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세계사 9

'수메르인들이 최초의 문명체계를 만들다'

메소소포타미아에서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만년 전이다. 그들은 왜 모이게 되었으며, 어떻게 험난한 자연 속에서 슬기롭게 살아남았을까?

  1장. 메소포타미아에 문명이 발생하다.

세계 최초의 문명은 지중해라고 불리는 지역의 동쪽인걸 이젠 다 알겠지? 역사에서 동지중해 연안을 <기름진 초승달 지역>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지금 이라크 지역에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는 정말 기름진 옥토였다고 해.

우리가 보통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가운데'라는 뜻의 그리스어 메소(meso)강이라는 뜻을 가진 potams의 단어가 결합되서 영어식으로 사용하게 된 단어야. 즉, 강과 강 사이의 비옥한 땅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를 가르키는 용어를 일반 명사 단어처럼 쓰고 있는 거지. 비슷한 예로 남북 아메리카 사이에 있는 고대 문명들을 메소아메리카 문명이라고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야.

자 그럼 이제부터 교과서에 나온대로 한번 최초의 문명이 왜 탄생했는지를 유추해보자.

교과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 인류 문명이 시작된 대부분의 지역에는 큰 강이 흐르고, 강의 범람이 주변 땅을 비옥하게 만드니까 사람들은 점점 더 기름진 땅에 모이는 거라고...  하나 더 부연하자면 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협력과 분업>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회 조직망도 이루어질 수 있었을 거야.

특히 티그리스강은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기름진 흙이 하류에 쌓이면서 자연 제방이 되었기 때문에 그 지역은 당시에 가장 살기 좋은 알짜배기 땅이었지. 요즘으로 따지면 유프라테스강이 벤처 기업들이 도전하기 딱 좋은 강남 서초구라면, 티그리스강은 고급 주택들이 바글바글한 송파구 정도???

그래서인지 5500년전에 이곳에 문명이 정착된 이후, 천년 뒤부터 바로 여기저기 이민족들이 이쪽으로 이주하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거야... 전에 말했던 민족 대이동있지? 뭐, 그 정도는 아니래도 틈틈이 이 동네로 사람들이 몰려왔지. 그게 아니면 아예 동쪽으로 가서 인더스 강가로 넘어가거나 했으니까...

땅은 좁은데 분양받으려는 사람이 많으니깐 얼마나 비비적 거리겠어? 따라서 약 3천년전경부터는 바로 이 지역이 서아시아에서 가장 전쟁이 많고 민족 이동이 많은 지역으로 바뀌게 되는거야.

아무튼, 이 지역은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 좋았어. 그러나, 어떤 지역이든 완벽한 동네는 없겠지? 이 지역에는 큰 문제가 하나 떡~ 하니 있었어.

그것은 바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강이 같은 시기에 홍수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지. 두 강물이 넘치는 시기가 다르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은, 농사를 짓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거야. 따라서 이 지역은 농사에 힘쓰면서도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장사하는 분야에도 눈을 돌리곤 하지. 이 지역에서 상업과 농업이 동시에 발달한 가장 큰 이유가 이거야.

또 강이 2개나 되어서 강의 범람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더 많은 <홍수 설화>가 만들어진 지역이기도 하지. 수메르 홍수 설화, 바빌로니아 홍수 설화,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설화.... 기타 등등 비슷한 설화들이 무지 많아.

아무튼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강물이 넘친 후에 비옥해진 땅을 이용하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면서 살아야만 했어. 강물이 크게 넘치면 땅이 늪지대로 변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그 물을 빼는 작업부터 해야 했던거야. 반면 강이 넘치지 않을 때는 땅이 메마르고 건조해지기 때문에 평소에 물을 저장해두어야 하겠지?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물을 저장하고 빼는 시설, 즉 <관개시설>이었지.

이러한 요령을 잘 파악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슬기롭게 안착한 사람들이 바로 <강가 도시 사람들의 모임>란 뜻을 가진 <수메르> 사람들이었지.

- 수메르인들이 역사를 시작하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메르인 이전에도 돌이나 청동기를 사용할 줄 알았던 원주민들이 있었어. 또 수메르인이 정착한지 천년 뒤에 기름진 강가 북쪽에 아카드라고 불린 사람들도 살고 있었어. 그런데도 우리는 서아시아 문명를 이야기 할 때 유독 수메르인에 대한 이야기만 주로 하게 되지.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수메르 이전의 사람들이 이 근처에 머물긴 했지만 보통 어느 정도 있다가 이동했거나,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야. 훨씬 전에 이 비옥한 땅 중 하나인 우르 지방에서 살았다던 아브라함이 성경에서는 큰 의미가 있을진 몰라도 이 지역의 전체 역사에 기여한 점은 아직 찾질 못한거랑 같은 거지. 다른 소수 민족들도 마찬가지야. 아카드인들 역시 후대 역사에 크게 영향을 준게 없어.

반면,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해서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큰 의미가 있어. 그리고 그 문자 기록이 후대 왕조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지. 예를 들어 수메르 다음으로 이 지역에 건너온 아무르족이 세운 바빌로니아 왕국은 그 언어나 신화, 생활패턴부분까지 수메르인들과 비슷한 부분이 매우 많거든.

반면, 기록이 남지 않은 민족들은 유물이나 유적지 등을 조사해서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단편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잖아? 그나마 유물이나 유적지가 너무 적은 경우에는 존재했는지 근거도 헷갈려서 <전설의 시대>로 넘겨 버리기도 하거든. 만약, 구약성경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우리가 알수 없고, 그 존재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야. 아마도 수메르 이전에도 아브라함 부족처럼 수많은 소수 부족들이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거쳐갔을거야.

아무튼~~~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인들은 형체가 있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를 남기기 시작했어. 예를 들어 사람을 표현하려면 사람 모양을 그리고, 새를 표현하려면 새의 모양을 그려서 초보적인 표현을 남긴 거지. 이런 초보적인 문자를 상형문자라고 해. 뭐... 교과서에도 나오지만, 이 글자가 계속 발전해서 후대 페니키아인들이 고쳐쓰기도 했는데, 그게 알파벳의 기원이라나, 뭐래나....

