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퀴즈
 

5문제입니다. 즐겁게 풀어보아요!!!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 난이도는 1,2 번 하, 3, 4번 중 구성됩니다.

 


1. (하)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 각 분야의 서작 편찬을 장려하다. *****

-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 김순과 신석조의 의방유취

- 이석형의 치평요람 / 윤회, 신색의 팔도지리지

- 정인지, 김종서의 고려사

- 설순의 삼감행실도

- 정초, 변계량의 농사직설

***** 문화, 예술, 경제 분야를 꽃 피우다 ****

- 관습도감을 만들어 박연이 아악을 정리하도록 지시하다.

- 대간의, 소간의, 혼의, 혼상, 일구,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등 천문 분야에 힘쓰다.

- 농잠 서적을 발행하다.

- 조선통보를 주조하고 환곡법을 철저히 시행하다.

- 전제상정소를 통해 연분, 전분에 의거한 전세제도를 확립하다.


 

1. 위 내용과 관련있는 조선의 국왕은 누구일까요?
① 태종        ② 세종        ③ 세조
④ 성종        ⑤ 정조        

 

 

2. (하)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 그의 이름은 '새벽'이다. 아버지의 성을 따라 설새벽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찍이 출가하여 법명을 얻었는데, 그 법명은 '처음으로 불법이 빛나다' 라는 뜻의 _____였다.

그는 특정 종파에 매이지 않고 모든 교학을 연구했다. 그리하여 법화경종요, 대승기신론소 등 100여종 240여권의 방대한 책일 남겼다.


그는 의상과 당나라에 유학을 가던 중 무덤에서 노숙하다 해골의 물을 마시고, '일체의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된 후 유학을 포기하였다. 또한 요석궁 공주와의 인연을 계기로 승복을 벗고 세속인이 되어 '소성거사'라 칭하며 민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광대처럼 바가지를 두드리며 민중들 앞에서 화엄경의 정수인 무애가를 불렀다. 음악과 춤으로 불교 교리를 전파했으니, 신라시대의 아이돌 가수라고나 할까?


그는 관념에 치우쳐 이론적 연구만 하는 중국불교의 일부 종파를 '근원만 추구하느라 현실과 백성을 모르는 무리들'이라며 비판했다. 이로서 왕실과 지배층만이 지배하던 불교가 민중 속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가 불교를 전파한 이후 마음으로 부처를 섬기면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정토에 갈 수 있다는 정토종이 유행하였다.

 

 

 

 

2. 위 인물과 관련있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① 세상이 어지러울 때 다시 내려와 지상에 광명을 뿌리고, 민중을 구원하겠다고 호원장담했다.
② 백성들에게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③ 대각국사로 불리었으며 천태종을 열었다.
④ 조선의 수도를 정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⑤ 소림사를 만들었다.

 

 

3. (중)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부조리에 관한 시론 : 이방인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갔다. 이튿날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코미디 영화를 보고 실컷 웃는다. 밤에는 여자친구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 며칠 후,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 이유없이 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장에서 그는 바닷가의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고 하였고, 속죄의 기도를 거부한다. 그는 항상 행복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처형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밀려올까를 기대한다.


이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는 '부조리'이다. 사회적 관계망이 형성되지 않은 인간이 개인의 욕망 속에서 어떻게 지배받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유럽은 세계 2차 대전의 암울한 상황에서 인간의 목숨은 존엄하지 않았다. 뫼르소의 죽음은 부조리한 현실에 죽음으로 반항하는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3. 위의 '부조리' 이야기와 관련있는 작가는 누구일까요?
① 사르트르
② 알베르 카뮈
③ 니체
④ 헨리 입센
⑤ 안데르센

 

 

4. (중)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9세기 독일 통일을 이룬 그에게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모두 찬사를 보냈다. 그의 공무원 조직과 막강한 군 조직은 제국의 위상을 높인 1등 공신이었다. 반면, 그 조직들은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 변화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의회마저 장악해 버린 그로서는 개혁과 소통이 필요할 리 없었다.
 

