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1984년의 7월엔 이미 동학농민운동이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에서 남부 3도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9월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개혁 강요로 인하여 2차 농민전쟁이 기포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은 1894년 11월 농민군 및 청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1차 개혁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및 동도서기 계열, 조선 보수 관료 등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개혁이 바로 2차 갑오개혁입니다.

일단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고문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개혁에 감놔라, 배놔라... 시비걸기 시작합니다. 1차 개혁의 중심세력인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을 밀어내고 비교적 친일성향의 개혁파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1차 개혁의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도 폐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세력을 확실히 제거한 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2차 개혁은 1차 개혁과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침투에 용이한 조항과 조선 국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2.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다.

일본의 개혁방침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죠.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 방식을 벤치마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이집트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건설이 늦어지고 이집트 스스로 그 차관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지자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보호국이란, 차관(빚)을 진 나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돈을 빌려준 나라(영국)이 그 빚을 받기 위해 해당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집트 같은 경우 영국에 막대한 차관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 제 3국이 이집트에 불평등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해주면서 이집트의 모든 피와 살을 뜯어먹는 형식이지요.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에 가하려고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보호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2차 개혁에서 일본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령>을 만들고, 일본의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선결조건으로 일본과 친한 박영효,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죠. 당시 개화파인 김홍집 등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나갔던 적이 있어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진화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조선의 개화와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원할하게 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간섭> 때문이었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러시아는 긴장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삼국간섭>을 하였습니다. 3나라는 일본에게 청에게 강탈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고, 대만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하던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빼앗은 땅을 다시 잃게 됩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결국 1894-1895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훗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국간섭이후 조선의 개혁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죠. 2차, 3차 개혁을 주도한 것은 1,2,3차 김홍집 내각(김홍집, 박영효 등)이었습니다.

2. 홍범 14조를 발표하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표한 것은 2차 개혁 때였지요. 홍범 14조로 볼 때 1차, 2차 갑오개혁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요?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홍범 14조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조의 <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이 원한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청은 청일전쟁에서 밀리며 이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이전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닌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5조까지의 내용은 <왕권을 확실하게 약화시킨다>는 조항입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이 서양과 같은 근대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져야 <조선의 보호국 정책>이 수월해지니까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왕권은 약화시키면서도 군제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군제개혁은 12조의 징병제도 뿐인데, 이 항목을 제외하곤 실제 1894년 조선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군대 강화를 일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6-9조는 재정과 부세에 관한 항목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조세의 금납화 및 조세권의 일원화>이죠. 탁지아문이라는 재정 전담부서에서 부세를 걷고, 잡세를 폐지하여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조세의 일원화는 국왕이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또, 토지개혁없이 세금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농민들이 원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농민들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잠깐 세금 깍아주는 것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원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경자유전>이란, 토지를 경영하는 자(실제 농사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부터 계속 주장되어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합니다.

특히 7조의 1년 회계를 예정한다는 <서구식 선예산주의>를 택한 것으로서 재정개혁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부분입니다. 또 13조의 민법, 형법 등의 법령을 정한다는 것은, 법령위의 헌법적 성격을 가진 강령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13조의 내용은 훗날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법령을 만드는 것에 기본 근거가 되는 조항이 됩니다.

10조 이하는 신분제도 폐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새로운 사회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개혁 법안 중 가장 핵심을 추려 놓은 것이 바로 이 홍범 14조입니다.

홍범14조를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입헌군주제>가 핵심이겠네요. 왕도 법을 지키라는 것이죠. 이것은 실학자들부터 이어져 내려와, 갑신정변에서도 강조된 개화파의 개혁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신분제 폐지>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동학 농민들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는 <재정 일원화와 금납화>이겠죠. 홍범 14조는 국가의 자주권부터 정치, 행정, 재정, 교육, 국민의 권리 등을 규정한 <국가 개혁을 위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홍범 14조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국가 내부, 외부에 선언한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주독립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 개혁 강령으로 함으로서 서구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알린 것이며, 서양식 헌법내용을 도입하겠다는 것을 알린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3. 2차 개혁만의 독특한 법안

1차 개혁의 내용 대부분이 2차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실제,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만 다를 뿐 개혁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를 바가 별로 없으니까요. 단, 2차 개혁에서는 제도적인 정비가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먼저 중앙제도에서는 본격적인 내각제도의 법제화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혁 주체가 <내각>이 되었고, 국왕권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1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라는 도깨비같은 기구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이제 서구식 <내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내각으로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8아문이 서양식 <~~부>로 바뀌고, 이것을 7부라고 합니다. 7개의 부가 등장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행정부, 경제부, 교육부 등등이 등장한 것이죠.