하지만, 이런 상형문자는 큰 결점이 있었지. 형체가 없거나 정신적인 부분, 관념적인 용어는 똑같은 모양을 그려서 표현할 수가 없잖아? 새는 새모양을 그리면 되지만, 사랑은 어떻게 표현할건데?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형체가 있는 것은 <상형문자>로 표현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쐐기모양으로 글자를 새기다가 어울릴 만한 형태가 있으면 그냥 그것을 그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어. 이것을 <설형문자>또는 쐐기문자라고 묶어서 부르기 시작한거야. 그니까 정리하자면 상형문자, 설명문자, 쐐기문자는 딱 어떤 구분점이 있는건 아니고, 그냥 비슷한 글자체계구나~ 하고 대충 넘어가도 되지.

형태를 본뜬 단계엔 상형문자, 형태를 유추하는 단계에서 설형문자, 쐐기를 파고 기호를 표시하는 단계에서 쐐기문자.... 그냥 그런거야.

이렇게 처음엔 형태나 모양위주로 글자를 이용하다가....

숫자는 빗금을 긋고, 물품 수량 등은 막대기의 길이 각도로 표현하다가...

결국 관념적인 것들도 다 이렇게 쐐기를 새기면서 만들어지면서 쐐기글자 완성.

그럼 이 문자는 어디에다 기록했을까? 당시에는 종이라는 것이 없었잖아.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는 남아도는 거 하나 있지? 바로 강의 범람으로 생긴 진흙이야.  수메르 사람들은 강물이 넘치고 진흙이 생기면 점토판 위에다가 글자를 남긴 뒤 불에 구워서 자신들의 기록을 보존했던거야. 원래 쐐기란 것이 나무와 나무사이에 홈을 파서 연결하거나, 점토판에 못을 박거나 쓰윽~ 하고 긁어서 자국을 남기는 걸 말하는 거야. 뭐, 그래서 쐐기문자라고도 부르는 거지만.

그럼 무슨 기록을 보존했을까? 물론 일상적인 물물교환이나 도시 안의 사람들이 해야할 일도 기록했겠지만, 더욱 눈이가는 것은 수메르인 영웅 이야기나 전설, 그리고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이이지.

수메르인들의 도시국가는 사실 어마어마한 규모야. 큰 도시는 일단 사람의 숫자가 만명 이상의 단위였고,  그런 도시들이 서로 견제하고 도와가면서 성도 만들고 관개시설도 만들면서 살았던 것이지. 하지만, 그러려면 수많은 노예들이 일을 매우 매우~ 열심히 해야겠지?

그래서 수메르의 귀족들은 우리 도시가 얼마나 크고, 귀족들이 얼마나 위대하며, 도시의 수호신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를 마구 마구 홍보하기 시작하지. 즉, 신과 영웅이 도시를 지켜주기 때문에 하층 계급들이 그나마 죽지 않고 산다는 걸 알리고, 도시를 안정시키려고 한거야.

그래서일까? 세계 4대문명에는 모두 노예 계급이 있고, 가장 맨 위에는 신관 계급이 존재하지. 물론 수메르의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도 당연히 <신관>계급이야. 정말 그런지 한번 확인해볼까?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대 아리아인들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브라만>이라는 신관계급이 되었어. 또 그 아리아인들이 북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켈트족의 신관계급인 <드루이드>라는 신관계급도 생기게 되었지. 중국 은나라에서는 갑골문자라는 거 있지? 거북이 등껍데기에다가 점치는 거 말야. 그 때 제사를 주관하는 신관의 지위가 매우 높았어. 신관이 죽어도 전쟁 안된다고 하면 뭐 못하는 거였으니까.... 이집트야 파라오 자체가 신의 아들이라는데 할말 없구... 우리 나라 사극만 봐도 고대 사극에는 다 신관들 나오잖아. 주몽이랑 태왕사신기에 나오는 신관들은 왕의 아들들도 죽일 정도로 권력이 있어보이긴 하더만...

아무튼 최초의 문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교 관념>이 강했고, 종교 의식을 치르는 신관계급이나 정복자들은 사회의 지배계급으로서 살아갔지. 그리고 신관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항상 <신화>가 존재했어.

그 신화는 내용은 안봐도 뻔해.

태초에 신이 있어서 인간을 만들었고, 그 신을 모시기 위해 신관이 존재하고, 신관의 말을 잘들으면 도시사람들이 신의 가호를 받고 살아갈 수 있다... 뭐 이런거지. 특히, 수메르인들은 <설형문자>를 통해 점토판에 신과 영웅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두었기 때문에 신화 내용이 그나마 많이 남아있거든.

자, 그럼 이제 인류 최초의 신화라고 불리는 수메르 신화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 신화가 갖는 역사적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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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신학과 역사 사이 : 이야기 기독교사 (1)

서아시아 최초의 문명이 등장하다.

- 들어가는 말....

지금부터 적을 이야기들은 내년에 출판될 <역사 속의 기독교 이야기>의 초안에 해당될 이야기의 일부 내용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학 이야기와 기독교 일화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경의 관점에서 씌여진 이야기들은 아니랍니다. 오히려 여러 역사 속의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서 그리스도교가 2천년간 진행된 전체 맥락을 훝고, 그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이단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들>이 어떻게 신념을 이어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랍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어렵게 느끼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개념들을 역사 맥락 속에서 쉽게 이야기 할 예정이랍니다.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들은 종교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이야기랍니다. <역사 속의 불교이야기>보다 더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서아시아에 문명이 탄생하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시기가 기껏해야 지금으로부터 6천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이미 70만년전부터 인류의 기원이 되는 유인원들이 지구에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에렉투스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유인원들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고,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한 원숭이들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죠. 호모(Homo)란 인간이라는 고고학 용어로, 이러한 학명을 가진 원숭이들이 살았던 긴 시기를 구석기 시대라고 부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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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 아프리카누스(약 215만년전 유인원 : 미세스 플레스)의 두개골로 재현한 고인류.
당시 인류는 인간보다는 원숭이에 가까웠지만, 직립보행과 도구의 사용을 근거로 인류의 시조로서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일 뿐, 현생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기엔 미흡한 점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도시를 만들었던건 기원전 3500년 경에 불과하답니다. 즉, 구석기 시대는 70만년전이고, 문명이 시작된건 지금으로부터 겨우 5천년 전이니까 인류가 지구의 주인이 된 시기가 얼마나 짧은 기간인줄 알 수 있겠죠?

