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1건

  1. 2011.01.27 (NO 4) 본문 3.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을 하게 된 시점은 언제인가요? (1)
  2. 2010.07.02 역사 크로스 퀴즈 8회 - 난이도 : 보통 (1)
  3. 2010.01.12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 범위 : 한국사 검정능력시험 3급 (5)
  4. 2010.01.01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5 (화요일) - 출제범위 : 한국근현대사
  5. 2009.11.03 낙서 한국사 1 : 고조선 이야기 - 환단고기와 가림토(1) (3)
  6. 2009.10.02 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3)
  7. 2009.01.14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1)
  8. 2008.12.28 수능 근현대사 정리 12 :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2)
  9. 2008.12.27 수능 근현대사 정리10 :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5)
  10. 2008.12.01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2) -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2)
  11. 2008.05.31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1) (2)
  12. 2007.08.08 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13. 2007.03.29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1)
  14. 2007.03.27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에 대한 진실 (11)
  15. 2007.03.18 화랑도의 기원과 역할, 그리고 진흥왕의 화랑도 개편 목적 분석 (3)
  16. 2007.03.02 삼한은 고조선에서 나왔다. - 삼한의 역사 (1)
  17. 2007.02.14 우리는 고조선, 고구려 역사에 취해 한반도 남쪽 <진국>의 역사는 묻어버렸다. (4)
  18. 2007.01.24 단일민족은 무엇이며,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1)
  19. 2007.01.13 광개토대왕릉비 조작설(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중) (1)
  20. 2007.01.13 백제 근초고왕 대 중국 진출 및 정복설 사료 (1)
  21. 2007.01.13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1)

근현대사 이야기 (NO.4)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이 시작된 시기는?

- 시대구분 이야기 -

자, 이제 서양의 시대구분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자. 이제, 우리 역사에서는 어떻게 <시대 구분>를 하는 지 알아보도록 할꺼야. 자, 칼하나 들고 우리 역사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조각조각 내보면서 <카리스마> 있게 놀아볼까나? (헉... 유치한 개그 ㅋ)

그럼,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할 테니, 한국사에서 근대, 현대라는 개념이 언제 등장했는지 알아봐야겠지? 그 첫 번째, 시간.... First Time.... go!

지난 시간에 서양 <근대인>들이 <중세>와는 다른 자신들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근대>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 그런데 말야. 고대-중세-근대라는 서양인들의 구분은 시간에 따라 나눈 구분점이야. 서양 근대인들이 가까운 시간을 자신들의 시간인 <근대>로 파악하면서, 점점 멀어지는 시대를 다른 용어로 표현했었지.

자 그럼 자세히 한번 볼까? <근대>의 사람들은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 거야. 역사는 먼 옛날의 이야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시간별로 나눈 것이라구.... 하지만, 어떤 시대를 나누었다면, 아무 생각없이 나누진 않았겠지? 당연히 시대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무언가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고 시대를 나누었을 거야. 그렇게 시간이 쭈욱~~ 흐르면서 점점 나은 세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가장 발전한 근대라는 시대까지 왔다고 생각한 거지.

결국, <근대인>들이 시대 구분을 했던 목적은 <세상이 가장 올바르게 발전했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서양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발전을 똑같이 찾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 우리 역사는, <시대에 따라 발전했다>라는 명확한 기준보다 더 확실한 기준점이 있어. 그건 바로 <고조선 - 삼국시대 - 고려 - 조선>과 같이 왕조가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우리식 기준>이 있다는 거야.

한마디로, 우리 역사에서는 왕조별로 각 시대를 나누는 것이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훨씬 편하거든. 이렇게, 왕조별로 역사가 다 다르고, 발전하는 모습이 다 다른데, 서양식으로 나누는 구분법을 사용하려고 하니깐 너무~ 안 맞는거야.

에구구... 우리 역사는 서양의 기준에 맞추어 표현하기 너무 힘들다. 그런데 옛날 한때.... 이걸 이용해서 우리 역사를 아주~ 비하하는 역사학자들이 짜잔~ 하고 등장했었어. 그 나쁜 사람들이 누구냐구? 바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시기, 즉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본 역사학자>들이지.

일본 역사학자들은 박은식, 신채호 선생님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자 분들이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어. 조선의 역사 연구가 많이 진행될수록 일본이 조선인들을 <무식한 인종~>으로 몰아세우기가 어려웠거든.

그래서~  일본 총독부에서는 1920년대부터 <조선사 편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선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지.

그럼 이 <조선사 편수회>는 당연히 뭘 했을까? 당연히~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것이 너무 잘된 일이다> 라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겠지, 뭐...  그럼 이 단체의 사람들이 주장한 것들을 한번 쭉~ 들어보고, 그 결론이 뭔지 같이 볼까나?

나쁜넘A : 야... 조선애들은 지들 고대 역사가 없어. 북쪽은 중국애가 내려와서 무슨 기자 고조선을 만들었잖아. 또, 중국 한사군한테도 점령당해서 뚜들겨맞구... 남쪽은 우리 일본에게 점령당해서 임나일본부를 세웠고... (타율성이론)

나쁜넘 B : 뭐, 그 이후에도 거란애들, 여진애들, 몽골애들... 돌아가면서 한반도를 박살냈잖아. 뭐, 만주쪽 이민족들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조선 역사가 바뀌니... 이건 뭐, 조센징은 역사가 있긴 있어? (만선사관)

나쁜넘 C : 결국 조선애들의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나보지도 못한 역사야. 뭐? 위대한 대륙 진출? 다 뻥이지 뭐~  중국, 일본, 이민족을 따라하면서 이루어진 역사일 뿐야... 어설픈 따라쟁이의 역사네!! (반도사론, 사대주의론)

나쁜넘 D : 한마디로, 고려니, 조선이니 하는 왕조 교체는 별 의미도 없는거라니까... 얘들은 쭈욱~ 고대 수준이니, 자본주의같은 건 생각도 못한 원시인들이지. 뭐, 우리 일본 아니였으면 영원히 발전도 없는 애들이야.(정체성 이론)

결논내봐 : 결과적으로 원시적인 조선이 식민지가 된 건 천만다행인 거야. 일본덕에 근대화도 된거잖아. 조센징들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감사해야돼.(식민사관의 결론)

뭐, 이런 논리를 만든거야. 한마디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한국사를 연구한거지.

그럼 우리 역사학자들도 본격적으로 <시대 구분>이라는 것을 하면서, 일본의 이상한 주장을 반박해야겠지?

그 때, 짜잔~ 하고 나타나 시대 구분을 시작한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의 시대구분>을 가지고 일본과 싸웠던 사회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이란 사람이야.

일본학자 : 야... 조선 너네는 왕만 자꾸 바뀌지, 발전도 없고 수준은 계속 고대 수준이고.... 너무 미개하잖아.

백남운 : 아니거든? 우리도 고대-중세-근대 사회가 있었어. 내가 쓴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 뭐 이런책 읽어볼래?

일본학자 : 귀찮어. 그 책에서 뭐라고 쭝얼거렸는데? 어쨌든 조선애들은 원시적이라 중세가 없었다니깐?

백남운 : 자, 우리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대 구분을 조선에 적용해 볼까? 이걸로 계산해보니깐, 와... 서양 고대처럼 우리 역사에도 노예제도 있었지, 토지생산 있었지.... 서양 고대처럼 중세 봉건제도도 있었고,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장원제도도 있었네. 거기에도, 지주와 농노라는 계급투쟁도 있고... 와... 아 있다, 다 있어!!! 자료 들춰보니깐 하나하나 증거 다 있다!!!

자, 이렇게 백남운 선생을 시작으로 우리도 시대 구분이라는 걸 시작한 거야. 근데, 이 시대구분은 일본애들의 황당한 헛소리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 역사에 마구마구 가져다 붙인 거라서, 약간 억지도 좀 있었다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자, 이렇게 시작한 시대구분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했지. 그런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찌질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위대한 고대 북방의 역사, 특히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많이 집중하게 되었지. 심지어 어떤 학자는 <고구려>를 <로마제국>과 맞먹는 위대한 고대 제국으로 표현하기도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가 광복을 맞이한 그 기쁜 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문제가 생겼어. 사회주의자인 백남운 선생도 북한으로 넘어갔고, 대부분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스스로 북한에 갔거나, 납치되서 북한에 넘어가 버린 거지.

그 결과!!! 1950년대 이후, 남한에 남은 역사학자들은 시대구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이였어.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가지고 역사를 연구한다는 입장이였지. 따라서 이들은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단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   

그나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시대구분>이라는 말이 빤짝~! 등장하기도 했지. 역사는 <혁명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갖는 시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시대를 구분할까?> 라고 생각한 용감한 역사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었구.... 박정희 군사 정권이 시작되자, 또 다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시대 구분을 하겠다는 용기를 가진 역사학자들은 점점 사라졌지. 교과서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시대구분을 한 학자들은 <재야학자> 소리를 듣기도 했구.

그럼 본격적으로 <시대구분>이란 걸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그건 바로,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이후야.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건,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였으니, 시대구분도 199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교과서(3차 교과서)에 등장하게 된 거지.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1990년대 이후 짜잔~ 하고 연구가 시작된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 기준을 한번 살펴보면서 이야기 해볼까나...


-  다음 정보들을 참조하면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어요!  -


중국사시대구분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민두기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1997.08.31
상세보기

한국사 시대구분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차하순
출판 : 소화 1995.04.25
상세보기

조선사회경제사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백남운 / 박광순역
출판 : 범우사 199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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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진로 재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백남운
출판 : 종합출판범우(BW범우) 2007.08.15
상세보기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시어도어 래브 / 걍유원,정지인역
출판 : 르네상스 200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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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시대구분 자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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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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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크로스

  1. 이성계와 함깨 조선을 건국한 세력, 성리학을 새왕조의 이념으로 채택하였다.
  2. 조선 영조 때의 정치상황이 반영된 음식이다. 청포의 흰색은 서인, 쇠고기의 붉은색은 남인,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상장한다. 각각 다른 색과 향이 어울러져 조화를 이룬다는 영조의 정치 철학을 보여준다.
  3. 명나라 홍무 13년, 주원장에 의해 제거되었다. 황제독재체제를 위해 재상권을 탄압한 사건으로, ***의 옥사라고도 한다.
  4. 중국 한나라 말기, 농민 비밀결사 단체로, 장각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초기에는 오두미교를 모체로 하여 확산되었지만, 조조와 원소의 연합군에게 격퇴되었다.
  5. 고려 무인정권기, 최충헌의 노비. 반란 모의가 실패하여 주살되었지만, 고려시대 신분해방운동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난.
  6. 신라의 시조이자 박씨의 시조.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상하 크로스

  1. 신라 진흥왕 때 국사를 편찬한 인물
  2. 독사신론과 조선상고사의 저자. 민족주의 역사 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3. 용과 호랑이가 싸우는 박빙의 기세.
  4.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봉기. 당나라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신라의 숙위학생으로서, 관직에 오른 최치원은 토격문을 적기도 하였다.
  5.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한 일종의 쇼맨쉽에서 비롯되었다. 환관 위충헌은 구천구백세를 외치게 하여, 자신의 권한이 황제 바로 아래임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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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사 3급 검정 문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그림과 같은 피난길에서 있었던 사실과 다른 것을 골라보세요.
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전주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②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③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피난한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해를 하였다.
④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후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였다.
⑤ 북벌을 위한 군대는 러시아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는 나선 정벌에 이용되었다.

 

2.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위 지도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작성하였다.
② 김육은 서양식 달력인 시헌력 채택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③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만나서 천주교 신앙에 관한 책을 국내로 가져왔다
④ 정두원은 천리경과 자명종을 조선에 수입하였다
⑤ 김홍집은 황쭌셴으로 부터 조선책략을 수입하여 17세기 국제정세를 조선에 알렸다.

 

3.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대성 : 백제가 마한땅을 정복하고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시기였네
② 승리 : 낙동강에 진출해서 가야의 해상 교역에도 큰 타격을 주었겠군.
③ 탑 :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둥 반도에서 진출했잖아?
④ 태양 : 근초고왕의 고구려 공격으로 고국천왕이 전사했었어
⑤ 지드레곤 : 근초고왕이 왜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백제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지

 

4.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위와 같이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이 있던 시기의 조선과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골라보세요.
① 규리 : 조선에서 3.1 운동이 있던 같은 해에 러시아는 코민테른(제 3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어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
② 니콜 : 3.1 운동과 같은 해에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 4 운동이 있었지, 아마?
③ 하라 : 당시 이집트의 반영운동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네.
④ 승연 :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은 비폭력, 불복종을 지향했었잖아.
⑤ 지영 : 3. 1 운동은 세계 1차대전이 발생하기 전에 시작되었지?

