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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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근현대사 이야기 (NO.8)

번외편 : 마르크스로 <독일철학>과 <사회주의> 이해하기 (3)

- 마르크스 이전의 독일 역사 : 헤겔의 인생극장~

18-19세기 독일의 철학을 <관념철학>이라고도 하고, <고전철학>이라고도 부르곤 하지.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두 사람의 영향력 때문이야. 자... 여기서 유명한 말 한마디를 읽으면서 그 2명의 철학자가 누군지 한번 보자.

고대 <로마제국>은 유럽의 호수였다. 모든 고대의 문화를 흡수한 뒤, 유럽문화의 원형을 만들어 곳곳에 흘러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들어와 독일 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있었다. 그 호수는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서양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바로 이 두사람이다. 칸트 & 헤겔...

그럼 지금부터 칸트의 철학을 종합하여 <방대한 철학>을 완성시킨 헤겔이란 인물의 일생에 대해 알아볼꺼야. 물론, 헤겔 이야가 끝나면 제자인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일단, 아이유부터 보면서 안구 정화를 한 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고고...

헤겔, 이 철학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세무국 재무관이었어. 뭐, 공무원 집안이니 학비 걱정은 없이 학교를 다닐 정도는 되었겠지.... 웃~ 돈 좀 있는 중산층이닷...

처음에, 헤겔은 신학 대학에 진학해서 신을 섬기며 살겠다고 생각했었나봐. 그런데,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오히려 철학이 더 재미있다는 걸 느낀거지. 점점 어렸을 때의 맹세는 사라지고... 이제 이런 자기 합리화를 하겠지?

저기 굳이 신학을 안해도요... 철학을 하면서도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되지 않나요??? 아,, 어쩌나...

그래서 청년 시절 신학할까, 철학할까... 무진장 갈등했다고 하더라구... 아무튼, 이 사람이 철학을 하더라도, 신앙심을 완전 버리지 못했을 거라는 정도는 짐작이 가겠지?

그런데, 철학을 공부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깐, 정말 당대에 잘나가는 대박~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어. 일단, 동갑내기인 유명한 문학가 <휄더린>.... 또, 음악가 베토벤과도 동갑이었구. 또, 5살 아래인 천재 철학자 <셸링>도 헤겔에게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었지... 암튼, 잘나가는 친구들은 주변에 무조건 많아야돼.

청년 헤겔은 휄더린이랑 같이 책을 읽고 논쟁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친해졌어. 피끓는 문학을 접하다보니, 자유니, 혁명이니, 세계시민이니.... 이런 말들도 많이 듣게 되었지. 그래서인지 소위 말하는 <좌파동아리>도 가입하고, 거기서 술먹고 토론하고, 노래하고... 했었지. 소위 말하는 낭만적인 대학생? 뭐, 그런 거야.

그런데 어느 날, 아니 어느 1789년.... 프랑스에서 엄청난 대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헤겔은 그 말을 듣고 <굿굿굿~>을 외쳤겠지. 헤겔이 평소에 생각하던 자유니, 평화니, 인간존중이니... 그런 단어들이 <프랑스>에서 막 따끈따근하게 날아왔거든....

헤겔은 프랑스 혁명이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어. 그래서 소년구락부... 아니 아니 정치클럽의 회원이 되서 혁명을 찬양하고 다니기 시작한거야.

음... 보통 서양사 하는 분들 중 나이드신 분들이 <구락부>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건 그냥 <클럽>이라는 말이니깐 역사 공부하다가 <구락부>라는 말 나오면 걍 <단체, 클럽> 뭐 그런 뜻으로 해석하길 바래... <구락부>는 일본식 표현의 잔재거든...

암튼 말야. 헤겔은 친구들과 모여서 <루소 만세!>, <프랑스 만세!>를 외쳤지.

지가 무슨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주인공도 아닌데, 들판에 자유의 나무를 심어놓고 막 흐뭇해 했던 거야. 또, 프랑스의 혁명가이자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면서 스스로 <자유인>이라는 감상에 젖어 있었겠지. 헤겔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로운 정신이 곧 <세계정신>이라고 믿었던거야.

 

<프랑스의 국가 : 라 마르세예즈>

헐... 근데 그 <프랑스 자유군>이 헤겔의 청춘에 태클을 걸었어.

프랑스 혁명군이 독일 예나 지역으로 진격하자 헤겔은 전쟁의 참혹함을 보게 되었거든. 일단 혁명군이 헤겔의 집을 약탈했지. 안그래도 공부한다고 아버지 유산을 다 까먹었는데, 약탈까지 당하니 헤겔은 점점 거지가 되가는 거야. 거기에 문교부 장관인 괴테가 주던 생활보조금도 전시중이라 끊겨 버렸어. 에휴... 그게 헤겔에게 닥친 현실 생활의 <세계정신>이었던거야.

그 와중에 출판사에서는 헤겔을 압박하고 있었어. 포탄이 날아오든, 약탈이 자행되던 간에 쓰고 있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은 빨랑 완결하라는 거였지. 에구... 헤겔은 그 전쟁 중에도, 본인이 약탈당하면서도 19세기 최고 대작이라고 불리는 <정신현상학>을 완성하고, <세계정신>이 어쩌구... 하는 책을 출판한거야... 그리고나서 출판료 올려달라면서 편집장이랑 대판 싸우고 돌아다녔다나.... 하는 일화가 있지. 뭐, <정신>이 어쩌고 뭐고... 고상한 말도 중요하지만 돈은 받아야 굻어죽지 않고 살기 때문이지.

이런 헤겔의 상황을 불쌍하게 여긴 친구가 헤겔에게 고등학교 교장 자리를 던져 주었어. 이 때부터 헤겔 인생이 역전되기 시작한거지. 일단, 삐까번쩍한 직장이 있으니, 사람들 대우가 달라지지 않겠어?  나이 마흔에 명문가 딸과 결혼해서 행복한 시절이 시작되었구, 몇 년뒤부터 교수직도 얻게 된거야. 인생 역전~ 대박~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하자마자 2년만에 인기 강사가 되었어. 뭐, 대학 강사 이전에 미리 공부 많이하고 준비한 게 있으니 인기가 쑤욱~ 올라가기 시작했지. 거기에 운좋게도 철학자 피히테가 죽게 된거야. 그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까지 되면서 최고 철학자 반열에 오르게 된 거지. 나중에 베를린 대학의 총장까지 하게 되니, 뒤로 갈수록 대박 인생이 된 인물인거지.

- 칸트 철학의 정리자 : 헤겔의 <정신현상학>

앞 시간에 정리했던 칸트 알지? <헤겔>은 칸트 철학을 연구해서 논문을 썼던 사람이야. 독일 관념론의 계보는 칸트 - 헤겔로 이어지고, 이 헤겔 철학을 유물론으로 전환시킨 사람이 바로 뒤에 다룰 <마르크스>인거지.

당연히 헤겔은 칸트 철학의 위대함을 몸소 배운 사람이야. 그런데 말야. 헤겔은 칸트 철학의 <핵심> 부분인 <현실세계와 신앙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좀 달랐어.

칸트는 기성 종교인들이 오랜시간동안 쌓아온 종교 교리들을 <도덕>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걸 정말 싫어했다고 말했지? 다시 한번 칸트가 생각한 현상과 종교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볼까나?

칸트 : 솔직히 말하자면 말야. 지상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예수는 이성적인 사람이였거나, 정이 많은 사람이었을거야. 얼마나 온화하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많아?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는 참 따뜻한 사람이잖아.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은 그런 면을 쏙~ 빼 버렸어. 예수가 떠난 뒤, 교회가 만든 많은 내용들을 무조건 믿으라고 하고, 교회에 복종하라고 하잖아. 그리고, 그런 절대적인 복종이나 믿음을 <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도덕이라는 건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도 증명할 수 없잖아? 교황이 만든 법이 하나님이 만든 법이라는 걸 누가 증명할건데?

생각해봐. 철학은 <지상>에서의 일을 탐구하는 거야. 인간이 알 수 있는 유한한 세계의 것들만을 <지식>이라고 생각해야돼. 인간이 알 수 없는 것들은 하나님이 알려주실 거니, 우리가 고민할 필요도 없어. 한마디로 신앙은 단지 믿음일 뿐이지, 절대적인 지식이 아니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서 알아낸 것들이 <지식>일 뿐이야. 지식은 우리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인 거지.

자,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헤겔은 신학대학에 진학하고 싶어할만큼, 종교적인 마인드가 강한 인물이었지? 칸트를 아무리 존경했다고 하더라도, 생각이 좀 달랐을거야. 그럼 헤겔의 생각을 한번 볼까?

헤겔 : 칸트 형님의 말이 맞는 말인데 말야. 종교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버리면, 문제가 하나 생길거야.

인간은 현실을 넘어서서 무한하고 궁극적인 실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잖아.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아?  내 스스로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하는 것도 <철학>이 해야 할 일이야. 그리고 그렇게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끝에 <종교>가 있는 거구...

인간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잖아? 그니깐,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생각하면서 살 수밖에 없어. 신의 존재를 믿기도 하고 비현실적인 것들도 생각하기도 하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람들은 이 두가지를 모두 생각하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나 : 자아>를 생각하곤 해. 그런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철학>이 아닐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인간의 <정신>이야. 현실, 도덕, 종교와 같은 것이 진리라는 것을 판단하는 것도 우리의 <정신>이지.

에구... 너무 심오하다. 헤겔의 말이 뭔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그럼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을 인용해서 좀 체계적으로 이야기해 봐야겠다. 헤겔은 <정신>이 3단계를 거쳐가면서 완벽한 정신, 즉 <절대정신>으로 간다고 말하고 있어.

정신 1단계(무의식적인 도덕성) : 예를 들면 이런거야. 누군가 <사랑>하고 사세요... 라고 말할 때, 어린 아이들은 사랑이 뭔지 구체적으로 모르지?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자신을 아낄 때 그냥 그게 사랑이라고 느끼지. 즉, 감각적으로 도덕적인 것들을 판단하는 거야. 이게 원시적인 정신, 즉 <감각적인 정신>이지.

정신 2단계(도덕성의 자각) : 그러다가 학교에 다니고, 공동체 문화를 익히고 하다보면 점점 <사랑>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해서 결론을 내리게 되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의식적으로 실천하려고 할거야.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랑을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되지. 이 때의 정신은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정신>이 되는 거지.

정신 3단계(종교적 충만함) : 그리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가슴에 뿌듯함과 충만함이 채워지고, 절대자에게 다가가는 단계, 즉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단계를 알게 되지. 그게 바로 <진리>의 단계이며, <정신>이 현실과 통일되는 단계야. 이렇게 절대적 진리를 깨닫게 된 정신를 <절대정신> 이라고 해.

자, 헤겔이 말한 정신인가 뭔가를 3단계로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거다. 

좀더 압축하면, 인간의 <정신>은 무의식적인 것, 의식적인 것, 절대적인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거지. 그럼 헤겔식으로 따지면 역사나 문화, 종교도 <정신이 발달하는 것> 이 되겠지? 이 부분에서 헤겔의 이야기를 정리해볼까?

헤겔 :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정신>이 발달해가고 있는 과정이야. 그런데, 인간 <정신>의 최종 3 단계는 <절대자에게 다가가서 절대적 진리를 아는 것> 이라고 했지?

그니깐, 역사의 목적은 결국 <신의 목적>을 따라가는 거야.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발전하면서 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점점 더 잘 알게 되었지. 신이 원하는 건 인간이 <절대적 진리>를 깨닫는 거야. 그 절대적 진리는 도덕일 수도 있고, 자유일 수도 있지.

근데, 아주 옛 사회에서는 그런 걸 몰랐어.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구속해서 자유를 빼앗고 노예로 만들기도 했지. 또, 법이라는 걸 만들어서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도 했어. 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신의 섭리>를 알 정도로 발전하면 그런 구속들을 점점 사라지게 되지. 신이 진정 원하는 건 인간의 <자유>일테니까... 그럼 현실 세계에서 필요한 건 뭘까? 바로, 인간이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거야.

그럼 모든 인간이 가장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제도를 가진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그건 모든 개인에게 자유를 허용하고, 국가가 그것을 지켜주는 나라야. 따라서 왕이 있어도, 왕이 국민의 법을 지키는 <제한된 군주제>가 필요해.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국민의 자유를 지켜주어야 하고, 법은 자유민들에게 관대해야 하지. 재판도 다양한 배심원들이 함께 진행해야 하며, 국가의 중요한 일도 의회에 모인 국민대표가 함께 결정해야해.

물론, 역사가 다시 <발전>하면 기존의 제도에 뭔가 더 첨가되고 바뀌어서, 더 좋은 제도들이 등장하겠지.

뭐, 헤겔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역사>와 <국가>를 생각했던거야. 솔직히 프랑스 혁명의 세계정신이나 자유를 이야기하다가, 또 <군주제>를 인정한다는 식으로 말 바꾸기를 하니깐, 이 인간이 좀 이중적으로 보이기도 하겠네.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써 놓은 책이 <법철학강요>라는 책이었어.

- 고전 철학의 종결자 : 변증법적 발전 이론

자, 이번에는 헤겔하면 떠오르는 단어, <변증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변증법이란 이런거야. 하나의 현상이 존재(정명제)하는데 그것에 반대하는 현상(반명제)이 있다면 이 두가지를 절충하여 새로운 또 하나의 해답(합명제)을 찾는 거지. 대체 뭔 소리여? 오늘 아이유 스페셜이라고 했으니, 아래 아이유를 예로 들어 한번 살펴보자.

자, 조금은 이해되겠니...

원스 업펀어 타임 코리아... 쉽게 말해서 한 때... , 까칠, 도도, 블랙, 막말 서인영이 (스스로 우기기로는) 예능의 대세였지. 그게 기존의 대세인 정(正)이야.

근데, 갑자기 귀염둥이 아이유가 가요계를 평정하고 50억 소녀가 되서 대세가 되었어. 헐...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네. 새롭게 등장한 아이유가 반(反)이야.

자! 그럼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서인영의 선택은? 어느 날 신상 도도 까칠녀 서인영이 알록달록 아이유 잠옷을 입고 마시멜로우 춤을 추고 있었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한거지. 이게 바로 합(合)이야.

하지만, 내년, 내후년이 되면 아이유 스타일은 시대흐름에 밀리고 또 다른 컨셉의 가수가 예능의 대세가 되겠지? 그럼 또 반(反)이 나오고, 또.... 합(合)이 나오고... 뭐, 약간 억지스런 예이지만 쉽게 얘기할려고 가져다 붙여본거야...

자 그럼 이제, 진짜로 우아하게 변증법을 정리해보자.

정(正) : 칸트라는 철학자가 <인간의 경험>이 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어. 이게 기존의 이론이고, 이게 처음에는 맞는 말 같다고 해봐. 맞다는 걸 한자로 정(正)이라고 하자.

반(反) : 근데, 종교론자들은 경험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진리>와 같은 개념은 더 중요하다고 고 생각한거야. 이걸 반대된다는 뜻의 한자인 반(反) 이라고 할께.

이 <정>과 <반>을 어떻게 정리해야 더 나은 철학적 해답이 나올까?

합(合) : 그래서 헤겔은 <정>과 <반>이 합(合)쳐서서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지. 이 두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단어를 <절대 정신>이라고 표현한거야.

변증법은 이런 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지식(정)이란, 새로운 상태의 지식(반)을 만나면서 변할 수밖에 없게 되는거지. 그럼 이 정과 반이 논쟁을 하면서 새로운 단계의 해답을 제시(합)하는데 그 속에서 사회는 <발전> 한다는 거야.

사실 변증법은, 서양 고대부터 있었어. 뭐, 소크라테스니 소피스트들이니 하는 사람들도 대화를 풀어나가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중 하나였지. 물론, 서양 중세시대에도 <변증법>이란 건 있었어. 특히, <아벨라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시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이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해.