당시 제국의 40%인 가톨릭 신도들은 황제 빌헬름 1세 뿐 아니라 로마 교황에게도 충성을 하고 있었다. 재상이었던 그는 가톨릭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제국의 적으로 규정하였으나, 그마저도 종교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가톨릭 국민들에게 항복하고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였다.
 

이후 그는 주적을 사회주의자들로 삼았다. 산업사회의 변화로 노동자들을 다루기가 어려워지자 사회주의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탄압은 노동자 회유로도 이어졌다. 노동자를 위한 구인구직제, 노인보호법, 질병예방, 문화혜택 등을 국가가 장려한 것이다.
 

그러나, 경직된 공무원, 군대 조직으로 인하여 산업혁명이 늦어지자 독일제국은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식민지 확보전에 들어갔다. 식민지 쟁탈전은 이미 식민지를 확보했던 영국, 프랑스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독일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 연합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
 

독일의 딱딱한 조직 구조는 훗날 이 대립으로 인해 세계 1차 대전까지 이어지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도 이 군대 조직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위 지문에 나온 독일 재상과 관련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① 관세혁파
② 자유무역 추진
③ 철혈정책
④ 카르보나리 개혁
⑤ 크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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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6장. 남북조 불교와 정토종, 선종의 역사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해진 불교가 이민족 왕조인 북조, 중국왕조인 남조로 갈라진 뒤 수나라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을 간략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1. 북조의 불교 : 불법이 왕법에 대해 도전할 수 없다!

북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이민족 왕조가 받아들인 이민족 종교>를 <호국>을 위해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초기 5호 16국 시대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 자치게 불교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점이 강하였습니다. 불교의 참뜻이나 교리는 굳이 국왕이 알 필요도 없었고, 단지 불교의 모든 핵심 교리에서 왕권에 유리한 측면만 부각시키려는 불교가 이 때의 불교였으니까요.

바로 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던 수많은 고승들이 바로 북조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고승들입니다. 불도징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역경을 겪고 인도로 건너왔으며, 도안, 혜원, 구라마습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명맥은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기에 북조 각 국의 지도자들은 유명한 고승들을 초빙하여 국가 방략을 얻으려 하였고, 고승들은 이러한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중국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승들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려 노력하였다고 하더라도 북조의 지배자들은 불교의 <미신적, 주술적>인 측면과 <왕권 강화의 이데올로기>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였고, 초기 북조의 불교는 상당히 미신적, 격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북조를 통일한 북위는 선비족의 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중국 전통의 사상인 유교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민족 왕조가 이민족 종교를 활용하여 중국 전통 사상에 쉽게 동화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북조의 많은 고승들은 <불교가 왕권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불교교리의 참 뜻은 <자비와 평등>을 바탕으로한 만민애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결코 정치적인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차츰 중국인들 스스로 불교에 대한 진리를 터득하고, 인도에 구법여행을 다녀오면서 불교가 결코 <왕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알게됩니다.

왕법은 이러한 <불법>의 움직임에 대하여 <좌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불교의 참 교리를 선동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불법이 왕권을 벗어나려 할 때 마다 왕권은 불법을 탄압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폐불사건>들입니다.

2. 폐불 사건이 발생하다.

북조 최초의 폐불사건은 북위 태무제의 폐불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북위는 북조를 통일하고, 철저한 한화정책을 추진하려고 준비하는 시기였습니다. 북위는 한화정책을 위하여 한인 출신 관료들을 중용하였고, 중국 관료제를 선별하여 수용하였습니다.

이 때 북조 정권에 의해 등용된 최호 등의 한인들은 <이민족 왕조인 북위정권의 중국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최호는 철저한 유교주의 사상을 통하여 국왕을 교화하려 하였고, 불교를 이민족 종교로서 가치없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북위 시대에는 중국 전래의 도가 사상이 구겸지에 의해 발전하여 <도교>사상으로 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유교주의 관료들과 도가사상가들은 외래종교인 불교를 탄압하여 불교를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폐불사건>입니다.

그러나 중국관료인 최호일당과 선비족 귀족출신 관료들의 대립인 국사필화사건으로 최호 일당이 추방되면서, 불교는 선비족 관료들에 의해 보호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등장한 웅장한 석굴사원인 <윈강의 석굴사원>입니다.

