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퀴즈
 

오늘은 간만에 o,x 퀴즈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서 점수와 해설을 확인해 보세요.

 

다음 10문항에 대하여 맞으면 O, 틀리면 X를 선택해 주세요.

 

1.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O
X

2. 사물놀이에 쓰이는 4가지 쇠, 장구, 북, 징은 불교의식에 쓰이며,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목어, 운판, 법고, 범좀의 네 가지 사물이 변해서 쓰인 것이다.
O
X

3. 안압지는 신라 문무황 때 만든 윌지라는 연못으로 신라가 망한 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안압' 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O
X

4.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군은 관창이다.
O
X

5. 징기스칸이 죽은 뒤 몽골 본토인 몽골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은 막내아들인 툴루이나, 실제 몽골의 2대 황제는 셋째아들인 오고타이이다.  
O
X

6.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된 왕과 왕비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이다.
O
X

7. 조선시대 지방관(수령)의 임기는 6개월이다.
O
X

8. 병자호란은 청나라를 세운 거란족과 관련된 전쟁이다.
O
X

9. 세계문화유산인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O
X

10.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여우 사냥' 작전을 전개한 러시아인들이다.
O
X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과학 발전의 비밀 : 전쟁이 과학을 진화시킨다!

003. 전쟁으로 현대 문명은 진화하다

*** 배경 : 1, 2차 세계대전 ***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무서운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싸우고 있는 집단들'에게 과학의 발전을 가져다 준답니다. 인류가 가장 잔인해지는 순간, 생존을 위해 과학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는 것이죠.

고대 서아시아의 히타이트 민족이 최초의 철제 무기로 수많은 문명을 제압한 뒤 철제 기술이 보급되어 오히려 이후 수많은 문명이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제국을 유지하고 정복전쟁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 철기 제련을 연구하는 특수기관을 두기도 하였죠. 중국의 철기 제련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가장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였습니다. 서구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학의 성장기에는 십자군이라는 큰 전쟁과 전쟁 후 아시아와의 교역이 있었답니다.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과학적 업적을 가장 많이 남긴 중국 송나라는 역사상 가장 침략을 많이 받은 중국 왕조였습니다.

그것은 근대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답니다. 특히,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국가는 어떤 과학 기술도 필요하다면 수용했으니까요. 전쟁의 승리에 필요한 것은 과학 뿐... 그 과학이 도덕적인 것인지 윤리에 어긋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윤리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시기에 과학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과학 만능주의는 너무나 위험하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순식간에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교통혁명으로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준 비행기도 2차 대전이라는 전쟁의 덕을 보았답니다. 미국은 전쟁의 승리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파괴력을 갖춘 폭격기를 만들기 위해 백년도 더 걸릴 과학기술을 엄청난 투자로 몇 년만에 이루었어요.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이 고속 비행기를 추적하기 위한 레이더를 개발하는 데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 그 결과 '마이크로파'를 개발했고 그것이 오늘날 주방의 필수품인 전자렌지의 핵심기술이 되었답니다.

또 컴퓨터 역시 2차 대전 당시 대포의 탄도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만들어졌답니다. 삼각함수 아시죠? 대포의 사정 거리와 포탄이 날아가는 각도 등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만들어진 초기의 컴퓨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지만, 그 성능은 지금의 사무용 컴퓨터 1대 수준였죠.

그럼 인터넷은?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을 띄우자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의 핵공격에서 군사통신망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로그인(log in)' 이라는 메시지를 먼 거리로 전송하는 테스트를 했는데, 그것이 성공하면서 알파넷이라는 최초의 군사용 인터넷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스위스의 물리연구소에서 윌드와이드맵(www)으로 창안한 것이죠. 1992년 미국의 마크 앤드리슨이 윕브라우저라는 것을 발명해서 지금은 전세계인의 인터넷으로 발전한 것이랍니다.

또, 인터넷 이전의 통신수단이었던 무선 전파시스템도 전쟁을 통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지금의 핸드폰에 이르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초토화시켰던 원자폭탄의 개발은 인류가 원자력이라는 원료를 사용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또한, 일본과 독일에서 자행된 인간생체실험은 매우 끔찍했지만, 미생물분야와 의료분야의 발전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요. (물론,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간의 희생으로 이런 발전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인간의 잔인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쉽게 먹을 수 있는 통조림도 전쟁의 산물이랍니다. 프랑스 혁명기,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하다 보니, 이곳 저곳으로 이동을 많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발명한 것이 프랑스 와인병을 밀봉해서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만든 전투식량, 즉 병조림이었죠. 프랑스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배를 타고 작전을 수행해도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는 전투식량을 연구했는데, 그것이 바로 병조림보다 더 밀봉효과가 강한 통조림이었답니다. 결국 통조림은 나폴레옹의 작품을 섬나라인 영국에서 해상 식품으로 개발한 것이지요.

통조림과는 좀 다르지만, 징기스칸이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넓은 대륙을 점령할 때도 '보르츠'라는 말린 육포가 큰 힘을 발휘했답니다. 보르츠는 소의 생살을 말려서 건조시킨 뒤 잘게 빻아둔 것인데, 무게도 가볍고 영양가도 높아서 말을 타고 무한정 달리는 몽골 부대에게 아주 적합한 전투 식량이었죠. 오늘날 육포의 유래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그러나, 전쟁은 승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발전은 '인류를 위한 과학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답니다. 사람을 잘 죽이기 위해 회전력이 강한 총탄을 만드는 것이 인간을 위한 과학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과학 발전과 인류의 발전을 구분해야 한답니다. 예를 들어 정확한 포탄을 날리기 위해 일기예보를 연구해서 기상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의도는 불순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혜택을 입은 것이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상학의 발전은 <전쟁이 가져다 준 혜택>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잊고 살아서는 안되겠지요. 목적과 수단, 결과를 모두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훗날에도 끔찍한 전쟁이 끝나지 않을 거에요.

자 그럼 이번엔 전쟁이 끝난 뒤 기발한 아이디어로 창조된 제품들을 한번 볼까요?

