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퀴즈
 

오늘은 간만에 o,x 퀴즈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서 점수와 해설을 확인해 보세요.

 

다음 10문항에 대하여 맞으면 O, 틀리면 X를 선택해 주세요.

 

1.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O
X

2. 사물놀이에 쓰이는 4가지 쇠, 장구, 북, 징은 불교의식에 쓰이며,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목어, 운판, 법고, 범좀의 네 가지 사물이 변해서 쓰인 것이다.
O
X

3. 안압지는 신라 문무황 때 만든 윌지라는 연못으로 신라가 망한 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보고 '안압' 이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O
X

4. 황산벌에서 신라의 대규모 부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한 백제의 명장군은 관창이다.
O
X

5. 징기스칸이 죽은 뒤 몽골 본토인 몽골 제국을 물려받은 사람은 막내아들인 툴루이나, 실제 몽골의 2대 황제는 셋째아들인 오고타이이다.  
O
X

6. 프랑스 대혁명 때 처형된 왕과 왕비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이다.
O
X

7. 조선시대 지방관(수령)의 임기는 6개월이다.
O
X

8. 병자호란은 청나라를 세운 거란족과 관련된 전쟁이다.
O
X

9. 세계문화유산인 직지심체요절은 현재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O
X

10.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여우 사냥' 작전을 전개한 러시아인들이다.
O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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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명(明 1368 ~ 1644), 청(淸 1616 ~ 1911)
  원말에 한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백련교도나 홍건적의 난 등 수많은 봉기가 있었다. 명의 태조인 홍무제(洪武制) 주원장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일단 명이 들어서고, 다시금 중국을 한족이 지배하게 되자, 명은 지난 원나라 때 남아있던 원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족 전통 문화를 부흥하고자 하였으며, 재상제를 폐지하고, 율령 정비, 이갑제(里甲制)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새로 호적인 부역황책과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 : 물고기 비늘과 같은 그림의 책)을 만들어 역과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명이 베이징으로 천도해서 보다 중국적인 면모를 갖춘 것은 성조 영락제 때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베트남을 공략하고 정화를 통한 원정을 실시하였다. 정화의 원정은 1405 ~ 1433년 7차에 걸친 항해 원정을 말한다. 동남아, 아프리카 동부해안에까지 닿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중국의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고, 훗날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원정은 단지 중화주의적인 조공질서를 만들었을 뿐이며, 어느 한 곳 침략해서 식민지화 한 적은 없다. 명은 환관 세력이 점차 득세를 하고 북로남왜(북쪽은 유목민족, 남쪽은 왜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더욱 국력이 소모되었다가 이자성의 난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은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의 누르하치가 팔기 조직을 통해 만주 지방을 지배하면서 성장하였다. 처음 국호를 청이라고 정한 것은 태조로, 태조는 조선을 침략해 정묘, 병자호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조는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통치의 기틀을 다졌다. 청에서 가장 손꼽아 다루는 것은 성조 강희제와,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이다. 우선 성조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정상공의 난을 정벌하여 타이완을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1689)하여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명확히 했다. 그 외에도 외몽골, 칭하이, 티베트를 정복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며, 문자의 옥을 통해 사상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문자의 옥은 강희, 옹정, 건륭제 때 계속 지속된다). 세종 옹정제는 군기처를 독립시키고 러시아와 카흐타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금도서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으며, 크리스트교가 중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자 크리스트교 포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고종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청의 최대의 영토에 달해 만주, 몽고, 한, 위구르, 티베트 지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고금도서를 보강한 사고전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중농 정책으로 인해 농업은 여러 발전을 하였다. 관개 시설의 확대, 농업 기술의 향상,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쌀 외에도 목화 생산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의 외래 작물이 전해져오기도 했다(* Tip(추가사항)  : 고등학교 국사에선 이러한 외래작물이 유입된 시기를 보통 임진왜란 전후 혹은 이후로 본다). 과거 중국과 명, 청대의 쌀 생산지는 매번 변화하였는데 송원대에는 양쯔강 하류에서, 명대는 양쯔강 중류에서 청대에 와서는 쓰찬 지방에이 쌀의 주산지가 되었다( * Tip(추가사항, 참고) : 오늘날 중국의 쌀 생산지는 만주지역이다. 원래 만주는 농경 / 목축 / 유목이 전부 가능한 비옥한 곳이긴 하였으나, 대규모 농경지로 변화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 우리니라 사람들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만주 일대의 농경 기술은 대부분 조선족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공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다. 