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 I S T O R I A > 
역사적으로 본...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길고 긴 대립과정

이 이야기에 나온 역사적인 이야기들과 법, 제도, 인물 등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라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해당되는 입장의 내용들만으로 씌여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프랑스 혁명 : 자유부터인가, 평등부터인가...

서구 역사가들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찾곤 한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하면 <자유와 평등>을 떠올린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에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실제, 근대 유럽의 자유와 평등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였다.

프랑스 혁명을 처음 일으킨 것은 <귀족>세력에 반발한 <부르조아> 계급이었다. 그들은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인권선언을 발표하여 자본가들의 <재산권>을 인정받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한 첫 번째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의회의 자본가들은 1791년 샤플리에법을 만들어 <노동자>들의 파업을 억누르려 했고, 재산이 있는 자만이 투표할 수 있다는 헌법을 만들었다. 자본가들을 믿고 <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한 대중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1년 뒤, 민중들은 8월 봉기를 일으킨다. 민중들은 <자본가>들의 세상을 다시 부수고, 프랑스 제 1공화정(국민공회) 시대를 열었다. 자본가들을 위주로 하는 지롱드파를 몰아내고,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정권을 잡았으며, 국왕인 루이 16세마저 사형에 처한다. 93년 헌법에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재산권 위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기준으로 하는 혁명적인 헌법을 다시 만든다. 또, 모든 사람이 직접 선거할 수 있는 <보통선거>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주장하는 자본가들은 끊임없이 <평등파>와 대결하려 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방토즈>법을 만들어 <재산가>들의 재산을 <혁명군과 애국시민>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한다. 서구의 근대사 최초로 <자유>가 <평등>에 의해 억압당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난 것이다.  <자유파 의원>들은 반혁명을 일으켜 다시 <자유>의 가치를 높이려 하였다. 공포정치로 자유를 탄압한 평등주의자 로베스피에르는 죽었고, 부르조아지들은 다시 <재산권>을 최고의 기치로 삼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이 대립했지만, 최후의 승자는 <자유주의>였다.

평등주의자들은 이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긴 하였다. 예로 1796년 혁명을 통하여 모두가 <평등>한 <공산주의적> 사회를 추구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사회주의의 아버지 <바베프>이다. 그는 재산권 자체를 부정하고, <자유>는 <평등>의 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그의 시도는 실패하였고,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곧 바로 <사형> 시킨다. 그 이후 자유주의는 <절대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는 <나폴레옹>이라는 독재자에 의해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몰락한 프랑스 경제의 부활>과 <혁명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발표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는 이 것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오로지 혁명의 성과를 <자유>로만 규정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유주의 이념을 평등주의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독재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주의>말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성과인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부르조아지와 대토지 소유자>들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을 프랑스의 위대한 국민이라고 광고하였다. 그리고 유럽 정복을 통하여 <재산권과 자유권>을 유럽 대부분에 전파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국민 대다수가 원하는 <평등주의>에는 관심이 없었다. 평등을 주장하는 언론은 바로 군부에 의한 <탄압>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법전>은 위대한 법전으로서 법적인 평등과 신앙, 재산, 직업의 자유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법전의 모든 조항은 개인을 위한 자유보다는 <국가 시민으로서의 자유, 재산권을 가진 시민으로서의 자유>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나폴레옹 시대의 이념은 <자유이념>이 모든 이념을 포괄하여 유럽에 전파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초기 <자유주의 이념>이었고, 이 자유주의 이념은 유럽의 진보와 발전을 위한 최초의 이념이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근원이 된 혁명에서부터 <자유>가 <평등>을 누르고 세상의 빛을 보았으며, 이 후 산업혁명과 근대화를 겪으면서 서구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이념으로 부각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부터 <자유주의> 이념에 반기를 들고 노동자 계급의 <평등>이념을 부각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시도들은 대부분 <자유라는 인간의 절대 기본권>에 반한다는 이유로 모두 좌절되었다. 또한, <자유주의>이념은 <자유주의적 고전 경제학>과 맞물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절대적 지원사격을 받았다. 그 이후, 극단적인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에 이르는 <반자유투쟁>이 계속되었으나, 역사는 이러한 투쟁을 모두 실패로 기록하고 만다.

