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조선'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5건

  1. 2007.03.02 위만조선의 발전과 멸망 (4)
  2. 2007.02.15 우리 역사의 시작,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였는가? (5)
  3. 2007.02.04 한반도에서의 철기시대로의 이행 (1)
  4. 2007.01.13 연의 침략과 위만의 배신 (1)
  5. 2007.01.13 위만조선 열전 (1)

위만 조선의 발전과 멸망의 역사

1. 위만 조선의 발전

철기 무기를 사용하여 정권을 잡은 위만조선은 준왕을 월지국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우거왕 때에는 발달된 철제 기술을 확보하면서 남부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대동강 유역의 무역권을 이용한 중계무역으로 성장합니다.

위만조선은 진국과 압록강 중류의 예족(예군남려)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위만조선의 압박으로 예군남려는 한나라에 투항해 버리기도 합니다. 한나라는 예족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예인을 이용하여 위만조선을 압박하려고 했으나, 예인들은 오히려 한나라의 강압정책에 반발하여 창해군은 몇 년 안가 소멸됩니다.

당시 중국의 패자인 한나라의 한무제는 흉노와 맞써 싸우는 일에 주력했었습니다. 초기의 한무제는 위만조선과 대립하려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흉노를 무찌르기 위해 서역 월지국과 동맹을 맺으려 한 한무제가 장건을 파견하면서 비단길이 열리고 서역과 적극적인 무역로가 개통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흉노는 중국과 서역의 직접 무역으로 비단값이 떨어져 경네난이 유발되자, 위만조선과의 연합을 추진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무제는 흉노 세력을 약화시킨 후 서방 9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흉노와 조선의 연결을 막기 위해 대동강 무역권을 강탈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1년여에 걸친 한과 조선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죠. 그러나 위만조선에서는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장군 왕협 등이 한나라에 투항하고, 이계상이 우거왕을 피살함으로서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대신 성이가 계속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기원전 108년 조선은 멸망하고 맙니다.

2. 한나라의 분열정책

한은 조선의 땅에 한4군을 설치하여 감시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적극적으로 주도 세력 성장을 방해하여 그 땡을 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군현의 주변지역까지 경제, 문화적으로 흡수하면서 옛 조선의 영토는 심각한 사회분화 현상을 겪게 됩니다. 조선 멸망 이전부터 소국으로 존재하였던 예, 맥, 한족들은 소국으로 분립되어 상호 항쟁하게 되었고, 토착사회는 60여개의 법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사회가 분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화는 2가지 문제점을 가져옵니다. 첫 번재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족장 세력들을 통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자기 지배 체제로 끌어들이는 문제, 두 번재는 중국문화에서 벗어나려는 다른 새외 민족과의 충돌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살아남은 국가들이 고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사회분화 속에서 살아남은 초기 국가들을 살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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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중심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1. 기자 조선이란 무엇인가?

중국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항상 기자 조선을 염두에 두고 서술합니다. 고조선을 세운 것은 단군이지만, 중국에서 기자가 건너와 단군조선을 개화시켰고 단군조선이 문명화된 것은 기자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조선시대의 지배층도 이 기자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고, 문명의 개화는 기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기자 조선의 이야기를 중국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기자가 중국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요하 서쪽에 위치한 조선으로 단군이 세운 단군조선과는 별도의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단군조선이 새로운 세력인 지자조선에게 서쪽 영토를 일부 나눠준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서양이나 중국식으로 보면 봉건제도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이 기자조선은 나중에, 또 다시 중국에서 넘어온 우리나라 유민세력인 위만조선에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중국 한무제에게 멸망당합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별도의 나라로 본다면 한사군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사건은 단군조선과 무관한 일이 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만 고조선으로 기록해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다 망한 나라입니다. 진국, 진번, 임둔이 한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고, 중계무역으로 쌓은 부를 이용하여 주변 임둔, 진번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흉노와 연합하여 한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위만조선의 이러한 행동은 한나라에게 커다란 위협이였고, 한무제는 적극적으로 위만조선을 공략하여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최근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다.

고조선은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를 놓고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실증주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을 거점으로 하는 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주의적인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이동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럼, 평양설, 요동설, 이동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죠.

평양설을 주장하는 사례부터 볼까요?

고조선 중심지를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나 학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양설을 주장하던 시기가 북방 요동을 점령한 민족에 의해 침입을 받던 시기라는 점이죠. 북방 민족에게 침입을 받는 시기에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발언은 민족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매국적 행위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 예를 들어볼까요?