중세 시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했어. 아니, 안다기 보다는 어떻게든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거지. 그래야 교회 활동이 정당하다는 것도 증명되지 않겠어? 그런데, 그걸 증명하려고 했더니 서로 모순되는 2가지 사상이 있어서 좀 힘들었어. 그 2가지 사상이란 무엇일까?

그중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진리(이데아)를 강조했던 플라톤의 사상이야. 또 하나는 현실 세계의 경험(중용)을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었지.

이 두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했다구해. 세상에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 라고... 

하지만, 그 절대적 진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상세계에 있느냐, 아니면 현실세계이냐... 라는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절충하기가 매우 어려웠지.

이런 모순되는 생각들을 종합해서 신의 존재를 합리화 시킨 사람이 중세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였다나 뭐래나... 그가 <신학대전>이란 책에서 써 먹은 변증법의 내용을 한 번 보면서 중세시대 변증법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까나... 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도들에게 써먹기 위해 질문과 답변을 해놓은 말들을 짧은 변증법으로 풀어보자.

질문 1 : 저기... 인간의 경험과 신의 섭리 중에 무엇이 더 현실 세계에서 유용한 것일까요?

1. 정 : 지상에는 감각적인 경험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은 중요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실재론 수용)
   2. 반 : 하늘에는 신의 섭리가 있는데 이것은 지상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이다.(신플라톤 학파의 유명론 수용)
   3. 합 :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신의 섭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으므로 2가지는 모두 중요하다.

질문 2 : 저기... 그럼 자연적인 경험과 신의 은총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닌가요?

1. 정 : 자연적인 경험과 진리는 항상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
   3. 합 : 자연의 진리는 초자연의 진리에 의해 보완되는 것으로, 신의 은총은 자연과 대립(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다.

질문 3 : 그럼 우리가 행복하다는 것은 지상에서의 행복인가요, 천국에서의 행복인가요?

1. 정 : 인간의 행복은 지상의 행복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행복>은 인간 삶의 목표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카톨릭에서는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플라톤)

   3. 합 : 자연속의 행복도 중요하나 신앙과 자애라는 카톨릭의 덕목은 더욱 중요하다

질문 4 : 그럼 교회는 세속의 일과 영적인 일 중에 어떤 목적을 갖고 운영되는 것일까요?

1. 정 : 국가권력은 세속의 필요에 의해 합리적으로 결정될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교회는 영적인 필요에 의해 인간을 신심으로 인도한다. (플라톤)

   3. 합 : 신과의 생활이라는 더 높은 초자연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교회는 초자연적 목적에 더욱 힘써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정, 반, 합을 이용해서 교묘히 교회 이론을 정당화 시킨거지.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변증법에는 역사가 <발전>한다는 내용은 없지? 그냥~ 두 철학자의 사상을 박수받을 만큼 논리적으로 햡쳐놓은 것 뿐이잖아.

반대로 생각해보자. 헤겔의 변증법이 다른 사람들의 변증법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이유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서 <역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라는 뉘앙스의 단서를 박아놓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이 단서를 바탕으로 역사의 발전 단계를 명확하게 구분해놓은 제자가 바로 <마르크스> 이거든. 그럼 다음 장에서 드디어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한번 다루어 볼까나?


-  이 책을 참조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


독일 관념론 철학 (양장)
국내도서>인문
저자 :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 박만준역
출판 : 지만지고전천줄(지만지고전선집) 200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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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과 독일관념론
국내도서>인문
저자 : 권기철
출판 : 철학과현실사 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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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주의와 독일 관념론
국내도서>인문
저자 : 베르너 바이어발테스 / 조규홍역
출판 : 누멘 201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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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히테, 쉘링, 헤켈
국내도서>인문
저자 : 로타 엘라이 / 백훈승역
출판 : 인간사랑 2008.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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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비판의 철학
국내도서>인문
저자 : 강순전
출판 : 철학과현실사 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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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역사 철학 (양장)
국내도서>인문
저자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 이한구역
출판 : 서광사 2009.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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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 이론의 근본구조 - 헤겔의 논리학에 있어서 변증법적 범주발전의 재구성과 수정
국내도서>인문
저자 : 디터 반트슈나이더 / 이재성역
출판 : 다산글방 2002.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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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계급의식 - 맑스주의 변증법 연구
국내도서>인문
저자 : 게오르그 루카치 / 박정호 외역
출판 : 거름 199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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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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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퍼즐

  1. 고려 태조가 옛 고구려 땅을 되찾기 위해 펼친 정책.
  2. 조선 인조시대,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하여 벌었던 전쟁. 삼전도의 굴욕과 관련있다.
  3. 고대 폴리스에서 군사적, 종교적 거점이였던 곳. 아테네, 포세이돈 등을 모시던 신전들이 유명하다. 헤라클레스는 이곳에서 12가지 신탁을 받았다.
  4. 도리아인이 중심이 되어 만든, 고대 그리스의 국가. 귀족 중심의 군국주의 체제로 **** 식 교육은 강압적인 군사문화를 상징한다.
  5.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모두 영웅인 헬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 라고 불렀다.
  6.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7. 스파르타, 아테네 등 폴리스를 이룬 소국 국가들을 묶어서 표현한 용어. 페르시아 전쟁 때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루었으며, 스스로를 헬레네스라고 불렀다.
  8.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 철학자. 토끼는 앞선 거북이를 절대 추월할 수 없다는 논증법으로 유명하다.
  9. 소크라테스의 제자. 철인정치론, 국가론, 이데아론 등이 유명하다
  10. 페르시아 3차전쟁 때, 그리스의 병사가 이 전투에서 이긴 후, 약 40km를 달려서 승리를 알리고 죽었다고 한다.
  11.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간의 전쟁. 이후 폴리스간의 대립과 분쟁이 계속되었다. ****** 전쟁.
  12. 고대 그리스의 12신을 모시던 아크로폴리스가 있던 지역을 일컫는 말. ****의 12신이라고 부른다.
  13.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는 이 사람을 모시기 위해 3번을 찾아가 삼고초려를 했습니다.
  14. 상대적 진리를 주장했던 그리스의 궤변학파. 웅변과 수사학을 중시했으며, 제논 등이 유명하다.
  15.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
  16.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 72개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자료를 받아, <물질은 질량에 내재한다>는 객관적 진리를 입증하였다. 중용과 행복론의 철학을 추구하였다.
  17. 개화기에 우리 나라 바다 근처에 나타난 서양 배를 이르는 말

세로 퍼즐

  1.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치려고 한 효종 임금의 정책
  2.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에 2차에 걸쳐 조선을 침입한 전쟁
  3. 일리아드, 오디세이의 저자
  4. 의학의 아버지. 의사 윤리 강령은 오늘날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의 의학자.
  5. 고대 그리스에서, 산지가 많아 각각 흩어져 있던 촌락 도시를 일컫는 말
  6. 도편추방제를 제정하여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틀을 다진 인물
  7. 고대 아테네의 수호여신인 아테나 여신을 위해 만든 신전
  8. 조선시대, 상평통보와 같은 동전을 부르는 말입니다.
  9.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하면서, 고대 아테네 민주정치의 전성기를 이끈 지도자. 수당제, 공직추첨제 등의 직접 민주주의 방식이 유명하다.
  10.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시민들이 회의를 하고, 시장을 열기도 했던 광장. daum 사이트에도 토론 공간을 이렇게 부른다.
  11.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동족(헬레네스)와 다른 이방인을 이렇게 불렀다.
  12. 고대 그리스 본토에서 발달한 청동기 문명. 크레타를 정복하고,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도리아인에게 멸망하였다.
  13. 1970년대, 농촌에서 가난을 몰아내고 농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실시한 운동.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이 운동의 정신이 곧 국민 정신임을 강조하였다.
  14.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15. 고대 그리스인들이 동족의식을 과시하기 위해 4년에 한번 열었던 민족 축제. **** 제전
  16. 그리스 신화의 주신. 독수리와 번개창이 유명하다.
  17.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 받은 자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은 관직임명장이 돈을 주고 거래되었습니다. 이것을 *** 이라고 합니다.
  18. 미케네 문명에게 멸망한 고대 소아시아 문명. 목마를 탄 병사들이 이 문명을 멸망시켰다는 ***의 목마 이야기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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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26.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역사 일반>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 378년, 아시아 훈족의 기마군단에 내몰린 (1) _________ 일족이 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관리들은 이들의 재산을 빼앗고, 여인들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게르만족들은 로마에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동로마의 발렌스 황제는 게르만을 제압하려다가 참패를 당하고 죽고 만다.

- 새로 등극한 (2)_____________ 는 게르만의 이민족과 로마인을 묶어줄 하나의 이념으로 크리스트교를 생각하였다. 그는 테살로니카 폭동으로 로마인들이 이민족 관리들을 찢어죽이자 로마인들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그리고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그의 일생은 제우스교 등 전통신을 믿는 이단 귀족들과의 전쟁이었다.

- 새로운 국왕 호노리우스는 전통신을 믿는 자였다. 테오도시우스의 충신이자 (1)________ 일족의 왕 (3) __________ 는 크리스트교를 부정하는 새 왕과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는 교회 시설을 제외한 모든 로마 제국을 불질러 버렸다. 로마는 불타 버렸다.

- 로마가 불탔다는 말을 들은 (4) _____________ 는 너무나 슬펐다. 크리스트교를 통한 이념 통합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신국론>을 저술하기 시작한다. 모든 죄를 크리스트교인에게 뒤집어 씌우는 로마인에게 그는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사상으로 교회를 지켜야만 했다.

- (2) ____________ 의 딸, (5) ______________은, 아버지의 이념을 지켜낸 마지막 로마의 여제였다. 그녀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등 여러 공의회를 열어 크리스크교 교리를 확립시켰고, 망해가는 로마의 백성들을 크리스트교 이념으로 묶어놓으려고 했다. 그녀의 시대는 로마 최후의 전성기였다. 게르만인들도 그녀만큼은 존중했고,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뒤, 로마는 곧 게르만인들에게 망하게 된다.

 

1.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인물(민족)으로 틀린 것을 골라보세요~
① 서고트
② 테오도시우스
③ 알라리크
④ 아우구스투스
⑤ 갈라 플라타키아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 십자군 전쟁으로 고대 로마의 문화 유산이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유산의 핵심은 <아리스토텔리스>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중세 유럽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인 사고 방식이 신앙중심의 기독교 사고와 충돌하게 된 것이다.

- 십자군 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프랑스>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인 사고가 제일 먼저 퍼지기 시작했다. 파리의 신학자 ___________ 는 <신의 존재를 인간이 알 수 없으니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교황의 명제를 깨 버렸다. 그는 <왜 신앙와 이성은 양립해야만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논증법>을 이용하여 신앙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변증법>이었다.

- 이후, 프랑스에서는 교회에 대한 다양한 운동이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이단을 사냥하는 마녀사냥과 이단종교 심판이 가장 심했던 곳이 프랑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반란과 시민반란, 아비뇽 유수와 같은 교황 납치 사건을 일으켰던 곳도 프랑스 지방이었다. 그리고, 교회가 하지 말라던 <세속적 상업 이익>을 챙기면서 중세 은행을 가장 먼저 만들었던 곳도 프랑스 지방이었다.

 

2. 위 지문에 들어갈 철학자는 누구일까요?
① 율피아누스
② 유겔리우스
③ 아벨라르
④ 토마스 아퀴나스
⑤ 시벨리우스

 

3. 다음 작품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 이 예술 사조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중립국인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된 문화 운동으로, 기존의 예술 구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anti-art'의 성향을 띠고 있다. 이 운동은 미국으로 퍼져 20세기를 상징하는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 활동을 지칭하게 된다.

- 위 작품은 대표적인 창조가인 마르셀 뒤샹의 작품으로 <샘>과 <자전거 바퀴>이다.

 

3. 위 작품과 같은 예술 사조를 무엇이라고 할까요?
① 야수파
② 입체파
③ 초현실주의
④ 추상파
⑤ 다다이즘
⑥ 액션 패인팅

 

4. 다음 조직의 구성표를 보고 물음에 답해주세요~~

 

4. 위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처음부터 독일, 일본, 소련, 이탈리아의 가입이 가능했다
② 현재 이 기구의 사무총장은 한국인이다.
③ WHO는 이 기구의 산하 기구에 속한다.
④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를 총회의 결의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이 있다.
⑤ 미국과 영국에 의해 발표된 포츠담 회담에서 최초로 구상된 조직이다.

 

5. 다음은 이슬람 교도의 5대 의무입니다. 잘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 5주 : 다섯 개의 기둥

1번째 기둥 : 샤하다(신앙고백) - 신앙 고백을 합니다.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 곧 예언자이다.>

2번째 기둥 : 살라트(예배) -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3번째 기둥 : 자카트(종교세) - 소득의 일부분을 양심에 따라 기부합니다.

4번째 기둥 : 샤움(단식) -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 그 한달동안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단식합니다.

5번째 기둥 : 하지(성지순례) - 일생에 한번 (1)__________를 방문합니다.

 

5. 위 빈칸의 (1)에 들어갈 성지를 정확한 한국식 발음으로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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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3화. 예수는 왜 유대인들에게 모함을 받아야 했을까?

1. 멸망한 유대인들의 방황의 세월

자, 이제  유대인의 나라는 없다. 오로지 남은 것은 그들의 역사를 기록한 <약속> 뿐이다. 우리가 구약이라고 알고 있는 책은, 신약과 대비하여 <옛 약속>이라 부르는 역사서일 뿐이었다.

솔로몬 왕 이후 분열된 헤브라이인들는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노예로 팔려가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 오리엔트를 처음 통일한 아시리아 역시 헤브라이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헤브라이인들은 탄압을 받을수록 <약속>된 <구세주 :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오로지 헤브라이만의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결코 자비로운 분이 아니셨다. <약속>과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끝없는 자비를 베푸는 하나님이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하나님이었다.

아시리아가 망하고, 오리엔트 사회는 <페르시아>에 의해 재통일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은 가혹한 통치를 하던 이전 국가들과 달리 각 민족의 자치를 인정하는 <관대한> 통치를 하였다. 그 이유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하는 오리엔트에서 모든 민족을 탄압한다면, 이전 왕조들과 같이 쉽게 망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 페르시아 왕국의 국제정책에 의해 유태인들은 드디어 노예와 같은 상태에서 해방이 된다.

그러나, 해방되었다고 어딜 갈 것인가? 유태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모세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도 없었고, 국가를 세울 만큼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페르시아가 오리엔트를 통일한 시기는 동네 추장들이 다스리는 부족국가시대가 아니였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하는 이상, 헤브라이인들에게는 국가 수립의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기원 전후, 지중해를 넘어 영역을 넓히던 강대국 로마에 의해 유태인들은 또 다시 <로마인>에게 자유를 빼았겼다.

2. 예수의 시대(서력)가 시작되다.

우리는 보통 예수가 태어난 기원 1년을 서력의 시작으로 계산하여 연도를 세고 있다. 그러나, 유대 사학자들은 역사적 연구를 바탕으로 예수가 기원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헤브라이가 유대와 이스라엘로 갈라진 뒤 실시한 유대의 호구 조사를 보면,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는데, 그 시기는 기원전 4세기 경으로 보고 있다.

자, 그럼 이제 <예수>의 일생 얼마나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이었는지 살펴보자.

예수가 태어난 팔레스타인 지방은 옛 헤브라이 왕국의 거점으로서 <유대인의 성지>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약속한 구세주가 등장하여 헤브라이를 핍박하는 민족들을 박살내고, 하나님의 심판을 알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 계시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여호와에게 직접 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아브라함 이후 오랜 세월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것이기도 했다. 훗날, 성문으로 된 것과 전승된 것을 합하여 <탈무드>라는 율법책으로 정리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율법의 내용 중 구전되어 전해진 것이 많았다. 따라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율법 사이에 마찰이 생길 경우, 저명한 율법학자(랍비)에게 율법의 해석을 물어야 했으며, 랍비는 유대교라는 종교에서 최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유대교의 테두리에서 등장한 <예수>는 기존 랍비들과 다른 사상을 전파하였다. 하나님이 헤브라이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으로서 <율법>보다 앞선 <사랑>을 가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종교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철저한 시민권 개념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성인 시민 남자만 인간으로 취급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재산이나 정복사업 참여(군복무) 등을 기준으로 성인 남성에게 시민권을 주었다. 그것도, 로마를 벗어난 동맹시나 주변 동맹국은 제한된 시민권을 부여했을 뿐이다. 그런데, 남자도 아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니?