지금으로부터 1만년전... 드디어 사람같은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드디어 농사를 지을 줄 알고, 집을 만들어서 정착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석기인들이었죠. 하지만, 그들도 문명을 만들거나 도시를 세우지는 못했답니다. 신석기 시대에는 생산력이 워낙 적어서 문화활동을 할 만큼의 여유가 생기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들의 농사라는 것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벼농사>가 아니라 도토리를 비롯한 소량의 잡곡을 드문드문 키우는 것이었답니다.

자, 신석기인들의 식단을 한번 볼까요? 그들은 계절별로 그 지역에서 주로나는 곡식들을 단기간에 키우거나 채집하면서 겨우 연명했답니다. 문명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홍수나 기아로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는데, 훨씬 원시적인 이 시대에는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큰 성공이었겠죠?

세계 최초의 문명은 바로 아래 지도에서 지중해라고 불리는 지역의 동쪽이었답니다. 역사에서 동지중해 연안을 <기름진 초승달 지역>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에서도 지금 이라크 지역에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는 대단히 기름진 지역이었답니다.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원숭이 화석이 발견된 지역들.
이 중에서 훗날 세계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지역은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이었다.

그렇대면 왜 이 강가에서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대부분의 지역에는 큰 강이 흐르는데, 그 이유는 강의 범람이 주변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죠. 또한 강이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의 공동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협력과 분업>이라는 인류 최초의 사회 조직망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특히 티그리스강은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기름진 흙이 하류에 쌓이면서 자연 제방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살기에 너무 좋았죠. 그러나, 이 지역에는 큰 문제도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강이 같은 시기에 홍수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죠. 두 강물이 넘치는 시기가 다르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은, 농사를 짓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농사에 힘쓰면서도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장사하는 분야에도 눈을 돌리게 된답니다. 또한 강이 2개나 되어서 강의 범람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도 더 많은 <홍수 설화>를 갖게 됩니다.

이 지역에 처음 살았던 수메르인과 바빌로니아인들도 <홍수 신화>가 신화의 가장 큰 핵심부분을 담당하고 있고, 훗날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홍수 신화도 이 지역의 자연환경과 무관하지 않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강물이 넘친 후에 비옥해진 땅을 이용하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즉, 강물이 크게 넘치면 땅이 늪지대로 변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그 물을 빼는 작업이 가장 절실했죠. 반면 강이 넘치지 않을 때는 땅이 메마르고 건조해지기 때문에 평소에 물을 저장해두어야 했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물을 저장하고 빼는 시설, 즉 <관개시설>이었죠.

이러한 요령을 잘 파악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슬기롭게 안착한 사람들이 바로 <수메르> 사람들이었습니다.

- 수메르인들이 역사를 시작하다.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는 수메르인 이전에도 돌이나 청동기를 사용할 줄 알았던 원주민들이 있었답니다. 또 기름진 강가 북쪽에는 아카드인들이 있었답니다. 그런데도, 수메르인들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문자>를 사용해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랍니다. 기록이 남지 않은 시기에는 유물이나 유적지 등을 조사해서 누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단편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지요. 그나마 유물이나 유적지가 너무 적은 경우에는 <전설의 시대>로 치부해서 넘겨 버리기도 합니다.

기원전 3500년경, 수메르인들은 형체가 있는 물건의 모양을 본떠서 글자로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표현하려면 사람 모양을 그리고, 새를 표현하려면 새의 모양을 그려서 표현한 것이죠. 이러한 문자를 상형문자라고 합니다.

수메르인들은 쐐기 모양으로 글자를 만들어서 사용했는데,
이후 이 지역을 이민족들이 점령하면서 이 언어는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훗날 페니키아인들이 이 문자에 모음을 보태서 글자를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상형문자는 한계가 있었답니다. 형체가 없거나 정신적인 부분, 관념적인 용어는 표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수메르인들은 형체가 있는 것은 <상형문자>로 표현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쐐기 모양으로 뜻을 나타내는 문자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설형문자>라고 합니다.

그럼 이 문자는 어디에다 기록했을까요? 당시에는 종이라는 것이 없었고, 이들에게 가장 많은 것은 강의 범람으로 생긴 진흙이었답니다. 따라서 이들은 점토판 위에다가 글자를 남기고 불에 구워서 자신들의 기록을 보존했습니다.

그럼 어떤 기록을 보존했을까요? 물론 일상적인 물물교환이나 도시 안의 사람들이 해야할 일도 기록했겠지만, 더욱 눈이가는 것은 수메르인 영웅 이야기나 전설, 그리고 천지창조에 대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은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인 만명 단위의 도시국가들을 만들고, 각각의 도시국가들이 서로 견제하고 도와가면서 성을 만들고 관개시설을 두었답니다. 그리고 각 도시의 영광을 찬양하고, 도시를 수호하기 위해 수많은 수호신들을 두고, 신과 영웅의 가호아래 안정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따라서 도시를 다스리는 사람은 당연히 <신관>계급이었습니다. 우리가 소위 세계 4대문명이라고 부르는 문명들은 공통적으로 큰 강 근처에서 만들어졌다는 점도 있지만, 지배계급에서 <신관>이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는 점도 있답니다.

예를 들어 중앙아시아에 살던 고대 아리아인들은 인도를 점령하면서 <브라만>이라는 신관계급이 되었고, 북유럽으로 건너가면서 켈트족의 신관계급인 <드루이드>라는 신관계급이 되었답니다. 최초의 문명 시대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종교 관념>이 강했고, 종교 의식을 치르는 신관계급이나 정복자들은 사회의 지배계급으로서 살아갔답니다. 그리고 신관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항상 <신화>가 존재했습니다.

그 신화는 보통 태초에 인류가 어떻게 탄생했는지에서 시작해서 신관과 도시를 구성하는 민족들이 어떻게 하면 신의 가호를 받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묻어있었습니다. 특히, 수메르인들은 <설형문자>를 통해 점토판에 신과 영웅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겨두었기 때문에 그들의 기록을 통해 초기 문명 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의 내용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수메르 신화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서아시아와 이집트 지역에 존재한 다양한 신화들이 그리스도교 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간단히 이야기해 봅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2화. 아리아인의 시대와 인도 초기의 종교들

1.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든 것이 아닌가?

