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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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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퀴즈

  1. 모든 인간의 인연은 시간과 공간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는 불교의 이론. 모든 생명과 만남에는 뜻이 있으며, 윤회를 통해 만남은 계속 이루어진다.
  2. 고려, 조선시대의 지배층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다처제도. 법적으로는 정부인 외의 부인들을 첩으로 간주하여 신분상의 차별이 있었다. 1915년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3. 이황의 14대손. 본명은 이원록. 의열단 출신으로 베이징 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7년,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으며, 청포도, 절정과 같은 유명한 시를 남겼다. 1943년 독립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4. 현재 일본의 천황
  5.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았던 절세미인. 그녀의 미색이 나라를 저물게 했다는 뜻에서, 경국지색이란 말을 사용하였다.

세로퀴즈

  1.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만든 제도. 독립자금을 국외로 송금할 때도 이용하였다.
  2. 인도의 불교를, 중국식 불교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 불교의 이론을 중국 고유의 도교 이론으로 해석하는 격의불교를 바탕으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3. 호는 퇴계. 중국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잡았으며,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4. 자치통감의 저자. 송나라 구법당의 보수주의자들을 이끌었던 인물로서, 신법당의 왕안석과 대립하면서, 붕당정치를 이끌어갔다.
  5. 조선시대 이지함이 만든 운수책. 서민들을 위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실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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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퀴즈 (2010. 5. 15)

오늘의 출제 범위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그는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전국을 주(州)로 나눠 새롭게 편재했다. 주 아래의 기본 행정단위를 현(縣)으로 나누어 현 단위로 세금을 걷는 것이다.

세금은 공납(공 : 貢)과 부역(부 : 賦)으로 나누어 걷음으로서 중간에 호족들이 세금에 개입할 일을 없애고 국가 기관이 세금을 전담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주현공부법(州縣貢賦法) 이다.

 

1. 위의 국왕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실시 또는 발표했던 것들을 3개 더 골라보세요.(정답 2개)
① 훈요 10조            ② 노비 안검법            ③ 사심관 제도
④ 과거제도             ⑤ 공복 제도                ⑥ 12목 설치
⑦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설치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장보고가 당에서 무령군소장을 지내다 신라로 귀국한 뒤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로 신라, 당, 일본 사이의 무역을 독점하였다. 장보고는 원할한 무역을 위해 당에 신라인 마을(신라방), 신라인의 절(신라원), 신라인의 관청(신라소)를 지원하였다.

(1) ___________ 은 당의 산둥반도에 세운 절이다. 이곳은 신라인 마을에 세운 신라인의 절로서 장보고가 당과 본국의 연락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곳이었다. 이곳은 해외포교를 하면서도, 신리인들의 법회의식을 따라 강경회를 열었다.

특히, 여름에는 금광경, 겨울에는 (2) __________을 낭송하였다.

 

2. (1)에 들어갈 절의 이름에서 추론하여 (2)에 들어갈 법회의 <경론>이 무엇인지 골라보세요.
① 인왕경                ② 화엄경                ③ 신라경
④ 삼론경                ⑤ 법화경

 

3. 다음 표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 표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소수 서원이라는 사액 서원이 되었다.
② 율곡 이이와 관련된 향약은 해주 향약이다.
③ 중종 때 조광조는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하였다.
④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관련하여 갑자 사화가 발생하였다.
⑤ 이황은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4.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이 단체는 우리 나라 근대 연극의 시초가 되는 단체였다.

이 단체의 이름은 땅(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하늘(달 : 이상)을 쫒는다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박승희가 제안하여 만들어진 이 단체는 1923년 7월 조선극장에서 1회 공연을 시작하였다. 외국의 유명한 연극 뿐 아니라 창작극까지 무대에 올린 <신파>에서 벗어난 신극운동이다.

원래, <신파극>는 이름 그대로 <새로운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온 신파극은, 단순한 <멜로> 수준에 머물렀다. 박승희는 일본식 신파 뿐 아니라, 서구의 연극을 직접 국민에게 전달하면서 <희극>을 창작하고, 창극을 연극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20년대, 활약했던 이 단체는, 1946년 재건되기도 했지만, 부족한 예산 문제로 곧 사라지고 만다.

 

4. 지문에서 제시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극단> 이름은 무엇일까요?
① 극예술 연구회                ② 발명 학회                ③ 명토회
④ 토월회                           ⑤ 천지회

 

5. 다음은 국보 179호인 <_______박지연어문편병> 이다. 