먼저 사무용품인 <스템플러 stapler>는 세계 1차 대전과 상관이 있답니다. 세계 1차대전 때 벤자민 호치키스는 총 하나로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연발 기관총인 <호치키스 기관총>을 만들었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 버리자 마피아같은 조폭을 빼고는 총을 살 사람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호치키스는 기관총의 탄창처럼 침을 장전해서 종이를 찍는 기계를 대신 팔았답니다. 그것이 바로 널리 쓰이는 스템플러, 즉 <호치키스>라는 사무용품이었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껌도 세계 2차 대전 중 식량난에 허덕이던 일본이 개발한 특허상품이랍니다. 원래 껌은 고대 마야족이 즐겨 씹었던 천연 치클이 그 유래입니다. 일본은 2차 대전 전쟁중 방탄 탱크에 사용할 수 있는 비닐 수지를 발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 식량이 너무 부족하자 전쟁용 초산비닐수지를 허기를 달랠 수 있게 씹을 수 있는 용도로 다시 개발하였고, 이후 화학약품처리를 해서 '플라스틱 초산비닐수지'로 만들어 오늘은 껌의 대중화를 이끌었답니다.

먹는 것 하나 더.... 2차 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에서 껌을 이용해서 먹는 것에 대한 불만을 해소했다면, 또 다른 패전국인 독일에서는 마실 것을 이용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했답니다. 그 음료수가 바로 '환타'라는 것이죠.

세계 2차대전 때 미국과 전쟁을 하던 독일은 적국인 미국에서 코카콜라의 원액을 공급받지 못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불안한 전시 상황에서 콜라조차 먹지 못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죠. 코카콜라 독일 지사장인 막스 카나트는 콜라를 대체할 음료수 개발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환타'였답니다. 콜라를 먹지 못하는 미국의 적국들은 환타를 마시게 되었고, 환타는 세계 5대 탄산음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세계 1차대전 때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자 붕대를 만들 면이 부족했답니다. 이 때 <킴벌리> 라는 회사가 종이의 원료인 펄프로 셀루코튼이라는 대체 면을 개발했답니다. 이 면이 너무 흡수력이 좋고 부드러워서 부상자들에게 필수품이 되었죠.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문제가 생겼어요. 너무 많이 생산하다보니 엄청난 재고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던 거에요. 그런데, 전쟁 중 여성들이 이 인공면을 생리대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바로 발상을 전환했답니다. 바로 생리대, 화장솜 등 세계최초의 여성용품으로 포장해서 판매하기 시작한거죠. 그리고 더 나아가 화장을 지우는 휴지로 팔았는데, 이게 바로 유명한 <크리넥스 티슈>라는 박스에서 한 장씩 뽑아쓰는 휴지랍니다.

또 하나.... 여성용품과는 좀 다른 개념이지만 여성들의 가슴 수술에 이용되는 실리콘. 이것은 원래 세계 2차대전 때 각종 유리제품이나 파손될 수 있는 무기를 포장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실리콘 재고는 처리할 방법이 없었죠. 당시 전쟁의 패전국 일본은 나라가 망해서 수많은 여자들이 거리에 나와 성매매 업소에서 생활했답니다. 미군은 남아도는 실리콘을 일본 게이샤들의 가슴에 주입해서 성형으로 실리콘을 처분했답니다. 이것이 소문이 나서 전쟁후 미국에서도 실리콘 성형 수술이 시작된 거죠.

자 이렇게 전쟁이 낳은 수많은 과학기술과 물품들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것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면서 이루어진 것들도 있고, 또 다른 것들은 전쟁 중에도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개발한 물품들도 있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수많은 과학의 혜택을 누리는 우리가 이 혜택만을 찬양하는 결과론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과정'을 생각하면서 겸허하게 과학의 혜택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인물 이야기...

쌍화점 속의 고려왕들 - 개혁가인가, 변태들인가?

1. 영화 쌍화점?

유하 감독이 만든 쌍화점이 극장가에서 화제라고 한다. 19세 이상 볼 수 있는 작품인데,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란다. 개인적으로는 유하 감독의 작품은 머리 아파서 잘 보지 않는다. 예전에 전직 대통령과 한국 정치 상황을 <무림>이라는 코드로 때려맞춰 만든,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을 읽은 기억이 난다. 아이디어는 기발했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박정희가 무림최고수, 무림인들이 먹는 금단의 술 <에이주 AIZu>, 5.18을 풍자한 듯한 무림의 난?.... 뭐 그 정도 껴 맞추기 수준?

압구정동이나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영화에서 뭔가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의도보다는 이슈가 앞선 감독이었다. 쌍화점에서도 동성애 코드에 뭔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는데, 일단 보고 와서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해야 하니 볼 수 밖에 없다. 결국 다 보게 되는 건가?

영화 쌍화점이 히트 상품이라니까, 쌍화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적어보야겠다. 고려의 왕들이 과연 동성애자인가?

2. 무신보다는 몽골쪽을 택했던 원종

영화 쌍화점은 어느 왕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고, 그냥 그랬다라는 여운을 남기는 포스트모던 코드를 지향한다. 왜냐면, 역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 코드와 멋들어지게 만들어진 스토리를 꾸미기 위한 배경으로 역사를 차용한 것 뿐이니까...

그럼 실제 역사에서의 쌍화점은 어떤 분위기에서 만들어졌을까?

<쌍화점>이라는 고려 가요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최초로 <충>자 항렬을 사용한 <충렬왕>부터이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몽골에 저항하던 최후의 세력인 삼별초가 완전 타도된 직후, 왕이 되었다.

충렬왕의 아버지 원종은 몽골에 항전한 <무신정권>을 뿌리뽑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쪽에 협조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다. 1264년 몽골에 가서 몽골왕의 신임을 얻음으로서 고려가 망하는 것만큼은 방지하려고 했는데, 사실 국내 무신들들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다. 

무신 임연을 시켜 실세인 무신정권의 김준을 죽여 버렸고, 다시 임연을 죽이려다가 왕에서 쫒겨났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몽골의 원조를 위해 원종은 동녕부(서경을 비롯한 서북부 영토)를 몽골에 바치기도 하였다.

몽골과 마지막으로 항전을 준비한 임연과 무신들은 결국 원종과 몽골(원)의 연합부대에 밀려, 결사항전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삼별초의 최후 항쟁>이다.

   삼별초가 탐라(제주도)에서 모두 제거당하자, 몽골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일본 원정을 위한 비용을 고려에 전가하기 위해 정동행성이란 임시기구를 만들고, 고려의 부녀자들을 몽골에 보내기 위해 결혼도감을 만든 것이다. 고려의 풍속은 문란해졌고, 부모들은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어린 딸들을 일찍 시집보내기 시작한다. 

   원종이 삼별초를 제거한 직후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되었는데, 아예 몽골에 충성한다는 뜻에서 <충>자를 붙여 <충렬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3.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충>자 돌림의 왕들...