자,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 역시 크리스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열망>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인간들의 이야기이듯, 신과 종교의 탄생 역시 인간들의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 내린 <고난>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일 수도 있다. 신과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가 확립되는 것 역시 당대의 <사회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여호수아>의 강림을 바랬던 열망은, 철기 시대에 접어오면서 심해진 핍박 때문이었다. 지금 인도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종교 역시 당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홍수나 번개 등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많은 열망들이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그럼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라는 나라의 종교부터 한번 살펴볼까?

2. 초기 인도 원주민들의 신앙

인도 지방의 초기 문명을 흔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초기 문명에 대해 우리는 약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곧 인도 문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틀렸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철기 시대 이전에 등장하였다. 인더스 문명 역시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 체계가 없었던 초기 문명 시대였다. 문명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생길리는 없지 않는가?

기원전 2500년경 등장한 최초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가>의 작고 초라한 문명을 말한다. 천년간 계속된 이 문명은 작은 도시국가 단위의 문명이었다. 우리가 고대 문명 유적지로 말하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문명은 국가 문명이 아니라 작은 도시 문명을 뜻한다.

<초기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

이 문명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토착민인 <인더스인>들이었다. 인더스 인이란, 최초로 인도에 거주한 <드라비다인, 문다인> 등을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문명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성곽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홍수를 대비한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들이 우선 만들어진 것은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이었다. 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제공하면서도, 큰 홍수 한방으로 주변 문명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최초의 원주민들은 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항상 홍수라는 큰 변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초기 원주민들은 큰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목욕탕은 물(강)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큰 곡식창고를 만들어놓고, 커다란 범선을 이용하여 주변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던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숭배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생식기였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의 <정자>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미 존재했었다.

<모헨조다로
족장집에서 나온 동상>

<모헨조다로의 춤추는 소녀상>

<하라파에서 나온 인장과 유물>

<하라파의 공동 시설물>

<하라파의 주거지>

<하라파의 사원>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흔적>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모헨조다로의 목욕탕과 배수시설>

3. 청동기 민족을 정복한 철기인들

크리스트교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세기라고 했었다. 기원전 12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이유는,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줜 13세기무렵 히타이트 인으로부터 시작된 철기 문물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인도에 내려온 철기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아리아> 인들이었다. 아리아 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히틀러는 순수한 <게르만>인은 <아리아인>의 핏줄이라면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히기도 했었다.

반면,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들과 충돌하였다. 청동기 문명의 백성들이 철기 부족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인더스 강 유역(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땅을 찾아 끝없이 진출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갠지스 강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 시절의 수많은 부족들이 이들에게 굴복하였다. 인도에 진출한 아리아인들을 유럽의 아리아인들과 구별하여 <인도-아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인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화려한 도시 국가를 건설한다. 아리아인의 부족 족장은 <라진 : rajan)이라고 불렀는데, rajan은 <종교 : region>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아 인의 국가는 농경을 주로 하는 철기 국가였는데, 수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각각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부족의 <신> 역시 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리아 인들은 정복민만 노예로 삼았을 뿐, 각 부족간의 전쟁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5세기 까지는 이런 부족단위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족간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전쟁을 참았기 때문에, 아리아의 각 부족들이 믿는 신은 모두 평등했다.

초기 아리아인의 브라만교를 보면 하늘, 지상, 공간의 3 구역에 모두 33명의 신(데바)이 있었다. 이 33명의 신은 모두 평등하다. 결국 33명의 자연신이 훗날 브라만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는 이 33명의 자연신을 찬양하는 찬양가와 기도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원래 <베다>는 <지식을 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것은 33명의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신관>은 당연히 최고 지배층이었다.

<베다>는 500년간 계속 이어진 찬가들을 모으고 모아 4개의 찬가집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기원전 900년경에는 거의 정리가 끝나간 듯 싶다. 이 찬가집인 베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찬가 자체는 <본집>으로 정리된다. 제사를 위한 찬송가 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제사 규칙을 적어둔 <브라흐마나>가 있다. <브라흐마나>를 알고 있는 자는 <신>과 접촉하는 자로서 지배층이 된다. 다음으로 숲속의 비밀을 적은 <아란야카>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우파니샤드>가 있다.

물론, 베다 자체에 이 4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다>는 이 4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진정한 베다로 인정된다.

4. 바르나 제도의 엄격함

브라만교의 근본 철학은 <우파니샤드>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이 완성된 것은 베다가 완성되고 한참 후인 기원전 5세기 경이다. 즉, 베다 문학보다도 400년 정도 이후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굳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관>은 최고 계급이고, <노예>는 마지막 계급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끝이다. 뭐하러 복잡한 철학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겠는가?

<브라만의 모습 : 알타이 벽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 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브라만교의 철학을 위협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만든 아리아인들은 사회 계급을 4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신>이 나눈 것 처럼 행동하였다. 즉, <제사> 규칙을 아는 자들이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된다. 브라만은 곧 신이거나, 신의 대리자이다.

왕족과 귀족은 브라만보다 낮은 제 2계급이다. 2계급은 정치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크샤트리아라고 부른다. 일반 백성들은 3계급이며 바이샤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원주민들은 <노예>계급으로 수드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4계급으로 사회를 나누고, <바르나> 제도라고 불렀다. <바르나>란, 색깔을 뜻하는 단어이다. 원래 아리아인이 유럽인과 같은 계통인 백인이기 때문에,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과 구분하기 위해 바르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도의 신분 제도를 <카스트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쓴 말이다. 카스트란, 바르나 제도의 4계급에서 계급마다 <출생> 족보를 따져서 수많은 계층으로 다시 분화한 것을 뜻한다. 즉, 직업, 결혼관계 등을 따져 여러 종족(종성)으로 분화되는데, 이것을 카스트(종성)이라고 다시 부른 것이다. 카스트는 바르나와 쟈티(JATI : 출생)이란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카스트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로 지금 인도의 신분계층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할까?

