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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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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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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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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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초기화엄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오다 겐유 (불교시대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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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카테고리 자기계발
지은이 장석만 (부표,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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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초등역사교사모임 (늘푸른아이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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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계 안에서의 나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안형관 (이문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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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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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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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석지현 (민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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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선의 사기꾼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전윤 (신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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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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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0화. 천태종과 화엄종의 라이벌 1라운드

1. <교> 사상에 치우친 삼론종 이야기

위진남북조의 길고 긴 혼란기가 끝났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모든 국가 체제를 <통일>하려고 하였다. 이민족과 한족을 하나로 통일하였고, 도량형과 문자도 통일하려고 했다. 대운하를 건설하여 강남의 경제권을 북방으로 끌어오려고 하였다. 사상 역시 통일되고 있었고, 불교의 수많은 학파들도 하나의 진리로 통일되고 있었다. 수나라의 통일된 불교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천태종>이었다.

천태종은 불교 각각의 종파 특징을 하나로 아울려 통일하려고 하였다.  <교>와 <관>을 통일한다는 것이다. <교>란 가르침, 즉 지식을 말한다. <관>이란 깨달음과 실천을 말한다.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와 <깨달음>을 강조하는 종파는 같은 불교라 해도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다. 천태종은 <교관일치>를 주장하여 각 종파를 하나로 끌어안으려 했다.

먼저, <교>를 강조하는 종파를 한번 볼까?

혼란기 중국의 불교 학파는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구마라집의 영향을 받았다.(8-9화 참조) 최고의 고승이라 불리는 구마라집이 다양한 불경을 해석하여 다양한 학파가 탄생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존재론>으로 접근하려고 했던 파가 <성실학파>이었다. 그러나, 구마라집의 정통 제자인 승조는 <공> 사상은 심오한 사상이기 때문에 <존재를 분석>해서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성실학파>는 구마라집이 아끼던 제자 승조에게 비판받게 된다.

승조는 <공> 사상 자체의 심오한 뜻을 인도철학인 <반야> 자체로 파악하려고 하였다. <삼론학파>는 <삼론종>으로 발전하였고, 주변국에 전파된다. 고구려의 <승랑>은 삼론종에 정통하였고, 안식국의 <길장>은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원래 <삼론>이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이라는 3가지를 지킨다는 뜻이다. 삼론종의 핵심 사상은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라는 인도의 <공 사상 체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공>이 무엇이지 파악하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 언어에 집착하는가? 말이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가가 중요하다.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언어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집착이 사라지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편안한 상태가 <공>인 것이다. <공>은 언어를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언어와 논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허무한 것이다.

사물의 본질은 하나이되, 하나가 아니다. 실체가 있다고 믿는 것과 실체가 없는 것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것이다.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없는 것이 되며, 생성된 것은 어느 순간 죽는다. 결국 만물은 이것도 아니며, 저것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어느 하나를 집착하지 않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 조차 버리는 것이 바로 <중도>이다.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은 <극단 : 탁자의 모서리>인 것이다.

결국 삼론종은 인도 대승불교의 <공>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따라서 <공>을 <인간의 지식>으로 판단하려고 한 <성실종>을 논리적으로 때려부순 것이다.

그러나, 삼론종은 큰 약점이 있었다. 첫째, 인도 불교 사상을 이해했으나, 중국적인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다. 철저한 인도 불교의 <공> 사상을 이해한 것은 좋았으나, 그것이 중국인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그 고민이 부족하였다.

둘째, 너무 학문적이다. 지식체계는 훌륭하다. 그래서??? 그 다음이 없다. 지식은 곧 실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자기들까리 지식을 공유했다고 해서 훌륭한 불교 종파가 될 수 있겠는가?

셋째, 국가에 도움이 안된다.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다는 교리가 통일한 수나라의 전제왕권에 무슨 도움이 될까?

성실종과의 지식 논쟁에서 훌륭하게 이긴 삼론종이 허무하게도 천태종에게 흡수당한 것은 당시 통일된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실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훗날, 삼론종은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수나라 시기엔 삼론종의 이론이 먹히지 않았다.

2. <선> 사상에 치우친 열반종 이야기

열반종은 지난 장에서 이야기(8화)한 도생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구마라집의 수제자였던 도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중국 불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럼 도둑놈도 죽기 전에 깨달음만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인가? 도생의 이론은 범죄자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기존 <불가론자>들에게 탄압받았다.

그러나, 법현 스님(7화)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14년간 서역을 유랑하며 구해온 <대열반경>에는 어떤 사람이나 부처가 될 <인간성>이 있다고 적혀있었다. 도생은 자신의 불성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종의 <불성 이론>은 천태종의 기본 이론으로 정착된다. 천태종은 누구나 마음을 갈고 닦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열반종은 개달음과 지식의 두 가지를 동시에 공유한 천태종에게 흡수당하게 된다.

3. <지의>의 교, 선 일치

천태교의 시조는 지의이다. <지의>는 법명이고, 천태산에서 수양을 하여 <천태대사>라고 부른다. 수양제가 시호로 <지자대사>를 내렸기 때문에 다양하게 불린다.

지의는 남북조시기 양나라에서 태어나서 7살때 불가에 입문하였다. 남북조의 전쟁시기에 그가 했던 일은 <구걸>이었다. 구걸하고 걸식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탁발승>이라고 한다.

그는 23살 때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석가의 세계에 들어가 버렸다.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 빠졌으나 꿈은 아니며, 천년 전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는 석가모니가 법회를 여는 장면을 체험하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리를 체험하는 것을 <삼매경>에 빠졌다고 말한다. 법화경에 빠져 과거에 들어갔기 때문에 <법화삼매>를 체험한 것이다.

법화삼매는 꿈이 아니다. 꿈과 비슷하지만, 실체 과거 속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은 심령현상을 이용하여 신통력을 발휘하는 최고의 경지인 것이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른다.

천태종은 지의가 공부한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일승론>이다. 초기 대승불교는 글을 읽는다는 <성문승>, 깨달음을 얻는다는 <연각승>,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보살승>으로 나눠 이것을 <3승>이라고 했다.

법화경에는 이 3승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결국 글을 읽던(지), 깨닫던(관) 간에 결론은 부처가 되려는 것 아닌가? 결국 3승은 모두 <수행승>인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들이 <보살>이므로, 모든 스님은 <수행승> 또는 <보살승>으로 통일하여 1승이 된다는 것이다. 즉, 지식과 깨달음은 하나이기에, 어느 하나만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종파>인 것이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고,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한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핵심이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인 것이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지식)이던, 관(깨달음)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삼제원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이라고 주장한다.

4. 화엄인가, 천태인가?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불교에서는 어떤 대승불교 경전이 가장 부처의 말씀과 일치하는 가를 놓고 순위싸움을 하였다. 이것을 <교상판석>이라고 한다. 이건 각 불경을 중요시하는 종파간 자존심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 위세를 자랑하던 종교는 천태종, 화엄종, 열반종, 성실종, 삼론종이었다. 그러나, 아까 말했던 성실종, 삼론종은 천태종에 흡수당했으니 제외하자.

