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4화. 달마 이야기 : 지식은 권력층만의 것이 될 수 없다.

1. 선(禪)이란 본래 수행방법이었다.

선(禪)은 원래 인도 불교의 수행방법으로서 <요가의 명상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선은 범어로 드야나(dlhyana)를 번역한 것인데, 원 뜻은 <집중하여 생각한다> 이다.

그런데, 이 수행방법이었던 선이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큰 위상을 차지한 <종파>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오늘은 선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국에서의 <선종>은 보리달마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데, 달마가 중국에 건너오기 전의 <선>을 교학선이라고 한다. <교학선>이란, 소승불교에서 개인 수양을 위해 적어놓은 <호흡법> 등과, 대승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요가수행법 등을 바탕으로 한 <명상법>을 말한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교종> 종파들이 책을 읽은 후 수행법으로 익힌 것이다.

따라서 <교학선>은 독자적인 선종 종파로 볼 수 없다. 교종의 진보적인 스님들이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이 스님들도 선종과 관계없이 그냥 <선사>라고 부를 뿐이다. 원래 <선사>란, 종파와 관계없이 선법을 익힌 모든 스님들을 칭하는 호칭이었다.

그럼 선종(禪宗) 조사는 누구일까? 말은 많지만, 대부분이 <달마>를 조사로 인정하고 있다. 원래 인도에서의 선은, 신비주의적인 <도술>과 같았다. 숨쉬기를 통해 <공중부양>을 한다는 요가법을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종교로 인정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처음 달마가 중국에 선을 소개했을 때, 불교인들은 달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듯 싶다.

지금이야 무협지에서 장풍을 쏘고, 축지법을 쓰고 난리도 아니지만... 무협지의 기본 배경이 되는 불교 종파가 바로 달마를 시조로 하는 선법 계열이다.

달마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는 소림사에서 장풍이나 날렸던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달마가 지었다는 <이입사행론>이나 그의 철학인 <일심사상>도 후대인들이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마의 저서가 후대작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 책으로 그의 철학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2. 달마 : 마음으로 경전을 읽을 수는 없는가?

달마는 극심한 혼란으로 어수선한 남북조 시기의 <남조>에 건너왔다. 당시 중국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양나라의 무제는 <불법의 수호자>를 칭하는 인물이었다. 양조는 달마대사가 오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평생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고, 승려들을 공경한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남조의 왕은 스스로를 미륵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미륵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경전을 읽고 있었다. 백성들은 글을 모른다. 사후세계의 주인은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달마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당신은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마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선종의 선사상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과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선종은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공덕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공덕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먼저 아는 것이며, 본래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다.

달마의 사상은 <이입사행론>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의 핵심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理)는 깨달음(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행(行)은 실천을 말한다. 즉,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라는 것이 이입사행인데, 깨달음의 핵심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을 아는 것이고, 실천의 핵심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을 말한다.

보리달마는, 남조의 왕이 <공덕>에만 욕심을 내고,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조의 지배층은 공덕을 무시하는 달마를 배척하였다. 달마가 쫓겨난 것인지, 수행을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간 면벽 수련을 한다.

그런데, 면벽(벽관) 수련이란 어떤 수행법일까? 용어 그대로 벽을 보며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수련을 말한다. 이것은 사방이 차단되어 아무런 번뇌도 나에게 들어올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3. 경전을 버려야 하는가, 경전에서 참뜻을 구해야 하는가?

중국 불교 초기에 선사상이 <교학선>이라면, 달마와 그 후계자들로 이어지는 선사상을 <여래선>이라고 한다.

여래선은, 부처라는 인격을 절대적으로 보려는 기존 교종 사상과 차별되는 사상이다. 여래선에서는 기존 경전보다 <능가경>에 나오는 <여래선> 사상을 강조한다.

보리달마가 가장 중요시한 <능가경>에는 4가지 선사상이 나온다.

1단계 : 우부소행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

2단계 : 관찰의상선

모든 것이 무(無)라는 것을 알고 사물을 바로 알아가는 단계

3단계 : 반연진여선

진여(사물의 실제)를 알기 위해 경전의 진리(반야)에 집착히지 않는 단계

4단계 : 여래청정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위해 실천하며 살며,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

능가경은, 수행과 깨달음을 위한 선을 4단계로 분류한 뒤, 여래선이 최고의 선이라고 규정하였다. 달마 이후 선종 조사들은 스스로의 선을 여래선이라 불렀는데, 그 핵심은 <마음>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죽고 사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마음은 인간이었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기에, 부처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우선인 것이다.

손을 하나로 모으는 <합장>은 악수와 다르게, 내 스스로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화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다.

<밥 먹을 땐 밥을 먹고, 이야기힐 때는 말하고,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마음이 시키는 하나의 행동이란 것을 중생들이 모를 뿐이다. - 보조국사 지눌 - >

여래선에서 말하는 마음은 크게 2가지이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하고, 죽음이 덧없음을 아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렸으니, 부처가 되어 <성불>하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능가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부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종에서는 <경전의 말씀>만 강조한다. 그러나, 경전으로 깨닫는 것은 <지식의 독점>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철학을 접할 시간도 없는 일반민에게 성불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달마의 사상은 획기적이면서도, 지배층에게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 사상이었다. 그리고, 달마의 후계자들 중에 <마음>을 강하게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탄압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달마의 직계 계승자>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계속 해보려고 한다.

4. 이심전심(以心傳心) : 선종의 시조 마하가섭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자. 선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는 마하가섭의 이야기이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씩~ 웃으며, 나는 석가모니의 뜻을 알 것 같은데요... 하는 표정으로 석가를 쳐다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경지를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그 후로,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이 일화를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을 인도 선법의 시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종의 역사를 정리한 <능가사자기>는 마하가섭을 시조로 달마를 중국선조(2대조)로 기록하고 있다.