이러한 자기 공예를 _________ 라고 한다.

이는 고려 청자에서 조선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려말, 조선초 유행했던 회청색의 자기이다.

제작 방법이나 재료는 고려 청자와 같지만, 겉에 백토를 한 번 덧발라서 다시 구웠기 때문에 회청색을 띄고 있다.

청자에 백색 흙을 바른 이 자기는 15세기 유행했지만, 16세기가 되면 고급스럽고 하얀 조선 백자가 유행하면서 점차 사라져 갔다.

 

5. 위와 같은 <사기>를 무엇이라고 하는지 4글자로 적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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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은 사회 복지 운동가였다.

1. 자연의 모든 것이 공부였던 천재

이지함 하면 <토정비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반인들은 그가 특출한 예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토정비결의 이지함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지함은 독특한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조선 시대를 살아간 일종의 <기인>이었다.

일단,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 <실존 인물이 아니다>라는 오해를 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토정비결이란 책에는 저자가 나와있지 않다. 토정비결이 운수와 풍수 등에 관련된 책이라는 걸 감안해볼 때, 다른 어떤 풍속서에도 이지함의 이름이 나와있지 않은 점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지함(1517-1578)은 당당히 역사 속을 살아간 인물이며, 그의 인생 행적들을 추적해 볼때 토정비결을 그가 저술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그가 토정비결을 적었는지 안 적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단지, 인간 이지함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이단아였으며, 개혁적 사상을 가진 인물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지함은 고려말 유명한 학자였던 이색의 6대손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직에 있었다. 그는 중종 때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는데, 14살때 아버지가 16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시묘살이를 시작하였다.

이지함은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머리도 좋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밤에도 책에 빠져 있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은 지함의 눈이 나빠질까봐 등불의 기름을 주지 않았다. 책을 읽고 싶은 지함은 장작에 불을 지펴 책을 보았다. 한번 책에 빠지면 끝까지 읽었다. 장작마저 사람들이 치워 버리자, 이번엔 직접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워 공부를 하였다. 연기에 숨이 막히고 컥컥 거리면서도 꼭 책을 읽어야 했던 것이다.

시묘살이를 끝내고 서울에 온 이지함은 왕족인 이성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더욱 공부에 매진하였다. 사람들은 지함이 과거를 단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그는 출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필요한 사서 삼경이나, 제자백가, 각종 경서 들을 통달했지만, 그는 과거 시험을 보지 않았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도 스승조차 없었다. 책이 그의 스승이었고, 그는 하고 싶은 공부를 자유롭게 하였다. 양반들이 꺼려하는 음악과 산수, 의학, 천문과 지리학 등의 책도 잡으면 손에서 놓질 않았다.

책에서 진리를 구하던 청년 이지함은 직접 자신의 공부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삿갓을 쓰고 전국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역사와 문화 유적지를 따라 돌아다녔다. 유적 탐방은 문화와 지리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준다. 이곳 저곳의 풍속과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유통되는 물자들과 지리적 여건에 따른 생활 양식들도 보게 된다. 인간과 지리를 접하고, 민중들의 삶을 직접 바라보면서 토정은 자신의 학문이 어떻게 쓰여야 할지 본격적으로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전국 곳곳마다 비참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백성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2. 기인과 기인의 만남.

지함이 살았던 이 당시 까지의 조선은 유교적 문화와 함께 불교, 도교의 사상도 용인되던 시기였다. 율곡은 지함보다 19살이나 아래였으며, 이황의 성리철학도 막 정리되어가던 시기였다.

지함은 중국의 죽림칠현과 같이 자연을 돌면서 풍류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겼다. 자연 속을 여행하다가 서울에 올 때면,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어울려 같이 풍류를 즐기곤 했다.

당대 이율곡은 지함보다 후학이었기에 토정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다. 토정은 딱딱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풍류와 농담, 익살 같은 표현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표현에는 정치적 모순과 사회 비판에 대한 정확한 칼날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인 성혼, 조식, 이항복 등은 토정과 토론하면서 그의 박학함에 놀라곤 하였다.

훗날, 조식은 마포에서 빈민과 생활하는 이지함을 직접 찾아와 이야기하곤 이렇게 말하였다. 

