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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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교회>와 교황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일원화된 불교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인도 아쇼카왕이 주장한 전륜성왕의 이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즉, 자신은 불교를 지상에 전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법왕임을 자처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라의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이고, 호법이란 곧 호국과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흥왕은 불교 행정 구역 일원화와 함께 백좌강회와 팔관회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대하게 엽니다. 백좌강화란 백고좌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법회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성대하게 개최한 법회입니다. 이것은 외적을 막기위한 호국 법회이자, 국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신성법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호국 법회를 위해 신라에서 만든 절이 <황룡사>입니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터로 만들려고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그 터가 신라 초기 소도가 있던 <7가람의 하나>라고 계시하면서 절을 지은 곳입니다. 이 절이 곧 신라 호국 불교의 원산지입니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 호국 행사로 이용되었는데, 훗날 몽골 침입기에 몽골은 이 절의 호국적 성격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진왜란기 일본도 불국사 등 주요 호국 법회가 열리는 절이나 터를 불태우려고 했다는군요.

2. 신라 중기 : 대중 불교 운동이 시작되다.

신라 초기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근거하여 왕권을 신성화하였다면, 신라 중기 이후의 불교는 이제 대중에게 파고드는 보편적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불교라는 사상의 근원이 바르나 제도를 부정하면서 만민평등과 해탈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였던 만큼, 골품적 한계에 직면했던 신라사회에서도 골품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만민을 구제할 대안으로 불교가 중요시된 것입니다.

실제 진흥왕 이후 통일 이전 승려계급은 거의 진골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을 등에 업고 불법에 있어서 왕권에 저항하던 지방의 <부> 세력을 왕이 누르기 위해 국왕은 불교적 이념을 가진 진골들을 적극 중용하였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진골이었고, 전륜성왕의 화신인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들도 진골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정비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신라에서 진골이라는 계층이 새로 성립된 것도 하나의 필연적 사건이었고, 진흥왕기 이후 진골 귀족이 왕권 옹호세력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골성향의 승려들이 바로 원광, 안함, 자장, 의상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 불교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고, 문무왕, 신문왕기에 김흠돌의 난 등을 계기로 진골세력들마저 정권에서 몰아내고 왕의 전제정권이 확립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왕권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부합되는 진골 외에는 국정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6두품 등 두품 세력을 곁에 두어 국왕의 자문으로 활용하려 했지요.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었던 5,6품들은이제 국왕의 옆에서 자문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교적인 성품이 강했습니다. 반면, 신라사회에서 그동안 진골귀족들의 세력아래에서 진정한 불교의 보편적 정신을 전파하지 못했던 불교 두품 세력들은 거리로 나가 불교의 진정한 도를 백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중 불교 세력들이 흔히 4-6두품이라고 알려진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의 승려등입니다.

혜공은 부개사를 세워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했고, 대안은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면서 불교를 거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최고 신분층인 진골층을 풍자하면서 서민과 함께 불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불교가 국왕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자비를 갖춘 보편적 종교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원효는 어떤 백성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면 정토와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정토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에서 세, 속의 경계는 필요없다는 대중불교의 이념을 갖고 현실에 뛰어들었으며, 스스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하여 스스로 파계당합니다. 그러나 무열왕도 원효를 인정하여 사위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3. 원효 사상의 기본 - 일심론<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 정토종

원효의 사상은 원효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기본 사상만 여기서 파악해 봅시다.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에 입각한 <일심론>이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음이란 신분과 상관없는 것이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여자와 노비들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일심론은 현실(예토), 마음(정토)는 한마음(일심)이라는 것이 핵심으로 마음에 따라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죠. 즉, 대중불교의 기본이념이 바로 일심론입니다.

일심론은 마음에 따라 성인도, 악인도, 여자도, 노비도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극락에 여자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성불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원효는 여자가 성불하면서 바로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 남자로 해탈하므로 여자 역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성인 사상이라면, 원효의 불교는 인간평등의 만민사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극락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륵불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보통 미타사상이라고 하며, 원효의 <정토사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의 정토설은 귀족 위주의 현실적 불교를 죽은 뒤 극락에 가기 위한 <내세적 불교>로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의상 등 다른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의상이 만든 부석사는 화엄종 성격보다는 원효의 정토적 성격이 강합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등이 부석사에 있음으로 해서 부석사는 마치 의상이 만든 절이라기 보다 원효의 <정토사상>을 보여주는 절처럼 느껴집니다.