일단, 인도에서 전래된 <공>사상의 핵심인 <반야경>은 무조건 1등이다. 부처의 진리 자체가 들어있는 경전인데 어디 순위를 매기는가?

그럼 2등이 무엇인가가 싸움의 핵심이다. 천태종의 <법화경>, 화엄종의 <화엄경>, 열반종의 <열반경>이 순위 다툼에 들어갔다. 그런데, 열반종도 천태종에 통합될 정도로 세력이 약하니 4등으로 내려주자.

남은 것은 천태종과 화엄종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싸움은 쉽지가 않다. 이 두 종교는 모두 통일 종교로서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통일된 수나라에서 종교 통합을 이룬 천태종과, 수나라 이후 당나라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화엄종은 모두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한 학파이다.

두 종교는 모두 지관일치, 즉 지식과 깨달음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과 깨달음을 얻는 <대상>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첫째는 <불성논쟁>이었다. 화엄종과 천태종은 둘다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는 <도생>의 열반 철학을 인정하였다. 화엄종은 딱 <인간>까지 불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태종은 거기서 더 나간다. 만물은 돌고 돈다. 모든 사물은 훗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른다. 따라서 풀과 나무,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미>에게도 불성이 있으므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고, <돌맹이> 조차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종에서는 <인간>만이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불성>은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의 문제이므로, 마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면 불성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돈오점오>의 문제였다. 화엄종의 <화엄경>은 <돈>를 강조한다. <돈>이란 깨달음을 뜻한다. 문득 깨닫음을 얻은 뒤 진리를 알았다는 기쁨을 강조하는 것이 화엄경이었다. 반대로, 법화경은 <점>을 강조한다. <점>이란 <점진적>이란 뜻이다. 즉, 깨달음을 얻는 과정 속에서 부처를 만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럼, 깨달음의 과정과 깨달음을 안 기쁨 중 어떤 것이 우선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야 두 종교의 우위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셋째 두 종교의 차이는 <부처>의 품성 문제였다.

흔히 두 종교는 모두 <바다>에 비유된다. 다른 종파들이 물고기, 게, 미역 등 바다에 살아가는 종파라면, 화엄이나 천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바다> 자체이다. 다른 종파가 지식, 깨달음, 수행법, 율법 등 하나를 강조한다면 화엄과 천태는 모든 것을 강조하는 통일 국가의 통일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바다를 구성하는 물이 문제이다. 화엄은 모든 것은 형태가 변하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같다고 말한다. 바다의 물이 있다. 물은 물방울도 되고, 파도도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은 물이다. 따라서 어떻게 변해도 결국 물인 것이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의 <본질>은 여러 형태로 구현된다고 말한다. 물이 화가 나면 파도가 되고, 물이 갈라지면 물방울이 된다. 본질과 별도로 물의 성격이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의 품성 논쟁으로 전개된다. 화엄에서는 <물>의 본질은 결국 깨끗한 물이므로 <부처>는 선한 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천태에서는 <물>도 성난 파도가 될 수 있으므로, <부처>도 태어날 때 가진 악한 품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악을 누르고 선을 실현했기 때문에 더 위대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화엄종의 논리는 부처은 이미 성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악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천태는 성불한 부처도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악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종교는 이론논쟁을 계속하였다. 수나라 시기에는 <천태종>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당나라 시기로 넘어가면서 천태종의 힘은 약해진다. 강력한 국왕이 다스리는 현실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돌맹이에 불성이 있다>가 아니라 <부처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것이었다.

중국에서의 천태종은 짧은 전성기를 끝내고 역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천태종은 맹렬한 기세로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천태종과 화엄종은 라이벌로서 2라운드를 전개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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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 철학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심재룡 (한국학술정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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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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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침의 말씀 깨침의 마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석지명 (불교시대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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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화엄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기무라 기요타카 (민족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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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불교와 도교의 한판 승부...

1. 이민족 왕조에 뿌리내린 도교

자, 이제 불교의 수준은 <도교>를 벗어나고 있었다. 구마라집이 불경을 번역한 이후, 불교는 진정한 불법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도교의 이론을 빌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불교 이론의 다양한 연구는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각, 학파들은 도교 이론을 부정하고, 대승 불교 고유의 <공>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도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도교 역시 혼란기를 이용하여 확실한 <도가 이론>을 확립하여,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이끌어갈 사상으로 성장했다.

<도교의 시존 - 노자>

<도교의 선구자 - 갈홍>

원래 도교는 춘추전국시대 <노장사상>에서 기원한다. 당시에는 여러 제가 백가 중에 하나로서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학파>였기 때문에 <도학>, <도가> 등으로 말할 수 있겠다. <도학>은 노자의 <도덕경> 사상을 바탕으로 장자의 현실 철학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 도가가 도교로 변한 것은 언제일까? 불교의 <학파>가 성립되는 위진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동진시대 갈홍이 <도교>의 선구자이다. 갈홍은 <포박자>를 저술하여 도교 발전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원래 학문적 성격이 강한 <도가>에 신선술과 민간 종교를 모두 종합하여 <도교>를 성립시킨 것이다.

일단, 노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자연 속에서 영생을 누리는 <신선>이라는 존재를 종교 안에 포함시켰다. 신선은 노장 사상을 이해하여 속세를 해탈한 귀인으로 표현된다. 또, 신선은 죽지 않고 천수(1000살)를 누린다는 <불로장생> 사상을 포함시켰다. 이렇게 대충 이론이 정립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도교는 부적이나 신비술이 가능하다는 <신선술>을 강조함으로서 혼란기 현실에서 고뇌하는 백성들을 포섭하였다. 후한부터 시작된 중국의 혼란기에 많은 민란이 있었다. 대표적인 민란인 한나라 오두미교는 <도교> 조직의 모델이었다.

가난한 백성들도 곡식 5두를 내면 가입이 가능한 <오두미교>는 후한 시기 장각의 태평도로 발전하였다. 이 오두미교를 <천사도>라고 불렀는데, 북위 시대 구겸지가 이것을 <신천사도>로 개편하여 혼란기 중국 북부지방의 조직단체로 개편한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를 통일했던 북위는 도교를 국교로 숭배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등장한 여러 이민족 왕조들이 중국 고유의 사상인 <유교>를 배척하기 위해 도교를 활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면서 도교의 교단이 강화된 것이다.

도교를 국가 종교로 만든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불교가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여 <내세에서의 행복한 윤회>, <해탈>, <인과응보> 등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을 모은 것처럼 도교 역시 혼란한 시대를 이용하였다.

혼란한 시대를 피해 숨어 버린 한족들도 도교에서 주장하는 <무위자연>을 받아들였다. 특히, 죽림칠현 등 당대 사상가들은 유교의 형식주의가 무질서한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다. 혼란한 난세에 인간의 인격은 존중되지 않는다. 이민족들의 세상에 현실은 너무 암담하다. 역사 속을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현실을 탈피하고 싶은 이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신선을 동경하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에서 살아가는 고고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백성들 역시 현실을 탈피한 이상적 존재를 그리워하게 된다. 부처이든 노자이든, 이 암울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는가?