명대에는 면직물과 견직물의 직물공업이 16세기 이후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기존에 농민들에 부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이젠 공장을 갖춘 수공업으로 면모하여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명에서는 과거 원과 달리 초기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다가 16세기 중엽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들은 농산물과 직물,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여 은을 벌여들었다. 이들 역시 동업 조합인 공소와 동향인 조합이었던 회관을 운영하였다. 명의 수취제도는 기본적으로 양세법을 따랐다. 하지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명에서는 은이 가장 구하기 손쉬운 귀금속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명 정부는 은을 본위로 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잡다한 세금을 지세(토지세)와 정세(인두세)로 묶어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명, 청대는 여러 분야에서 경제력이 향상되는 시대로 서민 경제 또한 같이 발맞춰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민경제의 성장은 서민의식의 확대와 성장을 야기하여 서민 운동을 야기하였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시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권익 옹호 운동인 민변(民變)과 소작인이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항조(亢燥) 운동, 노예의 신분 해방운동인 노변(奴變)과 명나라 때 방직 공장에서 직공을 중심으로 부당 징세에 항거한 직용(織傭)의 변(變)(1601)등이 있다.
  청대에는 대상인이 자본을 축적하여 저장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상인 무역 조합인 방이 있었다. 청대에는 명대의 자유로운 무역과는 달리 특허를 가진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행 무역이라고 한다. 18세기 이후에는 광저우만 개항되기도 했다. 청 왕조가 비록 공행을 통해 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상품은 값비싼 것이었으며, 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은을 얻었다. 청대 역시 은을 본위로 하는 세금제도가 만들어졌는데, 18세기 초 세종 옹정제는 정은(인두세)를 지세에 포함시켜 징수하는 지정은제가 그것이다. 지정은제는 세금이 일원화 되었다는 의의와 함께 호적 상에 인구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 청대에 사회 지도층은 향신(鄕紳) 혹은 신사(紳士)였다. 이는 생원(지방학생), 감생(국자감 학생), 거인(향시 합격자), 퇴직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민중교화, 각종 사업, 조세 징수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은 한족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초기에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관학화는 유학의 형식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명 중기에는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양명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양명학은 양명 왕수인이 정리한 것으로, 마음이 즉 이치(심즉리心卽理)라는 내용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실천적인 유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명학도 명나라 후기 때는 비판 받았으며 『본초강목』등의 실학이 발달하여 수공업 등에 영향을 끼쳤다. 명대에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등이 완성되어 서민문학이 발달하였으며(* Tip(추가사항) :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원대이고, 완성된 것은 명대이다. 헛갈리지 말자.),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에 의해 곤여만국지도와 『천주실의』가 전해졌다. 곤여만국지도는 중국인의 세계관 확대에 기여하였다.
  청대에는 문자의 옥, 금서령 등으로 학문의 현실 비판 기능을 억누르자 고전의 객관적인 해석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를 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강희자전』,『고금도서집성』(* Tip(추가사항) : 조선시대 후기 정조는 사고전서가 곧 출판된다는 말에 사람을 시켜 사고전서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사고전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금도서를 사들였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렇게 정조 때 고금도서가 들어왔다),『사고전서』 등이 출간되었다. 고증학이 형식화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공양학이 등장하였다. 공양학은 진보적 발전 사관을 가지고 훗날 변법 자강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청대에는 『도화선전기』,『장생전전기』와 같은 희곡과 구어체 소설인 『홍루몽』, 『유림외사』 등의 서민문화가 발달하였고, 선교사에 의해 서양과학이 전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 때 크리스트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가 마찰이 일었으며, 이를 전례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전례문제로 인해 더 이상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금지되었으며, 청은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세계사 흐름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Tip(추가사항) : 명과 청은 크리스트교에 대해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명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마테오리치였으며,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반면 청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조선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인물인 아담 샬로,  전례문제 때문에 청대의 선교사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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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1. 1880년대 이후 개화파의 분위기

