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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겸

이자겸의 난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이자겸의 난 이자겸이 다른 성씨가 비(妃)가 되어 권력과 총애가 나뉘어질까 두려워하여 셋째 딸을 왕비로 바쳤으며, 넷째 딸도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자겸을 제거하고자 신하들을 불러 논의하였으나, 이자겸의 심복이었던 척준경이 화가 나서 칼을 빼어 들고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쏘면서 공격을 하니 화살이 왕 앞에까지 날라 왔다. 밤에 왕이 산호정까지 도망을 하였는데 따라오는 자들은 10여인에 불과하였다. 왕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글을 지어 자겸에게 선위(禪位)할 것을 청하였다. 이자겸의 난, 고려사 더보기
고려의 문벌 귀족 관련 사료 고려사 학습 사료 모음 고려의 문벌 귀족 관련 사료 (가) 왕 16년 12월 5품 이상 관리의 아들 에게 음직을 주었다. (나) 양반 6품 이상 관리의 자손 중 한 명을 입사 (처옴 벼슬 자리에 나감)하도륵 하였다. 선거지 (다) 이자겸은 그 족속을 요직에 널리 앉히고, 관작를 팔고, 스스로 국공이 되어 그에 대한 대우를 왕태자와 같게 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져 바치는 믈컨이 넘치게 모여드니, 썩어저 버리는 고기가 항상 수만 근이었다. 이자겸 (라) 김돈중이 아우 김돈시와 함께 아버지 김부식이 세운 관란사를 중수하고 왕을 위해 복올 비는 것이라고 소문을 내었다. 왕이 김돈중 등에게 말하기를 ‘듣컨데 경들이 과인올 위해 복올 빈다고 하니 매우 가상하다 장차 가저 보겠노라.'하였다. 김돈중 등이 또 .. 더보기
이자겸의 난 -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다 이자겸의 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게 되어 귀족사회 붕괴를 촉진시키다 ." 고려 귀족사회는 문종대를 전후하여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상호대립하는 양상이 심화되어갔다. 그러한 귀족세력 중에 경원이씨는 문종부터 인종 때까지 80여 년 간 계속 외척으로서 강력한 세력을 굳혀오고 있었는데, 이자겸은 이러한 경원이씨 가문의 출신이었다. 1094년 문종의 아들인 선종이 죽고 병약하고 11세밖에 안 된 어린 나이의 헌종이 즉위했다. 이때 경원이씨 출신인 이자의(李資義)는 자신의 여동생인 원신궁주(元信宮主)와 선종의 사이에서 태어난 한산후(漢山侯)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거사를 도모했으나 왕의 숙부인 계림공(鷄林公:숙종)이 이자의 일파를 주살하고 중서령이 되었다가 그해 11월에 헌종의 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