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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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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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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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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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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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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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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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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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오승은 (예림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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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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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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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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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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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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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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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측천무후를 역사 흐름 속에서 분석해보자!

측천무후는 영화, 책으로도 많이 나온 중국사의 재미있는 소재거리입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고, 잔인하면서도 영특한 면모를 지닌 요부로 나오기도 합니다. 절세미인이자, 절세요부로 평가된 이 측천무후... 하지만 절세의 미모 하나로 중국 전체를 호령하면서 82살까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나라까지 건국하였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것이 하나 쯤 있지 않았을까요? 이번 장에서는 당나라 3번째 포스트로 측천무후를 다루되, 영화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한 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당 왕가에서 측천무후의 등장 및 영향력과 관련된 시기... 거의 1/3의 시기에 이르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1. 베일에 쌓인 그녀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중국 당나라 2대 태종의 후궁이자, 3대 고종의 황후이자, 중종과 예종의 어머니이자,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여자를 측천무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왜 무후? 무후란, 스스로 황후임을 인정하는 칭호입니다.

그녀의 칭호가 측천무후인 것은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을 스스로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측천대성황후>라고 일컬은 것이 명칭의 유래라는 설이 가장 다수설입니다. 또, 그녀의 아들 중종이 어머니를 <측천대성황제>로 부른 것도 있구요.

실제 그녀의 이름은 스스로 <조>라고 말했기 때문에, <무조>라고 불리며, 그녀가 주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측천무후의 아버지는 거상인 무사확으로서, 무사확은 수나라 시절, 당의 시조 이연에게 군자금을 제공해주고 성장한 상인이었습니다. 무사확은 이연을 밀어준 대가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력을 떨치게 되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무사확이 산둥지방(옛 북제시절 귀족들의 본거지)과도 연계된 세력이라는 점입니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아내인 장손왕후가 죽자, 후궁으로서 총애를 받습니다. 물론, 측천무후가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강조되지만, 그녀의 신분이 개국공신에다가 여러 세력에게 도움을 준 자금력이 탄탄한 상인집안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태종은 그녀를 <무미랑>이라고 부르며 매우 아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은 측천무후의 미모를 상당히 아끼다가 어느날부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와 연계된 세력들이 당 개국공신들과는 차이가 있는 구귀족 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로, 당시 집권층이자 개국공신 집단들은 <궁 내 여자의 기가 너무 강하여 문제가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의 세상은 무씨 여인의 천하가 될 것이다.> 등등의 소문 등을 이유로 무미랑을 적극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황제의 총애를 잃자 황태자인 진왕 이치(이후 고종 황제)에게 접근하여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즉, 태종의 비였던 그녀가 고종의 여자로서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불륜이 가능했던 이유는 2가지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이 전통 중화제국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방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하였던 남북조 시대 북위, 북주 등의 풍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 여자, 여자로서 황제를 꿈꾸는 여자는 중국 전통의 가부장적 윤리관으로서는 절대 수용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계통의 유목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은 아니였고, 이러한 북방적 관념이 당 초기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두 번째는 이러한 불륜적 상황을 인정해줄 수 있는 지지기반으로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고종에게는 정식 왕후인 왕황후와 고종이 사랑하는 여자인 소숙비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고종에게서 소숙비를 떼어놓기 위해 <무미랑>을 고종에게 붙여놓은 것입니다. 왕황후의 이러한 선택은 훗날 자신이 처참하게 죽게 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2. 왕황후파와 측천무후파의 대결은 정권 다툼이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당 초기 건국 상황에서 <관롱집단>과 <산둥귀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관롱집단이란, 북방민족도, 전통 한족도 아닌 관중지방의 의협집단으로 북위가 분열된 이래, 서쪽 지역에서 성장한 서위 - 북주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지연적 집단임을 말했습니다. 이 관롱집단이 곧 수, 당을 건국한 지배세력이었고, 이들의 성격상 과연 당나라가 전통 중화제국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었습니다. 관롱집단은 서위 우문태 장군부터 시작한 공신집안들로 구성되었고, 당의 개국공신으로서 역대 왕과 왕후들에게 충성하면서 자신들을 특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던 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산둥귀족은 북위가 분열된 이래 동위 - 북제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명맥을 이어온 낙양 명문가를 비롯한 전통 귀족 집안입니다. 수, 당의 건국세력인 양견, 당고조 이연은 관롱집단으로서 양견과 이연 자체가 이종사촌간입니다. 따라서 산둥귀족은 상대적으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정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북제 출신 귀족인 이 산둥귀족이 곧 측천무후를 지지하면서 개국공신 집단을 견제하려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왕황후가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측천무후는 소숙비의 10배 이상되는 강적이었습니다. 역사상 사료에는 왕황후가 착한 여인, 측천무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인으로 후대에 평가됩니다.