왕이 된 충렬왕은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왕비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였다. 신하들 역시 친원파들이 대세였다.

그나마 고려가 망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인 <원종> 덕분이었다. 몽골은 1대 징기스칸 - 2대 오고타이에 이어 다시 칸을 뽑아야 했는데, 고려 원종은 후계구도에서 멀었던 비주류 왕족 쿠빌라이를 적극 밀어주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도움을 받아 <원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원종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고려는 망하지 않았지만, 충렬왕은 몽골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다. <종>을 붙이던 왕호는 <충>자가 붙은 <왕>으로 격하되었다.

황제국의 예법은 부마국(사위국)인 고려에 적용되었다. 태자는 몽골이, 세자는 고려가 사용하였다. 왕을 칭하는 <짐>은 몽골이, <고>는 고려가 사용했다. <폐하>는 몽골이, <전하>는 고려가 사용하게 되었다.

그나마 충렬왕은 원종이 실시했던 <전민변정도감> 사업 등 토지개혁을 하면서 친원파에게 소극적으로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조그만 반항만으로도 친원파들에게 크게 찍히고 말았다. 충렬왕의 유일한 보호막인 몽골 부인이 죽자 마자, 충렬왕은 바로 폐위당한다.

충렬왕 24년.... 쿠빌라이칸의 외손자이자, 충렬왕의 아들이 <살아있는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니, 이 사람이 유명한 <충선왕>이다.

그런데, 충선왕은 충렬왕보다 더 친원파들을 미워했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의 황태자인 친킴 가문의 공주였다. 충선왕은 대놓고 몽골 공주를 구박하였다.

여기서 쌍화점의 줄거리로 알려진 <바람피우는> 이야기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시작된다. 충선왕은 부인을 구박하기 위해 보란 듯이 바람을 피워 5명의 첩과 비를 두었다. 특히, 몽골의 천한 여자인 <의비> 등과 바람을 피워 몽골 공주를 자극하였다.

실제로, 27대 충숙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의비가 낳은 아들이다. 거기에 친원파들이 아닌 신진 유학 세력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개혁조서>를 발표해 버린다. 그 개혁조서는 친원파들의 불법점유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 아버지 충렬왕은 다시 왕위를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여자를 붙여주거나, 바람 피는 것을 묵인하였고, 심지어 며느리인 몽골 공주에게 이혼과 재가까지 권유하였다. 몽골 공주는 충선왕에 맞서 계속 맞바람을 피웠고, 국정을 파탄으로 몰고갔다.

결국, 원나라 왕실은, 충선왕을 단 4개월만에 다시 짜르고, 충렬왕을 왕으로 재즉위 시켰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마저도 적으로 돌린 충렬왕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4. 아들의 개혁정치를 뒤로 하고...

충렬왕 본인도 개혁정치에 뜻을 두고 있었다. 충렬왕도 초기에는 능력있는 인재를 선발하고, 친원파를 숙청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원나라에게 패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영토 수복도 원하였다. 그러나, 아들의 개혁정치를 무산시키고 다시 왕이 된 이후,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충렬왕은 불교도였던 제국대장공주가 살아있을 때에는 눈치보며 바람을 피웠지만, 이젠 눈치볼 사람이 없어졌다. <쌍화점>이라는 속요가 원래 민간 속요였는지는 모르지만, 늙고 할 일 없는 국왕이 즐기기에는 딱 좋은 뮤직컬이었다.

쌍화잠이 처음 궁중에 들어온 것은 충렬왕 5년부터였고, 충렬왕은 이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연을 궁궐내에서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자극적인 공연을 찾았고, 왕위를 빼앗겼다가 되찾은 후에는 거의 공연에 미쳐산 듯 하다.

일설에는 충렬왕의 신하인 <오잠>이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쌍화점을 뮤직컬로 개편하여 공연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잠이 누구일까?

대표적인 <친원파>였다. 그는 고려라는 나라를 원나라에 바치자고 말한 <입성운동파>였다. 입성운동이란, 몽고의 행정단위인 <성>으로 편입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따지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하자는 것과 같다.

이 입성운동은 공민왕 직전까지 집요하게 진행된 운동이었다. 친원파 입장에서는 까질한 고려왕에게 아부하는 것보다는, 몽골 부족에 편입되는 것이 더 빠른 출세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입성책동운동은 <원나라>가 거부하였다. 우리가 나라를 미국에게 넘기자는데, 부시가 거부했다고나 할까? 이유는, 명분과 실리 때문이었다.

고려를 원왕조로 편입한다면, 삼별초의 40년 항쟁을 책임져야 했고, 끔찍한 내란이 일어날 경우 뒷감당도 해야 했다. 또, 고려를 자주국으로 둔다는 것은 고려에 은혜를 입은 쿠빌라이칸의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원 입장에서는 고려를 편입해서 제국화하려는 시기가 아니라, 점령한 중국인들에게 신경써야할 시기였다. 이 입성운동을 행했던 일파는 훗날 공민왕이 시시비비를 따져 척살해 버린다.

아무튼, 친원파 오잠은 쌍화점을 국립 뮤직컬로 만들어 버리곤, 왕의 총애를 받으려 노력하였다.

5. 쌍화점은 변태적인 궁정 공연일까?

쌍화점에 쌍화병을 사러 갔더니 / 회회아비(몽고인, 혹은 아랍인)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에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번지면(소문나면) / 조그만 어린 광대(심부름하는 아이)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 / 그 절 사주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번지면 / 조그만 어린 상좌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데가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 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우물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두레박아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 그 집의 아비가 내 손목을 잡더이다.

만약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번지면 / 조그만 바가지야 네 탓이라 하리라.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그 잔 곳같이 난잡한 곳이 없다.

쌍화점은 궁중악 대본이었고, 실제 공연은 기생들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자배우들이 노래, 춤, 미모 등을 뽑내며 남장을 하고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으로 단순히 <동성애 코드>가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면, 유목국가인 몽골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풍이 몽골에 유행했듯이, 몽골 양식이 고려에 유행하였다.

   남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곧 변태적 취미라고 몰아붙이기에도 이상하고, 일상적인 동성애 코드라고 보기에도 좀 그렇다. 몽골인들도, 그들과 다른 고려의 사냥술 등을 새로운 문화인 양 받아갔기 때문이다.