원효의 일심론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다양한 불교 학파를 통일한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공유논쟁>이라는 불교 최고의 논쟁을 원효가 정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처가 죽은 뒤 인도와 불교가 전파된 중국에서는 공, 유의 개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공>이었는가, 모든 것은 인식에 달려있다는 <유, 식>이었는가를 놓고 다툰 논쟁입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이것에 대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효는 이것을 <일심론>으로 정리합니다. 즉, 부처가 주장한 세계는 공, 유의 나눔이 아니라 본질은 한마음이라는 일심이라는 것이죠.

원래 한마음이란 본질(공 : 진여문), 현상(유 : 생멸문)가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원래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모두 비롯되는 하나인 것이다 - 라는 정리가 원효의 정리입니다.

이 원효의 사상은 공을 중시한 중관학파, 유를 중시한 유식학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당나라 화엄학 성립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를 벗어나 독자적 불교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원효 사상 이전의 귀족적 미륵신앙(상생적 미륵신앙, 하생적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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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생적 미륵신앙 : 부처일족이 미륵이 되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국왕권 옹호 신앙(국왕 = 만민을 구원할 미륵)    상생적 미륵신앙 : 귀족들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부처일족)이 된 뒤 언젠가 내려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원효의 정토신앙 : 누구나 깨달음이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믿음

4. 의상의 대중불교  - 모든 것은 원융이다. : 화엄종

의상의 불교도 각론에서 다루니, 여기서는 기본만 봅시다. 의상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원융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을 갔었죠. 그런데, 5두품 출신인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신라로 돌아와서 의상만 당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의상은 당에 유학이 자유로운 진골출신입니다.

의상은 진골이지만, 불교에서의 교리의 평등성을 인정하여 불교의 보편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노비, 평민, 극빈층 등이 많다고 합니다. 즉,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는 원효가 백성들 사이에 직접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교단불교>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유명한 부석사를 지었는데, 이 부석사는 원효가 신라 화엄종을 개창했음에도, 전술햇듯이 원효성격의 대중불교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종 2대 시조 지엄에게 화엄학을 전수받았는데, 중국의 고승들이 원효의 사상에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불법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볼까요?

<하나 안에 일체가 있으며, 많음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찰나요. 한 찰나가 곧 그 한량없는 겁니다.>

<한국불교전서 중 발췌>

이 말은 곧 모든 것이 하나요, 하나는 모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요체인데, 신라 왕실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백성은 왕에게 귀속된다>로, 하나는 모든 것이다를 <왕실은 백성에게 베푼다>로 해석하여 이 사상을 전제왕권에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목적이나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의상 스스로가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 후세의 불교에서 그의 사상을 왕권에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융>이라는 개념입니다. 원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불립된 각종 종파불교를 묶기 위한 의상의 노력을 집대성한 사상입니다. <원융>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둥글게 감싸서 포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타 다른 교단의 불학들이 불법이 무엇이고,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원융사상>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 진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원융>이라는 진리에 모든 것은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다른 교파의 모든 사상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과 물고기와 영양분들이라면 <화엄종의 원융>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바다>자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상은 다른 통불교적 사상들을 원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통합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종파 불교들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합니다.

5. 원측의 유식 불교 - 법상종

법상종의 성립 배경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유식론을 배울 때로 올라갑니다. 원측은 그 유명한 현장법사 아래에서 당나라 섭론종(구유식 사상)을 배웠습니다. 유식파란, 부처의 가르침은 인식에 달려있는 것으로 실제이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 허상인 <공>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중관학파>와 대립되는 사상이었죠.

그런데, 원측은 유식학파의 <유>라는 실체 역시, <공>이라는 이념을 일부 수용해야 조화롭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의 스님들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원측의 학파를 서명학파라고 하는데, 원측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유식>만이 진리라고 한 중국승 규기 일파를 <자은학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은 일본까지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논쟁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공유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공유논쟁은 원효가 일심론으로 해결합니다.