봉건귀족 세력의 역사적 역할 : 자유주의 이념에 반하는 <악마세력>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뒤, 유럽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금기어가 되었다. 유럽의 봉건 왕조들은 빈회의를 통해 혁명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 유럽을 <보수화>하려고 하였다. 유럽의 왕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평등보다는 <자유>이념이었다. 왕실과 귀족세력은 산업혁명 등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자본가> 계급을 가장 큰 적으로 보았으며, <자유주의>는 이들 자본가 계급의 무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유럽의 <정통 왕실>과 성장하는 <자본가>들은 서로 적으로서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럼 이 때 <지식인과 민중>은 누구 편을 들어야 했을까? 당시의 지식인들은 <평등주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 과거 세력>들인 왕실과 귀족에 대한 대대적인 규탄시위에 들어간다. 독일 대학생들은 부르센샤프트 운동을 벌였고, 나폴리에서는 카르보나리라는 비밀결사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중세적 왕실 질서는 또 다시 프랑스에서 대대적으로 규탄에 들어간다. 나폴레옹 사후의 프랑스에서는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시민계급과 자본가들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으나, 정부는 의회를 해산해 버리는 등 자유주의를 탄압하였다. 티에르 등 <자유주의자>들은 <민중>과 연합하여 1830년 7월.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은 다시 <평등주의자>들을 버린다. 민중이 원한 평등선거는 없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부도 없었다. 단지, 자본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조금 더 주었을 뿐이었다. 특히 노동자들은 <샤플리에법>에 의해 정치적 발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모두 적으로 여긴 봉건귀족은 이 둘의 연합으로 몰락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평등주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유>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프랑스 공화정 : 계속된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이 이야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혁명을 이끈 프랑스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혁명은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유럽 각지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혁명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자유주의 혁명을 이끈 선구적인 혁명이 프랑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이다.

7월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또 다시 <평등>의 기치를 잃어 버렸다. 이 때부터 프랑스 민중들은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보통선거>를 요구하게 된다. <자유>가 어느 정도 정착되자 <평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를 주장했던 학생들은 이제 농민의 편이 되어서 평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8년 2월. 프랑스에서는 또 한 차례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국왕 루이 필립을 폐위시키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다시 수립하게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 혁명 공화정에 이은 <제 2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제 2 공화정>은 <자유주의>와 극심한 마찰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급진 평등파>들은 <자유주의>의 기본 이념인 <재산권>을 제한하려 하였고,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온건한 공화파>들 조차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다시 극단의 혁명을 몰고왔다.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은 6월 봉기를 일으키고, <평등주의>의 완전한 실현을 주장하였다. 제 2 공화정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폭동은 불법이라면서 강하게 진압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타협을 시도하기 시작한다. 공화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도>를 실시하여 국민투표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자유주의>에 대한 보완책으로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을 체제안으로 포섭해야 했다. 특히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국내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우애>의 개념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민중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국민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족>은 계급을 떠나 하나이다. 모든 계급의 통일체가 민족이고, 민족의 정부가 국민의 정부이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이다. 그는 이 <민족>개념으로 국민들의 <냄비같은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물론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평등을 요구했고, 게드의 프랑스 노동당이 창립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의 강력한 리더쉽 앞에 <평등주의>는 <민족주의>라는 이념에 묻혀 버렸다.

영국 : 자유주의가 제국주의 이념으로 전환되다

프랑스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어갔던 영국의 <자유주의>는 무시할 수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19세기 세계사적으로 미친 영향은 우리나라에까지 엄청난 파급력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화기부터 진행된 우리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이념은 프랑스, 영국, 러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물론, 이들 나라의 문물을 먼저 수입한 청과 일본에 의한 것지만 말이다. 이건 다음 회에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철저한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많은 혁명을 목격한 <조용한 섬나라>는 이미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젠트리들에게 수많은 권리를 주었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던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혁명이 아니라 조용한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영국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국가이다. 그만큼 자본가들에게 상대적으로 관대한 나라였다. 무론 의회 내에서 귀족과 자본가의 대립이 있었지만, 자본가 위주의 휘그당은 <자유당>으로 명칭까지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체제>를 구축해 나갔다. 귀족들은 <보수당>에 집결하여 정당정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19세기 영국은 곡물법을 폐기한다던가, 항해조례를 폐기하면서 자본가들이 해외무역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물론 영국의 노동자들도,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시키려는 노력이 있었다. 19세기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주장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자유>의 이념은 <평등>이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이 산업자본가와 같은 권리를 차츰 인정받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 유럽 어느 나라이든 19세기 <여성의 평등>을 거론한 나라는 없다. 여성에게 똑같은 보통선거를 준 것은 선진적인 영국도 <20세기> 들어와서이다.

이러한 영국의 자유주의적 발전은 <자유주의 만능 이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특히 자본가들의 <자유>를 철저하게 인정했던 분야가 바로 애덤스미스로 대표되는 <경제학> 분야이다. 애덤스미스는 국가가 국민의 자유에 절대 간섭하면 안된다는 이론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은 <가격>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멜더스는 인구론에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내 놓는다. 그런데, 그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유>는 주되, <평등>은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빈곤은 노동자 책임이므로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릴 수는 없다. 빈민촌에는 소독도 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이었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정립한 사람은 <스펜서>이다. 스펜서는 이 모든 이론을 <사회진화론>으로 정립시켰고, 유럽인들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사회진화론>이란,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사자가 양을 잡아먹는 것은 먹이사슬에 의한 정당한 행위이다. 사자는 강하고, 양은 약하다. 사자는 육식동물이고 양은 초식동물이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이것을 사회 법칙에 대응하면?