<깨끗한 거울과 같은 마음에 청렴하고 욕심이 적고 그 행실이 바르게 서 있어서 세상에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이다.>

실제 이지함은, 고대 청담 사상가들이 꿈꾸어왔던 도사의 수련을 하기도 하였다. 엄동설한에 가벼운 옷 한벌을 걸치고 버티는 수련이라던가, 오랫동안 서서 명상을 한다던가 하는 기이한 일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 학문이란, 유교만을 고집할 것이 못되었다.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이 곧 학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토론을 하며 학문의 범위를 넓혀가던 지함은, 당시 이름이 높던 <서경덕>을 찾아 개성으로 떠났다. 서경덕은 정치와 담을 쌓고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던 유생이었기에 지함의 스타일과 딱 맞아 떨어졌다.

서경덕과 성혼, 이율곡의 철학은 이황과 달리 주기론 철학이었다. 당시 주기론은 이황의 주리론과 달리, 다른 학문에 포용력이 있었다. 이황은 주자의 철학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주기론자들은 주자의 철학을 현실에 맞게 응용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

훗날, 이율곡이 <임진왜란을 대비해 10만 양병을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는데, 이것 역시 이지함이 풍수지리와 천문지리를 토대로 예언한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유교적 철학을 인정한 결과였다.

이지함은 서경덕의 제자로서 더 넓은 공부를 하려고 했다. 서경덕의 이기일원론은 역학, 천문학, 지리학, 수학 등 인접학문을 총정리하여 구성된 것이었기에, 이지함 역시 스승의 영향을 받아 여러 학문에 더욱 능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이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 역시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과거시험에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말을 적어 제출하는 등 기인의 행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왜 과거 시험에 흥미를 잃었을까?

3. 서경덕을 떠났으나 정치에도 관심이 없는....

어느 날, 이지함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집 주인의 부인이 지함을 유혹하려고 했다. 지함은 그 부인을 달래다가 지쳐 결국 그 부인에게 인륜을 설명하였다. 집주인은 그 모습을 보고 서경덕에게 사실을 말하자, 서경덕은 지함의 공부는 이미 인륜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 경지라고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이 없으니, 돌아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게.>

서경덕은 스승을 떠나게 되었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높은 학식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정치에 대한 회의 때문일 것이다.

알려진 바로는 친구인 안명세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안명세는 사관으로서 당대 큰 사건인 을사사화를 바탕으로 <시정기>를 저술한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집권자들은 그 기록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안명세를 죽여 버렸다. 권력이란 게 얼마나 허무한 것이며, 권력을 잡은 자들이 얼마나 비열한 사람들인가?

그는 죽장에 삿갓을 쓰고 자연을 벗삼아 사람들의 세상으로 떠나 버린다. 북쪽의 오지에서 남쪽의 제주도까지 그는 전국 방방 곳곳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옷차림은 정말 남루하였다. 천민이나 상민들이 쓴 패랭이 갓을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옷은 누더기처럼 다 떨어진 도포자락을 걸치고 다녔다.

당시에 제주도는 어떻게 갈수 있었을까? 당시 기술로 제주도를 혼자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작은 조각배를 만들어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들을 달아두어 균형과 함께 부력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그 배를 이용하여 제주도를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가 45살이 되었을 때, 국가에서는 지함의 가문을 고려하여 그에게 포천현감 자리를 주었다. 지함을 알고 있던 학자들이 적극적으로 천거한 것이다. 일종의 특별 채용이자, 어찌보면 낙하산일 수 있었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출세의 기회였다.

그는 현감이 되어서도 걸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향리들의 접대는 모두 거부했고, 평소 식사도 잡곡밥과 소금국을 먹었다. 백성들의 음식과 똑같거나 못해야 그들의 삶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 지함의 철학이었다.

지함은 고을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낚시대와 그물을 보내달라고 조정에 건의하였다. 물고기를 잡아 경비를 마련하면 백성들의 세금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의견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현감 자리 조차 버리고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4. 빈민의 삶을 이해한 방랑자

지함은 오랜 여행을 통해 빈민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하였다. 그는 하층민들 역시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기본 전제를 신념으로 삼은 것 같다.

신혼 다음날 추위에 떨고 있는 부랑아를 위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떠난 일화도 있다. 노예의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하면 자신이 아끼던 책을 주고 그 아이의 부역을 빼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일까? 그의 제자 중에는 상인과 노예들도 꽤 많았다.