예로,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측천무후의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죽인 뒤 슬피 울면서 딸을 죽인 범인으로 왕황후를 지목하여 그녀를 축출합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정권에 대한 욕심으로 혈연도 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묘사되곤 하죠.

이 사건으로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측천의 책봉은 곧 관롱집단의 몰락 및 장안, 관중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과거 북제지방의 산동지방, 즉 낙양중심의 관료군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나 당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습니다. 직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시베리아 남부, 파밀 고원, 고구려 정복 등등 당의 최대 영토를 회복한 왕이었죠. 측천은 당 고종이 건재할 때는 감히 황제의 꿈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이 약해지자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입맞에 따라 왕위에 올리면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아예 아들들을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이 나라의 이름은 <주>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천을 옹호한 집단은 당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잃었던 구귀족들이었습니다.

3. 황후 옹립사건과 중종폐위 사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은 크게 3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왕황후 일파를 몰아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황후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개국공신인 관롱집단을 숙청하고, 구귀족인 산동 귀족들을 등용한 사건입니다.

2번째 큰 사건은 중종폐위 사건입니다. 무후는 자신의 아들은 중종을 폐위해 버리면서 중종과 연결된 당의 종실 제왕들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종래 측천무후를 지지하였던 산둥귀족들도 일부 숙청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후는 거의 전무후무한 전권을 휘두르게 되며, 자신의 새로운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신진관료 육성에 힘쓰게 됩니다.

마지막 사건으로는 스스로 여제가 된 사건입니다. 여제가 된 뒤 무후의 업적을 간략히 개관해 볼까요?

4. <주> 제국의 건설

측천무후가 새로운 칭호로 건국한 <주>나라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의 고대 <주나라>를 뜻합니다. 이것은 고대 주나라의 이상으로 돌아가서 주나라의 제도를 통한 이상적 국가 수립을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국호입니다.

고대 주나라의 이상적인 체제들을 역사에서는 <주례체제>라고 부릅니다. 측천무후가 생각한 고대 주나라의 주례체제의 핵심은 정전제를 이상으로 하는 <경자유전 : 농자짓는 자가 토지를 가지는 것이 옳다> 이념의 토지공유제도, 국왕을 중심으로 신료들과 합의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합좌제도> 등등의 이상적인 이념들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의 최초의 황제로서 스스로를 <황제>라 부릅니다. 따라서 측천무후가 아닌 <무측천>이 맞는 용어겠네요. 그녀의 새로운 나라 건국으로 당제국은 일시 중지되고, 당의 수도이자 관롱집단, 개국공신들의 중심지인 장안대신 산동의 구귀족 중심지인 낙양이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낙양은 이제 중국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개국공신에 대한 특혜를 대부분 없애 버리고,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합니다. 즉, 중국 역사상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확대된 것이 바로 이 <주>나라 때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법장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를 채택하여 국가주의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불교로서 국가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실제, 당 건국시기부터 건국이념은 구겸지의 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측천무후기에는 도교가 탄압받고 불교가 융성하게 됩니다.

실제, 측천무후기에는 당 건설 이후 확대된 영토와 안정된 사회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아주 크게 경제력이 급상승한 시기입니다. 농업은 발전하였고, 이미 건설된 수나라 때의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이 서로 원할하게 교차 수송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혈맥이 뚤리고 건강한 피들이 온 몸을 돌던 시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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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5. 무후의 꿈을 꾸는 자들이 등장하다.