노동자는 가난한데 그것은 유전자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빈곤할 수밖에 없다. 멘델의 유전의 법칙에 의하면 열성은 도태되어야 한다.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경제학자 리카도는 한가지 증명까지 시도하였다. 그것이 유명한 <임금의 철칙>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성경이다. 경제는 지대, 이윤, 임금의 3가지로 유지되는데 지대가 커지면 임금이 줄어든다. 노동력이 늘어나면 임금은 그만큼 준다. 노동력이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것이므로 노동자의 임금이 늘어날 수 없다. 결국 노동자는 항상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결국.... 가난은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 진화론을 국가간에 대입하면 이렇게 된다. 약한 나라는 강한 나라에 점령당할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는 먹이감을 구하고, 자국의 문제를 해결한 탈출구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거나 식민지를 만둘 수밖에 없다. 강한 나라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과 같은 <사회적 법칙>일 뿐이다. 따라서 제국주의 사상은 윤리나 도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이 아니라 <사회적 당위성>으로 설명해야할 사상이다. 약한 나라는 강한나라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힘을 키워서 사자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약자의 변명은 사회 속에서 통하지 않는다.

이로서 참신한 혁명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타락과 협상을 거쳐 다양한 사상과 연결된 결과, <제국주의>의 호수까지 흘러들어가 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 제국주의를 부정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개화기에는 <근대 사상과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 <자유주의>를 수용하였고, 그 결과 개화기 지식인들은 <제국주의>도 수용하였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이유는 <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우리 역시 강력한 <제국주의>국가로 거듭나서 <제국주의로 제국주의를 물리친다>는 이이제이의 원칙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선생도 초기에는 제국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고, 실제로도 일제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초기에는 <제국주의적인 군사실력 양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평등주의>의 반격...

사회진화론까지 나아간 <극단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평등주의>자들은 수많은 반격을 하고, 저항을 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이념을 계승한 이들은 중산계급의 하층민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리면 어느 정도 평등을 이룰 수 있다는 <평등주의적 급진주의>를 주장하였다. 생시몽과 같은 이들은 폭력혁명이 아닌 대화와 설득으로 자본가와 협력하여 타협을 이끌어내자는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푸리에는 한발 나아가 현존 제도를 모두 버리고, 심지어 결혼조차 부정하면서 성적인 자유까지 주장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 사람들은 <무정부주의>라는 새로운 이상향을 생각하게 된다. 무정부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국가 권력은 모두 <평등>을 억압한다고 본다. 경찰, 군대, 학교, 법원 등은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들 도구는 <평등>을 옹호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의 결론은 <국가의 완전 소멸>이 평등을 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 프루동은 국가를 없애고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생산수단을 가진 뒤 자본가로부터 착취당하는 일이 없는 평등한 노동의 세상을 말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직접 코뮌(자치집단)을 만드는 것이 <평등>사회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더 나가 러시아의 바쿠닌은 아예 폭력 혁명으로 모든 것을 부수자고 말하기도 한다. 크로포티긴은 바쿠닌의 사상을 계승하여 모든 것의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그 새로운 세상은 <평등>에 입각한 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크로포트긴의 사상을 계승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부수고 민족의 평등을 이루자고 주장한 사람이 바로 <신채호> 선생이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자유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대립

독일의 자유주의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비스마르크이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가 통일과 자본가 계층의 자본주의를 옹호하였지만, <평등주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대입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반사회주의법>을 발표하여 평등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독일의 현실 때문이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 된 이후 동독일의 토지귀족(융커)들과 서독일의 산업자본가에 의해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더 철저한 단결을 주장하게 된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의 <평등 개념>은 이렇다.

세상은 불평등하다. 누군가 평등함을 추구하면, 누군가는 그것을 또 깨드린다. 헤겔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현 사회의 모습과 일치한다. 단, 이 변증법은 철학적 개념이 아닌 실제 노동자들의 삶과 관련되어야 한다. 따라서 현재의 부조리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필요하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적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하부구조는 경제력인데, 상부구조인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독식한다. 역사는 그러한 모순(정)에 대한 투쟁(반)이었으며, 그 투쟁은 항상 새로운 결과(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역사는 발전하였지만, 아직도 평등하지 않다. 진정한 평등은 자유주의(자본주의 : 정)에 대한 평등주의(반)의 투쟁으로 새로운 세상(공산주의 : 합)을 만드는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은 혁명의 주체인 빈민층(프롤레타리아)의 단결을 위해 제 1, 2 인터네셔널을 만들었고 이 국제 평등기구에는 독일계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의회>에 진출하여 <자본주의>가 붕괴될 대를 기다리자는 이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세계적 기구로 단결하여 훗날 세계 공산주의자들에게 지침을 내리는 기구로 탈바꿈하게 된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 공산주의 국가가 성립됨으로서 이들은 해산하였다.