다음으로 지방제도도 바뀝니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 지방제도는 8도가 있고 그 밑에 군, 현이 있으며, 그 아래 행정단위로 방위개념이 강한 면, 촌락개념이 강한 읍, 향촌공동체 성격의 리 등이 있었죠. 이것을 23부로 바꾸고 지방 장관이 할 수 있는 권한을 확~ 줄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전국을 <내각 주도>로 개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사법제도도 근대식으로 바꿉니다. 사법부가 왕권에서 완전 독립하였죠. 행정부는 사법부에 간섭할 수 없었고, 재판은 독자적인 재판소의 권한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재판소인 의금부, 관리감찰을 하던 사헌부, 행정재판을 보던 한성부 등의 권한은 모두 1심, 2심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근대화라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약화를 위한 일본의 의도였다는 점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됩니다.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학교,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됩니다. 물론 이전부터 있던 개념이긴 하지만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등의 학명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 세워진 학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2. 2차 개혁의 중단

1차, 2차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1년, 2년, 3년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2차 개혁이 중단된 첫 번째 이유는 전술했던 <삼국간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의해 청일전쟁 승리의 노확물을 얻지 못하자, 일본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고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정책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이유는 개혁의 추진 세력이 친일 개혁파였기 때문에 국민적인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갑오개혁에 간섭하는 일본 세력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과거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개입하였던 청나라에 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죠.

세 번째 이유는 친일 개혁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1895년 6월 쿠테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갑오개혁의 핵심은 <국왕권 약화와 내각제 강화>였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혁파가 눈에 가싯거리였습니다. 좋은 개혁 내용도 있지만, 개혁의 핵심은 <국왕을 물로 본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박영효가 반대파의 음모 또는 쿠테타로 추방되면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정책>은 완전 실패하였고 2차 갑오개혁에서 일본이 이루려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더구나 <삼국간섭>으로 고종과 민씨 왕후는 <러시아가 일본을 견재할 수 있는 대항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을 버리고 친러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은 당황하였고, 반일세력의 중심인물을 <민씨>를 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895년 여름 일본은 <민씨 왕후>를 낭인자객을 보내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불지르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3번째 개혁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을미개혁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0년 : 조선책략과 조선의 개화정책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실시하게 된 계기와 그 내용입니다. 개화정책은 민씨정권(명성황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그럼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해서 간단히 다뤄볼까요?

1. 수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다.

수신사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합니다. 강화도조약 저번에 다루었죠? 강화도 조약 2조에 보면 <일본정부가 15개월 뒤 사신을 파견한다>는 항목이 있었고, 11관에 보면 6개월 이내 양국이 다시 통상장정, 조일수호조약 조규부록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도 일본에 협상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의 개화수준을 시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1차 수신사로 김기수 등 98명를 파견합니다. 1차 수신사인 김기수는 <수신사 일기>에서 <일본이 부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래 글을 볼까요? 양반 유생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조선 관료가 일본에 가서 느낀 점을 역설한 글입니다.

기교(技巧)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火輪)으로써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바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의 유람을 막은 사람이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했는데, 나는 그 옳은 말을 쫒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유람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가? 기기음교(奇技淫巧)도 말로는 이것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한다고 하니, 이용후생이라면 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김기수, 일동기유 -

일본은 1차 수신사가 다녀간 이후, 조선에 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요구합니다. 이 때 협상으로 부산, 원산은 개항되었지만, 실제로 중요한 관세문제, 미곡문제 등을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추진중이었던 이홍장은 수신사를 파견하는 조선에게 일본이 침략 의도가 있다며 경계하라고 합니다. 우리 정부는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고 2차 수신사로 김홍집 등 58명을 파견하였습니다.

2차 수신사의 목적은

1번째, 인천을 개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해 개항하지 않는 쪽으로 협상할 것

2번째, 일본인에 의해 쌀이 유출되는 문제를 강력히 항의할 것,    이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목적 자체가 아니라 2차 수신사가 파견됨으로서 수많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처방전같은 책인 <조선책략>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2. 조선책략이 유입되다.