유태인도, 그리스인도, 로마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평등하단 말인가?

이건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다.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예와 여자가 없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 아닌 빨래나 직접 하고 있어야 했을테니깐... <평등>이라는 말이 당시 지도층에게 얼마나 생소하게 들렸을까?

따라서, 로마의 지배층과 유대교 랍비들은 예수의 말을 허황된 이상주의로 생각하였다. 어떻게 노예와 여자들, 정복국의 사람들이 평등한 채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단 말인가? 로마 제국 자체가 정복사업으로 팽창한 국가였기에 예수의 사상은 도무지 말이 안되었다.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처음 예수의 사상을 들었던 로마 지배층들은 미친 소리라며 탄압은 커녕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로마의 지배층과 유대교 지도자들은 한 목소리로 예수를 탄압했으며,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3. 예수를 죽인 사람들...

역사서와 성경을 토대로 보면, 예수가 죽은 건 유대인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대인 지배층은 예수의 사상이 하층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자 그를 모함하였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려고 한다며, 빌라도에게 고자질 한 것이다. 로마는 이 이야기를 듣자 바로 내란죄, 반역죄 등을 모두 적용하여 예수를 극형인 십자가 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사람들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오랜 유럽의 역사에서 유태인들의 잘못이 있을 때마다 이 날의 일이 단골 메뉴로 거론되곤 한다. 중세와 근대, 현대까지도...

그런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단지 예수가 자신들의 기존 입지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이유로 죽인 것일까? 너무 인기가 많은 <슈퍼스타>여서? 역사적으로 더 깊게 생각해보자.

유대인들이 2차대전이후 국가건국의 이념으로 삼았던 <시오니즘>은 그 기원이 헤브라이 왕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결코 다른 민족의 신이 될 수 없으며, 약속된 천국과 약속된 땅은 모두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성경>에서 제시된 <약속>은 유대인들과 하나님 사이에 <계약관계>로 성립된 약속이었다. 그 계약을 처음 성사시킨 사람은 아브라함이었고, 따라서 구원의 약속은 아브라함 족속에게만 해당되었다. 이후, 모세가 여호와의 계시를 받으면서 그 계약은 <헤브라이 민족>에게만 국한된 계약임을 다시 확인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계약에 의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며, 계약에 대한 의무는 <헤브라이인> 즉, 유대인에게만 있다. 유대인이 계약을 믿는 한, 여호와는 유대인만의 여호와인 것이다.

그리고, 오랜 헤브라이인들의 고통은 하나님이 계약을 잘 지킬 수 있는 것인지 알기 위해 내리는 고난일 뿐이다. 그 고난은 10년일수도, 2000년일 수도 있다. 그 고난이 끝날 무렵 신은 새로운 세상을 알리기 위한 <메시아>를 지상에 내려보낸다고 약속하셨다. 메시아란, 우리말로 구세주란 뜻이다. 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은 그 약속을 믿고, 계약에 의해 약속된 땅(팔레스타인)에서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과연 메시아일까?

유대인 지도자가 보기에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를 이야기한다. 유대인에게 새 땅을 준다는 약속이 아니라 인류 구원같은 이상주의를 말한다. 또 구전 율법을 무시하고 치유술사나 마법사와 같은 기적을 행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족보를 믿을 수가 없다.

헤브라이 민족의 메시아는 다윗과 솔로몬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약속이 있었다. 구약에서 다윗 왕은 훗날의 메시아를 언급하였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메시아가 이들 위대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는 심판의 메시아였다. 메시아는 헤브라이 민족을 구박하는 모든 지상의 이단자들을 무찌르는 잔다르크와 같은 무력의 메시아인 것이다. 원수는 죽이고, 정의는 살리며, 이방인은 정화시키는 메시아... 그래서 빈부차도, 가난도, 병도, 재난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메시아인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예수는 메시아로 볼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그가 왜 메시아인가 의문을 품었다. 사랑 운운하면서 제자들과 이야기나 나누고, 정체모를 백성들과 어울려 다니는 자였기 때문이다. 유대인 지도자 들이 예수가 로마를 위협하는 자라고 고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의 입장에서도 예수는 달갑지 않았다. 평등 사상을 주장하면서, 황제가 아닌 이단신에게 복종하라는 것은 로마 체계에 맞지 않았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다신교 사회이면서도 주피터교 등 전통신에 대한 숭배가 강화된 사회였다. 로마 황제 자체가 전통신을 자신의 권위와 동격화 하면서 귀족들과 차별화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다른 신들보다 우위이듯이, 로마에서는 황제가 다른 귀족보다 우위였다. 예수는 그 전통 체계에 도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형이라는 당시에도 드문 극형으로 처형을 당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를 처형한 빌라도 총독은 아주 극악한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예수가 죽은 뒤에서 유대인들은 주장한다.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따라서 <메시아>에 대한 기록인 <신약>은 유대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메시아는 오직 헤브라이인을 위해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거듭 밝히면서 오로지 유대인만을 위한 종교를 이야기하고, 기독교를 배척한 이들이 유대교단의 <바리세파>였다.

4. 예수 사후를 밝힌 사람들

예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넘어설 수 없으므로 언급하지 않겠다. 성경에 나오는 좋은말만 반복하게 되니까....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을 배반할 자가 있다고 말했으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럴리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다는 직접적으로 예수를 배신했으며 나머지 제자들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등 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실제 그리스도가 유명해 진 것은 그의 제자들과 사도들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원래 그리스어인 크리스티아노스(Christianos)에서 유래한다. 원래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란 뜻으로, 예수의 제자와 그를 따르는 군중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말은 라틴어 이후, <크리스찬>으로 쓰여졌으며, 예수의 탄생일은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결국 예수와 관련된 모든 종교를 합쳐 <크리스트교>라고 부르면 된다. 단, 예수의 생일이나 예수의 신성문제 등은 역사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아직도 각 크리스트교 종파 사이에는 이견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중세 카톨릭이 크리스트교를 이끌어 갔고,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의 교세가 확정되면서 소수의 의견은 무시해도 좋다고 볼 정도이다. (단, 아직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가지고 있는 정교회는 기존 크리스트교의 입장과 많은 차이가 있다.)

아무튼, 예수 사후에 <크리스티아노스>들은 예수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신약은 그 많은 사도들이 예수에 대해 쓴 글을 모아둔 것이다.

예수의 12사도 중 요한은 에베소에 초기 교회를 세웠고, 마가는 문화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에 큰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예수 사후 크리스트교를 로마 제국에 보급한 것은 로마 교회 건립을 위해 노력한 <바울> 때문이었다.

바울은 가장 강경한 유대교 보수파인 <바리세파>인이었다. 그는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시민권 확보자로서 로마의 중간 지배층이었다. 바울은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고, 그가 젋어서 한 일은 예수를 옹호하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었다. 그것도 총책임자였다.

그러나, 바울은 서아시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눈이 멀었고, 방황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주 예수를 만나서 회개한다. 예수의 모든 것을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그는 유대교도의 율법과 지위, 로마인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버리고 예수와 함께 험난한 길을 택한다. 특히, 예수의 부활을 확인한 그로서는 천국을 가까이서 느낀 인간이었다.

초기 교회의 이론은 어찌보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의 글과 다를바 없었다. 바울은 유대교의 최후의 심판이 이민족에 대한 심판이라는 내용을 바꿔놓았다. 유대교 율법을 잘 알던 그였기에 새로운 사상 체계를 예수의 뜻에 맞게 기술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최후의 심판은 이민족에 대한 불지옥이 아니며, 환희에 찬 미래세계로 가는 길이다. 심판은 곧 천국의 날이라는 공식을 초기 교회에서 확립한 것이다.

바울은 이 사상을 알리기 위해 이방인들을 크리스크교로 적극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이 바울의 선교 시대를 <원시 크리스트교 시대>라고 부른다. 바울의 시대는 끝없는 탄압의 시대였다. 유대교 율법학자들은 배신자인 바울을 끝없이 공격하였다. 그는 크리스트교의 위대한 선지자이지만, 유대교의 타락한 배신자였다. 로마 역시 교회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교세는 갈수록 확장되어갔다.

끝없는 탄압과 박해, 그리고 늘어가는 순교자들....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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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존 스토트 (생명의말씀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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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세계기독교고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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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존 칼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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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영화와 방송, 인물, 정보


예수
감독 존 크리쉬, 피터 사익스 (1979 / 미국)
출연 요세프 실로아흐, 브라이언 디콘, 니코 니타이, 알렉산더 스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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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
감독 캐서린 하드윅 (2006 / 미국)
출연 케이샤 캐슬 휴즈, 쇼레 아그다쉬루, 히암 압바스, 알렉산더 시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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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유혹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88 / 캐나다, 미국)
출연 하비 키이텔, 스티브 쉴, 베르나 블룸, 폴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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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감독 윌리엄 와일러 (1959 / 미국)
출연 찰턴 헤스턴, 잭 호킨스, 헤이어 해러릿, 스티븐 보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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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감독 울리히 자이델 (2003 / 오스트리아)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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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A.D.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2008 / 프랑스, 미국)
출연 빈 디젤, 멜라니 티에리, 양자경, 제라르 드빠르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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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 여기에
채널/시간 기독교TV 목 오후 6시 20분
출연진 신성남, 오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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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이브 타임
채널/시간 기독교TV 월 오후 2시
출연진 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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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크리스천
채널/시간 기독교TV 토 오전 10시 50분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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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정말 생각없이 적은 글...

민주주의의 광기 - 흑사병보다 무서운 정부의 정책들과 병에 걸린 국민들

눈에 보이지 않는 병...

어느 잡지에서 흑사병에 대해 새롭게 쓴 책을 소개한 글을 본적이 있다. 저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흑사병으로 온 유럽 인구가 죽어 버렸다. 중국에서 시작된 악마의 병인 흑사병은 몽골부대의 진군과 함께 유럽에 전해져 유럽인이라는 종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아시아에서 시작된다. 신항로 개척은 중국이 시도하게 되었고, 아메리카를 점령하여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도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이다. 세계의 역사는 바뀌게 되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볼 것이다라는 카피가 생각날 정도로....

몸이 검게 변해 죽는다는 흑사병은 지금 21세기엔 가벼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병이다. 지금은 이러한 병이 퍼질 이유가 없다.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다고 하여 일명 <패스트>라 불린 병... 지금은 지루함을 달랠 먼 옛날의 흥미거리로나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그 결말 속의 광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민주주의가 병에 걸릴 확률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 병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고,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집단 광기>로 바뀐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의 시민들은 스파르타와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룰 때, 승리자는 당연히 아테네라고 생각했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국에게서 엄청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고, 농경사회인 스타르타는 단순히 군사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의 이간책에 의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에 앞서 시민들이 모인 뒤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결정은 큰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마침 퍼지기 시작한 전염병은 모여있던 그들을 몰살시키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국력의 우위에 있었던 아테네는 전쟁을 지속하면서 차츰 스파르타와 대등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테네의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테네인들이 선출한 6인의 장군이 전쟁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6인의 장군들이 무사히 군대를 살리기 위해 철수하면서, 물에 빠진 병사들을 버리고 온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사랑하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살 수 있었음에도 버리고 온 장군들에게 죽음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진다. 장군들은 전쟁에서 더 많은 군대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설명하였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죽음이었다. 유능한 장군을 잃은 아테네는 이후 스파르타에게 계속적인 대패를 당하였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특출한 지도자가 없던 아테네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는 <민주주의>이지만, 그 민주주의를 이끄는 시민들이 안락함에 젖고 무능해지면 바로 <바보들의 지배>로 전락한다고... 그는 정치체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치체제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군주의 1인 지배도 현명한 군주가 있을 때에는 효율적인 정치체제가 되지만 독재정치나 참주정치, 군인정치가 되었을 때는 몰락한다고 말한다. 또, 귀족들이 다스리는 정치도 그 정치체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현명한 1인의 군주보다 현명한 다수의 귀족들의 정치가 더 훌륭할 수 있고, 현명한 국민들의 정치는 더욱 훌륭하다고 말한다. 단, 다수일수록, 전체로 갈수록 현명한 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가 다스리는 정치일수록 누군가를 현명하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말해야 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 체제를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지금 그것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장치는 <교육제도>이다. 도덕과 윤리, 역사를 통해 그 사회 구성원들의 동질성을 가르친다. 교육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인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교육>이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독자적인 인격이며, 민주주의 사회 속을 살아가는 일원이라고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회 체제 속에서 불합리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도 <사회적 관용>아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실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혹독한 <적응>의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광기가 있는 것일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유럽의 정복자들에게 대륙을 약탈당하던 시기...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을 처참하게 망가지게 만든 그 병을 뒤늦게 경험해야 했다. 유럽인들이 내민 달콤한 손길은 곧 독으로 번지게 되었고, 인디언들은 병에 걸려 무능력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정설은 아니지만, 흑사병 전파설이라고 불리며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갑작스런 몰락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이 이론에서 알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인간의 경험에 의한 <악의 전파>이다. 한번 무시무시한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 공포를 전파한다는 자체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경험이 사회집단이라면 다르다. 한번 공포를 경험한 사회집단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목적의 행동을 해야 할 때 필요하다면 그 공포를 적극 이용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적 행위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역사 속에서 현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따돌림>이지만, 여럿이 모여서 한명을 괴롭힌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죄의식이 분산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책임전가를 하거나, 이것이 죄가 아니라는 연대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 집단적인 광기에서 시작된다. 최근 인터넷 기사나 글들을 보면, 우리가 매체에 얼마나 민감해져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호기심과 지적 충족을 위해 블로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검색순위 1위는 무엇이지를 생각하고, 왜 그것이 1위인지에 큰 호기심을 느낀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이나 매체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지적 충족 과정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이번 총선거에서도 이 집단 광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례가 있었다. 서울시의 많은 국회의원 후보들이 <뉴타운 공약>이니, <지역재개발>이니부터 뭘 만들고, 세우고, 하다못해 교육정책에 복지 시설 어쩌고 하는 것까지 논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했다. 도시에는 각기 시장이 있고, 공무원도 있는데 국회의원이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줄 수 있는것인가?

국회의원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아니다. 중학교 교과서만 봐도 국회의원이 할 일과 지방자치단체의 각급 임원들이 할 일이 정확히 적혀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지하철 구간까지 확보한다, 교육정책을 바꾼다까지 말하였다. 지하철은 서울시 합의 없이 국회의원 혼자 만들고, 교육정책은 교육감과 별도로 혼자 다 정한다는 것일까? 보름 전에 내려온 국회의원 후보들이 언제 그 많은 공약을 다 관련기관과 합의를 본 것일까?

그러나, 총선에서 그들을 지지한 시민여러분들은 한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국회의원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뉴타운 공약>을 믿고 특정 후보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찍어준다면,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치는 바보들의 정치>라는 말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쉽쓸리고, 속고, 또 속고 그러면서 또 누군가의 의견에 쉽게 휩쓸리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흑사병으로 모두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흑사병... 보수의 광기...

아무 생각없이 쓰는 글이라 앞뒤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여론이라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조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군사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0수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대한민국은 많은 자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물론, 그 자유는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하며 그 자유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많은 논의들 역시 재검토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경제문제니, 외교문제니 하면서 우리 사회가 보수화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시대에 역행하려는 보수적 움직임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황당한 일들을 저지르기도 한다.

도대체 모든 걸 자율로 풀어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자율, 자율.. 말하는 것일까? 교육 자율화는 학교에 자율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교육 자율화는 <학생>에게 합당한 수업권과 합리적인 교육 환경을 제공받을 권리를 주는 것이다. 대체 학교에다가 <0교시>수업이니, 방과후 수업이니, 우열반이니 하는 모든 권리를 준다는 것이 <교육의 최대 수혜자>인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일까? 아니, 최소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의사라도 반영한 것일까? 반영했다는데, 왜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부정적일까?

