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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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 고대 지중해 세계
 ① 에게 문명
  에게 문명은 에게 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문명들을 말한다.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등이 있었는데, 트로이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기원전 2000년 전에 크레타 문명크레타 섬에 있었던 문명을 말하는데, 크노소스 궁전과 궁전 안에 거대한 미궁으로 된 구조를 볼 때 그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섬에 위치한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나 유럽에 청동기와 오리엔트의 문명의 유산을 전해주는 중간 매체가 되었다. 반면 기원전 14세기에 등장한 미케네는 대륙에 위치한 문명으로, 대륙적인 호방한 성격과 상무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미케네는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의 이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도리아인은 훗날 스파르타를 건국하는 민족이다.

 ② 폴리스의 형성
  폴리스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약 8세기였다. 도시국가인 폴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그리스의 지형에 따라 그리스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集住) 형성되었다. 보통 폴리스의 형태를 크게 아테네형과 스파르타형으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폴리스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외의 것은 구체적으로 구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크게 산 둔턱에서 신전과 요새의 기능을 하는 아크로폴리스와 중앙광장인 아고라로 구성되어있다. 아고라에선 연극, 음악회, 향연 등이 열렸다. 그리스인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헬렌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을 ‘헬레네스’라고 하고, 변방의 외국인들을 ‘바르바로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4년에 한 번씩 현재의 올림픽과 같은 올림피아를 열어 운동시합을 겨뤘다.

 ③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케네를 멸망시켰던 도리아 인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원주민이었던 아리아인과의 마찰인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스파르타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마찰은 더더욱 확대되었다. 도리아인은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펴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스파르타 전체인구에서 도리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0% 전후로, 모든 도리아인은 군인이 되어야만 했다. 이들은 ‘아고게’라고 하는 공동 학습의 장에서 군사, 글쓰기, 문화 등을 수료해서 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전사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다. 반면 스파르타의 아리아인은 대부분 헬로트(헤일로타이)라는 노예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리아인들은 노예들을 감시하고 지배하였다. 무역은 페리오이코이라는 반자유인들에 의해 행하여졌는데, 아테네에 비해 활발하지 못했다.

 ④ 아테네
  아테네는 정복 국가의 성격을 띠는 스파르타와 달리,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폴리스이다. 처음엔 왕정이었다가 귀족들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상무역으로 상공인 계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아테네는 점점 보다 민주적으로 변해갔다. 아테네가 가장 크게 변화하게 된 동기는 전술상의 변화였다. 상공인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중무장을 하여 보병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중장보병이라 한다. 중장보병은 기병을 밀어내고 아테네의 주력이 되었다. 이를 통해 상공인 계층은 정치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⑤ 아테네의 민주주의 발달과정
  솔론은 아테네의 주력이었던 상공인 계층에게도 정치적인 권한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솔론의 ‘금권정’이다. 비로소 상공인 계층인 부를 통해 정치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부의 정도에 따른 평등을 기하학적 평등이라고 하며, 솔론의 금권정은 기하학적 평등에 의한 민중의 참여정치인 것이다.
  솔론의 개혁은 그 당시 상당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을 잡고 있던 귀족들은 솔론의 개혁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공인 층 역시 자신들의 정치 참여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귀족과 상공인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군사로 제압하고 권력을 잡은 것이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그는 군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시민을 다독여 지지를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를 참주정이라고 한다.
  참주정은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폐지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의 정책은 시민들에게 시원치 않았고, 시민들은 그들을 결국 추방하게 된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앞서 나타났던 참주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으며, 500인회를 구성하고 여기에 성인 남자를 참여시켜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갔다.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지중해 폴리스들에게 크나큰 위험이었다. 오리엔트에 위치해 그동안 많은 문화를 그리스 지역에 전파한 바 있는 페르시아는, 이젠 무력을 가지고 그리스 세계의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3차에 이른 페르시아 완정은 마라톤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훗날 있을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로 동맹을 맺게 되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도 그러한 동맹 중에 하나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의 완성은 아테네의 생활수준에 큰 변화를 주게 된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도 포함되는데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전쟁자금을 끌어들여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특수직이 아닌 일반 행정직 같은 경우에는 추천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아테네의 영광은 페리클레스 사후에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중우(衆愚)정치로 변질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아테네인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감정마저 갖게 된다.

Tip. 아테네 민주주의 발달 과정
솔론의 금권정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 클레이스테네스 - 페리클레스 - 중우정치

* 주의
아테네 사회가 다소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 때의 민주주의의 개념과, 지금의 민주주의의 개념은 너무나 다르다. 별도의 것이라고 봐도 좋다.

 ⑥ 폴리스의 쇠퇴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같이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을 탐탁케 여기지 않았다. 결국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격돌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쟁은 육군이 발달한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끝났다.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폴리스들의 전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도시국가에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고 비난했다. 폴리스 후반기에 주도권을 잡은 것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아닌 테베였으며, 테베 역시 오랜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였다.

 ⑦ 그리스의 문화
  그리스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적, 현세 긍정적, 합리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한 성격은 바로 미술에서 나타나는데 페르테논 신전과 아테네 여신상에서 볼 수 있는 조화와 균형적인 미가 바로 그것이다. 아테네에선 특히 철학이 발달하였는데 탈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자연 철학자부터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다. 역사서로는 최초의 역사서라고 일컫는 헤로도토스의 『역사(페르시아 전쟁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 생각해볼 문제
그리스의 문화가 저러하다면, 과연 페르시아나 이집트는 동물 중심적이고, 현세 부정적이며, 불합리적인 문화를 이루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미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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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 H I S T O R I A > 정말 생각없이 적은 글...

민주주의의 광기 - 흑사병보다 무서운 정부의 정책들과 병에 걸린 국민들

눈에 보이지 않는 병...

어느 잡지에서 흑사병에 대해 새롭게 쓴 책을 소개한 글을 본적이 있다. 저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그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흑사병으로 온 유럽 인구가 죽어 버렸다. 중국에서 시작된 악마의 병인 흑사병은 몽골부대의 진군과 함께 유럽에 전해져 유럽인이라는 종족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아시아에서 시작된다. 신항로 개척은 중국이 시도하게 되었고, 아메리카를 점령하여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도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인이다. 세계의 역사는 바뀌게 되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볼 것이다라는 카피가 생각날 정도로....

몸이 검게 변해 죽는다는 흑사병은 지금 21세기엔 가벼운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병이다. 지금은 이러한 병이 퍼질 이유가 없다.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다고 하여 일명 <패스트>라 불린 병... 지금은 지루함을 달랠 먼 옛날의 흥미거리로나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아테네의 민주주의, 그 결말 속의 광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정치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는 민주주의가 병에 걸릴 확률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 그 병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성을 잃게 만들고,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집단 광기>로 바뀐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 아테네의 시민들은 스파르타와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룰 때, 승리자는 당연히 아테네라고 생각했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국에게서 엄청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었고, 농경사회인 스타르타는 단순히 군사력에 의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펠레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의 이간책에 의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에 앞서 시민들이 모인 뒤 신전에서 신탁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 결정은 큰 화를 불러오게 되었다. 마침 퍼지기 시작한 전염병은 모여있던 그들을 몰살시키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국력의 우위에 있었던 아테네는 전쟁을 지속하면서 차츰 스파르타와 대등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테네의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테네인들이 선출한 6인의 장군이 전쟁에서 대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6인의 장군들이 무사히 군대를 살리기 위해 철수하면서, 물에 빠진 병사들을 버리고 온 것이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사랑하는 자신들의 아들들이 살 수 있었음에도 버리고 온 장군들에게 죽음을 내려야 한다는 것에 한 표를 던진다. 장군들은 전쟁에서 더 많은 군대를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음을 설명하였지만, 그들에게 내려진 것은 죽음이었다. 유능한 장군을 잃은 아테네는 이후 스파르타에게 계속적인 대패를 당하였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뒤 특출한 지도자가 없던 아테네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는 <민주주의>이지만, 그 민주주의를 이끄는 시민들이 안락함에 젖고 무능해지면 바로 <바보들의 지배>로 전락한다고... 그는 정치체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정치체제를 이끌어가는 주체들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군주의 1인 지배도 현명한 군주가 있을 때에는 효율적인 정치체제가 되지만 독재정치나 참주정치, 군인정치가 되었을 때는 몰락한다고 말한다. 또, 귀족들이 다스리는 정치도 그 정치체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현명한 1인의 군주보다 현명한 다수의 귀족들의 정치가 더 훌륭할 수 있고, 현명한 국민들의 정치는 더욱 훌륭하다고 말한다. 단, 다수일수록, 전체로 갈수록 현명한 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다수가 다스리는 정치일수록 누군가를 현명하다고 말한다면, 누군가는 어리석다고 말해야 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어리석은 자>들은 그 체제를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지금 그것을 인정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장치는 <교육제도>이다. 도덕과 윤리, 역사를 통해 그 사회 구성원들의 동질성을 가르친다. 교육은 <개인의 자아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인 <민주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교육>이다.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독자적인 인격이며, 민주주의 사회 속을 살아가는 일원이라고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사회 체제 속에서 불합리하거나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것들도 <사회적 관용>아라는 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실제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더 혹독한 <적응>의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광기가 있는 것일까?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유럽의 정복자들에게 대륙을 약탈당하던 시기...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을 처참하게 망가지게 만든 그 병을 뒤늦게 경험해야 했다. 유럽인들이 내민 달콤한 손길은 곧 독으로 번지게 되었고, 인디언들은 병에 걸려 무능력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정설은 아니지만, 흑사병 전파설이라고 불리며 아메리카 선주민들의 갑작스런 몰락을 설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이 이론에서 알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인간의 경험에 의한 <악의 전파>이다. 한번 무시무시한 공포를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그 공포를 전파한다는 자체도 두려워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경험이 사회집단이라면 다르다. 한번 공포를 경험한 사회집단은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목적의 행동을 해야 할 때 필요하다면 그 공포를 적극 이용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적 행위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역사 속에서 현재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따돌림>이지만, 여럿이 모여서 한명을 괴롭힌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죄의식이 분산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책임전가를 하거나, 이것이 죄가 아니라는 연대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이 집단적인 광기에서 시작된다. 최근 인터넷 기사나 글들을 보면, 우리가 매체에 얼마나 민감해져 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호기심과 지적 충족을 위해 블로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검색순위 1위는 무엇이지를 생각하고, 왜 그것이 1위인지에 큰 호기심을 느낀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이나 매체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지적 충족 과정을 유도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이번 총선거에서도 이 집단 광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사례가 있었다. 서울시의 많은 국회의원 후보들이 <뉴타운 공약>이니, <지역재개발>이니부터 뭘 만들고, 세우고, 하다못해 교육정책에 복지 시설 어쩌고 하는 것까지 논하는 것을 보면서 신기했다. 도시에는 각기 시장이 있고, 공무원도 있는데 국회의원이 그 모든 것들을 다 해줄 수 있는것인가?