달마는, 이렇게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실천사상이 담겨있는 <능가경>을 핵심경전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 달마 이후 2조 선사부터 5대 선사까지의 시대를 능가경에 의지한다고 해서, <능가종>이라고 부른다.

1대 달마는, 기존 교종처럼 지식의 유무를 테스트하여 2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하여 후계자를 뽑은 것이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옷(가사)와 지팡이를 말하는데, 이 두가지를 전수받은 제자가 종파 조사가 되는 것이다.

달마에게는 <혜가>라는 제자가 있었다. 혜가는 면벽수련을 하는 달마에게 법을 구했으나,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달마를 모시고, 성실하게 생활하였으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혜가는 입실 허락을 기다리다가 다시 달마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달마는 혜가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불안한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져오너라.>

혜가는 스승의 눈빛을 이해한 뒤, 칼을 뽑아 왼팔을 끊어 달마 앞에 보여주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널 편안하게 해 주어야겠구나.>

그리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사를 넘겨주는 선종의 전통이 생긴 것이다. 시조 달마에서 5대조 흥인까지는 이렇게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능가경>을 경전으로 선사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6대조 혜능에 이르러 <능가경>조차 버리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럼 선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혜능>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5. 혜능과 신수 :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선문의 5대조는 흥인이다. 흥인은 양자강 쌍봉산에서 <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아직 선종이라는 종파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모임을 <동산법문>이라는 문파로 부르고 있었다. 이 종파는, 달마의 면벽수련과 정토종식 염불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흥인 역시, 부처와 인간의 심성은 동일하며 누구나 부처가 되어 성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중국의 오랜 분열시기가 끝나고, 수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된 시기였다. 그 때문인지, 흥인은 안정적으로 불법을 설교할 수 있었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흥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신수, 혜능, 법지였다. 신수는 가장 뛰어난 제자로 흥인의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인물이다.

반면, 혜능은 남조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흥인을 만나고자 일부러 찾아온 인물이었고, 절에서 방앗간 허드렛일이나 하는 자로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신수는 평소 자신의 사상을 5언률의 게어로 지어 스승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랑스레 붙여놓았다. 모든 이들이 신수의 학식에 감탄했으며, 스승 또한 선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며 칭찬하였다.

몸은 곧 보리수이고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때때로 힘쓰고 털어내어서 번뇌가 다가오도록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나, 혜능은 신수의 게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선>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를 깨닫고, 결국에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리수와 거울의 비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혜능은 글을 모르기에, 다른 사랑에게 부탁하여 글을 적었고, 자신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여두었다.

보리라는 나무도 본래 없는 것이고, 맑은 거울이란 것도 그 본질이 없는 것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사물일 뿐인데, 어느 곳에 먼지가 쌓인단 말인가?

혜능의 게어를 본 흥인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은 혜능에게 옷과 지팡이를 전해주고, 선문 6대조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신수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혜능을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30살을 갓 넘긴, 혜능은 남쪽으로 내려가 16년 동안 평민들과 어울려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것을 보고 난 후, 그의 토론하여 그를 <마음>으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출가하여 <남종선>을 개창하였다.

혜능의 선사상은 달마의 수행법인 좌선수행을 벗어난 것이었다. 혜능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선문답>이었다. 혜능의 6대조부터 선종은 <여래선>을 벗어나 <조사선>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아시아 선종은 바로 이 <조사선> 계통이 된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혜능이 6대조가 되어 <남종선>을 연 동안, 정통 제자로 여겨졌던 신수는 무엇을 했을까? 신수와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하였다. 훗날, 북종선이라 불린 신수의 선종 문파는 경전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승불교의 여러 교단을 선종의 이론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원래 유교와 도교의 이론에도 정통하였던 신수는, 당나라 무측천(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어 대통선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종 고승이 된 그는, 대승불교를 <마음>의 관점에서 통합하려 했지만, 그가 죽은 뒤 교단 자체가 힘을 잃게 된다. 당나라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마음> 따위를 강조하면서 <불교>를 평민들과 <공유>하려고 한 그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또한, 혜능의 진보적인 교단이 남부지방을 석권하면서 신수 일파의 북종선이 일방적으로 비판당했기 때문이다.

신수, 혜능과 같이 흥인의 제자였던 법지는 아예 독립적인 교단을 차려 나갔는데, 그가 주장했던 것은 염불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종파를 <우두종>이라고 하지만, 염불을 강조한다는 교단 성격이 정토종과 비슷하기 때문에 곧 잊혀지게 되었다.

6. <직지인심>을 계승한 선종

일자무식이라 여겨진 혜능이 선종을 <종파>로 만들어 버린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혜능부터 <조서선>이라 불린 선종은 이론적으로 현재의 선종과 유사해졌다.

불립문자

문자에 의지하지 않음

교외별전

경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음

이심전심

마음을 통해 마음으로 전함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본성)을 한번에 깨달음

견성성불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마음을 타고 났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음

선종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인데, <마음>은 결코 경전으로 알 수 없다. 일상속에서 깨달을 수도 있으며,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문자에 의지할 필요도 없으며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혜능은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오랜 시간의 면벽(좌선, 참선)보다도 선문답을 통한다면 더 빠른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말하였고, 어느 순간 단번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돈오견성)

또, 혜능은 수행을 통한 번뇌 해소보다 깨달음을 통해 바른 성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원래 번뇌와 지혜는 하나이다. 참과 거짓도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선문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을 <돈오>라고 하자. 깨닫기 위해 문제를 파악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리고, 큰 <화두>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요즘 이슈가 되는 <화두>는 이거야... 대학갈려면 <공부> 안할래?... 이렇게 단어들은 모두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혜능이 말한 <조사선>은 자신이 알아야 할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서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 <돈오>에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은 기존 <지식>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기존 교종의 입장은 <경전>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성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화두>가 그것인데, 왜 <공부>만 시키려 드는가?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은 안보고 왜 손가락만 보는가?