지함은 어느 날, 한적한 섬에 들어가 박을 심었다. 그 박을 팔아 곡식을 사니 그 곡식이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껏 먹을 만큼 많았다. 지함은 곡식을 마포로 가져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대가로 빈민촌 한가운데 조그만 땅을 얻었다. 빈민들은 그가 빈민촌에 흙으로 쌓은 정자에서 산다고 하여 <토정>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왜 하필, 박을 팔아 곡식을 만들어 빈민을 도왔을까?

그것은 빈민들에게 단순히 곡식을 나눠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토정은 자신이 터득한 장사방법을 빈민들이 볼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주민들에게 전수해 주려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유통경제는 포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지금처럼 고속도로나 지하철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강 자체가 물자 운송의 핵심이었다. 배를 통해 지방의 산물과 서울의 시장이 만나는 곳이었으며, 유통을 통한 이익은 빈민들이 구걸해서 얻는 이익보다도 막대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상업에 손을 댄다는 것은 당시 큰 수치였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란 사실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조선 초기에 등장한 양반 계급 출신의 상인이라고 할까?

5. 통상무역론을 주장한 혁신적인 사상가

57살의 늦은 나이, 그는 드디어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된다. 정치를 혐오했던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들어선 것은, 자신의 꿈을 현실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사화의 시대가 끝났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선조가 즉위하면서 종말을 맞이했다. 서경덕, 성혼, 이율곡, 조식 계열의 학자들이 사림이라는 이름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이지함을 추천하였다.

이지함은 빈민을 위한 복지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국가에 많은 정책을 제시하였다.

그 핵심 사업은 부유층의 재산에서 좀더 많은 세금을 걷자는 것과 부유층의 부동산을 국유지로 설정하여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선조시기에는 조선 건국 세력인 훈구세력이 어느 정도 척결되었고, 그들의 불법 보유지를 국가가 환수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된 상태였다.

이지함이 생각한 것은,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었다. 산림과 해양은 지배층의 것이 아니라 국유 재산이 되어야 한다. 성리학의 왕토사상과 고대 정전법의 토지공유사상을 도입하면 쉽게 자원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토지와 바다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이다. 광산의 금, 은과 바다에서 나오는 수산자원은 막대한 부를 축척할 수 있다. 그 자원을 통해 국고가 충당하면 빈민들을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이지함은 <국제통상>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금, 은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 자체가 나아지지 않는다. 산림자원과 광업자원이 부족한 국가에 비싼 가격으로 자원을 팔아 무역체계를 확립하면 막대한 이익이 생간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섬에서 만든 박을 가지고, 섬사람들이 나눠 먹는건 비효율적이다. 넓은 시장에서 다양한 물자와 교역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지함의 이론은 당대 유럽의 <중상주의 정책>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6. 조선 시대 복지 사업의 선구자

이지함은 죽음을 앞둔 어느 순간, 고향은 충청도로 돌아와 아산 현감 자리를 맡았다. 그는 상인 신분의 친구들, 노예 신분의 제자들과 함께 중앙에서 원할하지 못했던 개혁을 실천에 옮겼다.

그가 생각한 빈민 구제 개혁안은 <걸인청>의 설립이었다. 국왕은 백성들을 하늘처럼 모셔야 한다. 그것이 성리학에서 말한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국왕을 생각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굶지 않고, 죽지 않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쌀 한바가지를 주는 것이 효율적인 것일까? 그것은 복지가 아니라 자선일 뿐이다. 진정한 복지는 백성들 스스로가 굶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철학으로 시작된 <걸인청> 사업은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사업과 연결되었다.

걸인들에게 먹고 잘 곳만 계속 제공해주면, 지원이 끊겼을 때 그들은 죽고 만다. 따라서 먹고 잘 곳보다 중요한 것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본 자금이다.

걸인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사를 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대여해주고, 값싼 이자를 거두어 들인다. 그 이자로 다른 이들에게 기술 교육을 시킨다. 기술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해당 기관에서 일을 하여 수입을 얻는다.

힘없고 늙은 노인들은 짚신을 만들거나, 작은 나무를 깎도록 한다. 관청에서 그것을 사서 판매한 후, 이들에게 쌀을 대가로 지급한다. 일하지 않고 구걸만 하는 자는 처형하지만, 일을 하겠다는 자에게는 최대한 협조하여 일자리를 마련해준다.