쌍화점은 궁중악으로 연출되기 위해 대화식으로 구성되었다. 한명이 <만두 사러 갔더니 내 손목 잡더라>라고 말하면, 다른 한 명이 <나도 가고 싶어..> 하는 식으로 되받고, 후렴구를 같이 노래하는 형식이다.

원래 이 노래가 민중 속요에서 비릇된다고 볼 때는, 왕궁은 우물, 왕은 용 등으로 풍자해서 혼란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짓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의 지배 속에서 충렬왕 때만 혼란한 시기였을까? 충자 돌림의 모든 왕들은 개혁정치와 자주정치, 그리고 친원파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25대 충렬왕은 무능력한 자신을 탓하며 개혁을 실패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살았고, 26대 충선왕도 아버지가 죽은 뒤 개혁정치를 하기 위해 <사림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친원파들이 제공(?)한 미녀들 속을 허우적거리며 고뇌했다. 심지어 유학자 이제현은 충선왕이 사랑한 여자가 다른 곳에서는 창녀와 다를바 없이 즐기고 산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하면서 왕의 여자들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하였다.

27대 충숙왕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버리고 몽골 공주와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서, 이유없이 몽골 공주를 때리고 구타했다고 한다. 몽골 공주가 골병들어 죽자 17살의 어린 몽골 공주를 데려와 아이를 낳게 했는데, 그 공주도 어린 나이에 출산하다가 죽고 만다. 결국 충숙왕은 몽골 여인들을 학대한 죄로 왕에서 쫒겨나게 된다.

28대 충혜왕은 몽골 공주가 아닌, 고려 여인이 어머니였다. 그러나, 몽골의 정권이 바뀌자 빽없는 충혜왕은 쫒겨났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이 되는 헤프닝이 벌어진다. 충혜왕은 여기에 앙심을 품고, 훗날 다시 왕이 되어 아버지의 부인이었던 왕비를 공개적으로 성폭행하고, 외숙모, 황태후도 욕보인다. 결국 충혜왕은 엽기적인 행각으로 나라 망신을 시킨 죄로 원에 압송당하였는데, 가는 길에 쓸쓸히 죽어 버린다.

충혜왕이 죽고서, 고려의 왕은 친원파가 선출하는 분위기였다. 충목왕, 충정왕은 나이 어린 꼬마였고, 어린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원에서는 친원파 기철의 누이가 <기황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는 친원파 세상이었다.

이 때 등장한 공민왕은 왕위계승과 거리가 멀었지만, 원의 노국대장공주와 원의 수도에서 정략결혼을 함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공민왕은 이전의 왕돌과 다르게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몽골 공주를 적대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 공주가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할 정도였다고 한다.

왕호에 <충>자를 사용하는 저주가 없었기 때문일까? 공민왕은 드디어 <충>자 왕들을 따라다녔던 <몽골 여자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몽골 공주 외에는 몽골 여인이 없었으며, 유력 신하들과 신돈의 딸만을 귀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혼란한 시기가 서서히 끝나면서, <충>자 돌림 왕돌의 엽기적인 행각도 끝이 났다. 그리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들 <충>자 돌림 왕들의 행적은 <남녀상열지사>로 기록되어 나쁜 왕의 선례로 거론되었다.

  쌍화점은 단지, 충렬왕 때의 엽기적인 행각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충>자 돌림의 왕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었던 좌절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그토록 몽골 여인이 싫었을까? 몽골 공주들은 부인이 아니라 원의 황제가 보낸 감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실제 고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충>자 돌림의 왕들처럼, 왕권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한 왕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어떻게든 원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다. 친원파를 대신할 세력을 찾기 위해 유학을 공부하고, 유학자들과 끊임없는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원나라만 물러가면 만주와 요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면서 어두운 시기를 참고 견뎌내었다.

  고려 전시기를 통털어 각종 제도 개혁을 가장 많이 발표했던 시기도 이 시기이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유학 세력이 태동한 시기도 이시기이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한 개혁은 모두 원나라와 친원파에 의해 실패했으며, 그들은 좌절감에 묻혀 살았다. 몽골 공주에게나 한풀이하면서 살았던 그들의 행적은 <엽기>로 기록되었다. 조선시대에 남겨진 <고려사> 등의 기록은 그들을 방탕한 왕으로 기록하였다.

  언젠가는 공민왕이나 신돈 뿐 아니라, 그 이전 시기의 <충>자 왕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이야기들을 참조하세요 ...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1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박한용 외 (동녘, 1996년)
상세보기

뜻밖의 한국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경훈 (오늘의책, 2004년)
상세보기

고려왕조사 4 (충렬왕-충정왕)(주문판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유재하 (학문사, 2000년)
상세보기

고려에 시집온 칭기즈칸의 딸들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이한수 (김영사, 2006년)
상세보기

쌍화점
감독 유하 (2008 / 한국)
출연 조인성, 주진모, 송지효, 심지호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히스토리 채널 - history 1th

팟케스트 방송 1회 분...

방송 듣기

포딕스 사이트에서 <히스토리아>를 검색하시면 방송을 mp3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첫 방송에서 무지 버벅버벅.... 이해 부탁 드려요...


