받아야 하며, 어느 누가 이 질서를 인위적으로 건드려서는 안됩니다.

스펜서가 생각한 사회진화론의 핵심은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진화상태도 <자유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애덤스미스의 <고전 경제학>을 지지하는 이론으로 작용합니다.

단, 스펜서의 이러한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스펜서가 살았던 시공과 다를수록 변질되어 간다는 점은 유의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모든 개체를 <자유>롭게 내 버려 둔다는 것은, 모든 개체의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서 <방임>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사회진화론을 개인이 아닌 <민족>으로 이해한다면, 어떤 민족은 좀더 진화한 민족, 우월한 민족이라는 민족 우월주의로 가게 됩니다. 만약 사회진화론을 개인이 아닌 <국가>에 적용한다면, 우월한 국가와 진화가 완벽한 국가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약소국을 침탈할 수도 있겠네요.

결국, 다윈이 주장한 <생물학적 진화론>이 스펜서의 <사회적학 진화론>으로 변하면서, 제국주의와 애덤스미스 사상을 지원사격하는 사상으로 변한 것입니다.

3. 약자에 대한 배려는 <진화 법칙>에 어긋난다. 약자는 죽어도 좋다.

1장에서 우리는 멜서스 이야기를 잠깐 했었습니다. <인구론>을 쓴 멜서스는 지구 인구가 늘어난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못난 민족, 가난한 자들은 국가에서 아무런 혜택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빈민촌에 약을 주는 것은 인류 멸망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멜서스죠.

멜서스의 이론은 스펜서의 이론으로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펜서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개인들이 진화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경찰, 군대의 유지 및 사유재산 보호>에서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자유는 <인권, 기본권>같은 것과는 상관없는 <국가로부터 간섭받지 않을 자유>였죠.

오히려, 스펜서는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주지 말자고 주장했습니다. 왜? 왜? 왜?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동자들이 가난한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고전경제학을 지지하는 멜서스, 스펜서, 섬너 등의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에 진화가 되지 못한 것 때문입니다. 노동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함과 나태한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노동자라는 것이죠.

사회는 진화하고, 강한 자는 성공하며, 게으른 자는 도태합니다. 노동자들은 게으르고, 열성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고, 삶에 의욕이 있는 걸출한 유전자라면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자본가가 되었을 것이라는 게 사회진화론의 입장이니까요.

스펜서는 아예, 진화의 기준을 넘어 <선과 악>의 기준마저 진화의 법칙으로 설명합니다. 사회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적응한 자들, 발전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하층 계급일수록 <악한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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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선과 악의 구분은 18세기 <계몽사상>의 이념을 끌어다가 정당화시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18세기 로크, 루소, 몽테스키외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무한히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주의 법칙도, 자연의 법칙도 알 수 있고, 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이성>을 신념으로 여긴 것이지요. 이들은 신의 존재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의 법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가 구성되어 운영되는 법칙이 곧 <신의 존재>이므로 신, 즉 우주의 법칙을 알면 인간이 무한히 진보하여 우주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런데 스펜서는? 계몽사상과들처럼 인간은 무한히 진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그 낙관적이고 이상적인 인류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유능한 인간들은 <우성, 적자, 가진 자, 강한 국가>이기 때문에 <열성, 도태자, 노동자, 약한 국가>는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를 볼까요? 스펜서는 영국 사회가 식민지도 많으며, 앞으로는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 국가가 될 것이라 예언합니다. 그 증거는? 유전학적으로 영국인들의 머리가 <우수하다>는 멘델의 법칙을 인용한 것이지요. 영국인이 우성 유전자를 가졌으니 인류의 발전은 영국에 달린 것이죠. ㅎ

스펜서와 계몽사상가들이 다른 점은, 계몽사상의 신은 <우주의 운영 법칙>이었지만, 스펜서의 신은 <진화의 법칙>이라는 점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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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가진 국가, 가진 계급을 위한 이론이 됩니다. 그리고, 자유방임주의 이론을지지함으로서 가진 국가, 가진 계급의 권리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막강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자들은 노력하지 않고, 사회의 기득권을 노리는 <열등한 유전자의 반항>으로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만능이며, 자본주의 사회 안의 모든 개인 행위는 자연상태의 <적자생존>으로 인식합니다.