2008년 실업자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제대로 실시하지 못한 사회 사업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빈민들을 위한 이 사업을 순조롭게 추진하였고 성과도 얻었다. 문제는, 이지함이 현감으로 부임한지 1년도 되지 못하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는 마포의 토굴에서 <토정>으로 살아갈 때부터 시작했던, 빈민들을 위한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빈민들이 결혼날짜를 잡아달라던가, 좋은 일이 있을 지 점을 쳐달라고 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비결>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토정비결을 단순한 <운수책>, <점보는 책>으로 여기곤 한다. 만약 토정비결을 쓴 사람이 이지함 본인 맞다면, 이 책은 빈민들에게 삶의 위안을 주면서도, 일하지 않고 요행만 바라는 이들에게는 경고하기 위해 쓴 책이 아닐까?

토정비결은 좋은 말들이 많이 있다. 약 70% 정도는 좋은 운수가 적혀있다. 그러나, 30% 확률로 경계해야 할 운수들이 적혀있다. 즉, 희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좋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는 삶의 제시를 하면서도, 운에 의지하지 말고 노력해야 한다는 지함의 경고가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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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에 그려져 있는 이황, 북한에서는 반동분자로 평가받는다.

1. 성리학에 대한 북한 주체 사상식의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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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주체사상의 이념도 <마르크스 사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 철저하게 북한식 공신주의 사관으로 모든 역사를 바라보는 북한 역사학자들은 남한에서 1000원, 5000원권으로 쓰이는 유명한 성리학자인 이황과 이이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우리가 역사와 윤리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는 이황, 이이에 대한 평가와 북한의 평가는 상당히 다릅니다. 오히려 북한과 우리의 견해가 상당히 다른 반면, 남한과 일본의 견해가 더 비슷할 정도입니다. 그럼 한번 볼까요?

북한의 역사인식은 소위 말하는 <유물론적 사관>입니다. 유물론적 사관을 간략히 말하면, 모든 현상은 눈에 보이는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마르크스의 견해입니다. 사회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마르크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인간의 마음이 만드어 낸 허구라고 말했습니다.

예로, 신의 존재는 증명된 적이 없지만 인간들은 신을 믿죠? 특히 서구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신이란 인간이 자신의 불완전함과 우주에 대한 무지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삶의 어처구니 없는 불완전함을 인간식으로 해석하기에는 한계를 느껴 신이란 존재를 창조했다는 것이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물질, 즉 사회경제적 물질의 소유관계에 따라 발전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토지, 자본 등 눈에 보이는 경제 물질을 놓고,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자가 투쟁하면서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말했죠.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역사란, 눈에 보이는 물질(유물론)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 같은 존재(관념론)가 투쟁하는 역사이자, 물질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가 투쟁하는 역사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결국 완성되는 사회는 모든 물질을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소유하는 <공산주의 사회>인 것이죠.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의 철학 이념은 물질과 경제 기반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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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황은 유물론자가 아니라.

이러한 유물론 중심의 북한 철학은 역사의 주도층을 2가지로 분석합니다.

첫 번째는 관념론의 이념을 가진 자들로, 신이나 우주 법칙 등을 생각하는 비생산적인 계급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기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려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구질서를 유지하려는 인물들입니다.

두 번째는 유물론의 이념을 가진 자들로, 현실을 직시하고 경제 문제의 해결과 실제 삶에서의 평등한 가치를 찾으려는 자들이 있씁니다. 이들은 피지배계급인 백성을 생각하고 좀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생산력을 높이는 일에 주력하는 자들입니다. 인간이 생산의 주체이자 사회 변화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주체 사상을 가진 이들로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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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조선 성리학자들을 이 공식으로 이해합니다.

북한은 조선 시대 관념론을 이끌어 간 대표적인 학자는 이황이라고 규정합니다. 이황은 관념적인 주자성리학을 이끌어간 자로 규정합니다. 특히 이황은 아무런 사회적 개선책도 내 놓지 않고 윤리나 지배집단의 도덕정치만을 주장한 지배집단의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이황의 주리론적인 성리학을 관념론으로, 이후 조금 개방적인 주기론적 성리학은 조금 유물론에 근접한 학문으로 분류합니다. 이황에서 좀더 유물론적이고 현실론적으로 생각한 자가 바로 이이 등으로 이어지는 현실주의파들이었다고 말하죠.