아무튼, 원측은 이단파가 되어 본국인 신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제자 도증, 태현에게 전수되어 신라 법상종으로 자리잡습니다. 법상종은 유식파의 성격이 강하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 해석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신라 귀족들은 법상종, 계율종을 상당히 옹호하면서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하였습니다. 법상종을 실제 일으킨 인물은 진표인데, 그는 미래 부처인 미륵불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러 내려온다는 <상생적 미륵신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 귀족들이 죽어서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 머물게 되므로, 룻날 내려오는 미륵은 귀족과 연관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신라에는 통일 후 5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화엄종, 법상종 외에 열반종, 계울종, 법성종이었습니다. 5교를 개관적으로 볼까요?(세부적인 것은 각 불교 각론에서 다루겠습니다.)

화엄종과 법상종은 전술했듯이, 부처가 말한 진리는 <공>이냐, <유>이냐의 논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화엄학은 의상을, 법상학은 원측, 또는 진표를 각각 조사로 합니다.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은 불법의 요체 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열반종은 열반, 법성종은 불성, 계율종은 계율이 불법의 요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5교의 난립한 이념을 <십문화쟁론>으로 정리하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주를 달면서 하나로 통일(화쟁사상)한 사람이 바로 원효입니다.

6. 신라 말기의 불교 - 선종

신라 말기에는 어려운 사회상 속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이 유행합니다. 새로운 종교인 선종은 이전의 5개 교파 불교를 모두 교종이라 부르면서, 그 불교들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선종은 불교의 핵심은 경전을 읽거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를 믿어야 한다는 원효의 <정토종> 사상을 일부 인정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심성을 맑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경전과 상관없다(불립문자)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자체가 불성임을 알면 불교의 모든 도리는 깨닫는 다는 것(견성성불)을 말합니다. 선종 경전의 암기보다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므로, 귀족적이기 보다는 민중적인 불교였습니다.

원래 선종은 5호 16국 시대 북위에서 <달마>가 소림사에서 개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종은 경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 자신의 본체와 내면적 기질을 알기 위한 좌선을 중시합니다.

이 선종에서는 경전을 암기한 자에게 교파의 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의발과 바리때를 전수함으로서 다음 조사를 법조를 선발합니다.

5대 흥인 때에는 <신수>라는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흥인이 제자 중 한명을 다음 선사를 뽑아 전해주려고 하면서 모든 제자에게 깨달은 것을 게어(시문)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신수는 선사의 방 앞에다 다음 게어를 적어놓았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흡족하여 제자들에게 이 게어를 종종 암기하라고 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이 게어가 선종의 모든 경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어느날 방앗간 소공인 혜능이 이 게어를 보더니, 글을 쓸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또 하나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었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집이 아니며,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티끌이 생긴다는 것인가요?>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감동하여 혜능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이 방앗간 소공은 비록 글을 몰랐으나, 너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습니다. 흥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혜능의 글을 무시하면서도, 실제로는 혜능에게 선종 6대조 자리를 물려주며,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맞아죽지 않게 도피시켰다고 합니다.

이 혜능이 개창한 선종이 바로 <남종선>입니다. 남종선은 혜능의 유지를 받아 갑작스런 깨달음(돈오)을 중시하고, 왕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민중 불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처음 게어를 걸었던 <신수>와 직계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했는데, 이 북종선은 측천무후의 비호로 귀족불교가 되었습니다. 이 북종선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 점진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점수>라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지눌 스님은 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이론을 합쳐 <돈오점수>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선종이론이 점차 통합되기도 하죠.

신라에서는 <남종선>을 받아들였는데, 이 것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신라 말 사회 혼란 속에서 <교종 종파 5교>가 문란해진 상황에서였습니다. 선종은 각각 나말 호족들과 연합하여 <9산>이라는 유명한 절들을 세우고 호족들과 연계했습니다. 또 선종의 9산이라는 각 파는 대부분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거나 그 자신이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 진골 위주의 교종세력에 대한 반발이자, 선종이라는 종교가 혜능기부터 이어온 혁신적이고 지방분권적이며,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나중에 불교 각론을 세부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힘드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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