경제에 자율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경제 주체인 <국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국민을 살리겠다는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의료산업을 민간부분으로 돌리겠다는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중요한 문제가 대운하니 뭐니 하는 논쟁으로 총선 이슈에서조차 실종되었다. 슬그머니 실행되어 버리면 또 얼머나 많은 국민들이 그 때가서 난리를 칠까?

민주주의는 알 수가 없다.

국민들은 정치할 시간도 없고, 신경쓸 시간도 없이 바쁘다. 정치는 정치 전문가가 해야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정치 체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은 아무리봐도 전문가적인 구석이 없다. 당 이름이 <친박연대>란다. 장난하나? 정당이란, 정권획득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결사단체로, 그 구성원들은 같은 정치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당명이 <민주, 자유, 선진, 노동, 진보, 보수, 한나라> 등등으로 쓰인다. 친박연대라는 명칭은 도무지 당명이 될 수가 없다. <특정 박씨랑 친한 사람들의 모임?>... 정치 철학은? 복당이 목적? 그런 당이 원내 교섭 단체가 되면 국민이 아니라 복당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일까?

<뉴타운> 건설을지지한다는 뜻으로 특정 정당에 표를 던진 국민들은, 투표 직후 뉴타운 건설은 없다는 서울 시장의 말을 듣고 허탈했을 것이다. 무슨 도박판 야바위 정치 같다. 대충 아무 말이나 던져서 아무 말이나 솔깃하게 걸리는 말이 있으면 사기부터 치고 보자는 심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매번 속아주는 국민들이다. 말했지 않는가?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국민들이 계속 속아주면 <바보들의 정치>, 즉 중우정치로 전락한다고... 수십년의 혁명과 운동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바로 정치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누구 탓도 아닌 우리 국민 전체의 탓이다. 그렇다고, 제도 탓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본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지만, 그 정치는 결국 어리석은 국민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정치로 끝났다. 민주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마저, 민주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제적 기반은 <노예>였고, 노예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민주정치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 시대의 정치가 아니였을까 고민하였다고 한다.

만약, 지금 민주정치가 최상이 아니라면 1천년 뒤 인류는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을까? 왕정과 독재정치가 무너지고, 민주정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지금의 민주정치체제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최선의 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하였다. 민주정치를 하는 이유는 민주정치가 가장 완벽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그 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발견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스웨덴식 복지주의 같은 특이한 체제도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과연 1천년 뒤에도 계속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더 진화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을까? 1천년 뒤에 살아보고 싶다.

민주주의의 비극.... 여론의 광기...

내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부작용인 <여론의 광기>가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이다. 사실, 우리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 체제가 완벽하게 정착되지 못하였다. 깨끗한 정치인의 수만큼 부패한 위정자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아직 부정하기 어렵다.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아직 금배지를 달고 있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떳떳하게 <친일행위가 뭔데요?>라고 따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 신문은 2002년에 <49%로 당선되어 과반수의 지지도 얻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타이틀 기사를 내더니, 이번 선거에서는 <48%의 절대 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문구를 걸었다. 대통령을 비교하지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문구 하나에 담긴 의미가 뭘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문구 하나쯤은 그냥 지나쳐야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 나라의 여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에게서도 나타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인터넷 상에서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유없는 악성 댓글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심지어 누구가의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내가 지금 당장 <동방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한다면, 이 글 아래에는 수백개의 악성 댓글을 달릴 것이다. 어디엔가에 속해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인식을 가진 집단에서는 그 자존심에 금을 그었을 때 개인적인 표현보다 훨씬 극명한 자극적인 집단 광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피겨 여왕 김연아나 맨유의 박지성에 대한 안티글 하나를 적는다면, 나는 바로 이 블로그에서 매장될 것이다. 국민에게 가장 큰 자존심은 애국심이고, 그 애국심을 자극하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도구는 바로 <스포츠>니까...

그러나, 집단 광기로 자살을 택한 어느 연예인이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시에 자살한 여중생 집단의 이야기는 집단이 가진 무섭고도 잔인한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무서운 집단의 면면은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 이웃이기도 하다는 점이 더욱 무서운 일이다.

나도 미쳤나보다...

아무 생각없이 글을 적다보니 나도 미쳤나보다. 역사 이야기만 적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이런 이야기나 적고 있다니... 하지만 분명한건 2008년의 대한민국이 되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더 이상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하다. 특히, 어제 공교육 정책이 발표되면서 나는 한가지 상상도 하게 되었다. 이제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죽지도 않았는데, 지옥에서 살아가야만 되겠구나...

교육이 대체 뭘까? 영어 단어 몇 단어 더 외우면 대한민국 교과서 첫장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인 <민주시민의 자질 함양과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시민교육>이 완성되는 것일까? 난 대체 알 수 없다.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전문 통역관들을 많이 양성하는 편이 더 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그 많은 돈 들여 전 국민 교육한다고 통역관보다 더 영어를 잘할까? 나 역시,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대학 졸업후 영어책 닫았다. 필요하면 번역사 쓰면 된다. 1페이지에 딱 7만원 든다.

우열반이 과연 인성교육에 도움이 될까? 확실한 건 입시교육에는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중학생들은 특목고 가기 위해 날새면 되고, 고등학생들은 대학가려고 날새면 된다. 공교육 정상화란, 말 그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정책은 공교육 정상화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인재 양성을 위한 <특별 프로젝트>일 뿐이다. 그렇게 인재가 필요하면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에서 인재를 키워라. 고등학교는 교육법에 이미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때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중등교육 및 기초적인 전문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초중등교육법 54조 1항>

지금 정책은 법적으로도 위헌이다. 전 국민을 전문가로 만들려 하고 있지 않은가? 우열반은 헌법 31조 1항 기회균등 조항에 어긋나며, 전체적인 입법 취지 자체가 학생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각급 학교 교육목표를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목표는 전부 자아실현이나 적성, 사고력, 세계시민의 의식,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는데, 이젠 교육목표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갈수록 실망스러운 정책 때문에 뭔소리인지 모를 글을 적어보았다. 혁신도시는 이전 정부 방침이라면서 방침을 바꾸려 하고, 공공기관장들도 이전 정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임하란다. 임기보장된 기관장들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정부도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국회의원, 대통령, 대법원장의 임기는 각각 4,5,6년 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임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자신들의 임기내에 얼마나 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귀찮다. 그만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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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사 5 - 보편논쟁 제 4장 : <유명론>

스콜라 철학의 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기서는 보편논쟁 중 <유명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유명론을 정리하면서 유명론과 관련된 다른 이론들도 마저 정리하고, 스콜라 철학부분의 길고 긴 포스팅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중세 철학만 하다가 며칠이 가겠네요... 휴.... (보편논쟁 마지막 장입니다)

1. 초기의 유명론

유명론은 보편적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실재론>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초기의 유명론자들은 보편적 관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므로, 그것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로스켈리누스인데,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보편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물에서 시작한다. 개체적 사물이 존재한 이후에, 그것의 범주를 묶어 보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은 개체보다 후행한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르면, 귀납법과 연역법적 사고 방식이 이 당시에도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재론이 <신의 존재>를 당연히 인정한 다음에 개별 사물에 대한 인식을 시도한다고 본다면, 유명론은 <개별 사물>을 인정한 연후에 커다란 <이데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실제, 실재론, 유명론이 중세 이후 경험론에 영향을 많이 주기는 하지만, 실재론 자체가 연역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유명론은 이데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좀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네요.

유명론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볼까요?

실제론 : 모든 사물은 신의 정신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사물의 본질은 이데아에 있다)
   유명론 : 모든 사물은 개체만이 존재하여, 보편이란 것은 없다. (사물의 본질은 질량안에 있다)
   개념론 : 보편은 초월적 이념이 아니라 개별자들과 함께 그 속에서 공존한다(아벨라르의 입장)

2. 유명론은 탄압받았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유명론보다는 실제론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일단, 초기 교부철학자들부터가 <신플라톤 학파>의 실재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철학의 삼위일체설 자체가 신의 존재를 보편화하는 <실재론>적 입장이었습니다. 이 실재론을 인정하게 되면 <성부-성자-성신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체계화>하기가 편리했습니다. 3위일체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성령-예수가 일원화되어 있다는 것을 <신비주의적>인 믿음으로 간주하기 딱 좋았죠.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신은 곧 인간이 지식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이데아>였습니다.

그러나, 유명론은 (교황청과 결탁하지 않은 경우에는) 탄압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논리상의 체계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예로, 신이라는 보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개별 교회를 각각 따로 인정하는 경우, 하느님과 교황청이라는 중세 보편적 매개체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유명론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각각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별자가 됩니다. 보편이란 없으니까요. 따라서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원죄론>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래 선악과를 먹은 뒤 <원죄>가 있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그 원죄에 대한 구원 가능성이 생겼는데, 유명론의 이론대로 <각각 개별적으로 살고, 개별적으로 지은 죄가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교리는 무너집니다.

따라서 중세 사회는 거의 대부분 실재론이 지배하였으며, 유명론은 음지에서 이루어진 주장이 많았습니다. 실제 유명론의 체계적 이론이 사회적으로 대두한 것은 중세 말기 <스투터스, 오캄>이 등장할 무렵입니다.

3. 중세 말에는 교황이 오히려 유명론을 이용하기 시작하다.

중세 말에 교황권이 약해지고, 교회의 세속지배력이 약해지자, 각 개별교회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교황청은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막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유명론을 변형한 이론들이 교회내부에서 힘을 얻습니다.

유명론에 따르면, <하늘의 보편적 신>이라는 개념보다, 지상의 개별 권력에 더 중점을 둡니다. 따라서 보편성을 부정함으로서 <보편적 신>의 대리인인 <교황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원래의 유명론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이유로 유명론을 변형한 것이죠.

따라서 교황은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자>로서 절대화 하고,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실재론>을 지지하면서도, 일부 교황권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론을 도입하는 것이죠.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교회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신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황은 신의 대리자로서 <화려한 건물>을 지어야 하며, 신읠 대신할 심판자로서 <면벌부>를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자신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이론들(오캄, 스투터스, 위클리프, 후스 등)에 대해서는 유명론, 실재론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이단>으로 처벌합니다. 결국 중세 말기에는 실제론도, 유명론도 아닌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어 중세 교회가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이상한 논리에 반항하여, 교황보다는 <셩경>을, 논리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이미 위클리프, 후스 등의 교회개혁 사상에는 종교개혁적 성향이 많았다고 합니다.

4. 아벨라르 : 개념론이 등장하다.

개념론은 보편논쟁을 종합하여 유명론, 실제론을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처음 시도하였는데, 그는 변증법적인 논리로 보편논쟁을 정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입니다.

1. 정 : 보편적인 것은 실재한다
   2. 반 : 실재하는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을 떠나 따로 실재하지는 않는다.
   3. 합 : 보편성과 실재성은 모두 하나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개별적인 것과 함께 존재하며, 이 둘은 파트너입니다. 만약, 혼자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추상적으로 상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정, 반, 합을 통하여 잘못된 것을 <회의>하고, <탐구>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쓰여진 그의 저서가 <긍정과 부정>입니다. 이 책은 이전 모든 교부철학자들부터 그 이후의 논쟁을 정리하여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성경의 논리에 부합되도록 정리한 책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변증법적으로 처리한 학자가 바로 전 포스트에서 설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바로 <교회법>이었습니다. 유명한 교회법은 볼로냐 대학에서 체계화한 <그라티아누스 법령집>입니다. 이 법령집은 종교회의, 교황의 명령 등을 모아 체계적으로 만든 교회법이었습니다. 이 법이 생기면서 교황입법이 정당화되었고, 교횡법정이 전 유럽을 지배하는 최고 법정으로 규정되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아벨라르,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보편 논쟁은 일단락 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교황법을 통하여 중세 교회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말기가 되면 다시 유명론이 득세하면서 교회 세력의 레임덕 현상이 가속되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세 말기의 유명론을 한번 볼까요?

5. 14세기의 <윌리엄 오캄> : 프란체스코파는 철저하게 아퀴나스를 비판하다

프란체스코파의 윌리엄 오캄은 철저한 유명론자입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한 것을 비판합니다. 지상세계와 신의 세계를 무리하게 연결하는 것도 문제고, 플라톤 철학 체계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 집어넣어 일원화 시키려는 것은 <짜집기 철학>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신앙과 철학은 분리되는 것이 오히려 <신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고,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면 아퀴나스 처럼 억지 학설이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비판한 것은 실재론의 <이데아론>입니다.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도 중요하지만, 이데아라는 신의 섭리가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오컴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개개인의 감각은 느끼고,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신을 생각해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는 아퀴나스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요시하지만, 아퀴나스가 <이데아론 : 신플라톤 철학>과 그것을 융합하려 한 것에는 철저히 반대합니다. 오히려 아퀴나스의 <온건적 실재론>은 어설프다고 비웃습니다.

그는 보편자가 개별적 사물들 속에 있다는 것마저 부인합니다. 그는 아예 보편자가 없다고 까지 말하면서, 오직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철저한 유명론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한 <실체는 필요없이 증가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개체뿐이다>라는 주장을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개체와 보편의 철저한 분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앙과 이성의 분리>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데아>라는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개체만을 고집하였고, 이것이 후에 자연과학적 사력을 중요시하는 <경험론>으로 연결됩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교황권과 철저하게 대립됩니다. 왜냐면, 오직 개체만을 강조하는 사상을 오캄이 말하므로서 <교권정치, 교권제도>보다 <개별적인 신과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캄의 유명론은 철저하게 탄압받습니다.

6. 14세기 위클리프 : 대학에서도 교회를 비판하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입니다. 그는 중세말 교회의 부와 사치를 철저하게 공격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는 신자들의 생활 방식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형식적으로 예수를 믿는 <실체변화설(신교에서는 화체설)>을 부정합니다.

화체설이란, 성체와 성혈은 예수의 몽과 피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에게 주며 예수를 기억하려고 하였는데, 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로 축성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성체를 받아먹는 다는 뜻으로 <영성체>라고도 합니다. 위클리프는 이것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믿음이 의식에 있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교회의 재산이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그것은 신성한 왕권이 교회의 종이였고, 제후들이 열심히 싸워 교회를 보호해 주었으며, 신자들이 교회를 믿고 교회세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죄를 범한 성직자가 성사를 하는 것을 무효이다. 순결하지 못한 자가 교회의 제단에 앉아있는 것은 범죄이다. 성사라는 것 자체가 영혼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믿음이 없는 자의 가르침은 죄악일 뿐이다. 카톨릭의 생활은 청결과 믿음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 예수는 영적인 존재이다. 예수는 결코 빵이나 포도주와 같은 의식으로서 믿음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성사와 사랑이 없는 미사와 사랑이 없는 복음은 모두 무효이다.

그의 주장은 교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던 <영국 귀족>들에게 환영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교회 재산과 교회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에 분개한 교황청 및 영국의 성직자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그는 결국 이단으로 몰려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교리를 충실히 수행하는 <롤라드파>가 계속 성장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고, 이 롤라드파는 많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계속 이어져 훗날 종교개혁기에 큰 활약을 합니다.

7. 15세기 보헤이아의 후스 : 위클리프의 뒤를 잇다

보헤미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유명론>적인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후스는 <교황>이라는 존재가 아닌 사람들의 <개별적인 믿음>을 중요시하는 유명론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고, 고위성직자의 세속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중심은 <보편적 교황청>이 아닌 <성경을 통한 개별적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그는 면벌부 판매등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이단화 되어 화형당합니다.

그가 죽은 후 보헤미아 지방의 사람들은 후스를 추종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종교세력에 대한 비판, 후스 신앙에 대한 확신, 보헤미아(체코) 민족주의 운동이 결합한 형태로 교황청이 반항하였고, 큰 싸움끝에 진압되었습니다. 그들은 롤라드 파와 연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롤라드파, 후스추종파의 반란과 개혁운동은 훗날 종교개혁기에 큰 역할을 하며, 종교개혁의 선구 운동이라고 7차 교과서에 의의가 나와있습니다.