프랑스.... 왕정과 공화정의 반복 :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대립

프랑스는 제 2공화정이 몰락하면서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자유주의적 가치>를 들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내세운 것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평등>요구로 기득권과 자본가들이 <재산권>을 빼앗긴다는 우려를 했기 때문에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높았고, 나폴레옹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나폴레옹은 신헌법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독재권을 용인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탄압하고,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헌법의 큰 줄기였다. 나폴레옹 3세는 기득권을 위한 <쇼>를 많이한다. <자유주의>의 옹호자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행설립, 철도 건설, 중공업 산업 육성 계획을 세워 자본주의 국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특히 파리시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만은 많았다. 나폴레옹이 실시한 노동자를 위한 <평등> 정책은 실업자 구제책이었다. 실업자가 늘면 사회 불만 세력이 되고, 그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지 모른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평등이란 말 대신 <민족의 영광>이란 말로 모든 국민이 단결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은 점차 불만이 많아졌다. <민족>을 주장하면서도 결국 <부르조아>를 위한 정책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정책은 간단하였다. 나폴레옹을 소개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발전 정책에 불만을 품은 <민중>을 달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것은 전쟁이었다. 지금이야 월드컵과 같은 스포츠, 영화, 연예인 등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수 있지만, 이 당시의 확실한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나폴레옹 3세가 국민들에게 전쟁의 이유를 설명한 것을 보면 명확해진다. 바로 <국민적 영광>을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림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샤르데냐 전쟁), 멕시코 원정, 오스트리아 전쟁 등 도대체 왜 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한 전쟁을 수많은 이유를 들어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일 통일 전쟁(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비스마르크의 농간으로 패함으로서 <국민적 영광>은 상처로 돌아왔고, 국민들은 그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역사적인 <파리 자치정부>가 추진된다.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자, 프루동의 무정부주의자, 블랑키 주의자들은 <평등주의>의 이념을 내세우면서 연합하였고, 파리에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였다고 선언한다.  그들이 진정 원한 건 혁명 자체가 아니였다.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평등주의>로 국가정책을 전환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피의 일요일 전투>라고 역사는 부른다. 자치정부군은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항쟁하였다. 국가는 그들을 잡아 바로 바로 총살시켰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정부는 죽이지 못한 이들을 파리 시내에 가뒤 굶겨 죽였다. 쥐를 잡아먹으며 항쟁했던 <자치정부>의 모든 이들은 엄청난 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

다음 2부에서 다룰 이야기 : 사회주의의 성장 드레퓌스 사건, 카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의 관계, 미국노예해방은 자유주의인가 평등주의인가, 러시아의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자유주의를 버린 제국주의, 세계대전 중 평등사상, 히틀러와 자유주의, 냉전시대와 평등주의, 신자유주의 사상의 등장배경과 역할


참고 서적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 찾아보세요~~~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양장본) 상세보기
데이비드 하비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는 책. 신자유주의는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무역의 특징을 갖는 제도적 틀 내에서 개인의 자유 및 기능을 해방시킴으로써 인간 복지가 가장 잘 개선될 수 있으며,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실행에 적합한 제도적 틀을 창출하고 보호하는 데 있다고 제안하는 정치적ㆍ경제적 실행에 관한 이론이다. 이 책은 세계적 담론과 정책을 주도하는 핵심 용어가 된 신자유주의의 의미를 알아본다. 신
신자유주의의 역사와 진실 상세보기
강상구 지음 | 문화과학사 펴냄
문화과학 이론신서 19번째권. IMF 이후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지 2년이 지난 현실에서 신자유주의의 태동과 전개과정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저서. 1950-60년대 신자유주의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고 신자유주의 등장과 현대자본주의의 특징을 고찰했다.
WHY NOT(불온한 자유주의 자유시민의 세상읽기) 상세보기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펴냄
15년 전 항소이유서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인용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저자의 정치문화 에세이. '이 땅에서 자유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나는 국론통일이 싫다', '한국적 자유주의의 비극' 등 45여 편을 엮었다.
현대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이해 상세보기
장동진 지음 | 동명사 펴냄
정치의 본질을 다룬 정치철학서. 정치철학의 정의부터 분배의 정의와 평등, 국제사회 정의에 관한 모색 방안 및 자유주의와 한국정치에 관한 내용까지 담았다. 지난 10년간 학술지 및 학회나 학술회의에서 발표했던 논문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정치철학에 대한 이해와 일부 현대정치 이론가들의 이론을 담았다.
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상세보기
황경식 지음 | 철학과현실사 펴냄
'자유주의는 진화하고 있는가'란 물음에 깊이 있게 고찰해 본『자유주의는 진화하는가』. 자유민주 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아 왔고 철학공부를 한 저자는 롤즈의『정의론』을 접하게 되면서 잠재의식적 자유정신을 의식화하고 자유주의를 향한 사회경제적 인프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에 자신이 나름대로 구상해 온 자유주의적 입장에 대해 총 5부로 나누어 마음껏 이야기한다. 1부에서는 자유주의와 그 적들, 2부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상세보기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 나남 펴냄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책.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해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보는 필자의 생각을 상상의 공동체라는것을 통해 접급했다.

프랑스혁명과 베르트랑 바래르 상세보기
서정복 지음 | 삼지원 펴냄
근대적 민주시대의 새로운 장을 연 프랑스 대혁명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혁명의 추진자 겸 관찰자 역 할을 했던 베르트랑 바래르의 활동과 증언을 통해 살 핀 책. 혁명 이전 새로운 사상의 흐름과 베르트랑, 자코뱅 시대, 테르미도르 사건 등 6개 장으로 설명했다.

