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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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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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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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화엄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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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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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측천무후를 역사 흐름 속에서 분석해보자!

측천무후는 영화, 책으로도 많이 나온 중국사의 재미있는 소재거리입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고, 잔인하면서도 영특한 면모를 지닌 요부로 나오기도 합니다. 절세미인이자, 절세요부로 평가된 이 측천무후... 하지만 절세의 미모 하나로 중국 전체를 호령하면서 82살까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나라까지 건국하였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것이 하나 쯤 있지 않았을까요? 이번 장에서는 당나라 3번째 포스트로 측천무후를 다루되, 영화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한 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당 왕가에서 측천무후의 등장 및 영향력과 관련된 시기... 거의 1/3의 시기에 이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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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1. 베일에 쌓인 그녀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중국 당나라 2대 태종의 후궁이자, 3대 고종의 황후이자, 중종과 예종의 어머니이자,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여자를 측천무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왜 무후? 무후란, 스스로 황후임을 인정하는 칭호입니다.

그녀의 칭호가 측천무후인 것은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을 스스로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측천대성황후>라고 일컬은 것이 명칭의 유래라는 설이 가장 다수설입니다. 또, 그녀의 아들 중종이 어머니를 <측천대성황제>로 부른 것도 있구요.

실제 그녀의 이름은 스스로 <조>라고 말했기 때문에, <무조>라고 불리며, 그녀가 주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측천무후의 아버지는 거상인 무사확으로서, 무사확은 수나라 시절, 당의 시조 이연에게 군자금을 제공해주고 성장한 상인이었습니다. 무사확은 이연을 밀어준 대가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력을 떨치게 되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무사확이 산둥지방(옛 북제시절 귀족들의 본거지)과도 연계된 세력이라는 점입니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아내인 장손왕후가 죽자, 후궁으로서 총애를 받습니다. 물론, 측천무후가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강조되지만, 그녀의 신분이 개국공신에다가 여러 세력에게 도움을 준 자금력이 탄탄한 상인집안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태종은 그녀를 <무미랑>이라고 부르며 매우 아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은 측천무후의 미모를 상당히 아끼다가 어느날부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와 연계된 세력들이 당 개국공신들과는 차이가 있는 구귀족 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로, 당시 집권층이자 개국공신 집단들은 <궁 내 여자의 기가 너무 강하여 문제가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의 세상은 무씨 여인의 천하가 될 것이다.> 등등의 소문 등을 이유로 무미랑을 적극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황제의 총애를 잃자 황태자인 진왕 이치(이후 고종 황제)에게 접근하여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즉, 태종의 비였던 그녀가 고종의 여자로서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불륜이 가능했던 이유는 2가지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이 전통 중화제국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방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하였던 남북조 시대 북위, 북주 등의 풍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 여자, 여자로서 황제를 꿈꾸는 여자는 중국 전통의 가부장적 윤리관으로서는 절대 수용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계통의 유목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은 아니였고, 이러한 북방적 관념이 당 초기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두 번째는 이러한 불륜적 상황을 인정해줄 수 있는 지지기반으로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고종에게는 정식 왕후인 왕황후와 고종이 사랑하는 여자인 소숙비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고종에게서 소숙비를 떼어놓기 위해 <무미랑>을 고종에게 붙여놓은 것입니다. 왕황후의 이러한 선택은 훗날 자신이 처참하게 죽게 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2. 왕황후파와 측천무후파의 대결은 정권 다툼이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당 초기 건국 상황에서 <관롱집단>과 <산둥귀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관롱집단이란, 북방민족도, 전통 한족도 아닌 관중지방의 의협집단으로 북위가 분열된 이래, 서쪽 지역에서 성장한 서위 - 북주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지연적 집단임을 말했습니다. 이 관롱집단이 곧 수, 당을 건국한 지배세력이었고, 이들의 성격상 과연 당나라가 전통 중화제국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었습니다. 관롱집단은 서위 우문태 장군부터 시작한 공신집안들로 구성되었고, 당의 개국공신으로서 역대 왕과 왕후들에게 충성하면서 자신들을 특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던 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산둥귀족은 북위가 분열된 이래 동위 - 북제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명맥을 이어온 낙양 명문가를 비롯한 전통 귀족 집안입니다. 수, 당의 건국세력인 양견, 당고조 이연은 관롱집단으로서 양견과 이연 자체가 이종사촌간입니다. 따라서 산둥귀족은 상대적으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정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북제 출신 귀족인 이 산둥귀족이 곧 측천무후를 지지하면서 개국공신 집단을 견제하려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왕황후가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측천무후는 소숙비의 10배 이상되는 강적이었습니다. 역사상 사료에는 왕황후가 착한 여인, 측천무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인으로 후대에 평가됩니다.

