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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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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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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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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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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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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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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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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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사상 3. 법가사상

법가사상은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실제 통일 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던 사상으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군주들에게는 가장 필요했으며, 시급했던 사상입니다. 3번째로 법가사상을 한 번 볼까요?

1. 법가의 필요성

법가가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 반영된 것은 이 사상이 급변하는 철기시대 혼란상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혼란기의 정신없었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도덕, 윤리, 자연, 철학>을 조근조근 설명하는 것보다 <죽을래? 법지킬래?> 한 마디가 더 확실하게 먹힐 수밖에 없으니까요.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지향함으로서 효율적으로 조세를 걷고, 부국강병을 이루며, 이에 따라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에 기여했습니다. 진 나라가 통일에 성공한 이유도 이 법가주의를 통한 변법으로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소국들이 난립하였는데, 이들은 아직도 주나라 이래 씨족공동체적인 구습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습을 타파하고, 구 귀족을 숙청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제도와 획기적인 사회변화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유가는 너무나 이상적인 측면에만 치우쳐 있었죠. 숙청해야 할 구귀족세력에게 <시경>을 읽어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유가는 부국강병에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묵가는 너무 서민중심적인 집단이었고, 도가는 국가의 질서 자체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 학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전국시대 군주들은 법가사상을 배경으로 강력한 <변법>을 시행하였고, 상앙, 이회, 추기 등이 실시한 각 국가의 변법은 실제 부국강병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전국시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변법을 시행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 구귀족을 숙청하고, 제민지배를 확립하여 백성들을 법의 이념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법가사상의 시도

법가사상이 국가사상으로 대두한 것은 춘추시대 최강국인 진나라를 배신하고 하극상을 일으킨 <한, 위, 조> 삼국이 서로 경쟁하면서 부터입니다. 이전 춘추시대 제나라에서도 관중 등이 법가주의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것은 일부 수준이었고, 실제 <한, 위, 조> 3국은 치열한 중원의 한 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법에 의한 중앙집권을 시도하려했습니다.

특히, 법가사상은 그 특성상 엄법주의를 추구하므로, 법가를 도입한다는 것은 법가와 조금이라도 뜻이 맞지 않는 다른 사상들은 모두 버리거나 제단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법가는 기존 사상, 특히 정치적 라이벌 사상인 유가사상을 그 근본적 윈리인 <가족윤리>부터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상앙이 변법을 실시할 때, 분가정책으로 형제간, 심지어는 부자간에도 같은 집에 살수 없다라고 제도화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합니다.

3. 법가의 사상 체계

법가사상은 세치, 술치, 법치의 3단쳬계를 한비자가 정립하면서 사상적 이론이 완성됩니다.

일단, <세치>란 하늘의 다스림(천치)와도 통하는 말로, 신도가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군주의 통치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위세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즉, 군주는 신성하고 위대한 자로서, 감히 신하가 넘볼 수 없는 권력을 가졌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입니다. 따라서 신하가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유가에서 말하는 <덕>이나, 묵가가 말하는 <선양>의 개념이 아니라 그 <위세와 세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치의 개념은 곧 <군주권의 신성화>라는 맥락에 닿아있습니다.

<술치>는 군주가 위세를 가지고 세치를 완성할 때 필요한 방법으로 신하를 다스리는 <기술>을 말합니다. 국왕은 강력한 권한을 과시하기 위해서 신하들을 벌벌 떨게 만들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관료들을 장악해야 하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를 적용해서라도 신하들을 휘어잡아야 합니다. 또 <관료제>를 정비하여, 국왕 밑에 관료들을 귀속시키고,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춤으로서 신하들이 국왕을 두렵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즉 술치는 국왕이 신성하다는 <세치>를 이루기 위한 <기술>입니다. 술치를 강조한 사람은 신불해입니다.

<법치>는 군주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근본으로, 법에 의한 통치를 말합니다. 누구든 신분과 지위를 막론하고 법을 기본으로 상과 벌을 내리면, 국가는 자연스럽게 기틀이 잡히고 부국강병을 이룬다는 논리입니다. 변법을 추구하는 변법주의자들이 법치를 강조했으며, 대표적으로 상앙, 이사, 이회, 추기, 한비자 등이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법치, 술치, 세치를 종합하여 법가주의를 완성한 사람이 <한비자> 입니다. 그는 <순자>의 제자이자, 이사와 동문으로 <성악설>에 기반하여 법치주의를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악함을 말하며, 엄형주의와 신상필벌을 강력히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술치, 세치는 사실 <법치>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치>를 완성할 때, 군주의 술치, 세치는 자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였습니다.

따라서 강한 법치를 추구함으로서 백성, 관리, 국정을 모두 총괄할 수 있는데, 이중 관리를 통제하는 것에는 <술치>가 뒷받침되고, 국정을 운영하는 데에는 국왕의 위세(세치)가 이용된다고 말합니다. 실제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에서는 남방 초나라 출신인 한비자를 초빙하여 <법치>를 배우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비자는 동문인 <이사>의 질투로 인해 진에서 쓸쓸히 죽게 되죠.