이러한 관점은 철학을 관념론, 유물론으로 나누어 무리하게 분석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황의 업적이 어떤 것이든,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이황의 철학이 물질세계와는 관계없는 나태하고 보수주의적인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죠.

북한이 주체사상을 정리하면서 이황의 사상을 가장 반동적인 철학사상으로 규정하여 매도한 것은 북한 정권이 추구하는 핵심 사상이 <유물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이황이 주장한 사상 중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천성이 정해져있다는 <인성론>은 두고 두고 계급차별적 발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사실, 이황이 대표적인 표적이었기 때문에 비판받은 것이지, 북한에서는 성리학 자체를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리학의 왕도정치, 국왕과 신하의 공치주의 같은 이념은 백성들의 혁명과 무장봉기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공산주의 혁명 사상과는 맞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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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 역시 북한에서 좋은 취급을 받는 학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이의 십만양병설이나 현실개혁 주장 등은 유물론적인 성향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이황정도로 처절하게 규탄받지는 않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완성하였고, 일본에서는 성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황.... 북한에서는 이 성리학자를 가장 반동분자로 생각한다니.... 좀 의외이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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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8 - 전국시대 :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키다~

1.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키워드

일본의 전국시대는 단순한 무사들의 봉기 같은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시작된 근본적인 계기는 이전에 다루었던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에 창업을 하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혼란의 수습을 위한 해결책으로 슈고에게 토지에 대한 많은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원래 일본의 봉건제도에서 <슈고>는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행정관입니다. 토지에 대한 권리를 위임받고 토지 경작에 관여했던 직책은 <지토>였죠. 그러나 막부 최고 지도자인 쇼군이 막부의 울타리를 튼튼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슈고>에게 토지에서 절반의 세금을 걷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어려운 말로 병작반수라고 하죠.

슈고가 토지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영주(다이묘)와 같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면서 <슈고 다이묘>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이 슈고다이묘들이 점차 쇼군을 넘어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지기도 하였죠.

그 결과 1467년 발생한 슈고들의 반란을 기점으로 무로마치 막부는 무너집니다. 이 난을 <오닌의 난>이라고 하는데, 실력자들과 토지를 가진 세력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각각 자신의 지역을 독립국으로 만들어 버린 원인을 제공한 사건이죠.

오닌의 난으로 무력을 가진 자들은 약한 자들의 토지를 빼앗아 새롭게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새 시대의 다이묘들을 <신흥 다이묘>라고 부릅니다.

이 신흥 다이묘들과 군사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스스로 영토를 지키려는 자치 마을 등 일본 내 많은 세력들이 세력균형을 이루며 대치하는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이 시대가 전국시대입니다.

2.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다.

전국시대를 이끌어 간 각 지방의 대표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고 주변국을 통합하여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가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거나,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부국강병책과 제가백가들이 등장하죠? 신라말 고려초에 골품제와는 다른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죠? 그리고 지도자들이 그 새로운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었죠?

마찬가지의 개념입니다. 전국시대 일본의 지방 세력들은 분열된 시대를 이끌어가기 위한 주역으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개혁을 실시합니다.

전국시대의 각각 영주(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억압하고, 가신단을 통제하며 영지에 대한 확실한 경제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데 이 법을 <분국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내 땅에서는 내 법으로 통치할테니 누구도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있는 법이지요.

또 다이묘들이 국가를 경영하는 방략으로 중국에서 왕권강화에 기여한 이념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훗날 퇴계 이황 선생님이 일본 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도 일본 스스로 유학의 장점을 찾아 국가 권력과 군신관계 이념을 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지요.

일본 전국시대는 혼란기 같지만, 유학이 널리 보급되고 학교가 대대적으로 증가하게 된 획기적인 시기이기도 합니다.

3. 유럽의 신항로 개척과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다.

이러한 일본의 적극적 문물 수입에 불을 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서유럽 국가들의 <신항로 개척>이었죠. 보통 유럽말로 <대항해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멀고 먼 유럽인들이 일본에 넘어오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서아시아의 최강국 오스만 제국에 가로막혀 동방무역이 원할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은 인도의 문물과 특산물을 유럽에 가져오기 위해 아프리카를 뺑돌아 항로를 개척하였죠. 아메리카도 발견했구요.