선종에서 말하는 비유는 위 문장과 같다. 석가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교종은 석가의 손가락만 보면서 찬양하고 있다. 석가의 <마음>은 이미 달로 향했는데, 교종은 마음이 아닌 석가의 <손가락>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석가의 손가락을 떠나 석가의 눈을 보면서 그가 향하고 있는 <마음>을 같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다.

7. 선종 문파의 창궐...

혜능 이후, <남종선>은 중국을 대표하는 <선종>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각지에 전파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종은 그 영향력 만큼이나 종파가 너무 다양해서 이름만 듣고서는 너무 생소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 유입된 선종 종파들의 이름이기 때문에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보자.

혜능의 문하에서 배출된 큰 종파는 마조도일의 <홍주종>과 석두희천의 <석두종>이다. 특히 혜능의 사상이 선종문파로 활성화 된 것은 <홍주종>의 영향이 크다. 홍주종에서는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평상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조도일의 제자인 백장회혜는 선종의 계율을 만들었는데, 함께 수행하고 선문답하며 자급자족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규율이 불가에서 중요시하는 <백장청규>이며, 이 때 부터 선종이라는 종파가 독립적으로 사원을 짓고, 규율에 맞춰 생활하게 되었다.

선종은 <경전>과 <문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마음>을 중요하기 생각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한 편이다. 또, 경전을 대신해서 선조 조사들의 <어록>을 경전과 같이 소중히 다룬다. 신약 성경이 예수의 말을 모아둔 제자들의 이야기라면, 선종의 <어록>은 선종 조사들의 이야기를 모아둔 <성경>이다.

선종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마하가습부터 달마, 혜능 등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부처의 <직계 사상 계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부터 현재까지의 조사들의 말씀은 곧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후, 마조도일의 홍주종에서 위앙종, 임제종이 나왔다. 석두희천의 석두종에서는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이 나왔는데, 이들 5개의 종파를 선종5가라고 말한다. 또, 송나라 때 임제종에서 황룡파, 양기파가 나와 이 때는 선종7종이라고 부른다.



위앙종

  무위무사 : 마조도일의 평정심 강조, 마음을 평안히 하면 번뇌가 사라짐

임제종

  임제의현의 개창, 황룡파와 양기파 배출, 즉시 깨달음을 강조, 간화선 강조



조동종

  설법과 언행이 중요함을 강조함, 묵조선 강조

운문종

  운문어록에 적힌 적은 글자 수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간결한 깨달음 강조

법안종

  화엄의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선을 받아들여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강조

선종은 고려 이후 한반도에서도 주류 불교종파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 중 법안종은 고려시대 초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통합을 시도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임제종은 불교가 침체되고 성리학이 유행했던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이어나갔다.

특히, 선종 5가 중에서 임제종과 조동종은 중국 송나라 시기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은 간화선 사상과 묵조선 사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간화선看話善>이란, 선종 조사들이 남긴 <어록>들을 공식 문서로 만들어 참고 자료로 활용한 다는 뜻이다. 만들어서 보고(看), 선조들과 대화하여(話) 자신의 본질을 알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간화의 <화>란 앞서 말한 <화두>의 약자이다.

<묵조선黙照禪>이란, 묵묵히(黙) 자신을 찾는(照) 수양법이다. 즉,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자신을 찾는 방법이다. 묵조의 <조>란 자신을 안다는 지(知) 자의 다른 표현이다.

   간화선이든, 묵조선이든 후대 선종 종파들은 한가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으며, 그 고민을 풀기 위해 각각 자신의 종파 이론이 달마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안고 있던 고민은 조사 달마에 관한 것이였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도대체,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중국에 남기려고 한 선법은 석가모니의 인도 선법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러나, 달마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그 정답은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달마에 대해 남긴 기록들은 후대의 제자들이 남긴 이야기일 뿐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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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선종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중국 불교에 대해서도 거의 정리된 듯 싶다. 중국 불교는 이제 끝이 났다. 왜냐면, 중국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이라는 신유교가 사회 전반을 자리잡게 되면서 불교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중국 불교가 유학에 밀리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한국 불교로 넘어가려고 한다. 한국 불교 이야기는 딱딱한 불교 교리 설명이 거의 없을 듯 싶다. 중국 불교에서 다 짚고 넘어간 듯 싶으니까...

한국에서 불교가 유입된 배경과 불교와 관련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논리들, 몇몇 새롭게 등장한 독자적인 종파들을 설명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불교 이야기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 햇듯이 티벳과 인도 불교는 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가끔 언급하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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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7화. 불교의 참뜻을 알리려던 고승들

1. 도안(312-385) : 지금 불교에 필요한 것은? 계율이다.

자 지금까지 격의 불교에 대해 설명했다. 격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교 사상을 쉽게 전파하기 위해 전통 중국 철학을 인용하여 불교 용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인 <열반>을 도교 사상인 무위자연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열반은 곧 무위이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불도징의 제자인 도안(312-385)은 심오한 불교 교리를 대충 때려맞추려는 격의 불교 사상이 싫었다. 격의 불교 사상 때문에 당시 불교는 <원시 신앙>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것 조차 못하였다. 하안과 왕필 같은 청담 사상가들은 <유교, 불교, 도교는 다 도를 추구하는 같은 종교이다>고 이해했을 정도이다. 오히려 논쟁이 된 것은 부처와 노자 중에 누가 먼저 태어난 스승이냐 같은 것이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뒤에 태어난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불교의 스님은 주술사와 다를 바 없었다. 스님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마술을 부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와 샤머니즘은 동일한 것이었다. 지옥을 지키는 불문의 수호장들은 동물 숭배 사상(토테미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천둥과 번개를 부릴 줄 아는 보살은 애니미즘과 다를 바 없다. 부처가 되기 위해 은거한 보살과 산신령이 뭐가 다른가? 위진시대 초창기 불교는 신비한 주술을 부리는 도가의 <도사>와 구별되지 못하였다.