지금 이 이론을 접하게 되면 이 이론의 목적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이론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괴롭히는 이론적 근거로 활용됨과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층민들이 기득권 세력에 반항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는 이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인 국가와 나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 이론은 독일과 일본에서의 국가주의 이론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사회유기체 이론으로,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 국가들과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제국주의에 반항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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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진화론을 사회학이 아닌 역사학의 개념으로 다뤄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 이제 사회진화론이 세계 각국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봐야겠죠? 1,2차 대전의 독일,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중국, 한국, 일본, 동남아 국가들.... 다음 장부터 나라별로 간략 간략하게 다루고, 우리 근현대사 속의 사회진화론을 자제히 다뤄보죠.

다음 장으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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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사회진화론. 1장> 다윈, 멜서스의 이론에서 사회진화론으로...

1. 사회 진화론이란?

오늘은 한국 근현대사를 다룰 때 중요한 사상으로 종종 이야기했던 <사회진화론>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사회진화론에 대해서 자세히 적을 수 있는 수준도 못되고... 그냥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공부할 때 참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어볼께요.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나온 <진화론>을 기반으로 합니다.

진화론 아시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19세기 최대의 이슈작이죠.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생물학, 고고학, 역사학, 종교학 등등.... 사회가 발칵 뒤집혔죠. 특히 크리스트교의 <창조론>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서구사회에 이 진화론은 정말 큰 파장이었습니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는 논의부터, 종의 기원을 악마의 저서라고 매도하는 입장까지...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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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고학적 연구와 생물학적 연구가 계속 진행되면서 <진화론>은 점점 사람들의 머릿속에 현실가능한 이야기로 수용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진화론이 인정받으면서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동물의 진화과정을 밝히는 진화론을 인간 사회 속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죠. 사회학, 인류학, 역사학 등에서도 진화론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진화론이 인간의 역사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라는 시도였죠.

당시 19세기 서구인들은 서구의 역사를 세계의 역사로 인식하였고, 서구인들이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 대륙에 광대한 식민지를 만들어가던 제국주의의 시대였습니다. 이 19세기의 서구인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습니다. 그것은, 생물학에서도 사자와 같이 강한 자가 살아남아 초원을 지배하듯이, 인간사회에서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죠. <강한 자를 자연이 선택한다>는 점과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 즉 우성의 법칙과 적자생존을 사회 현상에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사회진화론>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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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한 자가 살아남고, 살아남은 자는 정당하다.

서구식 사회진화론은 첫 번째 법칙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입니다. 만약 어떤 국가가 식민지가 되었다면, 그것은 그 국가가 약한 사슴이기 때문에 사자에게 잡혀먹은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식민지가 된 국가는 강한 나라를 욕할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강한 나라의 기술과 선진적 제도를 받아들여서 스스로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회진화론에서는 <식민지>에게 독립운동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강해져서 할 말을 해라. 약자는 할말이 없다>는 것을 강요합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아시나요? 일본에게 지배당한 우리 나라가 독립을 주장할 때, 자신의 민족일은 자신이 해결하라... 는 파리강화회의 14개 조항이었죠. 1차 대전 후 미국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내용도 결국은 <사회진화론>의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당시 독립한 나라는 우리 나라가 아니라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였습니다. 이빨빠진 호랑이의 식민지는 독립할 수 있어도 1차 대전의 승전국으로 당당한 사자가 된 일본의 식민지는 독립할 수 없었죠.

그럼 종의 기원을 쓴 다윈도 실제 그런 주장을 했을까요?

