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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읍

우리가 완전히 잘못알고 있었던 고대 식읍과 녹읍의 개념 정리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 더보기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존속한 <부>라는 체제 외위가 페지되고 국왕 근친들은 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1. 외위의 폐지 외위는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히 정리합니다. 에 대한 글을 읽으시려면 필수적으로 경위와 외위에 관련된 앞 포스트를 읽으셔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신라가 통일되면서 신라의 국왕들은 진골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독자적으로 주던 라는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통일 후 왕권을 강화해야하는데, 지방의 외위제라는 독자적 관등제도가 왕에게는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위를 없애면서도 왕의 종친에 해당되는 근친 진골들의 특권까지 제한하기에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 후 신라에서는 근친 진골들의 지방 지배을 인정해야 했고, 근친 진골들에게 국가유공자 성격의 을 토지로서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식읍.. 더보기
신라의 식읍, 녹읍 신라의 식읍과 늑읍 좌사록관은 문무왕 17년에 두었다. 우사록관은 문무왕 21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4권 38, 잡지 7, 직관 상 - 교령을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9월 정월 - 내외 군관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6년 3월 - 무열왕 4년(657년) 태종대왕이 김인문을 압독주(경산 지역)총관으로 제수하였는데,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계략과 용맹한 공로가 특이하다 하여 죽은 대탁각간 박.. 더보기
가야의 멸망 가야의 멸망 법흥왕 19년 금관국주 김구해가 왕비와 세 아들, 곧 첫째 노종, 둘째 무덕 셋째 무력과 함께 국고 보물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왕은 김구해를 예로 대우하여, 상등의 위를 주고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하였다. 진흥왕 23년(562)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이사부에게 교를 내려 공격하게 하였다. 사다함은 그 부장으로 기병 5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왕궁 정문으로 달려 들어가서 백기를 세우니 성안의 사람들은 두려워 하였다. 이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고, 모두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구형왕은 신라와 대적하여 싸울 수 없게 되자 동기 탈지 이질금을 보내어 나라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 상손 졸지공 등과 신리에 투항하였다. - 삼국유사 권 2, 기이편 하, 가락국기 - .. 더보기
고구려의 식읍 제도 고구려의 식읍 왕이 군사를 삼도로 나누어 급히 치니 위군이 요란하여 진을 이루지 못하고 낙랑에서 물러갔다. 왕이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할 때 밀우와 유유를 제일로 삼아 밀우에게는 거곡, 청목곡 등을 사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 두눌하원을 사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더 주어 구사자로 삼고 아들 다우는 대사자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 모용외가 쳐들어오자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여 나아가 곡림에 이르렀다. 그 때 신성재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500기를 거르리고 왕을 맞아 적을 세차게 치니 모용외가 지고 말았다. 왕은 기뻐하면서 고노자에게 대형의 벼슬을 더하고 곡림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 선비는 앞뒤로 적을.. 더보기
금관가야의 멸망과 식읍(부체제)의 등장 금관가야의 병합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장남 노종(奴宗), 둘째 덕무(武德), 세째 무력(武力)의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왕은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조정에 벼슬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유사 - 자료 참조 :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는데, 이 사료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그 일족을 흡수한 사실입니다. 왕이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지위를 준다는 것은, 가야국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연구되어야 알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금관가야계 김씨인 김유신 등이 신라 공신으로 성장하였다가, 중대 이후 골품제의 한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