예로,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측천무후의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죽인 뒤 슬피 울면서 딸을 죽인 범인으로 왕황후를 지목하여 그녀를 축출합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정권에 대한 욕심으로 혈연도 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묘사되곤 하죠.

이 사건으로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측천의 책봉은 곧 관롱집단의 몰락 및 장안, 관중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과거 북제지방의 산동지방, 즉 낙양중심의 관료군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나 당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습니다. 직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시베리아 남부, 파밀 고원, 고구려 정복 등등 당의 최대 영토를 회복한 왕이었죠. 측천은 당 고종이 건재할 때는 감히 황제의 꿈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이 약해지자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입맞에 따라 왕위에 올리면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아예 아들들을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이 나라의 이름은 <주>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천을 옹호한 집단은 당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잃었던 구귀족들이었습니다.

3. 황후 옹립사건과 중종폐위 사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은 크게 3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왕황후 일파를 몰아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황후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개국공신인 관롱집단을 숙청하고, 구귀족인 산동 귀족들을 등용한 사건입니다.

2번째 큰 사건은 중종폐위 사건입니다. 무후는 자신의 아들은 중종을 폐위해 버리면서 중종과 연결된 당의 종실 제왕들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종래 측천무후를 지지하였던 산둥귀족들도 일부 숙청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후는 거의 전무후무한 전권을 휘두르게 되며, 자신의 새로운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신진관료 육성에 힘쓰게 됩니다.

마지막 사건으로는 스스로 여제가 된 사건입니다. 여제가 된 뒤 무후의 업적을 간략히 개관해 볼까요?

4. <주> 제국의 건설

측천무후가 새로운 칭호로 건국한 <주>나라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의 고대 <주나라>를 뜻합니다. 이것은 고대 주나라의 이상으로 돌아가서 주나라의 제도를 통한 이상적 국가 수립을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국호입니다.

고대 주나라의 이상적인 체제들을 역사에서는 <주례체제>라고 부릅니다. 측천무후가 생각한 고대 주나라의 주례체제의 핵심은 정전제를 이상으로 하는 <경자유전 : 농자짓는 자가 토지를 가지는 것이 옳다> 이념의 토지공유제도, 국왕을 중심으로 신료들과 합의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합좌제도> 등등의 이상적인 이념들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의 최초의 황제로서 스스로를 <황제>라 부릅니다. 따라서 측천무후가 아닌 <무측천>이 맞는 용어겠네요. 그녀의 새로운 나라 건국으로 당제국은 일시 중지되고, 당의 수도이자 관롱집단, 개국공신들의 중심지인 장안대신 산동의 구귀족 중심지인 낙양이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낙양은 이제 중국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개국공신에 대한 특혜를 대부분 없애 버리고,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합니다. 즉, 중국 역사상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확대된 것이 바로 이 <주>나라 때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법장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를 채택하여 국가주의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불교로서 국가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실제, 당 건국시기부터 건국이념은 구겸지의 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측천무후기에는 도교가 탄압받고 불교가 융성하게 됩니다.

실제, 측천무후기에는 당 건설 이후 확대된 영토와 안정된 사회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아주 크게 경제력이 급상승한 시기입니다. 농업은 발전하였고, 이미 건설된 수나라 때의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이 서로 원할하게 교차 수송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혈맥이 뚤리고 건강한 피들이 온 몸을 돌던 시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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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5. 무후의 꿈을 꾸는 자들이 등장하다.

무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중국 대륙을 호령한 여걸중의 여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후 말년에는 상황에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먼저 중종의 왕비인 위후와 그 딸 안락공주는 또 다른 <무후>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위후와 안락공주는 남편이고 아버지인 중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또 다른 여제가 되어 여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측천무후와 같은 정치적 지략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와 대립하다가 태평공주 세력에게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태평공주는 조카인 예종과 함께 그녀들을 제거하였지만, 나중에 당 현종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여인천하는 끝나고 맙니다. 당 현종은 무후가 남긴 유산들을 가지고 당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당 현종 후반에는 그 유산들을 모두 탕진하여 당 제국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현종 때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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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건릉 앞 석상>

6. 역사는 여자들의 세상을 여화의 난이라 적다.