무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중국 대륙을 호령한 여걸중의 여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후 말년에는 상황에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먼저 중종의 왕비인 위후와 그 딸 안락공주는 또 다른 <무후>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위후와 안락공주는 남편이고 아버지인 중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또 다른 여제가 되어 여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측천무후와 같은 정치적 지략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와 대립하다가 태평공주 세력에게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태평공주는 조카인 예종과 함께 그녀들을 제거하였지만, 나중에 당 현종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여인천하는 끝나고 맙니다. 당 현종은 무후가 남긴 유산들을 가지고 당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당 현종 후반에는 그 유산들을 모두 탕진하여 당 제국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현종 때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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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건릉 앞 석상>

6. 역사는 여자들의 세상을 여화의 난이라 적다.

중국 전통 역사에서는 측천무후와 같은 여걸들의 평가가 아주 부정적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한 남존여비 사상은 여자들을 비하함으로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지배 사관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남성들의 잘못된 업적, 국가적인 제도상의 미비점들을 여자로 인한 문제로 만들어, 이것을 <교훈으로서의 역사>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로 하, 은, 주나라의 멸망을 달기, 포사 등 미녀들 때문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주색>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달기가 국가를 망하게 하기 위해 <미녀와 함께 술로 담근 연못에서 마시고 놀며, 고기를 걸어놓은 나무에서 배를 채운다>는 주지육림의 이야기도 여자의 미색을 조심하라는 교훈이고, 포사가 <웃지 않는 미녀>가 되어 왕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여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나라의 시조 이연이 새로운 국가를 새운 이야기도 수양제의 후궁과의 연정 문제였다고 하거나,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이 동생의 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측천무후가 등장한 것도 고종이 그녀의 여색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위후와 안락공주가 무후의 뒤를 이어 여인천하를 만들려고 한 것을 독한 여자들의 쓸데없는 욕심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현종의 몰락을 양귀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당나라의 역사에는 여자의 여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의 역사를 기록한 송나라가 철저한 유교중심의 사대부 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실제 무후의 시기에는 중국 역사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개국공신등의 구세력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과거 관료들이 등장하여 중국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사회로 정착되던 시기였습니다. 실제, 과거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로 이 무후기이니까요.

그러나, 무후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국 사회는 더욱 더 급격히 보수화되어 갑니다. 당나라 하면 떠오르는 개방주의적, 귀족주의적 성격의 국가는 태종기부터 무후 전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무후 사후, 중국 당나라에서는 북방적인 진보성은 사라져가고 점차 보수적이면서 전통 중화주의적인 사회로 급변합니다. 특히, 현종 후반기 탈라스 전투의 패배, 안사의 난 등이 발생하면서 더욱 사회는 경직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당 현종의 시기와 양귀비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무후 이후 전개된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이자, 당의 몰락기가 동시에 보여지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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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 측천무후의 릉과 고종의 릉>
     <우 : 측천무후의 이름이 새겨지 있지 않은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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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제국은 중국 왕조인가, 북방 왕조인가?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건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중국 수나라를 대운하라는 키워드로 한번 살펴보았죠? 당은 그 수나라의 건국 이념과 제도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실제, 수나라와 당나라는 유사성이 참 많습니다. 앞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앞 왕조와 거의 유사한 체제를 가지고 시작하다니... 이유가 뭘까요?

1. 당이 과연 중국 왕조인가?

사실 5호 16국 시대 말기 북주에서 시작되는 지배집단은 당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관롱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서 서위 - 수 - 당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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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이란,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이단아>입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방에서 넘어온 오랑캐도 아닙니다. 이들의 핏줄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관롱집단은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북위 말기부터 서위, 북주를 거치는 동안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의협집단에서 출발했으니까요.

북위를 멸망시키고, 동위, 서위로 중국 북조가 분열되었을 때 서위의 우문태 장군은 서방 중심지로 위수지역의 관중 지방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문태 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강력한 군부가 필요했는데, 이 때 관중지방에서 뭉친 협객들이 바로 관롱집단입니다. 보통 <서위 8주국과 그 후손들, 서위 12수호신>이라 불린 장군들이지요. 실제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이 관롱집단출신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관중지방이 원래 선비족의 본거지로서 선비족과 연결되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북위가 처음 나라를 개창하고 북조를 통일하였을 때, 이 관중지방에 많은 선비족들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중국화되어가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이 관중지방의 선비족들은 한인들과 어울려 남겨 되었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선비족처럼 귀족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서방을 지키는 관리나 향리, 또는 장원 소유자가 되어 지방의 실세가 되었죠.