국회의원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아니다. 중학교 교과서만 봐도 국회의원이 할 일과 지방자치단체의 각급 임원들이 할 일이 정확히 적혀있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은 지하철 구간까지 확보한다, 교육정책을 바꾼다까지 말하였다. 지하철은 서울시 합의 없이 국회의원 혼자 만들고, 교육정책은 교육감과 별도로 혼자 다 정한다는 것일까? 보름 전에 내려온 국회의원 후보들이 언제 그 많은 공약을 다 관련기관과 합의를 본 것일까?

그러나, 총선에서 그들을 지지한 시민여러분들은 한번쯤 생각했어야 했다. 국회의원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는지... <뉴타운 공약>을 믿고 특정 후보가 누구인지도 모른채 찍어준다면,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민주정치는 바보들의 정치>라는 말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쉽쓸리고, 속고, 또 속고 그러면서 또 누군가의 의견에 쉽게 휩쓸리는 순간...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흑사병으로 모두 함께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흑사병... 보수의 광기...

아무 생각없이 쓰는 글이라 앞뒤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 여론이라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도 <조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군사독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개막된 것은 불과 10수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안에 대한민국은 많은 자유를 가진 국가가 되었다. 물론, 그 자유는 더욱 더 확대되어야 하며 그 자유의 가치를 깍아내리는 많은 논의들 역시 재검토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경제문제니, 외교문제니 하면서 우리 사회가 보수화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시대에 역행하려는 보수적 움직임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황당한 일들을 저지르기도 한다.

도대체 모든 걸 자율로 풀어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자율, 자율.. 말하는 것일까? 교육 자율화는 학교에 자율을 주는 것이 아니다. 교육 자율화는 <학생>에게 합당한 수업권과 합리적인 교육 환경을 제공받을 권리를 주는 것이다. 대체 학교에다가 <0교시>수업이니, 방과후 수업이니, 우열반이니 하는 모든 권리를 준다는 것이 <교육의 최대 수혜자>인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일까? 아니, 최소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의사라도 반영한 것일까? 반영했다는데, 왜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부정적일까?

경제에 자율화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경제 주체인 <국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국민을 살리겠다는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의료산업을 민간부분으로 돌리겠다는 발상은 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왔을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중요한 문제가 대운하니 뭐니 하는 논쟁으로 총선 이슈에서조차 실종되었다. 슬그머니 실행되어 버리면 또 얼머나 많은 국민들이 그 때가서 난리를 칠까?

민주주의는 알 수가 없다.

국민들은 정치할 시간도 없고, 신경쓸 시간도 없이 바쁘다. 정치는 정치 전문가가 해야하는 것이 현대 사회의 정치 체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문가들은 아무리봐도 전문가적인 구석이 없다. 당 이름이 <친박연대>란다. 장난하나? 정당이란, 정권획득이라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결사단체로, 그 구성원들은 같은 정치적 철학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당명이 <민주, 자유, 선진, 노동, 진보, 보수, 한나라> 등등으로 쓰인다. 친박연대라는 명칭은 도무지 당명이 될 수가 없다. <특정 박씨랑 친한 사람들의 모임?>... 정치 철학은? 복당이 목적? 그런 당이 원내 교섭 단체가 되면 국민이 아니라 복당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일까?

<뉴타운> 건설을지지한다는 뜻으로 특정 정당에 표를 던진 국민들은, 투표 직후 뉴타운 건설은 없다는 서울 시장의 말을 듣고 허탈했을 것이다. 무슨 도박판 야바위 정치 같다. 대충 아무 말이나 던져서 아무 말이나 솔깃하게 걸리는 말이 있으면 사기부터 치고 보자는 심보?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매번 속아주는 국민들이다. 말했지 않는가? 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국민들이 계속 속아주면 <바보들의 정치>, 즉 중우정치로 전락한다고... 수십년의 혁명과 운동으로 얻어낸 민주주의를 바로 정치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누구 탓도 아닌 우리 국민 전체의 탓이다. 그렇다고, 제도 탓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본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민주정치를 이상적인 정치로 생각했지만, 그 정치는 결국 어리석은 국민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정치로 끝났다. 민주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마저, 민주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제적 기반은 <노예>였고, 노예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민주정치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 시대의 정치가 아니였을까 고민하였다고 한다.

만약, 지금 민주정치가 최상이 아니라면 1천년 뒤 인류는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을까? 왕정과 독재정치가 무너지고, 민주정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지금의 민주정치체제가 자유와 평화를 위한 최선의 체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하였다. 민주정치를 하는 이유는 민주정치가 가장 완벽한 정치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그 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발견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스웨덴식 복지주의 같은 특이한 체제도 민주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니까... 과연 1천년 뒤에도 계속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더 진화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을까? 1천년 뒤에 살아보고 싶다.

민주주의의 비극.... 여론의 광기...

내가 이런 쓸데없는 상상을 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부작용인 <여론의 광기>가 점차 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이다. 사실, 우리 나라는 아직 민주주의 체제가 완벽하게 정착되지 못하였다. 깨끗한 정치인의 수만큼 부패한 위정자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아직 부정하기 어렵다. 독재정권의 하수인들이 아직 금배지를 달고 있고, 친일파의 후손들이 떳떳하게 <친일행위가 뭔데요?>라고 따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모 신문은 2002년에 <49%로 당선되어 과반수의 지지도 얻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이라는 타이틀 기사를 내더니, 이번 선거에서는 <48%의 절대 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문구를 걸었다. 대통령을 비교하지는 말이 아니라, 그러한 문구 하나에 담긴 의미가 뭘까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문구 하나쯤은 그냥 지나쳐야 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 나라의 여론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러한 현상은 개개인에게서도 나타난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인터넷 상에서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유없는 악성 댓글을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심지어 누구가의 삶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내가 지금 당장 <동방신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한다면, 이 글 아래에는 수백개의 악성 댓글을 달릴 것이다. 어디엔가에 속해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자랑스럽다는 인식을 가진 집단에서는 그 자존심에 금을 그었을 때 개인적인 표현보다 훨씬 극명한 자극적인 집단 광기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피겨 여왕 김연아나 맨유의 박지성에 대한 안티글 하나를 적는다면, 나는 바로 이 블로그에서 매장될 것이다. 국민에게 가장 큰 자존심은 애국심이고, 그 애국심을 자극하는 현대사회의 가장 큰 도구는 바로 <스포츠>니까...

그러나, 집단 광기로 자살을 택한 어느 연예인이나,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동시에 자살한 여중생 집단의 이야기는 집단이 가진 무섭고도 잔인한 힘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무서운 집단의 면면은 동시에 가장 사랑스러운 우리 이웃이기도 하다는 점이 더욱 무서운 일이다.

나도 미쳤나보다...

아무 생각없이 글을 적다보니 나도 미쳤나보다. 역사 이야기만 적어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이런 이야기나 적고 있다니... 하지만 분명한건 2008년의 대한민국이 되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이전보다 더 이상한 사회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분명하다. 특히, 어제 공교육 정책이 발표되면서 나는 한가지 상상도 하게 되었다. 이제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죽지도 않았는데, 지옥에서 살아가야만 되겠구나...

교육이 대체 뭘까? 영어 단어 몇 단어 더 외우면 대한민국 교과서 첫장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인 <민주시민의 자질 함양과 자아실현>이 이루어지고, <시민교육>이 완성되는 것일까? 난 대체 알 수 없다.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전문 통역관들을 많이 양성하는 편이 더 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그 많은 돈 들여 전 국민 교육한다고 통역관보다 더 영어를 잘할까? 나 역시, 영어 공부를 해왔지만 대학 졸업후 영어책 닫았다. 필요하면 번역사 쓰면 된다. 1페이지에 딱 7만원 든다.

우열반이 과연 인성교육에 도움이 될까? 확실한 건 입시교육에는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중학생들은 특목고 가기 위해 날새면 되고, 고등학생들은 대학가려고 날새면 된다. 공교육 정상화란, 말 그대로 정상적인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정책은 공교육 정상화가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인재 양성을 위한 <특별 프로젝트>일 뿐이다. 그렇게 인재가 필요하면 전문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에서 인재를 키워라. 고등학교는 교육법에 이미 이렇게 명시되어 있다.

<고등학교는 중학교 때 받은 교육의 기초 위에 중등교육 및 기초적인 전문교육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초중등교육법 54조 1항>

지금 정책은 법적으로도 위헌이다. 전 국민을 전문가로 만들려 하고 있지 않은가? 우열반은 헌법 31조 1항 기회균등 조항에 어긋나며, 전체적인 입법 취지 자체가 학생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각급 학교 교육목표를 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교육목표는 전부 자아실현이나 적성, 사고력, 세계시민의 의식,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도 지켜진 것이 없는데, 이젠 교육목표까지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갈수록 실망스러운 정책 때문에 뭔소리인지 모를 글을 적어보았다. 혁신도시는 이전 정부 방침이라면서 방침을 바꾸려 하고, 공공기관장들도 이전 정부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임하란다. 임기보장된 기관장들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정부도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국회의원, 대통령, 대법원장의 임기는 각각 4,5,6년 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임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면, 자신들의 임기내에 얼마나 국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귀찮다. 그만 적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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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페리클레스의 전사자를 위한 추도연설

우리의 정치체제는 우리 이웃들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정치체제는 다른 어떤 것을 흉내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他의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치제도는 민주정(democracy)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권력이 소수가 아니라 전체 인민의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적(私的)인 분쟁을 해결하는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사람은 법 앞에서 평등합니다. 공직(公職)을 임명하는 일에서 누군가를 타인보다 우대할 때, 중요한 것은 특정계층에 속했는가 라는 점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실제적인 능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국가에 봉사할 능력을 갖추고 있는 한, 그가 가난하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정치생활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우리들 사이의 일상생활도 역시 자유롭고 개방적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그 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그에게 무언가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커녕, 무언가 언짢은 눈총조차 던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생활의 영역에서는 자유롭고 너그러운(tolerant)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의 문제에서는 법을 준수합니다. 왜냐하면 준법이야 말로 우리들의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공직에 임명한 사람에 대하여 복종하며 법자체에, 특히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과, 깨뜨리면 명백한 수치로 여겨지는 불문법에 복종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이 끝나면 우리의 정신을 위해서 모든 종류의 오락(recreation)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시합이나 경연대회(시, 연극, 음악 그리고 운동경기) 그리고 연중 규칙적으로 열리는 제례(祭禮)행사가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집에서 우리는 나날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우리의 근심을 쫓아내는 아름다운 것과 좋은 취미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都市의 위대함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도처에서 좋은 것들이 모두 흘러 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들로서는 外方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우리의 산물처럼 즐기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리고 군사적인 안전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엄청난 태도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몇 개의 본보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도시는 세계에 열려있으며, 사람들이 적에게 군사적으로 이익이 될지도 모르는 비밀을 관찰하거나 탐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일정한 인구를 국외로 추방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로 비밀병기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용기와 충성심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교육제도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용기를 기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대단히 고된 훈련에 순종해왔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제약과 무관하게 살아왔으나, 그들이 부딪친 바와 똑같은 종류의 위험을 그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맞이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그 증거가 있습니다. 스파르타인들은 우리 나라를 침범했을 때, 혼자 오지 않고 그들의 연합세력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外地를 공격할 때는 우리의 일을 혼자서 해결합니다. 그리고 외지에서 싸울지언정, 자신들의 고향과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적을 패배시키는데 실패하는 법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의 적수들 중 그 누구도 여태껏 우리의 모든 힘과 부딪쳐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주의를 해군과 육상에서의 여러 가지 임무수행으로 나누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적들이 우리 군사력의 일부를 맞아 싸워 패배시켰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 軍 전체를 격퇴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그들이 패배했다면, 그들은 우리의 군사력 전체에 의해 타격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닥쳐온 위험을 대처하는 방식, 즉 고된 훈련대신에 느긋한 마음으로, 국가가 유도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용기로 자발적으로 다가온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미래에나 있을 고난을 대처하느라 훈련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난관이 실제로 닥쳐온다면, 항상 엄격한 훈련을 받고있던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도 용감하다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은 우리의 도시가 찬양 받을 만한 중요한 자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사치와 방종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인 것을 사랑한다고 해서 유약(柔弱)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富를 무엇인가 적절히 사용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지 자랑스러워 할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난으로 말하자면 누구나 그 것을 받아들인다고 수치스러워 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수치스러운 것은 그 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아무런 실질적인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각 개인은 그 자신의 일만이 아니라 국가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의 事業으로 매우 분주한 이들조차도 일반적인 정치사정에 고도로 정통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입니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 자신의 사업을 염려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도대체 아무런 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아테네인들은 몸소 정책에 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그 결정을 적절한 토론에 부칩니다. 왜냐하면 말과 실천이 서로 불일치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그 귀결이 적절히 논의되기 전에 급히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은 우리가 다른 종족들과 구분이 되는 또 하나의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미리 그 것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無知로 인하여 용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을 하기 위해서 멈추었을 때는 겁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가장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감미로운 것이 무엇이며, 쓰라린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고, 닥쳐오는 것에 감연히 맞서는 사람입니다.