   지금 말하고 있는 제도는 21세기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고대 4계급이 존재했던 바르나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바르나>제도의 특성은 철저한 신분 차별에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자체를 막아 버렸다. 제사계급과 아리아인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2계급(크샤트리아)이 제 1 계급인 브라만의 권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철기시대의 보편적 현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작은 부족들은 큰 부족에게 통합되었고, 중앙집권국가의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 부족간의 전쟁과 부족간 통합은 물자 부족을 가져왔고, 3계급인 바이샤들이 상공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계급은 통일된 국가가 필요했다. 커다란 국가에서 통일된 상업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통일은 다양한 관세나 규제 등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기도 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보다 국제적 무역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정복사업과 상공업의 발전은 2,3 계급이 브라만 계급에 도전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드디어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왜 브라만이 위대한지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만 족들은 급해졌다. 왜 브라만이 지배계급인지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브라만은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우파니샤드 철학을 실제 사회에 맞는 철학체계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비로소, 브라만교의 걸맞는 사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5. 우파니샤드 철학의 <업그레이드>

브라만교의 철학인 우파니샤드는 <신관>들이 자신의 제자들엑게 입으로 전하곤 했다. 즉, 그들만의 구전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 철학은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어 <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 철학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철학의 기본 사상들의 영향을 받거나 반발하면서 석가모니의 <불교 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알다시피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제 2계급인 왕족이었다. 1계급의 독주를 막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 2계급인 석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 그럼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한 번 살펴보자.

이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인성의 일치>이다.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그 브라만은 개인의 인성(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원래의 아트만은 myself라는 재귀대명사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인간은 우주의 법칙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데, 우주에 음양오행이 돌듯이, 인간 역시 끊임없이 돈다. 만약 착한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음 세상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난다. 즉, 브라만이 제 1계급인 이유는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생까지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대표적인 윤회설로는 <오행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은 자는 흙과 물이 된다.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흙을 적셔주면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흙과 물이 만나 곡식을 이루고, 남과 여는 그 곡식을 먹는다. 남자가 먹은 곡식은 정자가 되고, 여자가 먹은 곡식은 아기집이 된다. 정자와 아기집이 다시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즉, 개인의 생명(아트만)은 죽은 뒤 우주의 법칙(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윤회하여 생명(아트만)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브라만으로, 나쁜 일을 하면 수드라로 윤회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회의 예외로 <신도>가 있다. 신도란, 신의 길로 가 버린다는 뜻이다. 윤회의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이 숲속의 비전을 찾아 산 속으로 숨어 버리면 윤회하지 않고 <신의 영역>으로 가 버린 다는 것이다. 이미 윤회를 알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을 <업>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브라만이 잘난 것은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이고, <신>의 세상에 가는 것도 브라만 뿐이라는 것이다. 전생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드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수드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철학은 브라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철학이었지만, 다른 계급의 반발을 불러오는 철학이기도 했다. 자, 그럼 2, 3계급이 어떻게 우파니샤드에 대해 반항했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나?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영혼의 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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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게하르트 베르 (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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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오브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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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기태 (판미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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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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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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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서정첩 (여래,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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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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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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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길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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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아름드리미디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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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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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편집부 (풀빛,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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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환타스티아 (6장)

서구의 신화에 대한 깊은 환상 - 드루이드

드루이드에 대한 세가지 관심

<드루이드>는 유럽의 신화에서도 특별한 존재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신화 속의 신화>로 자리잡고 있는 존엄한 사제라는 이유 때문이죠. 환타지물과 같은 유럽 중세의 이야기 속에서 드루이드는 유럽 주류와는 다른 <신화 속에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로 다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록이 거의 없으니까요.

사람들은 신화를 이야기할 때,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경외감이나 공포심을 갖고 이야기를 바라봅니다. 알려지지 않은 그 이야기에는 어떤 숨은 뜻이 숨어있을까 하고... 그러나 고대 신화의 큰 맥락은 인류가 살았던 비슷한 시기의 다른 곳 이야기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드네요.

드루이드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최근에는 크게 3부류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연구자들입니다. 신화와 민속학, 유럽에 대한 언어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드루이드라는 존재와 그 존재가 중세 유럽에 나오는 문건들을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죠. 특히 문학과 시가에 많이 나오니까요.

두 번째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게임매니아>들입니다. 환타지 소설에 드루이드는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하는 이중적인 사제로 등장합니다. 또 <와우>와 같이 대중화된 RPG 게임에서도 드루이드는 자연 속에서 치유의 힘을 갖는 사제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소설과 게임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역사와 완전히 일치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드루이드의 배경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는 듯 합니다.

세 번째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드루이드라는 단어에 대한 관심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그리스도교가 일반화 되면서 신화적 존재인 드루이드 사제나 고대 종교에 대한 왜곡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중세 교부철학자들은 가톨릭 교리와 다른 모든 신들의 역사를 이교의 역사로 단정했기 때문이죠. 왜곡된 종교적 공포심은 그 종교에 대한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불러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 <드루이드>에 대해 진실을 알 수 없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점이 <드루이드>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초기 사회에서 <신관>의 존재

드루이드가 무엇인가를 정의내리는 부분을 저는 다른 서적들이 접근하는 것처럼 신화, 종교적인 접근이 아닌 역사적인 (개인적인) 생각으로 적어볼까 합니다.

인류 역사 단계상 국가가 성립한 단계는 (대부분이) 청동기 시대였습니다. 청동기 때 금속기 문명이 등장하면서 <금속기는 무기 용도>로 가장 크게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도의 물질 문명이 시작된 것과 달리 초기 금속문명 시대의 정신적 수준은 그다지 높지 못하였습니다. 부족을 다스리고 국가를 세워 나라를 통합하려는 시기에도 여전히 석기시대의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이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남아있었습니다. 실제 유럽에서 크리스트교가, 아시아에서 불교가, 중국에서 유교이념이 등장하기 전까지 석기시대의 종교는 개별적으로 그 지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이러한 석기시대의 종교적 이념은 그 지역에 따라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자연환경과 사회구조에 따라 숭배하는 대상이 각기 달랐죠. 그러나, 초기 국가시대에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종교적 특장인 <신관>, 즉 <무당>이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삼한 기록으로 자주 나오는 종교적 제사장 <천군>, 인도 신화의 <신관>, 유럽 신화에서의 <사제>를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초기 국가 시대에는 <종교적 계급>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입니다.

초기 국가단계의 사회에서 종교적 지배자가 중요시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인류의 사회발전단계를 설명한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종교>의 근본 원인을 <공포>에서 찾았습니다. 인류는 자신이 알 수 없는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외심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불합리한 문제를 가장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알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무엇인가를 <신의 이름으로>라는 말 한마디면 간단히 해결되니까요. 초기 국가 사회에서는 동북아의 무당(샤먼)이나 인도를 경계로 서부의 사제(신관)계급이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매개체였고,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신성을 상징하는 매개체였다는 것이죠.