자유주의적 평등(한길그레이트북스 73) 상세보기
로널드 드워킨 지음 | 한길사 펴냄
로널드 드워킨의『Sovereign Virtue』를 번역한 책. 미국의 롤스 이후 대표적인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드워킨은 이 책을 통해, 자유주의 평등에 적대적이라고 생각하는 통념과는 달리 오히려 평등권이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주장한다. 구좌파가 지나친 평등을 추구했다는 기존의 비판과는 달리, 오히려 구좌파가 추구하였던 평등은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현대 정치철학의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TAG 1791년헌법, 1793년헌법, 1차선거권개정, 2월혁명, 7월혁명, 8월봉기, 가격, 고전경제학, 곡물법, 공포정치, 국민공회, 국민의영광, 국민의회, 급진평등파, 기조, 나폴레옹, 나폴레옹3세, 나폴레옹법전, 나폴레옹보나파르트, 노동권, 다윈, 러시아혁명, 로베스피에르, 루이16세, 루이필립, 리카도,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멕시코원정, 멘델, 멜더스, 무정부주의, 민족의영광, 민족주의, 민주적급진주의, 민중주의, 바베프, 바베프사건, 바쿠닌, 박애, 반자유투쟁, 방토즈법, 베베프, 병증법, 보수당, 보수주의, 보이지않는손, 보통선거, 부르센샤프트운동, 부르조아, 브리소, 블랑키주의자, 비스마르크, 빈곤의이유, 빈회의, 사회적당위성, 사회적법칙, 사회주의, 사회진화론, 상부구조, 생시몽, 생존권, 샤르데냐전쟁, 샤플리에법, 선거권, 스펜서, 신채호, 애덤스미스, 여성선거권, 오스트리아전쟁, 유전법칙, 융커, 의회제도, 의회주의, 인구론, 인권선언, 인터네셔널, 임금의철칙, 자유, 자유당, 자유주의, 자유파, 자치정부, 자코뱅주의자, 자코뱅파, 재산권, 정반합, 정통주의, 제1공화국, 제1제정, 제2공화정, 제2제정, 제국주의, 젠트리, 지롱드파, 진화론, 차티스트운동, 총재정부, 카르보나리, 코뮌, 크로포트긴, 크림전쟁, 테르미도르의반동, 토리당, 티에르, 파리코뮌, 평등, 평등주의, 평등주의적급진주의, 평등파, 푸리에, 프롤레타리아, 프루동, 피의일요일전투, 하부구조, 항해조례, 헤겔, 휘그당

(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1. 1896년 : 독립협회를 발족하고, 독립신문을 만들다.



지난장에서 독립협회가 발족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을 아관파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망국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보통 독립협회하면, 전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민족운동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생긴 것은 사실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들로부터입니다.

독립협회의 초기 맵버는 서재필 등을 비롯한 구미파 세력(친미적 세력, 정동구락부 세력)이 있었고, 또 갑오개혁과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고위관리들도 참여하여 정부 방침이 독립협회에 녹아있었습니다.

독립협회를 1896년 처음 발족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이후, <조선이 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청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초기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핸 <계몽홍보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익광고 협의회라고 할까요?

따라서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거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국가공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에 국가원로인 안경수, 위원장은 당시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이 때는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였죠...), 고문은 미국국적을 가진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의 자주성을 홍보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독립협회 초기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TV같은 것이 없었죠. 따라서 홍보에 적절한 매체로 신문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신문은 백성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글자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신문이 바로 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이 순한글 신문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하나 더 추가 해야 합니다. 순한글 신문이자, 한글, 영문 2개판으로 나온 신문이라는 점이죠. 조선의 자주성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알려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별도의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 1897년 : 고종이 돌아오면서 마찰이 시작되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족했을 때 독립협회는 단순한 <홍보기관, 사교단체, 정부어용기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열강의 이권침탈 실태를 알린다는 정도였죠. 독립협회의 모임은 정부 주도의 소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897년이 고종이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독립협회의 주장과 맞물려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고종은, 강력한 자주권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강력한 나라의 성립은 독립협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성격을 놓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력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중 미국의 공화정 및 일본의 입헌군주정을 경험한 친미, 친일파 출신들은 강력한 왕권이 근대화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법치국가를 만들고, 내각제나 의회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1897년 독립협회는 초기의 독립협회와는 성격이 달라집니다. 독립협회의 위원장인 이완용 등의 친러파들은 탈퇴하고, 서재필 등 친미파, 박영효 등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주도의 정권과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러시아 고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세력보다 비교적 민중적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을 적극활용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우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데 주력하였죠.

그러나, 독립협회는 백성들을 진정한 개혁주체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조차 <백성들은 무식하여 알리고 가르쳐 계도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하였죠. 따라서 신분제가 이미 혁파된 조선사회였음에도, 백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보다는 일단 가르쳐야할 대상들로 파악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인사들은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같은 유산시민 지식인>을 육성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마찰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3. 1898년 :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인사 중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왕(고종황제)과는 달리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성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민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독립신문은 금연광고같은 <계몽홍보신문>을 넘어서서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이념 주장>을 펼치는 장이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환궁했음에도, 계속 우리 내정을 간섭하는 러시아의 알렉시에프 등을 비난하고, 외국세력이 우리 이권을 침탈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합니다.