또 일반적인 好意의 문제에서 우리들과 다른 종족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호의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써 친구가 됩니다. 이 것은 우리의 우정을 보다 더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선의를 보임으로써 그들에게서 항상 감사를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 무언가 은혜를 입은 사람의 느낌에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은 열의가 어딘지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친절에 보답할 때, 그것은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주는 것으로 보다는 오히려 빚을 갚는 정도의 것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 때,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해득실을 계산하고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호의를 베푸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자발성의 의거하는 바이지 나중의 무엇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서 말하자면, 나는 감히 선언합니다. 즉 내가 보기에 우리의 도시는 그리스의 하나의 敎師와 같은 존재라고. 나는 또 선언합니다. 우리의 시민들은 각자가 인생의 모든 다양한 측면에서 그 자신이 정당한 지배자이며 그 자신의 인격체에 대한 주인임을 보여줄 수 있는데, 그것도 아주 유례를 볼 수 없이 우아하고 다재다능하게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것이 지금의 행사를 장식하기 위한 공허한 허풍이 아니라 진실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우리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힘과, 지금까지 내가 언급한 바로 그 자질로서 우리가 획득한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돌아보시면 되겠습니다.

아테네는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들 중 유일하게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바를 훨씬 능가하는 그 위대성을 시험하는 계기를 맞이했습니다. 아테네의 경우에서, 아테네의 경우에서만이 오직 유일하게, 어떤 침략자도 패배해도 수치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떤 예속민도 그 책임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에 지배받는 것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남긴 우리 제국의 표상(表象)과 기념물들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에게 놀랄 것입니다. 마치 오늘의 시대가 지금 우리에게 놀라와 하듯이...

투키디데스(Thucydides), 페리클레스의 추도연설 (Funeral Orations of Per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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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 사료는 서양사 자료 해석을 위하여 첨부된 서양사 사료입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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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헬레니즘 사회의 융성

헬레니즘 시대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는 제 지식이 짧기에,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과 키포인트로 여겨지는 몇몇 사실들을 위주로 정리해 볼까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이라는 사실은 전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헬레니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중심으로 다뤄볼께요.

우선 헬레니즘 사회는 알렉산더의 동방 이민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2가지 효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을 차단하며, 그리스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2번째는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연결한 거대한 교역권과 경제권을 성립시키고, 그 무역의 주체를 그리스인으로 삼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나게 확장하였지만, 그 경제력을 알렉산더 제국의 경제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적인 고대 문화유산을 동방에 전파하는 동시에 금, 은의 약탈 등을 통하여, 동방의 자원을 착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앗티카(아테네 지방) 주화가 화폐로 통용되었고, 앗티카 방언이 공용어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그리스어가 제국의 언어가 되어 상업, 제조업, 광업 등의 모든 교역산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의 진출로 인하여 그리스적인 형태의 도시가 제국 곳곳에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70여곳이나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죠. 또, 아시아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안티오크도 이 당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동서양의 거점에 위치한 로도스섬, 델로스섬도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알렉산더 제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는 <노예노동>을 통한 대규모 농업경영이라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공업, 수공업, 농업 등에 <그리스적인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였죠.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원주민과 이주 노예>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적인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이 원주민과 자주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국은 원주민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통치함으로서,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빈주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노예노동과 원주민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경제번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그리스적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원주민과 노예>를 기반으로 합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는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국의 물질적 자원과 풍부한 인적 기반이 새롭고 발전된 제국의 기반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소모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알렉산더 제국이 로마제국에게 힘없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 때문이지요.

2. 헬레니즘 문화를 정의내리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결국 동서문화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평등한 입장에서의 융합은 절대 아닙니다. 전술했듯이, 원주민 착취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까요. 이것은 그리스적인 입장에서의 문화가 폴리스 단위를 넘어 세계적 단위로 탈바꿈한 정도의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도시국가적인 문화는 오리엔트의 거대한 전제적이고도 전체적인 문화를 만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보편적,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문화로 나아갑니다. 특히 철학, 문학, 예술 분야는 그리스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동양적인 문화 색체를 가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이 문화는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제국인만큼, 로마, 이슬람, 간다라, 중국 등 당대 모든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대표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예술 분야를 살펴볼까요?

3. 헬레니즘 철학 - 스토아 학파

헬레니즘 시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기 때문에 철저한 금욕을 통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이 중요한 점은 거대한 제국 질서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진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분립주의적 성격을 넘어선 <초폴리스적인 세계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철학은 알렉산더 제국과 같은 세계국가란, 자연법과 보편적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국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법>이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자유와 평등을 원칙적으로 지켜줌으로서 정의가 살아있는 법을 말합니다. 세계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한 시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모든 시민들은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평등한 시민입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구속에서도 해방되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해방된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세계국가이며, 이 세계국가에서의 시민이란 철저한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원자적인 개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은 철저히 받아들이면서도, 실제 정치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반이 그리스적인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국가와 같은 이상국가의 이념은 지배층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의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적인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이였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토아 철학의 논리는 훗날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세울 때, 그대로 받아들였던 논리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념을 수용하여, 시민권의 분배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적절히 하였습니다. 단, 제정 후기의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논리보다는 점차 향락에 빠짐으로서 제국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키포인트입니다.

또 스토아 학파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세계시민사상은 유대교가 배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 크리스크교 초기의 구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민족성을 과시하던 부분이 있어서 타 민족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상이 크리스트교 사상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만나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4. 헬레니즘 철학 -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학파라 불리며, 스토아 학파의 반대선상에 있는 철학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저급하고, 더러운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제정 로마 후기 사회적으로 퇴폐하고 문란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생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본 철학은 <정신적 쾌락과 개인적 세계>를 위한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일단 국가라는 기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각 개인들이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즉,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면 국가는 필요없는 기구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로크의 저항권이나, 근대 시민권의 개념이 이들에게서도 보입니다.

또 이들은 개인이 철저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즐거운 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즉,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들이 실제 쾌락적인 삶을 산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쾌락 이전에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로,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인데,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지요. 즉,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두려운가? 신이란 무엇이며,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등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는 것이 곧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은 언뜻 보면 난잡하고, 쾌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토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시민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사상이 로마 제정 초기에는 그 근본정신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말기에는 난잡하고 문란한 쾌락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미술이 감각적, 향락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바로 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추구의 영향이 큽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이 금욕을 하던, 수양을 하던 간에 이들은 쾌락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니까요.

5. 헬레니즘의 예술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 예술을 봅시다. 이들의 예술은 그리스적인 가치관, 즉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현실미를 추구합니다.

헬레니즘에서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을 넘어서서 인간육체가 얼마나 관능적인 미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니케상은 승리의 여신이 자유롭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오콘의 군상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며, 정신적 쾌락을 방해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코린트 양식>입니다.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 이야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갈께요. 헬레니즘 건축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혼합된 것 처럼, 고전적인 공공건물과 세속적인 건축 양식이 동시에 보입니다.

5. 자연과학의 발달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시민주의가 발달하면서, 보편적으로 탐구되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명제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명제에 호응하여 발달한 분야가 자연과학 분야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 유클리드의 물리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오선 측정과 지구둘레의 계산 등은 이 당시 자연과학이 최첨단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곳곳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국가가 처음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투자한 시대입니다. 실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의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과 과학의 대부분을 스승이 지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뤄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도서관으로 바로 바로 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생전에 절대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인문과학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해설을 다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기록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겨우, 로마편에 입문하겠군요. 로마편은 제가 유럽 고대사 중에서 그나마 책을 좀 많이 읽은 부분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적을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전개해보겠습니다. 그럼 로마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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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그리스의 역사와 문학

1. 고대 역사학의 시조 - 투키디네스

그리스의 역사학의 사관을 말하자면, 보통 고대 순환론적인 사관이라고 말합니다.<순환론적인 사관>이라는 것은 역사를 볼 때,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유사한 사건이 반복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즉, 역사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은 과거 있었던 어떤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를 잘 알면 현재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가가 할 일은 과거의 모든 가능한 자료를 모아서 수집하고, 검토하고, 정확한 줄거리를 서술하는 것이 되겠지요.

이러한 고대 사관을 완성한 사람이 바로 <투키디네스>입니다. 보통 그를 <과학적, 비판적 역사서술의 시조>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정확한 과거를 객관적인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 때문이죠. 그런 기록을 남겨놓아야 후대 사람들은 교훈을 얻을 수 있거든요. 그는 고대 사관인 <순환사관>을 완성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순환사관이란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는 역사속에서 실용적인 교훈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쓴 저서가 유명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입니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너무나 유명하죠.

<정확한 사건을 아는 것은 유사한 사건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앎을 위해 기록한다.>

이 순환사관은 중세에 가서 깨집니다. 중세에는 하느님을 믿는 <신학>이 발달하면서 부터인데, 순환사관을 대신할 사관을 제시한 자는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라는 것이 절대 반복되는 것이 아니며, 역사가 아무 의미없이 순환된다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역사란 <하느님의 세계>로 간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것이라고 말하며, <목표론적 사관>또는 <발전론적 사관>을 주장합니다. 즉, 역사는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내일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파악한 것이죠.