1회 팟케스트 방송내용

   1. opening 역사 속에서 상상하는 만약이란 단어는?
   2. 음악 : 아, 고구려 by 서희
   3.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와 역사 속 이야기
   4. 음악 : 김삿갓 by 홍서범
   5. 조선시대에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6. 음악 : 경복궁타령 by 국립합창단
   7. 나폴레옹에 관련된 일화와 나레이션
   8. 음악 : 로렐라이 전설 by 징기스칸
   9. ending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방송에 나왔던 내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문헌들...
불끈불끈 나폴레옹(앗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71) 상세보기
믹 고워 지음 | 김영사 펴냄
뛰어난 장군, 천재적인 군사전술가, 정복자의 대명사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진짜 정체는 뭘까?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촌뜨기가 유럽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가 된 비결과 천하를 손에 넣은 그가 작은 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유는 무엇이지? 나폴레옹에 대한 오해와 비밀을 밝힌다.
벳시와 황제(세인트헬레나 섬의 나폴레옹과 한 영국 소녀 이야기) 상세보기
스테이턴 래빈 지음 | 오즈북스 펴냄
세인트헤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유배지 식량조달관의 딸인 벳시 발콤의 우정과 삶, 참사랑을 다룬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나폴레옹의 마음과 생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의 유배 시절을 흥미진진하게 재창조해 낸다.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뒤 영국의 포로가 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은 열네 살짜리 영국 소녀 벳시 발콤의 가족의 집에서
나폴레옹의 영광(HISTORY IN YOUR HANDS 3) 상세보기
리처드 홈즈 지음 | 청아출판사 펴냄
나폴레옹의 일대기와 업적을 정리한『HISTORY IN YOUR HANDS』제3권. <나폴레옹의 영광>은 리처드 홈즈를 비롯하여 영국의 저명한 군사역사학자들이 참여한 책이다. 당시의 사료와 그림 250여 점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의 탄생부터 몰락까지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풍부한 자료를 통해 나폴레옹의 특별한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에는 유럽 전역의 문서 보관소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피리부는 사나이(영어로 읽는 세계명작 스토리 하우스 20) 상세보기
편집부 지음 | 월드컴 펴냄
영어로 읽는 세계명작 스토리 하우스 20번, 피리부는 사나이 편. 주요 어휘나 숙어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각 Chapter의 마지막엔 질문을 수록하여 제대로 이해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테이프가 함께 들어있는 합본교재(책+테이프) 별도 판매. 구입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상세보기
로버트 홀든 지음 | 문학동네어린이 펴냄
한 마을의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뒤따라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 독일 전설을 바탕으로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드라호스 자크의 그림으로 새롭게 꾸몄다. 초현실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세밀한 펜화는, 그 어느 그림 보다 뛰어나다.   쥐 떼의 횡포로 지쳐가는 마을 사람들. 쥐 떼만 없애준다면 마을의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줘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이때 그들 앞에 낯선 사나이가 나
하멜른의피리부는사나이외(33.엘리트영어명작교재) 상세보기
HANS CHRISTIAN ANDERSEN 지음 | 월드컴 펴냄
우리들에게 친숙한 세계 명작을 통한 영어 학습서. 엘리트 영어명작 길라잡이 시리즈 제33권. 한스 크리스찬 알델센의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와 <거짓말쟁이 와퍼>, <재미있는 이야기들> 등 3편을 묶어 영어로 싣고 단어와 숙어, 중요 어구들을 해설했다. 중급편
십자군 이야기 1(충격과 공포) 상세보기
김태권 지음 | 길찾기 펴냄
역사만담꾼 김태권의 유쾌한 지식만화. 십자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침략전쟁. 당시 지배층의 정치적 야욕, 기사계급의 물질적 욕구, 순진한 민중들의 헛된 기대라 한 데 모여 일어난, 거대한 집단적 욕망의 폭발이었던 '십자군 이야기'를 담았다. 해박한 시사 상식과 올곧은 시선 속에서 더욱 의미를 갖는 톡톡 튀는 작가의 위트와 함께,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림체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을 이룬다. ♧ 저자 소개 지은
만화 세계사. 8: 십자군 전쟁 몽고 제국과 칭기즈 칸 상세보기
무로타니 츠네조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만화 세계사』시리즈 제8권《십자군 전쟁ㆍ몽고 제국과 칭기즈칸》. 본 시리즈는 재미난 만화를 통해 세계사를 살펴본다. 각 권은 특정한 주제와 지역을 다루었으며,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중간 중간마다 삽화와 사진, 용어 설명을 곁들였다. 8권 <십자군 전쟁ㆍ몽고 제국과 칭기즈칸>에서는 십자군 전쟁과 칭기즈 칸이 등장한 10~15세기의 동서양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 ☞ 이런 점이 좋습니
살라딘(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상세보기
스탠리 레인 풀 지음 | 갈라파고스 펴냄
동서양 모두에서 찬탄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슬람의 전설적 영웅 살라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십자군으로 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적국의 왕과 포로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가장 기사도적이며 고결한 정복자"라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살라딘의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면모에서 나오는 참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채우리 역사 만화 2) 상세보기
이범기 지음 | 채우리 펴냄
아동용 역사만화. 명성황후는 곧잘 불만과 질투의 화신, 흥선대원군과 대립한 여인으로만 그려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외세의 힘의 균형을 통해 우리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 애쓴 인물이에요. 명성황후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그리고 당시의 국내외 정세가 얼마나 급박하게 전개되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채우리 학습만화 시리즈 2.
흥선대원군 사료휘편(전4권) 상세보기
석파학술연구원 지음 | 현음사 펴냄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전4권 세트. 후손들에게 흥선대원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다양한 사료들을 번역하여 수록했다.
만화 세계사. 10: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상세보기
무로타니 츠네조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만화 세계사』시리즈 제10권《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본 시리즈는 재미난 만화를 통해 세계사를 살펴본다. 각 권은 특정한 주제와 지역을 다루었으며,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중간 중간마다 삽화와 사진, 용어 설명을 곁들였다. 10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서는 17~18 세기의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동서양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 ☞ 이런 점이 좋습니다! 「만화 세계사」시리즈는 50년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는 징기스칸 원정과 십자군 이야기였다.

1. 피리부는 사나이의 줄거리

<하멜린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중세 시대 독일 지역의 전설입니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에 의해서 장문의 시로 소개된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가 되었습니다. 내용을 볼까요?

13세기 하멜린이란 동네에는 많은 쥐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쥐생원들을 보라!
   개를 떠밀고 고양이조차 물어 죽인다.
   요람 속의 갓난 아이를 물고, 치즈통을 휘젓고
   주걱에 묻은 스프를 핥고, 소금에 절여놓은 생선을 갉아먹고
   어름들이 벗어놓은 모자는 그들의 잠자리
   여자들의 수다보다 더 요란한 그들의 소리
   사방에 가득한 바스락 소리
   비단 찢는 소리, 나무 긁는 소리
   높고 얕은 갖가지 소리
   온 천지가 그들의 세상일세!!

그런데, 어느 날 정체를 모를 낮선 피리부는 사나이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나이가 말하기를, 돈만 주면 모든 쥐들을 쫒아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나이는 피리를 불어 쥐들을 모두 강물에 빠져 죽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활한 마을 사람들은 약속한 상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피리부는 사나이는 다시 피리를 불어 마을의 어린이들을 소리로 유혹하였습니다. 사나이는 아이들을 곳펠벨크의 산 동굴 속으로 유인하여 동굴 문을 닫아 버렸고, 아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2. 첫 번 째 역사 : 페스트에 대한 이야기

첫 번째, 역사적 사실은 이 이야기 속에 시대가 <흑사병>으로 온 유럽이 죽어나가던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은 흑사병이 어떤 원인에서 생가는 병인지 몰랐습니다. <흑사병>이란, 몸이 검게 변해 하루만에 죽어 버린다라는 뜻의 병으로 유럽에서는<페스트>라고 불렀던 병입니다. 이 병은 중세 유럽 인구의 1/4을 몰살시켰던 병입니다.

