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단군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삼국 ~ 일제시대)

1. 삼국시대에는 고조선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들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 시대 기록들을 살펴보면, 거의 자신들의 계통을 철기 시대 국가들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삼국은 모두 독자적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의 뿌리는 북방에서 왔지만, 독자적인 영역국가임을 주장합니다.

사실 삼국사기라는 우리 역사서의 편찬 태도 자체가 고대 고조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볼 때, 고조선에 대한 삼국시대 지배층들의 인식은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를 통해 읽어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삼국시대의 지배층들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하였다는 근거는 삼국사기 외의 다른 저서들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을 분립적 역사의식, 삼국유민적 역사의식, 독립적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삼국시대의 삼국이란 실제로 <대립>하는 경쟁 국가였으며, 그들 사이에 동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단, 북방의 고조선- 남한의 삼한 사회라는 전통적인 씨족공동체 성격이 잔존하여 언어의 유사성과 복식, 풍습의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계기만 있다면 동족의식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역사서들은 모두 자국의 왕실계보와 중앙집권강화를 위해 작성되었을 뿐, 자국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지는 않았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계통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더 이상의 연원을 찾지 못하였고, 신라는 독자적인 건국신화를 가지고 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삼국시대 자체에 고조선 인식이나 민족의식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단, 고구려 - 백제가 같은 계통이었고, 고구려, 백제가 각각 요동, 요서 경영을 하였다는 중국 기사로 미루어보아, 이들 국가 사이에는 은나라 집단에서 파생된 동이족이라는 관념은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2. 통일된 신라는 국가의식은 있었으나, 고조선 인식은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역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신라의 통일 자체가 대동강 이남에 한정된 불완전한 것이었고, 당과의 관계 개선이 국가 기원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단, 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삼국의 백성은 모두 하나의 민족이라는 <삼한일통의식>이 보입니다. 예로, 신라 9주를 고구려, 백제를 고려하여 편제한다던가, 신라 중앙군인 9서당에 백제, 고구려, 말갈인 등을 편제한다던가 하는 것들이 그 예이죠.

또, 발해를 북국이라고 부르면서, 같은 계통의 국가라는 의식을 보이기도 합니다. 발해와는 국경을 접하는 대립국가이면서도,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우호적인 교류관계를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삼한일통의식>은 신라 말기로 갈수록 <신라 중심의식>만 남게 됩니다. 그 이유는 신라 사회를 지배한 <골품제> 때문입니다. 골품제라는 제도에서 고구려, 백제의 유민이나, 품족들이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기가 힘들었고, 신라 하대 골족의 상호 항쟁도 치열했습니다. 이렇게 신분제의 모순으로 삐걱거리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을 찾아봐라!>라는 주문은 무리입니다.

결국 후삼국의 성립으로 <삼한일통의식>은 산산조각이 납니다. 후백제, 후고구려의 건국 자체가 다시 백제, 고구려 등 분립적인 기원을 주장하면서 신라와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까요. 즉, 신라사회의 골품제적 한계가 같은 <기원>을 찾아야하는 당위성을 억눌렀던 것입니다.

3. 고려 전기에도 고조선을 찾는 자가 없었다.

고려는 통일 후 다시 <삼한일통의식>을 주장합나다. 마한-진한-변한 등의 삼한의 계보와 통일신라로 넘어선 통일 계보는 모두 같은 뿌리에서 기원된 것임을 말한 것이죠. 단, 이 때의 <일통> 주체는 초기에는 <고구려>를 계승한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호가 고려(고구려)였고, 초기에는 활발한 북진정책을 실시하였으니까요. 그러나 문벌귀족사회가 보수화된 12세기 이후에는 다시 <신라중심>의 일통의식으로 전환됩니다.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금의 세력확대 등의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고려사회는 철저한 보수주의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보수적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저술된 책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였고, 삼국사기 역시 신라중심의 사관이 많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 전기에는 아직도 각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 독립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조선으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는 역사 문헌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백성들의 민란은 고구려, 백제 계승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벌론에 기반하였고, 김부식의 묘청진압은 신라 계승의식을 표방하고 있었습니다.

4. 고려 후기 : 드디어 단군을 발견하다.