2. 역사학의 아버지 - 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는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헤로도토스는 투키니네스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투키디네스가 역사란 가장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앞선 사람인 헤로도토스는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들어가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헤로도토스가 적은 페르시아 전쟁사를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합니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적으면서, 그 전쟁의 성격을 스스로 규명하려고 합니다. 그는 페르시아 전쟁의 성격을 <문명간의 투쟁>이라고 파악합니다. 즉, 자유주의를 수호하려는 그리스 폴리스와 동방전제군주제를 추구하는 페르시아 문명간의 충돌이 그에게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보인거죠. 투키디네스였다면 그 전쟁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 전쟁과 각 사건에서 교훈을 찾으려 했을 것입니다.

3. 고대 그리스 문학

고대 그리스 문학은 유명한 것들이 많지만 다 다루면 역사를 벗어나게 되므로, 중요한 것들만 소개합니다.

일단, 호메로스가 가장 유명하겠죠? 보통 그리스 시대에 기록이 없던 시기의 일들은 호메로스의 문학 작품내용에서 그 시대상을 파악하므로, <호메로스 시대>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그는 토로이 전쟁에 대한 거대한 서사시인 일리아드, 오딧세이를 서술하였고, 그 책은 아직도 최고의 고전으로 추앙 받습니다.

다음으로 유명한 작품은 헤시오토트의 <신통기>,<노동의 세월> 등이 있습니다. 신통기는 신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자료이고, 노동의 세월은 아테네 농민들(특히 팔랑크스를 받은 자영농민들)의 일상을 정리한 책입니다. 당시 생활상을 알기에 적합한 책이지요. 또, 소포클레스의 <오디푸스의 왕>이야기도 유명합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은 대부분이 그리스 신화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리스 신화를 읽다보면 가끔씩 이들의 작품내용이 나올 경우가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도 유명합니다. 대부분 아시죠? 사람의 병을 고치거나, 의술과 관련된 일을 할 때는 그 윤리성이 강조된다는 것을 선서한 내용이지요. 그래서 그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보통 불립니다.

참고자료 - 페르시아 전쟁사(헤로도토스)

헤로도토스 (Herodotos)와 페르시아 전쟁사


헤로도토스 (Herodotos)

BC 484(?)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BC 430(~420). 그리스의 역사가.


고대에 창작된 최초의 위대한 이야기체 역사인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역사 Historiae〉(〈페르시아 전쟁사〉라고도 함)를 썼다. 헤로도토스는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소아시아 남서부의 그리스 도시인 할리카르나소스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모두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아테네에 살았고, 거기서 소포클레스를 만났으며, 그후 아테네가 중심이 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건설한 식민지 투리로 떠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역사〉에 언급된 마지막 사건은 BC 430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후 언제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BC 431년부터 몇 년 동안은 아테네가 그리스 중부 지방에 있었고, BC 425년 이전에 아테네에서 그의 저서가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헤로도토스는 널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런 여행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역사〉의 구성과 범위

〈역사〉에서 헤로도토스가 다룬 주제는 페르시아 전쟁과 그 전쟁의 예비단계였다. 오늘날 남아 있는 〈역사〉는 9권(이것은 헤로도토스 자신이 구분한 것이 아님)으로 나뉘어 있다. 제1~5권은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고, 제6~9권은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제7권)과 그리스가 BC 480~479년에 살라미스·프라타이아·미칼레에서 거둔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역사〉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BC 499년부터 시작된 예비 단계(제6권에 묘사된 이오니아의 반란과 마라톤 전투를 포함)와 함께 BC 480~479년의 전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페르시아 제국의 성장과 조직, 지리와 사회 구조 및 역사를 기록한 부분이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는 헤로도토스가 애초부터 전·후반부의 배열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페르시아나 전쟁의 역사 가운데 하나만 묘사할 계획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만약 그랬다면 두 부분 가운데 어느 부분을 기술할 계획이었는지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럴 듯한 견해 가운데 하나는, 헤로도토스가 처음에는 전쟁의 역사를 쓸 계획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에 포함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입장에서는 페르시아가 주도하는 침략군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방대한 크기뿐만 아니라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진 다양한 성격의 군대이면서도 단일 지휘체계를 갖춘 페르시아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스군은 공통된 언어, 종교, 사고방식, 전쟁목적에 대해 똑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데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사령관들은 걸핏하면 논쟁을 벌였다. 이런 점에서 페르시아군과 그리스군은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 차이점을 독자들에게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때문에 페르시아 제국 자체를 기술하고 있다. 전후반을 잇는 논리적 연결점은 제7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의 대군이 사르디스에서 헬레스폰토스 해협까지 서쪽으로 행군한 다음, 배다리를 이용하여 그리스 본토로 건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처음에는 크세르크세스의 오만함과 성급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이어서 행군하는 페르시아군의 여러 부대가 마치 열병식을 벌이듯 장황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거대한 침략군 집단을 이루고 있는 모든 민족과 인종이 하나씩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제1~4권은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와 구성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설명할 때 헤로도토스는 제국의 각 측면을 지리적인 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고, 페르시아의 역대 왕들(키로스·캄비세스·다리우스)이 정복한 순서에 따라 기술하는 방법을 채택했다(이 배열법에서 한 가지 예외는 리디아이다. 리디아는 맨 처음에 다루어져 있는데, 그것은 리디아가 맨 먼저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공격하여 정복한 첫번째 나라였기 때문임). 제1권의 서두에서는 리디아 왕국에 대한 설명과 페르시아의 리디아 정복을 다루고 있다. 이어서 키로스 왕이 메디아인을 무찌른 이야기와 페르시아에 대한 설명, 키로스의 마사게타이(카스피 해를 향해 북동쪽) 공격, 키로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2권에서는 왕위를 계승한 캄비세스의 이집트 원정 계획을 다룬 뒤, 이집트의 국토와 정복, 남부(에티오피아)와 서부 침략 실패, 캄비세스의 광기와 죽음, 페르시아의 권력 투쟁과 내분, 왕위를 차지한 다리우스의 거대한 제국 건설, 그리고 다리우스가 진압한 국내의 반란들을 다루고 있다. 제4권의 서두에서는 유목 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한 설명과 그들의 역사, 도나우 강에서 돈 강에 이르는 그들의 활동 지역(스키티아)과 흑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리우스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이들을 원정하려고 했다. 다음에는 페르시아의 스키티아 침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침략과정에서 비잔티움을 비롯한 몇몇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다. 페르시아는 스키티아를 공격하는 동시에, 이집트를 기점으로 하여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한 리비아를 공격했다. 제4권 마지막에는 리비아와 그 식민지 건설에 대한 기술이 나온다. 제5권에서는 페르시아가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그리스 본토로 깊숙이 진격하는 과정,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및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굴복하는 과정이 기술되고, 이어서 BC 499년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가 나온다. 이리하여 이야기는 작품 전체의 주요주제로 넘어간다.


서술방법

지금까지 헤로도토스의 〈역사〉 전반부를 간단히 설명했지만, 이런 간단한 설명은 이 책의 무한한 다양성을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책이 페르시아라는 다양한 제국의 지리·사회·역사를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명백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역사〉의 구조는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헤로도토스의 서술 방법 역시 복잡하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의 지리나 관습, 또는 정치체제를 그리스 독자들에게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나중에 전쟁에 개입한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적절한 시기에 기술하고자 했다. 그는 관련된 도시들의 정치적 상황을 서술의 줄거리 속에 여담처럼 교묘하게 끼워넣는 방법으로 이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크로이소스는 이오니아 본토의 그리스인들을 정복했지만 그 자신도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다시 옆길로 빗나가, 이오니아인과 도리아인의 지난 역사와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두 도시, 즉 이오니아인이 세운 아테네와 도리아인이 세운 스파르타의 분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BC 6세기 아테네의 복잡한 정치적 전개 상황이 간단히 언급되고, 스파르타인들의 보수적인 성격도 잠깐 언급된다. 이 모든 설명과 그밖의 많은 이야기(그중 일부는 오로지 헤로도토스의 개인적인 흥미 때문에 포함되었음)는 마라톤 전투가 벌어진 BC 490년과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를 침략한 BC 480년에 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놓여 있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참으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은 호메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체 역사에 대한 그의 집착과 타고난 재능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재미있는 짤막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대화나 연설까지도 서술 속에 삽입했는데, 그가 시작한 이런 방법은 그후 고대의 역사 기술 과정 전체를 통해 지속되었다.


인생관

제1권에 나오는 크로이소스의 이야기는, 솔론과의 대화에서 예를 볼 수 있듯이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전체적 의미, 즉 〈역사〉 전체가 지닌 의미를 암시한다. 그 의미는 큰 번영은 '불안정한 것'이고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특히 그 번영이 크세르크세스의 경우처럼 오만함과 어리석음을 수반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략에 대한 이야기는 그의 도덕적 관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크세르크세스는 인간의 모든 이성적 판단으로 미루어볼 때 당연히 승리할 수 있는 전쟁에서 패배했다. 헤로도토스가 생각하기에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라는 교훈은 보편적인 것이고, 그 당시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으로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불신앙과 오만함 및 잔인성에 벌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역사적 사건을 기술할 때는 항상 신들의 개입보다는 인간의 행동과 성격을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합리주의적인 이런 접근방식은 서양의 역사학에서 획기적인 혁신이었다.


역사가로서의 자질

헤로도토스는 자세한 것을 빠뜨리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위대한 여행가였고, 훌륭한 지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인간의 관습과 과거 역사에 지칠줄 모르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리스인과 이방인에 대해 편견을 갖지 않은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그는 순진하지도 않았고 쉽게 남을 믿지도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그의 작품 전반부를 읽기 쉽고 재미있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역사적 중요성을 갖게 해준다. 후반부에서 그는 주로 전쟁사를 다루고 있지만 결코 전쟁 이야기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가 군사 문제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즉 페르시아군은 육로로 침입했지만 함대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이해했다. 이와 같이 그는 정치적 상황을 개괄할 경우에는 대체로 사소한 개인적 동기를 근거로 하여 사건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여기서도 몇 가지 중요한 본질적 요소를 이해하고 있다. 큰 영토를 가진 페르시아 제국과 작은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리스의 독립성만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법의 지배가 그 전쟁 결과에 달려 있었다. 마라톤 전투가 그리스 세계에 대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은 이 전투를 계기로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동등하고 경쟁적인 지위로 올라섰고(이 지위는 살라미스 해전으로 더욱 확고해졌음), 스파르타는 오랫동안 인정받아온 우위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승리는 물론 영광스러웠지만, 이 전쟁은 단순한 승패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리스의 지도적인 도시 국가들 사이의 내분과 경쟁을 비롯한 몇 가지 문제를 초래했다. 이 내분이 결국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라는 상호 파괴적인 싸움에서 절정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헤로도토스는 알고 있었다.


결론

헤로도토스에게는 선배 산문작가들이 있었다. 특히 위대한 여행자인 밀레토스의 헤카타이오스는 헤로도토스의 책에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선배 작가들은 그 매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도시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일어난 국지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기를 쓰거나 이미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여행한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썼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유기적 구조를 가진 완전한 통일체, 즉 전체적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단일체를 창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기적인 통일체를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헤로도토스는 그리스 최초의 역사가이며 유럽 최초의 역사가이다. 헤로도토스의 작품은 예술적 걸작이다. 그 모든 실수(그리고 그 모든 환상과 부정확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우 중요한 시기인 BC 550~479년의 그리스 역사만이 아니라 당시의 서아시아 및 이집트 역사의 대부분을 알려주는 최초의 중요한 정보원(情報源)으로 남아 있다.