 

5. 다음 표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위 표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창민 : 이 단체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계승하고, 베이징에 수립하였지.
② 윤호 :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였고, 행정 기관으로 국무원을 두었잖아.
③ 유천 : 이승만의 외교론과 신채호의 투쟁론이 대립하면서 분열되었고, 창조론이 대두했었지.
④ 창민 : 개헌을 거듭할 수록 힘이 약해져서 결국 김구가 주석을 맡아 이끌어갔잖아.
⑤ 재중 :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인데, 연통제와 교통국 등의 조직과 애국공채 발행 등을 통해 군자금도 마련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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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5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 근현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노래를 잘 듣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노래와 관련된 가문에 대한 설명으로 바르지 못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위 인물의 가문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 집권가문에 속하는 유력 세도가문이였다.
② 위 가문이 일당 독재체제를 구축한 것은 1800년 정조가 사망하면서 나이 어린 왕들이 등극한 것과 관련있다.
③ 순조기에 효명세자는 위 가문의 독재를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④ 위 가문은 삼점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정적들을 제거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었다.
⑤ 위 가문의 집권기에 평안도, 함경도 등 중앙과 멀어진 지방의 한미한 가문들은 상대적인 차별을 받았다.

 

2. 다음은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맺은 후속 조치들입니다. 지문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조일수호 규칙(1차 통상장정)

    - 조선국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일본국 소속의 선박은 항세를 내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조일 수호 조규 부록

    - 일본화폐를 사용하여 한반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다.

    - 양국의 무역에 장해가 발견될 때 조약의 개정을 1년내에 제기해야 하며, 기한이 지날 경우 조약은 더 이상 개정될 수 없다.

*** 조일 수호 조규 속약

   - 부산, 원산, 인천항 밖으로의 이동 거리(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2년 후를 기해 다시 각 100리로 한다.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유력(여행)을 허가한다. 여행지방을 지정함은 예조에서 하되, 증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은 증서를 검사하고 여행자를 호송한다.

*** 1883년 조일통상조약(조일통상 잠정협약, 개정 통상장정)

  - 천재지변과 변란 등으로 식량부족 문제가 발생할 경우 조선은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다

  - (일본 화폐가 아닌) 조선화폐에 의한 관세 및 벌금 납입이 가능하다.

  - 일본 상인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해야 한다.

 

2. 위 내용에 따라 강화도 조약을 평가할 때, 지문을 잘못 해석한 사람을 골라보세요...
① 구하라 : 일본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통행거리를 설정하는 데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네.
② 임윤아 : 일본 화폐를 사용하느냐, 조선화폐를 사용하느냐하는 문제가 양국에서 첨예하게 대립하였군
③ 나르샤 : 개항장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도 양국의 입장에서는 중요했던거 같아
④ 현   아 : 개정통상조약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결국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관셰안이 개정된거 같아.
⑤ 씨   엘 : 일본인들은 개항장 밖으로 일본인들의 활동범위를 넓히려고 끊임없이 조약을 개정하려고 했었네

 

3. 다음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단체에 대한 내용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 1923 : 갑오개혁 이후, 양반, 상민, 노비와 같은 신분 차별이 사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백정>이라는 직업을 노비와 같이 취급하고 있다. 일제에 저항하는 우리에게 어찌 양반, 노비와 같은 차별을 강요하는가? 우리의 형평운동은 차별에 대한 항거이자, 형평을 통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다. 조선형평사는 단지 같은 민족으로서 정당한 요구를 할 뿐이다.

- 1924년, 형평사는 조선노농총동맹과 연대하여,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한다. 일제는 식민지의 모든 노동자, 농민에게 부당함을 안겨주었다. 20년대 이후, 공산주의의 국내 유입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에도 참여하게 된다. 이 활동은 3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3. 위 지문의 사료와 내용이 말하려는 근본적인 취지가 무엇인지 골라보세요.
① 일제시대에도 양반, 노비와 같은 신분차별이 심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제대로 전개할 수 없었다.
② 형평운동은 초기에는 사회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③ 형평운동은 신분차별을 강조함으로서 우리의 독립운동에 장애물이 되었다.
④ 형평운동이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원래의 순수함을 잃고, 좌파들에 의해 변질되었다.
⑤ 형평운동은 최하층 계급의 신분 투쟁이였으므로, 민족 독립운동과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4. 다음은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역사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 기자 조선에 대한 내용은 허구이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대한>이라는 것은, 일본의 임나일본부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 고대사는 한반도 안에 가두어진 <삼한>에 대한 조작된 내용이 아니라, 만주에서 비롯된 위대한 부여족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 만약 묘청이 김부식을 물리치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민족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묘청의 난은 조선 1천년래 대사건이다.

-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다.... 제국주의가 보여준 사회진화론은 결국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잡아먹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아와 비아의 투쟁을 극복하면서 민족과 민중이 자기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과정이다.....  독립 운동은 그들보다 강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정부를 부정하고, 식민지 지배 자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독립 운동인 것이다. 외부적으로 강하고, 강하지 않음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4. 위 지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인 분의 저서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독사신론
② 조선상고문화사
③ 조선사연구초
④ 조선상고사
⑤ 한국통사

 

5. 다음은 해방 후, 우리 민족국가를 설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건국준비위원회의 강령입니다.

-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에 기할 것이다.

-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할 것이다.

-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여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할 것이다.

 

5. 이 강령과 관련있는 <건국준비위원회>의 핵심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김  구
② 김규식
③ 여운형
④ 이승만
⑤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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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한국사1

고조선 이야기 - 환단고기와 가림토(1)

1. 한국사....

그동안 다루었던 한국사의 여러 이야기들을 재편집해서 순서대로 기술해볼까 합니다. 낙서처럼 끄적대며 적었던 글들이 많네요. 보통 한국사 하면 구석기 시대부터 쭈욱~ 읽었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족의 기원부터 시작하면서 석기시대는 좀더 뒤로 미루고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논쟁>거리가 등장하네요.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는 너무 논란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고조선이 <기록이 없었던 선사시대와, 기록이 전해져오는 역사시대>의 기로에 서 있었던 국가이기 때문이지요. 얼마 안되는 기록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고조선에 대한 모든 기록을 하나 하나 다 파헤쳐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한국사의 시작점에서 환단고기나 가림토 문자 등을 다룬다고 하면, 속이 거북하실 분들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뭐야? 역사 사이트가 아니라 신화 사이트야?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이야?

네... 실제 일어난 일들과 그럴듯하기 꾸민 것들을 구분하느라 머리가 아프시겠죠. 하지만, 가진 기록이 너무 없기 때문에, 고조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모든 기록을 살피고, 각자가 역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장 빠른 역사 이해 방법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오늘은 환단고기부터 다루고, 다음 장부터는 고조선과 관련된 다른 책들과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글들, 실증주의 사학자들의 이야기와 교과서까지 쭈욱~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환단고기를 가지고 민족의 자긍심을 느껴보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와 영상을 참조하세요.

http://hanpride.kr/ (한민족의 역사)

책 썸네일

시중에 나온 환단고기 - 계연수 저

2. 환단고기 - 완벽한 위서일까? 참고가 가능한 고서일까?

1979년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환단고기>라는 책을 출간하였고, 1985년 일반인을 위한 한글 번역본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 책에서는 고조선 이전에 광할한 영토를 가진 우리 민족의 위대한 국가가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구체적인 내용들이 하나 하나 적혀 있습니다.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인 것 처럼 광고가 나오기도 했었죠.

그런데, 왜 그런 역사책이 최근에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환단고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 강점기가 시작됩니다. 나라를 빼앗긴 독립군들은 간도, 민주 등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독립활동을 시작하게 되죠. 독립군이었던 홍범도 장군은 계연수에게 자금을 주어 민족의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고, 1911년 계연수가 기존에 있었던 역사서들을 모아서 <환단고기>라는 이름으로 책을 묶었습니다.

이 책을 집필한 뒤 계연수는 이유립에게 한단고기의 원본을 건네주었는데, 1975년 이유립이 모든 관련자료를 분실했다고 합니다. 1979년 나온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기억을 되살려 복원한 책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는 끊임없이 위서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책이고, 기존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지 않는 책입니다. 그 이유를 볼까요?

먼저, 이 책을 만든 이유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910년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해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1911년에 만든 책이라면, 출판도 되었어야 했고, 누군가가 이 책으로 독립군의 학교에서 수업도 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원본을 분실했는데, 그 방대한 내용을 모두 기억해서 복원했다는 점도 그렇고, 복원한 책에는 후대의 용어, 후대의 학설 등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또, 방대한 고대 환국과 배달국이 존재했다면 아시아 어디선가 그 유물, 유적 등이 발견되고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도 못합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북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공산주의> 사회로 이르기 위해서는 원시사회 - 중세- 근대 자본주의 - 공산주의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단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이런 세계사의 발전 규칙도 무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먼 옛날, 치우 황제가 강력한 철기 무기로 전쟁을 이겼다는 것을 북한도 인정할 수 없는 거죠. 북한은 고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고,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평양도읍설>을 주장히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이야기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즉, 남녀평등, 세계만방 등 현대적인 언어를 사용했고, 고려, 몽고 등 당시대와는 맞지 않는 언어가 나오며, 문명이 발생하기 이전의 시대에 철기가 나오는 등 도무지 근거가 없다는 것이죠.

더 이상한 점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민족주의가 <식민지의 민족>들이 생각하는 민족주의와는 동떨어졌다는 점입니다.

침략당한 민족들은 보통 침략자의 오만함을 비난하고, 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민족주의>를 지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아시아 전체가 우리 민족의 영역이었다는 이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나치의 확장전쟁이나 일본의 대동아경영설을 반박할 수 없는 이상한 민족주의 사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당대의 최남선 문인이 <아시아는 한민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관을 주장했다가 친일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반대로 이 책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어느 정도 내용을 첨가했을 수는 있지만, 완벽한 위작을 가지고 국민들을 속이려고는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만약, 국민들을 속이기 위해 만든 책이라면 아주 허황된 내용보다는 보다 믿을 수 있는 <적당한 사기>를 쳤을 것입니다. 또, 일본의 <대동아경영>과 비슷한 이론으로 역사서를 적을 이유도 없었겠지요. 결국,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려고 편찬한 <도가 계열의 작품>인데,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골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죠.

결정적으로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환단고기의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 역사의 참고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그런 역사적 일들이 정말 사실이라면, 우리 민족의 뿌리가 얼마나 단단하고 대단한 것인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환단고기가 주장한 핵심적인 내용 몇가지를 가지고, 고조선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들어가 볼까요?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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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상세보기

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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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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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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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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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삼웅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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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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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西京全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王師가 반적을 친 지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지역이 낭,불 兩家 대 儒家의 戰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戰이며, 독립당 대 사대파의 戰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戰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쟁을 어찌‘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묘청의 난에 대한 신채호의 평가 - 조선사상고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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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
 1)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교육 운동
  일제는 기본적으로 천황과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충실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3단계로 나누는 것처럼 일제의 교육정책도 크게 3차례의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1910년대 무단통치기의 교육은 제1차 조선교육령(1911)에 근거를 두어 차별과 우민화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제는 사립학교의 축소,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 축소, 중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 대학 교육을 금지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교육 기회에 차별을 두었으며, 학교에선 아주 기초적인 산수 정도의 최소한의 교육만이 행해졌으며 대부분은 실업, 기술 교육이 위주였다. 이러한 교육 실태는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둔 일제의 교육정책을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료. 제1차 조선교육령(1911)
 제1조 조선에 있는 조선인의 교육은 본령에 따른다.
 제2조 교육은 충량(忠良 : 충성스럽고 선량한 ㅡ 작성자 주)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 로 한다.
 제5조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여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6조 실업 교육은 농업, 상업, 공업 등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7조 전문 교육은 고등 학술과 기예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총독부 관보, 1911

  일제의 우민화 교육도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은 일제의 우민화 교육에 맞서 근대적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일제의 탄압을 통해 사정이 어려워졌다. 일제는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을 각각 사립학교의 축소와 서당규칙(1918)을 시행하면서 압박하였으며, 민족 교육의 주역은 점차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에서 야학이나 강습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료. 서당 규칙(1918)
 1. 서당을 개설하려고 할 때에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2. 서당에서의 교과서는 조선 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3. 조선 총독부가 적격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서당의 개설자 또는 운영자가 될 수 없다.
 4. 도 장관은 서당의 폐쇄 또는 교사의 변경,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 추가사항 : 주요 사료가 아니므로 눈으로만 봐두자

  1920년대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는 교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일제는 교육에 대한 차별을 누그러뜨린 유화 정책을 폈다.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1922)을 발표하고 이에 맞춰 우리나라의 학제를 일본식의 학제로 변경하고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였다. 국민교육이 4 ~ 6년이 된 것도, 대학의 설립이 가능해진 것도 이 때였다. 또한 일제는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보통 교육의 수업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면 1교 정책으로 전체적인 보통학교의 숫자를 늘렸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문화통치기의 일제의 교육정책은 언뜻 보기에 큰 선심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을 동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1면 1교 정책으로 학교가 세워진 곳은 마을의 정신적, 문화적 근간이었던 곳을 허물거나 파괴, 개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1920년대 민족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야학이나 강습소로 계승되었다. 야학이나 강습소에선 기본적으로 역사, 조선어, 지리, 창가 등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았으며 그 외에도 일반 지식을 확충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농민독본』,『경제학』,『노동산술』등의 실용 교과도 가르쳤다. 그러나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야학 역시 점차 쇠퇴해갔다. 민립대학 설립운동(1922),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 문맹 퇴치 운동(1920년대 ~ 1935)등도 1920년대 있었던 민족 교육을 위한 운동들로 이 때 역시 일제가 여전히 차별교육을 행했음을 알 수 있겠다. 결국 유화정책이라는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창남의 비행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교육에도 힘썼다.