고조선 중심지가 평양이라고 주장한 문헌은 일단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평양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정사실화 해서 적어놓고 있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적은 시기는 몽고 침략기로서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몽골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몽골이 점령한 요동이 아닌 평양이어야 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안정복, 정약용 등 실학적 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평양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청나라가 강성했고, 청나라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만주원류고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를 청나라 중심으로 엮은 책으로, 청과 조선은 문화적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안정복과 정약용은 민족적 자존심 차원에서 단군 조선의 위치는 청의 근거지인 요동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주장합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함으로서 청나라의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반발합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라고 정하고, 훗날 영토를 넓혀 요서를 점령하고 연과 국경이 마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쪽으로 확장된 국가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민족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였습니다. 정약용은 낙랑, 현도, 임둔(함경도-평양-임진강)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라고 주장합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는 고조선의 영토는 요서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였으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평양임을 역설합니다. 조선시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 등의 단군관련 기사도 평양중심의 단군조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제 문헌고증사학자들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것을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한군현의 위치가 요동이 아니라 한반도 내라는 것도 이들이 밝혀내려고 하였고, 단군조선의 위치도 객관적으로 밝히려고 했습니다. 이병도는 아사달은 평양, 패수는 청천강, 만번한은 박천강, 열수는 대동강으로 파악하여 고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임을 주장합니다.

3.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이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의 공통점은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진 시대에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고 한 시도와 맞물린다는 점입니다.

요동설은 조선 초기 권람의 <응제시주>에서 처음으로 보입니다. 권람은 낙랑은 압록강 북쪽이며, 기자조선은 요동과 요서에 걸친 광대한 영역국가라고 주장합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옛 조선을 계승한 조선왕조가 요동정벌을 하여 옛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북벌을 계획하여 당시 중국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17세기에 남인학자들은 이러한 요동설을 체계화 합니다. 홍여하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우리 옛 땅을 강탈한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이익, 이종휘 등은 이러한 사상을 <소중화 사상>과 연결시켜, 중국 정통 국가인 <명>이 멸망한 뒤 중화사상의 전통은 오랑캐인 청이 아니라 <조선>에 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청>은 중국 영토와 옛 고조선의 영토를 강탈한 침입자라고 주장합니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했던 북학파 역시 <청>이 고조성의 영토를 차지한 국가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실학자들을 거쳐 일제시대 민족사학자들에게 계승됩니다.

평양설과 요동설은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내리기 어렵습니다. 또, 평양설과 요동설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입장이 애국적이거나 매국적이라는 판단도 내릴 수 없습니다. 평양설은 외세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찾으려고 한 애국심의 발로이며, 요동설도 우리 영역을 요동너머로 정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이 두가지는 민족적 처지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시대에는 필연적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상반된 학설이였던 것이지요.

4. 고조선 중심지의 이동설

이동설의 핵심내용은 고조선이 요동에서 건국하였으나 후에 한반도 내부로 이동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였습니다. 실제 고조선 문화를 규정하는 것은 비파형 동검 문화인데, 비파형 동검이 출현한 것은 요서가 먼저이고, 요동으로 차츰 전파됩니다. 이것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점차 이동함을 보여줍니다.

만약 고조선 중심지가 초기부터 평양이라면 한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평양에서 발견되는 고조선기 세형동검은 그 상한선이 기원전 4세기를 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무엇을 들고 중국과 항쟁했을까요?

즉, 요동에서 기원전 4세기 이전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이였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조선의 중심지는 비파형 동검을 사용한 요동에서 뿌리내리고 있다가, 중국과의 항쟁(기원전 4세기 연의 침입)에서 밀린 후 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는 학설입니다. 평양으로 이동 후 한국형 세형동검을 만들어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학설이 최근에는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았습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고조선 이야기를 적을 때 상세하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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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로 이행 - 간단히 핵심 요약

1. 철기사용과 그 시대적 특징 - 간단히 다루기...

철기시대의 특징은 철기는 청동기와는 다르게 구하기 쉬웠고, 두루 쓰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논농사가 전국적으로 실시됩니다. 또, 철제무기를 통한 전쟁이 증가하고, 이것은 사회 분화를 촉진시켰다는 점도 중요하죠.

철기시대에는 해상활동세력, 대장장이(철기제조 기술을 가진 자), 상업세력 등이 각자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지역별로 이루어진 국가들이 철기 시대 초기에는 아주 많았죠. 삼한 70여국이라는 말에서만 보아도 이 당시 국가 숫자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국가들은 서로 정복전쟁을 통하여 집단간 계급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에 진 자들은 노예가 되어 사회 내부적인 계급이 상당히 분화됩니다. 즉, 제가, 호민, 하호 등 계급이 나뉘고, 정치와 제사를 지내는 군장 및 종교 세력등이 성장하는 등 중층적 질서가 보다 견고해지는 것이지요.

