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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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7화. 불교의 참뜻을 알리려던 고승들

1. 도안(312-385) : 지금 불교에 필요한 것은? 계율이다.

자 지금까지 격의 불교에 대해 설명했다. 격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교 사상을 쉽게 전파하기 위해 전통 중국 철학을 인용하여 불교 용어를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의 깨달음인 <열반>을 도교 사상인 무위자연과 비슷하다고 여기고, <열반은 곧 무위이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불도징의 제자인 도안(312-385)은 심오한 불교 교리를 대충 때려맞추려는 격의 불교 사상이 싫었다. 격의 불교 사상 때문에 당시 불교는 <원시 신앙>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식인과 일반 백성 할 것 없이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것 조차 못하였다. 하안과 왕필 같은 청담 사상가들은 <유교, 불교, 도교는 다 도를 추구하는 같은 종교이다>고 이해했을 정도이다. 오히려 논쟁이 된 것은 부처와 노자 중에 누가 먼저 태어난 스승이냐 같은 것이었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뒤에 태어난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불교의 스님은 주술사와 다를 바 없었다. 스님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마술을 부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불교와 샤머니즘은 동일한 것이었다. 지옥을 지키는 불문의 수호장들은 동물 숭배 사상(토테미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천둥과 번개를 부릴 줄 아는 보살은 애니미즘과 다를 바 없다. 부처가 되기 위해 은거한 보살과 산신령이 뭐가 다른가? 위진시대 초창기 불교는 신비한 주술을 부리는 도가의 <도사>와 구별되지 못하였다.

격의 불교 시기 스님은 마술로 백성들을 치료하고, 주술로 국가를 지키는 호법신이면서,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한 도사였다. 이렇게 신비한 스님이기에 위진시대 혼란기의 왕들은 스님을 초빙하여 <신비한 설법>을 듣고자 했던 것이다. 불도징 같은 위대한 스님이 겨우 <주술>이나 부리면서 왕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불교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다.

불도징의 제자인 도안은 이런 풍토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진정한 불교를 위해 2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복잡한 교리에 <해설>을 달아 불교 이론을 쉽게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계율을 만들고 지켜야 불교의 참뜻이 지켜진다는 것이었다.

도안은 스승인 불도징이 죽자 불경 주해를 다는 일에 온 힘을 다하였다.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도와서 쉬운 말로 <해설>을 달기 시작했다. 인도어인 <범어>는 논리적인 언어이기에, 다양한 뜻을 내포한 중국어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았다. 범어는 표음문자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도안은 최대한 쉬운 말로 범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불교 경전의 참뜻을 알리는 일이 도안부터 시작된 것이다.

반면, 도안이 수많은 경서에 해설을 달면서 중국어의 어휘체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심오한 불교 경전을 해석하다보면 중국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도안은 기존 한자의 활용도를 더욱 높여서 설법, 인도식 속담, 격언, 불교 고유 용어 등을 표현해 내었다. 중국의 불교 교리가 심화되는 것은 곧 중국어의 어휘가 풍부해짐을 뜻한다.

도안은 불교 교리를 전파하는데 노자의 사상과 청담가들의 논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불교의 원래 뜻을 살리려고만 노력했기 때문에, 중국 전통 사상을 가지고 불교 사상을 해석하는 <격의 불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불교 경전에 주석을 단 것은 부처의 말씀에 대한 글들을 읽고 확실한 근거를 통해서였다. 드디어 불교는 노자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도안은 철저한 계율을 중시했다. 승려는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승려가 되는 기본 조건은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예 모든 출가 승려들의 성을 <석>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처에게 귀의한 사람들이 세속의 성을 가질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안의 획기적인 계율 강조로, 이후 불교에서는 <석>을 성으로 삼는 전통이 생겼다.

그럼 도안이 불교의 참뜻을 찾아내었을까?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대승불교의 기본 교리는 반야(지혜)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율만 강조하고 지혜만 찾으라고 말하면서, <반야경>을 외워라~~~ 강요한다면 사람들은 복잡한 교리와 율법에 질려 불교를 떠날 것이다.

그래서 도안은 율법의 실천 사항으로 <미륵신앙>을 강조하였다. 어지러운 난세에, 미륵부처가 내려오면 모두가 하늘(도솔천)로 갈 수 있으니, 그 날을 생각하면서 왕생을 기도하라는 것이다. 미륵신앙은 내세를 염원하는 백성들의 뜻과도 일치하고, 절대자가 구원해준다는 신비주의 사상과도 일치했다. 또, 국왕이 곧 미륵의 화신이라는 논리와도 연결되면서 국왕도 불교를 탄압하지 않을거라는 확신을 준 사상이었다.