다음 장에서는 나머지 제자 백가 사상을 다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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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사상 2. 도가와 묵가

이번 장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2번째 편으로 도가와 묵가를 간략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두 사상은 전편에 다른 유가와 정면적으로 충돌한 사상으로, 유가와 비교해서 해석하면 재미있습니다.

1. 도가

도가의 기원은 노자, 장자의 노장사상을 흔히 말합니다. 도가는 유가와 함께 중국 2대 사상으로 발전하지만, 그 사상은 유가에 대한 반발적 경향이 강합니다.

도가 사상의 핵심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가부장권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전제군주권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유가는 국가주의적인 기형아적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춘추전국의 혼란은 인간이 욕심을 부려서 일어난 <인재>라고 보고, 인간이 욕심을 떠나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위 <무위자연>이며, 도가에서는 국가생활을 떠나 자연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보통 이러한 현실 부정의 사상은 중국 남부의 초나라 등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인도 등 남부 지역의 자연주의 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라 보는 입장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의 기원이 아니라 도가 사상이 실제 자연중심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중국 사상의 기반을 이룬다는 점이죠.

도가에서는 국가란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위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될 수 있으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 단위인 것이 좋으며, 국가의 규제보다는 자연의 법칙이 더 커질 때 진정한 자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을  <소국과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따라서 국가가 만약 일반 백성의 삶을 지나치게 규제한다면, 백성들은 국가에 대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저항권>의 개념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이며, 중국 민란의 사상적 근거의 대부분이 훗날의 <도교>에서 비릇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2. 도가의 사상가

도가 하면 일단 노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도가의 창시자이자 무위자연, 소국과민이라는 용어도 노자에게서 비롯되니까요. 그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였고, 백성들의 저항을 인정하였으며, 유가의 인위적 질서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노자가 은둔하기 직전 국경검문소 병사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서 적어주었다는 <도덕경>만이 남아 있는데, 이 도덕경의 심오함은 계몽주의 시대 서구 사상가들마저 감탄하여 필독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자는 도가사상에 종교성을 주입하여 <도교>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철학가입니다. 그는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어떤 진리도 절대적 근원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내가 나비인데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한 부분은 진리의 상대성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3. 묵가 사상

묵가는 묵자가 창시했는데,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주의를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나온 제자백가입니다. 묵가는 전국시대 당대에는 가장 활발했던 학파로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핵심 제자백가입니다.

묵가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은 다양합니다. 일단 유가의 윤리성이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점입니다. 묵가의 입장에서 유가를 바라볼까요?

유가에서의 예악정치란, 속마음을 숨기고 형식으로만 상대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왕위세습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적 제도 장치입니다. 유가가 말하는 어짐, 효도, 우애는 자신들의 가족만을 위한 가족윤리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묵가에서는 유가의 사랑을 <차별애>라고 하며 비난합니다. 또, 삼년상이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그 시간에 노동을 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가가 말하는 정치철학은 너무 현세주의적이라 내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다수 <백성>들의 삶에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반대의 사상이 묵가 사상의 핵심입니다.

묵가사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비공, 모두가 평등하다는 상동, 모두가 일한 만큼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교리, 위인을 존경한다는 상현, 왕위와 높은 직책은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한자에게 준다는 선양 등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꼭 갖추어야 하는 본성은 <가족윤리>가 아니라 <노동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곧 생활이자, 사회적 능력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온정인 것입니다.

묵가사상에서 본 정치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정한 능력 사회입니다. 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너무나 크다고 묵가는 말합니다. 즉, 국가는 정치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을 선거(선양)하여 그 인물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의 부강함, 인구의 증가는 모두 공정한 정치에서 나오며, 공정한 정치란, 노동자들에게 생산, 노동, 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고 가난한 자를 없애주는 정치를 말합니다. 특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3환의 제거>라고 말하는데, 3환이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 추위게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에게 휴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묵가는 묵자 이래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여 사회 노동조직이자,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학 집단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절대적 겸애를 바탕으로 한 <공리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핵심 덕목으로 하는 사상체계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노동과 금욕주의를 통하여 생산력과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게으른 자에 대한 귄위주의적 체벌과 훈련, 노동에 대한 복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묵가의 강력한 노동 중심의 권위주의는 묵가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가장 강성했던 묵가가 몰락한 원인은, 그 사상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중용>을 강조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과업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후의 묵가 교단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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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사상 1 - 유가사상

