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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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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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8화. 인도식 불교가 중국식 불교로 바뀌다.

1. 구마라집(구마라습 : KUMARAJIVA, 344-413) : 중국 중관사상의 아버지

도안과 혜원이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에 새 바람을 넣으려 했다면,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정리한 사람이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중국 고유의 토착 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구라마집 상>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 쿠챠국의 왕족이었다. 공주였던 어머니는 어린 라집을 불교에 입문시켰고, 최고의 불문 법사들 라집을 지도하였다. 라집은 박학다식한 불교 이론을 접하였다. 불교 뿐만 아니라 베다의 천문술, 수학, 음양오행, 힌두이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을 주름잡던 전진왕 부견은 라집을 모셔오라고 했다. <도안>과 함께 <라집>까지 있다면, 불교의 참뜻을 알 수 있을 뿐 이나라, 불법의 신이 전진의 호국신이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안 역시 라집을 만나 진정한 불교의 참 뜻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들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라집은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양주에 갖히게 된다. 불교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를 가둔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안과 부견은 모두 사망하였다. 결국 라집은 전진을 계승한 후진의 왕 요흥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고서야, 장안에 겨우 오게 되었다.

구마라집이 중국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이 된 이유는 긔의 <불경 번역> 때문이다. 라집은 방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중국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켰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불경 번역의 단계를 나눈다. 성경이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듯, 라집의 불경 번역이 중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중국사에서 구마라집 이전에 번역된 불경들을 <고역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구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 이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를 탈피하여, 중국 불교 수준을 인도 대승불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인 그의 번역서는 <대승론>, <반야경> 등으로 이것은 인도 전통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 등의 중관 사상을 중국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6바라밀의 핵심사상은 <반야>가 어떤 지혜를 갖는지, <공>이라는 것이 <연기설, 업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2-3화의 인도 불교 이론 참조)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정한 불교이론을 갖춘 <삼론종>이 등장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불경 번역은 중국 불교 사상에 수많은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마라집이 대승 불교의 원전을 번역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교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가 되면, 삼론학파을 필두로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이 등장하게 되고, 수,당시기에는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 등 종파까지 등장하게 된다.

2. 승조로부터 시작된 <삼론종>

구마라집에게는 구름과 같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승조와 도생이다.

승조와 도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승조는 책을 베껴적는 필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는데, 책을 필사할수록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승조는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였다. 특히 민중적이라는 점은 노자와 묵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더욱 민중적인 종교가 있었으니 <불교>였다. 그는 구역경 중의 하나인 <유마힐경>을 읽은 뒤 감동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라집의 제자로서 격의 불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공>사상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던 그는 라집의 사상체계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구로 따지면, 예수의 철학을 알리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수많은 불경해석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확실한 제자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불교철학사에서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등은 이후 중국 대승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 중 <부진공론>은 삼론종의 이론적 근원이었다.

승조는 인도의 중관학파의 <공> 사상에 구마라집의 <해설>까지 더하여 중국 특유의 대승불교 학파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삼론학파>라는 연구 단체였다. 훗날, 삼론학파의 철학이 수, 당 나라 시기 정착되어 <삼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론학파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 사상을 구마라집의 해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학파였다.

3. 도생로부터 시작된 불성논쟁과 <열반종>

반면,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특출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곧 도생이다.

도생은 난징에서 축법태에게 학문을 배운뒤, 7년간 혜원과 함께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진리를 알고 싶어했다. 혜원을 떠나 구마라집에게 온 뒤, 그의 박학다식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구마라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북쪽을 떠나 남조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불교 이론에서 상상하지 못하였던 혁신적인 발언을 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도 처음엔 깨달음이 없었다.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로 태어난 자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같은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강연하던 그는 깨달음은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막 불교 교리가 정리되던 마당에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인간으로 태어났다. 불교를 비판하는 자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불성>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면 <성불>할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노력을 일일이 기록하여 깨달음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누가 성불하겠는가?