고려 후기에는 드디어 고조선과 단군에 대한 기사가 실린 역사서들이 출간됩니다.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신정변을 통한 극심한 사회의 혼란을 겪었고, 몽골과의 40년간에 걸친 항쟁으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지배층은 민중들에게 국가와 지배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민족적 기원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단, 민족의 기원을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의 위대함을 민족적 차원에서 표출한 작품이 이규보의 <동명왕편>입니다. 동명왕편은 무신집권기의 사회혼란상에서 지어진 저서입니다.

이어, 몽골침략기에는 드디어 단군까지 민족기원을 거슬러 올라간 책이 집필되었습니다. 이 책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입니다. 이 책들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은 <저서 해석> 포스트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특히, 제왕운기는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삼조선설>을 주장하여,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체계화하였습니다.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을 민족적 시조로 하여 <전조선>, 기자를 문명화의 상징으로 하여 <후조선>으로 이분화하여 고조선을 증명하였습니다. 단, 제왕운기에서는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찬탈한 <위만조선>은 철저히 부정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전, 후 고조선은 이후 준왕이 남으로 내려오면서 <삼한>에 전통에 계승되었고, 그 이후 <삼국>에 전통이 계승되면서 고려까지 민족적 힘이 내려왔다는 내용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단군기년설>도 등장합니다. 유교에서는 600년을 가장 좋은 수로 여기고, 600이 들어가는 숫자는 번영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단기 3600년이 되는 고려 시대는 600 * 6이라는 엄청나게 좋은 운수를 가진 해이므로, 길하다는 것이 바로 단군기년설입니다. 즉, 단군을 민족시조로 하여 연도를 계산하고, 이 단군기년을 유교적 원리와 결합하여 민족 기원의 정당성과 다복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논리로 인해 정착된 단군의 기원은 조선건국에도 반영되었고, 조선시대 단군기년의 기원으로 작용합니다.

5. 조선시대에는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하다

조선 전기에는 이제 단군을 민족 시조로 확정합니다. 이성계가 건국후 국호를 배정받기 위해 중국에 건의한 국명 중에 <조선>이 있었으며, 이 <조선>이 곧 국호가 됩니다. 즉, 국호 자체가 <조선>이었고, 단군을 시조로 하는 국가가 탄생한 것이지요. 따라서 조선 초기의 저서들에는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많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응제시주 등에는 모두 단군 관련 기사가 적혀있으며, 조선 초기 태조기에는 요동정벌을, 세종 기에는 4군 6진 개척 등을 실시하면서 상당히 북진적인 국가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6세기 사림파가 정권을 잡고, 붕당정치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북진 정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진, 병자난 등 국난을 겪으면서 단군을 조상으로 하는 민족 기원 의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특히 전쟁 이후 17세기에는 단군에 대한 막연한 <민족 시조> 개념이 아닌, 단군이 어떻게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실학자들은 싫증적으로 고조선의 존재, 고구려와 발해의 존재까지 증명하여 민족의 기원을 체계적으로 연결하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익은 독자적인 <삼한 정통설>을 내세우면서 고조선 - 삼한 - 삼국 - 통일신라라는 개념을 확립하였고, 많은 실학자들이 다양한 기원론을 주장합니다. 유득공은 발해고를 저술하여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였습니다.

  - 이익의 삼한정통론과 단군 인식

동국의 역대 흥망은 대략 중국민족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 단군은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흥하였다. 주나라 무왕대에 이르러 기자가 와서 조선왕에 책봉되었다. 그 뜻한 무엇인가? 단군조선의 후예들이 점점 쇠퇴하여 미약하였고, 국가의 임금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기자가 와서 새롭게 문을 연 것이다. 여기에 8조의 교를 내리니 지금 전하는 바가 3개조이다. (중략)

무릇 문명의 개화는 실로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이 그 국가의 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위만이 와서 간사함으로 준왕을 몰아내었다. 준왕은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영토를 다시 넓히니, 준왕에게 복속한 나라가 50여국이었다. 이로서 동쪽 국가의 정통은 끊기지 않게 된 것이다. (중략)

(그 이후..)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은 모두 동서로 나뉘어 있고, 그 정통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이에 마땅히 강목을 따져 보니, 남북조 시대의 선례를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중국 남북조 시대에 정통이 없는 것처럼 삼한도 정통은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뜻인 듯 합니다.) (중략)