불교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 계율을 강조하고, 경전을 번역하면서도 대중적인 미륵신앙을 강조한 도안...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최상의 스님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도안을 <한나라 이후 선법과 방야의 두 가지를 종합한 반야 6대가>라고 표현한다.

도안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중국대륙의 북부를 통일한 부견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전진왕 부견은 명성이 자자한 도안을 모시기 위해 십만 대군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초토화 시키려고 하였다. 스님 한명을 위해 수만명이 죽을지도 모를 전쟁을 계획한 것이다. 도안은 전쟁을 말리며 전진의 수도 장안에 와서 수백권의 경서를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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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열정적으로 책을 번역했던지, 훗날 구마라습은 이렇게 말하였다. <도안은 동방의 진정한 성인>이라고...

전진왕 부견이 중국 북부대륙의 영토를 넓히고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다진 것은 도안의 철학을 존경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 혜원(334-416) : 백련결사는 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다.

혜원은 원래 노장사상을 따르던 <도사>였다. 그러나 불도징과 도안을 만난 후, 불교의 심오한 뜻에 흠뻑 빠져 불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도안을 존경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승인 도안이 전진왕 부견에게 가 버리자, 동림사(여산)라는 절에서 30년을 득도하면서밖에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는지, 자신이 30년간 속세에 나오지 않겠다는 말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다. 또, 속세의 성을 버리고 불가에 들어간 사람은 <정치>와 상관없는 사람이기에 왕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 사람이다. 혜원이 남긴 유명한 일화를 한번 볼까?

혜원은 친구인 도연명을 만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승려와 유학자, 불가의 스님과 속세의 정치인은 어울릴 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나, 당대의 최고 철학자라 불리는 이 둘은 너무나 친하였다. 이야기를 하는 중 도연명이 떠나자, 혜원은 도연명을 더 이상 전송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연명 : <좀더 전송해주게나. 나는 국가의 관리이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네는 속세를 떠났으니 자유롭지 않은가?>

혜원 : <안되네. 내 마음과 욕망은 자네를 더 전송하고 싶지만, 앞에 호계가 있으니 건널수가 없네. 이것이 삼십년 동안 지킨 내 계율이네.>

도연명 : <그런 계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혜원 : <의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네. 선한일이 비록 작다 하여도 행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악한 일이 비록 작아도 행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유가에 있더군. 내가 만일 이렇게 작은 일도 시종일관하지 못한다면 큰 일에는 더욱 시종일관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도연명은 그 말을 듣고, 대화마저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그는 돌아오는 즉시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만고에 길이 남을 <귀거래사>를 지었다. <귀거래사>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도연명이 남긴 대작이었다.

혜원 역시 스승인 도안과 같은 입장이었다. 사람들에게 복잡한 반야(지혜)를 설교하면서, 반야경을 외워라~~ 라고 말한다면, 누가 부처를 좋아하겠는가? 아무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도 수능 공부만 10년동안 하라고 말한다면 공부가 지긋지긋할 것이다. 그래서 혜원은 생각한다. 반야경은 나혼자 연구해서 남기면 될 것이고, 일반인들이 쉽게 불교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혜원이 생각한 불교의 수양 방법은 <나무아미타불>이었다. 보통 <아미타 신앙>이라고 한다. 혼란기의 백성들은 복잡한 계율과 교리를 이해할 틈이 없다. 매일 같이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속세의 사람들이 무슨 교리를 외우겠는가? 그냥 <아미타불>만 외치고, 마음으로만 부처를 모시면 된다.

혜원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문구를 외운 후 계율을 지키면서 착하게 살면 복잡한 교리를 몰라도 해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 이것은 먼 훗날 <정토종>이라는 불교 종파와 연결된다. 혜원은 아예 <나무아미타불>을 맘놓고 외칠 수 있는 염불 단체를 만들어 버린다. 이 결사 단체를 <백련사>라고 하는데, 후대 불교인들은 어려운 시기를 만날 때마다 이 <백련사>를 만들었다.

백련사의 수련법은 간단하다. 아미타 불상을 보면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언젠가 아미타불을 만날 것을 꿈꾸며, 죽은 후에는 극락세계에서 영원한 편안함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도안과 혜원은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구하면서도, 백성들과 거리를 두지 않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던 것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미신에 빠져있던 불교의 참 뜻을 중국인에게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3. 법현(339-420) : 나는 참 뜻이 뭔지 직접 찾아봐야겠다.

도안과 혜원이 중국 안에서 불교의 참뜻을 고민했다면, 법현은 아예 인도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고 한 인물이다.