다윈은, 생물학자였을 뿐입니다. 사회진화론과는 관계가 없죠. 그는 자연에서의 적자생존을 이야기했습니다. 한번 간단히 볼까요?

다윈에 의하면, 이 세상은 한정된 자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원이 한정되었다는 것을 경제학 용어로 <자원의 희소성>이라고 합니다. 자연 속의 생물들이 원하는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들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을 합니다.

여기에서 투쟁에 성공하여 자원을 확보한 생물은 <우성>이 되고, 자원을 잃은 생물은 <열성>이 되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자신들이 투쟁했던 경험이 후대에 유산으로 계승된다는 점입니다. 이 유산을 <유전자>라고 보면 됩니다. 어떤 생물이든 더 발전하기 위해 최상의 상태로 자신의 몸을 바꿔가는데, 이것을 <변이>라고 합니다. 변이를 이뤄 발전한 생물은 자연이 선택한 자, 즉 <적자>가 되어 <생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생물은 <도태>하게 됩니다.

이 다원의 이론은 사회학적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잘난 놈과 잘난 국가는 그만큼 노력해서 잘나게 되었다는 것, 못난 넘은 노력을 하지 않았거나 원래 불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못난 넘이나 식민지는 자신의 입장을 둘 중 하나로 해야 합니다.

1. 우리는 애초에 쓰레기였다, 가망성 없는 국가다.

2.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정세를 몰랐다. 노력을 못했다. 하면 우리도 잘난 놈이 된다.

식민지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 까요? 물론 1번을 선택하는 식민지는 없습니다. 모두 2번을 선택하겠죠. 그래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의 국가들은 모두 2번의 입장에서 서구이론을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은 국가가 독립하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 몸을 변이시켜 적자가 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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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회진화론 이전의 사회진화론자 - 멜서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사실 다윈만의 작품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미 <진화론>은 19세기 학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지식이었는데, 그것을 다윈이 종교계와 사투를 벌일 각오를 하고 완벽하게 정리해서 발표했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다윈 이전에도 이미 <진화론>적인 입장에서 사회를 바라본 이가 있었습니다. 바로 유명한 저서인 <인구론>의 저자 멜서스 이지요.

멜서스의 이론은 너무 유명합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그는 인류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더라도 식량 생산은 일정량만이 늘어날 것이므로, 수준 낮은 인종이나 가난한 자들은 아이를 낳지 말아야 <지구의 평화?>가 찾아온다고 주장했습니다.

멜서스는 백인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입장에서 가난한 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가난은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개인의 책임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은 노력하지 않은 못난 놈들의 책임이라는 입장이었죠.

따라서, 멜서스의 주장에는 놀라운 말도 있습니다. 가난한 지역의 주민들이 사는 곳에는 소독약을 뿌리지 말아야 하며,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정부 정책은 중지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쉬운 말로 진화가 불가능한 <열성>들에게 투자하지 말아야 <애만 낳아서 지구 인구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인자>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지금으로서는 놀랍고, 당시로서는 당연한 주장을 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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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잘난 <우성>만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주장이 다윈의 <적자생존>의 원칙과 만났습니다. 어떤 결과가 올까요? 그 결과물이 바로 미국이 낳은 학자 섬너와 영국이 낳은 학자 스펜서입니다. 유명하고도 저명한 학자들이라 이 학자들을 욕하는 글이 없습니다만, 여기서는 논문을 쓰는게 아니라 사회진화론을 가볍게 이야기 하자는 블로그이므로 존대나 존칭은 없습니다. ㅋㅋ 이들의 주장을 한번 봐야겠죠?

그럼 다음 장에서는 사회진화론에 대한 섬너와 스펜서의 주장을 한번 다뤄보겠습니다. 한 4-5편 정도로 나눠 적는 게 적당할 것 같네요. 그럼 다음 번에 다음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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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1. 1896년 : 독립협회를 발족하고, 독립신문을 만들다.