출처 : "헤로도토스"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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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사전)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이었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것이다. 스파르타왕 메넬라오스의 왕비로 절세의 미인인 헬레네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유혹해 간다. 이에, 그리스인들은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지휘로 1,000척의 배를 거느리고 트로이를 공격하지만 트로이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자신을 섬기는 사제 크라이세스의 딸 크라이세이스가 아가멤논에게 잡혀가자 격노한 아폴론신()이 벌로 액병()을 내린다.

이 수습책 때문에 벌어진 말다툼에서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한 그리스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가 노하여 싸움에서 손을 뗀다. 이 아킬레우스의 이탈이 바로 《일리아스》의 주제이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간청으로 주신() 제우스는 신()들에게 양군을 원조하지 말도록 명하여 그리스군을 패배케 한다.

패배한 그리스군의 참상을 좌시할 수 없어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구()와 전차를 빌려 그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적을 패주()시켰으나 그는 트로이의 장수 헥토르에게 살해된다. 이 소식에 접한 아킬레우스는 복수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가 특별히 만들어준 갑주를 입고 출전하여 헥토르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욕보인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은 신들의 비호()로 야음()을 틈타 아킬레우스의 막사를 찾아가 헥토르의 시체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일리아스》는 비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에 집중하여, 트로이 공방 50일 동안의 이야기 속에 10년의 전망을 담았으며,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암시함으로써 비극성을 강조하였고, 여러 가지 비유로 자연계와 인간계의 관계를 특색 있게 묘사하였다. 무용()을 노래하고 그리스 기사도를 찬양한 이 시는 BC 900년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마침내 그리스의 국민적 서사시가 되었고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유럽 서사시의 모범으로서 라틴 문학을 거쳐 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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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오딧세이의 노래(오디세이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으로 1만 2110행으로 되어 있으며, 《일리아스》와 같이 24 그리스 문자를 딴 24권으로 나뉘어 있다. 지리적인 지식, 시 속에서 묘사한 생활상태, 기타 여러 가지 내적인 증거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은 《일리아스》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주제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이야기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략 후의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해상표류의 모험과 귀국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를 40일간의 사건으로 처리하였다. 최초의 4권은 주인공이 없는 동안의 오디세우스의 저택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아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 궁전에 모여들어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그의 재산을 축내면서 방약무인하게 행동하지만, 아직 나이 어린 그의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는 이를 막을 만한 힘이 없다.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르로 변신한 아테네 여신에게 인도되어 아버지의 소식을 알고자 아버지의 전우() 네스토르메넬라오스를 찾아간다. 제5권에서 비로소 절해()의 고도에 님프인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등장한다. 신()들의 명령으로 그는 겨우 뗏목을 만들어 섬을 떠나지만 그를 미워하는 해신() 포세이돈이 일으키는 폭풍으로 난파(), 파이아케스인들의 섬에 상륙한다. 여기서 그곳의 왕녀에게 구원되어 왕의 궁전에서 환대를 받는다. 연회석에서 그는 자신의 모험을 이야기한다. 그 후 13∼24권은 그의 귀국과 그의 아내에게 구혼한 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이다. 아테네 여신의 인도로 거지의 행색으로 변장하고 그의 아들과 그의 충실한 두 명의 옛 부하의 도움을 받아 구혼자들을 처치하고, 부부가 다시 만난 후 여신의 중개로 구혼자의 혈족과도 화해한다.

서사시의 줄거리는 《일리아스》보다 복잡하며 기교적이다. 그를 중심으로 한 5∼12권은 메르헨의 세계, 13권에서는 돌연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복귀한다. 이 시도 《일리아스》와 함께 그리스 국민서사시가 되었으며, 그 후 서유럽 문학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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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헤시오토스의 신통기(출처 : 브리테니커)

BC 8세기 무렵에 활동한 헤시오도스가 천지창조에서 신들의 탄생 및 계보 그리고 인간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을 계통적으로 서술한 작품이다. 독자에게 지식과 교훈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교훈시로 분류되기도 한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300명이 넘는 신들의 복잡한 관계를 간결하게 표현하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신화와 전설을 하나의 세계관 및 우주관에 비추어 체계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BC 2000년대에 고대 오리엔트에서 살았던 후르리인들의 언어로 씌어진 같은 제목의 《신통기》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헤시오도스가 이 작품을 지을 때 중동()의 신화를 참조하였다고 여겨지며, 후세의 시인들이 덧붙인 내용도 엿보인다.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에 의해 신들의 계보가 만들어지고 신들의 이름과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말한 것처럼, 이 작품에는 그리스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 된 자료가 담겨 있으며, 오늘날 알려진 그리스신화의 일부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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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소포클레스

아테네 교외의 콜로노스 출생. 아버지가 부유한 무기 상인이었으므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아름다운 용모와 재능을 타고났고, 집안이 기사()신분에 속하였으므로 작가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명예로운 일생을 보냈다. 음악을 란푸로스에게, 비극을 아이스킬로스에게서 각각 사사하였다. BC 480년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 축제 때는 하프를 연주하면서 무용단을 선도하였다고 한다.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식견을 지녔으며, BC 443∼BC 442년 델로스 동맹 재무장관에 임명되어 페리클레스와 더불어 10인의 지휘관직에 선출되었다. 또한 BC 413∼BC 411년의 아테네 내정의 동요기에는 국가의 최고위원 10인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국가에 공헌하였다. 신앙심도 두터워 아스클레오피스의 신전을 자기 저택 내에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BC 468년, 28세 때 비극 경연대회에 응모하여 스승인 아이스킬로스를 꺾고 첫 우승한 이후로, 123편의 작품을 씀으로써 18회(일설에는 24회)나 우승하였다. 자기 후배인 에우리피데스가 사망하였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는 배우와 합창대의 관()을 벗게 하고 자기 자신도 상복으로 갈아입어, 참석자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국의 초청도 거절하고 평생을 아테네에 살았는데, 이러한 애국심과 진지한 인품은 온 시민의 경애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비극 작법은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초기는 아이스킬로스풍의 장중 화려한 작풍이고, 중기는 엄밀한 기교주의이며, 후기는 원숙기로서 등장 인물의 성격과 일치하는 문체로 씌어 있다. 현존하는 7편을 연대 순으로 보면 《아이아스 Aias》 《안티고네 Antigone》 《오이디푸스왕 Oidipous Tyrannos》 《엘렉트라 Elektrai》 《트라키스의 여인 Trāchiniai》 《필로크테테스 Philoktetes》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 Oidipous epi Kolōnōi》인데, 《콜로노이의 오이디푸스》는 원숙기에 속하는 것이지만, 《아이아스》와 《안티고네》만은 중기의 특징을 남기고 있다.

이 밖에 사티로스극() 《추적자》 외에 많은 단편이 남아 있다. 한편 배경화를 고안하기도 하고 소도구를 채용하는 등 상연 형식도 연구하였으며, 합창단을 종전의 12명에서 15명으로 늘리고, 또 배우도 종전의 2명에서 3명으로 늘렸다. 그리고 이 3명의 배우의 대화를 통하여 각자의 성격을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그들의 성격이 서로 충돌하고, 보복하고, 파멸로 치닫는 과정을 복선()을 교묘하게 배치해 가면서 비극적인 긴박감으로 끌어올려 기막히게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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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오이디푸스 이야기(출처 : 네이버 지식인 검색)

제작·상연 연대는 알 수 없다. 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에게도 같은 제재의 비극 작품이 있으나, 소포클레스의 것이 특히 유명하다.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는 나라 안에 악역()이 유행할 때, 선왕()을 살해한 범인을 추방해야 된다는 신탁()에 따라 그 범인 색출에 전력을 기울인다. 왕은 한때, 집정()인 크레온을 의심하지만,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과 선왕의 왕비이며 자신의 아내인 이오카스테의 설명을 들은 뒤로는 점차 자기 자신에 대한 의혹이 깊어져 간다. 코린토스의 사자(使)의 말, 자신이 테베에 들어오기 직전에 저지른 살인,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스런 예언, 그리고 선왕의 아들을 버린 양치기의 증언으로 마침내 자신이, 바로 운명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운명의 그물에 사로잡힌 존재로서, 아버지인 선왕을 살해하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극도의 절망상태에 빠진 오이디푸스왕은 스스로 자신의 눈알을 뽑아내고, 왕비 이오카스테는 자살한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왕의 만년()을 다시 《클로노스의 오이디푸스》(BC 402)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소경이 된 늙은 오이디푸스는 딸 안티고네에게 이끌려서 여러 나라를 방랑한 끝에 아테네에 온다. 오이디푸스에게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그는 신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들었을 뿐, 자신에게는 아무런 죄과()도 없다고 끝끝내 주장한다. 이와 같은 자부()를 가지고, 아직도 자기를 이용하려고 드는 자식이나 크레온을 뿌리치며 저주하는가 하면, 정의와 인간성이 넘치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에게 축복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신과의 위대한 화해가 이루어지고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난다.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은 중세의 그레고리우스 전설에도 되살아나, 토마스 만은 이것을 주제로 다룬 《선택받은 인간》(1951)을 발표하였다. 또한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비극 《오이디푸스왕》을 썼지만, 그것은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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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그리스의 문화 - 1. 종교부분

1. 그리스 문화는 인간중심적이다?

보통 우리가 교과서로 역사를 공부할 때의 한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기 쉽고, 요약하기 쉽게 딱딱 어느 한가지 현상을 정의내려 버린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으면 그 전말을 다 파악하기 보다는 그 사건의 성격은 이거다라고 정의 내리고, 어떤 문화가 있으면 그 문화의 특징은 이거다...라고 정의 내린 후 암기해 버린다는 점이죠. 그러나 어떤 사건도 한 가지 성격으로 규정되지는 않으며, 다양한 사건들 사이에서 맥락적으로 이해해야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역사 시간은 너무 짧기도 하거니와, 사회과목에 통합되어 있고, 또 그 내용을 너무 방대하게 잡아놓아서리 학생들에게 사건 전체를 바라보면서 맥락적으로 이해해라라고 부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또 교과서 내용이 얼마나 함축적이고, 요약적입니까? 그거 외우기도 바쁩니다. 과목이 몇 개인데.. 국사만 할 수도 업죠..

각설하고, 우리는 보통 그리스 문화를 <인간중심적 문화>라고 규정하고 외웁니다. 일단,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부터 인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특히, 오리엔트 지방의 독재적인 문화, 자연중심적인 문화와 대비하기 위해 인간중심적이라는 개념을 많이 이용합니다. 그래서 과연 그리스문화가 인간중심적이기만 할까요? 노노...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도 내세사상을 믿었고, 신비주의도 많았습니다. 그럼 한 번 그리스 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도록 하죠.