초기 사회에서의 <사제>란 계급은 어느 지역이든 <경외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주는 절대자였습니다. 그러고, 그 중 북유럽와 브리튼 지역에서 활동했던 켈트족의 사제가 바로 <드루이드>입니다. 드루이드는 신화적 존재로 격상되었지만, 실제 초기 사회에 볼 수 있었던 <사제> 계급이었을 뿐입니다.

인도 신화에서 유럽, 북유럽 신화로...

학자들은 드루이드의 기원을 인도 문화권의 <사제>의 개념이 전파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초기 국가시대 중화권-만주, 요녕-한반도를 아울러 신관계급이 존재했던 것처럼 인도 문화권에서도 사제라는 개념이 있었습니다. 인도 문화권에서의 초기 사제는 하늘과 땅을 중제하는 <무당 : 샤먼>의 개념이었습니다.

초기 인도 신화의 원형으로서 <아그니>라는 신이 있었는데, 이 신은 신과 인간을 중제하는 샤먼이었습니다. 이 신은 신들의 사자로 인간을 방문하고, 인간이 바치는 제물을 하늘의 신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초기 국가시대 각 국의 신관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짐승이나 인간 자체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와 비슷한 <제천행사>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그니는 인간으로서의 샤먼이 아니라 우주의 도처에 존재하면서 인간의 생활을 지켜보는 절대적인 신으로서의 샤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그니라는 말 자체가 <불>을 뜻하는 단어로서 인류를 지켜주고 문명을 발전시켜준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아그니와 같은 인도의 신은, 아시아 유목계 민족의 이동과 함께 인도-유럽문화권의 사제 개념으로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예로, 동양에서의 힌두교 신은 브라만이 사제 계급으로서 역할을 한다면, 서양 켈트족의 드루이드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제로 발전했다고 보는 관점이죠. (실제 기록은 없고, 단지 고대 민족의 이동경로연구나 종교적 유사성을 근거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갈리아 전기에 등장한 드루이드...

드루이드라는 사제 계급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이후 환타지 등 문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바로 유명한 로마의 정복자 시저(카이사르)의 저서 <갈리아 전기>에 캘트와 게르만의 존재를 적기 시작하면서 부터입니다.

시저의 기록에 의하면, 고대 캘트족들은 전사계급과 사제 계급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중 자유민들은 <전사단>을 구성하여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전사단은 국가적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단순한 수준의 <민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민화는 정치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토론하고, 자유로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의 단체였다고 합니다. 캘트인 중 하류 계급은 전사계급을 위한 식량 조달이나 일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캘트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계급은 <사제계급>인 드루이드였습니다. 이들은 <신의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샤먼의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으므로 사회적 지위는 상당히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의 심판은 절대적이었고, 신의 심판에 불복종하는 사람은 <종교적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당시 원시 사회에서 종교적 자유의 박탈은 신과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 가장 큰 형벌이었다고 볼 수 있죠. 이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믿었기 때문에 영혼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드루이드>는 당시 가장 큰 특권층이었습니다. 삼한의 <소도>와 같이 제정이 분리된 사회에서 자신들만의 성지를 가지고, 신탁을 받았는데 이러한 신탁이나 법적 해석은 당시 사회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범죄자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도 하였고, 가난한 자들을 산채로 제물로 바치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독재적인 풍속은 훗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교도>라고 탄압받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드루이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하면서 신의 명령을 지상에 전하는 역할을 합니다. 고대 이집트의 신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관, 인도의 브라만, 동아시아의 신관이 모두 그런 역할을 하였죠. 이러한 초기 사회 신관들의 특징은 단순히 제사만 지내는 신관이 아니라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층이었다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드루이드 역시 마찬가지였죠. 세습적인 계급으로서 드루이드는 사제이자, 신의 심판을 맡는 재판관이었고, 신의 명령을 전달하고 교육하는 교육자이자, 사회적 불만세력을 제거하는 조직체의 역할을 합니다. 이들은 천제를 보고 천기를 읽거나, 달력을 제작하는 역할도 하였고 예언가로서의 역할도 했으며, 병자를 고치는 치유술사에서 마법사의 역할까지도 하였습니다. 판타지 소설에 나올만 하죠.

캘트족의 멸망과 드루이드 죽이기의 시작

쇠락한 민족은 그 종교성도 의심받기 마련입니다. 기원전후를 기점으로, 로마가 유럽 북부지방까지 세력을 떨치면서 켈트족의 종교인 드루이드교도 심한 타격을 받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갈리아 지방 통제 정책으로 개별적인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황제숭배>와 <로마교>가 유럽 북부지방에 들어온 것이죠. 제우스신을 정점으로 한 로마교는 무당역할을 하는 드루이드의 이념과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드루이드가 사교도로 규정된 것은 유명한 교부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때 부터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종교도 부정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크리스트교를 위한 유명한 저서인 <신국론>에서 <하느님> 이외의 신을 인정하는 이교도의 사제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생활에 대해 이전과 다른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교도들은 사람을 산 채로 묻어 죽인다던가, 심장을 먹는다던가, 난잡한 섹스를 즐긴다던가, 야만인같은 행위를 즐긴다던가 하는 내용들이 추가됩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문명인들인 로마인을 자극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공포심>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마르크스가 종교의 근원을 <공포>라고 했듯이 교부 철학자들은 야민인들의 종교가 가진 <무서움>을 극대화하여 그 종교에 대한 반대 개념의 선으로 <크리스트교>를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로마 시대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던 아일랜드 지방의 드루이드 사제들 조차 <하늘과 지상의 연결자>로서의 신성한 권한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빼앗기고, 드루이드는 이제 <공포를 낳는 이교도>로 낙인찍혀 서서히 사라지게 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원시종교인 샤먼과 토템이 서서히 사라졌습니다.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정착되면서 원시 종교인 드루이드 등이 사라지게 된 것이죠.

드루이드에 대한 환상과 두려움의 양면성

중세시대 캘트의 문학을 미화하는 여러 작품들은 드루이드를 신화적 소재로 이용하기 시작합니다. 드루이드는 아일랜드와 브리튼, 캘트 전설에 종종 등장하는데, 그 신비함은 환타지적인 소재로 딱이었죠. 온라인 게임인 <와우>에 등장하는 드루이드는 자연 속에 은둔하는 판타지 속 신화의 존재로 등장하면서 드루이드의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 환타지 속의 드루이드는 선과 악의 양면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드루이드는 치유의 힘을 사용하여 밝음의 길을 걸으면서도, 반면 강력한 어둠의 힘을 이용하여 반대세력을 굴복시킨다고 표현합니다. 절대 선은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때문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형태가 가장 이상적인 설정이라는 것일까요?