2차 수신사들에 의해 유입된 조선책략은 중국인 황준헌이 쓴 외교방략서입니다. 그 내용을 한번 볼까요? 바쁘신 분들은 밑줄 부분만 읽어보세요.

지구의 위에는 막대한 나라가 있는데, 아라사(러시아)라고 한다. 그 너비가 광대해서 3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 정예병이 백여만이고, 해군 거함이 이백여척이다. 다만, 나라를 북쪽에 세워서 하늘은 차고 땅은 척박하였다. 고로 빠르게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선세로부터 표트르대제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이전보다 10배가 넘었다. 지금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팔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으로 중아세아에 있는 위구르의 모든 부족을 잠식하여 거의 다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뜻이 작지 아니함을 알고 왕왕 합종하여서 서로 항거하였다. 투르크 한 나라를 러시아가 오랫동안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여 유지해 나감으로 러시아가 끝까지 굳세게 그 뜻을 얻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서양의 여러 대국들, 독일·오스트리아·영국·이탈리아·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모두 호시탐탐 결단코 한 척, 한 촌의 땅이라도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토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세이고,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시아에서 뜻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세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구라파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동·서·북이 러시아를 등지고 경계를 잇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형세가 아시아주에 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는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이 된지 이미 천년이 지났으되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의 대청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을 정벌해서 2백여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사랑하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왔다.

강희·건륭조를 당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상문하지 않은 것이 없이 내지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가 같고 정의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연접하여 신경(북경)을 껴안아 호위함이 마치 왼팔과 같다. 서로 휴척을 같이하고, 서로 환란을 함께 하였으나, 저 월남(베트남)의 소원과 면전(버마)의 편벽과는 본디 서로 떨어짐이 오래됨이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서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속국은 곧 이 예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성원이 스스로 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 형세가 외롭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한 나라는 맹부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이리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한번 변고가 생기면 구주·사국이 또한 일본의 차지하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의 형세에 놓여있다.

한·조·위가 합종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촉이 서로 결합하자 위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획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구교를 닦고 외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해는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조선을 동해로부터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그 근본은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백년 전에 화성돈(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사람의 학정을 받기를 원치 않고 발분 자립하여 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십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례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연병을 권유하고, 약속을 고칠 것을 도와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로써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시초는 영국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으므로 고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항상 소원하였다. 그 인종은 실은 유럽과 동종이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국세는 대동양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는 호로 대동양에서 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거하고 무사하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리 대양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가히 구원을 얻고, 가히 화를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는 것은 조선의 믿는 바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장차 믿고, 장자 의심할 것이다.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즉 조선이 심히 의심할 것이다.

                                                                                         - 황준헌, 조선책략  -

자 밑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글의 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1번째, 개화를 통해서 부국강병을 해야 하니 서양과 통상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라

2번째, 러시아의 남하에 방어해야 하니 조선은 개화를 하되,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외국과 만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뜻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이 책을 만든 청나라의 의도입니다. 청나라는 당시 러시아와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재하면서도 <조선의 종주국은 청나라>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 책을 적은 것입니다. 미국과 연합하라는 제의는 곧 미국의 힘을 끌어들어 동아시아 구도를 바꿔보겠다는 청의 의지입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들어옴으로서 흥선대원군 시기 억눌려 있던 개화파의 목소리가 봇물터지듯 나오기 시작하였고,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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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책략의 유입을 필두로, 80년대 조선 정부는 개화라는 파도에 휩싸입니다. 개화파 신료들은 고종에게 정부가 앞장서서 개화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조선책략에 쓰여진대로 미국과 연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조미수호조약, 1882)

해국도지, 영환지략과 같은 세계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책들이 들어와 우리의 눈이 넓어졌고, 만국공법 등 서양의 보편법이 유입되어 합리적인 법질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지요.

3. 미국과 수교를 맺다.

조선책략으로 맺은 첫 번째 결실은 미국과의 수교입니다. 미국과의 수교는 <조선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조선책략을 유포한 청나라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조선이 조약을 맺는 중간자로서 청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청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종주권을 암암리에 묵인받게 되고, 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에서 미국의 원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고, 조차지 설정을 승인한데다가,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서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용어들이 어렵죠? 강화도 조약에서 했지만, 다시 한 번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이번엔 표로 정리해볼께요.

<불평등 조약의 일반적 내용들>

협정

내용

영사재판권

다른 나라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타국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은 외국인이 재판한다는 것이지요. 예로, 우리 젊은 여중생들을 미국 탱크가 밀어 죽였어도 미국병사들은 미국가서 재판받고, 국내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잖아요? 그것과 유사합니다.