지금 경주는 진한의 옛 터이며, 그 땅의 지계가 바르게 잡혀있다. 그 땅이 속되지 아니하며, 모자람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어리석은 오랑캐의 풍속이란 말인가? 나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하겠다. 이것은 필시 기자가 와서 개화한 것의 영향이 큰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문헌에 증거가 있다면 내가 능히 밝힐 수 있다고 하였다. 또, 과거 문헌에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가히 추론하여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익이 주장한 삼한정통론 -

6. 일제시대에는 진정한 <민족>의 개념까지 정립하게 되다.

조선 말기 이후 외세의 침투 속에서 고조선사에 대한 인식은 더욱 강화됩니다. 사실, 조선시기까지의 단군에 대한 언급은 거의 지배층 위주의 논쟁이었습니다. 왜냐면, 근대사회까지 우리 사회는 양반과 상민, 노비가 존재하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양반과 노비가 같은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공유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인, 상민, 노비는 민족의식보다는 신분의식이 더 크게 삶을 지배하였습니다. 이들이 민족의식을 발휘하는 때는 <국난, 외침> 등의 국가적 문제가 있을 때였습니다. 실제, 국난이 있을 경우에도 피지배층들은 <민족의식>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공동체적인 향촌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노력에서 <민족의식>처럼 보이는 국가 수호 의식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조선 말기 외세의 침략과 일본의 조선 정복 야욕은 신분을 넘어선 전 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적인 종교인 <대종교>가 등장하여 단군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 기원을 민중에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이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확립됩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의 동력을 <정신>으로 보고 정신의 성쇠에 따른 역사의 순환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고조선을 민족의 기원이자, 중흥기로 보았습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기자 조선은 철저히 부정하고, 고조선 이래 고구려-발해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기원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채호는 고조선 이래 북방 정신이 쇠퇴한 것은 금국정벌을 주장했던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김부식 등 문벌보수파에게 진압당한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 사건이 곧 민족적 정신이 쇠퇴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서 <1천년래 대사건>으로 인식한 것이죠. 이 사건이래 단군 조선의 민족기운이 쇠퇴하여 결국 일제 식민지 지배기까지 오게되었다고 말합니다.

이후,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등의 신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조선 전통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조선학 운동>까지 전개하며 민족의 기원인 단군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들 민족주의 학자들과 사회주의 학자들의 대부분이 월북하거나, 납치당하면서 신민족주의적인 경향의 학풍은 남한 사회에서 대부분 단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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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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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이야기는 설화인가, 허구인가?

1. 단군이야기의 기록

단군이야기는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 최초의 기록이 나타납니다. 이 이야기는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의 자손이라는 선민사상, 곰 부족이라는 토템 등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고대 설화입니다. 우리는 보통 단군의 이야기를 신화라고 많이 부르는데, 신화는 실제 역사 이야기와는 별도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허구적인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단군 이야기는 허구적인 이야기보다는 당시 역사상을 사회발전단계에 맞추어 설명하는 이야기이므로 신화보다는 설화가 맞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단군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신화로 보아 단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논의는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반학자들에 의해 조작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럼 일단, 일제시대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주요 주장을 적어볼까요?

2. 단군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신화일 뿐이다.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일본의 논리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역사적으로 당연하다는 하나의 논리를 위해 그 <논리> 선상에 모든 한국사를 끼워맞추는 식의 주장입니다. 그 논리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일선동조론, 만선사관 등 끝도없이 만들어졌지만, 여기서는 단군 관련 논의만 보겠습니다.

단군 시기에 대한 일본측의 가장 큰 주장은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한반도에는 단군이라는 인물이 없었으며, 이것은 한국인들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이라는 거죠. 실제 한반도는 위만조선과 한사군 등 중국의 식민지 정권에서부터 출발하므로, 한반도는 애초에 식민지 국가였다는 논리입니다. 이 것에 대한 일본인의 주장을 적어볼까요?