특히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의 석굴사원을 건설하였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북조의 <불교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국가는 호국을 위해 불교를 보호하였고, 불교는 국가질서를 수호하는 종교로서 왕권에 충실한 종교로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불교가 왕법을 벗어나 독립적인 교리체계와 불법체계를 확립하려고 한다면, 국왕권에 의해 어김없이 탄압당하곤 하였습니다. 북위와 수나라의 중간 단계 국가인 북주에서는 승려가 너무 증가하고, 사원이 발전하면서 불법이 왕법을 능가하는 폐단이 발생하였고, 불교권력이 사회악으로 규정되기 까지 합니다. 이 때 또 다시 국왕에 의해 불교를 철저하게 탄압하는 <폐불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나라 무종 때의 폐불사건을 3무의 난이라고 하면서 대표적인 폐불사건이라고 부릅니다.)

3. 북위 불교는 외래적 색체가 강한 호국불교였다.

북위의 유명한 유적지인 윈강의 석굴사원은 <북조 정권에 의해 국가가 불교를 보호하는 호국불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때 석굴사원의 특징은,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가 아직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지 못하여 외래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인도의 아잔타 석굴의 양식과 인도 대승불교의 간다라 미술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효문제의 낙양 천도 후 건축한 용문의 불상을 보면 이러한 요소들이 대부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윈강에 비해서는 인도와 서방예술(간다라 양식)이 없어지고, 중국 고유의 불상예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상의 성격이 단순한 미술이기보다는 <왕권을 수호하는 불법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북조의 북주 이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서 중국은 이제 수, 당 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6세기 담란의 정토종, 달마의 선종 등 초기 종파불교가 성립되면서 수, 당대 불교는 수준낮은 격의 불교를 넘어서서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탐문하는 종파불교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4. 정토종이 등장하다!

6세기 등장한 초기 종파불교의 시작을 알린이는 500년경에 활약했던 담란입니다. 담란은 어렸을 때 반야경(반야4경)과 불성론, 공유론을 공부하고 난 후 모든 것은 <공>에 있다는 주장을 확립합니다. 그는 부처의 주장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유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색즉시공>임을 말하면서 <생사해탈의 길은 선도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선도>를 깨닫기 위해 동위 효정제 및에서 정토종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개창하였습니다. 그는 선도를 얻는 방법은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미타불이란, 복잡한 교리나 경전을 외우지 않고도 간단한 믿음, 즉 아미타불을 계속 말하는 것만으로 극락에 갈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핵심 교리로 하여 그가 개창한 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교단 성격의 불교인 <정토종>입니다. 그의 교리는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한반도에 넘어와서는 원효의 <정토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정토종을 다룰 때 다시 한번 등장해야 할 인물이네요.

5. 선종이 등장하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선종 이야기는 중국 당나라로 넘어가서 6대조 혜능의 이야기 때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남조 시대의 불교는 일찍 종파불교가 시작되었다.

북위에서 불교가 철저하게 왕권에 의해 이용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불교의 참 뜻에 대한 연구가 적었다면, 남조는 상대적으로 불법의 독자성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남조 국가들 자체가 왕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남조는 한문 무장세력들이 창업하여, 북조를 견제하는 수준의 국가들이 근근히 명백을 이어간 왕조입니다. 실제 남조에서는 무장세력인 황제보다 귀족세력의 힘이 더 강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불심이 강한 귀족들의 보호 속에서 불교 본래의 참 뜻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초기 남조에서 활약한 자가 바로 이전에 포스팅 했던 <혜원>입니다.

남조는 불교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여건이 갖추어져서 다양한 종파불교가 발전하였고, 이 종파불교들은 당시 인도불교의 영향으로 대승불교적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또 당시 중국의 혼란기의 상황이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소승불교보다는 대승불교를 선호하기도 하였죠. 따라서 정토종과 선종, 율종, 삼론종, 천태종 등이 중국에서 종파불교로 자리잡는데 이 종교를 중국 5종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정토종과 선종은 민중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민중불교화되어 갑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불교를 포스팅하고,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중국 불교가 완전히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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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자료 - 원효대사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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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원효, 의상