지난장에서 독립협회가 발족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을 아관파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망국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보통 독립협회하면, 전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민족운동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생긴 것은 사실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들로부터입니다.

독립협회의 초기 맵버는 서재필 등을 비롯한 구미파 세력(친미적 세력, 정동구락부 세력)이 있었고, 또 갑오개혁과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고위관리들도 참여하여 정부 방침이 독립협회에 녹아있었습니다.

독립협회를 1896년 처음 발족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이후, <조선이 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청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초기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핸 <계몽홍보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익광고 협의회라고 할까요?

따라서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거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국가공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에 국가원로인 안경수, 위원장은 당시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이 때는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였죠...), 고문은 미국국적을 가진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의 자주성을 홍보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독립협회 초기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TV같은 것이 없었죠. 따라서 홍보에 적절한 매체로 신문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신문은 백성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글자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신문이 바로 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이 순한글 신문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하나 더 추가 해야 합니다. 순한글 신문이자, 한글, 영문 2개판으로 나온 신문이라는 점이죠. 조선의 자주성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알려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별도의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 1897년 : 고종이 돌아오면서 마찰이 시작되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족했을 때 독립협회는 단순한 <홍보기관, 사교단체, 정부어용기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열강의 이권침탈 실태를 알린다는 정도였죠. 독립협회의 모임은 정부 주도의 소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897년이 고종이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독립협회의 주장과 맞물려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고종은, 강력한 자주권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강력한 나라의 성립은 독립협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성격을 놓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력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중 미국의 공화정 및 일본의 입헌군주정을 경험한 친미, 친일파 출신들은 강력한 왕권이 근대화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법치국가를 만들고, 내각제나 의회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1897년 독립협회는 초기의 독립협회와는 성격이 달라집니다. 독립협회의 위원장인 이완용 등의 친러파들은 탈퇴하고, 서재필 등 친미파, 박영효 등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주도의 정권과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러시아 고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세력보다 비교적 민중적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을 적극활용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우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데 주력하였죠.

그러나, 독립협회는 백성들을 진정한 개혁주체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조차 <백성들은 무식하여 알리고 가르쳐 계도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하였죠. 따라서 신분제가 이미 혁파된 조선사회였음에도, 백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보다는 일단 가르쳐야할 대상들로 파악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인사들은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같은 유산시민 지식인>을 육성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마찰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3. 1898년 :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인사 중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왕(고종황제)과는 달리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성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민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독립신문은 금연광고같은 <계몽홍보신문>을 넘어서서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이념 주장>을 펼치는 장이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환궁했음에도, 계속 우리 내정을 간섭하는 러시아의 알렉시에프 등을 비난하고, 외국세력이 우리 이권을 침탈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합니다.

이 시기의 운동은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통하여 백성들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친미적, 친일적 성향을 가진 서재필, 박영효 등의 외국물을 드신 세력들이었습니다.

4.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자유민권운동

그럼 자유민권운동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자유민권이란, 서양 용어로 <천부인권>을 말합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프랑스 혁명과 영국혁명 등에서 비롯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 사상>을 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였듯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등의 구제도를 타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구처럼 <천부인권>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 천부인권을 홍보하는 수단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신문으로 모자라면 강연회, 토론회 등을 쭈욱~ 열어 자신들의 이상을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백성속으로 들어가 어떤 백성이든 같이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백분토론 같은 이상적 장이 바로 <만민공동회>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만민, 즉 모든 백성의 이야기장인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백정조차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에는 생존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물을 먹은 서재필 박사가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자유를 모두 모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주권>이 됩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에서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이란 <국민평등, 국민주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국민평등권,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소신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참정권>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서구식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대의제도에 따른 국회의원 선출>이죠.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의 최종 결론은 <의회설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의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법치주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대한제국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고종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죠.