오늘 다룰 내용은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갑신정변은 개화기의 모든 정황과 동 떨어져 단독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개화기의 큰 흐름 속에서 척사와 개화라는 양대 기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지요.

따라서 갑신정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조선책략, 위정척사, 임오군란, 개화파의 흐름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그 흐름만 다시 짚어볼까요?

1880년 개화의 지침서인 조선책략이 들어온 이후, 조선 사회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이 운동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 개화를 추구하는 민씨 정권 타도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려는 분위기였죠.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속에서 숨 죽여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 1세대들은 민씨정권의 등장이후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1878년 충의계라는 개화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를 위한 깃발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은 언젠가 한번 크게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은 엉뚱하게도 <임오군란>을 통하여 전혀 다른 역사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임오군란은 청의 도움을 받은 민씨세력의 재집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청나라의 전면적 내정간섭이 시작되었지요. 문제는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이 <청>이라는 외세에 의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정치고문인 묄뢴도르프, 군사고문인 마젠창을 보내면서 민씨정권의 소극적인 개화마저도 태클을 걸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민씨정권의 개화에 맘이 안 들었던 급진개화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파들은 그동안 민씨정권에서 추진해온 소극적 개화파들의 정책으로는 근대화가 늦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고종>에게 직접 접근하여 빠른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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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좌측부터)>

2. 급진개화파가 청의 세력에게 밀리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기존의 개화파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급진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83-1884년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들은 조정에서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한 <박영효>는 고종과의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청을 견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위기에서 김옥균은 고종에게 개화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밖으로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 친교하며, 안으로는 정략을 개혁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문명의 도로 교육하며, 상업을 번성시켜 재정을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또 군대를 기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할 수 만 있다면 영국은 마침내 거문도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 밖의 여러 나라도 역시 침략의 뜻을 버릴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의 크고 많음을 자랑하고 경쟁하는 때이거늘, 아직도 양반을 제거하여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은 기어코 앉아서 기다리는 꼴이 될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철저히 반성하시어 하루 빨리 무식 무농하고 수구 완고한 간신배를 축출하시고,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골라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립하여 백성들의 신용을 얻으시고, 널리 학교를 세워 백성의 지식을 깨우치게 하시옵소서. 외국 종교를 들여와 교화를 돕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 고균 김옥균전 -

고종은 급진개화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공감하였습니다. 이미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의 추진 정책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청의 고문들에게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급진개화파와 청의 세력간의 갈등은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한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재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는데, 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고문은 묄렌도르프는 <악화주조>를 주장합니다. 악화주조란, 일단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돈을 찍어내자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한 것처럼 <당오전>을 발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청의 재정고문의 의견에 급진개화파는 적극 반대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올라서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돈을 만들어 찍기 보다는 <차관을 빌려서 재정 위기를 해결한다는 경제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즉, 급진개화파의 재정해결책은 <차관도입론>이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서 국가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 급진개화파의 입지를 확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겪은 후 내부적으로 일시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은 돈을 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고, 청의 고문들은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여 그 세력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3. 하늘이 도와 청군이 일시 물러가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개화파들은 정치적으로 구석에 몰려 곧 괴멸당하거나, 망명해야 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왔습니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청불 전쟁이 벌어졌고, 청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급히 인도차이나 반도로 돌려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3000명의 청군이 있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조선을 떠난 것입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일본에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계획합니다. 일본 역시 청 때문에 약해진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서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기로 합니다. 급진개화파들은 친청파인 보수세력을 제거할 시기로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럼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한 사료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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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진행도 : 정변의 과정>