당대 유럽의 페스트의 원인은 규명되지 않았지만, 가장 일반적인 설은 <아시아 갈색쥐>에 의한 전염이 유력합니다. 페스트라 불리는 병은 현재 <쥐>가 옮기는 병으로 알고 있고, 당시 유럽에는 아시아의 징기스칸 등 몽골부대가 이동하면서 아시아에서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던 갈색쥐가 유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유럽인들은 아시아인과 달리 이 쥐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고, 대부분 죽었다는 내용이죠. 피리부는 사나이 이야기에는 엄청난 쥐 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처음보는 무시무시한 쥐들이 유럽에 나타났고, 그 쥐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훗날 이 전염병 이야기가 각색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최근, 잉카와 마야 등 고대 아메리카 문명의 갑작스런 멸망도, 유럽인들이 이 <페스트>와 같은 유럽의 전염병을 면역체계가 전혀없던 고대 아메리카인에게 전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점차 유력해지고 있답니다.

3. 두 번 째 역사 : 소년 십자군이 떠나다!

영국의 대영백과사전에는 이 피리부는 사나이가 <소년 십자군>을 상징하는 이야기일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전설이 생긴 시기와 십자군 시기가 일치하며, 줄거리 역시 소년 십자군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소년 십자군은 중세 교회 세력이 신앙심이 강한 아이들을 <신앙을 이용하여 악마에 팔아먹는 행위>를 보였던 사건입니다.

원래 십자군의 목적은 예루살렘 등의 성지탈환과 이교도들의 추방,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지중해와 아시아를 잇는 상권 확보가 목적이었고, 기사들은 영지 확장이 목표였으며, 교황의 목적은 교황권이 막대함을 동서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서로가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진 십자군 부대는, 가장 열의에 차 있었던 1차 십자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였습니다. 더구나 4차 십자군은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던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도 하였고, 이집트의 상권 때문에 일으킨 십자군도 있었습니다.

소년 십자군은 이러한 십자군의 추악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진정한 신앙에 의한 십자군 부대의 숫자가 줄고, 상권만을 위한 투쟁으로 실제 교황에게 돌아오는 상금(?)이 없었습니다. 교황은 신앙심이 깊은 소년들을 불러 축복의 성수를 뿌려줍니다. 이 축복을 받으면 죽지 않고 살아올 것이며, 신이 너희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러나 소년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도 전에 이탈리아의 악덕 상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말았습니다.

독일 하멜린의 피리부는 사나이 설화는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실제, 이 역사와 설화가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대 역사적 배경이 설화와 일치한다는 것은 무언가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요?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중에서..

로마를 이끌어간 현자이자 마지막 팍스 로마나의 주인공... 아우렐리우스는 역사를 이끌어간 이들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알렉산더, 시저, 폼페이우스가 있다. 그들은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와 무엇이 다른 사람들인가?

후자의 사람들은 사물의 본질, 즉 사물의 원인과 사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그들의 이성은 그들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의 사람들은 수많은 사물을 소유하기를 좋아했으며, 따라서 그만큼 사물에 대해 노예 상태에 있었다.

----------------------------------------------

우리는 철학자라는 사람들을 이상주의자라고 말한다. 철학자들은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구조의 본질을 논하고, 그것을 넘어 사물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까지 이야기 하려고 한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뜬 금없이 논하는 우주의 본질은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본질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과 그 주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소위 <영웅>이라는 사람들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갖게 됨으로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려고 한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역사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징기스칸이 저 초원을 끝없이 달리지 않았다면 유럽인들은 몽골이라는 부족을 알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나폴레옹이 가진 것이 없었다면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까? 징기스칸이 가진 것이 없었다면 평범한 양치기로 살아갔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자신이 궁금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알아 버린다면, 본질에 대한 허무함으로 낙화암에서 뛰어내릴 지도 모른다. 징기스칸이 양치기였다면, 영웅이 되기 위해 귄력과 결탁했을 지도 모른다. 징기스칸이라는 위대한 지도자가 아니였으면, 아마 희대의 악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조차 없었다면 징기스칸은 마주유에 수은을 타 먹고, 편히... 영원히... 잠들어 꿈 속에서 영웅을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질을 알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의 삶은 어짜피 100년을 넘길 수 없다. 그리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우리의 영웅들과 철학자들은 최대한 자신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지금은 21세기... 영웅은 사라졌고, 철학은 진부해졌다. 지금은 모두가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자신의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면서 살아하고 있을까?

나 자신부터 돌아보게 된다. 나에게는 살았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의미를 부정하고,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는 한... 결국 영웅이든, 철학자든 무언가가 되어 치열하게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 뛰어야 한다. 아니면, 다른 모든 이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어 사람들을 느껴가며 살아가던지....

결국, 이번 회에서도... 내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던지... 그게 아니라면, 그 드라마를 지켜보고 같이 공감하면서 살아야 한다. 2007년의 드라마는 끝나간다....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 당제국은 중국 왕조인가, 북방 왕조인가?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건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중국 수나라를 대운하라는 키워드로 한번 살펴보았죠? 당은 그 수나라의 건국 이념과 제도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실제, 수나라와 당나라는 유사성이 참 많습니다. 앞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앞 왕조와 거의 유사한 체제를 가지고 시작하다니... 이유가 뭘까요?

1. 당이 과연 중국 왕조인가?

사실 5호 16국 시대 말기 북주에서 시작되는 지배집단은 당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관롱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서 서위 - 수 - 당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관롱집단이란,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이단아>입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방에서 넘어온 오랑캐도 아닙니다. 이들의 핏줄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관롱집단은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북위 말기부터 서위, 북주를 거치는 동안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의협집단에서 출발했으니까요.

북위를 멸망시키고, 동위, 서위로 중국 북조가 분열되었을 때 서위의 우문태 장군은 서방 중심지로 위수지역의 관중 지방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문태 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강력한 군부가 필요했는데, 이 때 관중지방에서 뭉친 협객들이 바로 관롱집단입니다. 보통 <서위 8주국과 그 후손들, 서위 12수호신>이라 불린 장군들이지요. 실제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이 관롱집단출신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관중지방이 원래 선비족의 본거지로서 선비족과 연결되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북위가 처음 나라를 개창하고 북조를 통일하였을 때, 이 관중지방에 많은 선비족들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중국화되어가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이 관중지방의 선비족들은 한인들과 어울려 남겨 되었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선비족처럼 귀족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서방을 지키는 관리나 향리, 또는 장원 소유자가 되어 지방의 실세가 되었죠.