Tip. 유화 정책과 동화 정책
 유화 정책 : 보통 교육 수업 연장, 대학 설립 가능
 동화 정책 : 서당 설립 허가제,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탄압

  만주사변(1931)과 태평양전쟁(1938)으로 전선(戰線)을 지나치게 확장시킨 일본은 조선을 하루빨리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에서 징병, 징용하기를 원했다.( * 참고 : 본래 식민지의 주민들은 도주나 반란의 우려 때문에 전쟁에 내보내지 않는다. 조선에서의 징병, 징용은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발표된 제3차 조선 교육령(1938)은 조선의 국민들을 모두 황국 신민화를 시도(* 참고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이르러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하였다. 주된 내용으로는 조선어 사용의 금지, 조선어, 조선사 교육 금지와 중일전쟁 이후 대대적으로 실시된 군사 훈련, 그리고 강력한 민족 교육의 탄압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의 강압이 극도에 달해 민족 교육은 상당히 힘든 처지에 처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2)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일제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부정하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 편찬 위원회(1925년 이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의 『조선사』, 청구학회의 『총규학총』 등을 통해 식민사관을 만들어내었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규정하여 폄하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예술, 종교, 문학 분야에서 친일 인사를 육성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청소년들에게 일본문화를 강제로 이식하고 복종하도록 강요하였다.

 Tip. 일제의 역사왜곡
  타율성론 : 조선은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설
  정체성론 : 중세 부재론. 개항 당시 조선은 아직도 고대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다는 설
  당파성론 :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폄하하는 이론.
  일선동조론 :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이론. 단군이 일본 초대 천황의 동생이라고 주장.

  국학 연구는 크게 한글연구와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국사연구로 나뉜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1년 이윤재, 최현배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잡지 『한글』을 발간하고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한글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훗날 조선어학회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편되면서 한글 연구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의 상용화를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였다.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실패하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이윤재, 최현배 등을 강제로 투옥시킨 다음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한다.
  서양의 인문과학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학계도 많은 변화를 하게 되었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 사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자하는 여러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신채호, 박은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성을 고취하고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였다. 민족주의 사학1920년대 신채호, 박은식에 의해 그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민족의 고유의 정신을 강조하는 정신 사학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낭가사상’라는 고대 무인의 기상을 널리 강조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사 연구초』와 『조선상고사』가 대표적인데,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나(我)와 내가 아닌 것(非我)의 투쟁’을 통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박은식‘나라는 형(形 : 형태, 껍데기)이고 역사는 혼(魂 : 본질)’이라고 여겨 ‘혼’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채호와는 다르게 그가 살아가는 시대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한국통사』,『한국 독립운동지혈사』등을 통해 나타났다. 정인보『조선사 연구』에서 ‘얼’을 강조하였고, 문일평은 『호암전집』에서 ‘심(心 : 마음)’을 강조하여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계보를 이었다.

Tip.
 신채호
  ~ 1910년 : 계몽사학의 선구자로 외국흥망사, 구국 영웅전기로 유명,
                비평인 「독사실론」을 통해 역사의 주체성을 주장
  1910년 ~ :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낭가사상 강조, 「조선사」의 고대부분을 엮어 『조선상고사』 발간
 박은식
  ~ 1910년 : 조선광문회에서 고전연구,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실천유학인 양명학을 독려
  1910년 ~ : 민족 ‘혼’을 강조,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 참고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소개된 역사서를 읽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중요한 구절을 알아두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특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특히 국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와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의 서술은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다르다.(예를 들자면 신채호는 고조선이 망한 뒤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갈래로 나뉘어 남한에 정착한 것이 삼한이라고 한다.) 자칫 혼동할 수 있으므로 주의.

  사회경제사학사회주의의 사적 유물론(唯物論)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세계사 발전의 보편성에 발맞추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남운의 『조선 사회 경제사』등이 대표적이며 이러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인 정체성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실질적이지 못한 민족주의 사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Tip. 사적 유물론적 역사 발전 5단계설
 고대 노예제(귀족 - 노예) / 중세 봉건제(영주 - 농노) / 근대 자본주의(자본가 - 노동자) / 사회주의

  실증 사학랑케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실증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병도, 이상백, 손진태 등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 진단학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진단학보』를 편찬하였으며 청구학회와 대립하였다.
   * 참고 : 훗날 진단학회는 일제와 타협하고 친일노선을 걷게 된다.(진단학회 회원 대다수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유학파였다.) 6.25가 끝난 이후 이들의 학풍이 우리나라의 학계를 지배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단학보』는 아직까지 출간되고 있다.

  문학 활동1910년대 계몽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혈의 누』,『금수회의록』과 최초의 현대소설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 새로운 형식의 시인 최남선의 신체시 등이 있다. 1920년대는 낭만주의적이고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창조』, 『폐허』등의 동인지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한편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경향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문학가들은 카프(KAPE)를 결성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외에도 일제에 저항하여 시를 쓴 한용훈, 김훈, 이상화, 김소월 등이 있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광범위한 탄압으로 오로지 순수문학과 친일 문학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서, 대부분의 문학가들이 붓을 꺾어나 변절하였다. 그 와중에도 이육사, 윤동주만이 주옥같은 저항 문학을 남겼다.
  예술분야는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영화는 1910년대 신파극을 시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는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 1940년대 일제가 조선영화령으로 탄압하자 영화 사업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극분야에선 토월회, 극예술 연구회 등이 활동하면서 연극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으나 중일전쟁 이후로 일제가 연극을 탄압하였다. 음악에는 홍난파, 현제명, 안익태 등이, 미술에선 안중식, 이중섭 등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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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의 민족 운동(비밀결사) 
  일제의 남한 대토벌(1907)로 인해 국내에선 실질적인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의 전개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된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을 규합하여 만든 독립 의군부는 국권 반환을 위해 편지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및 일본을 향해 요구하였다. 또한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의 명령을 받아 결합된 비밀 결사였으므로 주된 목표는 황실의 부활, 즉 복벽적인 것이었다(왕실부활, 복벽주의).
  또한 대한 광복회군대식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독립운동, 무관학교 설립비 등을 모금하였다. 공화정을 주장하였으며,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속해있었던 단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무관학교, 김좌진 등의 키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독립 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성 비밀 결사 조직인 송죽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등이 있다.

 2)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에선 실질적인 항일 운동이 불가능 하였다. 때문에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무장 독립 투쟁의 대안이었다. 해외의 독립 운동 기지는 크게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네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만주 역시 서간도 북간도 북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서간도에는 삼학사의 경학사(후에 부민단으로 개칭), 신흥 무관학교,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으로 개칭, 김좌진 장군), 서진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등이 있었고, 북만주에는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결성하게 되는 한흥동(韓興洞 : 한족이 흥하는 동네)가 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성명회, 권업회와 같은 항일 결사를 비롯하여 유인석의 13도 창의군(정미 의병의 이인영의 13도 창의군과 다름, 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대한 국민 의회(1919, 손병희, 무장독립론) 등이 있었다.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1918, 안창호, 외교독립론)이 후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주에는 대한인 국민회(1909, 안창호, 이승만),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조직한 군대인 조선 구민군단(1914)이 있다.

18.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1 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 선언이 촉매가 되어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본래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중국집에서 임의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수해버리는 바람에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학생들과 종교인 등은 계획되로 진행이 되지 않자, 스스로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처음 운동이 시작했을 때는 참가자들은 학생, 종교인,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비폭력주의를 표방하고 힘차게 태극기만 휘날렸지만, 점점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상인, 노동자, 교사, 학생, 농민 등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특히 농민들 같은 경우 전에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이 점점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 등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운동은 3.1운동 그 자체보다 3.1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3.1운동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독립운동 관리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국내에선 실력양성운동이, 국외에선 무장독립투쟁이 활성화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이 대중화 되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영향으로 몇몇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걷고 있던 대한 국민 의회연해주에 있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 정부국내에, 안창호가 외교활동을 위해 만든 훗나 임시정부가 되는 신한청년단상하이에 있었다. 이러한 3개의 임시정부를 안창호가 '임시 정부 통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임시정부가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한성 정부의 조직과 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한성 정부가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특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노인네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위치는 상하이로 한다.
  -> 외교독립론(외교 > 무장) / cf. 만주, 연해주는 무장 투쟁론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조직이었던 연통제와 통신을 담당했던 교통국을 통해 활동하였다(행정). 만주에 이륭 양행, 부산에 백산 상회 등과 함께 애국 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군대조직으로는 육군 주만(住滿 ; 만주에 있는) 참의부와 훗날 만들어지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종영, 한국 광복군이 있다(군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미주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립 신문(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다르다)과 사료 편찬소 등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또한 실리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외교독립론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이승만은 또라이짓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제연맹과 미국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한 사실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과연 독립운동은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명제로 머리를 맞댄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자들(개조파)과 아예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무장독립투쟁론자(창조파)들이 대립하기에 이른다. 끝내 창초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 체제를 개편하고, 김구가 사(私)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1926)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바이다.


 Tip. 독립 운동론

  1. 무장 투쟁론 :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노선

   -> 신채호, 이동휘, 손병희 등

  2. 실력 양성론(준비론) : 힘을 길러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선

   -> 안창호

  3. 자치론 :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얻자는 노선 -> (삐꾸) 이광수, (찐따) 최린

  4. 외교독립론 : 국제 연맹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자는 노선

   -> (또라이) 이승만

  5. 계급 투쟁론 : 계급 투쟁을 통한 일제의 지배 계급 타도(사회주의계) -> 박헌영

 19. 의열 투쟁
 1) 의열단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만주 길림에서 비밀 결사인 테러조직을 조직하게 된다(190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외교론, 자치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직접 혁명을 촉구)」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김익상(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나석주(동척에 폭탄 투척)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비밀 결사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정당(政黨)과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열단원 전체가 중국의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1932)하기도 하였다. 후에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단을 결성(1935)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항일 운동의 최전방에 나섰다.