갑신(1884) 9월 다케조에 신이치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와 프랑스는 안넘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본 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청국은 이제 조선을 돌아볼 틈이 없으니 청국세력을 배제하고 독립할 기회는 바로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화합을 가지고 일본군을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 박은식, 한국통사 -

같은 해 10월 17일 우정국이 낙성되고 홍영식이 총판이 되매, 연회를 베풀고 대관들과 각국 공사, 영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육조판서와 내아문, 외아문 독판, 전후좌우 네 영사, 그리고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며 서기 시마무라를 시켜서 대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연회를 시작하였는데, 홍영식 등은 미리 왕궁문 앞과 경우궁 안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켰으며, 또한 우정국 앞 개천에 자객을 매복시켜 방화로 신호를 하게 하였다. 김옥균 등은 출입이 잦았으나 지휘하는 형적은 속이고 극비에 부쳤다. 10시가 되어 갑자기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 때 달이 밝아 대낮 같은데 불빛이 충천하였다. 민영익은 <불이야> 소리를 외치며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니 앞 개천을 따라오던 자객이 칼로 내려치자 영익이 몇 군데 자상을 입고 쓰러지자, 빈객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일당들은 여기서 청당을 모두 죽이려 하였으나 단지 민영익 한 사람만을 부상시켰다. 박영효, 김옥균, 사광범 등은 대궐로 달려가 바로 침전에 들어갔으니, 미리 내응이 되어 있던 궁녀가 문을 열고 기다린 까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헐떡이며 급히 아뢰되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니 급히 자리를 옮기시어 피신하소서> 라고 청하고, 아울러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케 하라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김옥균 등은 울며불며 달래다가 위협하며 빨리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중관 유재현이 살해되니, 왕은 창황히 침전에서 나갔으며, 조태호, 홍태후와 왕후, 태자 이하는 모두 걸어서 따라나섰다.

영숙문에 이르러 갑자기 총소리가 일어나자, 김옥균 등은 급히 외치며 청병들이 많이 이르렀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총소리는 일당들이 미리 이곳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켜 왕이 이르는 것을 엿보아 총소리를 내 암호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해달라고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김옥균, 서광범 등은 품과 있던 연필과 서양 종이를 꺼내어 일사내위(일본공사는 나를 지켜라)라는 넉자를 쓰고, 인신 증거도 없이 일본 공관에 보냈다. 왕이 경우궁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일본 공관에 이르자, 일본 군사들은 이미 낭우에 가득하고 일본 역관 아사야마는 맞아 뵙고, 공사 다케조에는 따라 들어왔다. 왕은 동상에 어거하시고, 일본 공사와 일당들은 청사에 거처했다. 조금 뒤 사관생도 12명이 입궁하여 둘러쌌으며 김옥균, 홍영식 등은 슬퍼하며 우는 모양을 짓고 있었다. 이에 일본병은 궁문을 에워싸고 일당들은 그 가운데 거하면서 외부와 내통을 억제했다.

- 박은식, 한국통사 -

이 때 우리 민인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 하여 만나면 치고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청병 또한 일본 공사관을 밤에 몰래 공격하여 39명을 죽이고 부녀는 욕을 보였으며 방사를 파괴하니, 드디어 다케조에 공사는 깃발을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서소문을 빠져 도망쳤다. 이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더욱 노하여 일본 공관을 불태우고 육군 대위 이소하야시를 죽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으로 영사관에서 나무 궤짝 속에 몸을 감추고 24일 일본 상선을 타고 도망쳤다.