이 시기의 운동은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통하여 백성들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친미적, 친일적 성향을 가진 서재필, 박영효 등의 외국물을 드신 세력들이었습니다.

4.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자유민권운동

그럼 자유민권운동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자유민권이란, 서양 용어로 <천부인권>을 말합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프랑스 혁명과 영국혁명 등에서 비롯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 사상>을 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였듯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등의 구제도를 타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구처럼 <천부인권>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 천부인권을 홍보하는 수단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신문으로 모자라면 강연회, 토론회 등을 쭈욱~ 열어 자신들의 이상을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백성속으로 들어가 어떤 백성이든 같이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백분토론 같은 이상적 장이 바로 <만민공동회>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만민, 즉 모든 백성의 이야기장인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백정조차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에는 생존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물을 먹은 서재필 박사가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자유를 모두 모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주권>이 됩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에서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이란 <국민평등, 국민주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국민평등권,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소신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참정권>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서구식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대의제도에 따른 국회의원 선출>이죠.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의 최종 결론은 <의회설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의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법치주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대한제국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고종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죠.

자유민권운동의 결과, 서재필은 중추원을 관선국회의원, 민선국회의원으로 내각기관으로 재편합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재추가 모이는 최고 국가 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해진 기관입니다. 중추원이 재신과 추신의 합좌기관으로 고려 이래 최고 기관이었던 만큼, 민선, 관선 의원들의 협의기관으로 딱이었죠.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의 내용

97. 8. 29 : 조선의 급선무인 인민 교육을 실시한다.
   97. 9. 26  :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97. 10. 17 : 인민 교육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97. 12. 19 : 신문을 만들어 인민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
   98. 1. 2 : 관민이 같이 애국해야 한다.
   98. 1. 23 :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광산을 확장해야 한다.
   98. 2. 6 : 수구파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야 한다.
   98. 3. 6 : 우리 국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말자.
   98. 5. 8 : 백성의 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출처 : 누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투스, p113)

5. 만민공동회의 활동 - 2. 자주국권운동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종의 <광무개혁>과 그 본질은 통합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에서 보듯이 그 실현방법에서는 너무나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만민공동회의 노력을 한번 볼까요?

민민공동회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하여 <자주국권운동, 자강혁신운동>이라 칭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자주국권운동은 외세를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만민공동회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온 모든 운동을 포함하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복귀 운동, 열강의 이권탈취 반대운동,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 등의 모든 부국강병 운동을 말합니다. 자주국권운동의 구체적인 예를 몇가지 볼까요?

1.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함
   2.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킴
   3.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음
   4.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고, 영국의 해양 침투를 막음
   5. 미국의 무한정 광산 채굴을 일부 막고, 러시아의 은광 진출을 방어함
   6.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해역에서 토지를 매도하는 것을 막음
   7. 외국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이권을 넘기는 이완용을 영구 제명함
   8. 일본의 철도 부설권 확득 의도와 청의 산림 탈취 의도를 사전에 홍보하고 막으려 함

이러한 자주국권운동은 독립신문에 홍보하는 동시에 만민공동회에서 계속적인 토론과 강연을 함으로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고종환궁요구와 일본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제동을 건 것도 독립협회의 업적이었죠.

그러나, 외세의 압력을 막는 <자주국권운동>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민권을 얻고 자주국가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을 막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서구 열강과 같이 발전해야 다시는 그들이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6.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자강혁신운동

만민공동회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발전과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의회제 설립과 내정개혁>이었습니다.

이 내정 개혁은 국가 체제 자체를 서구식 의회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행정, 교육, 경제, 국방,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서양체제를 도입하여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한 후, 부르조아 계급을 육성하여 국가 지배층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지만, 천부인권이 곧 <모든 백성의 지배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 혁명의 이념은 <천부인권>이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독립협회에서도, 국가발전의 이상적인 방향은 <서구식 사회진화론>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사회진화론은 원래 스펜서가 주장한 것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그대로 역사에 도입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과 우성이 열성을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진화합니다. 강한 동물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좀더 진화하고, 진화하지 못한 동물은 도태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가장 극대화된 진화체가 바로 인간이었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원리이자, 본능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크리스트교 문명을 전파함으로서 약한 나라가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에 의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를 늘리는 <제국주의 이론>이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이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독립협회 뿐 아니라, 초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이 사회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위기는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며, 먹히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독립협회의 지식인들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치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최선을 다하여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치호 일기 -

