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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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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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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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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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오승은 (예림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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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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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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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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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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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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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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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사 속 역사여행 10 - 불구대천의 어원과 고대의 <예 사상>

부모에 대한 예의가 첫 번째인 사회....

불구대천(不俱戴天)이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이야기를 정리한 <예기>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예기는 춘추전국시대부터 한나라까지 예(禮)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한 책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예>라는 것을 무척 중요시 하였는데, 이 예기는 <시경, 서경, 춘추, 주역>이라는 유명한 책과 함께 5경으로 불리는 책이죠.

다른 유명한 책들은 모두 시경, 서경 처럼 <경>자를 쓰지만, 예기는 <예>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각주(주석)을 달았다는 뜻에서 <예를 모아 기록한다는> 예기로 전해져 옵니다. 예기는 1권의 책이 아니라 예와 관련된 모든 문헌을 모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여러 파트에서 모은 책들을 다시 정리해서 쓴 경전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가면서 까지 예에 대한 책을 편찬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불구대천의 원수>라는 키워드로 풀어보도록 하죠.

불구대천 - 같은 하늘을 마주할 수 없는....

예기 곡례편에 나와있는 말을 한번볼까요?

자식된 자의 도리가 무엇인가?

겨울이 되면 부모님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여름이 되면 시원하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밤이 되면부모가 잘 주무시도록 해야 하며, 아침이 되면 문안을 드려야 할 것이다.

친구와 다투면 누가 부모에게 미칠지 모르니 다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중략)

부부간의 다툼은 부모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며,

형제간에 의가 상한다면 부모님에게 불효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효(孝)로부터 비롯하지 않는가?  (줃략)

아비의 원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무기를 늘 가지고 다녀 언제나 복수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친구의 원수는 나라를 같이 하여 살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불구대천이란, <같은 하늘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의 한자입니다.

예(禮) 란 무엇인가?

중국에서 <예>라는 것은, 원래 천자에게 <지배층>임을 증명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고대 중국의 이상국가라고 여겨졌던 주나라는 봉건제도가 있었죠. 봉건제도는 황제가 전 국토를 다스리되, 각 제후들을 지방의 번왕으로 임명하여 각 지역의 통치를 맡기는 제도였습니다. 또 각 제후들 역시 자신들의 신하(가신)들에게 자신의 땅 일부를 주는 대가로 충성을 요구하였죠.

지방의 유력한 제후들이 다스리는 가신집단이 <대부, 경, 사> 등의 신하였습니다. 그 신하들은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는데, 그 서약식을 <작>이라고 합니다. 그 서약을 받는 것을 <작위>를 받는다고 하죠. 그리고 그 서약을 할 수 있는 교양과 덕망을 <예>라고 합니다. 즉, <예>란, 지배층이 될 수 있도록 <작>을 받는 의식을 아는 것을 말하죠. <예>를 알고 행하며 <작>을 받아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합치면, <예의>가 되겠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대 중국에서는 <남작, 백작, 자작>과 같은 작위들이 있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도 많은데, 우리나라의 고려에서도 작위는 있었습니다. 토지를 받으면서 작위를 같이 받았죠.

작위는 관직과는 좀 다르네요. 관직이 자신의 주어진 위치라면, 작위는 자신의 도덕적 인품을 상징하면서, 자신의 영토에서 자신이 갖는 권위 비슷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라는 것에 대한 해석입니다. 원래 예라는 뜻은 윗사람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내용은 춘추시대를 통일한 진, 한 대에 바뀌게 됩니다. 특히, 한나라에서 <유교>를 국가사상으로 통일하면서 예는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의 으뜸은 효(孝)가 아닌가?

그럼 다시 <불구대천의 원수>로 돌아와보죠.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공자, 맹자, 순자 등 유가파가 등장했었습니다. 특히 <공자>는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함이 <가족윤리>가 파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죠.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 仁>인데, 이것은 사회적 관용과 가족간의 사랑을 한 글자에 압축시켜놓은 단어였습니다. 공자는 <인>이라는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을 찾기 위해서는 효도, 우애 등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것을 맹자가 국가윤리까지 확대하였죠. 맹자는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군주가 신하를 사랑하는 <덕치주의>가 곧, 평화의 시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가족윤리>였고, 가족윤리의 핵심은 곧 <부모>였습니다.

다시, 위에 적은 예기 <곡례편>을 보세요. 유학자들이 생각한 <예>는 군신관계,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 등에서 지켜야 할 윤리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 윤리로서 이것을 어긴 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된다고 여긴 것이죠.