한반도에서 철기가 도입된 것은 위만조선시대라고 보통 말합니다. 위만은 본래 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을 한반도로 몰아내고, 새로운 기술인 철기제조술을 이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성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원래 고조선에는 <경>이라 불리는 관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독자적 봉건세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위만은 봉건세력들을 통합하기 위해 새로 <상>이라는 칭호를 내려줍니다. 상은 지방 봉건세력을 중앙 관료로 흡수한다는 뜻의 관직명입니다. 그러나 봉건세력들은 <경>이라는 칭호 앞에 <상>이라는 칭호를 붙여 씀으로서 그들이 관료이지만 독자세력임을 과시합니다. <조선상 역계경>이라는 사료의 호칭은 가장 유명하죠. 조선상 역계경이 왕과의 마찰로 자신의 세력 2000호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버린 사실은 유명한 사료입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철기 국가들은 구심점을 잃고, <간>, <가> 등을 칭하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웁니다. <간>, <가> 등은 왕을 뜻하는 우리말입니다. 후에 이 명칭은 더 큰 나라에 복속된 소국의 군장세력을 뜻하는 말로 의미가 바뀌게 되죠. 북방의 이러한 독자적인 작은 소국들은 개마국, 구다국, 비류국, 옥저국, 동예국 등 수가 엄청 많았는데, 대부분 고구려에게 흡수됩니다. 훗날,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은 이러한 소국들의 간, 가 들을 자국의 세력으로 끌어들어 강대한 국가연합을 이루면서 대립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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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변화 2

(연이 쳐들어 온 이후 뒤이어) 진이 천하를 아우름에 미쳐서는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 때 조선왕 비가 섰는데, 진이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두려와하여 책략으로 진에 복속했으나, 조회는 하지 않으려 하였다. 비가 돌아가고 아들 준이 왕이 된 지 20여년에 진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워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 갔다. 준은 이들을 서쩍 지방에 와서 살게 하였다. 한이 노관으로 연왕을 삼자 조선과 연은 추수로 경계를 이루었다.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한 뒤 연나라 사람인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왕에게 항복하였다. 위만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홀을 하사하며 땅 100리를 봉해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거짓을꾸며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들어가 숙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결국 돌아와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하였다.                    

                                                             - 삼국지 위서 위략 -

사료해석 : 기자조선이 연의 침입 이후 영토를 잃어 중심지가 이동된 이후, 위만이 망명하여 위만조선의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중국측 사료로서 사실여부의 신뢰성부터 의심이 가지만 딱히 반박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한국사에서는 이 자료를 인용하여 모든 상황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위만이 연나라 사람인가하는 문제인데, 그것에 대한 한국사의 입장은 부정적입니다.

위만이 상투를 틀고 조선복장을 하였으며, 조선의 토착민족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관직 등을 유지시켰다는 점에서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관점이 더 많습니다. 위만에 대한 논쟁은 한국사 자료실을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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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전

위만이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을 때는 마침 효혜, 고후(한나라 혜제왕 대 여후 섭정기)의 때로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된 무렵이였다. 요동태수가 위만으로 외신(외번)을 삼아요새 밖의 만이를 막아서 변방에서 도둑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의 군장들 가운데 천자께 들어가 뵙고자 하는 자는 이를 막지 말도록 하자고 아뢰니 천자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위만이 군사의 위엄과 재물을 얻자 주변 소읍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여 땅이 수천리나 되었다.

위만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손자 우거에게 이르자 한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을 자못 많이 유인하였다. 또 일찍이 들어와 천자를 뵙지도 않으면서 진번 곁의 진국(한반도 남방의 중국, 3한의 모태)이 글을 올려 천자를 보고자 해도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봉 2년에 한에서는 섭하를 사신으로 보내 달래고 타일렀으나 우거는 끝내 조서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섭하는 돌아가다가 국경 위에 이르러 패수에 도착하자 부하를 시켜 자기를 배웅하러 나온 조선비왕 장을 죽인 다음 재빨리 강을 건너 요새로 달아났다. 돌아가서 이 사실을 천자에게 보고하여 자기가 조선 장수를 죽였다고 하자 천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더 캐묻지 않고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수로 여겨 군사를 내어 습격하여 죽였다. 이에 천자는 죄인을 모집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좌장군이 양군을 합하고는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사 노인, 상 한음, 이계상 참, 장군 왕협 등이 서로 모의하기를 “처음에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누선이 체포되고 좌장군 혼자 장군들을 합쳐 전투가 더욱 급하니 더불어 싸울 수 없을 것 같은데 왕은 항복하려 들지 않는다.” 하고는 음, 겹, 노인 모두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원봉 3년 여름, 이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해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이가 거듭 항전해왔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강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백성들을달래 성이를 죽이게 하였다. 이로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삼았다.

                                                             - 사기 조선열전 -

사료해석 : 위 사료는 사기의 관점입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위지동이전같은 사료와는 그 성격이 다릅니다. 사기에 나온 조선의 내용 자체가 <열전>에 포함되기 때문에 정치사적 관점에서 중국의 동이정복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반면 위지동이전 같은 사료는 민족지학적인 관점이 훨씬 많죠.

중국의 동이정복관점에서 전쟁의 명분이라는 측면에 사기에 많이 들어가 있으므로, 이러한 사료를 비판할 때 중국입장을 생각하면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진짜 그랬을까, 그랬다면 다른 이유가 있었지 않을까, 중요한 사건을 누락시키지 않았을까하는 사료 비판이 첨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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