격의 불교 시기 스님은 마술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주술로 국가를 지키는 호법신이면서,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한 도사였다. 이렇게 신비한 스님이기에 위진시대 혼란기의 왕들은 스님을 초빙하여 <신비한 설법>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불도징 같은 위대한 스님이 겨우 <주술>이나 부리면서 왕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불교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불도징의 제자인 도안은 이런 풍토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불교를 위해 2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복잡한 교리에 <해설>을 달아 불교 이론을 쉽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계율을 만들고 지켜야 불교의 참뜻이 지켜진다는 것이었다.

도안은 스승인 불도징이 죽자 불경 주해를 다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도와서 쉬운 말로 <해설>을 달기 시작했다. 인도어인 <범어>는 논리적인 언어이기에, 다양한 뜻을 내포한 중국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범어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도안은 최대한 쉬운 말로 범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불교 경전의 참뜻을 알리는 일이 도안부터 시작된 것이다.

반면, 도안이 수많은 경서에 해설을 달면서 중국어의 어휘체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심오한 불교 경전을 해석하다보면 중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도안은 기존 한자의 활용도를 더욱 높여서 설법, 인도식 속담, 격언, 불교 고유 용어 등을 표현해 내었다. 중국의 불교 교리가 심화되는 것은 곧 중국어의 어휘가 풍부해짐을 뜻한다.

도안은 불교 교리를 전파하는데 노자의 사상과 청담가들의 논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불교의 원래 뜻을 살리려고만 노력했기 때문에, 중국 전통 사상을 가지고 불교 사상을 해석하는 <격의 불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불교 경전에 주석을 단 것은 부처의 말씀에 대한 글들을 읽고 확실한 근거를 통해서였다. 드디어 불교는 노자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도안은 철저한 계율을 중시했다. 승려는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승려가 되는 기본 조건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모든 출가 승려들의 성을 <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처에게 귀의한 사람들이 세속의 성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안의 획기적인 계율 강조로, 이후 불교에서는 <석>을 성으로 삼는 전통이 생겼다.

그럼 도안이 불교의 참뜻을 찾아내었을까?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대승불교의 기본 교리는 반야(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만 강조하고 지혜만 찾으라고 말하면서, <반야경>을 외워라~~~ 강요한다면 사람들은 복잡한 교리와 율법에 질려 불교를 떠날 것이다.

그래서 도안은 율법의 실천 사항으로 <미륵신앙>을 강조하였다. 어지러운 난세에, 미륵부처가 내려오면 모두가 하늘(도솔천)로 갈 수 있으니, 그 날을 생각하면서 왕생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내세를 염원하는 백성들의 뜻과도 일치하고, 절대자가 구원해준다는 신비주의 사상과도 일치했다. 또, 국왕이 곧 미륵의 화신이라는 논리와도 연결되면서 국왕도 불교를 탄압하지 않을거라는 확신을 준 사상이었다.

불교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 계율을 강조하고, 경전을 번역하면서도 대중적인 미륵신앙을 강조한 도안...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최상의 스님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도안을 <한나라 이후 선법과 방야의 두 가지를 종합한 반야 6대가>라고 표현한다.

도안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중국대륙의 북부를 통일한 부견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전진왕 부견은 명성이 자자한 도안을 모시기 위해 십만 대군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초토화 시키려고 하였다. 스님 한명을 위해 수만명이 죽을지도 모를 전쟁을 계획한 것이다. 도안은 전쟁을 말리며 전진의 수도 장안에 와서 수백권의 경서를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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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열정적으로 책을 번역했던지, 훗날 구마라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도안은 동방의 진정한 성인>이라고...

전진왕 부견이 중국 북부대륙의 영토를 넓히고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것은 도안의 철학을 존경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 혜원(334-416) : 백련결사는 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

혜원은 원래 노장사상을 따르던 <도사>였다. 그러나 불도징과 도안을 만난 후, 불교의 심오한 뜻에 흠뻑 빠져 불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도안을 존경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승인 도안이 전진왕 부견에게 가 버리자, 동림사(여산)라는 절에서 30년을 득도하면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자신이 30년간 속세에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다. 또, 속세의 성을 버리고 불가에 들어간 사람은 <정치>와 상관없는 사람이기에 왕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사람이다. 혜원이 남긴 유명한 일화를 한번 볼까?

혜원은 친구인 도연명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승려와 유학자, 불가의 스님과 속세의 정치인은 어울릴 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당대의 최고 철학자라 불리는 이 둘은 너무나 친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중 도연명이 떠나자, 혜원은 도연명을 더 이상 전송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연명 : <좀더 전송해주게나. 나는 국가의 관리이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네는 속세를 떠났으니 자유롭지 않은가?>

혜원 : <안되네. 내 마음과 욕망은 자네를 더 전송하고 싶지만, 앞에 호계가 있으니 건널수가 없네. 이것이 삼십년 동안 지킨 내 계율이네.>

도연명 : <그런 계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혜원 : <의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네. 선한일이 비록 작다 하여도 행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악한 일이 비록 작아도 행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유가에 있더군. 내가 만일 이렇게 작은 일도 시종일관하지 못한다면 큰 일에는 더욱 시종일관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도연명은 그 말을 듣고, 대화마저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즉시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만고에 길이 남을 <귀거래사>를 지었다. <귀거래사>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도연명이 남긴 대작이었다.