기독교로 따지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와 같은 맥락이다. 삶은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므로, 결과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결과는 곧 그 과정들이 선택한 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과정이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 것과 같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불성>을 깨닫게 된다면, 악인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업보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처의 보편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몸 안에 부처가 살고 있기에 누구든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을 <돈오성불>이라고 말한다. <돈오>란 자신이 부처임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성불>이란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훗날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사상에 영향을 준다.

도생의 이론은 <불성논쟁>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가져왔다. 도생 이전의 불교 기본 이론은 <점수>였다. <점수>란, 한단계 한단계 수양을 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깨달음>의 철학은 <점수론>을 옹호하는 기존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를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부처의 세계와 <공>사상, <반야>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도둑놈도 깨달으면 성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도생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하여 교문에서도 추방된다.

하지만, 도생의 이론이 인도 본토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이나 <반야> 사상과 반대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도생이 추방된 후 3년 뒤 인도에서 <대열반경>이 전래되었다. 대승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은 이 경전에는 천제(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교를 비방하는 자, 무식한 자를 묶어서 다루는 말)도 사람이기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씌여진 것이다.

도생이 주장한 것은, 인도 본토에서 석가의 뜻을 해석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대승 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이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점이 좁혀진 것 아닌가? 누구가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열반학파>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열반학파의 사상은 수나라 시대의 <천태종>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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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의 성장으로 발생한 폐불 사건

구마라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불교 이론 정리는 수많은 불교 연구 학파를 탄생시켰다. 승조의 <삼론학파>, 도생의 <열반학파> 외에도 구마라집의 제자들은 다양한 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진 일파가 있었다. 인도의 4세기 하리바르만이 지은 <성실론>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공>이라는 것을 존재나 깨달음의 차원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학파를 <성실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승조의 <삼론학파>는 이 학파의 이론이 불교를 <존재와 논리>로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학파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불교로 분류되었고, 삼론학파에 흡수되어 삼론종의 일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에 <성실종>이란 종파로 이론이 전파된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에서는 인도의 유식학파 세친의 <화염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지론학파라고 한다. 이 지론학파는 훗날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남조의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섭론학파>를 만들고, 유식학파 세친의 <화엄경>을 연구하기도 힜다. 이들은 훗날 중국 유식학파의 대표종파인 <법상종>의 선구자들이 된다.

이렇게 불교는 <학파>와 <종파>를 만들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불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교와 도교 세력은 긴장하게 된다. 혼란의 절정기인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불교와 도교는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 피터지는 역사에 대해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불교와 도교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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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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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삼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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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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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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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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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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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 철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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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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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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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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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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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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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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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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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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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4화. 인도 불교의 대중화 - 대승 불교 이야기

1. 일반민에게 친숙한 석가 - 석가의 불상이 만들어지다.

자, 이제 한반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대승 불교쪽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소승불교나 티벳 불교는 우리와 큰 상관이 없으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핵심을 짧게 정리하자면 <만민구제>, <속가불교>, <보살신앙>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 하나 하나 정리해볼까나? 대승이란 말 자체가 <큰 수레>라는 뜻이다. 그럼, 소승은 <작은 수레>겠지?

석가시대의 불교는 출가자들이 문답을 통해 진리를 얻고, 수양과 고행을 적절히 섞어 깨달음을 알아내는 불교였다. 불교를 믿는 출가자들의 목표는 <자신의 구제>였다. 즉, 깨달음을 위해 정진을 계속하고, 그 결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가의 이념을 인정한 마가다 왕국이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역시이러한 불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는 <호법왕> 역할을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기 불교 자체가 <소승 불교>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쇼카 왕의 석주 : 정법실현>

<석주 머릿기둥>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무렵, 소승 불교는 성격이 바뀌게 된다. 당시에는 새로운 사회사상으로 힌두이즘의 바크티 사상이 유행하였다. 바크티란,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총>이란 뜻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신의 은총이 내린다는 초기 힌두 사상이었다.