8. 신비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교회는 <마녀사냥>을 확대하다

중세말에는, 이제 <보편적 교회>를 떠나 개별적 교회를 만들고 개별적 믿음을 가지려는 많은 개혁운동이 시작됩니다.대표적인 운동이< 신의 벗>과 같은 신비주의 파들입니다. 신비주의 파들은 제도적 교회보다는 <신과의 직접 소통>을 시도합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은 복잡한 교리보다는 단순히 심성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프란체스코파의 일부도 <하느님과의 직접소통을 통한 도시민의 교리 전파>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권>이라는 제도권 안에 있지 않는 교회는 <실재론, 유명론, 신비주의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단>으로 몰아 마녀사냥을 합니다. 사실, 교황청에서는 중세말 다양한 종교적 운동들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개혁적인 많은 종교운동들을 탄압함으로서, 교황청은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됩니다. 교황청은 이제 개혁을 추진할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 종교개혁이라는 큰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6세기에는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 치명적인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교회세력이 몰락하고, 다시는 세속정치에 교권이 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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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스콜라 철학과 관련된 사상과 학파들을 간략히 보았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쉽게 적지도 못하였네요. 아무튼 이 파트는 언제 또 포스팅 할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포스팅 하려니 무지 힘드네요.... 휴.... 종교사가 제일 싫어요.... 종교를 믿어야 뭔가를 잘 쓰는데...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서양사이야기/유럽중세사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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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사 4 - 보편논쟁 제 3장 : <온건한 실제론>

스콜라 철학의 세 번째 시간으로 여기서는 보편논쟁 중 온건한 실제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온건한 실재론은 초기 실재론을 변형하여 약간 교황중심적인 논리로 전환한 이론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로, 그는 실재론의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첨부하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끌어내였습니다.

1. 온건한 실재론의 개요

온건한 실재론이 등장한 배경은 <이슬람 세력에서의 문화 전파> 때문입니다. 유럽사회는 6세기 이후 이슬람에 빼았겼던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기 위한 시도를 여러번 했지만, 강성한 이슬람 왕조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9세기 이후 이슬람 왕조가 점차 분열되어 여러 칼리프로 분열되는 시기를 맞자, 유럽은 재정복 운동을 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을 찾고 이슬람과 교류하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저작이 이슬람의 <아랍어>를 통하여 유럽에 차츰 전파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이 플라톤과 버금가는 대 철학자의 논리를 교부철학에 접목시키되, 정통교리에 어긋나지 않게 체계화할 의무가 생겼습니다. 기존의 실제론은 신플라톤 철학으로서 <신 = 이데아>로 접목시킨 플라톤 철학이었습니다. 신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이데아이고, 신의 존재는 누구도 실체를 알 수 없는 <동굴에서 그림자만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추상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플라톤과 맞먹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는 <이데아론>이 아니라, <실제론>이었습니다. 그는 <보편>은 존재하나, 그 보편 각각에는 <개별적 개체>가 있다고 주장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이 철학 논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하였고, 이것을 철학적으로 완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아퀴나스는 모든 사물에는 <초월적 보편자>가 존재하지만, 그러한 보편자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지만, 신앙을 알기 위해서는 신앙이 절대적이라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죠. 이것은 절대적 존재인 <실재론>을 인정하면서도, 개별적 존재인 <유명론>도 수용하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말로 설명하곤 합니다. 사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란 <이데아 중심의 신플라톤 철학>과 <경험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조화를 다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조화되어 변형된 실재론을 <온건한 실재론>이라고 하며, 이것이 중세 사회의 기본 철학이 됩니다.

여기서 한가지 키워드가 작성됩니다. 신플라톤 철학을 받아들여 이데아론을 중심에 놓는 학풍을 우리가 <실제론>이라고 부른다면, 아리스토텔레스 중심의 철학을 중심으로 개별자를 강조하는 철학은 <유명론>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또 실제론은 이데아와 같은 보편 관념을 중시하는 <관념론>과 연결된다면, 유명론은 개별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론>으로 연결됩니다. 실제론에 영향을 받은 후대 철학자가 철저한 기독주의자인 <파스칼>이라면, 유명론의 경험주의를 이어받은 철학자는 <로크, 베이컨> 정도가 되겠네요.

2. 토마스 아퀴나스 :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존 실재론의 <플라톤 철학>과 어떻게 조화시킬까를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과제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여 <스콜라 철학>을 체계적으로 완성시킵니다. 실제, 실제론과 유명론의 철학은 그 이론 본질에서 대립합니다. <신>과 중요시하는 <플라톤식 실재론>은 <자연현상>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식 유명론과 합치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상충하는 대립적인 의견들을 모아 변증법적인 방법으로 묶어서 해결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요약한 최대의 스콜라 저서가 바로 <신학대전>입니다. 이 신학대전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어떻게 해내었는지 볼까요?

그 결론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변증법 논리로 귀결됩니다.

1. 정 : 지상에는 감각적인 경험이 있는데 이러한 경험은 중요한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계열의 실재론 수용)
   2. 반 : 하늘에는 신의 섭리가 있는데 이것은 지상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이다.(신플라톤 학파의 유명론 수용)
   3. 합 :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신의 섭리를 더 잘 깨달을 수 있으므로 2가지는 모두 중요하다.

예를 들어볼까요? <진리>는 감각적 진리와 신의 섭리 중 어느 것이 중요할까요?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1. 정 : 자연적인 경험과 진리는 항상 지상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초자연적인 신의 은총은 인간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 (플라톤)
   3. 합 : 자연의 진리는 초자연의 진리에 의해 보완되는 것으로, 신의 은총은 자연과 대립(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완성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행복>의 예를 들어볼까요?

1. 정 : 인간의 행복은 지상의 행복으로서 매우 중요하며, <행복>은 인간 삶의 목표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반 : 카톨릭에서는 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플라톤)

   3. 합 : 자연속의 행복도 중요하나 신앙과 자애라는 카톨릭의 덕목은 더욱 중요하다

이번에는 <세속권>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정 : 국가권력은 세속의 필요에 의해 합리적으로 결정될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2. 반 : 교회는 영적인 필요에 의해 인간을 신심으로 인도한다. (플라톤)

   3. 합 : 신과의 생활이라는 더 높은 초자연적인 목적이 있으므로, 교회는 초자연적 목적에 더욱 힘써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을 결과적으로 정리하면, 실재론의 경험과 자연성을 모두 인정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적극 수용하면서도, 관념론(플라톤 철학)의 주 이념인 <보편성, 초월성>이라는 것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건한 실재론>이자 <신앙과 이성의 조화>된 변증법적 개념입니다.

사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종합개념은 <아벨라르>가 확립하였습니다. 아퀴나스는 아벨라르 등 많은 스콜라 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면도 많지요. 아벨라르는 다음 장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유명론>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 해보죠. 관심분야가 아닌 것을 자세히 다루려니 정말 힘드네요... 휴... 하지만, 서양중세사를 다루기로 한 만큼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 전부 하나하나 짚어보려고 합니다. 유명론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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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사 2 - 보편논쟁 제 1장 :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스콜라 철학의 두 번째 시간으로 여기서는 스콜라 철학의 핵심인 <보편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1. 스콜라 철학에는 2가지 핵심 논쟁이 있었다.

스콜라 철학은 전술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작이 이슬람에서 넘어오고, 탁발교단이 정통교리를 확립하는 시기에 등장한 중세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핵심 과제는 위대한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을 지켜가면서도, 교황청의 정통 교리를 사수하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접목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스콜라 철학은 12세기 이후 중세 전 기간을 걸쳐 2가지 문제를 가지고 큰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첫 번째 논쟁은 바로 과연 <신이 존재한는가, 존재한다면 신의 존재와 이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라는 <이성과 신앙의 조화문제>였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두 번째 큰 논쟁은 <보편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를 따지는 논쟁입니다. 이 논쟁의 전자를 실제론, 후자를 유명론이라고 합니다. 그럼 이 유명한 논쟁에 대하여 한번 심도있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2개의 핵심논쟁은 각각 따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논쟁>이라는 큰 속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중세 시대 가장 큰 핵심 논쟁이었습니다. 그럼 <보편논쟁>이 무엇인자, 지금부터 시작해볼까요?

2. 보편논쟁의 불씨를 지핀 보에티우스

스콜라 철학의 시조라고 불린 사람으로서, 최초로 <보편논쟁>에 불을 붙인 사람은 유명한 철학자 보에티우스입니다. 보에티우스는 게르만족의 이동이 활발하던 중세 초기에 학자로서, 동고트 왕국의 국왕 테오도릭에게 등용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게르만족들은 <크리스트교>로 교화하면서 유럽 중세 문화에 적응하고 있었는데, 이 게르만족들의 교화를 위하여 <카톨릭> 이론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은 당시 과제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당시 그리스 저작(아리스토텔레스> 들이 많이 유실되었던 관계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의 교부철학체계를 인용하여 카톡릭 철학 체계를 완성하고, 대이동 이후 유럽사회에 정착한 게르만족을 교화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릭 황제는 <보에티우스>가 기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동로마 황제와도 교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보에티우스를 감옥에 가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이 감옥 생활을 하면서 차분히 자신의 인생과 학문체계를 정리하였는데, 그 때 나온 저서가 스콜라 철학의 기초가 된 <철학의 위안>이라는 긴 대화체의 장문입니다.

중세 보편논쟁은 쉽게 말해서, 과연 <신,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라는 것을 두고 논쟁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에티우스는 그 논쟁을 최초로 불러 일으킨 사람이지요.

원래, 보편논쟁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저서 <범주론>에서 비롯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은 포르피리오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학 입문론>이라는 책으로 다시 해석해 놓았는데, 보에티우스가 그 책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보편논쟁>은 시작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사물의 유와 종이라는 것이 과연 그 자체로 실제할까?> 라는 물음을 이 책에서 던집니다. 그는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의 개념은 우리 머리 속에서 감각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일 뿐, 진정한 사물의 실체는 알수 없는 것일까?>, <우리 감각과 사물의 실체는 일치하는 것일까?> 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만, 결론 내리지 않고 문서를 번역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문점을 그대로 기술하는 것에서 멈추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유, 종이라는 개념들을 모두 <보편>이라고 통칭하여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고민에 대한 논쟁을 <보편논쟁>이라고 합니다. 다음의 글이 바로 논란이 된 범주학의 서문 내용입니다. 이 글이 바로 <보편 논쟁>의 과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類)나 종(種)에 관해서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우리의 오성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 만약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은 물질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혹은 감각적 사물과는 별도의 것인가, 아니면 단지 감각적 사물 속에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인가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로서는 답변을 회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이와 같은 성질의 문제란 매우 난해한 과제로서 여기에는 좀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자유의지의 위안 :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이러한 보편논쟁과 함께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잡고, 고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실제론>이라는 것을 신학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고민한 보에티우스의 명저가 바로 <철학의 위안>입니다.

철학의 위안에서 보에티우스가 고민한 것은 <인간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명제였습니다. 이 명제는 중세 내내 <신앙>과 <이성> 중에 어느 것이 우위인가를 따지는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에티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중 다음의 이론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목적과는 전혀 다르게 우리에게 행운이, 또는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이것을 우연이라고 부른다.

보에티우스는 우연이라는 단어가 <신의 섭리>와 어떻게 일치될까를 고민합니다. <신>은 완전한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일관된 <신의 섭리>와는 다른 것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만약 신이 인간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모두 알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모두 신의 섭리 안에 있다고 가정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게 되며, 모든 인간은 신에 종속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신앙>과 <이성>이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게르만족>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게르만족들은 결코 <신>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보에티우스는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왜냐면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이 행한 모든 악한 행동은 모두 <신이 예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예정한 잘못을 인간이 했는데, 인간이 벌을 받아야할 이유도 없고, 인간의 잘못은 사실 모두 <신>의 잘못이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4. 신의 섭리에 대한 위안 : 우린 신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보에티우스는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습니다. 인간은 분명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정리했는데, 그럼 인간과 신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 그것이 문제가 되었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보에티우스가 제시한 논리는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라는 논리였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자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100년도 살지 못하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를 가진 의지입니다. 반면 신의 의지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의지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신의 의지의 관찰 안에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이렇게 말하면 쉽습니다.

내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면, 이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신이 예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태양을 보는 것이 태양이 떠오르는 원인은 아니며, 내가 태양을 보는 것은 내가 나가서 보고자 하는 의지 때문이다.

즉 쉽게 말하여, 신은 어떤 사실을 미리 예정하였고, 그 예정된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수 있지만, 인간은 어떤 사실을 예정하지 못하고, 그 사실에 대한 결과도 예상할 절대적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즉,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종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고, 그 자유의자가 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해준 것입니다.

이 논리 속에서 보에티우스는 인간과 신, 그리고 각종 자연의 관계를 낮은 순에서 높은 순으로 체계화 시킵니다.

1. 감각 : 하등동물도 있는 가장 낮은 인식의 도구 - 아베바도 촉수가 있다는 정도
   2. 표상 : 고등 동물의 종들이 느끼는 인식의 도구 - 개나 말, 소 등이 스스로 행동하는 정도
   3. 이성 : 인간에게만 있는 인식의 도구 - 자유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나, 절대성은 없는 것
   4. 직관 : 신에게 있는 것으로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는 것

즉, 신이란 존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도 없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간섭하려는 의지도 없는 완전무결한 관찰자입니다. 그리고, 관찰과 함께 인간에 대하여 사랑으로 <지켜봐 주시고> 훗날에는 인간에 대하여 용서하시거나 <심판>하실 존재입니다.

따라서 보에티우스가 알고 있는지상의 나라는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묵묵히 관찰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악>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그 악에 대하여 최대한 <용서>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곧 보에티우스의 신학 체계입니다.

이것은 게르만족들에게 <용서>와 <교화>라는 체계적 원리로 나타나게 됩니다. 중세 유럽 사회의 종교적 큰 틀을 하나 완성한 것이지요. 그러나, 그의 이론은 <신의 의지>와 <인간의 이성>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하지 않음으로서 훗날 <신앙>과 <이성>의 우위 문제를 유발시켰습니다. 또, 그가 제기한 <보편은 개별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 라는 <보편논쟁>은 중세 내내 이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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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만으로 포스트를 작성하려고 하는데도, 주제가 주제인지라 종종 종교적 냄새가 나 버리네요. 참고로, 저는 <다믿교>입니다. 성탄절엔 성당을, 석가탄축일에는 절을, 심심할 때는 용산 힌두교 상가에서 노는 사람이죠. 절대 특정 종교를 편애하지는 않습니다. 포스트 분위기가 그런 것이니, 그냥 이해해 주시길.. (저 교회, 특히 성당 많이 좋아합니다.)

다음 3편에서는 보편논쟁 중 <실제론>에 대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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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콜라 철학 이야기 1 - 교회에 각각 다양한 교단이 성립되다

오늘부터의 유럽 중세사 포스트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문화>를 다뤄볼까 합니다. 교회문화는 거의 대부분이 교단의 이야기와 스콜라 철학의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십자군이나 서임권 문제 등은 별도의 시리즈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스콜라 철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부분만 다루고, 다른 파트에서 빠진 교회 건축, 예술, 문화 부분만 간략히 포스팅 하겠습니다.

1. 로마 이래 거대한 계서제도를 완성한 중세 교회가 탄생하다.

중세 교회는 로마 교회의 행정-교구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고대 로마의 계서제도는 <로마사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습니다.

1. 교황(교황청) - 추기경(교황선출) - 대주교관구(대주교) - 주교(실질적 교회관리) - 교구(하부조직 : 도시, 농촌)
   2.  교구사제는 일반민과 접촉, 외곽에 종교회의(공의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수도원과 교단 등에 연결됨
   3.  교황 : 군주나 제후 파문 위협, 성상금지령, 교회법에 입각한 재판권(벌금형)

중세의 교회는 11-13세기 교황권이 강화됨에 따라 초국가적 조직체로서 <신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국가 사회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교황에서 - 추기경 - 교구까지 이르는 거대한 체계는 지역의 행정체계와 일원화된 조직이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종교기관이 아니라 독자적인 재판권을 가진 정치권력으로 부상하였고, 그것을 뒷받침할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세속 권력체>였습니다.