혜원 역시 스승인 도안과 같은 입장이었다. 사람들에게 복잡한 반야(지혜)를 설교하면서, 반야경을 외워라~~ 라고 말한다면, 누가 부처를 좋아하겠는가? 아무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수능 공부만 10년동안 하라고 말한다면 공부가 지긋지긋할 것이다. 그래서 혜원은 생각한다. 반야경은 나혼자 연구해서 남기면 될 것이고, 일반인들이 쉽게 불교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혜원이 생각한 불교의 수양 방법은 <나무아미타불>이었다. 보통 <아미타 신앙>이라고 한다. 혼란기의 백성들은 복잡한 계율과 교리를 이해할 틈이 없다. 매일 같이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속세의 사람들이 무슨 교리를 외우겠는가? 그냥 <아미타불>만 외치고, 마음으로만 부처를 모시면 된다.

혜원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문구를 외운 후 계율을 지키면서 착하게 살면 복잡한 교리를 몰라도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이것은 먼 훗날 <정토종>이라는 불교 종파와 연결된다. 혜원은 아예 <나무아미타불>을 맘놓고 외칠 수 있는 염불 단체를 만들어 버린다. 이 결사 단체를 <백련사>라고 하는데, 후대 불교인들은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마다 이 <백련사>를 만들었다.

백련사의 수련법은 간단하다. 아미타 불상을 보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언젠가 아미타불을 만날 것을 꿈꾸며, 죽은 후에는 극락세계에서 영원한 편안함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도안과 혜원은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구하면서도, 백성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던 것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미신에 빠져있던 불교의 참 뜻을 중국인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3. 법현(339-420) : 나는 참 뜻이 뭔지 직접 찾아봐야겠다.

도안과 혜원이 중국 안에서 불교의 참뜻을 고민했다면, 법현은 아예 인도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고 한 인물이다.

불법을 배우러 서역으로 떠난 최초의 인물은 <주사행>이다. 주사행은 한나라 영제 때 <도행경>을 번역했는데, 자신이 번역한 것을 스스로 읽어도 짜증이 났다. 도무지 불교의 참 뜻을 번역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조조의 위나라 시기에 서역의 우전국까지 가서 경전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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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법현 역시 서역으로 <구법> 여행을 시작했다. <구법>이란, 서역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우고, 불교 유적지를 직접 보고 느끼는 작업이었다. 이 당시 구법은 불교 경전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본가 스님을 만난다는 뜻이 강했다. 또, 해석되지 않는 부분과 관련된 책을 가져오는 목적도 있었다.

법현이 서역에 다녀온 후 적은 <불국기, 혹은 법현전>를 보면 법현의 여행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알 수 있다. 다녀온 사람이 없기에 길을 찾는 것 조차 어려운 여행 속에서 동료들은 모두 죽고 법현 혼자만 살아돌아온 것이다. 이미 부족할 것 없이 존경받고 있던 60살의 스님이 14년간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는 길도 모르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끝도 없이 가로질러 오아시스 국가에 도착한다. 파미르 고원의 눈보라와 싸워가면서 절벽을 넘고, 인더스 강을 건넜다. 겨우 서인도에 도착하여 불법을 배운 그는 실론(스리랑카)까지 넘어가 불법을 구하려고 했다. 스리랑카에서 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과 해일까지 만났지만, 그는 결국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지켜내었고, 그것을 번역하였다.

그가 가져온 책 중에서 유명한 것은 <대반열반경>이었다. 그가 번역한 이 책의 내용은 중국 <열반종>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중국 대륙에 부처의 참 뜻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한 그의 <불국기>는 현장(삼장법사)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위대한 불교 여행서로 평가된다.

자, 오늘은 격의 불교를 넘어서 불교의 참 뜻을 전하고 싶어했던 몇몇 고승들의 이야기를 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불교의 참뜻을 전한 구마라집과 남북조 시대의 고승들 이야기를 하고, 위진남북조 당시 역사의 전개가 불교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야기해보겠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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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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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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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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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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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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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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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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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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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인도 정통철학과 대승불교
카테고리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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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영혼과 윤회관(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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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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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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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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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사사키 시즈카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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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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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오강남 (현암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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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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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권오민 (민족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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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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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칼루파하나 (천지,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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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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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진섭 (지경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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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동 시간 구조대. 4: 붓다의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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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류가미 (삼성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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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 석가모니:그 생애와 가르침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와타나베 쇼코 (동쪽나라,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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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탐구시리즈:세계의 위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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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미심 (국민서관,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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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병역 (국학자료원,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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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구. 1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담마빨라 (열린경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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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7화. 교회를 지키는 사명을 목숨처럼 여긴 사람들.

1. 유대교를 크리스트교로 전환시킨 선지자 - 바울

이번 장에서 펼쳐질 이야기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신>을 인식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면서도, 지극히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라는 존재가 지상에 내려온 이후,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와 연결하여 <최상의 가치>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교리>이야기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가장 존엄한 가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교회 내부에서 지워 버렸다.

교회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로마 제국내의 <전통 종교와 철학>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반면, 교회의 가치를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자들을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제거해야 했다. 그것은 <크리스트교>의 독선 때문이 아니라, 소수 종교로서 로마 제국이라는 틀 안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초기 크리스트교의 가치를 지켜나간 자들을 <교부 : church father>라고 불렀다.

교부란, 원래 <사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점차 교회를 승계하고 지켜나갈 후계자란 뜻에서 <교부>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 즉, 신약성경을 저술하면서 교리의 정통성을 확보한 자들부터, 각종 공의회에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사람들까지를 두루 모아 <교부>라고 부른다.

고대 크리스트 신학의 기본 틀은 <신인본성론>이었다. 그것은 신이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 이론이었다. 기원전 유대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가 여호수아(Jeschua)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처형당했는데 부활 했다고 생각했다. 여호수아의 애칭이 그리스어로 <예수아 : 예수>이다.