불교도들은 이 사상이 자극을 받았다. 석가는 출가자와 일반 신도를 차별하지 않았는데, 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출가자들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을 얻기 힘든 일반인들은 <도솔천>에 오르기 힘든 것인가?

거기에 계속 유입되는 철학들도 불교의 폐쇄성과 대립하였다.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도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는데, 불자들은 왜 출가자들만의 <열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해결한 것이 바로 <대승 불교>였다. 붓다는 더 이상 선택받은 출가자들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교가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함께하는 구원이었다. 기원 전후로 인도에는 안드라 왕조가 성립하여 이민족을 몰아내고 인도 남부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왕조는 브라만교를 신봉하면서 바르나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했다.

불교도들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혼자만의 <열반>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한다는 명분이 필요할 때였다. 자신의 깨달음의 결과를 많은 이들에게 돌려 수많은 <불도>들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수많은 중생들을 <불제자>로 만들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석존의 가르침에 앞서 석존의 인격과 신성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원래 초기 불교에서는 석탑이라는 것이 없었다. 부처조차 죽음(입적) 후에는 화장을 하여, 몸에서 나온 다비를 세는 정도에서 죽음을 정리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석가의 유물들로 각지에 불탑을 세워 보호하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은 그곳을 찾아와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닌 일반인 중심의 불교가 시작됨을 뜻한다. 일반인들은 복잡한 불교의 가르침보다는 석가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 석가의 불상 조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석가의 불상 조각을 처음 만든 것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인도를 접하게 된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석가라는 인물을 합리적으로 알기 위해 어떤 형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모방한 형태로 석가의 불상을 조각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치던 인도 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간다라 미술)

<간다라 미술의 불상들>

2. 부처의 비서실장 - 보살들의 등장

다음, 불제자 양성 프로젝트는 <보살>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초기 소승 불교의 <개인 구제> 방법은 듣고, 고행하고, 깨닫는 방법이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암송한 뒤, 석가의 고통을 스스로 느껴보고, 석가의 깨달음을 명상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언제 암송하고, 고통받아보고, 한가로이 명상하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열반>에 들어간 석가가 다시 나와서 <전 중생>과 일일이 악수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살>이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다니는 예비 부처들이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행을 쌓아야 하는데, 선행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일반민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야만 했다. 이 수행자들은 부처의 사상을 알리는 홍보실장과도 같았다.

<보살>들의 수행방법은 <육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이것은 6개의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 불교의 최초 경전인 <반야경>의 핵심이었다. <반야>란, 6개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를 말한다.

육바라밀 : 보시(베풀어 주는 것), 지계(바르게 사는 것), 인욕(참고 사는 것), 정진(노력하는 것), 선정(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반야(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이 6가지를 실천하면서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곧 보살들인 것이다. 보살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자비로움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인물들이었다.

대표적인 보살은 <미륵>이다. 미륵은 석가시대부터 존재했던 보살이다. 많은 역사서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던 보살이다. 미륵은 당대 실존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장 부처에 가까운 보살로서 인간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보살로 알려졌다. 미륵은 언젠가 중생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다시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보살들이 등장했다. 자비로움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세음보살>은 훗날 동아시아에서 <아미타불>과 연관된 대중적 보살이 되었다.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반야경>과 관련있는 <문수보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살이 되었다. 죽은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지장보살>, 티벳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자정하는 <집금강보살> 등도 시기는 달리하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원래 보살은 수행자를 뜻한다.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원에서 수행을 하면 보살이 될 자격이 있다. <보살>은 불교 대중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반인들 자체가 보살이 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사원을 세울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보살은 수행자가 아니라, 숭배자가 되었다. 백성들은 미륵보살, 관세음보살과 같은 이들을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로 보고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힘들 때마다 <보살>들이 바쁜 부처를 대신하여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과 종말>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대중 스스로가 부처가 된다는 인식은 이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든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니까...