- 박은식, 한국통사 -

4.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들

갑신정변의 여러 적들(김옥균 등)은 서양을 존중하고 요순과 공맹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야만이라고 하고,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일컬었다.

- 속음청사, 상 -

김옥균은 청군의 종주권 아래에 놓여 있는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이 세계 각국 가운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 하였다. 김옥균은 그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니, 시대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바랬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 채용에 따라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인습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김옥균)는 구미 문명이 하루저녁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열국이 서로 경쟁을 벌여 점진적으로 이룩해낸 것으로서 수세기나 필요했으나, 일본은 일대만에 속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본을 본보기 삼고자 백방 분주하였다.

-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한국이 적자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 윤치호일기, 1982년 4월 7일 -

1884년 중엽에 새로운 집단이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간 몇몇 젊은이들은 철저한 개혁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일본이 변모하는 과정을 본 이들은 일본처럼, 아니 일본보다 더 철저히 개혁을 바랐다. 가능하다면 필봉 한자루로 조국을 서구화하고 싶어하였다. 또 일본 관료의 품에 몸을 던져 혁명적 변혁을 위한 만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F. A. 맥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

처음 김옥균은 박규수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1881년 나는 영선사로, 김옥균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다같이 나라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였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청이 우리나라에 내정간섭을 자주했다. 나는 청나라당으로 지목되었고, 청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데 분노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일본당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세상을 그를 역적이라 하였는데, 나는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다른 나라에 있지 않았고, 애국하는 데 있었다.

- 김윤식, 속음청사 -

갑신정변에 대하여, 김옥균에 대하여 당시의 전통 성리학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를 비롯하여 개화사상을 알고 있는 이들은 김옥균에 대하여 동정을 보낸 것 같습니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은 그를 민족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한 인물로, 윤치호는 당시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같은 개화파이지만 노선을 달리한 김윤식은 김옥균 역시 애국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김옥균이 걸어온 길이 우리 개화사상의 전통적 맥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개화파의 연결그림이 아래 있죠? 김윤식이 말한 김옥균의 스승이 박규수라는 점, 김옥균 역시 개화파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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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흐름도>

5.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 바로 개혁 정강을 내 놓다!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은 바로 개혁 정강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죠. 내용을 한번 볼까요?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이 14개조 정강의 핵심 내용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나눠보죠.

일단 정치적으로 급진개화파가 추구한 것은 <입헌군주제>입니다. 김옥균은 조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근대화는 서양식 <부르조아>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부르조아 계급은 곧 토지를 가진 지주계급과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상공업 계급이었죠.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일본 메이지 헌법처럼 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동양식 전제군주제를 영국, 미국식 의회제도로 바꾸어 <내각이 책임지고 통치한다>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젠트리 계급이 명예혁명을 일으켜 내각을 수립한 것을 모델로 하며,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메이지 유신 헌법을 모방하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궁안의 내시부를 혁파하고, 의회식 회의제도인 고관 회의를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외교분야에서는 그동안 내정간섭을 해온 청을 적극 배제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주장합니다.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라>라는 것은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을 납치는 청을 질타하고, 사대외교를 폐지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음 경제분야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인 <지조법>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지주의 봉건적이고 불법적인 수탈을 방지함으로서 <근대적 세율의 법정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 불명확한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주인이 없는 땅은 국유지로 편압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일정한 국유지를 확보하면서도, 토지소유자인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지주계급의 부르조아지화>와 <국가 재정 확보>를 동시에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지요.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호조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예산을 계획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근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것이지만, 큰 약점이 있습니다.

