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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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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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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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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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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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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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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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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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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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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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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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성왕(聖王)은 천하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욕심을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예(禮)로써 조절하였으며, 그 욕심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법으로써 제어하였다.

조절함은 방탕하게 됨을 막는 것이요, 제어함은 그 지나치고 과람하게 됨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절, 제어하는 것은 모두 천칙(天則)의 본연에 따른 것이고 사람의 사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곧 음일(淫佚)해질까 두려운 것이니, 어찌 예와 법을 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하늘이 오륜(五倫)을 서(敍)하여 법을 두고, 하늘이 등급을 질(秩)하여 예(禮)를 두었다.” 하였다. 질서의 근본은 함께 하늘에서 나온 것이니, 질이 바로 서이며 서가 바로 질이다. 그리하여 예와 법은 한가지인데, 특히 경우에 따라서 말을 다르게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위로 교(郊)촵묘(廟)의 제사(祭祀)로부터 조근(朝覲)촵직공(職貢)촵졸승(卒乘)촵부세(賦稅) 따위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라 하며 또한 법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그 근본이 이미 한가지이므로 그 작용하는 것도 또한 처음부터 같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쇠퇴하고 도의가 망해져서 선왕(先王)의 전장(典章)과 법도가 다 찢기고 없어지니, 임금된 자는 천하를 자기 한 몸의 사사로운 물건인 양 여긴다. 대저 천하는 큰 물건이요, 천하의 이(利)는 큰 이인데, 이것을 제가 오로지 하고자 생각하므로 진실로 천하 사람을 위엄으로 협박하고 통절하게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하여 제 요령껏 혹독한 형벌을 제정하여 천하를 호령하면서, 그것을 법이라 하였다. 이 법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사리(私利)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하늘의 질과 서가 아니었다.

예란 제사에 제기나 벌여놓는 것처럼 대단하지도 않은 일뿐이고, 법이란 형벌과 옥송(獄訟) 따위뿐이다. 이러하니 그 예가 되는 근본을 잃은 것이 어찌 예뿐이리요? 법도 또한 법이라 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법의 근본이 하늘에서 나왔고, 사람은 명을 하늘로부터 품수(稟受)했은즉, 법 앞에는 귀한 사람, 천한 사람의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의 규제를 받아서 감히 스스로 방자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참으로 선왕의 예법인 것이다.

지금은 법을 제정할 때 하늘에 근본을 두지 않고 사람의 사심으로써 만든다. 사람이 제 마음대로 만들었으니 그 규제를 기꺼이 받겠는가? 그러므로 후세의 법은 오직 신민(臣民)에게만 시행될 뿐이고 천자에게는 상관이 없다. 오직 상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천자가 제 하고 싶어하는 데에 따라서 법을 만든다. 게다가 제 의사를 한껏 반영해서 음란함을 부리며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만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면서, 오히려 방자하게 민중에게 호령하기를, “이것이 진실로 법이다.” 한다. 아아! 법을 만든 그 근본이 어찌 참으르 그러했으리요? 세상 선비들은 보고 들은 것에 익숙해졌고, 임금의 위엄을 겁내어서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군신(君臣) 사이의 의(義)에는 죽음은 있어도 버림받음은 없다는 것과,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장차 하려는 뜻이 있으면 반드시 베어 죽인다.”라는 말을 망령되게 인용하고, 뜻을 굽히고 세상에 아부하며 경전(經傳)을 인용하여 억지로 갖다 붙인다.

무릇 힘으로 항거해내지 못하면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천지의 상도(常道)요, 고금의 대의(大義)라 한다면, 이것은 또 2천 년 이래로 학문을 강론한 자의 허물이다. 그리고 그 예와 법의 근본을 능히 깨달은 사람도 드물었다. 하물며 우리 동방은 궁벽지게 한 모퉁이에 있어 그것을 존숭(尊崇)하고 흠모한 이는 오직 중국 진(秦)촵한(漢) 이후의 선비였다. 이를 본받고 이를 법하면서 그들의 조잡한 학설만을 배울 뿐이고, 진리는 탐구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형적(形跡)만 비슷하도록 모방할 뿐이며, 몸소 실행하지는 않은 터인즉, 선왕의 전장(典章)을 어찌 급급히 말했겠는가. 이러므로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한 번도 좋은 시대가 없었다.