<관세음보살 : 불상화>

<문수보살>

<미륵보살 입상>

3. 대승불교의 아버지 - <용수>

대승불교의 철학인 육바라밀 사상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3세기 용수(150-250)였다. 용수를 범어로 <나가르주나>라고 하는데, <나가>는 용을 말하며, 아르주나는 그의 모친이 태어난 나무 이름이다.

용수의 핵심 철학은 보살의 육바라밀 중 <반야>에서 출발한다. 다른 것은 다 실천하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지혜(반야)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가? 지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머리 속 구조와 관련있는 인식체계이다. 용수의 이 질문으로 대승불교는 수백년에 걸쳐 인간의 인지구조(지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용수가 생각한 지혜란 <공>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 등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여기서 부처의 철학을 다시 복습해보자.

부처는 인간의 번뇌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의해 돌고 돌기 때문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무상), 나란 존재도 결국 순간적인 변화물의 일부로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것(무상)이라고 말한다.

고대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생명(아트만)은 우주의 본질(브라만)과 같은 것으로 영원 불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는 본질이란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데, 확고한 본질이라는 것이 어디있는가? 모든 것은 순환 과정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연기설)

부처의 이 교리를 용수는 <공>으로 해석하였다. 부처가 말한 돌고 도는 인연(연기)는 결국 아무 본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공>을 말하는 것이다. 세속 세계는 부처 세계와 인연으로 닿아있어서 두 세계는 돌고 돈다. 세속이 없으면 부처 세계도 없고, 부처의 은혜가 없으면, 세속 세계의 아름다움도 없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공>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두뇌와 눈, 코, 입, 장기, 손, 발 등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인간의 절대적 본질은 없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이며,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눈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각각의 기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란 본질은 무의미해진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일 뿐이다. 언어로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지 그 본질은 각각의 연결점을 떼어놓고 설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전생의 업에 의해 다른 무엇인가로 윤회한다. 어찌 인간의 절대적 본질이 있을 수가 있는가?

용수의 대승철학의 핵심은 <공>이다. 용수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를 <중관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논리는 철학적 논쟁을 낳게 된다.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들은 무엇인가? 이름뿐인가? 본질이 없는 것인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에서 기원후 10세기가 넘어 유명론과 실제론의 논쟁이 가속화되었다면, 불교에서는 5세기 무렵,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훗날 <공유논쟁>으로 불붙어 대승불교가 전파된 인도와 중국, 한반도 등 전 지역에서 논쟁거리가 된다.

<나가르주나 : 용수의 불상화>

4. 용수의 이론에 대한 제자들의 논리 논쟁

3세기 용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기본 <공>사상은, 5세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어떻게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것인가? 철학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중관학파>의 내부에서는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사물의 본질이 <있다, 없다> 자체가 인간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럼,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대승 불교는 <논리>가 핵심 주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논리를 따지면서 등장한 학파를 <논증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 사상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에 대입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 속에서 느낀 깨달음들을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규명하여 <공> 사상이 일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귀납법이라고 할까?

반면, 논리적 철학 체계보다는 오류의 수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들은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굳이 앞장서서 논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완벽한 철학도 오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완벽해졌다고 믿지만, 그 속에서도 잘못된 오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보완해준다면 자연 <공>사상은 점점 완벽한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파로 분리되었지만, 용수의 기본 철학인 <공>사상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던 분파였던 것이다.

5. <공>사상의 라이벌인 <식>의 등장

기원후 5세기,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맞선 또 다른 대승불교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식> 사상이었다.

유식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대승불교의 중관파 학자들이 공 사상을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를 말하는 것인가? <공>이 단순히 있고, 없고의 문제인가?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 형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바뀌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은 우리의 머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유식론>의 입장이다.