2. 그리스 문화의 성립과 성격

그리스 문화는 오리엔트 지방의 신비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성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특히 이집트 문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리엔트 문화를 <인간주의적>으로 바꿔 받아들입니다. 즉, 오리엔트 신화에서 자연적인 신들은 그리스에서 인간적인 신들로 바뀝니다. 오리엔트와는 사회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완전 다른 성격의 문화를 창출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리스 지역은 오리엔트와는 달라 자유로운 환경을 특징으로 합니다. 폴리스 자체가 독립적이었기 때문에 이 곳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억제하기 보다는 표출하는 것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왕이나, 중앙권력이 상대적으로 느슨했기 때문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노예제도>라는 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점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국가적 <공납노예>를 소유했기 때문에 국가중심으로 사회운영이 이루어지는 것에 반해, 그리스는 각 개개인이 노예를 소유함으로서 개개인이 생산에서 해방되게 됩니다. 즉, 일은 노예가 하고, 시민은 여가생활, 문화생활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사회가 창출된 것이지요.

따라서 그리스인들은 아주 개성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화를 추구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중심적이면서 합리적인 문화, 어떤 면에서는 현실적이면서 독창적인 문화, 또 어떤 면에서는 정열적이면서도 신비주의적 문화, 또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이고 내세적인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 바로 그리스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 문화가 이집트가 갖는 신비주의적이고 내세적인 문화를 포함하면서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문화를 새로 창출했기 때문에 <인간중심적>이라는 말을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문화는 인간중심적이라고 부르기보다 <인간의 다양한 면을 포괄하는 전체성>을 강조하는 문화라는 말이 어울립니다.

이 그리스 문화는 유럽 고전문화의 기본틀을 만드는 과정이었고, 이러한 성격의 그리스 문화가 로마로 유입되며서 <고전문화의 완성>, <유럽문화의 호수>를 이루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이렇게 다양한 측면을 가진 그리스 문화를 분야별로 한번 볼까요?

3. 종교 부분 - 오르픽교라는 특이한 종교가 있었다.

종교 부분을 보면 그리스 문화의 다양성을 한번에 볼수 있습니다. 그리스는 일단 고대 사회 대부분이 그렇듯이 다신교 사회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신관이나 제사장이라는 신의 매개자의 역할이 축소되어 있고, 고대 종교들에게서 보이는 경전이 없습니다. 즉,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운 종교라는 점이지요. 각 폴리스의 성격에 따라 신이 창조되기도 하고, 신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들 자체가 인간의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신전인 델피신전은 아폴로의 예언과 신탁을 존중하는 신간으로 신에 대한 경외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신 자체가 인간적이고 현세적이라서, 예술, 문학 등의 소재로 활용될 수 있는 예술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에서 중요한 사상중에 하나가 대지모 숭배입니다. 이것은 범그리스적인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고대 종교중의 하나는 <오르픽교>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오르픽교는 포도주의 신이자 재생의 신은 디오니소스를 믿음으로서 내세에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종교입니다. 이 디오니소스는 이집트의 고대 신화인 재생과 내세의 신 오리시스를 그리스인들이 받아들인 것인데, 이 종교의 교리는 도덕적으로 살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 죽어서 내세의 행복으로 향해간다는 믿음을 가진 종교라는 점입니다.

이 오르픽교는 포도주를 피로 여기고, 음식을 자신의 몸으로 간주하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어 예수의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와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면이 있습니다. 기독교에도 영향을 준다는 뜻이겠네요. 오르픽교는 식민시로 그 교세가 확대되어 신자집단이 형성되었고, 소위 말하는 최초의 교회를 이야기할 때 이 오르픽교를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수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이 오르픽교의 수장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의 수학적 정리 중 일부는 이 오르픽교의 제사와 점을 칠 때 필요한 것들이었던 것이죠.

따라서 소위 기독교의 기원을 이집트에서 찾는 사람들은 이 오르픽교의 디오니소스가 이집트 신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백인이라는 사실도 부정하더군요. 실제, 아프리카 지역의 예수 그리스도는 벽화나 그림에서 흑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이슬람권에서는 예수가 황인으로 묘사된 거랑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백인이라는 증거를 정확히 하기 위해 서유럽권에서 노력하고 있죠. 근데, 종교는 종교로 믿으면 될 것을 뭘 그리 따지시는지... ㅋㅋ)

종교부분은 하다보면 신화 전체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이쯤하고 다른 파트로 넘기겠습니다. 자세한 신화이야기나 죵교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한번 정리해 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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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제가 일일이 정리하기 귀찮기도 해서 그냥 정리 잘된 펌글로 관련된 건축물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림 만들고 다운받는걸 무지 시러해서요. 귀차니즘이라 지송... 출처는 바로 아래 있습니다.

델피 신전(그리스 델피) 신전(그리스,로마)

출처 : http://blog.naver.com/bss2079/60011486814

 

델피 전경

델포이 유적은 코린트 만이 보이는 파르나소스 산허리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덕분에 이 곳은 매력적인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3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점, 둘째 올림피아와 마찬가지로 범그리스 제전인 피티아제가 4년마다 열렸던 점, 셋째 고대 세계 구석구석까지 널리 알려진 아폴론 신탁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1893년 발굴 조사를 몇 단계로 나누어 천천히 진행하자, 신전과 극장의 고대 유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발굴과 함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902년, 그리스인 은행가 싱그로스의 협력으로 세워진 델포이 미술관에 유물의 일부가 소장, 전시되고 있다. 오늘날 델포이 유적은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가이아 신전 (치오스 제단)


기원전 15세기경부터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모신 신전이 있었다. 가이아 신전은 가이아 여신의 시중꾼인 피톤이라는 용의 보호를 받으며 점술을 행하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이 용을 죽이고 이 일대를 자신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이 때부터 델포이에서는 아폴론을 아폴론 피티오스로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 프로나이아 신전


1987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이다. 아폴로 신탁이 있는 델피(델포이)의 신전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Omphalos(아폴로신전에 있는 원뿔꼴의 돌)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종교 및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델포이 유적 아래쪽 지역에 있는 아테나프로나이아의 신역에는 토로스라는 원형 건조물이 있다. 현재 위쪽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아폴론 신역으로 가기 전에 이 곳을 본다. 포키아 출신의 건축가 테오도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 건조물은 기원전 390년부터 10년 동안 건설되었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지구가 원반 모양이라고 여겼던 시대에 신들의 지도자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세계의 양쪽 끝에서 각각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독수리는 고대 시인이 ‘빛나는 2개의 정상을 가진’이라고 표현한 델포이의 바위산, 파르나소스 산 공중에서 만나 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곳을 ‘세계의 배꼽(옴파로스Omphalos)’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델포이는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아테네 프로나이아 신전


아테네신전 복원도



아폴론 신전


아폴론 신전은 델포이 성역의 중심 건물로, ‘최초의 신전은 월계수 가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전설상의 네 번째 신전은 ‘보로스 산의 돌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650년경에 건립되어 후에 소실되었다. 기원전 510년경에 세워진 두 번째 신전도 기원전 4세기 초에 일어난 지진으로 불에 타서 붕괴되었다. 현존하는 유적은 기원전 330년에 완성된 세 번째 석조 신전이다. 유적은 신전의 토대, 원주 몇 개, 원주의 토대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최근 원주 몇 개가 복원되어, 페리스튀리움(안뜰을 둘러싸는 열주랑)이 곁들여진 정면에 6개, 측면에 13개, 총 38개의 도리아식 열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신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신전의 전실에서 순례자를 맞이한 것은 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일곱 현자의 격언이었다. 거기에는 지금도 “너 자신을 알라.” “절도가 최상이다.” “참고 견디며 겸손하라.”와 같은 현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이 성역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에 아폴론은 인간에게 관용과 덕행을 권장하는 광명의 신으로 칭송받았다. 사람들은 신탁이 미래를 예언해 준다고 믿었다. 신전터에서는 여러 개의 원주가 복원되어,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당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준다. 아폴론 신전 내부는 3부분으로 나뉘며, 신탁이 이루어지던 가장 안쪽의 지성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 중앙 부분은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아폴론 상이 놓이고, 지하 성당(내진의 밀실)에는 ‘대지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대리석이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델포이의 신관을 지냈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대지의 갈라진 틈에서 안개 같은 가스가 분출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지만, 지금 그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는 무녀(피티아)가 있어, 광기어린 혼수상태에서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신탁 받을 사람은 카스탈리아의 신천에서 정화 의식을 마친 다음 무녀 앞으로 나갔다. 무녀가 전하는 신의 말은 불명료한 소리로 이어졌고, 여기에 함께 참석한 신관이 신의 말을 ‘통역’해 사람들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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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그리스의 분열

1.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의 가장 강력한 폴리스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그리스 사회가 나뉘어 치루어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배경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델로스 동맹>으로 그리스의 경제적을 장악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한 아테네가 이제 서부 지중해로까지 진출하면서 서부에 있던 주변국들을 위협했기 때문이죠. 특히, 코린트, 메가라같은 중소국가들은 아테네의 이러한 국가확장이, 폴리스의 기본원칙인 분립주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폴리스의 각 국가들은 하나의 그리스 민족이면서도, 각국은 독자적인 독립국가로 존중받는다는 <전체와 분립>원칙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테네는 이러한 원칙을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에게해의 패권을 차지한 아테네가 코린트를 위협하면서 서부 지중해로 진출하자, 서부 지중해 국가들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맺고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에게 집단적으로 저항을 합니다. 아테네는 서부 지중해 국가들의 동맹을 보고는 30년 평화 조약을 맺어 서남부 지중해 국가들과 평화를 유지합니다.

문제는 아주 작은 국가인 코르키라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코린트시의 식민도시인 코르키라가 코린트와 갈등이 있자, 아테네와 동맹을 맺고 펠레폰네소스 동맹을 배신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대규모 전쟁의 시작이었죠.

2.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결과

여기서는 전쟁의 과정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생략합니다. 그 얘기 다하면 그리스 신화나 트로이 전쟁처럼 끝도 없을테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원래 전쟁은 국력과 재정이 강한 아테네가 이겨야 정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의 저주>라고 불릴 정도의 강력한 페스트가 전염병으로 돌아 아테네는 일단 <나키아스의 평화>라는 조약을 맺고 전쟁을 중단합니다. 이후 아테네의 유능한 지도자 알키비아데스가 시칠리아로 원정을 떠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자 했지만, 전염병 이후 아테네의 내분은 심해져서 이 지도자는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추방당합니다.

반면, 스파르타는 강력한 국가인 아테네와 직접 전쟁을 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많다고 생각하여, 페르시아와 조약을 맺습니다. 그 조약 내용은 소아시아의 식민도시들을 페르시아에 넘겨주는 대가로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에서 스파르타를 돕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걸로 볼 때, 그리스 국가들의 분열이 얼마나 심했으며, 외세까지 끌어들일 정도로 그리스 사회가 점차 초기의 강건함을 잃고 있다는 것도 볼 수 있겠네요.

전쟁 중에 아테네에서는 전쟁을 이끈 유능한 10인 장군들이 전시에 죽은 익사자들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처리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테네 민중들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채, 시민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지 못한 장군 6명을 집단 처형해서 죽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전쟁중이라는 상황파악을 못한 것이지요. 결국 장군들은 처형당했고, 아테네의 함대는 그 해상전투의 우월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전에서조차 농업국가인 스파르타군에게 일방적으로 격파당합니다. 이것이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결말이지요.