반면, 중세이래 그리스도교, 특히 기독교에서는 드루이드를 마녀사냥의 도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사탄의 힘을 이용하는 심령술을 행하는 자, 악령을 부르는 제사의식을 행하는 자 등을 드루이드로 설정한 것이지요. 할로윈 행사에 등장하는 각종 기괴한 호박머리와 가면 등은 드루이드의 악마성을 상징하는 물품으로 이용됩니다. 물론 드루이드 뿐 아니라 각종 초기 종교들이 중세 이래 <사탄의 종교>로 낙인이 찍혀 있기도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종교가 사람의 공포심을 극대로 자극한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드루이드를 닉인찍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주류 종교의 반대 개념으로 역사에 묻힌 종교를 꺼내 <악마의 종교>로 낙인찍어 버리면 주류 종교의 신성함이 돋보이게 된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죠. 실제 <악마의 종교>라는 타이틀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극대화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중세시대 교황에 대한 믿음과 의존도가 높아지는 효과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드루이드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2가지입니다. 게임매니아들이 생각하듯이 재미있는 신화적 존재이자 즐길 수 있는 소재거리로서의 존재, 또 하나의 관점은 <악마의 속삭임>을 전해주는 오컬트 종교... 어느 쪽의 입장이던지 서구적 신화인 드루이드는 그냥 서구 사회 역사 속의 산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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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루이드 상세보기
편집부 지음 | 소프트뱅크코리아 펴냄
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 1(신화와 역사편) 상세보기
베니야만 지음 | 스타북스 펴냄
유럽의 정신문화와 지식을 함께 전해주는 재미있는 유럽 안내서 <유럽에 빠지는 즐거운 유혹>은 단순한 정보만을 알려주는 여행 안내서를 벗어나 지식과 즐거움, 역사와 유적, 축제일에 이르기까지 흥미와 정보, 지식을 더해주는 색다른 여행서이다. 알찬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세한 안내는 물론 그에 얽힌 유래, 사연, 그리고 생생한 사진까지 함께 실어 여행에 대한 충족감을 더해준다. 1권에서는 신들의 탄
유럽문명의 신화(나남신서 186) 상세보기
E.L.존스 지음 | 나남 펴냄
오늘의 유럽 문명, 경제가 있게 된 배경을 이슬람과 오토만제국, 인도와 무갈제국 및 중국 명.청조와의 비교를 통해 규명한 경제학자의 연구서.
인도신화의 계보(살림지식총서 13) 상세보기
류경희 지음 | 살림 펴냄
인도의 다양한 신과 신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사상과 가치들을 체계적이면서 쉽게 설명해준다. 인도 신화의 일반적인 특성, 즉 신들의 계보, 종류, 특성 관련 신화와 그 속에 담긴 핵심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오늘날 인도신화와 의미를 압축하여 담았다.
위대한 주제(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 1)(양장본) 상세보기
타임라이프 편집부 지음 | 이레 펴냄
인간 삶의 정신적 토대를 제공하는 신화 인류의 문화적 원형인 신화를 본격적으로 재조명한 신화 탐구서『타임라이프 신화와 인류 시리즈』. 총 10권으로 기획된 시리즈로, 타임라이프 사의 권위 있는 집필진이 인류의 지혜가 담겨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온전한 모습으로 소개한다. 다채롭고 풍부한 사진 자료를 함께 수록하여 생생함을 더했다. 이 시리즈는 각 문명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기이한 설화와 신비로운
안개너머의 나라 켈트의 속삭임(신화로 만나는 세계3) 상세보기
레이디 오거스타 그레고리 지음 | 여름언덕 펴냄
켈트 신화에 입문하거나, 켈트 신들의 세계, 켈트의 세계관과 정신적 뿌리에 접근하기에는 가장 좋은 텍스트를 지니고 있다. 쿠홀렌과 코나리 모르 등 영웅 전설로 이루어진 얼스터 시대 신화도 문화적 완성도가 높고 재미도 있어 관심 있는 사람은 찾아 읽어볼 만하다. 그레고리의 신화의 가장 뛰어난 점은 시적인 언어와 풍부한 이미지다. 유럽의 대표적인 신화 중 하나인 켈트 신화를 소개했다.
켈트: 고대 문명의 역사와 보물(세계 10대 문명사 9)(양장본) 상세보기
다니엘 비탈리 지음 | 생각의나무 펴냄
눈앞에서 펼쳐지는 켈트 문명의 박물관 세계 10대 문명을 생생한 도판으로 소개하는『세계 10대 문명사』시리즈. 풍부한 지적 재미와 품격을 갖춘 고급 교양서를 지향하는 이 시리즈는, 원서를 출간한 이탈리아의 화이트스타 출판사와 함께 제작한 대형 판형의 자료집이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폭넓고 깊이 있는 설명과 화려하고 풍부한 사진을 제공한다. 이 시리즈는 이집트, 그리스, 로마, 인도, 아스텍, 이슬람, 페르시
갈리아 전기 상세보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 종합출판범우(주) 펴냄
갈리아 지역에 대한 카이사르의 정복 사업을 담고 있는 <갈리아 전기>를 소개하는 책. 로마군의 갈리아 원정의 기록인 <갈리아 전기>는 카이사르가 직접 체험하고 지휘했던 전투의 상황을 유려한 필체로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카이사르가 조국을 침략하던 갈리아에 맞서 결국 조국의 영광까지 이룩한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카이사르 개인의 기록이 아닌, 그 시대의 로마와 갈리아의 운
갈리아 사람들(세계사 이야기 4) 상세보기
스테파니 러둘레스 지음 | 보물섬 펴냄
갈리아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을 일컫는 말이에요. 갈리아 사람은 사실 켄트 족이었는데, 철기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은 일찍이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블타니아 등지로 널리 퍼져, 유럽 문명의 원조가 되었답니다. 다양한 사진과 그림 자료 등을 통해 과거 갈라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로마 초기의 사회구조와 클리엔테스

1. 로마 초기의 사회와 로마의 사회구조

로마는 이탈리아 소국의 도시국가에서 출발합니다. 물론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보살핌 속에 살았다는 건국설화도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별로 중요치 않아서 생략합니다.