<신선의 뜻을 품은 도가인들 - 풍속화>

이민족의 왕들도 도교를 장려하였다. 북위의 구겸지는 유학과 다른 원리로 <도교>원리를 제시하였다. 중국의 황제가 <천명>을 받들어 즉위하는 것은 유교 방식이다. 고럼, 이민족인 북위의 왕은 <천명>이 없는가?

천명은 <도교>에서 찾으면 된다. 황제가 즉위할 때 하늘에 계신 지고지순한 신선인 <노자>가 축복해준다. 천상노군(노자)는 중국인의 아버지로서 중국의 천하를 이민족이 다스려도 된다는 것을 인정해준다. 이민족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전통 유교 원리와 다르게, 도교는 중국을 다스리는 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남북조 시대 북조에서는 유교가 도교에 밀려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불교 뿐이다. 한참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두 종교는 이제 종교 천하통일을 놓고 한판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도교 사원의 천존상>

2. 패자의 자리를 내준 유가

한나라 시기 국학으로 인정되던 유가는 혼란기에 힘을 잃었다. 전쟁이 지속된 어느 순간부터 모든 학문분야에서 유학은 제왕의 위치를 잃어간다.

삼국시대 초기 위나라의 조조는 유학을 벗어난 문학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진수의 <삼국지> 같은 작품이 등장하면서 역사학이 유학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은 불상들이 조각되고, 미술과 회화 분야도 유학의 입지가 사라졌다. 천문분야는 도교로 넘어갔으며, 자연과학분야은 수학과 의학 등에게 밀리게 되었다.

모든 학문분야를 총괄하던 유학은 노장사상, 문학, 역사학과 대등한 위치로 전락하였다. 이 4가지를 위진남북조 4학이라고 하며, 불교학을 포함하면 5학이라고도 한다.

정치 원리에서 밀린 유학은 도교 세력에게 참패를 당했다. 특히, 북조에서 도교를 국교화하면서 유교적 통치원리까지 무너진 것이다. 유학은 도교를 미신이라고 몰아세웠지만 이미 힘이 없었다.

유학은 불교도 끊임없이 비판한다. 특히 승려가 출가하는 것은 충, 효를 강조하는 유학과 상극이다. 어찌 국왕과 부모를 버리고 속세를 떠난다는 것인가? 유학자가 보기에 불교는 인륜을 무너뜨린 오랑캐의 종교였다. 그러나, 그 비판도 힘이 없었다. 불교 자체가 국왕을 보호한다는 <호국>의 이념을 가진 시기이기에 유학자들의 비판은 공허한 것이었다.

또, 죽으면 내세로 향한다는 원리도 유교의 현실주의와 상극이었다. 현실 정치와 현실에서의 충효를 중요하게 여기며, 내세를 논의조차 하지 않는 유교 입장에서는 불교가 눈에 가시였다. 내세를 위해, 해탈같은 비현실적인 작업을 위해 어마어마한 불교 사원을 짓는 것은 얼마나 돈과 시간의 낭비인가? 유교주의자들 눈으로 볼 때, 불교 사원을 짓고 부처가 나라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덕치주의, 민본주의>와 상관없는 미친 왕의 행동인 것이다. 고대 하, 은 나라가 망할 때 얼마나 큰 사치가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이 있었는가?

내세문제는 불교와 유학의 <정신불멸론> 논쟁으로 격화되었다. 유교에서는 정신과 육체는 하나이고,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죽기 때문에 내세란 없다고 말한다. 육체가 칼이라면 정신은 칼이 날카로운지, 무딘지를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칼이 부러지면, 칼이 날카로운지는 의미가 없어지며, 칼은 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육체와 정신은 죽은 뒤 분리된다고 말한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육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윤회를 통한 내세, 해탈은 현생을 사는 궁극적 이유가 된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의 유학은 비판 이상의 현실적 조치가 없었다. 이미 불교세력에게 큰 소리를 칠 힘조차 없었던 것이다. 유학이 불교를 누르기 위해서는 수백년이란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남북조 시대의 라이벌은 도교와 불교 뿐이었던 것이다. <정신불멸론> 논쟁에서 유학이 승리하기 위한 기다림은 남북조와 수, 당 나라를 넘어 송나라에 이르는 긴 시간이었다. 국가는 철학으로서 유학의 힘을 아직 인정했지만, 지배층들은 이미 불교나 도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3. 1라운드 - 도교와 유교의 연합작전(1차 폐불사건, 466)

이제 본격적으로 도교와 불교의 쌈박질 라운드에 돌입해보자. 이 두 종교가 마찰을 빚기 시작한 것은, 격의 불교를 뛰어넘어 불교가 도교에서 분리되던 4세기 부터이다. 그 핵심은 부처와 노자 중 누가 우위에 있으냐는 지극히 원시적인 논쟁이었다.

먼저 도교의 도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초기 청담사상가들은 유교, 도교, 불교의 성인들은 모두 <도>를 체득한 사람이므로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시작한 논쟁은 <노자가 곧 부처다>라는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노자는 <도덕경>을 쓰고 <신선>이 되었다. 그런데, 노자는 신선이 되기 전에 인도가 가서 큰 깨달음을 얻었고, 부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인>이 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며, <불교>의 근원은 <노자>라는 것이다. 노자와 부처 중 누가 먼저이냐를 <선후논쟁>이라고 말해두자.

불교와 도교라는 2가지 종교를 동시에 인정하여, <유학>을 대신하여 활용하려고 했던 이민족의 <북위> 왕조는 남북조 시기 내내 이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문제는 북위의 왕들이 불교와 도교라는 종교적 입장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어느 종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가, 또 정권을 잡은 귀족들이 어느 종교를 신봉하는가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남북조 시대 - 북위와 남조의 송>

그 첫 번째 대결은 북위 <태무제> 때였다.

당시 남북조 시대는 이민족 왕조인 <북위>가 중국 대륙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중국 왕조들이 정권을 바꿔가면서 대륙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북위 태무제 때의 재상 최호는 <중국인>이었다. 북위는 <선비족>들이 세운 왕조였지만, 전통 한족들을 어느 정도 우대하면서 마찰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족 관리들은 <유학>을 신봉하였다. 그가 원한 것은 선비족들도 전통 사상인 <유학>을 받아들여 <유교적 덕치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호는 도교의 창시자 구겸지와 결탁하여 불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유교와 도교가 연합하여 불교세력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다. 전혀 성격이 다른 유교와 도교는 불교라는 적 때문에 동맹을 맺은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 때 국가에서 불교를 막아 버리는 폐불사건(불교금지령)이 발생한 것이다.

1차 폐불사건으로 불교는 위축되었지만,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유학자인 최호가 <국사필화사건>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최호 등 한족들이 편찬한 <국사>는 북위의 창업과정부터 모든 내용들을 적어두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실을 객관적으로 적어두는 <훈고학적 유교사관>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국사에는 북위 지배층들의 잘못과 치부까지 그대로 적혀있었다. 이것은 북위라는 선비족 국가에서 한족과 선비족 중 누가 우월한가라는 논쟁을 불러왔다. 이 대립은 최호 등 한족 관리들이 주살되어 끝나게 된다. 즉, 한족 귀족들보다 선비족과 선비족의 왕이 더 우월함을 보여준 것이다.

