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고사여행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1. 청의가 사라지고, 탁한 자들이 설치니...

때는 후한 말, 삼국지에 원소가 지방 호족으로 등장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은 중앙과 지방이 모두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왕권을 농락하고, 대의정치를 외치는 지식인들을 옥에 가두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청의 운동>이라고 하여, 혼탁한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깨끗한 정치를 외치곤 했지만, 환관들에 의해 제거 당하곤 했다.

지방에서는, 중앙과 별도로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등장하였다. 호족들 중에는 환관들을 척결하고 <한나라 왕실>을 지키자는 <청의파>들도 있었다. 반면, 원소나 조조와 같이 자신의 영지와 군사력을 통해 한나라 왕실에 무력을 보여줌으로서 세를 늘리려는 세력도 있었다.

세상이 흉악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고, 전쟁이 나면 그나마 땅마저 황폐해질 뿐이었다. 화적이나 도적이란, 원래 <먹고 살기 힘든 농민> 들이 변심한 것이다. 즉, 도둑은 국가의 책임이지 않겠는가?

2.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궁중에 환관들이 설쳐대고, 한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었다. 유학을 받드는 지식인들은 환관들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태구현의 <현령> 진식이라는 사람도, <청류파>들을 잡아죽이는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갔다. 시절이 수상하니, 도망을 치면 되었지만, <내가 도망가면 나의 백성들은 누구를 기대어 살란 말인가?> 라고 말하며 기꺼이 잡혀간 사람이다. <양상군자>라는 고사 성어는 바로 이 진식에게서 비롯되었다.

진식이 다스리는 <태구현> 역시, 흉년과 전염병,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힘든 상황이었다. 진식이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몰래 그 방에 들어왔다가 슬그머니 대들보 위로 올라가서 숨었다.

진식은 도둑이 든 것을 알았지만, 그를 붙잡지 않고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아들과 손주들을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릇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쁜 사람들도 원래 본성이 그런 것이 아니다. 습관이 잘못되어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옳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대들보(양상) 위에 있는 군자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진식의 말을 듣고 있던 도둑은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황을 파악한 도둑은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뒤 벌을 받으려고 하였다. 진식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네의 모습과 얼굴을 보니 자네가 악인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군. 아마도 가난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

그리고는 비단 2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일이 알려진 후, 태구현에서는 더 이상 도둑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3. 양상군자는 비꼬는 말이 되어....

진식의 일화는 후한서 <진식전>에 나온다.

원래, 진식전에 나오는 <양상군자>는 <가난함에 어쩔 수 없이 지붕위에 떠밀려 올라간 도둑>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뜻은 점차 바뀌게 된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비열하게 남의 이목을 숨기면서 지붕위로 올라간 사람을 <양상군자>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진식은 <군자>라는 말을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후대인들은 <군자>라는 가면을 쓴 도둑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또, 대들보 위에 몰래 오르는 동물을 <쥐>라고 생각해서, <쥐새끼 같은 놈>을 뜻하는 것으로 와전되어 오늘 날에 사용되기도 한다.

후한 말에 살았던 진식은 <도둑>이란,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서 백성이 국가를 <배신>한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은 본인의 죄가 아니라, 혼란한 <국가>가 낳은 것이다.

21c 대한민국... 지금의 정부는 실업도 해결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도 못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대립각만 세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떠 넘기면서도, 국민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탄압하고, 심지어 <촛불>하나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 마저 두려워하고 있다.

진식은, 후한 말 <하진> 대장군이 높은 벼슬을 줄 터이니 중앙 정치에 나오라고 있지만, 자신의 마을을 지키며 묵묵히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가의 지도자도 아니였고, 유명세를 탄 인물도 아니였지만, 그가 죽을 때 나라 안에서 그를 추모하고 제사 지내기를 희망했던 사람이 3만이 넘었다고 한다.

서구에서 예수가 태어날 무렵 활약했던 옛 관리가 가졌던 인식을, 21세기의 현 정부 지도자들은 생각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 존경받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을 과거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2.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조창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상세보기

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부처님 나라(1 인도 중국편)(윤승운의 불교만화)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윤승운 (동쪽나라, 2003년)
상세보기

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예지각,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상세보기

하룻밤에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상세보기

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강성률 (형설, 2005년)
상세보기

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성철 (장경각, 1988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후한말기 황건적의 난을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짧은 글이 되겠네요.