내가 더벅머리 아이 적에, 근세의 큰 선비인 다산(茶山) 선생이 저술한 글이 수십 종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목민심서(牧民心書)》 같은 것은 모두 옥송(獄訟)을 불쌍하게 여기고 백성에게 편리하도록 하는 절실한 글이거니와, 더구나 《방례초본(邦禮艸本)》은 나라를 경영하고 다스림을 마련하여, 지난 세대를 잇달고 내후(來後)를 개발하는 큰 전장이니 주관(周官) 법도에 근본하여 그때의 형편과 인정에 알맞도록 참작하였다.

바야흐로 고요한 마음으로 독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어서는, 비록 맹자(孟子)의 말이라도 따르지 않음이 있었는데, 하물며 그 이하인 마(馬)촵정(鄭)촵공(孔)촵가(賈)이겠는가. 자신의 서문에, “선왕은 예로써 법했는데, 후왕(後王)은 법으로써 법했다.” 했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학문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미 예를 법으로 할 수 있음을 알았으면, 예 아닌 것을 법으로 할 수가 없음도 또한 당연히 알아야 한다. 이러므로 이 말은 질서의 근본이 모두 천칙에서 나왔고 예와 법이 한 가지라는 것으로,후세가 함부로 사욕을 부리면서 억지로 법이라고 이름한 것과는 다르다. 선생 같은 분은, 호걸스러운 사람이 문왕(文王)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왔다고 할 만하지 않겠는가.

아아, 선생의 재주와 학문도 이미 세상에 펼쳐져 시행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과 빗맞고 남들에게 따돌림당해서 거친 산, 장기(?氣) 있는 바닷가로 귀양까지 가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늙어서 죽기까지 한갓 빈말만을 세상에 남겼은즉 이것 또한 이미 슬픈 일이다.

그런데 세상의 도의가 더욱 나빠지고 선비의 기풍이 더욱 비루해져서 오직 녹봉(祿俸)과 이욕(利慾)만을 도모하여, 권세와 임금의 총애가 있는 사람의 집에 부지런히 드나들거나, 그렇지 않고 산림에서 도덕을 강구하고 학문을 담론하는 자도 또한 악착스럽게 고비(皐比)에 앉아서 문호(門戶) 하나 수립하여 제 한 몸 사사로이 계획하는 데 급급하다. 선생의 말씀은 저 은하수 같이 아득하게 여겨서 일찍이 지나치는 길에서도 묻지를 않아, 선생의 글이 상자 속에 담긴 채로 먼지와 그을음이 앉고 좀벌레만 배부르게 한 지가 벌써 1백 년이나 되었으니, 나는 여기에서 그윽이 느낀 바가 있다. 일찍이 들으니, 서양 사람으로서 몽테스키외는 《만법정리(萬法精理 : 법의 정신)》를 저술했고, 루소는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했는데, 정부에서 그 책을 급히 구해서 시행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다 한다. 학설이 한번 나오자 바람이 일 듯이, 우레가 움직이듯이 하여 세상 사람들의 보고 들음을 불끈하게 한번 새롭게 하였고, 또한 그에 따라서 더욱 깊이 연구하고 더욱 정밀하게 강론하였으니, 지금 유럽 여러 나라가 나날이 부강하게 되는 것은 모두 학술의 공이다.