어둡고 무서운 곳에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을 보면, 사람들은 귀신으로 여기고 소리를 친다. 그것이 귀신인가? 마음이 귀신을 느낀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밧줄을 보면, 뱀인 것처럼 느끼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밧줄이 뱀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원효 대사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맛있게 먹었지만,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핏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정말 깨끗한 물이었지 않는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뿐이지, 물질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유식론>의 기원은 최고의 보살로 추앙받는 미륵에서 시작된다. 미륵은 <유가사지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식론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실존인지 전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훗날 미륵이 도솔천에 올라가 보살이 되었을 때, 제자인 무착이 대중들에게 <유식론>의 <마음 : 식>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럼 유식론의 핵심 사상인 <식>을 자세히 알아보자.

불교의 핵심인 업설과 윤회설을 유식론은 어떻게 이해할까? 윤회란, 전생의 업을 바탕으로 한다. 전생에 착한 일을 하면 인간으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축생으로 태어난다. 그럼, 나쁜 짓의 정도를 어떻게 알까?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달린 것이다. 나쁘다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므로, 업은 착하고 나쁘게 살았던 자신의 행동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각이란 <순간>적인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감정이 다르고, 마음 가짐도 다르다. 따라서 <한>이란, 주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탐욕과 번뇌는 가슴 깊숙히 쌓인다.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주머니에 모인 <죄업>들은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숨어있다. 당장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릿 속에 기억이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때 그 사건을 이야기 해주면 기억 날 수 도 있는 것들이 <아뢰야식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이 깊을수록 <한>에 의해 지배당할 확률도 높다. 내가 공포에 지배당했다면 가로등도 귀신으로 느낄 수 있다. 숨어있던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현상은 외부로부터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외부적인 관점이 아닌 <인식>의 작용인 것이다.

그럼 번뇌는 왜 생기는가? 보이는 사물을 실제 사물로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유심조>를 안다면, 완전한 세계인 <진여>의 세계로 다가갈 것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5.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

유식학파의 근본원리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식>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식>의 원리를 보는 관점에 따라 2개의 종파가 생겨난다.

철저하게 모든 것은 마음이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는 이론이 무상유식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종파는 <섭론종>이다. 섭론종은 <밧줄을 보고 놀래서 귀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실제 현상을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학문 체계로 정리하려는 유식학파의 정통 학자들이 있다. 진나에 의해 창시된 이 유샹유식론은 인간의 머리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인간은 감각의 단계 - 지각의 단계 - 자각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그 다음에는 사물의 실체를 느끼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지각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그 사물의 실체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결국 <마음> 속으로 느낀 것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결국 사물의 실체에 집착한 중생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 인식론은 훗날 현장(삼장법사)의 노력으로 중국(당)으로 넘어가 중국 <법상종>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 이제 딱딱했던 인도 불교 이야기를 접고, 인물 중심의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음 편 부터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가져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해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진언 다라니 수행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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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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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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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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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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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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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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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평천창 외 편 (경서원,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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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108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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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금표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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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경의 십팔공법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형희 (경서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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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2화. 아리아인의 시대와 인도 초기의 종교들

1.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든 것이 아닌가?

자,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 역시 크리스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열망>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인간들의 이야기이듯, 신과 종교의 탄생 역시 인간들의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 내린 <고난>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일 수도 있다. 신과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가 확립되는 것 역시 당대의 <사회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여호수아>의 강림을 바랬던 열망은, 철기 시대에 접어오면서 심해진 핍박 때문이었다. 지금 인도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종교 역시 당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홍수나 번개 등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많은 열망들이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그럼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라는 나라의 종교부터 한번 살펴볼까?

2. 초기 인도 원주민들의 신앙

인도 지방의 초기 문명을 흔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초기 문명에 대해 우리는 약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곧 인도 문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틀렸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철기 시대 이전에 등장하였다. 인더스 문명 역시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 체계가 없었던 초기 문명 시대였다. 문명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생길리는 없지 않는가?

기원전 2500년경 등장한 최초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가>의 작고 초라한 문명을 말한다. 천년간 계속된 이 문명은 작은 도시국가 단위의 문명이었다. 우리가 고대 문명 유적지로 말하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문명은 국가 문명이 아니라 작은 도시 문명을 뜻한다.