구겸지의 도교 창시로 도교가 <국교화>되고 불교는 위기를 맞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불교는 다시 살아난 것이다.

4. 2라운드 - 도교와 불교의 선후논쟁(520)

1차 폐불 이후, 불교는 다시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다. 북위에서 한화정책으로 유명한 <효문제> 당시를 보면 더 뚜렷해진다. 효문제 스스로가 중국인들의 왕이라 칭하면서 중국식으로 모든 제도를 고치고, 선비족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유학의 이론을 공부하면서도 도교와 불교 문화를 더 장려하였다.

도교의 제단이 곳곳에 생겼다. 국왕이 불교문화를 장려하여 용문의 석굴사원이 건설되었다. 두 종교는 치열하게 교세 확장과 함께 이론적 논쟁을 다시 시작했다.

520년 두 종교는 또 다시 <선후문제>로 국왕 앞에서 직접 논쟁을 벌였다. 종교간의 논쟁이 아닌 국왕 앞에서의 논쟁은 큰 파장을 불러왔다. 국왕이 손 들어 주는 쪽이 우월한 종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도교 도사인 강빈은 노자가 부처를 제자로 삼아 교화했다고 주장했다. 승려인 담무외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두 명이 모두 자신의 주장을 위해 자료를 위조했다는 점이다. 강빈과 담무외는 각각 노자와 부처의 기록을 위조해 효명제 앞에 자신들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효명제는 강빈의 자료가 위조되었다는 것에 분노홰 강빈을 유배보내 버렸다.

이 논쟁으로 불교가 도교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국왕의 판단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도사들은 기회만 닿으면 불교에 흠집을 내려고 했다.

5. 3라운드 - 도교의 반발(2차 폐불사건, 574)

568년, 북주 무제기에 다시 <선후논쟁>이 불붙는다. 그러나, 이 때의 국왕은 단순히 불교 편을 들지 않았다. 유교와 도교가 침체되자 승려의 숫자가 증가했고, 이것은 국가적으로 낭비였다. 승려는 일하지 않는 자, 세금을 내지 않는 자였다. 또, 사원이 많아지는 것도 국가 운영비에 타격을 주었다. 종종 승려들이 세력화하여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도사들은 다시 <부처는 노자의 제자>라고 주장한다. 도사인 위원숭과 장빈은 종교의 순위를 정하였다. 한족의 지침인 유학이 1위, 도교는 2위, 노자의 제자인 부처가 3위가 된 것이다.

당시 종교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불교는 반발하였고, 황제에게 부당함을 건의하였다. 사회적으로 세력화한 불교를 규제하려고 한 무제는 도사들의 말을 받아들여 불교를 폐불시켰다. 그러나, 도사들도 제 발을 밟았다고 해야 할까? 도교 역시 사회적으로 무시 못할 종교 세력으로 왕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무제는 불교를 폐지시킨 후, 도교마저 폐지시킨다.

불교와 도교를 막론하고, 종교인들을 일하지 않고 논쟁을 하는 자들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오로지 철학으로서 유학만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당시 뿌리를 깊게 내린 종교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무제가 죽은 뒤 불교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가 걸어간 길...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를 정의하자면, <전파된 불교에서 독자적 불교로 나아간 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처음에는 불법의 뜻도 몰라서 노장사상의 이론에서 불법의 뜻을 해석하곤 했다. 그러나, 구마라집 등이 인도 불경을 해석하고, 도안과 혜원 등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법현이 인도에 구법여행을 떠나는 등 승려들의 노력으로 불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양한 학파들이 생겨나 불교 이론이 논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불교는 <호국불교>였다. 위진남북조라는 유례없는 혼란기에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왕권>과의 결탁이 필요했다. 국왕의 보호로 불교는 성장하였다. 그러나, <호국불교>는 양면의 칼이었다. 국왕이 불교를 버릴 때, 불교는 대책없이 탄압당했다. 또한, 왕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교는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기에 부족하였다.

여러차례의 폐불을 겪은 불교가 택한 선택은 무엇일까? 점차, 정치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북위> 정권과 밀착했던 북조 불교는 그런 점을 뼈져리게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국가 정권의 영향력을 적게 받았던 한족 정권의 <남조 불교>는 큰 탄압이 없었다. 불교가 귀족의 보호를 받았지만, 국가 이념에 정면으로 대항한 적도 없었다. 될 수 있으면 독립적인 종파를 만들어 <이론>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남조 불교>는 북쪽과 달리 <도교> 영향력이 적었다는 것이다. 구겸지가 창안한 <도교>는 북위 왕조에서 시작되었다. 도교와 피터지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불교는 점점 <거대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다. 정토종, 삼론종, 천태종, 율종, 선종은 5대 종파로 성장하였고, 담란의 정토종은 민중 사회로 스며들었다.

민중 사회에서는 읍사가 생겼다. 원래 읍은 북조, 사는 남조의 용어로 <불교를 믿는 마을 단체>를 말한다. 후대에는 합쳐서 읍사로 표현한다. 마을 단위로 불교 단체가 생기고 불상을 만들었으며, 스님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불교는 크리스트교와 같은 교구제로 운영하지 않았다.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원화하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의 행정구역과 실제 마을민들이 느끼는 공동체 단위가 일치하지 않았고, 오랜 전쟁으로 임의로 구성된 공동체가 많았던 점도 있다. 또, 불교단체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것과 행정구역은 별도였다. 불교 사원 자체가 수양과 깨달음을 위해 마을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것도 교구제가 성립할 수 없었던 원인이었다.

길었던 분열의 시대는 끝이 났다. 수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이다. 이제 통일된 시기의 불교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수, 당 시대에도 불교와 도교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며, 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몇몇 인물들로 파악해 보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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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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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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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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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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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교양으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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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화령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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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교양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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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영옥 (경덕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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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좋다(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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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가와이 하야오 (동아시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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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8화. 인도식 불교가 중국식 불교로 바뀌다.

1. 구마라집(구마라습 : KUMARAJIVA, 344-413) : 중국 중관사상의 아버지

도안과 혜원이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에 새 바람을 넣으려 했다면,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정리한 사람이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중국 고유의 토착 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구라마집 상>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 쿠챠국의 왕족이었다. 공주였던 어머니는 어린 라집을 불교에 입문시켰고, 최고의 불문 법사들 라집을 지도하였다. 라집은 박학다식한 불교 이론을 접하였다. 불교 뿐만 아니라 베다의 천문술, 수학, 음양오행, 힌두이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을 주름잡던 전진왕 부견은 라집을 모셔오라고 했다. <도안>과 함께 <라집>까지 있다면, 불교의 참뜻을 알 수 있을 뿐 이나라, 불법의 신이 전진의 호국신이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안 역시 라집을 만나 진정한 불교의 참 뜻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들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라집은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양주에 갖히게 된다. 불교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를 가둔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안과 부견은 모두 사망하였다. 결국 라집은 전진을 계승한 후진의 왕 요흥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고서야, 장안에 겨우 오게 되었다.