 2) 한인 애국단
  국민 대표회의 이후로 침체된 임시정부의 재활을 꿈꾸며 김구가 조직한 사조직이다. 이봉창(일왕의 마차에 폭탄 투척), 윤봉길(훈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여 중국 국민당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Tip.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비교

 의열단 : 국내에서 활동

 한인 애국단 : 외국에서 활동

 20.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순서, 장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혹은 대표자 등은 꼭 알아두자. 요즘 많이 나오는 추세다(거의 2문제 정도).
  1920년,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북간도 지방의 봉오동에서 대파하였다. 분노한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간도 훈춘에 있던 군벌에게 자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부리도록 자작극을 의탁하였다. 이것을 '훈춘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간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옮길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번에도 참패를 겪게된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보복(1920)하였고,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좌절되어 독립군들은 북만주에 있는 한흥동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독립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변을 당하게 된다(자유시 참변, 1921). 수많은 독립군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부대, 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소위 3부를 성립하게 되며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자치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이것 마저 만주 군벌과의 미쓰야 협정(1927)을 통해 독립군에게 현상금을 걸고 만주 군벌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3부를 지역중심으로 통합하여 남만주에는 국민부북만주에는 혁신의회를 세웠다. 후에 국민부혁신의회는 각각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으로 발전하여 휘하에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을 두었다. 단체의 이름으로 봐선 다분히 사상을 중심으로 통합한 듯 하나, 실은 사상과 관련없이 지역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3부의 통합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손꼽는다.
  1931년 일제가 드디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만주를 침략하고 괴례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만보산 사건(한중 물꼬 싸움) 이후로 민족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국과 한국인 사이가 만주 사변 이후 상호 협력적인 형태로 바뀌어가며 윤봉길 의사의 서거 또한 한 몫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에선 앞에서 만들어진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등에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5년 의열 투쟁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김원봉의열단,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의 산하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활발한 항일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의 하수인 노릇(찌라시 뿌리기, 항복 권고 등의 잡일)만 하게 되자, 분노한 대다수의 조선 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월북하여 중국 국민당 등지고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동북 지방에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 동북쪽에서 일본에게 대항하는 군대)은 국내의 민족 유일당 조직 중 하나였던 조국 광복회의 도움을 받아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해방후에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을 '갑산파(김일성 포함)'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국민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 의용대의 몇몇 사람들은 공산당이 있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연안 지방에서 손을 잡게 된다. 조선 의용대는 화북 지방에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 청년 연합회와 연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도 중국의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맨 마지막으로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해방 북한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940년 임시 정부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당(3부가 통합된 한국 독립당과 다름, 주의.)을 중추로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시될 당시만 하여도 30명 남짓의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1942년 김원봉을 비롯한 남아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힘을 보탬으로써 조직다운 면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대독,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여 한 나라의 국군(國軍)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국민당 산하에서 독자적인 지휘권 없이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게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Tip. 무장 독립투쟁 전개도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 (훈춘사건), 청산리 전투(김좌진) - 승리

        간도참변(경신참변) - 시련

        대한독립군단 - 극복 의지

1921년 자유시 참변 - 시련

1923~1925년 3부 성립 - 극복 의지

1927년 미쓰야 협정 - 시련

1928년 3부 통합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1년 만주 사변 - 시련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 극복 의지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조직 - 극복 의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 시련

        동북 항일 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조선 의용대 창설(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 주의)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 극복 의지

1942년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 - 민족 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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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와 문화 코드 (2)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1. 기존의 <진리>는 모두 버려라~

자, 그럼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을 정리해보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가 남긴 <기록>에 의존한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 등이 공동편찬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믿을 수 있는가?

당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 등과 대립하였다. 묘청이 고구려 중심 사관이라면, 김부식은 신라중심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것을 이유로, 묘청이 김부식에 패한 것이 <민족 1천년래 최고의 사건>이라고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이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3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적 정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채호가 살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민족주의가 유독 강조되는 시기였다. 그럼 <조선상고사>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신채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포스트모던 역사가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성>들이다. 어떤 역사속의 문서나 자료들도 <객관적> 일 수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이유가 말 안듣는 신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면?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 여진족 토벌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 등을 들어 이순신의 기용이 낙하산이라고 주장한다면?

<교과서에 없는 걸 말하지 말란 말야... 죽을래?> 라고 협박하고 끝낼 것인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누군가가 생각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다.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적었다는 뜻이다. 기록 자체에 의도성이 있는데, 무슨 객관성을 따진다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역사>라고 공부하는 것이 <과거>의 진실은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역사>란 실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은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그렇다고 우기는 과거의 자료> 뿐이라고 말한다.

흑사병으로 서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서유럽 사회는 망가졌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사 자료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 정도 인구가 죽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의 권위 신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 정통적인 주장들로 흑사병을 정리하면 끝날까? 어떤 이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그 정도 죽었으니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을 기록한 통계 자체가 흑사병의 가혹함을 알리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이 쯤 되면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 <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놓고 끝없이 추격전을 벌이는 <홈즈와 뤼팡>의 견해차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란 없다. 그 시대를 살아보았는가? 시대의 아픔을 눈으로 느껴보았는가?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역사가란, 역사를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100이 존재하면, 100가지 역사 이해가 존재한다.

누구나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시대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에 적어두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고생하기 때문에...> 라고 했다. 그건 당연히 적야야할 말을 적었을 뿐이다. MKMF에서 대상을 탄 동방신기도 <아버지, 어머니, 이수만 사장님 감사해요>라는 말은 먼저 달고, 그 다음에 할 말을 하지 않는가?

그 다음 말이 어떤 말일지는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상을 해볼 것이다. 동방신기 스스로 뭐가 잘나서 상을 탔다고 생각할까? 춤을 잘춰서, 노래가 좋아서? 기획사 빽으로? 맴버 잘만나서?..... 그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은 하나일 수 없다.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 탓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건국후 독자적 기반을 닦기 위해서? 우연히 부려먹을 똑똑한 신하들이 많아서? 유교주의가 성숙해서? 어느 날 문득 한문 공부가 짜증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를 딱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혁명이 <국왕의 폭정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했다>로 설명하면 끝나는가? 아니다. 수백년간 고통받았던 농민 하나하나가 가진 이유는 누가 설명해 줄 것인가?

그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에 진리는 없다. <교과서> 같은 책은 누군가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 <자료집>일 뿐이다. 김구가 영웅인 교과서가 있을 수 있고, 이승만이 영웅인 교과서도 있을 수 있다. 요즘 뉴라이트가 이상한 짓을 하듯이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면> 역사의 한 쪽 입장을 설명할 수 있다.

2. 모든 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하 포스트 역사학)의 핵심은 <탐정놀이>이다. 누군가의 역사적 발견을 끊임없이 추적해서 재비판하고, 또 다시 재비판받는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댓글놀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한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역사학이 비판하는 것은, 거대한 주류 사회이다.

원래 포스트 모더니즘 이라는 철학 자체가 서구 사회의 거대한 주류 문명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왜 미국과 서유럽의 문학, 사회, 과학 등이 절대적 진리가 되었는가?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인식이 당연시 되었는가? 과학의 발전이 왜 환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가? 백인은 왜 흑인보다 우월한가?

이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류보다 소외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것이 역사학에 반영된 것이다.

왜 역사를 큰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역사 속에는 왕조와 위인들만 존재하는가? 우리가 소외시킨 작은 진리들을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그 결과 역사는 <일상사>가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친구 사귀기, 흑사병에 걸린 소녀의 마지막 하루, 내시 김처선의 유년 시절의 사랑이야기 등이 역사가 된 것이고, 그것을 우리 상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비판 받는다. 누군가가 주몽의 하루를 이야기하면, 또 누군가는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 또 누군가는 비판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도 유사하다. 사극을 한 편 보면, 수백개의 비판글과 옹호글이 올라온다. 역사 갤러리에 의견 하나가 올라오면 반박 의견으로 수십개의 댓글이 올라와 혈투를 벌인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거대한 정치담론이 아니다. 신윤복이 과연 여자인가, 남자인가와 같은 <인물>을 던져놓고 벌이는 <재미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역사학은 정통 역사연구법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너무나 허무하다는 편견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 모던으로 접근했을 때 <역사적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포스트 역사학을 불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독도와 만주가 우리땅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역사적 객관성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거대담론이 있다. 포스트 모던적으로 접근해서 <안용복이 진짜 일본에 갔어?>라는 의심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잡기 시작하면, 일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조차 없다.

<김구가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놓고 역사를 접근했을 때,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우익 역사만들기 프로젝트>에 휩쓸려 버린다.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라. 말같잖은 소리를 교과서에 떡~ 제시해 놓아도 <이런 관점도 있잖아~>라는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지 않다.

그럼,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과 별반 차이없는 허무한 이론에 불과한 것일까? 상상력으로 구성된 창작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스트 모던이 시도하려는 <다양성>은 <독재적인 역사학>의 틀을 비판하고, 역사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역사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또 다른 일방적 관점>을 주입하려는 꼴통짓에 불과하다.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이나 창작 소설이 아니라 지난 역사가 가진 <절대성>을 부정하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철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뜻한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장길산>이나 <태백산맥> 같은 역사 소설, <이방인> 같은 실존주의 소설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으니 <역사물>인가?

포스트 모던 역사에서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역사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물로 여긴다면 그것은 역사물이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의 주체는 필자가 아니라 <독자>이다. 쓰는 사람은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지만,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의 관점과 상관없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원래 언어나 영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고, 보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다. 사극도, 대하소설도, 심지어 연애편지도 역사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든 사람의 작품만이 역사가 아니라, 보면서 역사적 느낌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3. 역사학이 과거를 창조해도 되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인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책 제목 아시는 분은 댓글을 주시면 감사^^)

책 내용은 간단하다. <만약에> 흑사병으로 유럽인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백인은 지구상에 없다. 당대 최강의 세력인 중국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럽의 빈자리에 중국의 깃발을 박아둔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아시아인이 발견하였다. 인디언들은 황인종의 지배를 받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문화혁명이 일어닌다. 중국의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아메리카 식민시의 황인종들은 독립선언을 한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전세계에 강력한 <패권주의>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이에 반발한 다른 국가들이 도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만약에 라는 테마 하나로 역사는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 가상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가상의 현실을 통해 실제 현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 잔혹함을 중국 제국주의의 잔혹함으로 패러디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였다면 가능했을 법한 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면 유럽과는 상이한 과정을 밟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 다른 길을 가는 중국 이야기를 다시 그려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 역사학이 남기려는 것은, 역사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역사는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자료들만을 간추려 이야기되고, 그것이 진리로 인정해야 하는가?

조선시기 타짜나 바람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것일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의 기준이 다르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소재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석이 곧 역사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자, 지금까지 포스트 역사학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할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앞으로 쓸 이야기들이 포스트 역사학을 옹호하면서 전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각종 매체나 문학 속에서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포스트 역사학은 <딱딱한 자료실>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반면, 모든 역사에 진리가 없다는 입장을 가짐으로서 <허무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앞으로 전개할 이야기들에서 이 다양성과 허무주의는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포스트 역사학을 적극 활용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에서는 허무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적 코드이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역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그럼 시작해 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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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이 이야기에 나온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법, 제도, 인물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해당되는 입장의 내용들만으로 씌여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혁명 : 자유부터인가, 평등부터인가...

서구 역사가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찾곤 한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하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실제, 근대 유럽의 자유와 평등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였다.

프랑스 혁명을 처음 일으킨 것은 <귀족>세력에 반발한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그들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첫 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의회의 자본가들은 1791년 샤플리에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려 했고, 재산이 있는 자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헌법을 만들었다. 자본가들을 믿고 <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한 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년 뒤, 민중들은 8월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은 <자본가>들의 세상을 다시 부수고, 프랑스 제 1공화정(국민공회) 시대를 열었다. 자본가들을 위주로 하는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았으며, 국왕인 루이 16세마저 사형에 처한다. 93년 헌법에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재산권 위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기준으로 하는 혁명적인 헌법을 다시 만든다. 또, 모든 사람이 직접 선거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평등파>와 대결하려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방토즈>법을 만들어 <재산가>들의 재산을 <혁명군과 애국시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한다. 서구의 근대사 최초로 <자유>가 <평등>에 의해 억압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파 의원>들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 공포정치로 자유를 탄압한 평등주의자 로베스피에르는 죽었고, 부르조아지들은 다시 <재산권>을 최고의 기치로 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 대립했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긴 하였다. 예로 1796년 혁명을 통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추구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의 아버지 <바베프>이다. 그는 재산권 자체를 부정하고, <자유>는 <평등>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곧 바로 <사형> 시킨다. 그 이후 자유주의는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락한 프랑스 경제의 부활>과 <혁명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발표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는 이 것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오로지 혁명의 성과를 <자유>로만 규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유주의 이념을 평등주의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말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성과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조아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을 프랑스의 위대한 국민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통하여 <재산권과 자유권>을 유럽 대부분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등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은 바로 군부에 의한 <탄압>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위대한 법전으로서 법적인 평등과 신앙, 재산, 직업의 자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전의 모든 조항은 개인을 위한 자유보다는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유, 재산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이념은 <자유이념>이 모든 이념을 포괄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자유주의 이념>이었고, 이 자유주의 이념은 유럽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최초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원이 된 혁명에서부터 <자유>가 <평등>을 누르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며, 이 후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 계급의 <평등>이념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시도들은 대부분 <자유라는 인간의 절대 기본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두 좌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이념은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과 맞물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절대적 지원사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극단적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반자유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역사는 이러한 투쟁을 모두 실패로 기록하고 만다.