지금 선생의 글로써 몽테스키외와 루소 등 여러 사람의 학술을 비교하여, 그 사이에 경중을 가늠하기는 진실로 쉽지 않으나, 다만 저들은 모두 분명한 말로 바로 지적하고 숨기거나 꺼리는 바가 없는 까닭에 가슴속 기이한 포부를 능히 죄다 발표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말은 완곡하면서 정당하고, 정밀한 중에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가끔 노출되어서 지극히 이치가 있다. 이따금 문장을 대하면, 여러 번 탄식하면서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는바, 이것은 선생이 만났던 시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이유로 선생이 저 사람들보다 못함이 있다 한다면, 사리에 합당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선생의 학술은 오직 당시에 시용(施用)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구한 공언(空言)처럼 취급되어 강론하지 않았다. 몽테스키외와 루소 같은 여러 사람들의 도(道)와 말이 시행되어, 그 공적이 한 세상에 아름답고 광채가 백대에 드리운 것과 비교하여 과연 어떻다 하겠는가. 이 점에서 나라가 선생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나는 거듭 슬퍼하고, 동서양이 서로 비교되지 않음을 깊이 한탄하는 바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 사람의 때를 만나고 못 만남에 따라서 나라의 성쇠와 존망이 매였은즉 내가 선생을 위해 슬퍼함도, 어찌 다만 그의 때를 만나지 못했음을 위한 것뿐이겠는가. 근래에 동지 여러 사람이 회사를 세우고 국조(國朝)의 문헌과,산림에 숨어 살던 기숙(耆宿)의 저술을 수집하면서 이 글을 첫째로 간행하였다. 선생의 글이 끝내 묻혀버리지 않을 줄은 내가 진실로 알고 있었거니와, 그 먼지와 그을음 앉은 상자 속에서 나와서 천하에 공포되게 된 것인즉, 제군의 애씀이 부지런했다 할 수가 있다. 오직 그것이 전해지지 않은 까닭에 사람들이 강론할 수 없었고, 오직 강독하지 못했으므로 또한 시행될 수가 없었다. 진실로 널리 유포되어서 강독하는 자가 많아진다면, 취하여 정사에 시행할 자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무릇 선생의 글이 정사에 시행되어서 질서와 전례의 근본을 밝히게 된다면, 그것이 겨우 한 나라의 법이 될 뿐 아니라 천하 후세의 법이 될 것임도 의심할 바 없다. 그런즉 선생이 비록 당시에는 불우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대우받음은 쉽게 요량하지 못했으리라.

무신(戊申)년 4월 초하룻날 아침에 후학 이건방(李建芳)은 삼가 서문한다.

- 경세유표, 방례초본 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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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중심지는 도대체 어디인가?

1. 기자 조선이란 무엇인가?

중국에서는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항상 기자 조선을 염두에 두고 서술합니다. 고조선을 세운 것은 단군이지만, 중국에서 기자가 건너와 단군조선을 개화시켰고 단군조선이 문명화된 것은 기자의 영향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조선시대의 지배층도 이 기자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고, 문명의 개화는 기자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침략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기자 조선의 이야기를 중국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기자가 중국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요하 서쪽에 위치한 조선으로 단군이 세운 단군조선과는 별도의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단군조선이 새로운 세력인 지자조선에게 서쪽 영토를 일부 나눠준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서양이나 중국식으로 보면 봉건제도적인 성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이 기자조선은 나중에, 또 다시 중국에서 넘어온 우리나라 유민세력인 위만조선에게 무너집니다. 그리고 위만조선은 중국 한무제에게 멸망당합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별도의 나라로 본다면 한사군이 고조선을 멸망시킨 사건은 단군조선과 무관한 일이 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조선만 고조선으로 기록해놓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위만조선은 한나라와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다 망한 나라입니다. 진국, 진번, 임둔이 한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막으면서 중계무역을 독점하였고, 중계무역으로 쌓은 부를 이용하여 주변 임둔, 진번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리고, 흉노와 연합하여 한에 대항하려 했습니다. 위만조선의 이러한 행동은 한나라에게 커다란 위협이였고, 한무제는 적극적으로 위만조선을 공략하여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주장은 가설에 불과하지만, 최근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 고조선의 중심지는 평양이다.

고조선은 그 중심지가 어디인지를 놓고 많은 이견이 있습니다. 실증주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을 거점으로 하는 평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주의적인 학자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합니다. 최근에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다는 이동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럼, 평양설, 요동설, 이동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죠.

평양설을 주장하는 사례부터 볼까요?

고조선 중심지를 평양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나 학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평양설을 주장하던 시기가 북방 요동을 점령한 민족에 의해 침입을 받던 시기라는 점이죠. 북방 민족에게 침입을 받는 시기에 고조선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발언은 민족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매국적 행위로 지탄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 예를 들어볼까요?