서위 멸망 후 북주의 중심지가 위수지역이 되자, 북주 총관 양견 등 관롱집단의 인사들이 대거 관료군화 되어 기용됩니다. 양견이 수를 세우자 관롱집단은 건국공신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 관롱집단은 결국 귀족이나 호족도 아니고, 화북의 북방민족도 아니고, 순수한 중국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관중이라는 지역을 매개로 뭉친 의협집단으로서 혈연적 측면은 상당히 약한 집단입니다. 실제, 수나라의 마지막 왕인 양제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모두 관롱집단의 협객 또는 무인 집안으로서 이 둘이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즉, 수와 당의 교체는 어마어마한 왕조의 교체라기 보다, 수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안 관롱집단들이 왕조 교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또, 이 관롱집단의 성격상, 수와 당 제국이 과연 순수한 중국인의 제국인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남조의 한인, 북조의 이민족 사이에서 통일한 수는 북조를 중심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 중국에는 한인, 북방인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수, 당의 중국 왕조 건설은 핏줄상의 중국왕조라기 보다는, 건국 지역 및 건국 이념상의 중국왕조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강좌중국사나, 중국사개론, 동양사개론을 보면 이런 식으로 정리해 놓고 있더군요.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후 북위 이래 선비족들은 한인화되어 혼혈이 증가하였다. 관롱집단도 결국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집단으로서, 장안으로 중심으로 중국식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2. 당의 건국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상

그럼 당 건국까지 중국 남북관계를 간단히 볼까요? 순수한 한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됩니다. 보통 중국 은나라는 천명사상을 가진 동이계통의 민족이 세웠다고 하며, 이 은을 물리친 나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처음으로 보여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강 이북까지를 순수한 중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의 험한 지역을 당시의 석기로 개간할 수 없어서 미개발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 중국의 중화란, 개간이 가능한 황하 - 위수 동쪽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상호 항쟁이 가열되고 금속기가 등장하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의 진이 통일하면서 진시황 때의 중화 개념은 서방 관중지방, 남부 양자강 지방까지로 확대됩니다. 진시황은 북방문화권의 패자인 흉노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북방문화권을 중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 문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을 이야기하면서 문화권의 기준을 농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농경문화권 보다 북방 문화권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5호 16국시대, 인더스 문명의 파괴, 징기스칸의 원정, 게르만의 이동 등등 흉노를 비릇한 북방 문화권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과서에 이 북방 민족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쉽군요.(날 잡아서 북방 민족 변천사를 한번 정리해봐야 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진한시대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만리장성 등 경계가 확실해 지면서, 중화족과 북방족의 항쟁은 천년보다 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한무제 때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중화족이 흉노정벌을 통해 북방족을 밀어내면서 강력한 중화질서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한나라 전체를 걸쳐 북방 민족은 서서히 중국 내부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래 중국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북방 민족들을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북부를 북방족이 차지하면서 <호한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호한이란, 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한다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호한체제를 종식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자가 수문제입니다. 문제의 아들 양지는 다시 중국의 천자임을 이념적으로 내비치며 북방에 대한 공격과 고구려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부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남북조, 유연, 돌궐, 흉노, 고구려 등 다원적 질서에서 중국 왕조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개편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에서는 마지막 원정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체제 전환에 실패하고 말죠.

당나라는 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확실히 중화족이 우위에 서는 세계질서체제로 국가체제를 개편합니다. 즉, 외부민족에 대한 봉건제도와 조공체제를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3. 당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세계국가의 추구

당나라를 창업한 당고조 이연은 사실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주 8주국의 8대신으로서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힌 집단의 후손이었습니다. 또 당의 건국자 이연과 수양제도 이종형제입니다.

여기서 서위 8주국의 대신들이란? 서위 8주국은 서위의 창업자인 우문태와 당시 실력자인 당나라 시조부 이호를 중심으로 연결된 집단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유명한 집안은 독고씨의 독고신은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을 북주의 왕 명제의 왕비, 수문제의 황후, 당시조부 이연의 부인으로 보내어 모든 가문들을 친인척 관계로 얽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시조 이연은 사촌은 수의 양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반란 진압도중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배신을 때려 국가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던 <먼나라와는 일단 친하고, 가까운 지역부터 치고 들어간다>는 <원교근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연의 아들인 당의 태종 이세민은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 당태종, 조선의 태종 등등 살육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이 국가를 정말 잘 다스렸다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정관의 치>라고 부를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죠. 자신이 죽인 형 이건성의 신하인 위징을 심복으로 등용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사에 적힌 이세민과 관련된 미담 중에 사형수들을 풀어준 미담도 있습니다. 이세민이 390여명의 사형수들을 1년간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사형수들이 1년 뒤 모두 돌아오자 이세민이 감동을 받아서 이들 사형수들을 모두 방면해 준 것입니다. 이세민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일화이지요. 그러나 구양수의 <종수론>을 보면, 이세민이 사형수들에게 1년뒤 돌아와야 모두 방면한다는 약속을 모두 한 뒤, 세상을 속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이 이세민 시기의 중국은 그동안의 호한체제를 버리고 중화 중심의 세계주의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인 방현령과 자신이 죽인 형의 심복인 위징에게 나라의 경영 방략을 물었습니다.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이 중요하므로 창업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업론을 말하였고, 위징은 <창업도 중요하나, 창업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럽다>라는 <수성지난론>을 말합니다. 이세민은 수성지난론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이세민은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주의>를 실시한 왕으로서 신하들과의 국정 운영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유명한 <정관정요>입니다. 이 책은 후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국주와 신하의 유교윤리, 정치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태종기의 <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의 내용을 볼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호한체제를 넘어서서 중화제국의 세계화 기반>을 닦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이세민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모든 유목민의 군장으로서 아시아의 왕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천가한이라고 부릅니다. <한>이란 징기스칸의 칸, 흉노의 선우와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신 스스로가 <천가한>이 된 이세민은 직접 주변 민족들을 정복한 후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중국 지방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세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지역은 <부>라 부르고, 지방의 중요지역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이민족 지역을 정복한 후 <도호부>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 통일기에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등이 당나라에 의해 생기죠? 도호부는 이민족 지방의 정복, 도독부는 당의 직할지 정복을 뜻합니다.