유가에서의 살인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구대천의 원수는 죽여야 한다>는 이념은 왜 나왔을까요?

그건, 윤리를 지키기 위한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부모로부터 태어난 인간일것인데, 부모, 형제에 대한 윤리를 무시한 자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 형제, 군주, 부부 등에 관련된 것들은 법에 의해 왈가왈부할 내용이 아닙니다. 인간의 절대 윤리이므로, <도덕>에 의해 판단해야 할 것들이죠. 이것은 법과 상관없이 인간이기에 어기면 처벌해야 할 것들입니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는 이 윤리에 의해 마을 공동체, 국가 공동체가 형성되고 유지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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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이 법에 우선하는 사회...

우리는 보통 법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올바른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서구인들은 합리적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에 적응이 잘 된 편이지요. 그런나, 아시아 전통 사회에서는 <법이 도덕의 표현>이라는 의식이 강하였습니다.

법은 최소한으로 필요합니다. 고조선에서는 8조의 법만 있었고, 이 8가지 법만으로 사회가 유지되었습니다. 그 말은 법이 많지 않아도 사회가 운영될 수 있었다는 뜻이죠. 그러나, 지금은? 수백, 수백만 가지의 법이 있으면서도 그 법을 피해 범죄를 만들고, 또 그것을 막기 위한 법이 생겨납니다. 법이 많고, 합리적인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요?

고대 사회에서의 <법>은 국가의 지침서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법을 어긴자는 처형을 하지만, 그 법은 도덕을 기준으로 설정되며, 법에 없는 내용이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면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대부분 전통왕조들은 아무리 나쁜 관리라 해도 <신하나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면, 신하와 백성은 자식, 수령은 어버이이기 때문에 자식이 어버이를 고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부인이 남편을 고발할 수 없고, 친구의 죄가 반역죄가 아닌 이상 눈감아주는 것은 <의리>로 생각하였습니다. 단,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할 수 있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할 수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흔히 이런 경우는 <강상죄>를 범한 경우에 해당됩니다. 즉, 수령이 아버지인 임금에게 반란을 하려고 한다던가, 형이 아버지를 죽였던가 등의 패륜은 고발할 수 있죠.

불구대천의 뜻...

정리하자면, 불구대천이란 <아비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유가의 가족윤리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지금은 속담처럼 쓰이게 된 것이죠.

유가사상은 지금 시대로 보면 고리타분한 사상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충성, 효도, 의리, 믿음, 열정 등을 실현하는 방법이 불과 10여년 전과 지금도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유가사상에서 강조하는 <인간의 근본>이라는 측면은 아직도 동아시아인들의 머릿 속에 크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른을 모시고, 벗을 사랑하며, 형제를 믿고, 부부간에 신의가 중요하다는 <보편적 진리>를 수용하고 살아가니까요.

술을 먹고 적어서 그런가? 오늘 이야기는 횡설수설이었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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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사상 1 - 유가사상

1. 유가 사상의 특징

유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공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자들인 맹자, 순자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간을 정치, 사회, 역사의 주체로 놓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윤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자연속에서 진리를 찾는 도가적인 관찰자 역할을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법가적인 강압주의는 인간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이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가사상가들은 자연과 강압의 가운데에서 <중용>을 통해 윤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곧 정치 윤리로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치국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유가주의자들의 논의는 상당히 지배계급의 이상적 당위성과 치국의 방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내적인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주시대의 봉건적 질서와 예작제도를 중시하였으며, 그 원리에 따라 예법을 만들고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군주는 덕치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군주가 지켜야할 행동가짐은 예치로 규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중용의 논리와도 일통합니다. 즉, 예치, 덕치, 중용에 입각한 덕치주의, 예약정치, 왕도주의는 군주의 필수 항목으로서 이러한 항목을 군주가 지켜가야 혼란한 시기를 구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유가주의는 당시 공자 이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중삼-자사-맹자 계열, 자하-순자 계열의 사상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인간이 예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유가의 핵심 원리는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패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계열이 갈리게 됩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 사상입니다. 어질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어진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효, 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 - 효 - 제라는 핵심 도리를 말함으로서 이 도리가 가족윤리적임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부장권을 옹하하면서 그 가족제도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국가적으로 확장하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국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가족을 감싸듯이, 덕으로서 백성들을 위무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이렇게 인 - 효 - 제를 지켜가면서 윤리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군자란 우애와 효도를 통해 <수신제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이상적 군자의 모범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그는 군자란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로서, 교양을 갖추되, 그 교양의 바탕에는 올곧은 지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소인배들을 군자로 끌어올라는 것이 곧 목표입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을 4등론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성인 - 현인 - 군자 - 소인이 있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되는 것이 곧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인은 군자의 단계를 넘어선 지식과 정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선천적으로 성인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이 4등론은 한나라 시대 한고가 인간유형을 9등으로 다시 세분하였고, 훗날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관인을 선발할 때의 기준으로 쓰입니다.