실제 <예수>는 선지자들에 의해 <예수아>로 지목받는다. 사도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하면서 위대한 분이라 말하였다. Q복음서에서는 요한이 예수와 비교될 만한 선지자라고 말하였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요한이 예수를 기다리는 선지자라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를 지혜라고 불렀는데, 지혜와 성령은 구약에서 동의어였다. 즉, 예수가 곧 성령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신약성경의 마가, 마태, 누가복음 등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지만, 당시 일반인들이 즐겨 읽던 Q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인격이 부각되면서 예수의 <인성>을 더 강조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알리고 다니던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것이 더 중요한지를 밝히지 못하였다. 아니, 신성과 인성과의 관계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또, 신이라면 하나님과 동격인가, 다른 인격체인가? 이것은 기독교가 시작되는 신약에서부터 시작된 논쟁중의 하나였다.

또, 유대인들이 제기한 문제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수치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는 아니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영광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다 보여준 것 없이 죽은 선지자가 어떻게 유대인들의 <예수아>가 된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라는 말로 반박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메시아의 경고이며, 예수는 성령으로서 살아있다고 말했다. 즉, 예수가 성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원래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배신으로 유대인들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종파주의를 버린 진정한 인류 모두의 사랑과 구원>을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유대교의 율법을 어느 정도 존중하였던 초기 시대에 바울의 한마디는 예수의 가치를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만든 것이었다.

<베드로와 바울>, 엘그레코 작

훗날, 크리스트교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겠다고 나선 <교부철학>은 바울의 정신에서 기원한다. 교부철학자들은 바울의 정신과 어긋나는 학파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기독교의 기본 철학을 완성하였다. 교부철학의 핵심 주제인 <삼위일체설>도 바울의 <예수와 성령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로마 제국 내에서 크리스트교가 확대될수록 바울의 <전통 교리>를 반박하는 자들은 교회를 부정하는 자들로 간주되어 박해받았다. 교회가 이단을 때려잡는 <정죄>의 의식은 생각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교회가 살아남고 정통 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 철학은 간단하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했다가, 지상에서 백성들과 함께 했으며, 부활한 후에 하나님과 있다는 것이다. 원래 바리새파의 촉망받는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을 앞두고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한다. 이단보다는 율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 바울 시대의 이단아 - 영지주의

최초의 교부로서 바울이 싸워야 했던 이단은 <그노시스 학파>였다.

그노시스 학파는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크리스트적 이단>이었다. 그노시스 학파의 기본 교리는 바울의 주장과 같다.

즉, 성령은 말씀이며, 말씀은 곧 구원의 증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지식이며, 신의 계시이다. 말씀을 믿고 따르면 구원이 온다.

그러나, 그노시스(영지주의)는 성령을 하나님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도 말씀(Logos)이며, 제우스 신도 구원이 가능한 신이다. 종말과 구원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어느 신이나 할 수 있다. 또, 종말이 먼 훗날의 일도 아니며,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신이냐가 아니라, 신이 어떤 말씀을 하는가이다. 신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또, 그노시스 주의자들은 영원불멸을 믿었다. 영혼은 순수한 것으로 지상에서 더럽혀진 육체가 영혼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구원은 신으로 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동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더러운 육체가 원하는 욕망을 버리면 자연스레 천국이 온다. 이 세상은 육체가 만든 환영이며, 죽은 후가 실제 영혼의 세계이다.

따라서 예수가 더러운 육체로 지상에 내려온 것은 거짓이다. 말씀이 더러운 육체로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존재 자체는 부인된다. 예수는 단지 말씀일 뿐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인성을 기진 인간 예수이지, 신성을 가진 말씀일 수가 없다. 즉, 예수와 말씀은 별개이며, 예수는 환상이다.

그노시스의 기본 철학은 신비주의였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에서 영향을 받는 그노시스의 신비주의는 과학과 다른 정신적 신비주의였다. 신비한 지식중에 최고는 살아숨쉬고 있다는 지식(실존지식)이었는데, 그 실존 지식은 플라톤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듯, 그노시스는 정신 세계인 이데가가 육체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원래 플라톤 자체가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 종교인 오르픽교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픽 교의 기본 교리가 영혼불멸과 윤회 사상이었다. 이 영혼불멸의 고차원 세계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이데아의 신비세계는 스토아 철학의 신성세계(로고스)에 영향을 주었다. 로고스는 성령이라는 그리스어이다. 그리고 성령은 크리스트교에서 예수를 말한다.

한마디로, 그노시스는 고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정신을 종합한 <이성적이고 계몽적 종교체계>였다. 그들은 하나님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신은 어디서 왔으며, 악은 왜 탄생했는가? 구원은 왜 시작되었고,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을까? 라는 실존적 지식이 중요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영원한 삶을 위한 해탈이지 <하나님 자체>가 아니다. 해탈을 위한 신이라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 그들의 목적 자체가 해탈이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 된다. 해탈은 영생이지만, 부활은 더러운 현실로의 복귀니깐...

그노시스 학파가 고민한 결과, 세상을 이루는 실제적 지식은 유일신인 하나님이 아니라 <이원론적인 신>이었다. 이원론이란, 세상의 구성물질을 두가지로 보는 것이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립되는 것들이 세상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스토아 사상이 유행했던 페르시아 지방의 조로아스터교 사상이었다. 세상은 선한 신과 악신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태초에 하나님은 선한 신이므로, 사악한 세계는 별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사악한 세계가 존재하므로 인간의 영원한 해탈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해탈을 돕기 위해 예수가 나섰다. 예수의 가르침은 신비적 마법으로 해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즉, 영혼의 영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예수이며, 예수는 이데아 세계를 열어준 플라톤 철학의 계승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상이 그노시스가 생각한 <예수>의 개념이었다.