구마라집이 중국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이 된 이유는 긔의 <불경 번역> 때문이다. 라집은 방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중국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켰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불경 번역의 단계를 나눈다. 성경이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듯, 라집의 불경 번역이 중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중국사에서 구마라집 이전에 번역된 불경들을 <고역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구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 이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를 탈피하여, 중국 불교 수준을 인도 대승불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인 그의 번역서는 <대승론>, <반야경> 등으로 이것은 인도 전통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 등의 중관 사상을 중국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6바라밀의 핵심사상은 <반야>가 어떤 지혜를 갖는지, <공>이라는 것이 <연기설, 업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2-3화의 인도 불교 이론 참조)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정한 불교이론을 갖춘 <삼론종>이 등장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불경 번역은 중국 불교 사상에 수많은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마라집이 대승 불교의 원전을 번역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교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가 되면, 삼론학파을 필두로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이 등장하게 되고, 수,당시기에는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 등 종파까지 등장하게 된다.

2. 승조로부터 시작된 <삼론종>

구마라집에게는 구름과 같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승조와 도생이다.

승조와 도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승조는 책을 베껴적는 필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는데, 책을 필사할수록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승조는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였다. 특히 민중적이라는 점은 노자와 묵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더욱 민중적인 종교가 있었으니 <불교>였다. 그는 구역경 중의 하나인 <유마힐경>을 읽은 뒤 감동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라집의 제자로서 격의 불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공>사상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던 그는 라집의 사상체계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구로 따지면, 예수의 철학을 알리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수많은 불경해석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확실한 제자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불교철학사에서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등은 이후 중국 대승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 중 <부진공론>은 삼론종의 이론적 근원이었다.

승조는 인도의 중관학파의 <공> 사상에 구마라집의 <해설>까지 더하여 중국 특유의 대승불교 학파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삼론학파>라는 연구 단체였다. 훗날, 삼론학파의 철학이 수, 당 나라 시기 정착되어 <삼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론학파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 사상을 구마라집의 해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학파였다.

3. 도생로부터 시작된 불성논쟁과 <열반종>

반면,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특출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곧 도생이다.

도생은 난징에서 축법태에게 학문을 배운뒤, 7년간 혜원과 함께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진리를 알고 싶어했다. 혜원을 떠나 구마라집에게 온 뒤, 그의 박학다식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구마라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북쪽을 떠나 남조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불교 이론에서 상상하지 못하였던 혁신적인 발언을 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도 처음엔 깨달음이 없었다.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로 태어난 자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같은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강연하던 그는 깨달음은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막 불교 교리가 정리되던 마당에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인간으로 태어났다. 불교를 비판하는 자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불성>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면 <성불>할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노력을 일일이 기록하여 깨달음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누가 성불하겠는가?

기독교로 따지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와 같은 맥락이다. 삶은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므로, 결과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결과는 곧 그 과정들이 선택한 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과정이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 것과 같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불성>을 깨닫게 된다면, 악인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업보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처의 보편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몸 안에 부처가 살고 있기에 누구든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을 <돈오성불>이라고 말한다. <돈오>란 자신이 부처임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성불>이란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훗날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사상에 영향을 준다.

도생의 이론은 <불성논쟁>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가져왔다. 도생 이전의 불교 기본 이론은 <점수>였다. <점수>란, 한단계 한단계 수양을 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깨달음>의 철학은 <점수론>을 옹호하는 기존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를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부처의 세계와 <공>사상, <반야>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도둑놈도 깨달으면 성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도생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하여 교문에서도 추방된다.

하지만, 도생의 이론이 인도 본토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이나 <반야> 사상과 반대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도생이 추방된 후 3년 뒤 인도에서 <대열반경>이 전래되었다. 대승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은 이 경전에는 천제(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교를 비방하는 자, 무식한 자를 묶어서 다루는 말)도 사람이기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씌여진 것이다.

도생이 주장한 것은, 인도 본토에서 석가의 뜻을 해석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대승 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이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점이 좁혀진 것 아닌가? 누구가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열반학파>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열반학파의 사상은 수나라 시대의 <천태종>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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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의 성장으로 발생한 폐불 사건

구마라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불교 이론 정리는 수많은 불교 연구 학파를 탄생시켰다. 승조의 <삼론학파>, 도생의 <열반학파> 외에도 구마라집의 제자들은 다양한 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진 일파가 있었다. 인도의 4세기 하리바르만이 지은 <성실론>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공>이라는 것을 존재나 깨달음의 차원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학파를 <성실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승조의 <삼론학파>는 이 학파의 이론이 불교를 <존재와 논리>로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학파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불교로 분류되었고, 삼론학파에 흡수되어 삼론종의 일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에 <성실종>이란 종파로 이론이 전파된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에서는 인도의 유식학파 세친의 <화염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지론학파라고 한다. 이 지론학파는 훗날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남조의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섭론학파>를 만들고, 유식학파 세친의 <화엄경>을 연구하기도 힜다. 이들은 훗날 중국 유식학파의 대표종파인 <법상종>의 선구자들이 된다.

이렇게 불교는 <학파>와 <종파>를 만들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불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교와 도교 세력은 긴장하게 된다. 혼란의 절정기인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불교와 도교는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 피터지는 역사에 대해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불교와 도교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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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처음 만나는 불경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장호 (심포지움,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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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삼매경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구마라집 (불광출판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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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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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 강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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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기영 (한국불교연구원,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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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사 2:수용기의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카마타 시게오 (장승,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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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펑유란 (형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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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불교 철학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심재룡 (한국학술정보,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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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이야기(재미있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임원용 (여래,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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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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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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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혜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장대년 외 (청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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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8장. 당나라 종파불교의 발전

지금까지 전개한 위진남북조와 수대의 불교사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이 가져와서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기도 전에 왕법에 의해 불법이 위축되었던 시기의 불교를 포스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나라 시기의 불교는 다릅니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문화를 가진 개방성을 큰 특징으로 하는 만큼, 불교에 대한 입장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불교는 이제 왕법에 의해 탄압받기만 하는 호국불교를 뛰어넘어 불법의 참 뜻 자체를 연구하고, 불법에 따라 석가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식으로 완성해가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삼장법사)입니다.

또 당나라 이전 불법에 대한 대탄압인 <폐불사건>을 여러번 거치면서 불교계는 이전 단계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불교계는 호국적인 성격으로 왕권에 봉사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불법의 독립성과 불교계 혁신운동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의 본 뜻인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체계적인 불법을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불법 완성 속에서 여러 교단 종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1.수많은 종파가 과연 진정한 석가의 참 뜻을 아는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는 사실 모두 석가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우물안에서 싸우던 개구리들아였습니다. 우물에서 바라본 하늘이 어떤 하늘이고, 어떤 크기인지 알 수 없듯이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석가의 삶과 불법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7장에서 자세히 다룬 지의의 천태종은 수많은 불교종파를 통합하여 하나로 융합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 역시 대립하는 불법을 융합하려는 시도의 종파였지, 불법의 참 의미를 찾던 종파는 아니였습니다.