초기 로마는 수많은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 중 아주 작은 소국에서 출발합니다. 초기에는 에트루리아 계통의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였지요. 초기 국가 형태도 그리스와 같은 집주형태로서 각각의 도시국가가 형성되어 발전하고 있었던 형태라고 보면 됩니다. 따라서 로마의 초기 역사는 아테네의 평민성장과정과 매우 유사한 형태를 띄면서 발전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와 로마는 지중해를 사이에 둔 중계무역과 식민도시 건설로 성장한 도시국가라는 유서점입니다.

초기의 로마는 왕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초기 소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국가의 주도권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기병과 무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귀족에게 있었고, 로마의 영토확장에 이들이 나서게 되면서 로마는 귀족공화정의 형태로 변하게 됩니다.

2. 로마의 귀족 공화정의 중앙 정치 제도

로마의 초기 공화정은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마 건국기에는 에트루리아 왕이 있었지만, 실제 종교와 정치적인 중요 업무를 처리하는 신관 수준의 역할이였고, 전쟁에 나가 싸우는 전사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은 곧 추방되고, 실권은 귀족이 장악하게 됩니다.

로마의 귀족 공화정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처럼 도시국가에 필요한 기구를 만들면서 확립됩니다. 그럼 초기 귀족공화정의 틀을 이루었던 기구들을 살펴볼까요?

우선 원로원이 있습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초기 국왕권 밑에서 세력을 키운 씨족장의 후예로서 국왕을 몰아내면서부터 로마 최고의 기관으로 군림합니다. 로마의 행정업무를 보는 정무관을 지낸 사람이 임기가 끝나거나, 나이가 들면 이 원로원에 소속되게 됩니다. 즉, 원로원이라는 기구는 형식상으로는 로마 행정기관(집정관) 밑에 속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원로원은 법률과 행정력을 무시할 수 있는 <원로원의 충고>라는 강력한 권한이 있습니다. 어떤 실질적인 권력자도 이 원로원의 충고는 무시하지 못하며, 원로원에게는 예의를 표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확립되어 있었으니까요.

법적으로 로마 최고의 행정관은 <정무관>입니다. 정무관은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단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한 최고 권력자는 <집정관>이라는 정무관인데, 이 집정관은 2명이 한달씩 교대하여 업무를 처리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상호 견제하면서 최고권력을 균형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으로, 이 2명의 집정관은 임기가 1년으로 정해져서 더 이상의 독재는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또, 전쟁 등 비상시에는 집정관이 <독재관>이 되어 군사업무 등을 총괄하는데,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고 해도 독재관이 6개월 이상 재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집정관은 민회를 소집할 수 있으며, 원로원과 협의하여 <원로원의 충고>를 거울삼아 정치를 하곤 했습니다. 집정관 역시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에 소속됩니다.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을 집행하는 <법무관>, 징병이나 인구조사, 풍기감독, 재산조사 등을 책임지는 <감찰관>,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관>, 건축이나 축제, 경기관람 등을 주관하는 <에딜레> 등이 있습니다.

모든 정무관의 공통적인 특징은 임기가 1년이며, 이들을 민회가 선출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정무관은 무보수의 직책이므로,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이러한 정무관들 말고, 고대 사회의 특징은 <신관> 역시 로마에 존재하기는 합니다. 특히 정치와 종교가 밀접한 고대 사회에서 신관을 무시할 수는 없죠. 이들 신관은 점을 통해 로마 지배층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로, 민회의 개최, 축제의 시작일, 전쟁의 날짜, 종교행사, 시민의 공공활동 등은 신관이 정해 준 날짜에 맞추어 하는 것이 이 당시 관례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신관이 정해준 날짜에 의해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기도 하였으니까요.

3. 로마 초기 사회의 구조

로마 사회는 그리스 사회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국가 규모 자체가 도시국가 수준이였고, 사회 구조 역시 비슷했습니다. 일단, 로마의 계급은 귀족, 평민, 노예로 구성되는 3계급 사회였죠. 특히, 귀족과 평민의 결혼 등은 엄격하게 구분하여 귀족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귀족 위주의 공화정이였습니다.

특히 귀족계급 은 사회적인 모든 특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원로원, 집정관, 신관 등의 주요 관직은 모두 이들 귀족의 차지였습니다. 특히, 초기 로마의 영토확장은 귀족들이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싸우는 기병위주의 전투였으므로, 실제 전쟁에 참여하는 귀족들이 전쟁을 통한 전리품을 모두 차지하는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초기 로마 사회를 귀족 공화정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초기 로마에서의 평민들은 정치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영농민이거나 수공업자 였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이 부족한 자들이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평민들은 유력한 귀족들에게 자신의 보호를 부탁하면서 귀족에게 자신이 가진 것들의 일부를 보상으로 지급하곤 하였답니다. 이렇게 평민과 귀족간의 보호-보상 관계가 이루어지는 제도를 클랜테이지라고 합니다. 특히, 보호받는 농민들을 클리엔테스(clinetes)라고 부릅니다.

클리엔테스는 가부장권이 절대적인 고대사회에서 보호자에게 보호를 받으며 신의를 맺은 평민입니다. 솔직히 이 당시 평민들은 법적인 인격을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보호자가 법정에서 변호를 해줘야 했습니다. 보호자인 귀족이 평민을 지켜줄 경우, 평민은 보호자를 위해 종군(전쟁에 참여해주는 것)을 하거나 보호자를 위해 공물을 바치곤 했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호-피보호 관계는 얼마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로마라는 국가가 전쟁을 통해 점차 국가 규모가 커졌기 때문이죠. 로마의 영토확장은 곧, 수많은 병사를 필요로 하고, 이것은 수많은 평민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됨을 뜻합니다. 평민들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면서부터 평민들은 로마 귀족들에게 토지를 댓가로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초기 그리스와 거의 유사하죠? 그리스에서도 식민도시 건설 속에서 평민이 <클레로스>를 받아 민주주의 사회로 진전되었음을 설명했었습니다. 로마 역시 평민들이 시민권을 요구하는 투쟁이 시작되며, 이것이 곧 로마라는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로마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는 부분부터 한번 시작해보겠습니다. 로마의 시민성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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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