불법을 배우러 서역으로 떠난 최초의 인물은 <주사행>이다. 주사행은 한나라 영제 때 <도행경>을 번역했는데, 자신이 번역한 것을 스스로 읽어도 짜증이 났다. 도무지 불교의 참 뜻을 번역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조조의 위나라 시기에 서역의 우전국까지 가서 경전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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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법현 역시 서역으로 <구법> 여행을 시작했다. <구법>이란, 서역의 고승에게 불법을 배우고, 불교 유적지를 직접 보고 느끼는 작업이었다. 이 당시 구법은 불교 경전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본가 스님을 만난다는 뜻이 강했다. 또, 해석되지 않는 부분과 관련된 책을 가져오는 목적도 있었다.

법현이 서역에 다녀온 후 적은 <불국기, 혹은 법현전>를 보면 법현의 여행이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알 수 있다. 다녀온 사람이 없기에 길을 찾는 것 조차 어려운 여행 속에서 동료들은 모두 죽고 법현 혼자만 살아돌아온 것이다. 이미 부족할 것 없이 존경받고 있던 60살의 스님이 14년간 여행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는 길도 모르는 중앙아시아의 사막을 끝도 없이 가로질러 오아시스 국가에 도착한다. 파미르 고원의 눈보라와 싸워가면서 절벽을 넘고, 인더스 강을 건넜다. 겨우 서인도에 도착하여 불법을 배운 그는 실론(스리랑카)까지 넘어가 불법을 구하려고 했다. 스리랑카에서 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폭풍과 해일까지 만났지만, 그는 결국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지켜내었고, 그것을 번역하였다.

그가 가져온 책 중에서 유명한 것은 <대반열반경>이었다. 그가 번역한 이 책의 내용은 중국 <열반종>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중국 대륙에 부처의 참 뜻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시작한 그의 <불국기>는 현장(삼장법사)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위대한 불교 여행서로 평가된다.

자, 오늘은 격의 불교를 넘어서 불교의 참 뜻을 전하고 싶어했던 몇몇 고승들의 이야기를 해보았다. 다음 장에서는 불교의 참뜻을 전한 구마라집과 남북조 시대의 고승들 이야기를 하고, 위진남북조 당시 역사의 전개가 불교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야기해보겠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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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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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사상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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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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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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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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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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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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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대로의 진입

1. 유럽의 구석기 시대

자 이제, 유럽의 구석기 시대의 특징을 한번 살펴볼까요?

유럽의 구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은 알타미라와 라스코의 동굴벽화, 비너스의 여인상 조각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정령숭배 등의 주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내세관념을 일찍부터 가지고 있었던 듯 싶습니다. 특히 비너스의 여인상 등을 통해 볼 때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는 그들에게 큰 의미였던 것 같네요.

구석기 시대 초기에는 단순한 도구의 제작을 통해 어느 정도 두뇌가 발달하면서 인류가 발전했던 것 같습니다. 이 두뇌 발전을 대대적으로 촉진했던 것은 역시 언어의 사용이겠지요. 사냥을 하면서 사고능력과 협동심도 늘었을 것이고, 불을 사용하면서 자연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극복했던 것 같습니다. 구석기 중기에 오면 네안네르탈 인 등이 시체매장의 풍습도 행하였습니다. 즉, 초보적인 종교 관념과 죽음에 대한 인식도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후기 구석기 인인 3-4만년전의 크로마뇽인은 진화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인상의 조각이나 동굴에 그린 주슬적 미술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죠. 또 초보적인 분업도 행하였고, 이음도구 등을 사용하면서 중석기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로 나아가는 시대 변화를 주도하였습니다.

2. 신석기 혁명

이러한 아주 느리게 점진적으로 발달한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약 1만년전 시작된 신석기 시대의 변화는 구석기 시대의 변화에 비하면 너무나 짧은(?) 시기의 발전이라 볼 수 있죠. 일단 가장 큰 특징은 농경입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동생활을 벗어나 정착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동굴이 아닌 움집을 지어 모여사는 씨족 생활이 시작된 것이죠. 농경은 함께 일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부족생활을 발전시켰고, 부족들은 이제 가락바퀴나 뼈바늘 등을 통해 의복생활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합니다. 농사를 통해 남는 잉여생산물을 저장하기 위한 토기가 등장하였습니다.