봉건귀족 세력의 역사적 역할 :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악마세력>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유럽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금기어가 되었다. 유럽의 봉건 왕조들은 빈회의를 통해 혁명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 유럽을 <보수화>하려고 하였다. 유럽의 왕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평등보다는 <자유>이념이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은 산업혁명 등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보았으며, <자유주의>는 이들 자본가 계급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럽의 <정통 왕실>과 성장하는 <자본가>들은 서로 적으로서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 이 때 <지식인과 민중>은 누구 편을 들어야 했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평등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 과거 세력>들인 왕실과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시위에 들어간다. 독일 대학생들은 부르센샤프트 운동을 벌였고, 나폴리에서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결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왕실 질서는 또 다시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규탄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사후의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과 자본가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등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티에르 등 <자유주의자>들은 <민중>과 연합하여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평등주의자>들을 버린다. 민중이 원한 평등선거는 없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부도 없었다. 단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샤플리에법>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모두 적으로 여긴 봉건귀족은 이 둘의 연합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정 : 계속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이 이야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혁명을 이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혁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을 이끈 선구적인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이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또 다시 <평등>의 기치를 잃어 버렸다. 이 때부터 프랑스 민중들은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자유>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주장했던 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편이 되어서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또 한 차례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을 폐위시키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다시 수립하게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 혁명 공화정에 이은 <제 2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제 2 공화정>은 <자유주의>와 극심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급진 평등파>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인 <재산권>을 제한하려 하였고,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온건한 공화파>들 조차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다시 극단의 혁명을 몰고왔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6월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제 2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은 불법이라면서 강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화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도>를 실시하여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체제안으로 포섭해야 했다. 특히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국내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민중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국민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 계급을 떠나 하나이다. 모든 계급의 통일체가 민족이고, 민족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이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 그는 이 <민족>개념으로 국민들의 <냄비같은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평등을 요구했고,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창립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강력한 리더쉽 앞에 <평등주의>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묻혀 버렸다.

영국 :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이념으로 전환되다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국의 <자유주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부터 진행된 우리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들 나라의 문물을 먼저 수입한 청과 일본에 의한 것지만 말이다. 이건 다음 회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을 목격한 <조용한 섬나라>는 이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젠트리들에게 수많은 권리를 주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이다. 그만큼 자본가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나라였다. 무론 의회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본가 위주의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명칭까지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귀족들은 <보수당>에 집결하여 정당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세기 영국은 곡물법을 폐기한다던가, 항해조례를 폐기하면서 자본가들이 해외무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세기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은 <평등>이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이 산업자본가와 같은 권리를 차츰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 유럽 어느 나라이든 19세기 <여성의 평등>을 거론한 나라는 없다. 여성에게 똑같은 보통선거를 준 것은 선진적인 영국도 <20세기>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영국의 자유주의적 발전은 <자유주의 만능 이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자본가들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했던 분야가 바로 애덤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 분야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에 절대 간섭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가격>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내 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유>는 주되, <평등>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은 노동자 책임이므로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는 없다. 빈민촌에는 소독도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정립한 사람은 <스펜서>이다. 스펜서는 이 모든 이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정립시켰고, 유럽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먹이사슬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다. 사자는 강하고, 양은 약하다.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을 사회 법칙에 대응하면?

노동자는 가난한데 그것은 유전자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은 도태되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학자 리카도는 한가지 증명까지 시도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성경이다. 경제는 지대, 이윤, 임금의 3가지로 유지되는데 지대가 커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임금은 그만큼 준다. 노동력이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날 수 없다. 결국 노동자는 항상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진화론을 국가간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먹이감을 구하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한 탈출구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거나 식민지를 만둘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사상은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당위성>으로 설명해야할 사상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나라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서 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약자의 변명은 사회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서 참신한 혁명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타락과 협상을 거쳐 다양한 사상과 연결된 결과, <제국주의>의 호수까지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제국주의를 부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개화기에는 <근대 사상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개화기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도 수용하였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역시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서 <제국주의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제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기에는 <제국주의적인 군사실력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평등주의>의 반격...

사회진화론까지 나아간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평등주의>자들은 수많은 반격을 하고, 저항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이념을 계승한 이들은 중산계급의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급진주의>를 주장하였다. 생시몽과 같은 이들은 폭력혁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자본가와 협력하여 타협을 이끌어내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푸리에는 한발 나아가 현존 제도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결혼조차 부정하면서 성적인 자유까지 주장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생각하게 된다. 무정부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 권력은 모두 <평등>을 억압한다고 본다. 경찰, 군대, 학교, 법원 등은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들 도구는 <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국가의 완전 소멸>이 평등을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국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진 뒤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평등한 노동의 세상을 말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접 코뮌(자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평등>사회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러시아의 바쿠닌은 아예 폭력 혁명으로 모든 것을 부수자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포티긴은 바쿠닌의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것의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그 새로운 세상은 <평등>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수고 민족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대립

독일의 자유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가 통일과 자본가 계층의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지만,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표하여 평등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독일의 현실 때문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 된 이후 동독일의 토지귀족(융커)들과 서독일의 산업자본가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철저한 단결을 주장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은 이렇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 평등함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또 깨드린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현 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단, 이 변증법은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하부구조는 경제력인데, 상부구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독식한다. 역사는 그러한 모순(정)에 대한 투쟁(반)이었으며, 그 투쟁은 항상 새로운 결과(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자유주의(자본주의 : 정)에 대한 평등주의(반)의 투쟁으로 새로운 세상(공산주의 : 합)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의 주체인 빈민층(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해 제 1, 2 인터네셔널을 만들었고 이 국제 평등기구에는 독일계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의회>에 진출하여 <자본주의>가 붕괴될 대를 기다리자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적 기구로 단결하여 훗날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서 이들은 해산하였다.

프랑스.... 왕정과 공화정의 반복 :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프랑스는 제 2공화정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평등>요구로 기득권과 자본가들이 <재산권>을 빼앗긴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재권을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헌법의 큰 줄기였다. 나폴레옹 3세는 기득권을 위한 <쇼>를 많이한다. <자유주의>의 옹호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행설립, 철도 건설, 중공업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워 자본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특히 파리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많았다. 나폴레옹이 실시한 노동자를 위한 <평등> 정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다. 실업자가 늘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평등이란 말 대신 <민족의 영광>이란 말로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점차 불만이 많아졌다. <민족>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부르조아>를 위한 정책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정책은 간단하였다. 나폴레옹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발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을 달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전쟁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화, 연예인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확실한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국민적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샤르데냐 전쟁), 멕시코 원정, 오스트리아 전쟁 등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전쟁을 수많은 이유를 들어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농간으로 패함으로서 <국민적 영광>은 상처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파리 자치정부>가 추진된다.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자, 블랑키 주의자들은 <평등주의>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연합하였고, 파리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혁명 자체가 아니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평등주의>로 국가정책을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전투>라고 역사는 부른다. 자치정부군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항쟁하였다. 국가는 그들을 잡아 바로 바로 총살시켰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죽이지 못한 이들을 파리 시내에 가뒤 굶겨 죽였다. 쥐를 잡아먹으며 항쟁했던 <자치정부>의 모든 이들은 엄청난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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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2부에서 다룰 이야기 : 사회주의의 성장 드레퓌스 사건, 카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의 관계, 미국노예해방은 자유주의인가 평등주의인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버린 제국주의, 세계대전 중 평등사상, 히틀러와 자유주의, 냉전시대와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의 등장배경과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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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란 물음에 깊이 있게 고찰해 본『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자유민주 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왔고 철학공부를 한 저자는 롤즈의『정의론』을 접하게 되면서 잠재의식적 자유정신을 의식화하고 자유주의를 향한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이 나름대로 구상해 온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총 5부로 나누어 마음껏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와 그 적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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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드워킨 지음 | 한길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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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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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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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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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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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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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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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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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대왕릉비에 대한 문제점 논의(종합자료)

1. 광개토 대왕릉비에 관한 이 사이트 내 검색 자료(히스토리아)

비문 전문  해석 : http://historia.tistory.com/236    
   비문 해석(한문포함) :
http://historia.tistory.com/909
   고구려의 영토 확장 :
http://historia.tistory.com/31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일부 : http://historia.tistory.com/323
   비문 위치와 내용 : http://historia.tistory.com/328

2. 광개토 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은 보통 우리가 영토를 넓힌 왕(광,개,토)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 이름은 담덕이었고,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엄청난 묘호를 쓰고 있죠. 생전에 연호는 영락으로서 보통 영락대왕이라고 합니다.

비문은 보통 3개의 단계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위 참조 자료들에도 각각 자세한 설명을 달았지만, 1부는 고구려의 건국 내역, 2부는 대외 정복과정, 3부는 수묘인 연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 비문 위치와 내용 글 참조)

3. 비문의 발견과 위조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중국 만주지역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이 당시 만주가 가장 강성했던 국가인 청나라의 근거지라는 점입니다. 이 비석을 발견한 청은 이 비석의 내용이 자국의 수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비석의 내용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시대가 지나갔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청의 근거지인 요동-만주 지역을 차지한 일본은 이 비석을 위조했습니다.(청이 먼저 위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일본의 위조 이유는 임나일본부설의 침략자료로 활용하여,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를 정설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은 비문의 중요 부분들을 쪼아내어 비문을 훼손하고 석회를 발라 없는 글자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일본인 사까와는 이 위조된 비문으로 탁본을 만들었고, 이 탁본 또한 탁본을 만들때마다 약간씩 글자가 달라지고나, 먹물 농도가 달라져서 탁본 1장 1장의 내용이 다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일본군 참모본부가 의도적으로 비문을 위조했다는 점입니다.

4, 신묘년조의 문제점

광개토대왕릉비의 최대 논점은 바로 신묘년조입니다. 신묘년조를 위조한 목적은 일본 참모부가 일본서기(니혼쇼키)에 적혀있는 내용을 정당화하기 위함입니다. 즉, <신공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점령하여 약 200년간 경영하였다>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과 일치시키기 위한 작업으로 시작된 것이죠.

문제가 되는 부분을 볼까요?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과*南,

조공을 바쳐왔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 소굴의 남쪽에 이르러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일본은 이 부분을 위조했습니다. 일본측의 위조는 일본이 백잔, 신라, 고구려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바꾼 것입니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來渡海입니다. 즉, 건너와서 쳐부순 주체가 누구냐는 것인데, 그 뒤의 글자들이 지워져 있으므로 알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실제, 당시 상황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이므로 고구려가 주어가 되어야 맞습니다. 즉,

고구려가 바다를 건녀 신묘년에 왜를 쳐부셨다. 가 맞죠.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도 양국의 첨예한 대립으로 남아있는 역사상 중요한 논쟁입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위 참조 포스트들에 각각 기술되어 있습니다. 혹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글을 읽다가 중요한 것이 눈에 띄면 바로 올릴께요.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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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대 화랑도의 개편 -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1. 화랑도에 관한 사료부터 읽어보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으니, 화랑 국선의 시작이다. 그래서 기념비를 명주(강원도 강릉)에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에게 악을 고쳐 선으로 옮기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니 오상과 육예와 삼사와 육정이 널리 행하여졌다.

(참고 - 오상 : 인, 의, 예, 지, 신 / 육예 : 예, 악, 사, 서, 어, 수의 6가지 과목 / 삼사 : 태사, 태부, 태보의 3가지 최고 관직 / 육정 : 성신, 양신, 충신, 지신, 정신, 직신의 6가지 바른 신하)

-삼국유사 권 3, 탑상편,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 -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전에 군신이 인재를 알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기어 사람들을 끼리끼리 모으고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 뽑아 쓰려 하였다. 그리하여 남모와 준정이라는 미녀 두 사람을 뽑아 300여명 이나 되는 무리를 모았다. 그런데 두 여인이 서로 어여쁨을 다투고 시기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다음 끌어다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이로 인해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졌다.

그 뒤 다시 외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부르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의를 닦거나 서로 가악으로 즐겁게 하면서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는데,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나쁘고 나쁘지 아니한 것을 알게 되어 착한 자를 가리어 조정에 추천하였다.

그런 까닭에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현좌와 충신과 양장과 용졸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 라고 하였고,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이른다. 이 교의 기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3교를 포함한 것으로 집안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공자의 뜻이며, 모든 일을 거리낌없이 처리하고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것은 석가모니의 교화 그대로이다> 라고 하였으며,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서는 <귀인의 자제 가운데 어여쁜 자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국인이 모두 높이 섬긴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

공(김유신)은 나이 열다서에 화랑이 되어 다이 사람을 기꺼이 복종하였는데, 이를 용화향도라 일컬었다.