서위 멸망 후 북주의 중심지가 위수지역이 되자, 북주 총관 양견 등 관롱집단의 인사들이 대거 관료군화 되어 기용됩니다. 양견이 수를 세우자 관롱집단은 건국공신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 관롱집단은 결국 귀족이나 호족도 아니고, 화북의 북방민족도 아니고, 순수한 중국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관중이라는 지역을 매개로 뭉친 의협집단으로서 혈연적 측면은 상당히 약한 집단입니다. 실제, 수나라의 마지막 왕인 양제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모두 관롱집단의 협객 또는 무인 집안으로서 이 둘이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즉, 수와 당의 교체는 어마어마한 왕조의 교체라기 보다, 수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안 관롱집단들이 왕조 교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또, 이 관롱집단의 성격상, 수와 당 제국이 과연 순수한 중국인의 제국인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남조의 한인, 북조의 이민족 사이에서 통일한 수는 북조를 중심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 중국에는 한인, 북방인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수, 당의 중국 왕조 건설은 핏줄상의 중국왕조라기 보다는, 건국 지역 및 건국 이념상의 중국왕조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강좌중국사나, 중국사개론, 동양사개론을 보면 이런 식으로 정리해 놓고 있더군요.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후 북위 이래 선비족들은 한인화되어 혼혈이 증가하였다. 관롱집단도 결국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집단으로서, 장안으로 중심으로 중국식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2. 당의 건국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상

그럼 당 건국까지 중국 남북관계를 간단히 볼까요? 순수한 한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됩니다. 보통 중국 은나라는 천명사상을 가진 동이계통의 민족이 세웠다고 하며, 이 은을 물리친 나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처음으로 보여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강 이북까지를 순수한 중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의 험한 지역을 당시의 석기로 개간할 수 없어서 미개발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 중국의 중화란, 개간이 가능한 황하 - 위수 동쪽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상호 항쟁이 가열되고 금속기가 등장하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의 진이 통일하면서 진시황 때의 중화 개념은 서방 관중지방, 남부 양자강 지방까지로 확대됩니다. 진시황은 북방문화권의 패자인 흉노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북방문화권을 중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 문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을 이야기하면서 문화권의 기준을 농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농경문화권 보다 북방 문화권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5호 16국시대, 인더스 문명의 파괴, 징기스칸의 원정, 게르만의 이동 등등 흉노를 비릇한 북방 문화권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과서에 이 북방 민족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쉽군요.(날 잡아서 북방 민족 변천사를 한번 정리해봐야 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진한시대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만리장성 등 경계가 확실해 지면서, 중화족과 북방족의 항쟁은 천년보다 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한무제 때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중화족이 흉노정벌을 통해 북방족을 밀어내면서 강력한 중화질서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한나라 전체를 걸쳐 북방 민족은 서서히 중국 내부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래 중국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북방 민족들을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북부를 북방족이 차지하면서 <호한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호한이란, 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한다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호한체제를 종식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자가 수문제입니다. 문제의 아들 양지는 다시 중국의 천자임을 이념적으로 내비치며 북방에 대한 공격과 고구려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부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남북조, 유연, 돌궐, 흉노, 고구려 등 다원적 질서에서 중국 왕조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개편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에서는 마지막 원정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체제 전환에 실패하고 말죠.

당나라는 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확실히 중화족이 우위에 서는 세계질서체제로 국가체제를 개편합니다. 즉, 외부민족에 대한 봉건제도와 조공체제를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3. 당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세계국가의 추구

당나라를 창업한 당고조 이연은 사실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주 8주국의 8대신으로서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힌 집단의 후손이었습니다. 또 당의 건국자 이연과 수양제도 이종형제입니다.