공자는 내적인 윤리(덕)와 외적인 예(예절)이 균형잡힌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지식과 정신의 겸비를 다시 강조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와 정을 고루 갖추어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은 관용과 타협정신을 가진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시함에 있어 격식에 맞게 행하는 것은 서주의 예에 맞는 것으로, 예악정치도 강조합니다.

3, 맹자의 사상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일단 인간 윤리에 대한 전제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 처음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본성을 지키는 것이 곧 유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여된 4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사단이라고 합니다. 4단은 측은지심(인), 수오지심(의), 사양지심(예), 시비지심(지)입니다. 그리고 이 4단이 발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 때문인데, 이것을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4단에 맞추어 인간은 다섯 가지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이라는 5륜입니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이론으로는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왕도주의란,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한점 부끄럼도 없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야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4단 중에서 <수오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의 = 정의를 뜻하는 것이지요.

제왕이 수오지심에 의거하여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면, 천명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하늘이 스스로 제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명은 곧 하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군주가 정치를 한다면 이것은 하늘의 정의를 버리는 일이고 백성들은 새로운 하늘의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상 속에는 <혁명론>의 근거가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혁명론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살아생전에 크게 존경받으면서도 군주들이 꺼려하는 유가사상가였습니다. 또, 이러한 천명의 변화라는 개념은 후대 <선양>이라는 선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법가사상가들은 맹자의 사상은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4.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유가주의이면서도 기존의 학설과 많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성악설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공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족윤리를 주장할 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절을 통해서 억눌러야 된다며 맹자를 적극 비판합니다.

인간에게는 4단이라는 윤리가 내제한 것이 아니라, 절대 악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악을 누르기 위해서 예악정치,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은 유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 패도적인 법가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 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면, 순자는 아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체벌과 정신교육, 토론을 계속 할 것입니다.

또 순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효제라는 가족윤리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자는 가족 윤리는 작은 것이며, 이 작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윤리가 있는데, 이것은 곧 <의>를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소속한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헌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순자의 견해를 <충의론>이라고 합니다.

5. 유가를 비판하기 시작하다.

그럼 여기서 순자 외에 공자 사상을 비판한 수많은 제가 백가들의 비판 내용을 한번 볼까요?

도가에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도덕관념에 너무 얽매여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모순덩어리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교사상이 인간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국왕권과 밀착된 현생문제에만 몰두하여 인간이 가진 내면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가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소국과민>을 추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도가는 국가의 단위는 최소한 작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유가는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면서 지배층의 이념만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사상을 허무한 형이상학적 이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가 사상은 도덕과 윤리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여서 과연 그것이 정치이념이 되었을 때, 실제 전쟁으로 굶고 있는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이야기 합니다. 실제, 유가 사상은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묵가사상가들은 가장 신랄하게 유가를 비판합니다. 유가가 왕권이 강한 중원지역의 학맥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가장 남방의 초나라 권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유가가 중원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원리를 정당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묵가는 크게 반발합니다. 묵가는 유가의 인-효-제의 가족윤리는 자신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윤리이고, 그것을 확대한 가부장적인 군주관은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는 지배층만의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묵가는 가족애는 <차별애>이므로, 만민이 모두 평등할 수 있는 <겸애>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유가에서 말하는 <예절과 예악>은 허례허식일 뿐이며, 그런 절차가 과연 무슨 생산력 발전에 도움을 주느냐고 비판합니다.