그리고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믿는 강국들을 물리치기 위해 지구 반대편의 <하나님 나라>를 찾고 있었습니다. 유럽에서는 고대 하나님의 나라로서 찬란한 문명을 이끌었던 전설의 나라 <아틸란티스>를 찾는다던가, 이슬람을 물리칠 구원자인 <존 왕>이 사는 지구 반대편 기독교 국가를 찾기를 원했죠. 그래서 유럽인들이 일본에 왔을 때 새로운 문명을 가진 동쪽 끝의 국가(해가 뜨는 국가)라는 뜻으로 <지팡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1부는 아주 큰 거인들이 사는 나라, 2부는 아주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나오고 3부는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나라가 나옵니다. 이 걸리버 여행기의 3부에 나오는 나라로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가 바로 <지팡구>였고, 일본이었습니다. 따라서 걸리버 여행기 3부의 지도를 보면 한반도와 일본의 지도가 나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걸리버 여행기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반도 사이의 바다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6세기 동해바다를 일본과 서양이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 만하죠?

유럽 국가들 중에서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이 일본과 적극적으로 무역을 시도하였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들은 중국 화약과 화포술을 바탕으로 만든 대포를 일본에 전래하였죠. 당시 중국 대포의 제조법은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최무선이 염초(화약원료)만드는 기술 하나를 배우기 위해 생난리를 치다가 기술을 배워 일본 왜구를 크게 소탕하였죠. 일본은 대포와 총포의 주력 화술을 유럽에서 역수입한 것입니다.

신항로 개척기 카톨릭 국가인 에스파냐, 포르투갈은 영국, 네덜란드 같은 신교(개신교) 국가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방 선교에 주력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장들은 크리스트교와 카톨릭의 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give and take였던 것이죠.

4. 오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이에야스

일본의 전국시대 하면 중국의 삼국지 만큼 유명한 인물 3명이 등장하죠.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죠. 다른 인물들도 유명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 역사가 아닌 만큼 이 3명만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 등의 이야기는 나중에 시간나면 정리해 보죠.

이 중 전국시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사나이는 오다 노부나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하면 <천하포무 : 천하통일>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작은 영지를 가진 오와리의 노부나가는 동맹을 맺을 상대와 공격할 상대를 잘 찾아 행동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초기에 주변국인 미노와 친선을 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그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동맹을 맺고 미노를 공략하는 등 상황 판단이 빠른 인물이었죠.

노부나가의 가장 큰 장점은 시류를 잘 볼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식 총포를 도입하여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던 철포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식 소규모 전투가 아닌 화포를 이용한 전술은 노부나가의 든든한 성공 전략이었죠.

또 새로운 종교인 카톨릭을 적극적으로 일본에 도입합니다. 카톨릭의 도입은 포르투갈 등 서구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면서, 일본 고유의 기득권층인 불교세력을 철저하게 억압하는 효과를 가져왔죠.

노부나가는 서양식 화포로 토지 영주였던 승려 세력을 억압하였고, 혼란기를 틈타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실력있는 자들을 등용하는 <용병제도>를 도입하였죠. 노부나가의 전략은 통일을 위한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가신인 미츠히데의 배신으로 갑자기 죽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은 전국시대 통일을 앞둔 것이여서 그 파장이 큰 것이었습니다. 이 때 노부나가의 심복이었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츠히데를 죽이고,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를 앞세워 노부나가의 세력을 모두 끌어안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정식 계승자로서 전국시대의 <통일>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집권은 많은 골수 노부나가 추종자들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정책이었던 카톨릭 보호 정책을 폐기하고 카톨릭과 연관된 세력들을 탄압한다는 구실로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으로 조선을 공격하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전쟁을 통하여 막부 세력의 결속을 단단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자, 새로운 권력을 놓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때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유명한 전투의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식 쇼군이 되어 도쿠가와 가문의 에도 막부를 개창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인내한 자였습니다. 그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밑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60을 훨씬 넘긴 후였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최후의 승자는 이에야스였다는 것입니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는 이전과 달리 수도명을 막부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막부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쇼군의 자격으로 정치를 하였던 것에 비교해, 에도 막부는 수도에서 직접 중앙집권정치를 실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막부 자체가 수도에서 전국을 통괄하는 체제로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해지고 안정적인 막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에도막부는 일본 막부사상 가장 긴 시기를 지속한 막부입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에도 막부가 어떻게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유지했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다음 장의 키워드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과 사회통제정책>이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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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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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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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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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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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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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