고조선 중심지가 평양이라고 주장한 문헌은 일단 <삼국유사>가 있습니다. 삼국유사는 평양에서 단군이 고조선을 세웠다고 기정사실화 해서 적어놓고 있죠. 일연이 삼국유사를 적은 시기는 몽고 침략기로서 문화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 몽골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몽골이 점령한 요동이 아닌 평양이어야 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안정복, 정약용 등 실학적 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평양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청나라가 강성했고, 청나라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만주원류고는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를 청나라 중심으로 엮은 책으로, 청과 조선은 문화적 뿌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안정복과 정약용은 민족적 자존심 차원에서 단군 조선의 위치는 청의 근거지인 요동이 아니라 평양이라고 주장합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조선의 중심지를 압록강 이남으로 한정함으로서 청나라의 역사인식에 정면으로 반발합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에서는 고조선의 중심지는 한반도라고 정하고, 훗날 영토를 넓혀 요서를 점령하고 연과 국경이 마주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시작하여 중국쪽으로 확장된 국가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민족의 뿌리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였습니다. 정약용은 낙랑, 현도, 임둔(함경도-평양-임진강)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라고 주장합니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서는 고조선의 영토는 요서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였으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평양임을 역설합니다. 조선시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국지리지 등의 단군관련 기사도 평양중심의 단군조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일제 문헌고증사학자들은 철저한 고증을 통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라는 것을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한군현의 위치가 요동이 아니라 한반도 내라는 것도 이들이 밝혀내려고 하였고, 단군조선의 위치도 객관적으로 밝히려고 했습니다. 이병도는 아사달은 평양, 패수는 청천강, 만번한은 박천강, 열수는 대동강으로 파악하여 고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임을 주장합니다.

3. 고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이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의 공통점은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진 시대에 국가적 위상을 높이려고 한 시도와 맞물린다는 점입니다.

요동설은 조선 초기 권람의 <응제시주>에서 처음으로 보입니다. 권람은 낙랑은 압록강 북쪽이며, 기자조선은 요동과 요서에 걸친 광대한 영역국가라고 주장합니다. 정도전은 이러한 옛 조선을 계승한 조선왕조가 요동정벌을 하여 옛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북벌을 계획하여 당시 중국 명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멀어지기도 합니다.

17세기에 남인학자들은 이러한 요동설을 체계화 합니다. 홍여하는 정묘호란, 병자호란 이후 북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나라는 우리 옛 땅을 강탈한 도적이라고 말합니다. 이익, 이종휘 등은 이러한 사상을 <소중화 사상>과 연결시켜, 중국 정통 국가인 <명>이 멸망한 뒤 중화사상의 전통은 오랑캐인 청이 아니라 <조선>에 넘어왔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청>은 중국 영토와 옛 고조선의 영토를 강탈한 침입자라고 주장합니다. 청의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했던 북학파 역시 <청>이 고조성의 영토를 차지한 국가라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실학자들을 거쳐 일제시대 민족사학자들에게 계승됩니다.

평양설과 요동설은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내리기 어렵습니다. 또, 평양설과 요동설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한다고 해서, 그 입장이 애국적이거나 매국적이라는 판단도 내릴 수 없습니다. 평양설은 외세 침략에 맞서 우리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찾으려고 한 애국심의 발로이며, 요동설도 우리 영역을 요동너머로 정함으로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려는 시도였습니다. 즉, 이 두가지는 민족적 처지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당시대에는 필연적으로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상반된 학설이였던 것이지요.

4. 고조선 중심지의 이동설

이동설의 핵심내용은 고조선이 요동에서 건국하였으나 후에 한반도 내부로 이동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주장이였습니다. 실제 고조선 문화를 규정하는 것은 비파형 동검 문화인데, 비파형 동검이 출현한 것은 요서가 먼저이고, 요동으로 차츰 전파됩니다. 이것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점차 이동함을 보여줍니다.

만약 고조선 중심지가 초기부터 평양이라면 한가지 모순이 생깁니다. 평양에서 발견되는 고조선기 세형동검은 그 상한선이 기원전 4세기를 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기원전 4세기 이전의 고조선은 무엇을 들고 중국과 항쟁했을까요?

즉, 요동에서 기원전 4세기 이전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이였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조선의 중심지는 비파형 동검을 사용한 요동에서 뿌리내리고 있다가, 중국과의 항쟁(기원전 4세기 연의 침입)에서 밀린 후 평양지역으로 이동했다는 학설입니다. 평양으로 이동 후 한국형 세형동검을 만들어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학설이 최근에는 유력한 학설로 자리잡았습니다.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은 고조선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고조선 이야기를 적을 때 상세하게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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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