묵가 사상가들이 유가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은 너무 많습니다.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차별적인 관습이다, 3년상은 허례허식이다, 예악정치는 낭비이다, 가족윤리는 차별애이다, 또 현세적인 유교적 치국주의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생활상과 맞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도가, 법가, 묵가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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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특징과 칭왕현상

1. 전국시대의 시작

전국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춘추 전국시기 이후 출현한 군현제적 중앙국가체제의 등장과 연관됩니다. 14장에서 말했듯, 춘추 전국시대 중기에는 남방과 북방의 치열한 패자 다툼이 있었고, 이 시기에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강력한 통일국가가 필요했습니다. 각 국가들은 주왕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약소국을 멸망시켜 중원의 주인으로서 활약하려 하였고, 이것은 곧 군현제도의 가속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춘추시대 북방의 패자였던 <진>나라의 가신인 한, 위, 조가 하극상으로 각각 독립국을 세운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것은 가신계급인 경, 대부의 성씨집단들이 제후집단에 반란을 일으켠 것을 말하며, 이제 주왕실과 제후라는 봉건질서의 주체들 외에 경, 대부라는 국인층들도 건국 주체로 성장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주왕실을 지킨다는 존왕양이는 사라졌고, 주왕실의 국인으로서 같은 하늘의 백성이라는 의식인 <예>는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강력한 영토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군주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군주는 자신을 보필한 현명한 인재와 강한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즉, 광대한 영역 국가에서 국왕인 인, 민을 직접 지배해야 했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 거대한 관료지배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반맹을 거듭하는 회맹질서는 필요없게 되었고, 국왕은 가부장권을 가진 모든 지배층(인)과 피지배층(민)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지방은 왕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 거대한 군, 현 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즉, 전국시대의 시작을 기점으로 봉건제적인 씨족제는 사라지고, 봉건제적인 혈연관계는 타도된 것입니다.

2, 전국시대의 왕들은 군현제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군현제는 말 그대로, 왕이 지배하는 전국을 군, 현으로 나누어 왕이 파견한 신하에 의해 전국을 직접 지배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 군현제는 현 - 군 - 향의 3층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현이란, 대국이 소급을 병합한 경우, 국가단위의 땅을 행정구역으로 개편한 행정구역입니다. 군은 변방지역이나, 작은 읍을 점령한 경우 설치한 작은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현이 너무 큰 경우 몇 개로 쪼개어 다수의 군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향이란, 현 아래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씨족 공동체적 유제가 남아있는 씨족 마을을 말합니다. 현은 차춤 군에 흡수되어 소멸되어 가지만, <향>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공동체 마을을 지칭하는 말로 쓰입니다.

3. 칭왕 현상의 시작과 관제 개편

전국시대의 왕들은 이제 패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주왕실을 모신다는 개념의 패자, 제후, 국군, 작이라는 칭호를 완전히 버립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는데, 이 시기는 각 국이 씨족적 기반을 버리고, 구귀족을 죽이며, 새로운 사회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변법의 실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제 왕은 누군가에게 존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하늘의 자손으로서 천하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사회에 제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신성화하기 시작합니다.

각 국의 왕은 이제 지방의 군현제 정비와 함께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변법을 시도합니다. 중앙 관제의 개편 목적은 종래 세습귀족과 다른 새로운 관료들이 새로운 관직에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 특징은 보다 전문적인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관직의 세분화였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행정권 - 군사권 - 지방권을 분리시키는 일이었으며, 이 분리된 권한은 각각 왕에게 귀속됨으로서 모든 국가의 총괄책임을 왕에게 부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종래 세습귀족들은 이제 왕에게 반항할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습귀족들의 모든 특권을 왕에게 돌려 왕이 직접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체제를 <제민지배체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민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하여 사회 제도를 씨족적 질서에서 중앙집권질서로 통채로 바꾸는 것을 <변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새로운 제도를 살펴볼까요?

왕권 밑에서 행정을 총괄하고 재상으로서 활약하는 최고 전문직 관리를 <승상>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승상은 백관을 감시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할 뿐 독자적으로 가진 권한은 별로 없습니다. 감찰은 <어사>가, 토지는 <사도>가, 재정은 <소부>라는 부서가 담당했습니다.

또 효율적인 영토확장을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지만, 이러한 군사제도 역시 문, 무 관리들을 분할하여 각각의 임무를 따로 두었습니다. 특히 장군 아래 <위>라는 호위대장을 두었는데, 이 위가 진시황의 통일 후 <태위>가 되어 군사권을 총괄하는 총수개념이 됩니다.

지방 제도도 확실히 분할합니다. 군의 태수는 <군수>, 현의 태수는 <현승>, 향리는 자치적인 토착세력, 지방 군사는 <위>에게 각각 분담하는 제도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조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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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 춘추전국시대의 지역 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 배경

1. 은나라의 영역 구조

은나라 시대의 씨족 공동체적인 원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 구조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3층적인 구조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국사나 중국사에서 고대를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중층적 구조>나 <부체제>가 바로 은, 주 시대의 기본 구조입니다.