실제, 당 초기까지 어떤 종파도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석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의 경전을 번역하여 읽는 것만으로는 그 심요한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석가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서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진국에 유학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울에서 아무리 혼자 영문법책을 읽어도 영어발음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석가의 참 뜻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경전만을 읽고 석가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던 것이죠.

따라서 당대에는 서역의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보다는, 직접 서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한 것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현장법사)입니다.

2. 현장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 수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말하는 경전을 석가의 참 뜻이라고 주장할 뿐,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문파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불경이 너무나 부족하고, 사상적인 체계도 완벽하지 못하며 불경의 해석도 제 각각인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현장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중국 불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인도에 가는 것은 너무도 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국외로 출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라고 말하며, 인도로 향합니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소설인 <서유기>의 시작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고승으로서 환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불법을 생각하다가, 인도 난타사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여 구마라왕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6년간의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구라마습과 현장의 불경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구라마습 이전의 경전을 고역경, 구라마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경, 현장이 번역한 경전을 신역경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이 완성한 불법의 요체는 <나의 본체와 불법의 본체는 모두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실체는 실제 존재하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린 아집과 법집을 깨뜨리고,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식론>이라고 합니다.

유식론의 특징은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과 대립하는 <유식사상>으로, 부처의 진정한 말씀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한다는 유사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현장의 교리는 <법상종>이라는 종파로 체계화되고, 현장은 법상종의 시조가 됩니다. 이 법상종은 오랜 기간동안 종래 <공사상>에 기반을 둔 다른 종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훗날 <공유논쟁>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일대 유학생이라고 보기에는 인도,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인도에서도 수백년에 나올까말까한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중국에서는 진정한 불법을 전파한 종파 불교의 아버지격이었으니까요. 명나라 오승은인 이러한 현장의 유학 생활을 소설로 발전시켜 <서유기>를 저술하였습니다.

3. 선종이 등장하다.

(이미 전에 선종을 설명했지만, 당대 혜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포스팅 합니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4. 혜능에 와서 북종선, 남종선이 완성되다

선종의 5대조인 흥인선사기에 제자를 뽑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어>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총명한 제자인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라는 게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일하는 소공인 혜능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는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명경 또한 집이 아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티클이 생간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소공인 관계로 글을 아는 자가 이 말을 옮겨적어 게어로 만들었습니다.

홍인선사는 혜능의 말에 감동받아 그에게 선종 6대조의 의발을 물려주었습니다. 선종이 비록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마음 수양만을 강조하는 종파>라고는 하지만, 글을 모르는 소공이 선종 조사가 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후 선종은 가장 총명한 후계자였던 신수의 북종선과, 글을 모르는 소공출신인 혜능의 남종선으로 갈리게 됩니다. 북종선은 선종교파 중에 비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였고, 남종선은 오로지 <마음 외에는 없다>라는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파였습니다. 북종선은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성장하였고, 남종선은 글을 모르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종 중 대중적인 남종선은 우리 나라 선종에 큰 영향을 줍니다. 나말 여초의 호족세력과 6두품, 그리고 반신라 지식인들의 종교가 선종이었고, 고려 불교의 큰 흐름도 왕권의 교종과 민중적인 성향의 선종이 대립하며 주도해 나갑니다. 이 혜능의 남종선은 훗날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며, 시문 등 감정이 필요한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남종선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실천도덕이 지배층에도 환영받았으며 행사규칙인 백장청규를 마련하여 대중적 토대를 확실하게 합니다.

5. 법장의 화엄종 :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 세계로 통한다.

법장은 당나라 최고의 여걸 여황제 측천무후기에 활동하면서 <화엄종>이라는 교단을 완성한 고승입니다. 화엄종은 법장이 주장한 <진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종파입니다. 이러한 진심을 정리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법장은 현장의 <유식론>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는 다르고, 실체는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닐 수 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법장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진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 말은 법장이 화엄의 원리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한 글입니다. 즉, 금사자의 눈도, 코도, 입도 금사자라고 부를 수 있고 금사자 전체를 금사자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금덩어리라는 본질로 이루어진 실체이며, 녹으면 본질인 금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진심>은 영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그 본질인 영혼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원리 속에 흘러갑니다.

예로 산이 있으면, 그 산에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돌맹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 나무를 본 사람은 나무가 진실이고, 토끼를 본 사람은 토끼가 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종파를 만듭니다. 그러나, 산 전체를 보고 산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산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며, 그 변화에 따라 나무와 토끼는 어떻게 될 지를 포괄적으로 보는 종파가 바로 화엄종입니다. 화엄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둥근 원 속에서 파악한다는 <원융 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당대 이러한 종파 불교의 성립이 중국사 전체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후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불교가 중국에서 단절되듯 침체되고, 한반도에서 융성하게 되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불교사로 넘어갈 때가 된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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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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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6장. 남북조 불교와 정토종, 선종의 역사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중국에 전해진 불교가 이민족 왕조인 북조, 중국왕조인 남조로 갈라진 뒤 수나라에 의해 통합되는 과정을 간략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1. 북조의 불교 : 불법이 왕법에 대해 도전할 수 없다!

북조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이민족 왕조가 받아들인 이민족 종교>를 <호국>을 위해 활용했다는 점입니다. 초기 5호 16국 시대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유 자치게 불교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점이 강하였습니다. 불교의 참뜻이나 교리는 굳이 국왕이 알 필요도 없었고, 단지 불교의 모든 핵심 교리에서 왕권에 유리한 측면만 부각시키려는 불교가 이 때의 불교였으니까요.

바로 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던 수많은 고승들이 바로 북조에서 활약했던 대표적인 고승들입니다. 불도징은 중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수많은 역경을 겪고 인도로 건너왔으며, 도안, 혜원, 구라마습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명맥은 불교가 중국에 토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혼란기에 북조 각 국의 지도자들은 유명한 고승들을 초빙하여 국가 방략을 얻으려 하였고, 고승들은 이러한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중국에 불교사상을 전파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승들이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려 노력하였다고 하더라도 북조의 지배자들은 불교의 <미신적, 주술적>인 측면과 <왕권 강화의 이데올로기>만을 선별하여 받아들였고, 초기 북조의 불교는 상당히 미신적, 격의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북조를 통일한 북위는 선비족의 왕조였습니다. 이들은 중국 전통의 사상인 유교를 대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민족 왕조가 이민족 종교를 활용하여 중국 전통 사상에 쉽게 동화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북조의 많은 고승들은 <불교가 왕권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이용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불교교리의 참 뜻은 <자비와 평등>을 바탕으로한 만민애의 정신이었고, 이것은 결코 정치적인 타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차츰 중국인들 스스로 불교에 대한 진리를 터득하고, 인도에 구법여행을 다녀오면서 불교가 결코 <왕권>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알게됩니다.

왕법은 이러한 <불법>의 움직임에 대하여 <좌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누군가 불교의 참 교리를 선동하면서 왕권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불법이 왕권을 벗어나려 할 때 마다 왕권은 불법을 탄압하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폐불사건>들입니다.

2. 폐불 사건이 발생하다.

북조 최초의 폐불사건은 북위 태무제의 폐불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북위는 북조를 통일하고, 철저한 한화정책을 추진하려고 준비하는 시기였습니다. 북위는 한화정책을 위하여 한인 출신 관료들을 중용하였고, 중국 관료제를 선별하여 수용하였습니다.

