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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28 (근현대사 10장)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7)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