자유민권운동의 결과, 서재필은 중추원을 관선국회의원, 민선국회의원으로 내각기관으로 재편합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재추가 모이는 최고 국가 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해진 기관입니다. 중추원이 재신과 추신의 합좌기관으로 고려 이래 최고 기관이었던 만큼, 민선, 관선 의원들의 협의기관으로 딱이었죠.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의 내용

97. 8. 29 : 조선의 급선무인 인민 교육을 실시한다.
   97. 9. 26  :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97. 10. 17 : 인민 교육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97. 12. 19 : 신문을 만들어 인민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
   98. 1. 2 : 관민이 같이 애국해야 한다.
   98. 1. 23 :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광산을 확장해야 한다.
   98. 2. 6 : 수구파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야 한다.
   98. 3. 6 : 우리 국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말자.
   98. 5. 8 : 백성의 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출처 : 누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투스, p113)

5. 만민공동회의 활동 - 2. 자주국권운동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종의 <광무개혁>과 그 본질은 통합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에서 보듯이 그 실현방법에서는 너무나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만민공동회의 노력을 한번 볼까요?

민민공동회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하여 <자주국권운동, 자강혁신운동>이라 칭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자주국권운동은 외세를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만민공동회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온 모든 운동을 포함하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복귀 운동, 열강의 이권탈취 반대운동,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 등의 모든 부국강병 운동을 말합니다. 자주국권운동의 구체적인 예를 몇가지 볼까요?

1.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함
   2.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킴
   3.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음
   4.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고, 영국의 해양 침투를 막음
   5. 미국의 무한정 광산 채굴을 일부 막고, 러시아의 은광 진출을 방어함
   6.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해역에서 토지를 매도하는 것을 막음
   7. 외국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이권을 넘기는 이완용을 영구 제명함
   8. 일본의 철도 부설권 확득 의도와 청의 산림 탈취 의도를 사전에 홍보하고 막으려 함

이러한 자주국권운동은 독립신문에 홍보하는 동시에 만민공동회에서 계속적인 토론과 강연을 함으로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고종환궁요구와 일본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제동을 건 것도 독립협회의 업적이었죠.

그러나, 외세의 압력을 막는 <자주국권운동>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민권을 얻고 자주국가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을 막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서구 열강과 같이 발전해야 다시는 그들이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6.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자강혁신운동

만민공동회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발전과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의회제 설립과 내정개혁>이었습니다.

이 내정 개혁은 국가 체제 자체를 서구식 의회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행정, 교육, 경제, 국방,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서양체제를 도입하여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한 후, 부르조아 계급을 육성하여 국가 지배층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지만, 천부인권이 곧 <모든 백성의 지배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 혁명의 이념은 <천부인권>이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독립협회에서도, 국가발전의 이상적인 방향은 <서구식 사회진화론>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사회진화론은 원래 스펜서가 주장한 것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그대로 역사에 도입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과 우성이 열성을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진화합니다. 강한 동물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좀더 진화하고, 진화하지 못한 동물은 도태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가장 극대화된 진화체가 바로 인간이었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원리이자, 본능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크리스트교 문명을 전파함으로서 약한 나라가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에 의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를 늘리는 <제국주의 이론>이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이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독립협회 뿐 아니라, 초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이 사회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위기는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며, 먹히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독립협회의 지식인들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치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최선을 다하여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치호 일기 -