특히, 교회의 광대한 재산은 <교회가 중세의 지주>임을 과시할 수 있게 하는 든든한 재원이었습니다.

교회는 <신의 이름과 섭리>라는 규칙 속에서 이 규율을 어진 자들에게 엄첨난 벌금을 걷었습니다. 그리고 벌금이 아니더라도 <신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으로 반강제적이면서도 자발적으로 보이는 막대한 <성금 : 십일조>를 걷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교구민은 마치 국가에 세금을 내듯이 교회에 헌금을 내야했습니다. 또 성직자는 성직 첫해에 <초입세>라는 꽤 많은 돈을 교회에 바쳐야 했습니다. 또, 이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세워진 각지의 수도원들은 광대한 장원을 보유하면서 그 경제력을 더욱 넓혀갔습니다.

베네틱트 수도원 이래 클뤼니 수도원 같은 수도원 단체들은 교회를 <영적으로 보호>하고 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성직임명권이나, 성직자의 부패를 막으려는 노력이 있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운동을 하는 수도원 역시 교회의 기득권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수도원은 크리스트인의 지상에서의 구원매개자인 <교황청>을 적극지지하는 경우가 더 많았죠.

2.12세기  시토교단이 등장하다

12세기의 시토교단은 12세기 영국 헨리 1세의 왕권 전성기 때 등장한 수도원입니다. 이 교단은 모든 수도원들이 검소하게 생활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교리는 베네딕트 교단의 청결, 복종 등을 모방하였습니다. 이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소유하는 것 등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교단은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교단 수입으로 활용하였는데, 이 교단이 개간하고 넓힌 토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신의 노동> 속에서 시토교단은 영국 요크셔 목양지에서 영국, 프랑스를 연결하는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 지방까지 개간하여 <모직물>을 생산하게 됩니다. 이 모직물은 중세 상업의 가장 큰 <상업 교환 수단>으로 북부 플랑드르 ~ 영국 지방을 <북부 무역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 합니다.

사실 원래 교회는 모든 상업활동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교회는 자발적인 헌금과 빈빈 구제 등을 아름다운 덕으로 삼았고, 상업을 통한 부는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토교단의 개간 사업을 통하여 이러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인식의 변화는 상업을 통한 <이자 개념>을 인정한 것입니다. 원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기독교인들은 더러운 죄악이요, 악마의 놀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사회에서는 금융업 발달이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토교단 이후 13세기에는 다양한 상공업의 발달로 정당한 이자를 받고 금융에 종사하는 이들이 늘게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금융업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어 돈을 벌게 되었는데, 이러한 유대인들의 활동 때문에 유럽사회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구약을 믿는 유대인들이 금융에 종사하는 것을 영국인들은 조롱하곤 하였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이자를 갚지 못하면, 혹은 장사를 기한내에 하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잘라야 한다>는 유태인의 악행이 나옵니다. 이것은 상업이 발달하여 이자업을 더 이상 죄악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반대로 이것으로 성장한 유태인들에 대한 반발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3.13세기  탁발교단이 등장하여 이단을 정화하려고 하다

13세기에는 도시문화가 발달하고, 각지에 대학이 설립되면서 유럽사회에 다양성이 생기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13세기는 교황권의 절정기인 시기였습니다. 교회세력은 13세기 이후 다양해지는 사회적 현상을 철저히 막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복음 논리만을 전파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도시와 학문의 발달에 따라 나오는 다양한 <성경의 해석>과 <그리스인들의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하여 교회는 이단이라고 하면서 탄압합니다.

이러한 이단파의 성장 속에서 카톡릭의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 등장한 일련의 교단을 탁발교단이라고 합니다. 탁발이란, 쉬운 말로 하자면 <빌어먹는 수도승들>을 말합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스님들이 시주를 받아 먹고 사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탁발교단은 순수한 영적 믿음을 가지고, 신성한 노동에만 종사하면서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수호하려는 교단을 말합니다.

이중 가장 강력한 탁발교단은 도미니쿠스 교단이었습니다. 이들이 주로 한일은 교황청의 지원을 받아 이단을 개종하는 일을 주로 하였습니다. 특히, 13세기 프랑스 필립 4세의 알비즈와 십자군 등으로 이단인 <알비즈와파>가 약해지자, 이들을 개종하는 일들을 주로 맡아했습니다. 하지만, 이단이 개종하지 않거나, 이단의 논리가 정통 논리를 위협할 정도로 체계적일 경우, 도미니쿠스는 잔혹한 <종교재판>을 통하여 이단의 뿌리를 근절하기도 합니다. 이 종교재판은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지기도 하였죠.

교황청이 인정한 탁발교단 가운데, 가장 논란이 되는 파는 프란체스코파입니다. 성 프란체스코가 만들었다는 이 파는 초기에는 상당히 <이단>적인 성향이 많은 탁발교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직접 귀의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고 하는 등, 신과의 직접 대화를 강조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성 프란체스코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죽일 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교회 세력안에 포섭하여 다른 이단을 견제하는 데 이용하기로 합니다. 중국에서 <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라는 것과 같이 <이단적 성향을 가진 파>를 정통파로 귀의하게 한 다음, 이단 사냥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도시민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런 믿음을 전파하고, 독자적인 기독교 체계를 가진 정통파로서 중세에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 자체가 <하나님과의 직결된 믿음>이라는 사상체계를 가진 만큼,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지상세곙서의 교황의 우월성>에 대한 반항으로 보일 우려가 많았습니다. 결국,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이 탁발교단은 프란체스코의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강경파와, 프란체스코의 교리를 교황청의 요구에 따라 변형한 온건파가 대립하게 됩니다. 이후, 프란체스코의 강경파는 이단으로 규정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4. 이러한 교단들은 학문 발전에 공헌하다 : 스콜라 철학의 성립

이러한 정통 기독교 정통 교단들의 성립은 12세기 이후 대학발전에 큰 공을 세웁니다. 교단은 수도원을 넘어 대학 교수를 많이 배출하였고, 대학내 자치권은 이들 교단의 교수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였습니다. 이러한 학문 발전은 9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부 사상을 체계화하고, 중세 교황청의 논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럽 사회 전반을 <신학>적인 학문구조로 이끌어 갑니다.

또 십자군 전쟁을 겪으면서 고도로 발전된 이슬람 문화와 만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럽어로 번역된 원전이 유입되면서 이제 학문은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원래 대학의 성립 이전에는 주교성당의 부속학교인 <스콜라>에서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는데, 대학의 성립 이후에는 대학에서 자치적으로 학문을 연구하면서 이 <스콜라>의 학문을 더욱 확장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콜라 철학이라고 합니다.

이 스콜라 철학은 가장 큰 목표가 체계적으로 크리스트교 교리를 정립하되, 기존의 교단들의 논리와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시대의 교부철학(아우구스티누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철학 체계, 각 교단의 정통 교리를 서로 융합시키는 것이 이 시대 학문의 사명이었고,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논쟁하면서 학문이 발전합니다.

이 학문적 과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론(이성론)과 기독교의 신앙론(관념론)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았으며, 그 속에서 중세 유럽의 유명한 논쟁인 <보편논쟁>이 시작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스콜라 철학을 다뤄 보겠습니다. 그 핵심은 <보편논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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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이슬람 세계의 문화

1. 문화의 융성 배경

이슬람 문화가 융성한 배경은 아바스 왕조 이후 여러 칼리프 국가로 분열했음에도 불고하고, 공통된 문화를 유지했기 대문입니다. 마호메트의 계시를 철저히 믿으며, 이슬림교와 아랍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문화로서 종교, 문화적 통일세계를 구축한 것이 이 지역 문화의 특징이지요. 특히, 역대 칼리프들은 각자 문화활동을 장려하고 인종 차별이 없이 학자를 등용하고는 했는데, 이것은 아바스 왕조의 이란계 민족의 힘이 큰 것이었습니다.

2. 문화적 특성

이슬람 문화는 그 위치적 특성상 동서 문화의 요충지로서 다양한 문자를 습득, 발전 시킨 후 다시 동서양으로 내 보내는 <문화의 갯벌>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주변 세계 속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한 문화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헬레니즘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되는 지역이었고, 동방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문화, 인도문화, 중앙아시아 문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몽골제국이 이 지역에 영향력을 보임으로서 원문화와 유목문화까지 융합된 문화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거기에 이슬람교와 아랍어라는 철저한 자기 문화를 첨가시켜 독창적인 문화가 탄생한 것이지요.

3. 과학과 철학의 발달

이러한 아라비아 문화의 특징을 살펴 볼까요? 먼저, 의학, 과학, 화학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합니다. 특히 연금술 등에서는 독보적이었죠. 또, 인도의 0개념을 도입하여 아라비아 숫자가 나왔습니다. 산과 알칼리의 구별. 지구 구형설, 역법의 발달, 승화작용, 여과증류법, 광학의 연구와 비중측정 등은 아라비아 인들이 남긴 세계적 유산입니다. 또 최초의 병원 설립 등의학이 발달하여 근대 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줍니다. 특히 이븐 시나의 의학전범, 치유의 서는 유럽에서도 유명한 의학교과서이자, 철학서로 쓰이기도 합니다. 또 3차 방정식과 3각법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의 의학, 수학적 지식은 아라비아 지식에 의존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신학도 아라비아에서 발달된 학문 중 하나입니다. 코란은 알라에 대한 절대 복종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규제했으므로, 신학 법학이 발달하였습니다. 또 이슬람의 역사연구, 메카순례, 동서무역 등은 역사, 지라학의 발달을 초래했습니다. 이븐할둔의 세계사 서설, 이븐바투타의 3대륙주유기(여행기) 등은 유명합니다.

특히 철학도 유명합니다. 그들의 철학은 크리스트교의 구약과 신약성경 등 신학적 원리를 많이 인용합니다. 코란의 구성이 곧 구역성경의 재해석이니까요. 또 그들은 고대 플라톤, 신플라톤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첳학을 연구합니다. 이것을 코란의 해석과 이슬람교 교리문제에 적용하여 난제들을 해결합니다. 이러한 여러 학문의 인용으로 발전한 아라비아의 독특한 철학을 <아라비아 학문>이라고 부릅니다. 이 아라비아 학문은 비잔틴과 더블어 고전철학과 과학을 보전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와 주석은 거의 아랍어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중요 저서가 아랍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유럽이 가져가 재번역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유럽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이 아랍어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습니다. 즉, 코란에 인용되던 고대 철학을 하느님에게 인용하도록 바꾸고, 그 고대 철학의 원리를 신의 섭리와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스콜라 철학의 논점이었지요.

4. 문학과 미술의 발달

이슬람 세계는 공상적인 시와 설화 문학이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아바스 왕조 이후 이란 문학의 영향이 커서 산문이 발달하였고, 궁중문학이 발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는 9세기 아랍어로 번역된 페르시아의 천일야화를 기초로 하여 16세기 초 카이로에서 완성된 설화집입니다. 이것은 인도, 페르시아, 아바스 왕조, 시리아, 이집트의 설화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라비안 나이트( Alf laylah wa laylah)

아라비안 나이트 (Arabian Nights) 혹은 {천일야화}로 흔히 번역되는 이 작품의 정확한 원제는 {천 한 개의 밤}이다.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가 동양문학의 커다란 두 산봉우리로 [성서]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손꼽을 만큼 아랍어로 쓰여진 설화의 집대성이다. 전체가 하나의 큰 틀속에 있는 이야기인데 주요 이야기 180편에 100편의 짧은 이야기가 곁들여 있다.

이 작품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지만 6세기경 페르시아 사산 왕조때의 고대 설화집 [하자르 아프사나(천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 바그다드와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승돼오던 이야기가 추가되고 개작과 윤색을 거듭, 13∼15세기경 현존하는 형태로 완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아랍지역의 이야기뿐 아니라 페르시아 지역으로 흘러 들어온 인도와 그리스, 아프리카 등지의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으나 모두 아랍어로 기술되었고 이슬람 사상을 밑바탕으로 하게 됐다. 이같은 이유로 {아라비안 나이트}는 여러 지역의 민중 구비 문학을 집결한 세계 최대 기서(奇書)중의 하나이며 인류가 낳은 최고의 이야기 문학으로 손꼽힌다.

이야기 줄거리는 페르시아의 왕 샤흐르야르가 어느 날 사냥나간 사이에 왕비가 흑인 노예와 간통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격분한 끝에 그 둘을 죽여버린다. 그후 세상의 모든 여자를 증오하게 된 왕은 온 나라의 신부감 여자를 맞이하여 하루밤 수청들게 한 다음 다음날 아침에 신부를 죽여버렸다. 나라안의 신부감 여자들이 모두 죽거나 피신해버리자 마침내 그나라 대신의 딸인 샤흐라자드가 자진해서 왕을 섬기며 매일 밤 교묘한 말솜씨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하여 왕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샤흐라자드를 하루 하루 더 살려두게 되고 샤흐라자드는 매일밤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부와 악마의 이야기, 짐꾼과 바그다드의 세 소녀 이야기, 알라딘과 이상한 램프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 신드바드의 모험 이야기 등...이야기는 일천 일밤 계속 되고 드디어 왕은 샤흐라자드의 재주와 이야기 솜씨에 감탄하며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여 어진 정치를 베풀고 그 나라가 오랫동안 번성했다는 줄거리이다.

근본적으로 옛 아랍인들의 풍속사인 {아라비안 나이트}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가득한 이야기 문학의 보고(寶庫)이다. 질투에 차서 아내를 살해하는 남편의 이야기와 돈을 벌기 위해 장삿길에 나섰다가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상인들의 이야기, 낯선 풍속을 모르고 함부로 결혼을 했다가 생매장을 당하게 되는 나그네의 이야기 등 모두 인간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행간에는 단순한 재미만 있는게 아니라 인간의 슬기와 행동에 따른 교훈을 늘 주고 있어 이야기책 이상의 작품성도 갖고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는 언제나 선이 악에 이기고 신앙은 반드시 불신앙을 누른다. 인과응보가 철저히 적용되며 적선과 덕행은 어김없이 신의 보장을 받는다. 이 작품에서 외설스럽도록 농란한 애욕의 여러 장면들도 참된 삶의 철학적 진리를 전개해 나가기 위한 보조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1703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A. 갈랑(Galland)의 프랑스어역본이 처음 나오자 이 작품의 생동감과 상상력에 반한 유럽인들로부터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후 전 세계에 퍼졌으며 영국인 동양학자인 리차드 버튼(Richard Burton)이 완역한 버튼판 {아라비안 나이트}가 널리 읽혔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가난한 나무꾼 알리바바가 우연한 기회에 도둑의 일당이 보물을 숨겨둔 동굴에 들어가 그 일부를 집으로 가져온다. 그의 돈 많은 형 카심이 그 비밀을 알고 동굴에 들어가지만 주문(呪文)을 잊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도둑들에게 살해된다. 40인의 도둑은 알리바바까지 죽이려고 기도하나, 카심의 여종이었던 어질고 착한 마르자나의 지혜로 이들을 퇴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르자나는 자유의 몸이 되어 알리바바의 아들과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마르자나의 칼이 심장에 꽂히는 순간 손님은 "억!"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는데, 그때는 이미 혼이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마르자나는 너무나도 정확히 손님의 심장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알리바바와 알리바바의 아들은 그 순간 그 너무나도 뜻밖의 사태에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도 마르나자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단검을 뽑아내어 비단 천으로 닦고 있었다.