<초기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

이 문명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토착민인 <인더스인>들이었다. 인더스 인이란, 최초로 인도에 거주한 <드라비다인, 문다인> 등을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문명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성곽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홍수를 대비한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들이 우선 만들어진 것은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이었다. 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제공하면서도, 큰 홍수 한방으로 주변 문명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최초의 원주민들은 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항상 홍수라는 큰 변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초기 원주민들은 큰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목욕탕은 물(강)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큰 곡식창고를 만들어놓고, 커다란 범선을 이용하여 주변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던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숭배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생식기였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의 <정자>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미 존재했었다.

<모헨조다로
족장집에서 나온 동상>

<모헨조다로의 춤추는 소녀상>

<하라파에서 나온 인장과 유물>

<하라파의 공동 시설물>

<하라파의 주거지>

<하라파의 사원>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흔적>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모헨조다로의 목욕탕과 배수시설>

3. 청동기 민족을 정복한 철기인들

크리스트교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세기라고 했었다. 기원전 12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이유는,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줜 13세기무렵 히타이트 인으로부터 시작된 철기 문물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인도에 내려온 철기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아리아> 인들이었다. 아리아 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히틀러는 순수한 <게르만>인은 <아리아인>의 핏줄이라면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히기도 했었다.

반면,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들과 충돌하였다. 청동기 문명의 백성들이 철기 부족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인더스 강 유역(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땅을 찾아 끝없이 진출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갠지스 강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 시절의 수많은 부족들이 이들에게 굴복하였다. 인도에 진출한 아리아인들을 유럽의 아리아인들과 구별하여 <인도-아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인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화려한 도시 국가를 건설한다. 아리아인의 부족 족장은 <라진 : rajan)이라고 불렀는데, rajan은 <종교 : region>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아 인의 국가는 농경을 주로 하는 철기 국가였는데, 수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각각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부족의 <신> 역시 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리아 인들은 정복민만 노예로 삼았을 뿐, 각 부족간의 전쟁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5세기 까지는 이런 부족단위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족간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전쟁을 참았기 때문에, 아리아의 각 부족들이 믿는 신은 모두 평등했다.

초기 아리아인의 브라만교를 보면 하늘, 지상, 공간의 3 구역에 모두 33명의 신(데바)이 있었다. 이 33명의 신은 모두 평등하다. 결국 33명의 자연신이 훗날 브라만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는 이 33명의 자연신을 찬양하는 찬양가와 기도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원래 <베다>는 <지식을 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것은 33명의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신관>은 당연히 최고 지배층이었다.

<베다>는 500년간 계속 이어진 찬가들을 모으고 모아 4개의 찬가집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기원전 900년경에는 거의 정리가 끝나간 듯 싶다. 이 찬가집인 베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찬가 자체는 <본집>으로 정리된다. 제사를 위한 찬송가 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제사 규칙을 적어둔 <브라흐마나>가 있다. <브라흐마나>를 알고 있는 자는 <신>과 접촉하는 자로서 지배층이 된다. 다음으로 숲속의 비밀을 적은 <아란야카>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우파니샤드>가 있다.

물론, 베다 자체에 이 4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다>는 이 4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진정한 베다로 인정된다.

4. 바르나 제도의 엄격함

브라만교의 근본 철학은 <우파니샤드>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이 완성된 것은 베다가 완성되고 한참 후인 기원전 5세기 경이다. 즉, 베다 문학보다도 400년 정도 이후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굳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관>은 최고 계급이고, <노예>는 마지막 계급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끝이다. 뭐하러 복잡한 철학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겠는가?

<브라만의 모습 : 알타이 벽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 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브라만교의 철학을 위협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만든 아리아인들은 사회 계급을 4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신>이 나눈 것 처럼 행동하였다. 즉, <제사> 규칙을 아는 자들이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된다. 브라만은 곧 신이거나, 신의 대리자이다.