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토지 구성을 보면, 국왕은 자신의 본거지만 직할지로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나머지 땅들은 각 부족장들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서양으로 보면 그리스의 <폴리스>같은 도시국가 구조이고, 한국사로 보면 각 부족들이 모여 합의하는 <연맹왕국> 성격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은의 중층적이고 3층적인 구조를 보면 대읍(은왕 직할지) - 족읍(방백, 각 부족의 땅) - 소읍(종족단위의 마을)로 구성된 3층 구조입니다.

2. 서주 시대 초기 봉건제도에서의 지역 구조

이러한 구조는 서주시대에 <봉건제>성립과 함께 약간 바뀝니다. 봉건제도를 실시한 목적 중의 하나가 은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족읍을 주왕조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왕조는 멸망했지만, 실제 은 왕조의 세력은 은 왕조와 연합하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세력들(족읍의 군장)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는 소국의 군장들(족읍의 독자적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혈연적인 관계를 매개로 하여 토지를 분봉하는 형식으로 그 독자적 지배를 인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주나라 초기의 새로운 족읍 체제를 한번 볼까요?

은대부터 내려오는 읍은 새 제후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우 옛 거주자는 새로운 봉건제후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독자적인 옛 은의 영역에 주 왕실의 혈연성을 가진 제후를 파견하여 그 영역을 은이 아닌, 주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 왕실이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제후가 그 영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중국 사회는 중앙집권화 할 만큼 민족적 동질성이나 고유 문화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화>라는 개념이 있긴 하나 이것은 외부 적을 상대할 때 이야기이고, 각 부족은 아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중화>라는 중국중심의 공통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넘어가야 완전히 확립됩니다.

주가 새롭게 개척하여 영역을 넓힌 새로운 족읍은 국가가 지정한 주왕실의 혈연 제후에게 분봉되어 그가 옛 은나라의 씨족 사회 지배자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주 교체로 인한 사회혼란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은의 옛 부족국가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의 지배층은 인, 피지배층(정복민)은 민으로 구별함으로서 국의 구성원간에 계층적인 구별을 합니다. 지배층은 파견된 제후를 중심으로 민(정복민)과 전(토지)를 지배하며, 민은 직접생산자로서 국인의 소유물로 간주됩니다. 민(民)은 이 당시에는 정복된 노예라는 개념이 강한 단어이나, 훗날에는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즉, 이 당시의 민은 인(人,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사람 대우를 받는 지배층 밑에서 존재하는 노예같은 민(民, 피지배층)이므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하는 학설이 다수설입니다.

3. 서주 시대 중기 - 춘추시대의 지역 변화

춘추 시대에는 대읍-족읍-소읍이라는 3층적 구조와 인, 민 이라는 지배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은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국, 도, 비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춘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의 약화와 각 봉건제후들의 독자성 강화입니다. 봉건제후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문만 가졌을 뿐, 실제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방어 태세를 위한 새로운 지역 개념을 제시합니다.

주왕실은 왕기(대읍)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제후들은 각각 족읍을 국(國) 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또 제후들은 자신이 가진 국의 일부를 가신인 경, 대부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도(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비(卑)라고 합니다. 국, 도에는 각각 지배층인 인과 피지배층인 민이 삽니다. 즉, 은, 주 시대와 같은 중층적 구조이나, 달라진 점은 제후들이 성장하여 족읍을 국으로 바꾼 것이지요.

당시 왕과 제후는 동족의 대표자 성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제후의 독립지역은 국을 넘보기 어려웠고,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지배층인 인들에게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사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회의 체제나 연맹왕국 수준의 체제와 비슷합니다. 즉, 왕이 국의 민을 지배할 수 없고, 제후는 도의 민을 지배할 수 없는 각각의 독자적인 구조이지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계루부 왕이 소노부의 종묘사직을 인정한 것처럼, 춘추시대에도 각각의 분봉자들의 영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에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방>이라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읍에 속하지도 않고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이민족의 땅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의 국가들과 상당히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중원의 국들은 이러한 방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의 땅인 국과 구분하기 위해 <방>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대한 문명의 한 가운데라는 뜻으로 <중화>라고 부르고, 이민족들은 <변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국, 도, 비의 변화