여기서 서위 8주국의 대신들이란? 서위 8주국은 서위의 창업자인 우문태와 당시 실력자인 당나라 시조부 이호를 중심으로 연결된 집단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유명한 집안은 독고씨의 독고신은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을 북주의 왕 명제의 왕비, 수문제의 황후, 당시조부 이연의 부인으로 보내어 모든 가문들을 친인척 관계로 얽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시조 이연은 사촌은 수의 양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반란 진압도중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배신을 때려 국가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던 <먼나라와는 일단 친하고, 가까운 지역부터 치고 들어간다>는 <원교근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연의 아들인 당의 태종 이세민은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 당태종, 조선의 태종 등등 살육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이 국가를 정말 잘 다스렸다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정관의 치>라고 부를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죠. 자신이 죽인 형 이건성의 신하인 위징을 심복으로 등용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사에 적힌 이세민과 관련된 미담 중에 사형수들을 풀어준 미담도 있습니다. 이세민이 390여명의 사형수들을 1년간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사형수들이 1년 뒤 모두 돌아오자 이세민이 감동을 받아서 이들 사형수들을 모두 방면해 준 것입니다. 이세민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일화이지요. 그러나 구양수의 <종수론>을 보면, 이세민이 사형수들에게 1년뒤 돌아와야 모두 방면한다는 약속을 모두 한 뒤, 세상을 속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이 이세민 시기의 중국은 그동안의 호한체제를 버리고 중화 중심의 세계주의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인 방현령과 자신이 죽인 형의 심복인 위징에게 나라의 경영 방략을 물었습니다.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이 중요하므로 창업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업론을 말하였고, 위징은 <창업도 중요하나, 창업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럽다>라는 <수성지난론>을 말합니다. 이세민은 수성지난론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이세민은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주의>를 실시한 왕으로서 신하들과의 국정 운영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유명한 <정관정요>입니다. 이 책은 후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국주와 신하의 유교윤리, 정치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태종기의 <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의 내용을 볼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호한체제를 넘어서서 중화제국의 세계화 기반>을 닦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이세민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모든 유목민의 군장으로서 아시아의 왕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천가한이라고 부릅니다. <한>이란 징기스칸의 칸, 흉노의 선우와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신 스스로가 <천가한>이 된 이세민은 직접 주변 민족들을 정복한 후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중국 지방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세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지역은 <부>라 부르고, 지방의 중요지역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이민족 지역을 정복한 후 <도호부>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 통일기에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등이 당나라에 의해 생기죠? 도호부는 이민족 지방의 정복, 도독부는 당의 직할지 정복을 뜻합니다.

즉, 당태종의 업적은 주변 이민족을 철저히 중국에 끌어들이는 정책입니다. 정복사업을 끊임없이 떠나고, 고구려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은 스스로 칸으로 추대받는 정책이지요.

특히, 정복한 지역은 중국이 직할지로 편제하지 않고, 도호부로 편제하여 제한적으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지역 추장보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자치의 대가로 그 지역 추방은 중국을 도와 다른 민족 정벌을 떠나야 하죠. 이렇게 오랑캐에게 자유를 주어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것을 역사에서는 <이이제이>라고 부르죠.

<기미정책>으로 중국에 협조하게 된 민족들은 중국과 봉건제도의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이 왕, 오랑캐족은 신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하국가는 중국에 매년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대외관계를 <봉건질서에 입각한 조공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기미정책과 이이제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2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첫째는 태종 때 있었던 일로서 서돌궐과 동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서돌궐을 지원하면서 동돌궐을 무너뜨린 정책입니다. 돌궐의 내분은 북방에서 당나라에 맞설 나라가 백년이상 사라져 버렸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수백년간 동북아시아의 상권을 지배해온 국가를 무너뜨림으로서 대동강부터 북방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를 중국이 장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라가 삼국통일 당시 신라에 요구한 것은 대동강부터 이북을 당에 넘기라는 조항이었고, 신라는 아주 착실히 그 조항을 이행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대한 동방무역권이 당나라에 넘어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당에서는 이 무역로를 이용하여 거대한 동방이익을 차지합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 남해, 중국을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통하게 되는데 이 무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차지한 자가 바로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장보고>입니다.