전쟁의 결과 아테네는 모든 그동안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델로스 동맹을 해체하며, 스파르타에 복종한다는 맹세를 하면서 겨우 독립만을 허용받았습니다. 이제 아테네 민주주의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며, 아테네는 어리석은 민중들이 다스렸던 <중우정치>의 국가라고 폴리스들에게 손가락질 받게됩니다. 아테네는 30명의 참주가 다스리는 참주정으로 국가를 이끌어 나가다가, 다시 민주정치로 복귀하지만 이미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가장 큰 영향은 그리스가 완전 분열되면서 분립주의가 심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폴리스는 하나의 전제 단위라는 공통의식이 사라지면서, 각국을 적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특히, 전쟁에 이긴 스파르타는 펠로펜네소스 동맹을 이용하여 더 강압적이고, 더 군사적으로 주변국들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델로스 동맹의 이권도 스파르타가 모두 탈취하면서 주변국들은 스파르타에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하죠. 더욱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내준 소아시아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하였지만, 페르시아에게 패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테네는 다시 힘을 키우게 되고, 또 아테네와 우호적이었던 테베를 중심으로 반 스파르타 진영이 형성되어 이제 그리스는 3국 중심의 상호 대립과 분쟁이 계속됩니다. 멸망이 다가온 것이죠.

3. 그리스의 쇠퇴 - 예견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가 쇠퇴한 이유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이라는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가 쇠퇴할 수밖에 없던 근본적인 경제적 이유는 또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식민활동 중단>이라는 측면입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전성기를 구가한 3-4c는 엄청난 식민지 정복 시기였습니다. 소아시아에 진출하여, 식민도시를 만들고, 수많은 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시키고, 심지어 페르시아와 전쟁까지 하면서 식민지 확대라는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5c에 넘어오면서 식민지 정복사업은 거의 끝이 났습니다. 이것은 폴리스 사회를 지탱하던 경제적 끈이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일을 시킬 노예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식민지에 가서 일한 사람들은 실업자가 되었으며, 빈민들이 늘어났습니다. 식민지 전쟁이 사라지자 전쟁을 통해 땅을 확보한다는 <클레로스> 제도가 유명무실해졌고, 이제 군대도 <달리는 중장보병>이 아니라 <직업군인>이라는 용병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내부적 모순만 커진 폴리스들은 이제 같은 폴리스끼리 내부적 전쟁을 통해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지요.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습니다. 식민활동이 중단됨으로서,

1. 빈민이 속출하다    2. 군역을 기피하여 용병이 출연하다.   3. 시민공동체가 무너지고 폴리시간 내전이 발생하다.

이러한 폴리스의 위기는 그 위기를 극복할 대안도 마련하기 전에 마케도니아라는 나라에 정복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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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 국가 스타르타

1. 스파르타식 국가체제가 성립된 이유는?

우리가 보통 강압적이거나 군대식으로 일을 밀어부칠 때 스파르타식이라고 합니다. 그 어원이 바로 이 고대 국가 스파르타에서 비롯된 것인데요. 흔히 그리스 역사를 비교할 때 민주국가인 아테네와 군사국가인 스파르타라고 비교하곤 하죠. 그리스의 폴리스를 대표하는 두 국가는 왜 이렇게 상당히 다른 정치체제를 채택하게 된 것일까요? 그리고 스파르타는 과연 독재와 억압으로 이루어진 사회일까요? 한번 봅시다.

스파르타의 주 구성원은 전에 이야기해던 도리아인입니다. 도리아인은 미케네 문명을 세우며 청동기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선주민을 초기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도리아인이 그리스 본토에 선주한 수많은 초기 그리스인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폭력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국가체제를 갖출 수밖에 없었지요. 이것을 편의상 <군국주의적 국가체제>라고 부릅시다.

일단 스파르타에서는 도리아인이 지배계층이고요. 정복당한 원주민인 미케네인들을 2계급으로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일로타이와 페리오이코이입니다.

헤일로타이는 도리아인에게 반항하거나, 원래 노예였던 신분이 여기 해당합니다. 이들은 엄청난 숫자이기 때문에, 반란이 이러날 확률도 높습니다. 스파르타의 도리아인들은 이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마련합니다. 이들은 재산권이나, 자유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국가가 할당한 시민분배지를 경작하는 일종의 <농업 공납 노예>입니다. 일하고, 공납바차고, 일하고, 공납바치는 생활을 반복하다가 죽는 것이지요.

다름 페리오이코이는 변두리 주민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스파르타의 지배층인 도리아인에게 협조하거나, 우호적이었던 선주민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비교적 자유민으로 상공업에 종사하거나, 군대에서 장교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지배층은 아닌 까닭에 선거권이 없었고, 따라서 시민권을 주어지지 않는 자유민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파르타의 군국주의적인 정체체제는 소수의 도리아인이 다수의 선주민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생간 부산물이라는 것이지요.

2. 시민계급의 발전

스파르타에서는 진정한 시민은 도리아인입니다. 그렇다고 도리아인이면 모두 동동한 시민이었는가라고 묻는 다면 글써요... 아테네에서 보았듯이 초기 폴리스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분배토지(클레로스)가 있어야 시민으로 인정받습니다. 즉, 전쟁에 열심히 참여하여 국가에 기여하고, 국가로부터 정복된 토지를 분배받는 것이 바로 시민으로서 인정받는 첫 스타트거든요. 아테네도 초기 솔론시대에는 토지를 가진 자들을 시민으로 인정하는 재산금권정치를 실시했다고 말했었죠?

이렇게 토지를 가진 자를 시민으로 인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헤일로타이는 자신의 토지가 없이 토지노예였으며, 페리오이코이도 농업이 아닌 상공업이나 장교쪽의 일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스파르타 자체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자리한 농업국가였습니다.

이러한 스파르타 시민들이 모두가 평등한 시민권을 갖게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메세니아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스파르타가 메세니아 지역을 정복한 1차 전쟁과, 메세니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2차 전쟁이 있는데, 두 번의 전쟁 모두 스파르타의 군대가 잔인하게 진압합니다. 메세니아 전쟁의 결과 많은 전쟁 참여 시민들에게 토지가 분배되었고, 시민의 평등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시민들은 국가 사회에 별 불만이 없게 되었고, 이들 시민들은 항시 전쟁 준비를 하는 군인으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보통 스파르타의 민주정치를 시민군을 중심으로 한다고 하여 <중장보병 민주정>이라고도 부릅니다.

스파르타는 시민이 이끌어가는 민주주의적 정치체제이지만, 국가 자체는 시민군 위주로 이루어지는 군국주의적 국가체제입니다. <군국주의적 국가체제>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시민들은 보통 20-60세 정도까지 군대와 관련을 맺습니다. 특히 20-30세의 집단 군생활은 엄격합니다. 30세가 넘으면 엄격한 집단 군생활에서 약간 해방되나, 일상 생활은 계속 군과 관련을 맺습니다. 시민생활이 병영에서 이루어지기도 하고, 전 시민이 공동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이 정복한 선주민(헤일로타이)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사회의 긴장감을 조성하는 행위를 늘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민은 일체의 생산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경제적 지출은 헤일로타이의 공납으로 충당하는 노예제 사회입니다. 헤일로타이는 공납노예인 것이지요. 상업은 페리오이코이가 전담합니다. 즉, 시민이 감시하고, 정복민이 일하는 사회로 폐쇄적인 자급자족주의 사회가 바로 스파르타입니다.

그럼 여기서 잠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차이점을 볼까요?

아테네와의 공통점을 보자면 노예제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테네의 노예는 자유로운 시민 소유의 노예이지만, 스파르타의 노예는 국가가 소유하여 공납을 걷는 국가 노예입니다. 아테네의 민족은 미케네 문명기의 이오니아인이지만, 스파르타인들은 미케네 문명을 정복한 도리아인입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이지만, 스파르타는 민주정치를 하면서도 시민군을 위주로 하는 군국주의적인 성격의 국가입니다. 아테네는 해군을 중심으로 한 해상상업을 중시하지만, 스파르타는 육군을 중심으로한 농업중심사회입니다. 아테네는 자유로운 학문과 문학이 발달하였지만, 스파르타는 군국주의 체제이므로 개인의 자유 표현이 약합니다.

3. 스파르타에 대한 착각 - 그들은 사실 민주정치이다.

스파르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보통 전제적인 국가입니다만, 이건 완전히 틀렸습니다. 스타르타의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체>, <국체>라는 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체는 <징치체제>로서 그 사회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누구냐를 말합니다. 스파르타를 이끈 것은 군인으로서 활약하는 다수의 시민들입니다. 즉, 왕이나 독재자가 아닌 시민이 사회를 이끌어가므로 민주주의 정치체제인 것입니다.

국체는 <국가체제>로서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방식을 말합니다. 스파르타의 국가 구조는 시민군을 위주로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이므로, 스타르타의 국가체제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 군국주의 국가체제인 것입니다.

즉, 스파르타는 군국주의적 국가체제이자, 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가 맞습니다. 스파르타가 전제적이라는 말은 틀립니다. 전제적이라는 것은 정치를 어느 한 1인이 이끌어간다는 것과 유사한데, 스파르타의 정치는 시민이 민회(시민회)를 만들어서 이끌어 나가거든요.

자 그럼 여기서 우리는 스파르타의 정치체제를 한번 볼까요?

일단 스파르타에는 초기에 국왕이 2명이 있었으므로, <왕정>이었으나, 왕의 실권은 없어서 왕정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또 귀족대표가 모인 장로회가 있어서 국가의 중요한 안간을 마련하는 입법부의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이것만으로 전적으로 <귀족공화정>이라고 보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 스파르타를 이끈 것은 다수 시민의 민회입니다. 민회는 성년 시민남자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민회에서는 법안을 의결하고, 공직자를 선출하며, 원로원(장로회)이 제출한 안건을 승인하는 등 최종적인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단체입니다.

실제 스파르타를 이끄는 행정관인 에포르는 국정운영의 집정관이자 스파르타 체제의 감시관으로 막강한 권한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 에포르를 선출하는 것도 민회입니다.

결과적으로 스파르타의 정치제제를 말하자면 <왕정, 귀족정>의 성격이 보이기는 하나 실제 <민주정> 체제인 국가라고 보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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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에서 평민층이 성장하기 시작하다.

1. 평민들이 성장하려 하다.

이제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아테네부터 한번 역사를 정리해볼까요? 아테네는 모두 아시다시피 고대 민주정치를 꽃피웠던 찬란한 문명의 국가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생각보다 쉬운 것도 아니고, 그 민주정치를 할 수 있었던 사회 여건들은 아름다운 것들도 아니였습니다. 아테네 민주정치는 귀족들에 대항하는 평민들의 피터지는 항쟁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평민들이 항쟁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사회가 평민들의 성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죠. 그럼 민주정치를 달성해가는 평민들의 성장과정을 한번 봅시다.