중국 전통 역사에서는 측천무후와 같은 여걸들의 평가가 아주 부정적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한 남존여비 사상은 여자들을 비하함으로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지배 사관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남성들의 잘못된 업적, 국가적인 제도상의 미비점들을 여자로 인한 문제로 만들어, 이것을 <교훈으로서의 역사>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로 하, 은, 주나라의 멸망을 달기, 포사 등 미녀들 때문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주색>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달기가 국가를 망하게 하기 위해 <미녀와 함께 술로 담근 연못에서 마시고 놀며, 고기를 걸어놓은 나무에서 배를 채운다>는 주지육림의 이야기도 여자의 미색을 조심하라는 교훈이고, 포사가 <웃지 않는 미녀>가 되어 왕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여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나라의 시조 이연이 새로운 국가를 새운 이야기도 수양제의 후궁과의 연정 문제였다고 하거나,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이 동생의 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측천무후가 등장한 것도 고종이 그녀의 여색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위후와 안락공주가 무후의 뒤를 이어 여인천하를 만들려고 한 것을 독한 여자들의 쓸데없는 욕심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현종의 몰락을 양귀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당나라의 역사에는 여자의 여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의 역사를 기록한 송나라가 철저한 유교중심의 사대부 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실제 무후의 시기에는 중국 역사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개국공신등의 구세력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과거 관료들이 등장하여 중국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사회로 정착되던 시기였습니다. 실제, 과거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로 이 무후기이니까요.

그러나, 무후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국 사회는 더욱 더 급격히 보수화되어 갑니다. 당나라 하면 떠오르는 개방주의적, 귀족주의적 성격의 국가는 태종기부터 무후 전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무후 사후, 중국 당나라에서는 북방적인 진보성은 사라져가고 점차 보수적이면서 전통 중화주의적인 사회로 급변합니다. 특히, 현종 후반기 탈라스 전투의 패배, 안사의 난 등이 발생하면서 더욱 사회는 경직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당 현종의 시기와 양귀비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무후 이후 전개된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이자, 당의 몰락기가 동시에 보여지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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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 측천무후의 릉과 고종의 릉>
     <우 : 측천무후의 이름이 새겨지 있지 않은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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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국>의 개념을 심화해보자.

1. 국이란 무엇인가?

앞에 중국사 12장에서 은-주-춘추시대까지의 지방체제와 국, 도, 비의 개념을 심층 분석하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중 현재 국가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국>의 개념을 자세히 정리해 보도록 하죠.

국이란 원래 초기 씨족사회 및 군장사회에서 <족읍>이라는 독자적 취락을 기본으로 하던 공동체 사회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기 봉건제도에서는 이 <국>이라는 것은 왕이 하사한 봉토의 개념으로 제후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곳이었죠. 그러나 사회 경제가 발전하고, 특히 철기 무기와 농기구가 등장하면서 국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합니다. 이 국이 주왕실의 <직할지> 수준에 맞먹는 생산력과 무기기술 단계에 들어서면 점차 독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은, 주 시기의 도시국가 수준에서의 <국>은 4개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이라는 성을 쌓아 중심 수도를 이루었고, <국>전체에는 <외성>을 쌓아서 국과 그 밖의 지역(비읍)을 구분하였습니다. 비읍에 사는 자들은 지배층인 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민이라 불렀습니다.

1. 국 -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왕에게 국을 분봉받은 제후가 거주하는 지역
   2. 읍 - 원래부터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곳
   3. 도 -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하사한 분봉 지역이었으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 국가의 수도로 인식되는 지역
   4. 비 - 국의 외성 밖의 지역으로 작은 소읍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백지역

그리고 국의 교외에는 소읍으로 비읍이 존재합니다. 비읍이란 국과 국 사이의 공백이 되는 모든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야인, 비인이라 불러 국에 사는 국인과 차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비인들은 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집단적인 개간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철기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집단 취락을 형성하여 생산력을 높이게 되었는데, 이로서 비읍의 생산력은 <국>의 생산력에 버금가는 생산력을 보이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각 <국>들은 이 비읍의 생산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이러한 영토분쟁은 각 <국>의 영유권 주장으로 확대됩니다. 따라서 각 국은 이 비읍을 점령한 다음 <군>, <현>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행정구역화 한 뒤 세금을 걷어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한 제원을 확보하려 하였습니다.