- 조선은 석기시대 없이 위만이라는 중국인이 건너와 중국 한사군에게 멸망하였고, 금속문명이 최초의 문명으로서 고대 조선은 식민지 상태에서 출발한다고 일본인 학자들은 주장한다. -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판부) -

또 일본인들은 단군신화가 만들어진 배경을 대몽항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설정합나다. 몽골침략기에 고려인들이 외세와 싸우면서 국난극복에 도움이 되는 통일 사상이 필요했는데, 여기에 부응하기 위해 단군신화라는 근거없는 신화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보아도 일본측의 주장은 이상합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의 신화에는 태양신부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상한 신까지 더 황당하거든요. 일본건국신화는 더욱 역사적 근거없이 천황가의 신성성을 과시하기 위한 부분이 더 큽니다. 뭐 묻은 자들에게는 뭐 묻은 것만 보인다고, 스스로의 역사가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 남의 역사도 그렇게 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부분은 역사적으로 반박해야 하므로 단군 설화가 단지 허구가 아님을 밝혀야 되겠죠?

3. 단군이야기는 사회상을 담고 있다.

푸코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화는 신들의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설화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므로 그 속에는 인간들의 바람뿐만 아니라 실제 인간들의 삶이 살아 숨쉬고 있다고 말합니다. 단군설화는 신화를 넘어선 설화이고, 설화를 넘어서면 역사적 요소가 보입니다. 단군의 건국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하면, 위나라의 <위서>에서 가져온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 위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에, 우리 주장이 좀더 설득력을 잃어가지만, 단군의 조선 건국은 역사적 배경을 지녔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이 주장하는 한반도에는 청동기가 없었다는 것은 현재 잘못된 주장임이 밝혀졌습니다. 한반도에는 청동기 시대와 고조선의 유물 뿐만 아니라 신석기, 구석기 유물도 다수 나오고 있으니까요. 또 관자, 산해경, 위략 등의 중국 사서에 고조선과 중국이 접촉한 사실들이 많이 보입니다. 단군이 허구라면 중국 정사들도 다 허구가 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환인이라는 표현이 고조선 당시에는 없던 용어를 고려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 자체가 허구이며, 신화 구조 자체가 허구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인이라는 표현은 고려 당시 <하늘님>을 표현할 때, 종종 쓰는 보통명사이므로, 하늘에 계신 신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일 뿐입니다. 환인은 불교식 용어로 <제석천>이라는 신을 뜻하는 용어인데, 단군신화에서는 단지 하늘에 계신 신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 했을 뿐, 허구적으로 만든 말이 아닙니다.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는 일본 고대사람들이 첨부터 그렇게 불렀을까요? 아마, 아주 고대인들은 다른 용어로 불렀을 것입니다.

또 일본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손, 사람과 곰의 결혼 등의 역사성을 부정합니다만, 일본 신화를 보면 일본이 과연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생각됩니다. 일본의 신들은 남매끼리 결혼하여 계속 신을 낳고, 임신하고, 또 가족끼리 결혼하기를 반복합니다. 사실, 동아시아에는 곰이 나오는 신화와 하늘에서 신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소위 <친신강림(일본 천황가가 주로 쓰는 말입니다.)>은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왜냐면, 당시 동아시아 고대 사회에서는 선민사상을 가진 부족 위주로 정복사업을 벌였고, 곰 등 토템을 가진 타부족과의 항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역사가 있었으니까요.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강신화>는 하늘에서 신이 내려왔다는 고대 보편적 관념을 따른 것입니다. <인수교혼>이라고 하는 사람과 동물의 혼인은 당시 전쟁과 연합이 계속되는 사회상을 상징하는 것 뿐입니다. 푸코는 이러한 설화의 역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단군신화에는 한인, 황웅, 풍백, 우사, 운사 등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들어있다고 일본측이 주장하면서, 허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적 사상을 고려인들이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풀어 쓴 것일 뿐입니다. 실제,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고기, 위서, 본기 등 이전 사서들을 인용하면서, 그 용어를 스님인 일연이 사는 고려시대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화는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신화구조 자체로 판단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일본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단군설화는 <천강신화> - <인수교혼> - <단군의 탄생>이라는 3개의 에피소드 구조로 형성된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이것은 설화 구조 속에서 그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고, 이야기를 읽어가면서 민족적 기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지침서일 뿐입니다. 이것을 액면 그대로 곰과 호랑이가 쑥을 먹었다라고 이해해 버리면, 설화 속에 숨어있는 역사적 맥락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4. 단군이야기는 역사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단군이야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그 역사성의 고증 문제입니다. 단군의 건국은 기원전 2333년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실학자인 이익 등이 <단군의 연대는, 중국 고대 태평성대 시기의 요, 순 전설시대와 맞먹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부합하기 위해 내세운 연대인데요. 실제, 중국에서는 전설 시대인 황제, 곡, 요, 순, 하나라 시대를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라 정도까지만 역사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 역시 단군의 역사성이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못하였음은 중국가 마찬가지네요.