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교회>와 교황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일원화된 불교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인도 아쇼카왕이 주장한 전륜성왕의 이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즉, 자신은 불교를 지상에 전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법왕임을 자처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라의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이고, 호법이란 곧 호국과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흥왕은 불교 행정 구역 일원화와 함께 백좌강회와 팔관회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대하게 엽니다. 백좌강화란 백고좌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법회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성대하게 개최한 법회입니다. 이것은 외적을 막기위한 호국 법회이자, 국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신성법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호국 법회를 위해 신라에서 만든 절이 <황룡사>입니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터로 만들려고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그 터가 신라 초기 소도가 있던 <7가람의 하나>라고 계시하면서 절을 지은 곳입니다. 이 절이 곧 신라 호국 불교의 원산지입니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 호국 행사로 이용되었는데, 훗날 몽골 침입기에 몽골은 이 절의 호국적 성격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진왜란기 일본도 불국사 등 주요 호국 법회가 열리는 절이나 터를 불태우려고 했다는군요.

2. 신라 중기 : 대중 불교 운동이 시작되다.

신라 초기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근거하여 왕권을 신성화하였다면, 신라 중기 이후의 불교는 이제 대중에게 파고드는 보편적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불교라는 사상의 근원이 바르나 제도를 부정하면서 만민평등과 해탈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였던 만큼, 골품적 한계에 직면했던 신라사회에서도 골품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만민을 구제할 대안으로 불교가 중요시된 것입니다.

실제 진흥왕 이후 통일 이전 승려계급은 거의 진골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을 등에 업고 불법에 있어서 왕권에 저항하던 지방의 <부> 세력을 왕이 누르기 위해 국왕은 불교적 이념을 가진 진골들을 적극 중용하였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진골이었고, 전륜성왕의 화신인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들도 진골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정비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신라에서 진골이라는 계층이 새로 성립된 것도 하나의 필연적 사건이었고, 진흥왕기 이후 진골 귀족이 왕권 옹호세력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골성향의 승려들이 바로 원광, 안함, 자장, 의상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 불교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고, 문무왕, 신문왕기에 김흠돌의 난 등을 계기로 진골세력들마저 정권에서 몰아내고 왕의 전제정권이 확립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왕권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부합되는 진골 외에는 국정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6두품 등 두품 세력을 곁에 두어 국왕의 자문으로 활용하려 했지요.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었던 5,6품들은이제 국왕의 옆에서 자문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교적인 성품이 강했습니다. 반면, 신라사회에서 그동안 진골귀족들의 세력아래에서 진정한 불교의 보편적 정신을 전파하지 못했던 불교 두품 세력들은 거리로 나가 불교의 진정한 도를 백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중 불교 세력들이 흔히 4-6두품이라고 알려진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의 승려등입니다.

혜공은 부개사를 세워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했고, 대안은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면서 불교를 거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최고 신분층인 진골층을 풍자하면서 서민과 함께 불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불교가 국왕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자비를 갖춘 보편적 종교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원효는 어떤 백성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면 정토와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정토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에서 세, 속의 경계는 필요없다는 대중불교의 이념을 갖고 현실에 뛰어들었으며, 스스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하여 스스로 파계당합니다. 그러나 무열왕도 원효를 인정하여 사위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3. 원효 사상의 기본 - 일심론<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 정토종

원효의 사상은 원효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기본 사상만 여기서 파악해 봅시다.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에 입각한 <일심론>이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음이란 신분과 상관없는 것이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여자와 노비들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일심론은 현실(예토), 마음(정토)는 한마음(일심)이라는 것이 핵심으로 마음에 따라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죠. 즉, 대중불교의 기본이념이 바로 일심론입니다.

일심론은 마음에 따라 성인도, 악인도, 여자도, 노비도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극락에 여자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성불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원효는 여자가 성불하면서 바로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 남자로 해탈하므로 여자 역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성인 사상이라면, 원효의 불교는 인간평등의 만민사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극락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륵불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보통 미타사상이라고 하며, 원효의 <정토사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의 정토설은 귀족 위주의 현실적 불교를 죽은 뒤 극락에 가기 위한 <내세적 불교>로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의상 등 다른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의상이 만든 부석사는 화엄종 성격보다는 원효의 정토적 성격이 강합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등이 부석사에 있음으로 해서 부석사는 마치 의상이 만든 절이라기 보다 원효의 <정토사상>을 보여주는 절처럼 느껴집니다.