"오! 알라 이외에 신 없고 주권 없도다! 손님을 모셔놓고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다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알리바바 부자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소리치며 마르자나의 손에서 칼을 빼앗으려고 했다. 그들 부자는 마르자나가 미친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마르자나는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주인님들, 주인님들의 목숨을 노리는 도적 두목을 치도록 하기 위하여 이 연약한 처녀에게 칼을 내리신 알라를 칭송합시다. 이 사나이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한 달 전에 기름 장수로 변장을 하고 왔던 도적의 두목이랍니다. 친절하신 주인님이 환대의 뜻으로 제의했던 신성한 소금을 거부했던 이 사나이가 도둑의 두목인지 아닌지 우선 확인부터 해보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난 그녀는 쓰러져 있는 시체의 가짜 수염을 뜯어내고, 소매 밑에 감추고 있던 단도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의 신분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것은 그의 품에 간직하고 있던 피로 쓴 글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던 것이다.

"알라께 맹세코, 나는 서른 아홉명의 내 부하들의 목숨을 앗아간 알리바바와 그의 일족을 멸종시키고 말리라!"

그걸 보자 알리바바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후사인씨야말로 한 달 전의 그 기름 장수이며, 도둑의 두목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 전부의 목숨을 구해준 젊은 처녀 마르자나에게로 다가가 와락 그녀를 껴안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오, 내 딸 마르자나야, 너를 보내주신 알라를 나는 칭송할 뿐이란다. 다만 한가지 더 바랄 것이 있다면,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여기 있는 내 아들과 결혼해서 정말로 우리 집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란다."

그러자 마르자나는 기쁨에 찬 미소를 지은 얼굴로 알리바바의 손에 입맞추며 말했다.

"오, 주인님, 저로서는 더없는 기쁨일 뿐입니다."
그녀의 이 말에 알리바바와 알리바바의 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두 젊은이의 결혼식은 그날 당장 거행되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두목의 시체를 처리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노예 압둘라는 전에 서른일곱명의 도둑들을 묻었던 묘혈에 그들의 두목도 함께 묻었다. 그리하여 사십인의 도적은 모두 죽고만 것이다.

며칠 뒤, 알리바바의 아들과 마르자나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젊은 신랑 신부는 더없이 행복해 했다. 그들 뿐만 아니라 알리바바를 비롯한 모든 집안 식구들도 기뻐했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중에서)

내용출처 : [기타] http://www.chosun.ac.kr/%7Ehmsa/1001.htm

또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했기 때문에 종교, 예술에서 신과 인간을 조각하거나 그리는 일은 금지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교 사원인 모스크의 벽을 보면 조각이나 그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미술 양식도 문양을 중심으로 하는 양식으로 발달했습니다. <모스크 양식>은 큰 원형의 지붕과 종루를 가진 이슬람 고유의 건축 양식을 말하는데, 모스크의 안을 보면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문양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아라베스트 양식이란 식물의 잎이나 꽃을 아름답게 엮어놓은 문양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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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헬레니즘 사회의 융성

헬레니즘 시대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는 제 지식이 짧기에,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과 키포인트로 여겨지는 몇몇 사실들을 위주로 정리해 볼까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이라는 사실은 전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헬레니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중심으로 다뤄볼께요.

우선 헬레니즘 사회는 알렉산더의 동방 이민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2가지 효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을 차단하며, 그리스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2번째는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연결한 거대한 교역권과 경제권을 성립시키고, 그 무역의 주체를 그리스인으로 삼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나게 확장하였지만, 그 경제력을 알렉산더 제국의 경제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적인 고대 문화유산을 동방에 전파하는 동시에 금, 은의 약탈 등을 통하여, 동방의 자원을 착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앗티카(아테네 지방) 주화가 화폐로 통용되었고, 앗티카 방언이 공용어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그리스어가 제국의 언어가 되어 상업, 제조업, 광업 등의 모든 교역산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의 진출로 인하여 그리스적인 형태의 도시가 제국 곳곳에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70여곳이나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죠. 또, 아시아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안티오크도 이 당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동서양의 거점에 위치한 로도스섬, 델로스섬도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알렉산더 제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는 <노예노동>을 통한 대규모 농업경영이라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공업, 수공업, 농업 등에 <그리스적인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였죠.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원주민과 이주 노예>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적인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이 원주민과 자주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국은 원주민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통치함으로서,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빈주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노예노동과 원주민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경제번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그리스적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원주민과 노예>를 기반으로 합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는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국의 물질적 자원과 풍부한 인적 기반이 새롭고 발전된 제국의 기반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소모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알렉산더 제국이 로마제국에게 힘없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 때문이지요.

2. 헬레니즘 문화를 정의내리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결국 동서문화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평등한 입장에서의 융합은 절대 아닙니다. 전술했듯이, 원주민 착취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까요. 이것은 그리스적인 입장에서의 문화가 폴리스 단위를 넘어 세계적 단위로 탈바꿈한 정도의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도시국가적인 문화는 오리엔트의 거대한 전제적이고도 전체적인 문화를 만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보편적,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문화로 나아갑니다. 특히 철학, 문학, 예술 분야는 그리스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동양적인 문화 색체를 가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이 문화는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제국인만큼, 로마, 이슬람, 간다라, 중국 등 당대 모든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대표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예술 분야를 살펴볼까요?

3. 헬레니즘 철학 - 스토아 학파

헬레니즘 시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기 때문에 철저한 금욕을 통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이 중요한 점은 거대한 제국 질서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진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분립주의적 성격을 넘어선 <초폴리스적인 세계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철학은 알렉산더 제국과 같은 세계국가란, 자연법과 보편적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국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법>이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자유와 평등을 원칙적으로 지켜줌으로서 정의가 살아있는 법을 말합니다. 세계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한 시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모든 시민들은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평등한 시민입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구속에서도 해방되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해방된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세계국가이며, 이 세계국가에서의 시민이란 철저한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원자적인 개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은 철저히 받아들이면서도, 실제 정치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반이 그리스적인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국가와 같은 이상국가의 이념은 지배층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의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적인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이였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토아 철학의 논리는 훗날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세울 때, 그대로 받아들였던 논리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념을 수용하여, 시민권의 분배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적절히 하였습니다. 단, 제정 후기의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논리보다는 점차 향락에 빠짐으로서 제국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키포인트입니다.

또 스토아 학파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세계시민사상은 유대교가 배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 크리스크교 초기의 구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민족성을 과시하던 부분이 있어서 타 민족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상이 크리스트교 사상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만나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4. 헬레니즘 철학 -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학파라 불리며, 스토아 학파의 반대선상에 있는 철학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저급하고, 더러운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제정 로마 후기 사회적으로 퇴폐하고 문란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생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본 철학은 <정신적 쾌락과 개인적 세계>를 위한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일단 국가라는 기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각 개인들이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즉,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면 국가는 필요없는 기구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로크의 저항권이나, 근대 시민권의 개념이 이들에게서도 보입니다.

또 이들은 개인이 철저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즐거운 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즉,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들이 실제 쾌락적인 삶을 산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쾌락 이전에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로,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인데,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지요. 즉,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두려운가? 신이란 무엇이며,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등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는 것이 곧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은 언뜻 보면 난잡하고, 쾌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토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시민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사상이 로마 제정 초기에는 그 근본정신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말기에는 난잡하고 문란한 쾌락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미술이 감각적, 향락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바로 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추구의 영향이 큽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이 금욕을 하던, 수양을 하던 간에 이들은 쾌락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니까요.

5. 헬레니즘의 예술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 예술을 봅시다. 이들의 예술은 그리스적인 가치관, 즉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현실미를 추구합니다.

헬레니즘에서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을 넘어서서 인간육체가 얼마나 관능적인 미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니케상은 승리의 여신이 자유롭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오콘의 군상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며, 정신적 쾌락을 방해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코린트 양식>입니다.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 이야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갈께요. 헬레니즘 건축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혼합된 것 처럼, 고전적인 공공건물과 세속적인 건축 양식이 동시에 보입니다.

5. 자연과학의 발달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시민주의가 발달하면서, 보편적으로 탐구되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명제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명제에 호응하여 발달한 분야가 자연과학 분야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 유클리드의 물리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오선 측정과 지구둘레의 계산 등은 이 당시 자연과학이 최첨단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곳곳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국가가 처음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투자한 시대입니다. 실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의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과 과학의 대부분을 스승이 지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뤄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도서관으로 바로 바로 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생전에 절대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인문과학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해설을 다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기록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겨우, 로마편에 입문하겠군요. 로마편은 제가 유럽 고대사 중에서 그나마 책을 좀 많이 읽은 부분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적을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전개해보겠습니다. 그럼 로마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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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의 철학이야기 -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철학

1. 소크라테스

그리스 역사에서 훗날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고대 철학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꼭 다루어야 하지만 이 사이트는 철학 사이트가 아니라 역사 사이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들 그리스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해서 다루고, 후대 역사에서 <가치가 큰 일부 사상> 만을 다루겠습니다. 자세한 철학적 부분의 이야기는 나중에 <그리스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생성할 때, 개별적으로 만들겠습니다.

먼저 소크라테스 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아테네 민주주의> 시대에 태어난 시대적 산물인 소피스트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소피스트들의 역사적 의의가 바로 자연철학적 사고방식을 인간철학으로 전환시킨 것에 있다고 전술했었죠?

소크라테스는 <인간철학>으로 관심을 돌린 소피스트들을 일단 지지합니다. 그리고 소피스트들이 아테네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 데 일조하였으며, 그들의 웅변술과 수사학이 아테네 시민들의 교양에 일부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비판한 것은, 아테네 민주정치가 소피스트들에 의해 너무 한쪽 측면으로만 치우친다는 점입니다. 즉, 웅변술과 수사학을 추구하는 소피스트들이 자연 철학의 근본적 목적인 <본질과 절대적 진리의 탐구>라는 개념을 아예 버리고, 출세와 입신양명을 위한 교사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은 소크라테스에게는 큰 불만이었죠. 그리스 철학이 여기까지 온 것에는 <진리 그 자체에 대한 사랑>과 <철학의 근원>을 끊임없이 탐구한 자연철학자들의 업적도 큰 것입니다. 그 업적의 토대 위에서 인간철학으로 전환했어야 하는데, 소피스트들은 이 업적을 버리고 오로지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에 맞는 철학만을 추구했던 것이죠.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사상의 근원에는 자연철학과 인간철학의 장점을 모두 공유한 자연철학적 인간철학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되, 자연 속에서 인간이 꼭 지켜야 할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모든 개성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살아있되, 그들이 꼭 지켜야할 보편적 진리는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은 소피스트들의 상대적 진리관을 버리고,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절대적 진리는 절대적 선이며, 절대적 선은 도덕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함으로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이라는 것은 <정의, 절대적 진리, 절대적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그럼 이 도덕이라는 것을 알고 지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 성찰>입니다. 이 세상 속에 살고 있는 내가 누구이며, 내가 무엇을 알고 있으며, 내가 남들과 무슨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자기 성찰이죠.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에 대해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끊임잆이 탐구하는 자세(탐구법), 끊임없이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자기를 깨닫는 자세(문답식 교육), 상대방과의 대화속에서 서로의 모순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자세(산파술)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장 아테네에서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듣고는 깜짝놀라, 다른 유명한 철학자들과 대화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아주 유명한 철학자들 및 소피스트들과 대화한 후 1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것은, 최소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 1가지는 알고 있는데, 소피스트들은 그것조차 모른채 자신들의 철학이 대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1가지 사실의 차이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깨닫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구요.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말을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플라톤 등 제자들이 기술한 몇몇 저서 외에는, 알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적은 저서가 없기 때문이죠.

2. 플라톤

플라톤 철학의 역사적 배경은, 피타코라스의 <오르픽교>의 영향이 큽니다. 오르픽교는 그리스 종교사 할 때, 다루었죠? 고대 그리스에도 미신적이고, 내세적이고, 영생을 갈망하는 초기 교회 성격의 종교가 있었다고 말입니다. 기독교와 연관있는 고대 종교지요. 플라톤 역시 약간 오르픽교와 관련이 있는 철학자이면서, 소크라테스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처럼 절대 불변론이면서도, 약간 신비주의적 관점이 들어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진리의 불변성과 절대성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는 철학의 일관성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변명(대화편), 크리톤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철학적으로 유명한 책들이죠.

하지만, 플라톤 철학에서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가장 중요한 책은 <공화국>입니다. 이 공화국이라는 저서에는 2가지 아주 중요한 플라톤의 핵심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데아론과 철인정치론입니다.

플라톤 철학 중 역사적으로 중요한 1번째는 <이데아론>입니다. 이데아론은 참된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이니라, 이성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초월적 세계이며, 참된 진리 역시 이성으로 인식해야 하는 관념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관념적인 진리를 <이데아>라는 말로 압축하였습니다. 특히, <선의 이데아>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고차원의 이데아인데,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 선>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됩니다.

플라톤은 이 이데아론이라는 어려운 철학을 <동굴의 비유>라는 예시로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즉, 동굴안에서 안쪽으로 앉아있을 때, 우리는 밖에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만들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그림자를 보고 이것이 진짜 형상이구나, 이것이 진리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이 동굴에 앉아있을 땐 보고 느끼는 것이 그림자 뿐이니까요. 그러나 돌아서서 동굴 밖을 보면 그림자가 아닌 색과 모양이 선명한 진짜 형체를 보게 됩니다. 진짜 모습을 보았을 때 우리가 상상했던 그 모습을 깨지고, 진리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데아>란 동굴 안에서 진리라고 보았던 것이 아니라, 동굴밖에 실제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동굴안에서 진리를 상상하고 살고 있습니다. 진실한 모습은 이성으로 끊임없이 추론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인 <실제론>과 함께 유럽 철학의 <관념론>이라는 큰 흐름으로 자리잡습니다.

플라톤은 저서 공화국에서 <철인정치>라는 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 철인정치는 아테네적인 민주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정치입니다. 플라톤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테네를 위해 헌신적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죽인 것에 대하여 큰 불만이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민주정치는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는 스파르타식의 국제 모델을 생각하여 철인 정치가 좋다고 말합니다. 철인정치란, 철저한 <계급주의>에 입각하여 계급을 나누고, 그들이 맡은 바를 각자 하는 정치를 말합니다. 즉, 철인은 국가를 다스리는 지도자,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계급, 일반인은 생업에 종사하는 계급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정치는 언뜻보면, 선거로 지도자를 뽑아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간접민주정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체주의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을 말하지만 끝도 없고, 여기에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밑빠진 독에 물붓기네요. 유럽철학의 근간이자, 유럽의 철학적 사유의 성전인 이 철학은 한마디로 전술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역사적 관점에서만 서술해보고, 나머지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키워드로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요, 루케이온 학원의 창립자이자, 소유학파의 거두입니다.

그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철학인 <보편적 진리>라는 점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보편적 진리를 바라보는 입장이 앞선 스승들과는 다릅니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 진리를 <도덕적 선>에서 찾았다면, 플라톤은 <관념적 이데아>에 진리가 있다고 말했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장을 넘어 <사물의 질량>속에 불변의 진리가 내제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사물의 본질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며, 이데아가 이닌 사물의 질량 자체에 내제되어 있는 것이죠. 플라톤은 본질과 관념적 이데아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2원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자체에 본질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원론>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책임졌고, 알락산더 대왕은 정복한 전세계의 모든 문화와 서적을 그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그는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이전에는 유래가 없었을 만큼, 방대한 지식체계를 쌓은 사람이 되었고, 그것을 통해 모든 학문을 망라하여 집대성하였습니다. 그는 이 철학적 체계를 정리하기 위해 자연사 분야의 실험적인 방법, 경험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합니다. 실제, 책에 나와있는 것을 해보고, 경험하고, 확인하는 방법을 통해 방대한 분량의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이지요. 그 결과 그는 이전과 다른 지식의 탐구방법까지 제시하는 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경험론적, 귀납법적> 방법론입니다.

혹시,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을 보셨나요? 그 책을 보면 수도사들이 알게 모르게 죽어가는 데, 그 이유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감추어진 금단의 책을 찾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푸코의 진자>나 <다빈치 코드>의 원조격되는 중세시대의 추리소설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와 저서는 중세 철학과 사상의 성전이었지만, 워낙 방대한 저술을 하다보니, 교회에서는 그 철학적 체계를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에 모두 일치시키지는 못했답니다.