바울은 그노시스 학파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바울의 선교는 그노시스 학파와의 길고 긴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그노시스 문서

바울의 전통 교리를 지키려는 그의 후계자들은 끊임없이 그노시스와 싸워야 했다. 그 결과, 새로운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것은 예수의 지위를 격상시켜 하나님과 동급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바울의 시대를 보통 <원시 크리스트교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크리스트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만들기 위해 <성찬식>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그의 피와 살로 음식을 만들어 모두에게 기적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 안의 예수는 다른 종파와는 다른 유일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해 <카톨릭>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으로서,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할 때 <카톨릭>이란 말도 같이 공인하였다.

바울 이후 1세기의 <교부>들은 그노시스파를 몰아내기 위해 예수의 신성을 극대화 하였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예수역시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던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즉, 창조보다 먼저 그리스도가 있었고, 창조의 보조자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예수와 말씀은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노시스는 학파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예수는 더욱 더 신성화되고, 하나님과 동격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삼위일체설의 바탕이 되었다.

3. 기독교 변호사들의 등장

초기 크리스트교의 적은 영지주의 뿐만 아니라 전통 그리스, 로마 등의 이단 신도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가 그리스의 달변가들을 말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 철학적 지식을 두루 갖춘 소크라테스의 후손들을 믿음만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래서 등장한 자들이 변호가(Apologiar)들이었다. 이들은 크리스트 철학을 이교도에서 알리면서 신학의 우수함이 철학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며, 말씀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 변호가들은 차츰, 바울과 다른 교리로 논쟁에 다가서게 되었다.

예수는 <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를 <신>으로만 파악해서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우주의 근원과 실제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지, 보이지 않는 신과의 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변인들은 갈수록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고, 예수는 하나님보다 하위라는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을 <속박론 또는 종속론>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변호가 데오필루스에 의하면, <삼위일체설>이 아닌 <삼인분리설>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령, 성자, 성부의 3개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성자와 성부가 성령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들은 로마인들이 크리스찬들은 현실을 무시한 미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해야 했다. 따라서 변호가들은 크리스트교의 하나님이 로마 황제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제우스 신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실제 크리스트교 달변가들의 노력으로 로마인들이 크리스트교를 친숙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도 크리스트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변호가들의 입장은 <대외적>인 입장이었다. 교회 내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당연하게 생각혔고, 예수의 신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 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그들은 크리스트교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스의 신들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들의 이중적 입장은 대외적으로는 이단과의 싸움 승리, 대내적으로 정통 교리 확보라는 두가지 과제를 수행하는데 효율적이었다.

4. 제국 로마에 등장한 교부들...

바울 이후 2-3세기, 로마의 교부들은 각지에 교회를 세워 로마의 행정체제 내부에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교구체제>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교회라는 이점을 가지고, 초기 사도들과 바울 사상과 반대되는 학파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였다. 특히, 그노시스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잘 정비된 교회 조직 덕분이었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학파는 히타피아를 소개할 때 언급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노시스와 지속적으로 싸우면서도, 일부 그들의 철학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훗날 아리우스파가 <삼위일체설>을 반대한 것도 이 교단의 역사적 배경과 유사하다.

초기 교회의 교단들은 서로의 입장이 달라서 정통 교리를 놓고 많은 대립을 하였다. 그러나, 그 대립은 적절한 시기마다 종교회의를 열어 적절히 타협해 나갔다. 초기 교회는 표면적으로 문제가 없는 듯 싶었다.

그러나, 2세기 말엽 교회 내부에 <단일신론>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단일신론이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라는 입장을 반박하였다. 데오도투스는 그리스 철학의 유물론을 바탕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간으로서 예수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롭고, 인간으로서 초연한 사나이로서의 예수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신이 된 것은 죽은 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활한 이후라고 주장했다. 260년 경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안디옥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성부만이 하나님이며, 다른 것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 까지 주장하고 나선다.(양태적단일신론) 다른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성부가 우선이지만 나머지 둘은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일까? 예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전통 크리스트 교리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열린 종교회의(공의회)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교회 간섭 의도가 숨어있었다. 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교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자, 그럼 이렇게 난해한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명쾌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해결사는 교부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자, 그럼 이 지겨운 교부철학 이야기를 끝내고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어보자. 다음 장에서는 당대 최강의 탕자로 시작하여, 크리스트교 최고의 성인으로 등극한 한 인물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 인물을 통해 크리스트교 교리가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 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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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할 만한 책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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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리스트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이너북,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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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크리스트교사(기독교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경민 (청목,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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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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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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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세윤 (두란노아카데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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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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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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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폴 니터 (분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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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해설총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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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2: 고대 국가와 세계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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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나라 : 유교를 국교화하여 체계를 정립하다

이번 장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가장 큰 업적인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를 중심으로 한나라 시기 유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한나라 초기의 유교 사상

한의 초기, 건국자인 유방은 유교에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건국집단인 유협집단도 수준낮은 의리, 충성 등의 기초적인 이념만으로 뭉친 협객집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건국초의 유방은 저명한 학자인 <육가>에게 학문적 교양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육가>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유방에게 유교이념을 받아들일 것을 권합니다.

<말 위에서 천하를 달리며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육가의 말을 듣고 공자묘를 만든 유방도 아직 유교이념에는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유방이 죽은 뒤 세력을 잡은 유방의 부인 여씨 일족은 유교를 왜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초기의 한에서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도가가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도가에 있는 신비주의 사상이 유행하여, 신선이라던가, 불로장생 등의 미신적인 부분이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흔히 이러한 신비주의적 도가사상을 황로사상이라고 합니다. 또, 왕조 개창의 이념이었던 음양오행설 사상(음양오행의 순환으로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다는 믿음)이 민간에 유행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운명과 자연에 맡기는 경향도 많았습니다.