즉, 당태종의 업적은 주변 이민족을 철저히 중국에 끌어들이는 정책입니다. 정복사업을 끊임없이 떠나고, 고구려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은 스스로 칸으로 추대받는 정책이지요.

특히, 정복한 지역은 중국이 직할지로 편제하지 않고, 도호부로 편제하여 제한적으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지역 추장보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자치의 대가로 그 지역 추방은 중국을 도와 다른 민족 정벌을 떠나야 하죠. 이렇게 오랑캐에게 자유를 주어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것을 역사에서는 <이이제이>라고 부르죠.

<기미정책>으로 중국에 협조하게 된 민족들은 중국과 봉건제도의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이 왕, 오랑캐족은 신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하국가는 중국에 매년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대외관계를 <봉건질서에 입각한 조공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기미정책과 이이제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2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첫째는 태종 때 있었던 일로서 서돌궐과 동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서돌궐을 지원하면서 동돌궐을 무너뜨린 정책입니다. 돌궐의 내분은 북방에서 당나라에 맞설 나라가 백년이상 사라져 버렸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수백년간 동북아시아의 상권을 지배해온 국가를 무너뜨림으로서 대동강부터 북방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를 중국이 장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라가 삼국통일 당시 신라에 요구한 것은 대동강부터 이북을 당에 넘기라는 조항이었고, 신라는 아주 착실히 그 조항을 이행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대한 동방무역권이 당나라에 넘어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당에서는 이 무역로를 이용하여 거대한 동방이익을 차지합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 남해, 중국을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통하게 되는데 이 무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차지한 자가 바로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장보고>입니다.

3. 고종기의 중화제국의 확장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을 뒤이어 손쉽게 세계제국 건설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 고종기의 업적을 한번 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도호부들이 당나라의 6도호부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종기 당나라 영토는 보통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 전성기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점령한 지역을 표시해보죠.

동부 : 한반도 북부 점령(백제, 고구려 멸망)

서부 : 중앙아시아 진출,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배(천산남로의 도시국가 경략)

납부 :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

북보 : 시베리아 남부 진출

지금 이 지도를 외우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만큼의 영토를 당이 차지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기미정책>에 의해 당에 동화되었다는 점이지요. 당은 동화된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의도적으로 전파합니다. 또는 한반도와 같이 이미 문화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당의 문화체계가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보통 한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파된 한자, 율령, 불교, 유교 등의 중국 사상이 문화권 전체에 더 크게 파급된 시기가 이 시기지요.

다음 장에서는 당나라 2번째 이야기로 당나라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를 한번 다뤄 보로록 하겠습니다. 측천무후와 양귀비 등등 당에서의 여걸 이야기가 되겠네요.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4세기 중세 유럽엔 봉건제도의 위기가 찾아오다.

1. 봉건경제 전반이 위축되기 시작하다.

이번 장에서 살펴볼 부분은 중세 봉건제도가 더 이상 시대적 사명을 하지 못하고, 새로운 조류에 밀려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중세사회는 5세기 게르만의 이동기부터 10세기 무렵까지 끊임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게르만의 이동, 마자르의 침입, 노르만의 이동, 이슬람 세력의 확대 등 당시 정세가 서유럽의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없는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봉건제도는 이러한 혼란기에 국왕 - 성직자 - 기사계급- 평민으로 이어지는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최적화된 사회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10세기 이후, 봉건사회가 외부침입으로부터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절정에 이르기 시작합니다. 10-13세기는 봉건제도의 절정기로서 장원제도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도시가 부활하였으며, 대학이 성립하고, 교황권이 안정적으로 유럽사회를 지배해나간 시기입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십자군 원정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이러한 중세적 사회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십자군의 실패로 인하여 교황권, 기사권이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고, 반대급부로 동방무역을 통한 도시 상인계급이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또 몽골제국의 유럽원정으로 아시아 황색쥐가 유럽에 유입되면서 <흑사병>이라는 전대미문의 병이 유럽에 돌기 시작합니다. 13세기 후반 이래 유럽인들은 기근과 흑사병, 아시아계통 민족들의 재침입 등으로 큰 혼란에 빠집니다.

하지만 폐쇄적인 장원사회와 도시의 길드체제는 이러한 새로운 변화와 혼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혼란의 원인을 농노와 도시 빈민층에게 돌리기만 하였습니다. 13-15세기 도시의 하층민과 노동자들은 폭동과 반란을 끊임없이 일으켰으며, 농노들은 몰락하는 장원을 버리고 도시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동방무역을 통해 성장하고 있던 도시세력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스스로의 자치도시를 지키기 위해 13세기 이전에는 적대적이었던 국왕권과 제휴하기 시작합니다. 즉, 도시 상인귀족들은 국왕에게 세금을 내었고, 국왕은 도시에게 받은 세금으로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마련합니다. 이 상비군으로 도시를 지켜주면서 도시와 왕권이 상호 연합하게 되는 것이지요.

상비군이란, <항상 준비된 군대>의 약자입니다. 이전에는 봉건귀족들에게 토지를 주고 쌍무적 계약을 맺어야만 왕권에 충성할 수 있는 군대를 얻을 수 있었고, 이 계약은 종종 파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왕이 세금을 비롯한 자금으로 직접 구입한 상비군은 국왕을 배신할 일이 없는 충성스런 군대였습니다. 달타냥과 삼총사를 보면, 왕실 상비군들이 목숨걸고 충성하는 기사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이 당시의 기사는 토지를 가진 영주도 아닙이다. 국왕에게 충성하면서 봉록을 먹는 이들인 것이지요.

이러한 관료제, 상비군의 마련으로 국왕권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데, 이러한 현상으로 나타난 근대적 성격의 중세 군주들의 시대를 <절대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라니깐, 엄청 국왕권이 강한 것 같죠?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차차 나중에 다뤄 보도록 하죠.

아무튼, 이렇게 국왕권이 강해지고, 상업적 기반의 도시가 성장하면서 반대 급부로, 교황권은 약해지고, 장원제도는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그 기점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규정되면서 끝나간 13세기 후반부터이지요. 서유럽의 14-15세기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태동기로서 새로운 경제질서와 새로운 사회질서, 정치질서가 확립되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보통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이라고 합니다. 자, 그럼 중세가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14-15세기를 몇 차례에 걸쳐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먼저, 다음 포스팅에서는 14세기 장원이 붕괴한 원인을 다뤄 보겠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