학교 교과서에서 우리는 청동기 시대의 상한선을 기원전 10세기라고 배웁니다. 어떤 역사학자도 청동기를 기원전 2333년까지 보진 않습니다. 그 정도 상한선의 유물은 발굴된 적이 없으니까요. 즉, 우리 민족과 관련된 청동기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고조선 건국기까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삼국 정립기에야 겨우 고대 시기가 정착되었다고 말하며, 고조선은 고대 국가가 아니라 석기를 쓰는 원시국가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단군신화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발굴되지 못한 청동기 유물의 부족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고고학적 기술은 아직도 수준이 낮고, 지금까지 발굴된 것도 풍납토성 등 아주 초보적인 유물만 발굴되었습니다. 더 깊이 말하자면, 우리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로 우리 역사를 복원해야 하는데, 현재 수준이 그렇지 못한 관계로 알 수 없는 역사는 비워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어있는 부분의 역사가 많다보니 고대사에 대한 각종 루머들이 너무 많습니다. 단군시대의 족보가 나돌기도 하고, 단군시대 한반도 남부에는 전설의 고대 국가가 있었다고 까지 주장하기도 합니다. 실제, 한국사에서는 단군의 고조선 시기 남쪽 진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설명조차 없습니다. 그 때 남쪽 진국은 고조선과 무역을 했다면, 뭔가 수준있는 국가였을텐데요. 우리는 단군조선이 중국 요임금기에 건설했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도, 긍정해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중국에서도 증명되지 않은 전설시대인만큼, 우리 역시 차분히 다 연구하고 조사해서 진실이 숨겨져 있는 역사적 자료들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단군왕검을 보통 해석할 때, 단군은 제사장으로, 왕검은 정치적 수장으로 이해하여 제정일치의 군장 칭호라고 보통은 여기죠. 그러나 우리 고대사가 거의 가설 수준이듯 이것도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한국고대사는 역사적 사실을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여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자료가 빈약합니다. 사람들이 고대사를 놓고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 증거의 부족때문이죠.

5. 단군이야기의 기록들과 주요 내용들

단군설화는 삼국유사에 나오지만, 삼국유사 역시 단군 설화를 고대 사서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고기, 본기, 위서 등에서 인용하였음을 제시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죠. 중국 사서인 위서가 단군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사실일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러나 위서는 지금 중국에 남아있지 않고, 안타깝게도 소실되었습니다.

제왕운기의 본기에서 단군설화는 삼국유사랑 조금 다릅니다. 삼국유사의 단군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야기이고, 제왕운기는 단군설화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차이점만 보죠.(일연은 스님이교, 이승휴는 유교영향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 차이점이 이해됩니다.)

제왕운기에서는 환웅과 웅녀가 아니라, 단웅천왕의 손녀와 단수시이 결합하였다고 말합니다. 환웅은 단군과 연결시켜 단웅이라 적었습니다. 유학자들은 중세 유교적이고 합리적인 역사관을 추구하였던 사람들이다보니, 사람이 곰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그대로 적지 않고, 좀더 현실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이러한 단군이야기는 그 시기나 저자에 따라 조금씩은 달라집니다. 조선시대 응제시주,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의 단군신화가 각각 조금씩 명칭이 다릅니다. 그러나, 단군이야기의 존재나 사실성을 부인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중국 산둥성의 무씨 사당은 단군신화가 중국내에서도 존재하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입니다. 그 벽화에는 삼부인이 등장하며, 풍백, 운사, 우사가 보이고, 곰과 호랑이가 등장합니다. 이 무씨사당은 기원후 2세기에 제작된 것이니, 이 무렵 단군설화의 골격이 되는 이야기는 이미 고대부터 존재하였고, 이런 기원의 설화를 가진 민족들이 시베리아 남부, 중국 대륙 일부, 한반도에 널리 분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치우설화에서도 단군과의 연계성이 잘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 책을 참조하여 서술해보겠습니다.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솔출판사 참조)