이 때 북조 정권에 의해 등용된 최호 등의 한인들은 <이민족 왕조인 북위정권의 중국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최호는 철저한 유교주의 사상을 통하여 국왕을 교화하려 하였고, 불교를 이민족 종교로서 가치없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북위 시대에는 중국 전래의 도가 사상이 구겸지에 의해 발전하여 <도교>사상으로 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유교주의 관료들과 도가사상가들은 외래종교인 불교를 탄압하여 불교를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폐불사건>입니다.

그러나 중국관료인 최호일당과 선비족 귀족출신 관료들의 대립인 국사필화사건으로 최호 일당이 추방되면서, 불교는 선비족 관료들에 의해 보호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때 등장한 웅장한 석굴사원인 <윈강의 석굴사원>입니다.

특히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용문의 석굴사원을 건설하였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북조의 <불교 전성기>가 시작됩니다. 국가는 호국을 위해 불교를 보호하였고, 불교는 국가질서를 수호하는 종교로서 왕권에 충실한 종교로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전성기>를 맞이한 불교가 왕법을 벗어나 독립적인 교리체계와 불법체계를 확립하려고 한다면, 국왕권에 의해 어김없이 탄압당하곤 하였습니다. 북위와 수나라의 중간 단계 국가인 북주에서는 승려가 너무 증가하고, 사원이 발전하면서 불법이 왕법을 능가하는 폐단이 발생하였고, 불교권력이 사회악으로 규정되기 까지 합니다. 이 때 또 다시 국왕에 의해 불교를 철저하게 탄압하는 <폐불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북위 태무제, 북주 무제, 당나라 무종 때의 폐불사건을 3무의 난이라고 하면서 대표적인 폐불사건이라고 부릅니다.)

3. 북위 불교는 외래적 색체가 강한 호국불교였다.

북위의 유명한 유적지인 윈강의 석굴사원은 <북조 정권에 의해 국가가 불교를 보호하는 호국불교>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때 석굴사원의 특징은,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가 아직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지 못하여 외래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즉, 인도의 아잔타 석굴의 양식과 인도 대승불교의 간다라 미술 양식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효문제의 낙양 천도 후 건축한 용문의 불상을 보면 이러한 요소들이 대부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윈강에 비해서는 인도와 서방예술(간다라 양식)이 없어지고, 중국 고유의 불상예술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상의 성격이 단순한 미술이기보다는 <왕권을 수호하는 불법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북조의 북주 이래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함으로서 중국은 이제 수, 당 시대 불교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6세기 담란의 정토종, 달마의 선종 등 초기 종파불교가 성립되면서 수, 당대 불교는 수준낮은 격의 불교를 넘어서서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탐문하는 종파불교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4. 정토종이 등장하다!

6세기 등장한 초기 종파불교의 시작을 알린이는 500년경에 활약했던 담란입니다. 담란은 어렸을 때 반야경(반야4경)과 불성론, 공유론을 공부하고 난 후 모든 것은 <공>에 있다는 주장을 확립합니다. 그는 부처의 주장의 핵심은 <눈에 보이는 유식>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색즉시공>임을 말하면서 <생사해탈의 길은 선도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선도>를 깨닫기 위해 동위 효정제 및에서 정토종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개창하였습니다. 그는 선도를 얻는 방법은 <아미타불>을 외우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미타불이란, 복잡한 교리나 경전을 외우지 않고도 간단한 믿음, 즉 아미타불을 계속 말하는 것만으로 극락에 갈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핵심 교리로 하여 그가 개창한 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교단 성격의 불교인 <정토종>입니다. 그의 교리는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한반도에 넘어와서는 원효의 <정토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정토종을 다룰 때 다시 한번 등장해야 할 인물이네요.

5. 선종이 등장하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선종 이야기는 중국 당나라로 넘어가서 6대조 혜능의 이야기 때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남조 시대의 불교는 일찍 종파불교가 시작되었다.

북위에서 불교가 철저하게 왕권에 의해 이용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불교의 참 뜻에 대한 연구가 적었다면, 남조는 상대적으로 불법의 독자성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남조 국가들 자체가 왕권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남조는 한문 무장세력들이 창업하여, 북조를 견제하는 수준의 국가들이 근근히 명백을 이어간 왕조입니다. 실제 남조에서는 무장세력인 황제보다 귀족세력의 힘이 더 강했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불심이 강한 귀족들의 보호 속에서 불교 본래의 참 뜻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초기 남조에서 활약한 자가 바로 이전에 포스팅 했던 <혜원>입니다.

남조는 불교가 독자적으로 발전할 여건이 갖추어져서 다양한 종파불교가 발전하였고, 이 종파불교들은 당시 인도불교의 영향으로 대승불교적 성향이 강하였습니다. 또 당시 중국의 혼란기의 상황이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소승불교보다는 대승불교를 선호하기도 하였죠. 따라서 정토종과 선종, 율종, 삼론종, 천태종 등이 중국에서 종파불교로 자리잡는데 이 종교를 중국 5종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정토종과 선종은 민중사회에 깊이 뿌리내리는 민중불교화되어 갑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불교를 포스팅하고, 인도 불교의 참 뜻을 중국 불교가 완전히 이해해 나가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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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5장. 불교의 참뜻을 알고싶다!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제 수준낮은 격의불교의 단계인 중국불교가 <불법>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른 시점을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위진시대의 정음시대 현학, 노장사상으로 이해한 불교가 북위시대와 남조시대에 이르러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는지 한번 보겠습니다.

1. 불도징 : 나는 불교의 참뜻을 중국에 전해야겠다.

위진시대에 진정한 불교의 포문을 연 사람은 <불도징>이었습니다. 불도징은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습니다. 그는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는 중국 백성들을 괴롭히는 석륵을 만나서 <주문으로 항아리에 연꽃이 피는> 주술을 보여줌으로서 석륵을 감화시켰다고 합니다. 불법에 높은 혜안이 있는 불도징이 철학 강론이 아니라, 주술로서 석륵을 감화시켰다는 점은 <중국 불교의 수준이 낮아서 직접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했음>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불도징은 단 한권의 경서도, 단 한편의 논문도 쓰지 않은 채 신통력으로서만 중국 지배층을 교화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후조의 왕 석호는 불도징을 존경하였는데, 불도징은 석호에게 다음과 같은 짧은 글로서 국왕의 도리를 설파하였다고 합니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이 불도징에게는 도안, 혜원이라는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안, 혜원이 바로 북조시대를 이끌어간 불교의 전파자들입니다.

2. 도안 : 노장수준의 격의불교를 인도불교에 접근시키다.