또 농경을 하면서 태풍, 벼락, 홍수, 가뭄 등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커졌습니다. 여기에 부응하여 종교가 탄생하였지요. 농경생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경을 망칠 수도 있는 행동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는 금지(터부)라고 합니다. 금기 항목을 지키기 위하여 주술과 종교가 발전하였지요. 동물숭배인 토테미즘, 자연숭배인 애니미즘,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무당을 숭배하는 샤머니즘이 등장합니다. 이 시기는 무당을 중심으로 신을 모시는 신정정치가 가장 활성화된 시기입니다. 또 조상신 숭배나 대지신 사상 등이 유행합니다. 특히, 대지신 사상은 풍성한 토지 수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가장 풍만한 여인을 여인상으로 조각하여 기원하는 의식도 성행하였습니다.

이러한 농경은 채도와 함께 전세계적으로 확산됩니다. 우리가 보통 듣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시작된 농경은 전 세계 인류의 생활방식을 바꿔가며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3. 점차 문화권이 형성되다.

이러한 신석기 시대의 농경 생활은 초기에는 씨족에 의한 촌락 생활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농사지을 터에 불을 질러 그것을 비료삼아 땅의 지력을 끌어올리는 화경농법(약탈농법)이었답니다. 그러나 농사기술이 발전하면서 씨족단위가 커지게 되었고, 점차 농경의 중심지가 평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씨족단위보다 큰 단위인 도시국가가 출현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변화로 인하여 신석기 후기로 갈수록 정복전쟁의 형태를 띄면서 잉여생산물을 약탈하는 경향이 많아집니다. 또 전쟁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이 집단정주생활을 하게 되며, 족외혼, 일부일처제, 부계제도 등을 제도적으로 확고히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정복전쟁을 통해 군장계급, 노예계급 등 계급이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는 나름대로의 규칙과 제도를 가진 거대한 문화권 들이 그 지역의 상황에 따라 형성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 4대 문화권이 등장하게 됩니다. 세계 4대 문화권을 살펴볼까요?

1. 농경문화권 - 중국과 일본을 포함하는 평야지대 문화권, 채도를 사용하며 지모신 신화가 많다. 목축도 동반한다.

2. 오아시스 농경 문화권 - 서아시대의 사막지대로 유목을 동반하는 문화권이다.

3. 유목문화권 - 추운 북부지방을 포함하는 문화권으로 초원지대에서 형성되며, 세석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이다. 수렵을 동반한다.

4. 수렵문화권 - 삼림지대에서 이루어지는 문화권인데, 원시농경도 혼재한 문화를 말한다.

이러한 초기의 4대 문화권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4대 문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세계 4대문명은 그 특징이 대부분 건조기후이거나 건조한 온대기후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특히 큰 강유역에서 대규모 치수사업을 하면서 계급과 국가가 성장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신석기 이후 청동기시대까지 농경을 계속 발달하였습니다. 농경과 목축의 발달은 곧 생산력과 인구 증가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청동제 무기 등이 개발되면서 전쟁이 많아지고 사회분화가 촉진됩니다. 또 농업의 발달은 잉여생산을 가져와 생산물을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빈부차 및 계급을 발생시킵니다. 계급의 차이가 커지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커진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불만을 포괄할 큰 정치조직체가 등장합니다. 즉, 도시와 국가가 출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문자의 사용, 수레와 범선의 발명, 제정일치의 사회조직 등과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 집니다.

한국서양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1세대 학자인 민석홍 교수는 이렇게도 주장합니다. 고대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은 철기를 사용한 히타이트 민족부터인데, 철기의 사용이 곧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면서 아버지 위주의 부계사회를 정당화시켰고, 가부정적인 사회로 사회가 개편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모계중심사회가 부계중심사회로 변화는 과정 속에서 국가관 역시 국왕 중심의 국가관으로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 즉, 고대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일 권리가 있듯, 국왕이 노예를 죽일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점차 정당하다고 여기게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기 고대 통일왕국을 이루는 기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석홍 교수는 6차 세계사 교과서(교학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일왕국이란, 가부장적인 체계 속에서 동서교류를 통해 발전하면서 신정정치적인 관료제를 갖추고, 보편적 종교를 국가이념으로 지향하는 국가라구요.

제가 생각해보니 그 이념에 정말 딱 부합하는 대표적이며, 상징적인 국가는 로마제국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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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신석기 시대

1. 원시-선사-석기시대를 구분하자.