- 삼국사기 권 41, 열전 1, 김유신 상 -

2. 화랑도의 용어를 정리해보자!

위 사료에서 보면 알겠지만, 화랑이라는 단체의 기원은 도교적, 유교적 영향으로 여성을 선발하던 단체였으나, 점차 남성단체로 전환된 것에서 비롯됩니다. 화랑이란, 국선, 풍월주라고도 하며 진골 중에서 으뜸인 젊은이들을 뽑아 사회에 필요한 교양과 국가 교육을 동시에 하는 단체였습니다. 화랑이 진골 귀족출신이라면 낭도는 화랑을 쫒던 일반 1-6두품 출신의 무리였습니다. 6두품이 등장할 무렵 1-3두품은 평민화 되어가는 것으로 볼 때, 낭도는 평민층도 포함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화랑이란, 무리인 <랑>을 이끄는 자들 중 가장 아름답다(화)는 뜻입니다. 여기서 화랑이 여성단체인 원화의 <화>, 즉 꽃에서 유래된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죠. 화랑도를 이끄는 <랑>은 최고의 귀족출신입니다. <낭도>란 <랑>을 따르는 자(도)라는 뜻입니다. 화랑 + 낭도라는 의미에서 <화랑도>라고 합니다.

향도는 이렇게 화랑(랑)과 낭도(도)로 이루어진 단체입니다. 향도란 무리를 따르는 <도> 들이, 모인 단체라는 뜻인다. 위 사료에서처럼 김유신의 용화향도가 대표적인 단체입니다.

3. 신채호가 생각한 화랑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이 화랑도를 우리 전통의 선 사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신라의 선(군선)은 고구려의 조의, 선인제도, 삼한시대의 소도를 수비하던 무사의 개념에서 내려오는 전통 사상으로 중국 당나라 초기에 국교화된 도교에서 말하는 <선>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중국의 선 사상과 다른 우리 고유의 선 사상을 <낭가사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채호는 이러한 전통사상을 잘 지켰을 경우 우리 민족이 흥하였고, 전통사상을 무시하고 내분을 일으킬 경우 민족이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고구려 초기의 국풍이 후기 내분으로 멸망단계에 이르고, 신라 후기에 낭가의 전통이 약해진 경우 등은 모두 국가가 문란한 시기였다고 말합니다.

특히, 묘쳥, 정지상 등이 이끈 서경천도운동은 낭가사상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중흥할 수 있는 계기였는데, 김부식 등의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진압당한 것은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일 대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고려 개경 보수파 김부식에 의해, 진보적 낭가주의 사상가들인 사경파가 진압당함으로서 우리 역사는 더 이상 북방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한반동에 갖혀 역사가 어그러지는 과정을 맛보았다는 것이지요.

4. 화랑도의 기원은?

화랑도는 원시 사회 청소년 조직에서 유래된 사회 유지 단체로, 성년식 등을 통한 청년 교육, 비밀 결사로 이루어진 군교육, 연령에 따른 계급적 교육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초기에는 원시적인 성격을 띄는 집단이었으나, 진흥왕이 화랑도를 국가 체제 속에서 공적인 단체로 규정한 이후 국가 군사 엘리트(명망군)를 보충하기 위한 특수조직으로 거듭납니다. 진흥왕기 진흥왕의 모후로서 섭정했던 김씨부인은 이 청소년 집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고 합니다.

즉, 화랑도는 진흥왕기에 불교교단의 정비와 더불어 국가 행정체제에 포섭된 단체가 되었고, 이후 풍월도, 풍류도라 불리던 전통 사상체계 및 중국 도교 사상 등과 연계되어 유, 불, 선 3교를 포함한 정치, 사회, 사상적인 제도로 자리잡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청소년 단체를 넘어 사회 교화까지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되죠.

5. 진흥왕대 화랑도가 정비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신라사회를 살펴볼 때, <부체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었습니다. 진흥왕 이전까지 신라 사회는 왕도 소속부를 가지고 있었고, 왕의 하교는 6부의 소속부와 같이 명령을 내리는 공동하교였습니다. 공동하교란, 왕과 주요 6부가 화백회의와 같은 회의체를 통해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왕족은 왕과 6부에 흩어져 공동의 정치를 했다는 것을 의미해줍니다. 신라 왕도 탁부 소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지증왕 대 우경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면서 국호와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고, 법흥왕 대 율령과 불교의 수용, 골품제의 정비를 통하여 왕권이 강해진 것을 계기로, 진흥왕 때는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추진하면서 왕 혼자 국정을 총괄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단독하교>입니다.

왕이 단독하교로서 왕권을 중앙집권화하려 하자, 인재가 많이 필요했습니다. 왕은 소속부를 초월하여 진골 인재들을 자신의 밑에 직접두려고 했죠. 이러한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불교교단의 정비와 골품제의 시행입니다. 불교 교단의 정비란,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치시켜 불교를 국가 지배체제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서 불교 세력을 각 부가 아닌 왕이 장악하게 되는 것이었지요. 또, 화랑도를 국가 단위로 개편하여 소속부와 계층을 뛰어넘어 왕이 진골인재를 직접 선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진흥왕의 이 정책으로 탄생한 세력이 바로 <진골세력>, <6두품>세력입니다. 과거 부체제 속에서 각 부의 혈연집단이었던 혈연 귀족들은 이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이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진골들은 왕과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세력으로 1-5두품 세력을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진골에 의해 6등급 아찬중위제 등 고위 관료직까지 진출한 새로운 두품을 <6두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진골 계급을 우두머리로, 성장하고 있는 두품 세력을 낭도무리로 하여 계급적 지배체제로 재탄생한 제도가 진흥왕기 화랑제도입니다.

그러나 화랑제도는 이러한 정치적 목적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랑은 기본적으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겠다는 왕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지만, 그 인재를 소숙부와 계급을 초월하여 선발함으로서 <사회통합>에 기여하였습니다. 또, 화랑과 낭도에 계급을 부여하고 그 계급윤리를 준수하게 함으로서 사회 규범과 윤리를 유지하는 역할도 하였고, 국가 긴급시에 활용할 수 잇는 군대(명망군)의 역할을 함으로서 삼국통일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으로도 활용됩니다.

이러한 화랑도의 발전으로 화랑도는 자체 체계도 갖추게 됩니다. 예로, 승려 원광이 작성한 세속오계는 화랑의 성격이 유교, 불교, 도교 등을 통합한 종합적 사상 체계임을 보여줍니다. 살생유택은 불교적 이념이, 사군이충과 사친이효, 교유이신 등에는 유교적 가치좐이 보입니다. 그러나, 충성, 우애, 효도 등은 유불선을 떠나 어느 사회에서나 강조하는 이념으로서 화랑도가 신라사회의 <보편적 이념>을 따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 화랑의 역할

실제 화랑은 삼국통일에 앞장선 자들입니다. 사다함, 반굴, 관창 등의 화랑은 적과의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김유신과 같은 가야계 진골들도 삼국통일에 큰 공훈을 세웁니다. 화랑은 자신의 낭도를 철저히 보호하고, 그 공훈을 인정하여 높은 보상을 보장하였기에 화랑을 따르는 낭도, 특히 6두품 낭도들은 목숨을 걸고 충성합니다. 실제로 삼국통일기에 화랑 아래에서 활약한 위대한 낭도들은 6두품 출신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과도기라는 점은 큰 메리트로 다가왔고,  두품의 한계를 뛰어넘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이것으로보면 화랑도가 골품적 한계를 어느 정도 완화시켜, 계층을 넘어선 사회통합에 기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화랑은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효녀 지은전을 보면 효종랑과 그 낭도들은 어렵게 살아가는 효녀 지은을 지극 정성으로 도우면서, 이것을 당연한 화랑도의 도리라 여깁니다. 즉, 화랑도는 <진골>이라는 지배계급이 백성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할 지를 제시하는 지배층의 <교과서>같은 역할도 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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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글) 이하의 아래 글은 화랑도에 대한 이기동 교수님의 글입니다. 참조하세요.

[기원과 제정]

원시공동체사회로부터 성읍국가시대에 걸쳐 우리나라의 촌락 내부에는 청소년조직 같은 인위적인 공동체가 발생하여 차츰 발전해갔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 三國志〉·〈후한서 後漢書〉의 동이전에는 삼한사회(三韓社會)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농촌에서 아직도 쓰이고 있는 '두레'라는 말은 본래 지역공동체를 나타내는 칭호였는데, 그 어원은 '들어간다'는 의미의 '들=들이=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입문(入門)·입사(入社)의 뜻인데, 이는 아마도 성읍국가시대 마을의 젊은이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에 들어가 단체활동을 했던 사실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신라는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연맹왕국을 완성하고, 6세기초에는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함에 따라 지금까지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청소년조직은 그 독자적인 기능을 중앙정부에 흡수당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태에서 조정에 의해 제정된 것이 원화(源花:또는 原花) 제도였다. 당시 조정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원화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조정에서는 인재를 양성·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특히 6세기 전반기가 되면 신라는 가야의 여러 나라, 나아가서는 고구려·백제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대를 편성해야 했다. 이에 진흥왕(眞興王:540~76 재위) 때에 국가는 화랑도를 정식으로 제정했는데, 이때 조정은 화랑도조직을 통해서 당장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랑도는 결국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이었다.

[조직상의 특징]

화랑도는 비록 국가에 의해서 조직되었으나 법률로 제정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다. 즉 종전의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청소년조직이 전통에 입각하여 거기에 중국 율령(律令)의 수용을 통해서 배운 관청조직의 원리를 교묘하게 결합시켜 만든 일종의 반관반민(半官半民) 단체였다.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神文王:681~92 재위) 때 최고 학부인 국학(國學)이 정비된 뒤에도 화랑도는 교육적 기능을 지니는 민간의 조직으로 여전히 남았는데, 이는 화랑도 조직상의 특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한 시대에 몇 개의 단체가 존재했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眞平王:579~632 재위) 때는 7개 이상의 화랑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이들 여러 단체를 통솔할 책임자로 화주(花主)를 제정한 일도 있었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이 낭도의 수효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많은 경우에는 수백 명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화랑은 이 집단의 중심 인물인데, 진골 귀족 가운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이 깊으며 사교성이 풍부한 사람을 뽑았다. 신라시대를 통해서 화랑은 모두 2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화랑의 무리 속에 섞여서 활동하는 승려들은 주로 지적·정신적인 방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그런 만큼 학문적 교양이 풍부한 승려가 흔히 이에 뽑혔다. 한편 낭도들의 신분이나 자격규정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화랑도는 위로는 진골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에 속하는 수도 거주의 청소년들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화랑도 구성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발적으로 맺어지고 있는 점이 하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주의를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일종의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수련상의 특징]

화랑도는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단체생활을 했다. 신라사회에서는 통상 3년을 하나의 서약·수련·의무의 이행기간으로 잡고 있었으므로 화랑도 역시 수련기간이 3년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역사 기록을 종합해보면 화랑은 대개 15~18세의 청소년이다. 화랑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기간 동안 경주의 남산을 비롯하여 멀리는 금강산이나 지리산 같은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례하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했다. 그런데 그들이 연마한 도의란 흔히 6세기말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5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5계 가운데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소중하게 여긴 사회윤리 덕목은 충과 신이었다. 이것은 화랑도가 제정된 6세기 중엽부터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200여 년 간이 신라 역사상 드물게 보는 국난기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와 춤이었다. 본래 노래가 정신교육, 특히 청소년의 의기를 북돋우는 데 크게 이바지했는데, 화랑집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화랑도가 즐긴 노래와 춤은 그들의 명승지 순례와 더불어 놀이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놀이는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그 세계관 형성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화랑도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진평왕 때는 신라사회에 불교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화랑도집단도 불교의 영향을 받아, 불교의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화랑을 도솔천에서 내려온 미륵으로, 낭도를 미륵을 쫓는 무리로 여겼다.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로 불렀다는 역사책의 기록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국난기에 즈음하여 귀족계급이나 민중들은 하루 빨리 이상국가가 건설되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화랑도가 자신들의 열망을 실현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화랑도는 낭도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결합된 위에 조국수호, 나아가서는 이상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한 기간 동안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그 구성원간의 인적 결합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그들 사이의 우정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함께 죽기를 약속할 정도의 사우(死友)·맹우(盟友) 관계였다.

