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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왕

위만조선의 발전과 멸망 위만 조선의 발전과 멸망의 역사 1. 위만 조선의 발전 철기 무기를 사용하여 정권을 잡은 위만조선은 준왕을 월지국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우거왕 때에는 발달된 철제 기술을 확보하면서 남부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대동강 유역의 무역권을 이용한 중계무역으로 성장합니다. 위만조선은 진국과 압록강 중류의 예족(예군남려)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위만조선의 압박으로 예군남려는 한나라에 투항해 버리기도 합니다. 한나라는 예족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예인을 이용하여 위만조선을 압박하려고 했으나, 예인들은 오히려 한나라의 강압정책에 반발하여 창해군은 몇 년 안가 소멸됩니다. 당시 중국의 패자인 한나라의 한무제는 흉노와 맞써 싸우는 일에 주력했었습니다. 초기의 한무제는 위만조.. 더보기
창해군의 설치에 대한 짧은 역사적 기록 창해군 원삭 원년에 예군 남여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서는 28만명을 이끌고 요동에 와서 소속되자, 무제는 그 땅으로 창해군을 삼았으나 몇 년만에 없애버렸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논쟁이 되고 있는 창해군에 대한 내용입니다. 창해군은 중국의 한(漢)나라가 랴오허 강[遼河]의 동쪽에 설치한 최초의 군현인데요. 위만조선의 성립 이후 고조선이 한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여러 세력과의 직접 접촉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자 한과 만주·한반도 일대의 세력들은 고조선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두 지역간의 직접교역을 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을 중심으로 한 28만여 구에 이르는 동방 예맥세력의 일부는 BC 128년 요동군에 귀속하여 중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더보기
위만조선 열전 위만조선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 고후(한나라 혜제왕 대 여후 섭정기)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외번)을 삼아요새 밖의 만이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자 주변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자못 많이 유인하였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한반도 남방의 중국, 3한의 모태)이 글을 올려 천자를 .. 더보기
조선상 역계경 조선상 역계경 일찍이 우거가 격파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않자 동쪽 진국으로 갔다. 그 때 백성으로서 역계경을 따라가 그곳에 산 사람이 2천호나 되었으며 이들은 조선 공번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 삼국지 위서 위략 - 사료해석 :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이 칭호로 고조선 시대의 이라는 용어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왕이 있었지만 독자적인 세력을 가진 등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계층은 곧 고조선이 연맹왕국 단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경, 상, 대부, 장군 등의 관직이 있었으나, 그들이 왕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들 지배계급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었고, 읍락 내부는 이들에 의한 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예로, 동예에서는 산천을 경계로 침입..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