1. 유가 사상의 특징

유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공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자들인 맹자, 순자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간을 정치, 사회, 역사의 주체로 놓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윤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자연속에서 진리를 찾는 도가적인 관찰자 역할을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법가적인 강압주의는 인간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이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가사상가들은 자연과 강압의 가운데에서 <중용>을 통해 윤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곧 정치 윤리로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치국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유가주의자들의 논의는 상당히 지배계급의 이상적 당위성과 치국의 방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내적인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주시대의 봉건적 질서와 예작제도를 중시하였으며, 그 원리에 따라 예법을 만들고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군주는 덕치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군주가 지켜야할 행동가짐은 예치로 규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중용의 논리와도 일통합니다. 즉, 예치, 덕치, 중용에 입각한 덕치주의, 예약정치, 왕도주의는 군주의 필수 항목으로서 이러한 항목을 군주가 지켜가야 혼란한 시기를 구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유가주의는 당시 공자 이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중삼-자사-맹자 계열, 자하-순자 계열의 사상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인간이 예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유가의 핵심 원리는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패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계열이 갈리게 됩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 사상입니다. 어질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어진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효, 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 - 효 - 제라는 핵심 도리를 말함으로서 이 도리가 가족윤리적임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부장권을 옹하하면서 그 가족제도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국가적으로 확장하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국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가족을 감싸듯이, 덕으로서 백성들을 위무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이렇게 인 - 효 - 제를 지켜가면서 윤리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군자란 우애와 효도를 통해 <수신제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이상적 군자의 모범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그는 군자란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로서, 교양을 갖추되, 그 교양의 바탕에는 올곧은 지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소인배들을 군자로 끌어올라는 것이 곧 목표입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을 4등론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성인 - 현인 - 군자 - 소인이 있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되는 것이 곧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인은 군자의 단계를 넘어선 지식과 정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선천적으로 성인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이 4등론은 한나라 시대 한고가 인간유형을 9등으로 다시 세분하였고, 훗날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관인을 선발할 때의 기준으로 쓰입니다.

공자는 내적인 윤리(덕)와 외적인 예(예절)이 균형잡힌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지식과 정신의 겸비를 다시 강조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와 정을 고루 갖추어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은 관용과 타협정신을 가진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시함에 있어 격식에 맞게 행하는 것은 서주의 예에 맞는 것으로, 예악정치도 강조합니다.

3, 맹자의 사상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일단 인간 윤리에 대한 전제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 처음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본성을 지키는 것이 곧 유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여된 4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사단이라고 합니다. 4단은 측은지심(인), 수오지심(의), 사양지심(예), 시비지심(지)입니다. 그리고 이 4단이 발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 때문인데, 이것을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4단에 맞추어 인간은 다섯 가지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이라는 5륜입니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이론으로는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왕도주의란,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한점 부끄럼도 없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야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4단 중에서 <수오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의 = 정의를 뜻하는 것이지요.

제왕이 수오지심에 의거하여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면, 천명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하늘이 스스로 제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명은 곧 하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군주가 정치를 한다면 이것은 하늘의 정의를 버리는 일이고 백성들은 새로운 하늘의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상 속에는 <혁명론>의 근거가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혁명론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살아생전에 크게 존경받으면서도 군주들이 꺼려하는 유가사상가였습니다. 또, 이러한 천명의 변화라는 개념은 후대 <선양>이라는 선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법가사상가들은 맹자의 사상은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4.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유가주의이면서도 기존의 학설과 많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성악설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공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족윤리를 주장할 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절을 통해서 억눌러야 된다며 맹자를 적극 비판합니다.

인간에게는 4단이라는 윤리가 내제한 것이 아니라, 절대 악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악을 누르기 위해서 예악정치,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은 유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 패도적인 법가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 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면, 순자는 아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체벌과 정신교육, 토론을 계속 할 것입니다.

또 순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효제라는 가족윤리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자는 가족 윤리는 작은 것이며, 이 작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윤리가 있는데, 이것은 곧 <의>를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소속한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헌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순자의 견해를 <충의론>이라고 합니다.

5. 유가를 비판하기 시작하다.

그럼 여기서 순자 외에 공자 사상을 비판한 수많은 제가 백가들의 비판 내용을 한번 볼까요?

도가에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도덕관념에 너무 얽매여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모순덩어리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교사상이 인간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국왕권과 밀착된 현생문제에만 몰두하여 인간이 가진 내면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가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소국과민>을 추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도가는 국가의 단위는 최소한 작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유가는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면서 지배층의 이념만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사상을 허무한 형이상학적 이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가 사상은 도덕과 윤리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여서 과연 그것이 정치이념이 되었을 때, 실제 전쟁으로 굶고 있는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이야기 합니다. 실제, 유가 사상은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묵가사상가들은 가장 신랄하게 유가를 비판합니다. 유가가 왕권이 강한 중원지역의 학맥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가장 남방의 초나라 권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유가가 중원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원리를 정당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묵가는 크게 반발합니다. 묵가는 유가의 인-효-제의 가족윤리는 자신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윤리이고, 그것을 확대한 가부장적인 군주관은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는 지배층만의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묵가는 가족애는 <차별애>이므로, 만민이 모두 평등할 수 있는 <겸애>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유가에서 말하는 <예절과 예악>은 허례허식일 뿐이며, 그런 절차가 과연 무슨 생산력 발전에 도움을 주느냐고 비판합니다.

묵가 사상가들이 유가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은 너무 많습니다.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차별적인 관습이다, 3년상은 허례허식이다, 예악정치는 낭비이다, 가족윤리는 차별애이다, 또 현세적인 유교적 치국주의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생활상과 맞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도가, 법가, 묵가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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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