원시시대라는 용어는 인류가 고대 이전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시대를 말합니다. 흔히 원시 공동체 사회라고 하며, 생산과 분배가 씨족 또는 부족의 공동체 소유로 규정되던 사회를 말합니다. 이 용어는 사회 발전단계상 원시-고대-중세... 등등 시대 구분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선사시대란, 역사시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전의 문자가 없는 시대를 말합니다. 즉, 어떤 시대이든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면 무조건 선사시대인 셈이죠. 한반도에서는 최초의 기록이 <사기 조선열전>에 나오기 때문에 우리 나라 역사에서 선사시대란 기원전 2세기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으므로, 이 시기가 원시시대는 아닙니다. 즉, 한반도에서 원시시대는 국가가 없는 공동체 사회를 뜻하므로 고조선 이전의 시기를 말합니다.

석기시대는 고고학적으로 볼 때, 도구 사용 기준에 맞춘 시대입니다. 즉, 돌을 이용한 구석기, 신석기 시대가 석기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석기시대 이후가 국가가 발생하는 청동기 시대이므로 우리는 보통 석기시대가 원시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청동기의 사용으로 정복전쟁이 많아서 노예계급과 군장계급이 발생하였고 국가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청동기 시대는 원시시대를 넘어가는 시기가 되는 것이죠. 이 논리에 맞추어 최근에서 청동기 국가인 고조선도 한국의 고대사회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교과서에서는 고대시대를 보통 삼국시대가 정립된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단, 석기시대가 꼭 원시시대는 아닙니다. 신석기에서도 생산력이 높아지면 국가와 계급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시기가 원시를 넘어 고대 사회가 되기도 하죠.

역사를 공부할 때 꼭 원시, 석기, 선사 시대를 공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용어 구분를 하고, 이 시대를 교과서나 개론서에서 다루는 이유는 단지 우리 민족의 기원이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프롤로그 수준의 내용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신석기 문화가 시작되다.

구석기 시대는 솔직히 우리 민족사와 별 상관이 없습니다. 한반도라는 우리 터전이 자리잡은 시기도 아니고, 구석기인들의 문화가 우리와 관련도 별로 없습니다. 실제 우리 민족사는 신석기인들부터라고 보아도 무난합니다.

신석기 문화는 식량 생산을 하던 문화로서 돌을 갈아 도구로 사용하던 간석기인이며, 농사를 통한 음식을 저장히기 위해 토기를 사용한 최초의 문화였습니다. 특히 이 토기는 빗살이 나타나 있는 빗살무늬토기로 이 빗살무늬 토기는 서쪽 핀란드, 러시아,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등 대량으로 출토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빗살무늬 분포로 보아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은 시베리아에서 이주한 고아시아족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특히 시베리아 고아시아족은 조상으로 곰을 숭배한 사실이 있는데, 이러한 요소가 단군신화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신석기 문화는 기원전 5천년전 쯤 시작되었고, 처음에 신석기인들은 농경과 관련하여 강가나 해변에 거주하였습니다. 또한 사냥, 어로 활동도 활발하였으며 부분적으로나마 사회분화도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이 당시 농경으로는 도토리가 주목됩니다. 도토리는 가루로 만들어 물어 타면 훌륭한 식량이 되며, 칼로리도 높았던 만큼 이 도토리를 사용한 흔적이 확실하진 않지만 보인다고 합니다. 도토리, 과일류, 나무열매류, 토란, 마, 칡 등이 식량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신석기인들이 생산한 곡식은 피, 조, 기장, 수수 등 많았는데, 특히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에서는 불에 탄 곡물이 나와서 이러한 농경 생활의 증거를 보여줍니다. 농경은 조 중심의 밭농사였지만, 한강하류 김포지역에서는 볍씨들도 발견되곤 합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놓고 신석기설과 청동기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3. 마을을 이루고 자연을 숭배하다.

신석기인들은 혈연중심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하는 이 평등한 사회는 지배자가 없었습니다. 또한 같은 마을 남녀끼리는 결혼할 수 없는 족외혼 사회인 것으로 보아 주변에 결혼을 할 수 있던 다른 씨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씨족 혈연 및 주변 지연관계의 부족사회가 존재하였음을 알수 있으며, 공동체 운영단위는 씨족 중심에서 점차 부족 중심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인들은 숭배된 동물을 믿는 토템시상(토테미즘), 우주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애니미즘),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무당사상(샤머니즘) 등 종교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종교는 아마도 농경사회에서 갖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시체 머리를 일부러 동쪽으로 향하게 하는 관습은 동쪽을 해가 뜨는 곳으로 보아 영혼의 소생처로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불멸사상을 의미합니다.

특히 샤먼사상은 단순한 주술사로서의 무당을 믿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을 판단하는데 근거가 되는 정치적 성격으로서의 무당이었습니다. 무당은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 존재를 매개하는 매개자로서의 무격신앙이었는데, 이러한 무격신앙을 보여주는 유물은 조가비 가면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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