춘추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제후의 영토 확대로 국, 도, 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원래 주왕실이 분봉한 땅을 의미한던 국(國)은 이제 제후가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집안이라는 뜻의 국가(國家)로 바뀝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국, 국가라는 영토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된 것입니다.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눠준 땅인 도(都)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하여 경, 대부의 독자적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도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으뜸머리의 도라는 뜻의 수도(首都)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가의 수도(서울)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卑)는 비루한 백성들이 사는 피지배계급의 땅이라는 뜻에서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각각 국가, 수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용어로 변환되는 것이며, 이렇게 국가, 수도, 변경을 갖춘 통일국가가 바로 <중화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진은 너무 단명한 까닭에 다음 한나라 시기에 이러한 중화제국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유교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 한나라가 바로 <중화>를 대표하는 민족국가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중국말은 <한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한나라가 과거 모든 사상적 체계를 차분히 완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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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도시국가설과 읍제국가설

1. 도시국가설

청동기 시대인 은, 주 시대의 국가란 어떤 형태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그 내용을 크게 2가지 분류로 볼 수 있는데, 이중 1번째가 도시국가설입니다.

도시국가설의 주요 내용은 중국 은, 주 시대가 세계사의 고대 국가 발전 단계와 일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서양에서 도시국가란 그리스의 폴리스, 로마를 말하는데, 이들 그리스와 로마는 식민도시를 건설하면서 제국적 발전형태로 나아갑니다. 중국의 은, 주도 조그마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제국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입장이 이 입장입니다.

세계사적 보편성에서 보면 <씨족사회 - 도시국가 - 영토국가 -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도시 국가 발전의 일정한 패턴이고 중국의 은, 주는 이 패턴에 딱 맞는다고 본 것이지요.

그 공식에 맞추어 보면 은대 초기 = 씨족사회 / 은대후기와 춘추전국시대 = 도시국가 / 전국시대 = 영토국가 / 진나라, 한나라 = 통일국가..   이렇게 됩니다.

2. 읍제국가설

읍제국가설의 주요내용은 은, 주 국가의 발전단계보다 은, 주 사회의 사회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이 당시는 씨족공동체 사회로서 씨족공동체가 이끌던 사회였는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성격이 점차 바뀐다는 것이 핵심주장입니다.

이 국가설에 따르면, 은, 주 시대는 읍제국가(씨족공동체국가)입니다. 이후 봉건제도는 주왕실이 씨족적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체제재편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는 씨족적은 읍제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영역국가로 나아가는 시기입니다.

3. 은대 읍제국가의 사회 구조

은, 주의 사회 기본 단위는 씨족공동체 사회입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은 혈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읍>입니다. 읍은 씨족공동체 마을을 말합니다. 이 읍을 중심으로 국가가 구성되어있죠.

그런데, 이 읍은 3층 구조로 이루어집니다. 대읍은 은왕이 사는 왕도를 말하며, 족읍은 그 밑에 종속된 가신(후, 백, 방백)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읍은 족읍에 종속된 작은 혈연단위의 씨족공동체 마을을 말합니다. 이 3층 구조의 읍이 춘추 전국 시대 이후 국, 도, 비 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답니다.

이렇게 수많은 읍들은 2가지를 매개로 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씨족제사와 씨족공동체적 군사행동입니다. 제사를 통하여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며, 전쟁을 통하여 이민족을 정벌하고 영토를 유지했으니까요. 이 3층 구조의 읍은 족읍이 사회 기본단위를 이루며 소읍을 지배하고, 대읍에 복속하는 <중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 주 대 읍제국가의 변화

전술했던 3층적 읍구조는 서주시대에 변하게 됩니다. 대읍-족읍-소읍의 구조는 춘추시대에 와서 국-도-비라는 구조로 바뀌게 되죠. 이 국-도-비도 상하 종속관계로 설정된 <중층적 질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여기서의 <국>은 국이라는 곳 안에서도 계급을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국에서 지배층은 <인>, 국에서의 피지배층은 <민>이라며 구분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읍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곳은 <방>이라고 부릅니다.

정리해보면, 씨족공동체의 사회인 은, 주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점차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춘추 5패, 전국 7웅이 나타나는 시기에 씨족적 질서가 파괴되는 대신, 강력한 영역국가가 출연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주나라의 봉건제도 역시 주의 지배계층인 제후, 경, 대부가 각각 중층적으로 땅을 나눠갖고, 농민이 피지배계층이 되는 <중층적 씨족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층적 질서의 정점이 바로 왕이였구요. 왕은 모든 국토와 국인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중층적 질서가 그 사회를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 전국시대의 부국강병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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