각설하고, 그가 집대성한 학문의 키포인트는 바로 <중용>의 철학에 담겨 있지요. 중용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뜻입니다. 역사적 관점에서만 보면 중용은 모든 학문과 정치형태에 있어서도, 중간적 형태를 가장 <행복한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위치>로 보는 것입니다.

중용적 관점에서의 철학은 <원자론>과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일치시킵니다. 즉, 스승의 이데아를 완전 부정하지는 못하면서, 이데아라는 것도 존중하지만, 진리 속에서도 형상은 있다라는 관점입니다. 즉, 진리는 질량 속에 내제되어 있지만, 그것을 원자로써 쪼개면 아주 작은 무언가로 변형됩니다. 그럴 경우에는 우리가 그 사물의 본질과 본래 모습을 눈에 볼 수 없으므로, 이성으로 추론해야 하는데, 이 때는 이데아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그 추론은 상상이 아니라 실험과 경험으로 해야 합니다

그의 사상중에 정치적으로 유명한 것이 저서 <정치학>인데, 여기서도 중용의 철학이 엿보입니다.

그는 일단 플라톤이 제시한 <철인국가>라는 이상적 정치체제는 무시합니다. 그는 현실정치라는 것은 선악으로 구분된 이원적 지배체제라고 합니다. 선, 악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철학을 나눠보죠.

1인이 지배하는 정치 - 군주정치(선), 참주정치(악)

소수가 지배하는 정치 - 귀족정치(선), 과두정치(악)

다수가 지배하는 정치 - 민주정치(선), 민중지배(중우정치, 악)

그는 플라톤처럼 민주주의는 악이고, 철인정치가 선이다라는 흑백논리는 버립니다. 그는 각각의 정치는 장단점이 있으며, 그 정치를 잘 이끌어가면 선, 잘못하면 악으로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는 나중에 키워드를 만들어서 자세히 정리한 뒤 세계사인물방에 올리겠습니다.

여기까지해서 그리스의 시작부터, 끝까지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스를 마무리하니깐, 헬레니즘이 저를 부르는군요. 어짜피 정리한 김에 헬레니즘도 그리스 이야기에 그냥 포함시켜서 마저 정리해보죠... 헬레니즘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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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레스는 누구인가?

탈레스(B C 640-545) : 밀레토스학파의 선두주자, 통상 철학의 시조로 숭상됨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사람으로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라고도 부르죠.  그는 최초의 자연철학자라고도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서는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죠.

탈레스의 사상은 그 사상 자체의 위대함이라기 보다는 서양철학사에 있어 학문적으로 철학이 무엇인가를 밝혀준 최초의 등불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와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이죠. 탈레스는 일단 우주의 생성원리를 물에서 찾은 최초의 자연주의 철학자입니다.

2. 아르케는 곧 물이다.

그는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물이라고 하였습니다.(시작점, 원리 등을 아르케(arche)라고 하는데, 그는 아르케는 물이라 했죠) 그는 스스로, "만물의 아르케가 무엇인가? 만물의 아르케는 물이다" 라고 묻고 답하곤 했답니다. 쉬운 말로 만물이란 물에서 생겨 결국 물로 돌아간다는 뜻이지요.

그럼 만물의 근본이 왜 물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그는 먼저 물은 모든 생물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 물질이라는 점에 착안하였을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수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죠. 두 번째로 물은 고체, 기체, 액체로 그 형태가 변하듯 다양한 형질로 바뀔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고대 신화에서 물을 만물의 시조로 여기는 부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도 영향을 준 듯 싶습니다.

탈레스는 만물은 물로 이루어졌다는 일원론적인 철학체계를 제시했습니다. 또 만물은 물이라는 물질에서 비롯된다는 유물론적 시각도 이때부터 시작된 듯 싶습니다. 탈레스의 입장에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철학적 논쟁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결국 그것은 만물의 시초인 물에서 비롯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가 왜 물을 모든 사물의 본질로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실제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가 단순히 사건들을 관찰하다가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만물의 영양소가 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열이 수분에서 발생하며 수분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또한 만물의 씨앗들이 수분을 가지며 그 수분의 근원은 물이라는 사실로부터 탈레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탈레스는 주변의 현상들에 관심이 많았고 모든 사물들에는 공통적인 영원불변하는 연관되는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곧 하나의 원리 속에서 규명되며, 하나의 원리는 곧 우주를 구성하는 근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탈레스적인 해석이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탈레스의 사상보다는 탈레스가 제기한 문제의식입니다. 탈레스의 사상의 핵심은 만물을 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즉, 철학이라는 것이 고민과 성찰이라는 측면을 중요시한다고 했을 때, 탈레스는 철학적 사고와 의문을 제기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뜻이지요.(물론 서양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입니다.)

탈레스의 사상은 인류에게 크나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인간이 본질이라는 절대적 측면과 현실이라는 측면을 나누어 생각하게 되었고, 이렇게 생각하였을 때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결국 무엇이냐라는 최초의 물음이 여기서 시작된 것이지요.

3. 밀레토스 학파란?

여기서 밀레토스 학파를 한번 짚어봅시다. 밀레토스 학파는 사물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탈레스적 사고를 추구하는 학파입니다. 그들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은 실재로 존재하며, 그 존재하는 만물의 기원을 아르케라고 부릅니다. 아르케는 모든 만물의 시작이며, 모든 만물이 다시 되돌아가는 근원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지만, 그 기원은 아르케는 영원하다고 믿습니다. 즉, 아르케는 영원함을 가진 존재이며 영혼과 동일한 존재입니다. 탈레스는 "만물은 신들로 가득차 있다"라고 말합니다.

탈레스의 철학은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계통을 통해 밀레토스 학파가 완성되게 됩니다.

먼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B.B. 610~545)는 탈레스의 제자인 동시에 후계자로서 스승과 거의 동시대에 밀레토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는 스승과 달랐습니다. 스승이 경험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만물을 물이라 하였던 것과 비교됩니다. 그는 만물을 연구함에 있어서 물과 같은 물질을 아르케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불, 흙, 공기 등 다른 물질들이 물에서만 발생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죠. 그는 물질이 아닌 개념적으로 추론하고,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것으로 아르케를 삼으려고 노력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승처럼 단일한 본빌이 만물을 구성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물이 아닙니다. 물은 다른 수많은 요소들 중 하나의 요소일 뿐입니다. 그는 만물의 근원은 어떤 형태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무한한 것이라고 파악했습니다. 형태를 갖춘 일반 사물들은 이미 그 형태가 있는 물질일 뿐 근원일 수 없습니다. 즉 만물의 본질은 "비결정적 무한성"을 가진 무엇인가라는 개념적인 추론을 통해 만물의 근원을 연구한 것이지요. 그는 이것을 "하나의 영원한 운동이 있었고, 이것을 통하여 삼라만상이 탄생하였다"라고 개념적인 정의를 내립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무한자이다."

밀레토스 학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4, B.C.)는 아낙시만더의 젊은 친구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물의 근원으로서의 무한성이라는 친구의 개념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개념은 애매모호하고 임의적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더욱 깊은 고민끝에 만물의 근원은 공기라고 주장합니다.

4. 만물의 근원은 도대체 무엇인가?

밀레토스 학파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만물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이후 계속 이어집니다. 이후의 학자들은 이 학파의 논의에 대해 새로운 시도와 끊임없는 정의를 시도합니다. 구체적으로 몇 명의 학자들의 주장만 적어봅니다.

1) 탈레스(Thales, 624-546 B.C.) : 존재의 근원은 신이 아닌 물질.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

2)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610-546, B.C.) : 만물의 근원은 무한(aoriston)이다.

3)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4, B.C.) : 만물의 근원은 공기(pneuma)이다.

4) 크세노파네스(Xenophanes, 570-480, B.C.) : 만물의 기본 요소는 흙이다.

5)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41-475, B.C.) : 모든 물질의 본질은 형상이 없고 변화하지만, 가장 활기찬 것은 불이다.

6)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499-428 B.C.) :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질 변화의 수만큼의 원소가 있다.

7)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83-435 B.C.) :  4원소설(흙, 물, 불, 공기)을 주장하였습니다. 만물은 4개 원소의 각 부분이 '사랑(philia)'과 미움(neikos)'의 두 개의 힘에 의하여 혼합되거나 분리되어 형성된다고 합니다.

8) 플라톤(Platon, 427-347 B.C.) : 4원소설을 수학적, 기하학적으로 변형하였고, 4원소 이외에 제5원소로서 에테르(aither)를 언급하였습니다.

9)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 4원소는 하나의 원질(primary matter)로 되어 있고, 이 원질에  건(dry), 습(wet), 냉(cold), 열(hot) 4개의 촉감적 성질(quality)이 두 개씩 조를 이루어 부가되어 현실적 원소가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10) 레우시푸스(Leucippus, 500 B.C.) :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졌다.

11)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460-370 B.C.) : 원자설을 완성하였습니다.

        ① 세계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것(atomos, 원자)과 공허한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다.

            원자는 모두 같은 원질로 구성되지만 형태, 크기 무게는 다르다.

        ② 무에서 새로 생기거나 존재하는 것이 소멸하지 않는다.

            소멸처럼 보이는 것은 원자 운동으로 다른 것으로 변환된 것이다.

        ③ 원자의 운동은 기계적이며 필연적이다.

12) 에피쿠로스(Epikuros, 342-271 B.C.) :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운동이 신에 의하여 예정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는 그 운동은 무작위적이며 자유 의지 같은 무엇인가의 결과이며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13) 루크레티우스(Lucretius, 95-55 B.C.) : 기원전 57년에 라틴어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지었습니다. 이 시가 1417년에 발견되어서 원자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5. 탈레스에 대한 일화들

1. 탈레스와 사고

탈레스는 그리이스 일곱현인 중에서도 최고라고 일컬어 질 만큼 유명한 수학자이며 철학자로서, 기원 전 620년 경에 그리이스 이오니아 해안의 밀레토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인 아버지와 어느날 함께 지중해를 건너 먼 이집트로 갈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집트의 고전에 관심을 가져온 그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먼저 그는 피라미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 저렇게 웅장한 것을 인간이 만들 수 있었을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이집트인으로부터 아직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불가사의한 책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책을 꼭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탈레스는 이집트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 책의 소재를 탐문해 본 결과 어느 사원의 사고(事庫)에 비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기쁨에 넘쳐 그는 이 사원의 승려에게 그 책을 보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지만 좀체로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탈레스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끈질기게 부탁을 계속했더니 그 승려도 결국은 그의 열성에 마음이 움직여 그 책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이 책은 수학과 천문에 관하여 쓴 것으로서, 탈레스가 그 방면에 평소부터 연구해 왔기 때문에 꿈에서도 읽을 만큼 그 책을 열심히 읽어 그 내용을 흡수하였다.

2. 일식을 예언

탈레스는 기원 전 585년 5월 28일 일식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언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오늘날에는 신비한 일도 아니지만, 기원 전 585년에는 태양의 일부 또는 전체가 달에 의해 가리워진 다는 것을 예언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탈레스가 비록 이집트를 다녀온 천문학자라 해도 설마 태양이 이지러진다는 것을 알 수야 있겠느 냐고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은 5월 28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 날은 왔다. 탈레스는 예언은 적중하였다. 한낮에 하늘은 갑자기 밤이 온 것처럼 어두워졌다. 마을 사람들은 탈레스가 천문에도 밝다는 사실에 경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단지 수학자로서 뿐만이 아니라 천문학자로 서도 그 명성이 그리이스 전역에 떨쳐지게 되었다. 어느 역사가는 "그리스의 철학은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시작되었다"라고 말한다. 이 날은 탈레스가 예언한 일식날이었다.

3. 웅덩이에 빠지다.

천문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탈레스는 자주 하늘을 쳐다 보면서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 날 저녁에도 전과 같이 무심히 밤하늘을 보면서 산보하고 있었다. 지상의 것은 어느 하나도 관심이 없 었다. 갑자기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놀라 보니 그 소리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별에 정신 을 팔고 걷다가 길옆의 웅덩이에 빠진 것이다. 그러자 익살스런 하녀가 그를 비웃었다. "자기 발 밑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면서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다니.... "

이 이야기에 대하여 플라톤은 진지하게 말한다.

"그와 같은 조소는 철학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사실 철학자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 무엇을 하는지, 심한 경우에는 자기가 인간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인지조차 모른다. 철학자는 하녀 뿐 아니라 법정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는 웅덩이 뿐 아니라 온갖 어려움에 빠질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서툰 행동을 한다. 그러나 철학자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달리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통구하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4. 피라밋의 높이를 재다

이집트에서는 왕이 죽으면 돌로 산처럼 큰 무덤을 쌓아 올린다. 이러한 왕릉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만 명의 노예가 매일 일해도 몇 십 년의 세월이 걸려야 할만큼 엄청난 노동력과 경비가 소요되었다. 지금도 수십 개의 피라미드가 남아있었지만 그 중 제일 큰 것의 높이는 5.6백자가 넘는다고 한다. 탈레스는 그 피라미드의 높이를 겨우 몇 자 밖에 안 되는 짧은 막대 하나를 가지고 알아냄으로써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탈레스는 과연 피라미드의 높이를 어떻게 재었을까?

탈레스는 피라미드와 태양의 반대쪽에 막대기를 세우고, 피라미드의 그림자 끝과 막대기 그림자 끝이 일치(만남)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삼각형 ㄱㄴㄷ과 삼각형 ㄱㄹㅁ의 두 닮은 삼각형이 생겨나게 되는데, 막대기의 길이는 이미 알고 있고(1m 막대기를 사용하면 편리하다.) 땅의 길이는 평면이기 때문에 금방 잴 수 있다. 그래서 탈레스는 다음과 같은 식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1 :h=χ : y

h×χ=y×1

h(높이)=y÷χ , (높이)=(큰 삼각형의 밑변의 길이)÷(작은 삼각형의 밑변의 길이)

탈레스는 이와 같이 그림자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구할 수 있었다.

5. 탈레스의 제자들

탈레스는 고향인 이오니아에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제자들과 함께 수학을 연구하였다. 따라서, 그의 제자 중에는 유명한 수학자가 있다. 그 중에도 아낙시만델과 아낙사고라스, 아낙레메네스 등은 최고의 수학자들이다. 그들을 학계에서는 이오니아 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아낙시만델은 어떤 사정으로 붙잡혀 오랜 기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수학을 연구하였다. 그 때 연구한 것 중의 하나는 원의 넓이와 같은 넓이를 가진 정4각형을 만들라는 문제였다.

이것은 '원적문제' 로 알려진 기하학의 3대난문 중의 하나로서, 자와 컴파스만으로는 작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재는 증명되고 있다. 탈레스는 비례 뿐만 아니라 초등기하학의 각 부분에도 손을 대어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 등과 마찬가지로 열심히 연구하였다.

6. 부자가 되어 버리다.

어떤 사람이 탈레스에게 "도대체 학문 따위는 쓸모가 없소. 당신같이 학문하는 사람은 모두 가난하지 않소?"라고 비옷었다.

그러자 탈레스는 그해 겨울 자신이 가진 모든 돈으로 밀레토스 일대의 올리브 착유기를 모두 사 버렸다. 다음해 가을이 되자 그가 예언한 대로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착유기를 빌리러 왔다. 그를 비웃었던 사람 역시 착유기를 빌리러 왔다. 탈레스는 이들에게 비싼 값으로 기계를 빌려주고 많은 돈을 벌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일화는 이렇게 설명한다.

"학자는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학자의 목적은 부자가 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탈레스는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7. 결혼에 대한 일화

탈레스의 어머니가 그에게 결혼을 하라고 하였다. 탈레스는 "아직 결혼할 시기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나이가 더 든 뒤 어머니가 결혼을 재촉하였다. 탈레스는 "이제 결혼할 시기가 지났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머니가 탈레스에게 왜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는냐고 말했다. 탈레스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라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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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