원효의 일심론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다양한 불교 학파를 통일한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공유논쟁>이라는 불교 최고의 논쟁을 원효가 정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처가 죽은 뒤 인도와 불교가 전파된 중국에서는 공, 유의 개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공>이었는가, 모든 것은 인식에 달려있다는 <유, 식>이었는가를 놓고 다툰 논쟁입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이것에 대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효는 이것을 <일심론>으로 정리합니다. 즉, 부처가 주장한 세계는 공, 유의 나눔이 아니라 본질은 한마음이라는 일심이라는 것이죠.

원래 한마음이란 본질(공 : 진여문), 현상(유 : 생멸문)가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원래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모두 비롯되는 하나인 것이다 - 라는 정리가 원효의 정리입니다.

이 원효의 사상은 공을 중시한 중관학파, 유를 중시한 유식학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당나라 화엄학 성립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를 벗어나 독자적 불교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원효 사상 이전의 귀족적 미륵신앙(상생적 미륵신앙, 하생적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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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생적 미륵신앙 : 부처일족이 미륵이 되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국왕권 옹호 신앙(국왕 = 만민을 구원할 미륵)    상생적 미륵신앙 : 귀족들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부처일족)이 된 뒤 언젠가 내려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원효의 정토신앙 : 누구나 깨달음이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믿음

4. 의상의 대중불교  - 모든 것은 원융이다. : 화엄종

의상의 불교도 각론에서 다루니, 여기서는 기본만 봅시다. 의상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원융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을 갔었죠. 그런데, 5두품 출신인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신라로 돌아와서 의상만 당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의상은 당에 유학이 자유로운 진골출신입니다.

의상은 진골이지만, 불교에서의 교리의 평등성을 인정하여 불교의 보편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노비, 평민, 극빈층 등이 많다고 합니다. 즉,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는 원효가 백성들 사이에 직접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교단불교>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유명한 부석사를 지었는데, 이 부석사는 원효가 신라 화엄종을 개창했음에도, 전술햇듯이 원효성격의 대중불교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종 2대 시조 지엄에게 화엄학을 전수받았는데, 중국의 고승들이 원효의 사상에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불법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볼까요?

<하나 안에 일체가 있으며, 많음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찰나요. 한 찰나가 곧 그 한량없는 겁니다.>

<한국불교전서 중 발췌>

이 말은 곧 모든 것이 하나요, 하나는 모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요체인데, 신라 왕실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백성은 왕에게 귀속된다>로, 하나는 모든 것이다를 <왕실은 백성에게 베푼다>로 해석하여 이 사상을 전제왕권에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목적이나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의상 스스로가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 후세의 불교에서 그의 사상을 왕권에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융>이라는 개념입니다. 원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불립된 각종 종파불교를 묶기 위한 의상의 노력을 집대성한 사상입니다. <원융>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둥글게 감싸서 포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타 다른 교단의 불학들이 불법이 무엇이고,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원융사상>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 진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원융>이라는 진리에 모든 것은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다른 교파의 모든 사상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과 물고기와 영양분들이라면 <화엄종의 원융>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바다>자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상은 다른 통불교적 사상들을 원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통합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종파 불교들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합니다.

5. 원측의 유식 불교 - 법상종

법상종의 성립 배경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유식론을 배울 때로 올라갑니다. 원측은 그 유명한 현장법사 아래에서 당나라 섭론종(구유식 사상)을 배웠습니다. 유식파란, 부처의 가르침은 인식에 달려있는 것으로 실제이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 허상인 <공>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중관학파>와 대립되는 사상이었죠.

그런데, 원측은 유식학파의 <유>라는 실체 역시, <공>이라는 이념을 일부 수용해야 조화롭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의 스님들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원측의 학파를 서명학파라고 하는데, 원측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유식>만이 진리라고 한 중국승 규기 일파를 <자은학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은 일본까지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논쟁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공유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공유논쟁은 원효가 일심론으로 해결합니다.