따라서 조선의 민중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즉적적으로 저항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문명을 좀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서구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는 곧 <프랑스 혁명>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근대주의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근대주의란, <지주, 자산가> 등 유산혁명계급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계몽해야 할 사람들>로 여기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것임에도,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식인층이었고, 광범한 백성들의 실질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여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본 것이죠.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 부르조아적 운동의 공통적인 성향은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하는 <의병운동>을 아직 힘도 없는 어린 애가 생각없이 어른한테 덤비는 무모한 운동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의병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화나게 할 뿐, 자강혁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립협회는 지주와 자산가들이 개화하여 발전한 서양제도를 본받는 것을 표방하였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을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교과서의 입장입니다. 의병운동은 그냥 <의병활동>이라고 하면서, 서양을 본받자는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해서 <애국>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냥 <의병>이고, 지주계급을 지배층으로 만들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운동은 <애국>이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논리를 학자들과 교과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도 서구식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립신문 - 의병들의 활동을 부정하는 글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의 불법한 일을 분히 여겨 일어나사 고을 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인데 불법한 일을 저희들이 행하니 그건 곧 도가 아니다. 도가 없으면 난민인즉, 난민은 법률상에 큰 죄이며 나라에 점점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을 시비하겠으면 나는 법률을 더 밝혀 지키고 행실을 더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전개된 자강혁신운동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업개발을 통해 민간자본을 육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독립협회가 이전 갑신정변과 다른 점은 <우민관>은 탈피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백성들은 <무지한 존재>들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정변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반응에 신경쓰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경쓸 시간도 없었지요. 3일천하였으니.... 그러나, 독립협회는 도시상인, 농민, 노동자로부터 심지어 백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들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이념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며, 갑오개혁 이후 전 백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럼 자강 개혁운동의 몇가지 사례만 들어볼까요?

1.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고, 전 국민을 위한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그것을 위한 재원을 마련한다.
   2. 법치주의를 위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3. 민간자본 육성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서구식 산업제도를 도입한다.
   4. 보수파 내각을 퇴진 시켜 개혁파 내각을 만들고, (이후) 헌의 6조를 채택한다.
   5. 관선과 민선 인원이 동등하게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한다.

7. 98년 3월 만민공동회 vs 10월 관민공동회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는 박영효, 서재필 등 주도세력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주의적인 입장은 고종황제의 전제 왕권 강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안에서는 이러한 법치주의 입장과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박영효, 서재필 등의 법치주의파들은 개화파로 치면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등이 당장 물러가야 하며, 친러파 관리들은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또,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는 내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근대 국가로 인식한 것이죠.

고종은 열받았습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고문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조치 하였고, 박영효 등의 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서재필, 박영효 등은 3월 황제의 명을 반박하고 전국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빠져나간 후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남궁억 등의 새로운 세력은 황제권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가 쫒겨날 수는 없었고, 황제의 개혁 역시 <자강혁신과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독립협회와 일치했으니까요. 윤치호 등의 새로운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화파로 따지면 온건개화파라고 할까요? 이들의 개혁은 <강력한 전제군주 아래 황제권을 옹호하면서 이루어지는 근대화>였죠.

서재필은 반발합니다. 개혁이란, 황제와 관료들 일부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인 부르조아가 모인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개혁핵심인 부르조아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표가 모인 의회에서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서재필 등의 입헌군주파와 정부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입헌파가 고종에게 쓴 소리를 하면, 고종은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온건파는 <독립협회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면서 반년이 흘러갑니다.

7. 98년 연말 : 관민공동회의 개최와 헌의 6조의 발표

98년 10월, 윤치호 등의 전제황제파 독립협회 회원들은 <황제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헌의 6조를 발표하면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 1조의 내용(헌의 6조)

-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할 것 -
①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②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④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⑤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⑥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제 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구성할 것.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권(원)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제 3조

의장은 대황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시고, 의관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에 노고가 있는 자로 선출하시고,
반수는 인민협희에서 27세 이상인이 정치, 법률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것.

제 12조.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하지 못할 것.

독립협회의 온건파들이 주장한 헌의 6조의 내용은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1조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고종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임관을 임명할 때 대신의 뜻을 묻는 다던가하는 조항들이 은근히 속 뜻을 가지고 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치호 등은 의회제도를 원하면서도, 고종황제에게 황제권 강화라는 명분을 확실히 심어주는 타협적인 제시안을 내놓은 것이죠.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 5명을 몰아내고, 중추원의 구성과 재정개혁을 약속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여 본격적인 내각제도가 시행됩니다. 즉, 명분상의 황제권은 절대적이나, 실제 내각이 출범하여 정치를 하는 타협안이 제시된 것이죠.