치우는 중국 3황 5제 중 맏형격 되는 황제가 신농씨를 정벌할 때 살았던 인물입니다. 용어하도와 산해경을 보면, 치우의 근거지는 난하유역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훗날 고구려인인 맥족 세력의 근거지입니다. 참고로 제시한 책을 보면, 치우 형제가 81인이라는 기록은 치우 세력이 형제적 질서를 가졌음을 보여주는데, 후대 고구려의 간등이 형, 대형 등 형계열의 조직과 유사합니다. 또, 고구려 말로 무신을 주류라고 하는데, 이것이 치우라는 어원이 되었다고도 주장하네요.(좀 신방성 없어보이긴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 교수님들이 이런 상상력으로 주장을 전개하시다니...)

치우설화에서는 풍백, 우사 등이 보이는데, 풍백은 공기, 우사는 물과 관련된 농경사회의 개념이라고 합니다. 특히 운사는 번개, 벼락 등의 개념으로 치우설화에서 빠진 것을 단군설화에 넣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 운사는 벼락의 개념을 통해 당시 사회가 공식적으로 형벌을 부과할 수 있는 국가 사회로 나아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이것도, 좀 이해가 안가기는 합니다만.... 최고 교수님들이 쓴 것이니... 그런가보다하고 이해합시다.)

여기까지 제가 정리할 수 있는 단군이야기를 쭉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이제 단군신화는 그만 넘어가고, 실제 역사로 잠입해보죠... 고조선 역사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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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우리는 단일 민족인가?

1. 단일 민족이 뭐야?

한민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단일민족이다.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이 말에 대해서 혹시 의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우리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주장한 사료는 <제왕운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삼한 70여 소국도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의심하곤 한다. 뭐야? 수백번의 외침을 당해 서로간의 민족이 섞였을텐데... 고대에는 국가 경계가 없어서 민족간 이동이 많았을텐데... 고대인들 스스로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등등 의심은 끝이 없다. 또 한국성 중에서는 중국성씨도 많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체 유일한 단일민족이라는 대책없는 자부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부터 보자. 민족이라는 개념은 조선시대 이전의 역사적 자료들을 살펴보면 특정한 학자 몇몇을 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국가라는 단위를 지역공동체의 핵심으로 간주해왔다.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은 있었어도 당시에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서 삼한일통을 해야하고, 우리는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의식을 그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고려도 국가단위로 역사를 서술하였고, 조선도 역시 그러하였다. 조선시대 몇몇 실학자들은 발해를 민족국가로 보기도 하고, 단군조선에 대한 세세한 책을 편찬하기도 했지만 이것은 민족이라는 단위에 대한 심오한 고찰이라기 보다는 당시 그 시대의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이승휴가 제왕운기에서 단군을 논한 것은 몽고가 침략한 국가적 위기 상황이었고, 동명왕편 역시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발행되었다. 실학자들이 북방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역문제를 논한 것도 <청>이라는 여진국가가 등장하면서부터 국가의 정체성과 사대외교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과 연관이 깊다.

민족을 단지 생물학적으로 파악한다면, 전 세계에 단일민족은 없다. 우리 나라의 민족구성도 북방계인 몽골계통과 남방계로 나뉜다. 남방계는 눈썹이 진하고, 썽꺼풀이 있는 큰 눈에 오똑한 콧날과 뚜렷한 입술 윤곽을 특징으로 한다. 북방계통은 그 반대인 경우이다. 우리 민족은 북방계가 80%정도라고 한다. 생물학적으로 단일민족임을 주장하면 전 세계가 웃을 것이다.

2. 그런데 왜 단일 민족이야?