1. 황건적의 난의 사상

황건적이 일어난 이유는 후한시대 중앙과 지방에서 전면적으로 백성들을 압박하는 지배층 위주의 정치가 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중앙에서는 어린 황제가 계속 등극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실제 정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세금을 걷는 횟수만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환관들은 외척과의 싸움에 몰두하여 민생은 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호족들은 대토지를 사유화하여 백성들을 괴롭했습니다. 거기에 왕조말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천제지변과 기아, 홍수 등의 악조건들이 농민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키고, 농민들을 초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황건적의 난은 일단 음양오행사상에 기반을 둔 사회변혁사상에서 이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창천은 가고 황천은 온다>에서 알수 있듯이 화목토수금으로 순행하는 오행의 법칙 상 <푸른 왕조>의 시대는 가고 <황색 왕조>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민란 전통의 오행 사상이 가미된 것입니다. 중국의 민란에는 적미의 난, 황건적, 홍건적 등 앙조의 <색>을 상징하는 명칭의 민란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우주 오행의 사상을 각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색>으로 대입하여 철학체계를 정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또 당시 서역에서 들어온 일종의 <밀교>도 난에 큰 역할을 한 사상입니다. 이 밀교의 영향으로 각종 주술과 미신, 점성술이 음앵오행사상과 결합하여 독특한 사상체계로 발전합니다. 정각의 태평도를 보면 부적을 태운다던가, 전쟁에 이기기 위한 주문을 외운다던가, 불노장생을 위한 약을 마신다던가하는 부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장각 스스로가 그러한 사상을 누군가에게서 전수받았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중국 전통의 신앙에다가 서역 어디선가 유입된 밀종 사상이 합쳐진 것으로 보입니다.

2. 황건적의 난의 특징

황건적의 난의 특징은 일반 민란처럼 중앙정부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이루어진 우발적인 난이 아니라, 정각 등에 의하여 비교적 체계를 잡고, 당시 집권층이었던 모든 제 세력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하면서 등장한 난이라는 점입니다. 실제 황건적의 난을 보면 농민이 중심이었지만, 그 안에는 사회 체제 속에서 중앙에 편입되지 못한 중소 호족과 중앙정치에 반기를 든 청류파 지식인들이 난의 <지도부>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부는 장각을 중심으로 하는 <태평도>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조직적으로 국가에 반항합니다. 이 태평도는 음양오행에, 서역 불교 사상을 가미하고, 맹자의 혁명론에, 도가의 저항권 사상까지 가미한 철학적 이념을 가진 혁명적 종교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우발적이고 지역적인 농민 봉기를 조직적인 반란군으로 전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웁니다.

당시 한나라의 군현 제도에서 가장 기본적인 촌락집단인 <향>은 이미 호족에 의해 그 근거지의 공동체성을 상실하였습니다. 또 황건군이 크게 일어난 곳은 어김없이 호족, 환관, 외척이 대토지를 소유한 지역적 기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난은 붕괴된 촌락질서를 태평도가 흡수하여 가장 적극적인 국가체제 전복 운동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난은 장각이 원소, 조조 등 호족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사그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오두미교 등이 하북에서 20년간 전쟁을 지속하면서 농민군을 유지했지만, 호족 세력에 의해 격퇴되었고 결국 이 황건적의 난을 통해서 사회의 주도권을 잡은 자들은 혼란기의 영웅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대규모 호족 세력들이었습니다.

즉, 이를 통해 볼 때 후한이라는 나라는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운 정권으로서, 호족들이 지방 주도세력으로 쭈욱 군림해 오다가, 호족들에 대한 반항으로 민란이 일어나고, 호족들에 의한 민란이 진압되었으며, 호족들이 다음 세대의 주도권을 잡고 새시대를 열어가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호족>을 키워드로 공부하면 쉽게 이해가 되는 나라입니다.

이 호족들이 서로 군공을 세우고, 때론 대립하면서 삼국지에 나오는 위, 촉, 오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삼국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아마 후한 대 황건적의 난에 대하여 제 포스트보다 훨씬 더 자세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하북 호족 원소가 중앙의 환관 세력을 주살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서북 호족 동탁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됩니다. 이후 하북지방 호족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토벌하였고, 이후 하북 호족 세력인 원소와 조조가 서로 대립합니다. 이후 호족 세력들은 각기 자신의 영역을 수성하는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하다가 조조의 아들 조비 대에 호족세력을 통일하여 <위>나라를 건국합니다.

조조가 통일할 수 있었던 기반은, <중화>사상에만 의존하지 않는 개방적 정책과 함께, 오환, 흉노 등 북방계 유목민도 포섭할 수 있는 정략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청주병으로 대표되는 둔전민을 육성하여, 유민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황무지 개간을 통한 군사비용을 충당하고, 화북의 재건을 단기간에 이루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조조를 한의 정통으로 보고 있지만, 소설인 나관중의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의 이야기와 <유비의 정통성>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삼국지는 이문열 삼국지랑 장정일 삼국지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데, 이문열 삼국지는 생생하게 그 상황을 묘사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반면, 장정일의 삼국지는 딱딱하게 흘러가지만 실제 역사적 상황을 그려가면서 자세히 묘사한게 특징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근에는 삼국지라는 책을 굳이 읽을 필요성이 없다는 점이죠. 중국 역사에서 재미있는 역사적 교훈을 얻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는 우리 역사서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중국 삼국지보다 우리 고대 역사를 다룬 <삼한지>를 읽으세요. 더 큰 도움이 될 듯 싶네요.

별로 쓸말도 없는 황건적의 난을 포스팅 주제로 잡으니 잡담만 하다가 포스팅이 끝나게 되네요. 다음부터는 이런 중요하지 않은 파트는 사전식으로만 정리해 버리고 끝내야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