2. 국의 신분질서

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는 바로 제후라 불린 국군(공)입니다. 국군이란 국에서 가장 높은 군주란 명칭이고, 제후는 왕이 분봉한 땅의 주인이란 뜻이며, 공이란 주왕실이 하사한 제후의 명칭입니다.

그러나 국을 지배하는 국군은 춘추중기까지만 해도 힘이 미약했습니다. 그들은 국에 사는 지배층(국인)들의 수장이자 대표자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군사, 제사는 국인들이 공동으로 하여 읍사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제사란 조상신이 같다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고 종법질서를 확인하는 절차로서 춘추시대 권력의 구조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춘추 5패와 전국 7웅을 거치면서 강력한 패자 중심의 정치가 진전되면서 이런 구조는 군현제도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변화됩니다.

경, 대부는 원래 제후로부터 <채읍>를 분배받아 생활하였는데, 그들은 이렇게 받은 채읍 중 중심지를 <도>라는 본읍으로 만들어 독자적인 권한을 유지하는 지배층(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분봉받은 대가로 전쟁에 적극 참여할 의무가 있었고, 공통의 제사를 통하여 종법적 혈연 관계를 확인하였습니다.

국에서 가장 낮은 지배층 계급은 <사>입니다. 사 역시 국인이었지만, 이들은 경, 대부보다 혈연관계가 소원해져서 하위 무사계급으로 추락한 지배층입니다. 그들은 전쟁 참여를 통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였고, 특히 제후, 경대부와 함께 제 3의 세력으로서 국의 지배자 계승권 분쟁, 외교 분쟁 등에 관여했습니다. 만약 국인간에 내분이나 싸움이 날 경우 이 <사>계층이 누구편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 사계급은 초기에는 몰락한 국인계급이 많았지만, 점차 부국강병을 통해 군사력이 중요해진 춘추 중기 이후에는 실력을 통해 성장한 평민층이 숫자가 많아집니다. 이들 새로운 평민 지배층은 전쟁참여의 대가로 토지를 분봉받은 영주이자, 학문을 통해 성장한 제자백가가 되기도 합니다. 또는 경, 대부로 신분상승하여 제후 밑에서 <재상>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왕들은 현명한 인재나 강병한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상>, <장군>자리를 보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자, 맹자, 한비자 등은 각국에서 서로 초빙하려 했던 유명한 제자백가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배층입니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은 일반 백성인 농인, 공인, 상인, 천민 등과 구별되는데, 그 구별법은 <작>과 <예>라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작이란, 신 앞에서 지배층으로서의 의무를 선서해서 얻은 신분을 말합니다. 흔히 우리가 공작, 백작, 남작, 자작 할 때의 그 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을 행하는 의식과 예법을 <예>라고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고결함의 상징을 이런 <예법>을 아는가로 따졌기 때문에, 이 <예>라는 의식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문명인이자, 국인입니다. 이 예는 사 계층까지만 베풀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별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네요. 이 <예>라는 단어는 후대 <예절>이라는 뜻으로 인식되어 쓰입니다. 그리고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예>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으로, 꼭 인간에게 필요한 도덕으로 재인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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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 춘추전국시대의 지역 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 배경

1. 은나라의 영역 구조

은나라 시대의 씨족 공동체적인 원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 구조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3층적인 구조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국사나 중국사에서 고대를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중층적 구조>나 <부체제>가 바로 은, 주 시대의 기본 구조입니다.

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토지 구성을 보면, 국왕은 자신의 본거지만 직할지로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나머지 땅들은 각 부족장들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서양으로 보면 그리스의 <폴리스>같은 도시국가 구조이고, 한국사로 보면 각 부족들이 모여 합의하는 <연맹왕국> 성격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은의 중층적이고 3층적인 구조를 보면 대읍(은왕 직할지) - 족읍(방백, 각 부족의 땅) - 소읍(종족단위의 마을)로 구성된 3층 구조입니다.