[기능과 역할]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에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까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화랑도는 이 중대한 시기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들을 많이 배출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며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했다. 화랑도는 당시 무사도(武士道)의 화신이었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화랑 및 낭도들의 전기를 보면 그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전사를 명예로 여기는 순국지상주의(殉國至上主義)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전사단체로서 화랑도는 사태가 급할 때는 곧바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국가의 정규부대인 당(幢)·정(停)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화랑집단의 무사도가 화랑도 구성원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층에까지 널리 퍼져서 시대정신의 구현에 이바지한 것은 이때였다. 그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불의(不義)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랑도가 국가에 기여한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화랑도가 제정되어 크게 활약하던 시기는 골품제도라고 하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였는데, 화랑도는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 그것은 화랑도가 진골귀족을 비롯하여 하급 귀족, 일반 평민 출신 등 여러 신분 소유자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추구하는 공동목표는 같았는데, 그 이유는 집단 자체가 철두철미하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을 강조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변천]

삼국통일 후 화랑도의 성격은 차츰 변질되어갔다. 무엇보다도 종전에 목표로 하고 있었던 군사적 과업이 달성됨으로써 전사단으로서 화랑도의 존재의의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통일 후 오랫동안 안정과 평화를 누리면서 화랑도의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일방적으로 놀이의 성격이 강해졌다. 여기에는 도교(道敎)의 신선사상이 침투한 데도 그 원인이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인 최치원(崔致遠)이 화랑도의 근본정신은 유교·불교·도교 3교의 융합에서 나온 풍류도(風流道)라고 규정한 것도 이처럼 삼국통일 후 변질된 화랑도에 대한 정의였다.

신라는 9세기에 들어와 왕권이 쇠약해지고 귀족세력이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화랑도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어갔다. 이처럼 신라의 쇠퇴와 더불어 차츰 변질되어가던 화랑도는 신라의 멸망과 동시에 그 제도마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화랑도의 도풍(道風)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즉 고려시대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에서 그 유풍을 볼 수 있고, 민간의 교육기관인 사학(私學) 12도(徒)가 크게 일어난 것도 화랑도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었음을 반영해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이같은 화랑도의 유풍은 거의 사라지고 오로지 노래와 춤을 즐기는 화랑도의 가무조합적(歌舞組合的) 기능만이 남았다. 그리하여 화랑이라고 하면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비롯해 〈훈몽자회 訓蒙字會〉·〈속대전 續大典〉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무당[巫夫]·창우(倡優)·유녀(遊女)·무동(巫童) 따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어 마침내 화랑도의 본질적인 성격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 현재 일부의 화랑도 연구자들이 화랑을 신라시대의 남자무당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처럼 조선시대에 변질된 화랑이란 용어를 마치 신라시대의 그것으로 잘못 판단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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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은 고조선에서 나왔다

1. 삼한의 기원에 대한 신채호의 학설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자세한 역사적 기록은 없습니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에서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지역이고,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지역이라고 서술한 정도입니다. 중국 삼국지에는 변진은 잡거한다고 표현하여 경계선이 모호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한 78개국은 제각각 왕이 있고 통치조직을 갖춘 독립국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고조선이 과거 위대한 우리 시조 국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적으면서도, 남쪽 진국의 역사는 상세히 적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의 과제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신채호는 민족의 영광된 시기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았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역사를 강조했으니까요.

신채호는 고조선이 3조선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신한, 불한, 말한이였습니다. 그 중 신한이 고조선을 이끄는 대왕의 국가였습니다. 불한과 말한은 신한의 부왕이였습니다. 이 3명의 왕이 각각 3경이 거주했답니다. 이것을 신채호는 전 3한시대라고 부릅니다.

3한은 같은 민족이였으나, 기원전 4세기 신조선은 연해주, 불조선은 요동, 말조선은 한반도를 지배하며 영역을 각각 분리하여 통치하였습니다. 신채호 이론에 따르면 진국은 곧, 말조선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되기 전의 조선을 분리된 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를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조선은 보통 이성계의 조선왕조와의 구분 때문에 <고조선>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옛날 단군의 조선이 여러 단계를 거친 국가이므로, 고조선 등으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이 3개의 조선 중, 신조선은 흉노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불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장군 진개에게 패하여 영토를 천여리나 잃었습니다. 불조선은 복수하기 위해 중국 진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불조선은 중국과의 항쟁을 위해 철기를 도입하려 하였고,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 백성인 위만에게서 철기 기술을 도입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오히려 불조선의 준왕을 공격하였고, 불조선은 위만이 다스리는 위만조선이 되었습니다.

이 준왕이 한반도를 다스리는 말조선으로 넘어와 월지국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말조선의 공격으로 이 월지국은 망하게 됩니다. (제 글을 제가 받아서 인용해도 옆에서와 같이 저작권보호가 뜨는군요. 티스토리 기능에 만족!!)

2. 신채호가 서술한 남쪽의 나라 <말조선>

말조선은 3개의 조선 중 한반도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처음에는 도읍이 평양이였는데, 이후 국호를 <마한>으로 바꾸고 월지국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 월지국은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 때 빼앗기기도 했지만, 다시 탈환하여 <마한>이라는 한반도 국가 중심체를 구축합니다.

마한은 한반도의 종주국이였습니다. 마한은 북방항쟁에서 중국에게 패한 신조선, 불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신조선의 유민들이 동부에 정착하여 진한이 되었고, 불조선의 유민들이 남부에 정착하여 변한을 형성합니다. 이로서 북방에서 활동하던 전삼한시대의 3개 조선은, 남방에서 다시 후삼한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삼한시대는 마한왕이 <진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진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자료로 참조되어 왔지만, 근거가 빈약하다고 해서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생각거리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이 고조선의 진정한 역사와 한반도 남쪽 <진국>의 정체를 밝힐 중요한 단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 출신의 역사 교수들은 이 3한 조선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 고구려사 역사 왜곡에 대항할 논리로 이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님도 같은 맥락의 역사학을 연구한 적이 있다고 하네요.

 
고조선의 위대한 영광이 빛나던 시대에 실제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였던 한반도의 역사는 200년 이상 아무런 자료도 없이 묻혀있다가 갑자기 삼한시대를 거쳐 백제, 신라가 튀어노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백제의 전성기인 4c에 백제인들은 중국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본 규수 지방까지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의 수도를 공격하기도 하는 강대한 세력이였습니다. 그러한 세력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백제 이전의 역사인 <진국>의 역사는 밝혀져야 합니다.

3. 진국과 진왕에 대한 기록

중국측의 기록은 진국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삼한의 전신인 진국에 대한 역사는 추론으로 찾아야 합니다. 진한은 옛 진국이라는 명칭에서 나왔다라던가, 삼한 전체가 진국이다라던가, 진왕이 진한의 왕이다라던가, 진왕이 삼한 전체의 왕이라던가 하는 학설이 분분합니다. 신채호의 학설로 보면 북에서 이주한 진한, 변한인들은 마한인의 통제를 받았을 것이므로 진왕이란 마한의 왕을 뜻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삼한에서 우대받는 계층으로서 국가 정책에 참여하는 귀족을 <국인>이라고 부릅니다.

4. 진한의 건국과정은?

진한은 북에서 내려온 흩어진 유민을 묶어 탄생한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로국의 혁거세 왕을 진국의 왕으로 추대했는데, 초기의 신라는 왕이라는 칭호도, 신라라는 국호도 없이 소국들이 연합하여 합의 통치하는 6부 합의 국가였습니다. 왕이 사는 곳은 국읍이라 하였고, 족장들은 별읍에 살았습니다. 별읍에 사는 작은 족장들은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으로 불렀는데, 그 족장의 세력 크기에 따라 이름을 차등있게 부여했다고 생각됩니다. 즉, 국왕 밑에 수많은 족장들이 있었고, 이들 족장간에도 서열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별읍간에는 잡거 형태로 경계선이 모호했고, 국왕의 통치력은 실제 하위 별읍에는 거의 미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5. 마한의 운영

마한은 여러나라를 총괄하는 지도적 위치의 국가였습니다. 마한에서는 왕과 별도로 <천군>이라는 제사장이 존재하는데, 이들이 제사를 주관함으로서 흔히 삼한을 <제정분리>라고 합니다. 천군은 솟대를 세우고 제사를 지냅니다. 이것은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의례로 보여줌으로서 국읍의 왕들이 정치적 지위를 신성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소도는 별읍에 설치되어 천신을 제외한 여러 신들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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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고조선에 치우쳐 진국을 잊고 있었다.

1. 알려지지도, 알려하지도 않았던 미지의 나라 진국

진국에 대해서 한번쯤은 짚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진국은 중국 사료에 <중국衆國>이라고 나옵니다. 衆國이란 쉬운 말로 하면 무리 국가들이란 뜻이네요.

고조선이 북방에서 강성할 무렵의 역사를 우리는 자랑스럽게 배웁니다. 단군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단군의 영토가 평양과 황해도, 함경도 지방을 중심으로 멀리 만주를 넘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넓은 지역을 다스린 자랑스러운 국가가 고조선이지요.

그런데, 그 자랑스러운 고조선이 우리의 뿌리로 자리잡고 있을 무렵, 남쪽 전라도, 경상도에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같은 남방의 원숭이들이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북방 영토를 중요하게 취급한 만큼, 남쪽 한반도의 역사는 소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그 남쪽에 있었던 국가들이 바로 사료상의 <진국 : 중국>인 것입니다.

진국은 위만 조선 멸망 후 삼국이 정립되는 시기까지 원시 공동체의 해체기를 거처 초기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였다고 합니다. 분명 기록에는 없는 어떤 小國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또, 고조선이 그정도 강성한 국가였다면, 그 문물이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고조선의 남부지역이나, 남부 국경선 지역이 그 당시 강성한 중국 및 고조선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납득이 안되는 점입니다. 중국의 진, 한 나라 시기 한반도 남쪽에 무리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그들 역시 국가단위를 형성하여 멀리 중국영토까지 알려졌다는 것을 뜻 합니다.

2. 신채호는 고조선의 입장에서 3 조선설을 주장하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고조선이 과거 위대한 우리 시조 국가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상고사를 적으면서도, 남쪽 진국의 역사는 상세히 적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우리의 과제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조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신채호는 민족의 영광된 시기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았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우리의 역사를 강조했으니까요.

신채호는 고조선이 3조선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신한, 불한, 말한이였습니다. 그 중 신한이 고조선을 이끄는 대왕의 국가였습니다. 불한과 말한은 신한의 부왕이였습니다. 이 3명의 왕이 각각 3경이 거주했답니다. 이것을 신채호는 전 3한시대라고 부릅니다.

3한은 같은 민족이였으나, 기원전 4세기 신조선은 연해주, 불조선은 요동, 말조선은 한반도를 지배하며 영역을 각각 분리하여 통치하였습니다. 신채호 이론에 따르면 진국은 곧, 말조선의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리되기 전의 조선을 분리된 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전자를 고조선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조선은 보통 이성계의 조선왕조와의 구분 때문에 <고조선>이라고 부른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옛날 단군의 조선이 여러 단계를 거친 국가이므로, 고조선 등으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이 3개의 조선 중, 신조선은 흉노의 침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불조선은 중국 연나라의 장군 진개에게 패하여 영토를 천여리나 잃었습니다. 불조선은 복수하기 위해 중국 진나라와 연합하여 연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불조선은 중국과의 항쟁을 위해 철기를 도입하려 하였고, 중국에서 넘어온 조선 백성인 위만에게서 철기 기술을 도입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만은 오히려 불조선의 준왕을 공격하였고, 불조선은 위만이 다스리는 위만조선이 되었습니다.

이 준왕이 한반도를 다스리는 말조선으로 넘어와 월지국이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말조선의 공격으로 이 월지국은 망하게 됩니다.

3. 신채호가 서술한 남쪽의 나라 <말조선>

말조선은 3개의 조선 중 한반도를 다스린 나라입니다. 처음에는 도읍이 평양이였는데, 이후 국호를 <마한>으로 바꾸고 월지국으로 천도하였습니다. 이 월지국은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 때 빼앗기기도 했지만, 다시 탈환하여 <마한>이라는 한반도 국가 중심체를 구축합니다.

마한은 한반도의 종주국이였습니다. 마한은 북방항쟁에서 중국에게 패한 신조선, 불조선의 유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신조선의 유민들이 동부에 정착하여 진한이 되었고, 불조선의 유민들이 남부에 정착하여 변한을 형성합니다. 이로서 북방에서 활동하던 전삼한시대의 3개 조선은, 남방에서 다시 후삼한시대를 열게 됩니다.