2. 평민성장의 배경

원래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초기에는 대부분 왕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리아인이 남하하고 혼란기를 맞이하자 이 혼란기를 수습한 것은 귀족들이었습니다. 왕은 한 일이 없었죠. 그 이유는 당시 전쟁에 필요한 말, 창 등을 마련할 수 있는 집단이 귀족이었고, 이 귀족들이 전쟁에서 많은 핵심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대부분의 국가들은 혼란기에 왕을 몰아내고 귀족 공화정을 수립합니다.

용어정리 : 왕이 다스리는 국가 = 왕국 / 정치체제 = 왕정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 = 제국 / 정치체제 = 제정
                  입헌군주가 다스리는 국가 = 입헌군주국 / 정치제체 = 군주정
                  군인참주가 다스리는 국가 = 참주국 / 정치체제 = 참주정
                  왕, 황제, 군주가 없는 국가 = 공화국 / 정체체제 = 공화정
                  (왕, 황제가 없으면 어떤 정치체제라도 공화정이다. 귀족공화정, 평민공화정 등등)
                   --- 이 외에 서양사에는 수많은 정치체제가 있지만, 그것은 차차 설명하겠습니다.

이러한 초기 상횡에서 성장한 것은 왕을 몰아낸 귀족들과 귀족들을 따라 전쟁에 참전한 평민들입니다. 귀족들은 폴리스를 방어하는데, 핵심으로 말, 무기 등을 자비로 마련할 수 있었고, 당시 초기의 전투에서 기병이 무지 중요했으므로 가장 우대받는 계급이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은 귀족을 따라 전쟁에 참여함으로서 <클레노스>라는 분배지를 받으면서 재산을 불려나갔고, 수공업, 상업등에 종사하면서 점점 발전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평민들은 성장하면서도 불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귀족들에 의해 분배지를 빼았길 수도 있고, 귀족들이 부당한 재판을 걸어 평민을 죽일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민도 전쟁 참여도에 따라 노예를 여러명 소유했지만, 이것도 귀족들에 의해 부당하게 빼았길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슬아슬한 평민들의 위치는 2가지 사회변화가 일어나면서 점차 평민에게 유리해집니다.

1번째 변화 : 전쟁의 양식이 바뀐 것입니다. 그리스 본토의 전쟁이 점차 소규모 동네싸움이 아닌, 대규모로 확대되고, 심지어 해외식민지까지 개척하면서 이제 몇 명의 기병귀족보다 엄청난 수의 중무장한 보병(팔랑크스)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은 점차 무장이 가능한 재력있는 평민들을 우대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이기려면 이들 무장농민들이 많이 필요하게 되니까요.

2번째 변화 : 점차 그리스 본토를 넘어 해외 소아시아까지 그리스인들이 진출하면서 <식민도시> 건설이 많아진 점입니다. 식민도시가 많아질수록 상공업은 발달하게 되고, 화페경제가 활성화되어 갑니다. 이 때 리디아라는 동방국가에서 화폐라는 새로운 경제 문물이 도입되자, 그리스는 경제규모가 급성장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제적 성장은 수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평민들이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자, 이제 평민들은 점차 성장하게 되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귀족들에게 덤비기 시작합니다.(이러한 평민성장의 배경은 그리스 이후 로마시대에도 똑같이 작용한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로마의 평민성장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 그럼 평민들과 귀족들이 서로의 권리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싸우는 피터지는 광경을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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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 폴리스가 성립되다

1. 폴리스가 성립된 배경

폴리스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쉽게 걍 <그리스 각지에 흩어진 동네국가들이다> 라고 말하면 쉽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죠. 우리 역사로 따지면 족장이 다스리는 소국, 일본으로 따지면 야요이 시대의 동네국가들이 되겠지만, 그리스의 폴리스는 약간 그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한번 볼까요?

2. 폴리스가 성립된 자연적 배경 1 <지리적 배경>

그리스에 폴리스가 성립된 이유 중 첫 번째는 지리적 배경 때문입니다. 그리스는 바다와 강 등으로 국가 영역이 소단위로 분리되어 있엇습니다. 또 산지도 많구요. 이러한 상황에서 촌락들은 산지, 바다, 강 등을 경계로 분리된 상태에서 각각 소 영역별로 모이게 됩니다. 이것을 촌락의 <집주>라고 합니다. 이들은 각기 일정한 자연적 경계를 중심으로 전사공동체적인 작은 도시국가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폴리스이지요.

3. 폴리스가 성립된 자연적 배경 2 <기후적 특징>

이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성립된 배경을 기후에서 찾는다면 <지중해성 기후>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은 여름에 건조한 기후 때문에 농업하기가 아주 불리합니다. 따라서 밀농사 등이 아니라 포도, 올리브, 목축 등 기후에 따라 다양한 농업경영을 추구하게 되며, 생활적인 일체감이 약간 부족합니다. 또 본토의 지형상 본토 자체를 통일하기 보다는 바다로 진출하여 기후가 좋은 소아시아에 식민도시를 건설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 초기에 한해서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대표적인 소아시아 진출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지요.

4. 폴리스가 성립된 결정적인 배경 <도리아인의 남하>

앞에 설명한 것은 단순한 자연적인 배경입니다. 이것만으로 폴리스 성립에 대한 근거를 정확히 말할 수 없습니다. 폴리스 성립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근거는 바로 초기 미케네 문명을 박살내면서 내려온 철기문명인인 <도리아족>의 남하입니다.

도리아인의 남하는 그리스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즉 도리아인의 남하로 기존 미케네인들은 아테네 지방(앗티카)으로 이동하여 각자 산과 강을 끼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또 소아시아와 크레타섬으로 이동하여 <이오니아>지방에서 새롭게 생활터전을 마련합니다.

여기서 그리스인들의 초기 문명은 유사한 2개의 지역 문명으로 분화됩니다. 하나는 그리스 본토에서 도리아인과 항쟁하며 버티는 전형적 그리스인이며, 또 하나는 이오니아(트로이를 포함한 소아시아) 지방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문명입니다.

먼저, 이오니아 지방을 보면, 도리아인을 피해 지계계층 중심으로 이동했으므로 본토보다도 더 문화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오니아에 먼저 살던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해안가에서 방어하기 쉬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이것이 바로 소아시아의 <폴리스>입니다. 즉,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는 군사적 수비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또, 이 해안가에 도시문명을 세우면 에게해의 여러 섬들 및 오리엔트 문명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 도리아인과 피터지게 싸우는 본토의 상황을 볼까요?

본토에서는 도리아인이 기존 문명을 철저하게 파괴하였고, 기존 문명인은 그것을 막기 위해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에 모여 수비를 시작합니다. 즉, 도리아인의 남하로 그리스 본토 자체가 혼란한 상황이었고, 그 틈을 이용해 바로 옆 국가를 공격하는 국가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 각 촌락은 지리적, 군사적으로 중심이 되는 곳에 도시를 만들어 문명을 유지하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주변의 촌락들이 하나의 독립된 주권국가를 만드는 데 이것이 폴리스인 것입니다. 즉, 폴리스는 외적 및 주변국가에 대한 공동방어의 목적이 강합니다.(폴리스 집주설)

5. 폴리스가 성립되면서 변화된 사회상은?

폴리스가 성립되면서 가장 큰 사회변화는 이집트적인 국왕중심의 국가가 아닌 자유로운 도시 국가로 사회가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즉, 수많은 전쟁이 발생하는 혼란기에 각 집단은 도시국가(폴리스)를 만들어 공동방어를 해야 했고, 이것은 전사공동체라는 시민의식이 생긴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두가 똑같이 평등한 전사가 되는 것이지요. 또, 전쟁을 통해 획득한 토지는 공동으로 분배하여 나누어 갖는데, 이것을 <클레로스>라고 합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여 전리품으로 토지를 획득한 <클레로스>보유 농민은 모두 평등한 시민이며, 이들은 독립된 토지소유자로서 활약하게 됩니다. 즉 <클레로스>를 가진 자들이 시민이 된 평등 사회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모든 토지는 국왕인 파라오의 것이라는 이집트 문명에서 건너온 고대 사상을 완전 깨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토지는 공유지이거나 왕의 토지라는 사상이 깨지면, 당연히 왕권과 부족권이라는 기존 권한은 약해지면서 시민들은 부역, 공납, 세금이라는 고대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시민의 권리와 자유는 <클레로스>를 통해 확고히 주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가 민주사회로 나가게 된 원천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반대 입장에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전쟁을 통해서 자유농민이 강해진 것이 아니라 귀족들이 강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혼란기 속에서 귀족들이 왕을 죽이거나 정치권력을 넘겨받고, 귀족들이 스스로 통치하기 쉽도록 자신의 근거지에 도시국가를 세워 귀족국가로서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쉽게 하기 위해 폴리스가 성립되었다고도 합니다.(귀족 집주설)

6. 폴리스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폴리스는 일단 중심도시와 주변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군사적 목적에서 해안근처에 도시국가를 건설합니다. 폴리스는 주변지역의 농촌까지 영향력을 가진 정치, 군사, 종교적인 중심지입니다.

먼저, 중심지에는 신전인 아크로폴리스가 있습니다. 이곳은 신탁을 받는 신전이지만, 전쟁이나 유사시에는 피난처이자 군사령부로도 이용됩니다. 다음으로 광장인 아고라가 있습니다. 이곳은 광장, 시장, 웅변장소, 공공생활장소, 사교장 등으로 이용되는 다목적 광장입니다.

이 폴리스에서 집주된 중심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귀족, 수공업자, 상인등입니다. 폴리스에 소속된 근처 농촌에서는 촌락민들이 살고 있는데, 귀족들도 도시에 살지만 자신의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는 농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럼 폴리스에서 자유민은 누구일까요?

폴리스에서 자유민이란, 폴리스를 형성하는데 참여한 부족의 성원과 그 후손만이 완전한 시민입니다. 즉 목숨을 건 전쟁속에서 이겨 <클레로스>라는 토지를 차지하고, 자신의 권리를 찾은 자만이 시민이 되는 것이지요. 자세히 보면 시민도 2종류가 있긴 합니다. 원래 혈통이 우수하고 대토지가 원래 있는 귀족계층이 있으며, 반대로 전쟁을 통해 <클레로스>를 획득한 새로운 시민계층이죠. 물론, 전쟁에 진 자들은 시민권이 없는 노예계급이겠죠?

이러한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분립된 수많은 동네국가 수준이면서도, 그들 나름대로는 미케네 문명을 공유했던 공동체라는 의식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본토를 자신들의 땅(헬라스)라 불렀습니다. 서로를 같은 민족인 <헬레네스>라고 칭했습니다. 같은 신화를 기원으로 하였다는 동족의식이 있었고, 올림피아 제전을 통해 함께 어울렸습니다. 또 인보동맹을 맺어 공동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과 다른 이민족은 <바바로>라고 하여 차별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각 소국은 독립된 주권을 가지고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영유하고,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면서도 동족의식은 공유하는 이상적인 고대 소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폴리스의 정의는 이렇게 내릴 수 있습니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인 유대관계로 결합하였으면서도, 법에 의해 규제되는 완전한 독립성과 주권을 가진 시민공동체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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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