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통삼한의식'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건

  1. 2007.02.04 한국 청동기 시대에서의 민족연결론과 민족교체론의 논쟁 (2)
  2. 2007.01.13 신문왕 대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1)

한국사에서의 민족교체론과 민족연결론의 논쟁

1. 청동기 시대의 민족교체론 주장 근거

한국사에서 일단 구석기인들은 현재 우리 민족과 연관성이 없다고 봅니다. 빙하기 대의 이동생활과 이, 모발 등의 형태로 보아 민족일 가능성은 희박하죠. 또, 당시 한반도와 일본이 분리되지 않은 사실도 민족이 아니라는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민족교체론은 신석기인들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신석기인들은 북방계통의 시베리아에서 새로 내려온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들을 모체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지요. 이들은 시베리아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이룩하고 내려온 고아시아족이라고 보통 보며,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민족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이어 청동기 때 내려온 민무늬 토기인들입니다. 민무늬 토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며, 반달돌칼 등 새로운 도구가 한반도에서 출토됩니다. <민족교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들 청동기인들이 이전의 신석기인들과 다른 민족적 구성을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즉,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일단 <거주 장소와 생계수단>이 다릅니다. 강가와 구릉지대라는 거주 장소가 다르고, 신석기 문화와 청동기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민족으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즉, 한반도 청동기 문화는 단순히 문화 전파가 아닌 주민들의 이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이들을 다른 민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죠.

이것은 우리 교과서에서 일부 반영된 논리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빗살무늬토기인은 고아시아족, 민무늬토기인은 예맥족으로 분리해서 봅니다.

2. 청동기 시대의 민족연결론 주장 근거

민족연결론은 민족교체론이 틀렸음을 조목조목 따져서 보여줍니다.

먼저 생계수단의 차이가 주민집단의 차이라고 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환경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기 마련이므로, 생계수단이 바뀐 것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음을 뜻한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또, 한국의 신석기 문화가 시베리아 고아시아 문화라는 증거도 없고, 그 문화와 뿌리가 같다는 증거도 없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즉, 민족교체론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빗살무늬인과 민무늬인들은 다른 생업경제를 꾸려갔을 뿐, 결과적으로 같은 계통의 사람들이라고 주장합니다. 빗살무늬인들이 민무늬 토기로 점진적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계속 높아지고 있으며, 신석기인중에 민무늬 토기를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흡수한 이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됩니다.

이 논쟁은 아직, 한반도에 충분한 유적이 발굴되지 못하여 소모적인 논쟁으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3. 실제 민족이 형성된 시기는?

위 논쟁에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민족연결론이든, 교체론이든 간에 우리 청동기 문화는 신석기 시기와는 달리 단일 계통의 주민들이 번영시킨 문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독자적인 집단으로 청동기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청동기인들은 다양한 계통에서 유입되었습니다. 청동기의 기원지가 많은 만큼, 아직 우리나라로 유입된 청동기의 정확한 전파지역도 너무나 다양하여 딱 꼬집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청동기 유이민들이 하나의 우리 민족이라고 여기게 된 시기는 세형동검이라는 동류의 문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라고 보통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를 공유하던 우리 민족을 기록에서는 <예맥>족이라고 합니다. 중국기록에는 예맥을 <동이족>이라고도 합니다.

동이족은 은주교체기에 한족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다가 한반도로 많이 유입된 자들이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 또, 이동하지 않고 중국대륙에 남아서 한나라 시기까지도 동이족 문화를 중국에 전파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산둥반도의 <무씨사당벽화>에는 단군 신화와 거의 흡사한 내용의 신화가 벽화로 남아있습니다. 백제가 근초고왕기에 중국에 진출하여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은 이 무씨사당벽화와 연결하면 아주 허구는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청동기 시대는 민족의 주류가 형성된 시기일 뿐, 민족이라는 자각을 우리 스스로 느끼기까지는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삼국통일기에 같은 민족을 통합하였다는 <일통삼한의식>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싹튼 동류의식은 고려시대 <몽골>과의 항쟁에서 민족적 조상은 <단군>이라는 정확한 개념을 도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에서 <민족>이라는 단어 자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근현대 이후에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조선시대 국난이 있을 때, 실학자들은 단군, 고구려, 발해 등을 같은 부류로 여기고 국가 개념을 확장하였습니다. 이것도 국가 개념의 확장이지 민족 개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뿌리가 같다는 동류의식의 확인이었지요. 신분제 사회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보다 신분이라는 개념이 더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일제시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고, 이 개념은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는 개념입니다. 반제국주의 운동, 반봉건주의 운동이라는 개념 속에 민족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고, 이 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분차별을 초월한 일치된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그 개념은 해방이후에는 남북통일을 위한 <한민족> 개념으로, 독재시설에는 경제 개발을 위해 뭉친 <민족 전사>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지금까지 내려왔죠. 반공헌장을 외운 세대와, 국민교육헌장을 외운 세대, 서태지 노래를 듣던 세대, 월드컵을 보면서 길거리에서 민족의식을 공유하는 세대는 다르지만, 민족개념은 아직까지도 우리 가슴 속에 남아있습니다.

이 파티는 민족개념에 대한 파트가 아니라, 민족교체론 논쟁 파트이므로 여기까지만 정리할께요. 민족개념에 대한 정리는 근현대사 할 때 자세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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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에 답하였다.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덧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일통삼한을 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

사료해석 : 통일신라시기부터 진정한 민족의 형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일통삼한>의식이 싹뜨기 때문입니다. 일통삼한이란, 이전 3국이 각각 분립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것과 대비되어지며 드디어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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