따라서 조선의 민중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즉적적으로 저항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문명을 좀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서구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는 곧 <프랑스 혁명>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근대주의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근대주의란, <지주, 자산가> 등 유산혁명계급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계몽해야 할 사람들>로 여기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것임에도,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식인층이었고, 광범한 백성들의 실질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여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본 것이죠.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 부르조아적 운동의 공통적인 성향은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하는 <의병운동>을 아직 힘도 없는 어린 애가 생각없이 어른한테 덤비는 무모한 운동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의병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화나게 할 뿐, 자강혁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립협회는 지주와 자산가들이 개화하여 발전한 서양제도를 본받는 것을 표방하였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을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교과서의 입장입니다. 의병운동은 그냥 <의병활동>이라고 하면서, 서양을 본받자는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해서 <애국>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냥 <의병>이고, 지주계급을 지배층으로 만들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운동은 <애국>이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논리를 학자들과 교과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도 서구식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립신문 - 의병들의 활동을 부정하는 글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의 불법한 일을 분히 여겨 일어나사 고을 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인데 불법한 일을 저희들이 행하니 그건 곧 도가 아니다. 도가 없으면 난민인즉, 난민은 법률상에 큰 죄이며 나라에 점점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을 시비하겠으면 나는 법률을 더 밝혀 지키고 행실을 더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전개된 자강혁신운동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업개발을 통해 민간자본을 육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독립협회가 이전 갑신정변과 다른 점은 <우민관>은 탈피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백성들은 <무지한 존재>들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정변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반응에 신경쓰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경쓸 시간도 없었지요. 3일천하였으니.... 그러나, 독립협회는 도시상인, 농민, 노동자로부터 심지어 백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들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이념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며, 갑오개혁 이후 전 백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럼 자강 개혁운동의 몇가지 사례만 들어볼까요?

1.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고, 전 국민을 위한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그것을 위한 재원을 마련한다.
   2. 법치주의를 위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3. 민간자본 육성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서구식 산업제도를 도입한다.
   4. 보수파 내각을 퇴진 시켜 개혁파 내각을 만들고, (이후) 헌의 6조를 채택한다.
   5. 관선과 민선 인원이 동등하게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한다.

7. 98년 3월 만민공동회 vs 10월 관민공동회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는 박영효, 서재필 등 주도세력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주의적인 입장은 고종황제의 전제 왕권 강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안에서는 이러한 법치주의 입장과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박영효, 서재필 등의 법치주의파들은 개화파로 치면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등이 당장 물러가야 하며, 친러파 관리들은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또,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는 내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근대 국가로 인식한 것이죠.

고종은 열받았습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고문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조치 하였고, 박영효 등의 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서재필, 박영효 등은 3월 황제의 명을 반박하고 전국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빠져나간 후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남궁억 등의 새로운 세력은 황제권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가 쫒겨날 수는 없었고, 황제의 개혁 역시 <자강혁신과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독립협회와 일치했으니까요. 윤치호 등의 새로운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화파로 따지면 온건개화파라고 할까요? 이들의 개혁은 <강력한 전제군주 아래 황제권을 옹호하면서 이루어지는 근대화>였죠.

서재필은 반발합니다. 개혁이란, 황제와 관료들 일부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인 부르조아가 모인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개혁핵심인 부르조아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표가 모인 의회에서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서재필 등의 입헌군주파와 정부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입헌파가 고종에게 쓴 소리를 하면, 고종은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온건파는 <독립협회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면서 반년이 흘러갑니다.

7. 98년 연말 : 관민공동회의 개최와 헌의 6조의 발표

98년 10월, 윤치호 등의 전제황제파 독립협회 회원들은 <황제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헌의 6조를 발표하면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 1조의 내용(헌의 6조)

-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할 것 -
①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②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④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⑤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⑥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제 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구성할 것.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권(원)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제 3조

의장은 대황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시고, 의관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에 노고가 있는 자로 선출하시고,
반수는 인민협희에서 27세 이상인이 정치, 법률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것.

제 12조.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하지 못할 것.

독립협회의 온건파들이 주장한 헌의 6조의 내용은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1조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고종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임관을 임명할 때 대신의 뜻을 묻는 다던가하는 조항들이 은근히 속 뜻을 가지고 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치호 등은 의회제도를 원하면서도, 고종황제에게 황제권 강화라는 명분을 확실히 심어주는 타협적인 제시안을 내놓은 것이죠.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 5명을 몰아내고, 중추원의 구성과 재정개혁을 약속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여 본격적인 내각제도가 시행됩니다. 즉, 명분상의 황제권은 절대적이나, 실제 내각이 출범하여 정치를 하는 타협안이 제시된 것이죠.

또, 중추원을 구성할 때 정부관료와 독립협회 인사가 딱 절반씩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립협회의 급진파였던 서재필, 박영효 등도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독립협회의 <내각제도>가 성공한 듯 보였죠. 이 시기를 보통 <독립협회의 참정권 투쟁 성공기>라고 합니다.

중추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송나라 기구였습니다. 고려 시대는 재추가 모이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가 조선 시기에는 무신들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권한은 항상 막강한 기구였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이 중추원의 기능을 모두 상실시켜 중추원은 <내각에 대한 지문 수준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국가최고의 <의회기관>으로 재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끝나면서 중추원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훗날 일제시대 때 이완용 등의 건의로 친일파 어용기구로 다시 살아납니다.