문제는 단일민족이라는 관점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일민족은 역사학적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즉, 우리 민족이 중국, 일본과 다른 독립된 민족이라고 생각하기 시작된 때가 언제인가를 기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청동기 시대부터 역사적 단위를 형성하였고,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주변국가와는 다르다는 것을 스스로, 그리고 주변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이 점은 모든 역사적 기원은 고대 로마로부터 나오며, 로마는 고대의 호수이자, 중세의 바탕점이다라고 보는 유럽의 시각과는 다르다. 유럽에서 영국사, 프랑스사, 독일사, 이탈리아사는 모두 따지고 올라가면 노르만, 게르만, 로마시대로 연결되어 뿌리가 좁혀진다. 즉, 그들에게 국가단위의 근대국가시기는 있어도 민족단위의 역사적 기점은 찾아보기가 애매한다. 어찌보던 중세이전의 그들은 역사를 공유한다고 보아도 된다. 그들 각국의 고대사는 로마사이며, 중세사는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나오며, 근대사는 서로 결혼으로 연결된 왕조들끼리의 결합속에서 이루어지니까...

우리는 이미 청동기 시대 이후 중국, 일본 등 주변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인도중심의 동남아사나, 이슬람 중심의 서아시아사와도 다르다. 우리는 중국에 종속되어 중국의 아류라 스스로 인식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그러한 인식은 분명해진다. 즉, 우리 나름대로의 동질적 집단을 구성하고 독자의 문화를 바탕으로 한 독립된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족의식이다. 우리는 성씨가 중국성이던, 지방에서 올라왔던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민족은 생물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단일 민족으로서의 역사

단순한 역사기록으로 살펴보자. 통일신라는 통일을 이루고 나서 <일통삼한>이라는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즉, 뿌리가 같은 삼한 민족을 영광스럽게도 신라가 통일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신라에서 이런 의식은 아직 미약하다. 이 일통삼한의식은 고려로 가면 보다 명확해진다. 제왕운기는 단군에서 비릇된 우리 민족의 유구성은 <삼한 70여국이 모두 단군의 후손>임을 명백히 강조한다. 고조선 전통이 이후 <한>을 계승하였다는 의식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이라는 칭호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라는 칭호는 개인적으로 별로 맘에 안들지만... 느려빠진 애국가라서 정말 맘에 안들지만, 우리 국가는 민족단결을 호소하는 애국가이다. 동해물이랑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호하고 애국하라는 뜻이니... 프랑스처럼 혁명가를 쓰는 것도 아니고, 네덜란드처럼 역사책을 통채로 읊는 노래도 아니다.

이러한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을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었기에 수많은 외침을 물리쳤다. 여진, 거란 등 북방민족들이 강력한 전성기를 누리다가도 망한것도 비교해 볼때, 고대와 중세의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침과 위기는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의 단일민족이라는 생각 속에서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지켜온 자존심이 만든 결과이다. 몽골침입 때도, 임진왜란 때도 스스로의 터전을 지켜 싸워온 것은 백성들이다. 물론 그들이 신분제 사회에서 지배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민족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솔직히 임진왜란 때 노비들은 일본군과의 싸움보다 노비문서를 불지르고 해방되는 일에 더 열중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농경사회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생존을 위해서는 같은 공동체 집단이 뭉쳐야 한다는 것을 정말 오랜 시간동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 이러한 단일 민족에 대한 주장은 지나친 민족주의의 폐혜라고 보는 입장에서 보면 반박당하기 쉽다.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은 보수적이고,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세계화에 역류할 수도 있는 주장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반박 역시 서구적 입장이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는 민족주의의 주장하면 보수적이라고 오해를 받는다. 나치당이 순수한 아리아인의 혈통만 지구상에 남기고 유태인을 말살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히틀러의 모순이다. 유럽 역사에서 로마인 이래 순수한 민족은 없으니까... 라틴, 게르만, 노르만, 마자르, 회교도 등등 민족적 구성이 다양하지 않은 나라가 서유럽에는 없다. 역사 자체가 치열했으니까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적인 사회도, 역사적으로 민족적 구성이 다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도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민족이라는 단어가 절실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실제, 민족이라는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도 일제시대 무렵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었다.

4. 한국의 민족주의의 특수성은?