이 삼한시대는 마한왕이 <진왕>이라고 자처하면서 <진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은 오랫동안 우리 역사자료로 참조되어 왔지만, 근거가 빈약하다고 해서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생각거리로 전락했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신채호의 3한 조선설이 고조선의 진정한 역사와 한반도 남쪽 <진국>의 정체를 밝힐 중요한 단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 출신의 역사 교수들은 이 3한 조선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고조선, 고구려사 역사 왜곡에 대항할 논리로 이 신채호 선생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님도 같은 맥락의 역사학을 연구한 적이 있다고 하네요.

 
고조선의 위대한 영광이 빛나던 시대에 실제 우리 민족의 주요 터전이였던 한반도의 역사는 200년 이상 아무런 자료도 없이 묻혀있다가 갑자기 삼한시대를 거쳐 백제, 신라가 튀어노왔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백제의 전성기인 4c에 백제인들은 중국 각지에 진출하였고, 일본 규수 지방까지 세력을 넓히며, 고구려의 수도를 공격하기도 하는 강대한 세력이였습니다. 그러한 세력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을까요? 백제 이전의 역사인 <진국>의 역사는 밝혀져야 합니다.

- 지금까지 서술한 신채호 선생님의 3조선설이나, 기타 내용들은 교과서에서 인정하는 부분이 아니라, 아직 검증되지 않은 가설 부분의 내용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실제 조선상고사 등 일제시대 민족주의 학자들의 저서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많이 적혀있다고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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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일 민족인가?

1. 단일 민족이 뭐야?

한민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단일민족이다.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이 말에 대해서 혹시 의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우리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주장한 사료는 <제왕운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삼한 70여 소국도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의심하곤 한다. 뭐야? 수백번의 외침을 당해 서로간의 민족이 섞였을텐데... 고대에는 국가 경계가 없어서 민족간 이동이 많았을텐데... 고대인들 스스로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등등 의심은 끝이 없다. 또 한국성 중에서는 중국성씨도 많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체 유일한 단일민족이라는 대책없는 자부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부터 보자. 민족이라는 개념은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특정한 학자 몇몇을 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국가라는 단위를 지역공동체의 핵심으로 간주해왔다.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은 있었어도 당시에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서 삼한일통을 해야하고, 우리는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의식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고려도 국가단위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조선도 역시 그러하였다. 조선시대 몇몇 실학자들은 발해를 민족국가로 보기도 하고, 단군조선에 대한 세세한 책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민족이라는 단위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라기 보다는 당시 그 시대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단군을 논한 것은 몽고가 침략한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고, 동명왕편 역시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발행되었다. 실학자들이 북방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역문제를 논한 것도 <청>이라는 여진국가가 등장하면서부터 국가의 정체성과 사대외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연관이 깊다.

민족을 단지 생물학적으로 파악한다면, 전 세계에 단일민족은 없다. 우리 나라의 민족구성도 북방계인 몽골계통과 남방계로 나뉜다. 남방계는 눈썹이 진하고, 썽꺼풀이 있는 큰 눈에 오똑한 콧날과 뚜렷한 입술 윤곽을 특징으로 한다. 북방계통은 그 반대인 경우이다. 우리 민족은 북방계가 80%정도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단일민족임을 주장하면 전 세계가 웃을 것이다.

2. 그런데 왜 단일 민족이야?

문제는 단일민족이라는 관점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일민족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즉, 우리 민족이 중국, 일본과 다른 독립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된 때가 언제인가를 기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청동기 시대부터 역사적 단위를 형성하였고,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주변국가와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그리고 주변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 점은 모든 역사적 기원은 고대 로마로부터 나오며, 로마는 고대의 호수이자, 중세의 바탕점이다라고 보는 유럽의 시각과는 다르다. 유럽에서 영국사, 프랑스사, 독일사, 이탈리아사는 모두 따지고 올라가면 노르만, 게르만, 로마시대로 연결되어 뿌리가 좁혀진다. 즉, 그들에게 국가단위의 근대국가시기는 있어도 민족단위의 역사적 기점은 찾아보기가 애매한다. 어찌보던 중세이전의 그들은 역사를 공유한다고 보아도 된다. 그들 각국의 고대사는 로마사이며, 중세사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나오며, 근대사는 서로 결혼으로 연결된 왕조들끼리의 결합속에서 이루어지니까...

우리는 이미 청동기 시대 이후 중국, 일본 등 주변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인도중심의 동남아사나, 이슬람 중심의 서아시아사와도 다르다. 우리는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의 아류라 스스로 인식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인식은 분명해진다. 즉, 우리 나름대로의 동질적 집단을 구성하고 독자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독립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식이다. 우리는 성씨가 중국성이던, 지방에서 올라왔던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민족은 생물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단일 민족으로서의 역사

단순한 역사기록으로 살펴보자. 통일신라는 통일을 이루고 나서 <일통삼한>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즉, 뿌리가 같은 삼한 민족을 영광스럽게도 신라가 통일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신라에서 이런 의식은 아직 미약하다. 이 일통삼한의식은 고려로 가면 보다 명확해진다. 제왕운기는 단군에서 비릇된 우리 민족의 유구성은 <삼한 70여국이 모두 단군의 후손>임을 명백히 강조한다. 고조선 전통이 이후 <한>을 계승하였다는 의식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는 칭호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라는 칭호는 개인적으로 별로 맘에 안들지만... 느려빠진 애국가라서 정말 맘에 안들지만, 우리 국가는 민족단결을 호소하는 애국가이다. 동해물이랑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호하고 애국하라는 뜻이니... 프랑스처럼 혁명가를 쓰는 것도 아니고, 네덜란드처럼 역사책을 통채로 읊는 노래도 아니다.

이러한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을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외침을 물리쳤다. 여진, 거란 등 북방민족들이 강력한 전성기를 누리다가도 망한것도 비교해 볼때, 고대와 중세의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과 위기는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의 단일민족이라는 생각 속에서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지켜온 자존심이 만든 결과이다. 몽골침입 때도, 임진왜란 때도 스스로의 터전을 지켜 싸워온 것은 백성들이다. 물론 그들이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임진왜란 때 노비들은 일본군과의 싸움보다 노비문서를 불지르고 해방되는 일에 더 열중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농경사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서는 같은 공동체 집단이 뭉쳐야 한다는 것을 정말 오랜 시간동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이러한 단일 민족에 대한 주장은 지나친 민족주의의 폐혜라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반박당하기 쉽다.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은 보수적이고,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세계화에 역류할 수도 있는 주장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반박 역시 서구적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의 주장하면 보수적이라고 오해를 받는다. 나치당이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만 지구상에 남기고 유태인을 말살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히틀러의 모순이다. 유럽 역사에서 로마인 이래 순수한 민족은 없으니까... 라틴, 게르만, 노르만, 마자르, 회교도 등등 민족적 구성이 다양하지 않은 나라가 서유럽에는 없다. 역사 자체가 치열했으니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적인 사회도, 역사적으로 민족적 구성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절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실제, 민족이라는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도 일제시대 무렵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4. 한국의 민족주의의 특수성은?

한국 민족주의의 특수성을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식민지배>속에서 민족개념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솔직히 전 근대사회는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사회 구성원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며, 단군의 후예라던가 하는 개념들은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였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전근대 사회에는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들은 양반과의 관계가 중요하며, 중인들은 신분상승이 중요했던 것이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느끼고 자부심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뒷받침되지 못한다. 같은 백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면 사라지고 민란, 반란, 반역 등 현실적인 문제가 더 대두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신분제가 철폐된 갑오개혁이후 표면적,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일제 강점기에 현실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절대 독립을 주장한 신채호에 의해서 <민중>이라는 개념과 국가를 무시한 민중들의 <무정부주의>라는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며, <의열단> 등을 통해 실제 민족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거친다. 역사적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해 낭가사상 등을 체계화 시키려고도 하였다. 박은식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수많은 위인전을 저술하고, 혼사상을 체계화한다. 신민족주의 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등은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의 해야할 바를 규정하려고 하였고, 민족정기, 얼사상, 심사상 등의 이론체계가 심화화기 시작한다.

즉,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구열강에 점령당한 일본에게 우리가 재정복 당했다는 수치심에서 시작되어, 민족적 기운을 다시 잡아 절대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성립된 정당한 것이다. 그것은 보수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 일제 시대 민족운동은 편협한 우리 것을 찾는 운동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 한국사의 특수성은 과연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운동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한국의 민족운동은 수많은 시련을 겪는다. 제국주의적인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일본이 주장한 자치론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필연적으로 여기면서도, 우리의 전통사상은 지켜내려는 노력은 민족운동의 주 흐름이었다.

5. 지금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민족>이라는 개념을 앞에 두고 표류하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를 왜곡하려 하고 있고, 고대사체계를 중국중심의 체계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화사상의 <민족>개념은 민족을 넘어 정치적 논리에서까지 진행되고 있다. 중극은 아시아의 중심에서서 미국과 같은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이 사실 동북공정의 최종 목적이다. 반대로 일본의 자민당은 철저하게 친미 방향으로 선회하여 미국과의 공조를 통한 아시아에서의 역할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6자 회담에서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면서 논리를 펼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내적으로 민족의 자존을 추구하는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외적으로는 당당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미국에게는 끌려다닌다. 세계화를 추구하는 시기에 FTA는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의견일치조차 보지 못한 상태이다.

지금 이순간의 한국사회는 갈등 속에 서있다. 과연 세계화 된 사회 속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중심의 사상을 가지고, 철저한 실리를 추구하면서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인가? 아니면 국가중심사상보다 민족중심사상으로 주변국에 대응하면서 민족적 자긍심과 한국사회만의 독특한 조화을 통해 다원화된 사회에 적응해나갈 것인가?

민족주의 논의는 과거만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며,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난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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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비문 조작설

내가 일직이 태왕의 비를 구경하기 위해 집안현에 이르러 여관에서 만주인 영자평이란 소년을 만나 필담을 나누었는데, 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비가 오랬동안 초래 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이 지방 영희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비문 가운데 고구려가 중국 토지를 침탈하였다는 자구들이 들어 있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것을 도부로 쪼개었습니다. 그 다음 일본인들이 이 비석을 차지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영업적으로 탁본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닳아 없어지거나 이지러진 부분을 석회로 떼어 발랐는데 이 때문에 그동안 인식할 수 없었던 자구가 도리어 생겨나 참된 사실은 삭제되고 위조된 사실만 첨가된 것 같습니다.

- 조선상고사, 신채호 -

사료해석 :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청시대의 만주족 성지인 만주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희가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1880년경 한 농민이 발견하였고, 영희는 그것을 탁본뜬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비석이 왜곡되어진 과정입니다. 일본인들이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비석을 탁본뜨고, 잘못된 부분을 위조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논쟁이 더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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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중국 정복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 진평 2군을 차지하고 통치하였다.

                                                                                         - 송서 제이전  -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대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 두 군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 양서 제이전  백제 -

사료해석 : 이 사료들이 사실이라면 백제의 전성기 때 백제 역시 중국을 지배한 것이 됩니다. 특히 이 사료들의 가치는 중국 사료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료는 중국에 의해 많은 반박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이 사료를 적은 <송, 양> 등의 국가가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로서 당시 북조와 대립한 상황이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입니다. 즉, 중국의 입장은 남조가 적대적인 북조를 멸시하기 위해 오랑캐인 백제가 북조 영역을 정복하였다는 허구적 사실을 사서에 적었다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신채호 등 우리 민족사학자들은 이것은 사실이지만, 중국 북조가 수치심에 적지 않아 남조의 기록에만 남았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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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초기 사상(1906)

오호라! 금일 우리 대한에 무엇이 있는가? 국가가 있건마는 국권이 없는 나라이며, 인민이 있건마는 자유가 없는 백성이며, …… 오호라! 지구상의 강국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나라도 한차례의 고통도 없이 능히 흥한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 크도다! 우리 한국의 오늘의 희망이요, 아름답도다! 우리 한국의 희망이오.  

오호라! 어떻게 하면 내가 2천만 동포의 피와 눈물이 항상 나라를 위하여 뜨겁게 방울 맺히게 할까? 오직 역사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무엇이기에 그 효능이 이처럼 신성하단 말인가. 가로되 역사라는 것은 그 나라 그 국민의 변천 성쇠의 실적이니, 역사가 있으면 그 나라가 반드시 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니 애국심이 없는 사람도 역사를 반드시 읽어야 하고, 애국심이 있는 자도 반드시 역사를 읽어야 하나니라.  

  - 대한협회 월보 -

참고글 : 대한협회는 헌정연구회와 대한자강회 등의 정신을 이어받아 1907년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성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구성원 들은 신민회로 흡수되었고, 남은 구성원들은 점차 친일적인 성격으로 변하여 후기에는 약간 초기와 성격을 달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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