왕족과 귀족은 브라만보다 낮은 제 2계급이다. 2계급은 정치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크샤트리아라고 부른다. 일반 백성들은 3계급이며 바이샤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원주민들은 <노예>계급으로 수드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4계급으로 사회를 나누고, <바르나> 제도라고 불렀다. <바르나>란, 색깔을 뜻하는 단어이다. 원래 아리아인이 유럽인과 같은 계통인 백인이기 때문에,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과 구분하기 위해 바르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도의 신분 제도를 <카스트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쓴 말이다. 카스트란, 바르나 제도의 4계급에서 계급마다 <출생> 족보를 따져서 수많은 계층으로 다시 분화한 것을 뜻한다. 즉, 직업, 결혼관계 등을 따져 여러 종족(종성)으로 분화되는데, 이것을 카스트(종성)이라고 다시 부른 것이다. 카스트는 바르나와 쟈티(JATI : 출생)이란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카스트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로 지금 인도의 신분계층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할까?

   지금 말하고 있는 제도는 21세기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고대 4계급이 존재했던 바르나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바르나>제도의 특성은 철저한 신분 차별에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자체를 막아 버렸다. 제사계급과 아리아인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2계급(크샤트리아)이 제 1 계급인 브라만의 권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철기시대의 보편적 현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작은 부족들은 큰 부족에게 통합되었고, 중앙집권국가의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 부족간의 전쟁과 부족간 통합은 물자 부족을 가져왔고, 3계급인 바이샤들이 상공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계급은 통일된 국가가 필요했다. 커다란 국가에서 통일된 상업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통일은 다양한 관세나 규제 등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기도 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보다 국제적 무역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정복사업과 상공업의 발전은 2,3 계급이 브라만 계급에 도전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드디어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왜 브라만이 위대한지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만 족들은 급해졌다. 왜 브라만이 지배계급인지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브라만은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우파니샤드 철학을 실제 사회에 맞는 철학체계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비로소, 브라만교의 걸맞는 사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5. 우파니샤드 철학의 <업그레이드>

브라만교의 철학인 우파니샤드는 <신관>들이 자신의 제자들엑게 입으로 전하곤 했다. 즉, 그들만의 구전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 철학은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어 <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 철학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철학의 기본 사상들의 영향을 받거나 반발하면서 석가모니의 <불교 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알다시피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제 2계급인 왕족이었다. 1계급의 독주를 막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 2계급인 석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 그럼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한 번 살펴보자.

이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인성의 일치>이다.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그 브라만은 개인의 인성(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원래의 아트만은 myself라는 재귀대명사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인간은 우주의 법칙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데, 우주에 음양오행이 돌듯이, 인간 역시 끊임없이 돈다. 만약 착한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음 세상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난다. 즉, 브라만이 제 1계급인 이유는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생까지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대표적인 윤회설로는 <오행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은 자는 흙과 물이 된다.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흙을 적셔주면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흙과 물이 만나 곡식을 이루고, 남과 여는 그 곡식을 먹는다. 남자가 먹은 곡식은 정자가 되고, 여자가 먹은 곡식은 아기집이 된다. 정자와 아기집이 다시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즉, 개인의 생명(아트만)은 죽은 뒤 우주의 법칙(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윤회하여 생명(아트만)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브라만으로, 나쁜 일을 하면 수드라로 윤회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회의 예외로 <신도>가 있다. 신도란, 신의 길로 가 버린다는 뜻이다. 윤회의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이 숲속의 비전을 찾아 산 속으로 숨어 버리면 윤회하지 않고 <신의 영역>으로 가 버린 다는 것이다. 이미 윤회를 알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을 <업>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브라만이 잘난 것은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이고, <신>의 세상에 가는 것도 브라만 뿐이라는 것이다. 전생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드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수드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철학은 브라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철학이었지만, 다른 계급의 반발을 불러오는 철학이기도 했다. 자, 그럼 2, 3계급이 어떻게 우파니샤드에 대해 반항했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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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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