아무튼, 원측은 이단파가 되어 본국인 신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제자 도증, 태현에게 전수되어 신라 법상종으로 자리잡습니다. 법상종은 유식파의 성격이 강하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 해석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신라 귀족들은 법상종, 계율종을 상당히 옹호하면서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하였습니다. 법상종을 실제 일으킨 인물은 진표인데, 그는 미래 부처인 미륵불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러 내려온다는 <상생적 미륵신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 귀족들이 죽어서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 머물게 되므로, 룻날 내려오는 미륵은 귀족과 연관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신라에는 통일 후 5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화엄종, 법상종 외에 열반종, 계울종, 법성종이었습니다. 5교를 개관적으로 볼까요?(세부적인 것은 각 불교 각론에서 다루겠습니다.)

화엄종과 법상종은 전술했듯이, 부처가 말한 진리는 <공>이냐, <유>이냐의 논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화엄학은 의상을, 법상학은 원측, 또는 진표를 각각 조사로 합니다.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은 불법의 요체 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열반종은 열반, 법성종은 불성, 계율종은 계율이 불법의 요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5교의 난립한 이념을 <십문화쟁론>으로 정리하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주를 달면서 하나로 통일(화쟁사상)한 사람이 바로 원효입니다.

6. 신라 말기의 불교 - 선종

신라 말기에는 어려운 사회상 속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이 유행합니다. 새로운 종교인 선종은 이전의 5개 교파 불교를 모두 교종이라 부르면서, 그 불교들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선종은 불교의 핵심은 경전을 읽거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를 믿어야 한다는 원효의 <정토종> 사상을 일부 인정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심성을 맑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경전과 상관없다(불립문자)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자체가 불성임을 알면 불교의 모든 도리는 깨닫는 다는 것(견성성불)을 말합니다. 선종 경전의 암기보다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므로, 귀족적이기 보다는 민중적인 불교였습니다.

원래 선종은 5호 16국 시대 북위에서 <달마>가 소림사에서 개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종은 경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 자신의 본체와 내면적 기질을 알기 위한 좌선을 중시합니다.

이 선종에서는 경전을 암기한 자에게 교파의 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의발과 바리때를 전수함으로서 다음 조사를 법조를 선발합니다.

5대 흥인 때에는 <신수>라는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흥인이 제자 중 한명을 다음 선사를 뽑아 전해주려고 하면서 모든 제자에게 깨달은 것을 게어(시문)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신수는 선사의 방 앞에다 다음 게어를 적어놓았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흡족하여 제자들에게 이 게어를 종종 암기하라고 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이 게어가 선종의 모든 경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어느날 방앗간 소공인 혜능이 이 게어를 보더니, 글을 쓸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또 하나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었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집이 아니며,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티끌이 생긴다는 것인가요?>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감동하여 혜능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이 방앗간 소공은 비록 글을 몰랐으나, 너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습니다. 흥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혜능의 글을 무시하면서도, 실제로는 혜능에게 선종 6대조 자리를 물려주며,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맞아죽지 않게 도피시켰다고 합니다.

이 혜능이 개창한 선종이 바로 <남종선>입니다. 남종선은 혜능의 유지를 받아 갑작스런 깨달음(돈오)을 중시하고, 왕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민중 불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처음 게어를 걸었던 <신수>와 직계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했는데, 이 북종선은 측천무후의 비호로 귀족불교가 되었습니다. 이 북종선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 점진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점수>라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지눌 스님은 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이론을 합쳐 <돈오점수>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선종이론이 점차 통합되기도 하죠.

신라에서는 <남종선>을 받아들였는데, 이 것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신라 말 사회 혼란 속에서 <교종 종파 5교>가 문란해진 상황에서였습니다. 선종은 각각 나말 호족들과 연합하여 <9산>이라는 유명한 절들을 세우고 호족들과 연계했습니다. 또 선종의 9산이라는 각 파는 대부분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거나 그 자신이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 진골 위주의 교종세력에 대한 반발이자, 선종이라는 종교가 혜능기부터 이어온 혁신적이고 지방분권적이며,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나중에 불교 각론을 세부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힘드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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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