실제, 한 초기 문제, 경제의 태평천하도 이 음양의 순환 원리에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한 문제 시절의 <가의>는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해야지 미신으로 풍속을 교화할 수 없다며 황제에게 유교이념을 수용할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가의의 노력으로 일단, 유교가 한나라 사회에 침투할 수 잇는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아직도 한에서의 유교 수준은 미흡했습니다.

2. 한무제 : 강력한 유교주의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다

이러한 미신적인 풍조를 일시에 정리하고,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황제지배권을 강화한 사람이 바로 한무제입니다.

한무제는 군주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을 받아들이고, 법가적 유교정치를 완성합니다. 또, 유교를 관학화 하여 오경박사, 효렴과, 태학 등을 정비하여 유교질서에 입각한 현실적인 관료군을 육성합니다.

그리고 효제 도덕을 중시함으로서 지방 권력자들에게 일정한 제약을 줌과 동시에, 촌락을 유교 윤리 공동체로 이념화 하여 국가 권력에 대한 충성을 강조합니다.

이 한무제의 유교 관학화 정치는 국가가 유교를 보호하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윤리는 동아시아 문화의 성격을 유교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대 사건이었으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정윤리가 동아시아 사회에 정착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3. 유교주의의 시작 : 동중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은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이제 지겨울 때가 되었네요. 여기선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천인상응설은 하늘(천)을 중심으로 하여, 지상의 황제(인)을 끌어들인 정치도덕론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황제는 천의에 따라 정치를 행하므로, 황제가 도가 있다면 하늘이 감응하여 황제의 권위를 신성화 시켜줄 것이고, 황제가 도가 없다면 하늘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라는 <천과 인간의 상응>입니다.

이것은 음양의 순환에 따라 왕조와 천자가 바뀐다는 음양오행설을 황제권에 대입한 유교원리로 한무제의 <천자 권위 확립>에 큰 역할을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양오행설이 맹자의 <혁명론>을 인정하여 왕조교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동중서의 이론에서는 <황제권을 심판하는 자는 하늘>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서 혁명이나 비정상적인 왕조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하와 백성은 유교이념상 아버지인 황제를 벌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부도덕함은 하늘이 심판할 뿐입니다.

또, 이러한 유교사상의 이념 속에서 동중서는 태학(중앙), 군국학(지방) 등을 정비하고, 스스로 교수가 되어 5경 중심의 유교학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학문기관의 발달과 함께 인재 등용의 방법도 바꾸기 시작합니다. 원래 한 초기에는 낭관이라고 하여 궁정에서 일하는 관인 후보들을 관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는 부호가 재산을 납부하면 관료로 채용하는 자선제도도 있었습니다. 황제는 수시로 특명을 내려 현량한 자를 1인씩 추천하라 하여 관료로 쓰기도 했습니다.

동중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합니다. 즉, 천거와 선발에 가장 효율적이고, 능력중심적인 방안으로 <효렴과>를 제시했습니다. 효렴과는 지방관이 효렴한 자를 지방에서 1인씩 추천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을 동중서가 다시 재편하여 향거리선제라는 제도로 정착했습니다. 이 제도는 추천과 시험을 병용하는 제도로서 지방관이 관료를 선발하고, 현량, 효람한 향촌 자제를중앙에 천거할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시험을 봐야 하므로 유교적 소양이 필요하나, 실제는 추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지방관은 유력 집안의 호족들을 천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9품중정제로 이어져 호족이 호족을 추천하는 관례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4. 금문학파와 고문학파가 등장하다.

초기에 한대 유학을 연구할 때 학자들은 전국시대 이래로 구전되어오던 경전들을 한나라에서 사용하는 예서체로 필사하여 작성한 후 연구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나라의 관학으로서 한무제 이래 후한말까지 한나라 유학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고대 문헌을 한대 글자로 필사한 문헌을 <금문경>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왕망의 신에서는 공자의 옛 터에서 발견된 경전 등 춘추시대 이래 당시 고문체로 쓰인 고본을 직접 연구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이렇한 고문을 <고문경>이라고 합니다. 이 고문경 연구는 후한 시대 <금문경>의 관학과는 달리 <민간>에서 연구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대 학파의 두 파를 정리하여 완성한 사람이 곧 <정현>입니다. 고대학파(훈고학)은 정현에 의해 사상적 통일이 되었고, 이것이 당나라 시기에는 공영달의 <오경정의>로 완성됩니다. 오경정의란, 고대에 중요한 5경을 정리하였다는 것으로 최소한 당대 이전에는 4서보다는 5경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구학의 연구는 <고문경>이든 <금문경>이든 책의 자구 해석에 주력하는 경향이 강하여, 철학이나 사상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어문학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그 해석된 문구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폐단을 낳아서 유학이 획일화되고, 합리적이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국가가 관학화 한 금문경은 고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 왕망의 찬탈이론, 참위설과 음양오행설의 유교화 등의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딱 좋았습니다.

이러한 유학의 미신화, 정치화에 반대하여 유학도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학자가 <왕충>입니다. 그는 논형이라는 저서에서, 동중서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즉, 천인상응설이라는 개념에서의 천은 하늘과 인간이 상응하는 주체라고 동중서가 주장했는데, 왕충은 그것이 바보같은 소리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하늘은 우주라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이 인간의 선악에 관여할 수 없고,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제권이 하늘에서 왔다던가, 신이 존재한다던가하는 말들은 모두 인간이 유교를 이용하여 지어낸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사라질 뿐 내세도, 지옥도, 천국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는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공자, 맹자마저 평범한 인간임을 주장합니다. 공자를 성인화하여 그의 말을 모두 <신성화>한다면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신이 탄생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이라는 것은 과학적, 합리적인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타락한 유학을 비판했던 청담사상 등의 체제비판 사상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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