3. 고종기의 중화제국의 확장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을 뒤이어 손쉽게 세계제국 건설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 고종기의 업적을 한번 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도호부들이 당나라의 6도호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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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기 당나라 영토는 보통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 전성기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점령한 지역을 표시해보죠.

동부 : 한반도 북부 점령(백제, 고구려 멸망)

서부 : 중앙아시아 진출,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배(천산남로의 도시국가 경략)

납부 :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

북보 : 시베리아 남부 진출

지금 이 지도를 외우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만큼의 영토를 당이 차지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기미정책>에 의해 당에 동화되었다는 점이지요. 당은 동화된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의도적으로 전파합니다. 또는 한반도와 같이 이미 문화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당의 문화체계가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보통 한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파된 한자, 율령, 불교, 유교 등의 중국 사상이 문화권 전체에 더 크게 파급된 시기가 이 시기지요.

다음 장에서는 당나라 2번째 이야기로 당나라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를 한번 다뤄 보로록 하겠습니다. 측천무후와 양귀비 등등 당에서의 여걸 이야기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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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당서

《당서》는 당고조(唐高祖)의 건국(618)에서부터 애제(哀帝)의 망국(907)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이다. 처음에는 단지 《당서》로 이룩하였지만,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하였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로 나누어졌다.

《구당서》는 200권으로 되어 있는데, 당나라 멸망 직후의 사료가 부족하여 후반부가 부실하다. 전반부도 여러 사료에서 대강 발췌한 것이라 체제에 일관성은 없다. 그러나 당나라 때의 원사료의 문장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신당서》는 225권으로 되어 있는데, 송나라 때 《구당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한 것도 많다. 표(表)가 많은 것도 특징이고, 처음으로 병지(兵志) ·선거지(選擧志)를 갖추었다. 문장은 당시 중시되던 고문으로 간결하게 기술하여, 정사 편찬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원사료의 문체까지 고치고, 간략이 지나쳐 사료적 가치는 구당서에 비해 떨어진다

《구당서》는 940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945년에 완성하였다. 장소원(張昭遠) ·가위(賈緯) ·조희(趙熙) 등이 편찬하고, 조영(趙瑩)이 감수(監修)하고, 유후가 일을 총괄하였다. <본기(本紀)>는 고조(高祖) 1권, 태종(太宗) 2권, 고종(高宗) 2권, 측천무후(則天武后) 1권, 중종(中宗) 및 예종(睿宗) 1권, 현종(玄宗) 2권, 숙종(肅宗) 1권, 대종(代宗) 1권, 덕종(德宗) 2권, 순종(順宗) 및 헌종 상기(憲宗上紀) 1권, 헌종 하기 1권, 목종(穆宗) 1권, 경종(敬宗) 및 문종 상 ·하기(文宗上下紀) 1권, 무종(武宗) 및 선종(宣宗) 1권, 의종(懿宗) 및 희종(僖宗) 1권, 소종(昭宗) 및 애종(哀宗) 1권을 합쳐서 20권, <지(志)>는 예의지(禮儀志) 7권, 음악지(音樂志) 4권, 역지(曆志) 3권, 천문지(天文志) 2권, 오행지(五行志) 1권, 지리지(地理志) 4권, 직관지(職官志) 3권, 여복지(輿服志) 1권, 경적지(經籍志) 2권, 식화지(食貨志) 2권, 형법지(刑法志) 1권을 합쳐서 30권, <열전(列傳)>은 후비(后妃) 2권, 제제자(諸帝子) 8권, 제신(諸臣) 122권, 외척(外戚) 1권, 환관(宦官) 1권, 양리(良吏) 1권, 혹리(酷吏) 1권, 충의(忠義) 1권, 효우(孝友) 1권, 유학(儒學) 1권, 문원(文苑) 1권, 방기(方伎) 1권, 은일(隱逸) 1권, 열녀(烈女) 1권, 돌궐(突厥) 1권, 회흘(回紇) 1권, 토번(吐蕃) 1권, 남만(南蠻) 및 서남만(西南蠻) 1권, 서융(西戎) 1권, 동이(東夷) 1권, 북적(北狄) 1권을 합쳐서 150권으로, 총계 200권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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