관세협정권

관세는 해외에서 물건이 들어올 때 세금을 메기는 것입니다. 관세가 높을 수록 세금이 많이 책정되므로 물건값이 비싸지고 잘 안팔리지요. 관세협정권이란, 관세를 낮게 책정하거나, 아예 관세없이 자유무역을 하여 자국의 물건이 잘 팔리게 하는 조약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FTA를 해서 자유무역을 하려고 하고 있죠? 바로 이것입니다.

개항장

설치권

개항장은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첫 입구인 항구근처를 말합니다. 개항장은 외국이 자유무역을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거주 세력 범위를 정하는데, 이것을 <조계>라고 합니다. 특히 조계는 외국들이 자신들의 독립된 영토로서 <조차지>를 설장하기 때문에, 그 지역이 외국의 땅으로 넘어가버리는 <반식민지 지역>이 됩니다. 일본과 미국은 이 개항장은 10리, 50리, 100리로 넓혀갑니다. 조차지가 넓어지고, 개항장이 넓어질수록 해상무역은 점차 육지 무역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이지요.

화폐통용권

화폐통용권은 개항장에서 외국의 화폐가 통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국이 자국의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김으로서 우리 경제를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최혜국

대우권

최혜국 대우권은 통상, 항해, 관세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3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로, 일본이 우리에게 원산을 개항했다면, 미국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으로서 일단 원산은 자동 개항하고 나머지 부분의 개항을 추가 합의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나라와 맺은 조약이 이후 조약 또는 이전 조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청과 맺은 조청상민무역장정에서 <내륙지 무역을 허가한다>라는 조약이 있습니다. 이 조약은 최혜국 약관에 의해 모든 나라가 우리 내륙에서 무역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 조약이 체결된 1880년 중반에서 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모든 나라가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고 받고를 시작하죠.

3. 민씨정권은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시도하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공공연한 명분을 얻게 되고, 개화파는 이제 양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1880년대의 개화정책의 특징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정부주도의 개화정책과 온건개화파의 득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개화정책이란, 서양의 모든 문물을 다 받아들이는 정책이 아닙니다. 조선 정부는 개화의 성공 사례는 일본을 본받으려 했지만, 개화의 원칙에 았어서는 청나라, 특히 양무운동의 이홍장에게 많은 자문을 얻게 됩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개화정책 사상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되, 중국의 정신을 유지한다>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나라 개화도 이 중국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의 성격을 본받아 <동양의 도를 존중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는 <동도서기>의 개화였습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위 글은 윤선학이 주장한 동도서기론입니다. 즉, 이홍장의 양무운동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민씨정권은 <동도시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구와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효율적인 문물 수용을 위해 청에는 김윤식 등 영선사를 계속 파견하고, 일본에는 수신사 대신 조사시찰단을 파견합니다. 조사시찰단은 정부 관료 중심이 아니라 젊은 관료와 기술자,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진보적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숫자도 상당히 많이 늘렸습니다.

이러한 외국 문물의 조사를 통해 통리기무아문과 12사라는 행정기구를 신설합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부, 12사는 각 부와 차관급이 되겠네요. 또 <국>을 신설하여 국가 기술력 향상을 추구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박문국으로서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합니다. 또 중국 양무운동기의 기기국을 모방하여 기기창이라는 무기 제조부를 만들고, 신식 군대도 양성합니다.

신식군대는 왜별기라고 하여 양반자제로 구성하였습니다. 원래 흥선대원군 시기에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극복하면서 무위영, 장어영의 2영체제가 확립되고 군권을 국왕이 장악하였는데, 민씨정권에 들어서면서 이 구식군대를 활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대원군기 구식군대는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신식군대를 육성함으로서 이것이 훗날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4. 조선책략은 룩론을 분열시켰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정부가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을 흔히 정을 수호하고, 사를 몰아낸다는 <위정척사운동>인데, 80년대 위정척사운동의 내용은 <민씨정권에 대한 개화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책략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일부를 한 번 볼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미국과 연합해고, 러시아를 물리쳐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생들은 아무 근거없이 개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의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보이는대로 불태우는 운동을 하면서 개화에 대하여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위정척사운동을 대원군기부터 명성황후기까지 시기별로 모아서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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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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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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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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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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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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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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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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