2. 서주 시대 초기 봉건제도에서의 지역 구조

이러한 구조는 서주시대에 <봉건제>성립과 함께 약간 바뀝니다. 봉건제도를 실시한 목적 중의 하나가 은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족읍을 주왕조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왕조는 멸망했지만, 실제 은 왕조의 세력은 은 왕조와 연합하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세력들(족읍의 군장)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는 소국의 군장들(족읍의 독자적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혈연적인 관계를 매개로 하여 토지를 분봉하는 형식으로 그 독자적 지배를 인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주나라 초기의 새로운 족읍 체제를 한번 볼까요?

은대부터 내려오는 읍은 새 제후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우 옛 거주자는 새로운 봉건제후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독자적인 옛 은의 영역에 주 왕실의 혈연성을 가진 제후를 파견하여 그 영역을 은이 아닌, 주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 왕실이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제후가 그 영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중국 사회는 중앙집권화 할 만큼 민족적 동질성이나 고유 문화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화>라는 개념이 있긴 하나 이것은 외부 적을 상대할 때 이야기이고, 각 부족은 아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중화>라는 중국중심의 공통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넘어가야 완전히 확립됩니다.

주가 새롭게 개척하여 영역을 넓힌 새로운 족읍은 국가가 지정한 주왕실의 혈연 제후에게 분봉되어 그가 옛 은나라의 씨족 사회 지배자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주 교체로 인한 사회혼란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은의 옛 부족국가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의 지배층은 인, 피지배층(정복민)은 민으로 구별함으로서 국의 구성원간에 계층적인 구별을 합니다. 지배층은 파견된 제후를 중심으로 민(정복민)과 전(토지)를 지배하며, 민은 직접생산자로서 국인의 소유물로 간주됩니다. 민(民)은 이 당시에는 정복된 노예라는 개념이 강한 단어이나, 훗날에는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즉, 이 당시의 민은 인(人,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사람 대우를 받는 지배층 밑에서 존재하는 노예같은 민(民, 피지배층)이므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하는 학설이 다수설입니다.

3. 서주 시대 중기 - 춘추시대의 지역 변화

춘추 시대에는 대읍-족읍-소읍이라는 3층적 구조와 인, 민 이라는 지배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은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국, 도, 비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춘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의 약화와 각 봉건제후들의 독자성 강화입니다. 봉건제후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문만 가졌을 뿐, 실제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방어 태세를 위한 새로운 지역 개념을 제시합니다.

주왕실은 왕기(대읍)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제후들은 각각 족읍을 국(國) 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또 제후들은 자신이 가진 국의 일부를 가신인 경, 대부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도(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비(卑)라고 합니다. 국, 도에는 각각 지배층인 인과 피지배층인 민이 삽니다. 즉, 은, 주 시대와 같은 중층적 구조이나, 달라진 점은 제후들이 성장하여 족읍을 국으로 바꾼 것이지요.

당시 왕과 제후는 동족의 대표자 성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제후의 독립지역은 국을 넘보기 어려웠고,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지배층인 인들에게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사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회의 체제나 연맹왕국 수준의 체제와 비슷합니다. 즉, 왕이 국의 민을 지배할 수 없고, 제후는 도의 민을 지배할 수 없는 각각의 독자적인 구조이지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계루부 왕이 소노부의 종묘사직을 인정한 것처럼, 춘추시대에도 각각의 분봉자들의 영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에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방>이라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읍에 속하지도 않고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이민족의 땅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의 국가들과 상당히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중원의 국들은 이러한 방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의 땅인 국과 구분하기 위해 <방>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대한 문명의 한 가운데라는 뜻으로 <중화>라고 부르고, 이민족들은 <변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국, 도, 비의 변화

춘추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제후의 영토 확대로 국, 도, 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원래 주왕실이 분봉한 땅을 의미한던 국(國)은 이제 제후가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집안이라는 뜻의 국가(國家)로 바뀝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국, 국가라는 영토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된 것입니다.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눠준 땅인 도(都)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하여 경, 대부의 독자적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도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으뜸머리의 도라는 뜻의 수도(首都)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가의 수도(서울)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卑)는 비루한 백성들이 사는 피지배계급의 땅이라는 뜻에서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각각 국가, 수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용어로 변환되는 것이며, 이렇게 국가, 수도, 변경을 갖춘 통일국가가 바로 <중화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진은 너무 단명한 까닭에 다음 한나라 시기에 이러한 중화제국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유교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 한나라가 바로 <중화>를 대표하는 민족국가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중국말은 <한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한나라가 과거 모든 사상적 체계를 차분히 완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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