또, 중추원을 구성할 때 정부관료와 독립협회 인사가 딱 절반씩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립협회의 급진파였던 서재필, 박영효 등도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독립협회의 <내각제도>가 성공한 듯 보였죠. 이 시기를 보통 <독립협회의 참정권 투쟁 성공기>라고 합니다.

중추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송나라 기구였습니다. 고려 시대는 재추가 모이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가 조선 시기에는 무신들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권한은 항상 막강한 기구였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이 중추원의 기능을 모두 상실시켜 중추원은 <내각에 대한 지문 수준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국가최고의 <의회기관>으로 재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끝나면서 중추원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훗날 일제시대 때 이완용 등의 건의로 친일파 어용기구로 다시 살아납니다.

독립협회가 정치에 참여하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민중 계몽기부터 전국적인 지회가 있었고, 회원이 4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 악마 서포터즈가 엄청난 것과 맞먹죠. 거기에 핵심 지도부가 박정양 내각으로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니, 그 위세는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박영효 들이 돌아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포터들을 늘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부의 장관으로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보수파들은 충격에 쉽싸입니다. 독립협회의 의회제도는 기존 관료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협회가 강해지면서 다시 <입헌군주제 및 법치에 의한 통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때문이죠. 보수적 관료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탄압하려 하였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이들 정부 관료들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 테러, 쿠테타 등을 시도합니다.

고종황제는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영효 등의 활동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같은 독립협회의 온건파들도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세력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여론을 주동하는 만민공동회를 혁파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부보상(보부상 : 황국협회)들을 투입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의를 방해하였습니다.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의 간섭으로 만민공동회는 혁파당하고, 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서재필은 추방되고, 박영효는 심문을 받았으며, 온건파인 윤치호는 북쪽 국경쪽으로 관직을 옮겨야 했습니다. 보수파와 성리학자들은 독립협회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였고 결국 독립협회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황국협회와 함께 해산됩니다.

8. 독립협회의 한계점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민족운동인 자주국권운동, 근대화 운동인 자강혁신운동, 민주주의 사상의 발현인 자유민권운동을 표방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기 민족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주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 황제가 실시하고 있던 광무개혁과의 충돌문제입니다. 입헌군주제(내각제도)를 통한 사회개혁과 황제권 절대화를 통한 자주성 확립이 충돌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의 이론에도 많은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일단,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주국권운동은 이완용 등 친러파을 견제하고, 아관파천을 철회하게 하면서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막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서재필, 박영효 등 친미, 친일적 성향의 개혁가였던 만큼, 일본, 미국 등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도움을 많이 얻었던 개혁가였고, 메이지 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여겼던 듯 합니다.

자강혁신운동도 전술했던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논리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의병활동 등을 애들 장난으로 여긴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회진화론 수용이 우리 독립운동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와 함께 우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사회진화론에 맞추어 민족 저항운동을 전개했으니까요.

자유민권운동은 <천부인권사상>등을 조선에 보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서구 <부르조아 유산계급>의 이론에 맞추어 토지를 가진 지주, 경제력을 가진 산업가를 자유민권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실제 토지가 없는 소작인, 차경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은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보호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간히 고종의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이 같은 시기에 언급되고 있죠? 독립협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독립협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고종의 광무개혁을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해 : 글을 적을 때 친일파 박영효, 친미파 서재필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박영효나 서지필이 나라를 매국한 친일, 친미를 했다는 뜻에서 쓴 용어가 아니라, 일본 문화, 미국 사상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 친미파라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쓰는 친러파 신채호, 친중파 김구 등의 용어도 친러, 친중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김구가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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