독립협회가 정치에 참여하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민중 계몽기부터 전국적인 지회가 있었고, 회원이 4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 악마 서포터즈가 엄청난 것과 맞먹죠. 거기에 핵심 지도부가 박정양 내각으로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니, 그 위세는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박영효 들이 돌아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포터들을 늘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부의 장관으로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보수파들은 충격에 쉽싸입니다. 독립협회의 의회제도는 기존 관료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협회가 강해지면서 다시 <입헌군주제 및 법치에 의한 통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때문이죠. 보수적 관료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탄압하려 하였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이들 정부 관료들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 테러, 쿠테타 등을 시도합니다.

고종황제는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영효 등의 활동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같은 독립협회의 온건파들도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세력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여론을 주동하는 만민공동회를 혁파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부보상(보부상 : 황국협회)들을 투입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의를 방해하였습니다.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의 간섭으로 만민공동회는 혁파당하고, 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서재필은 추방되고, 박영효는 심문을 받았으며, 온건파인 윤치호는 북쪽 국경쪽으로 관직을 옮겨야 했습니다. 보수파와 성리학자들은 독립협회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였고 결국 독립협회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황국협회와 함께 해산됩니다.

8. 독립협회의 한계점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민족운동인 자주국권운동, 근대화 운동인 자강혁신운동, 민주주의 사상의 발현인 자유민권운동을 표방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기 민족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주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 황제가 실시하고 있던 광무개혁과의 충돌문제입니다. 입헌군주제(내각제도)를 통한 사회개혁과 황제권 절대화를 통한 자주성 확립이 충돌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의 이론에도 많은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일단,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주국권운동은 이완용 등 친러파을 견제하고, 아관파천을 철회하게 하면서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막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서재필, 박영효 등 친미, 친일적 성향의 개혁가였던 만큼, 일본, 미국 등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도움을 많이 얻었던 개혁가였고, 메이지 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여겼던 듯 합니다.

자강혁신운동도 전술했던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논리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의병활동 등을 애들 장난으로 여긴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회진화론 수용이 우리 독립운동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와 함께 우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사회진화론에 맞추어 민족 저항운동을 전개했으니까요.

자유민권운동은 <천부인권사상>등을 조선에 보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서구 <부르조아 유산계급>의 이론에 맞추어 토지를 가진 지주, 경제력을 가진 산업가를 자유민권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실제 토지가 없는 소작인, 차경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은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보호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간히 고종의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이 같은 시기에 언급되고 있죠? 독립협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독립협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고종의 광무개혁을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해 : 글을 적을 때 친일파 박영효, 친미파 서재필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박영효나 서지필이 나라를 매국한 친일, 친미를 했다는 뜻에서 쓴 용어가 아니라, 일본 문화, 미국 사상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 친미파라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쓰는 친러파 신채호, 친중파 김구 등의 용어도 친러, 친중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김구가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관련글 모음
2007/09/14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21) 광무개혁 이야기 1장 - 개혁의 배경설명
2007/09/06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9) 독립협회 이야기 서론 - 아관파천과 이권침탈
2007/08/30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2007/08/14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2007/08/23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7장)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2007/07/22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10장)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2007/07/17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근현대사 8) 1884. 갑신정변의 원인과 그 결과는?
2007/05/20 - [한국사정리/한국 근현대사 이야기] -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박은식의 한국통사 서문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백정 박성춘의 관민공동회 연설문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고종 황제의 대한국 국제 및 해석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2.개화기사료] - 중추원 신관제와 헌의 6조 해석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TAG 갑신정변, 갑오개혁, 개화파, 고문정치, 고종, 고종환궁, 관민공동회, 관선국회의원, 광무개혁, 광산채굴권, 구미파세력, 국민주권, 국민참정권, 국민평등권, 군사교련단, 근대주의, 근대화, 기본권, 김옥균, 남궁억, 내각기관, 내각제, 내각책임제, 다윈, 대의정치, 대의제도, 대한제국, 독립관, 독립문, 독립문건립, 독립신문, 독립협회, 러시아고문, 러시아공사관, 만민공동회, 모수관, 목포증남포토지매도저지, 민간자본육성, 민권운동, 민선국회의원, 민족운동, 박영효, 법치국가, 법치주의, 보부상, 보수파, 부국강병, 부르조아, 부보상, 사교단체, 사회진화론, 산림탈취권, 상소운동, 생존권, 서구화운동, 서재필, 석탄고기지, 순한글신문, 스펜서, 신체의자유, 아관파천, 안경수, 알렉시에프, 애국계몽운동, 언론출판집회결사의자유, 열강의이권침탈, 영문판독립신문, 영은문, 우민관, 우성지배, 윤치호, 은광채굴권, 의병, 의병운동, 의회설립운동, 의회제, 이권침탈, 이완용, 인간의기본권, 인민협회, 입헌군주정, 입헌군주제, 자강혁신운동, 자산가, 자유민권운동, 자주국권운동, 재산권, 재정고문단, 재추합좌기관, 적자생존, 전국지회, 전제황권, 절영도조차, 정동구락부, 정부어용기관, 제국주의, 제국주의이론, 중추원, 중추원관제, 지주, 진화론, 철도부설권, 칙임관, 친미파, 친부인권, 쿠테타, 크리스트교, 탁지부, 토론회, 헌의6조, 홍보기관, 황국협회, 황제권절대화, 황제절대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