한국 민족주의의 특수성을 말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식민지배>속에서 민족개념이 형성된 것이라고 하겠다. 솔직히 전 근대사회는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사회 구성원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되지 않는다. 민족이라는 개념도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며, 단군의 후예라던가 하는 개념들은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였다. 왜냐면 현실적으로 전근대 사회에는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들은 양반과의 관계가 중요하며, 중인들은 신분상승이 중요했던 것이지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느끼고 자부심을 갖기에는 현실이 너무 뒷받침되지 못한다. 같은 백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사회적 불평등이 발생하면 사라지고 민란, 반란, 반역 등 현실적인 문제가 더 대두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민족주의는 신분제가 철폐된 갑오개혁이후 표면적,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일제 강점기에 현실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절대 독립을 주장한 신채호에 의해서 <민중>이라는 개념과 국가를 무시한 민중들의 <무정부주의>라는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며, <의열단> 등을 통해 실제 민족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거친다. 역사적으로 민족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민족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해 낭가사상 등을 체계화 시키려고도 하였다. 박은식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수많은 위인전을 저술하고, 혼사상을 체계화한다. 신민족주의 학자인 안재홍, 정인보 등은 조선학 운동을 통해 민족의 해야할 바를 규정하려고 하였고, 민족정기, 얼사상, 심사상 등의 이론체계가 심화화기 시작한다.

즉, 한국의 민족주의는 서구열강에 점령당한 일본에게 우리가 재정복 당했다는 수치심에서 시작되어, 민족적 기운을 다시 잡아 절대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성립된 정당한 것이다. 그것은 보수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었다. 또 일제 시대 민족운동은 편협한 우리 것을 찾는 운동이 아니라 세계사적 보편성 속에서 한국사의 특수성은 과연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운동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한국의 민족운동은 수많은 시련을 겪는다. 제국주의적인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일본이 주장한 자치론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필연적으로 여기면서도, 우리의 전통사상은 지켜내려는 노력은 민족운동의 주 흐름이었다.

5. 지금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 한국사회는 다시 한번 <민족>이라는 개념을 앞에 두고 표류하고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사를 왜곡하려 하고 있고, 고대사체계를 중국중심의 체계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화사상의 <민족>개념은 민족을 넘어 정치적 논리에서까지 진행되고 있다. 중극은 아시아의 중심에서서 미국과 같은 위치를 확보하려는 것이 사실 동북공정의 최종 목적이다. 반대로 일본의 자민당은 철저하게 친미 방향으로 선회하여 미국과의 공조를 통한 아시아에서의 역할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6자 회담에서 중국과 일본은 자국의 입장을 철저히 옹호하면서 논리를 펼 것이다.

우리 사회는 내적으로 민족의 자존을 추구하는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외적으로는 당당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미국에게는 끌려다닌다. 세계화를 추구하는 시기에 FTA는 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의견일치조차 보지 못한 상태이다.

지금 이순간의 한국사회는 갈등 속에 서있다. 과연 세계화 된 사회 속에서 한국이라는 국가중심의 사상을 가지고, 철저한 실리를 추구하면서 미래를 이끌어 갈 것인가? 아니면 국가중심사상보다 민족중심사상으로 주변국에 대응하면서 민족적 자긍심과 한국사회만의 독특한 조화을 통해 다원화된 사회에 적응해나갈 것인가?

민족주의 논의는 과거만이 아닌 현재진행형이며, 누구도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난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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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운기의 3조선설

본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상제 환인은 서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웅이였다고 한다. 이 웅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려가 삼위태백에 이르러 크게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웅이 천부인 3개를 받고 귀신 3천명을 거느려 태백산 마루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분을 단웅천왕이라 이론다고 한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먹여 사람이 되게 하여 단수신과 결혼시켜 아들을 낳게 하였다. 이름을 단군이라 하니 조선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1038년을 다스리다가 이사달에 들어가니 신이 되어 죽지 않은 연고이다.   

                                                             - 제왕운기 전조선기 -

사료해석 : 제왕운기는 3조선설을 제시합니다. 단군은 전조선기의 시조요, 기자는 후조선기의 시조라는 것이지요. 이중 단군은 민족의 동원성, 유구성, 독자성의 상징이며, 기자는 문명화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3조선에서의 위만조선은 그 정통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즉, 전조선과 후조선의 <조선전통>은 위만의 찬탈이후 삼한과 삼국으로 정통이 이어졌다고 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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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