도안은 불도징의 제자로서, 그는 불도징을 십수년간 모신 뒤 불도징이 입적하자 불경 주해를 다는 일에 정력을 쏟아부은 학자입니다. 그는 불경에 주해를 아주 쉬운 말로 달아서 중국어로 변용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노력은 곧 <중국과 인도 사상을 융합한 선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경서를 번역하고 주해를 달면서 중국어의 어휘가 풍부해지고, 중국의 불교교리가 심화되었습니다. 도안은 쓸데없는 노장사상의 청담이 결코 불교 교리 전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면서 철저하고도, 확실한  근거를 통해 불교를 노장사상과 격리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안의 명성을 듣게 된 전진왕 부견은 도안을 모셔오려고 십만대군을 일으켜 전쟁을 하려고 한 일화도 있습니다. 부견의 이러한 노력으로 도안은 전진의 수도 장안에 와서 수백권의 경서를 번역하였습니다. 훗일의 구라마습은 그를 <동방의 성인>이라고 까지 존대하였다고 합니다. 실제 전진왕 부견이 북방을 통일한 배경에 도안의 철학이 사상적 배경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도안은 한나라 이해 유행한 선법과 방야의 두 학설을 종합하여 반야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지칭됩니다. 그는 난잡한 중국 불교에 계율을 확립한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또 모든 승려는 석씨를 성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후세에 그대로 지켜져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안의 노력과 경전 번역은 노장사상의 수준으로 이용하던 격의불교의 중국 불교 사준을 전문적인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3. 혜원 : 30년간의 계율이 귀거래사를 만들어 내다.

혜원은 불도징의 제자로서 <정토종>을 개창하여 민중불교의 큰 틀을 확립한 인물입니다. 그는 '나미아미타불'이라는 아주 간략한 문구를 정성껏 외움으로서 극락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극히 간단한 가르침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입니다. 실제 후세 정토종 사람들은 그를 시조로 추존합니다. 그의 염불불교는 당대 강남에서 백련사 운동으로 전개됩니다. 그럼 혜원을 간단히 볼까요?

그는 도안에게 오랜 기간동안 불법을 전수받은 도안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계율> 중심의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불문은 속세를 떠났기에 왕에게 절을 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소신껏 지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도연명과의 일화는 유명합니다. 혜원이 도연명을 만나 이야기 하던 중 도연명을 더 이상 전송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도연명 : <좀더 전송해주게나. 나는 국가의 관리이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네는 속세를 떠났으니 자유롭지 않은가?>

혜원 : <안되네. 내 마음과 욕망은 자네를 더 전송하고 싶지만, 앞에 호계가 있으니 건널수가 없네. 이것이 삼십년 동안 지킨 내 계율이네.>

도연명 : <그런 계율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혜원 : <의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네. 선한일이 비록 작다 하여도 행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악한 일이 비록 작아도 행하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유가에 있더군. 내가 만일 이렇게 작은 일도 시종일관하지 못한다면 큰 일에는 더욱 시종일관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도연명은 그 말을 듣고, 대화마자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여 돌아오는 즉시 고관의 외투를 벗어던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고에 길이 남을 <귀거래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혜원은 원래 노장사상에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안이라는 특출한 불도자를 만나 출가한 후, 기존의 노장사상을 뒤집고 불교교리를 완성시킨 반야성공을 연구하였습니다. 반야성공은 <본체는 공이나 무이다>라는 석가의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상입니다.

그는 도안에게 배운 뒤 강남에서 구라마습을 만나, 불교와 중국 전통을 융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불문이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영혼이 불멸한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중국 전통사상과 치열하게 논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혼란기 중국 사회의 정체성과 관련된 논쟁으로 중국 불교 역사상 대전환기에 체계적인 불교사상을 잡아갔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4. 구마라습 : 경전 번역으로 중국 불교수준을 업그레이드 하다

구마라습은 서역에서 태어난 유명한 불법학자입니다. 전진왕 부견은 도안, 구라마습 등 당대 최고의 고승들을 전진에 데려오려 많은 노력을 하였고, 구마라습을 중국에 초빙하였는데, 그가 중국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부견, 도안이 죽은 뒤였습니다.

그는 중국에 반야 사상을 가장 잘 이해시킨 학자로서 수준낮은 중국 불교수준을 한차원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대승론을 번역하는 등 수많은 경전을 번역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불교원전 번역과 대승경전 번역은 중국의 불교가 <대승불교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그는 진제, 현장과 함께 중국 불교의 3대 번역가로 불립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구마라습을 기준으로 구마마습 이전의 번역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습의 번역 불경을 구역경, 당나라 현장기의 변역 불경을 신역경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가 이러한 불교 경전을 번역함으로서, 이 번역된 경전을 통해 중국에 새로운 불교 종파들이 등장합니다. 중국 불교의 가장 큰 흐름인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은 모두 구마라습이 번역한 경전에 근거하여 창립되었습니다.

5. 도생 :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

도생은 구마라습의 수재자로서 불경을 번역한 유명한 승려입니다. 그런데, 그가 구마라습과 따로 분류되어 중국 불교사를 장식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이 기존 사상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범어로 천제)도 인간이므로,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인간은 모두 누구나 불성이 기본적으로 있다고 믿고, 따라서 신분고하와 직위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다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불교계의 이단아 역할을 하는 것이었죠. 도생은 <노장사상과 공자, 맹자 사상을 받아들여 허무매랑한 주장만을 반복한다>고 매도되었고, 교문에서는 그를 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3년 뒤 인도에서 전래된 대열반견에는 <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라는 문귀가 있었고, 실제 도생의 이론은 인도 본토의 이론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불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이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돈오성불입니다. 이것은 <돈오>하여 아느날 갑자기 깨달으면, <성불>하여 부처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즉,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이 돈오성불의 내용인데, 이 내용은 훗날 선종 등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6. 위진남북조 시대의 불교는 불교 토착화의 진통이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불교의 체계화가 이루어지고, 불경의 번역이 이루어지는 시기였습니다. 당대 불법가들은 인도를 통해 불법의 참뜻을 깨닫는 것에 주력하였고, 많은 경전에 번역되었습니다. 일부는 직접 서역과 인도에 진출하여 불법을 연구하였고, 일부는 외래 승려를 초빙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인도에서 직접 포교활동을 위해 중국에 건너온 승려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진정한 교리를 깨닫는 과정속에서 국가와의 마찰이 심해집니다. 국가는 불교의 진정한 교리를 탄압하면서 불교를 세속적인 왕권강화에 이용하려고 노력합니다. 대표적인 왕권과 불법의 충돌이 바로 <폐불사건>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폐불사건을 여러번 경험하면서 불교 스스로 정화노력을 하고 진정한 불교의 참뜻을 찾기위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수당대에는 불교의 참뜻을 자체적으로 해석하여 등장한 여러 종파가 나타나게 되고, 중국의 불교가 석가의 뜻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종파불교로 발전합니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남북조시대 불법과 왕법의 충돌에 관련된 폐불사건과 수당대 종파불교로의 발전을 다루겠습니다. 중국에서의 불교사는 당대까지만 다루겠습니다. 왜냐면, 불법이 쳬계적으로 이루어져 완성된 시기가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 중국의 당왕조까지 이고, 그 이후 중국, 인도의 불교는 새로운 사상에 의해 더 이상 세력을 확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것처럼, 중국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어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과정들을 포스팅 하겠습니다. 마지막 단계에서 일본 불교를 다루면서 불교가 어떤 형식으로까지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죠. 그럼 일단 다음 포스트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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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