지조법은 실제 지주층에게 유리한 반면, 백성들이 원한 <토지제도 자체의 개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 지조법을 통한 근대적 부르조아지 양성은 농민층의 지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회분야에서는 봉건적 관습인 신분제도, 과거제도 폐지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럽의 시민 혁명과 메이지 유신에서 모방한 것으로, 전근대적 제도를 타파해야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즉, 양반중심의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지주층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자본주의>가 바로 갑신정변에서 추구한 이상적 근대화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청나라라는 외세의 간섭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6. 갑신정변의 실패

우정국 정변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 일파는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청의 대응은 김옥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빠른 것이었습니다. 청은 개화당의 정권 획득이 조선에서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발빠른 대응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개화파를 돕기로한 일본 공사가 김옥균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청군이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대군을 조선에 보낸 마당에 일본 공사관군이 대응하기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이 돕지 않은 것 외에 급진개화파의 미숙성도 있습니다. 김옥균은 단순히 근대적 개혁을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큰 착각이었죠. 일단 개혁의 방향이 국민중심이 아니라 <지주적 부르조아> 중심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백성들을 우매하여 계몽시켜야할 대상이라는 <계몽관>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인정하고 지주층을 중심으로 부르조아적 지조법을 단행함으로서 봉건적인 부분을 개선하지 못한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일본과 밀착한 개혁이었던 만큼 백성들은 개혁 자체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고 있었지요.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청과 일본은 정변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조선에 침투하다.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함으로서 조선은 다시 <청의 고문>이 실권을 잡아 정치하는 임오군란 이후로 되돌아갔습니다. 청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보수세력은 계속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개화세력은 이제 완전 도태되고 맙니다. 이후 김홍집, 박영효 등이 깁오개혁, 독립협회 등의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오개혁의 결과, 조선은 일본공사관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고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됩니다.(한성조약)

또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공동출병, 공동철수 할 것을 약속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밀린 일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맺은 것으로, 일본이 청과 동등한 파병권을 확보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군사적 기반을 계속 유지해나감을 의미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그럼 안녕히....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잃어버린 혁명(갑신정변 연구) 상세보기
강범석 지음 | 펴냄
한반도 근대 이행기에 일어난 1884년의 갑신정변의 진실을 연구한 책. 저자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써서 남겼다는『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위작된 것임을 주장한다. 갑신정변의 배타적인 제1차 사료가 되어온『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는 착상을 통해, 갑신정변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조선 갑신일기』,「메이지 17년 조
갑신정변 회고록 상세보기
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갑신정변에 대한 회고록을 편역해 소개한 책. 풍운의 한말을 살다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육성을 들어보며 갑신정변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혁명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남긴 회고록 4편을 소개하고 있다.
갑신정변 연구(한국학연구총서 27) 상세보기
박은숙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근대 변혁운동의 선구적 시발점인 갑신정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방법으로 갑신정변에 총체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의 개혁방안을 보여주는 정령 14개조안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고, 정변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각종 저술들을 비교 분석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개화파가 당시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참여층의 자발적 동참과 협조를 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갑신정변연구 상세보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지음 | 평민사 펴냄
김옥균(역사논술교과서 38) 상세보기
서울교육대학교 역사논술연구회 지음 | 파랑새 펴냄
『역사논술교과서』시리즈 제38권《김옥균》. 본 시리즈는「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를 읽은 후 활용하면 좋은 통합논술 대비 부교재이다. 학습자는 7단계로 나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꿰뚫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논술 학습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사상(세계의사상 36) 상세보기
김옥균 외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서재필(주니어세계의인물자서전 13) 상세보기
송건호 역 지음 | 금성출판사 펴냄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상세보기
김태웅 지음 | 펴냄
대원군 정권의 성립부터 3.1운동 직전인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내용 역시 이런 범위에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사회경제 변화및 근대 개혁 운동의 전개등을 집중서술하였다. 특히 반봉건, 반침략을 둘러싸고 처지와 이념에 따라 상이한 방략을 제시하는 여러 계열의 노선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설서와는 달리 생생한 자료의 정확한 전달과 충실한 해설에 비중을 두고 개별 항목단위로 구성한 나머지 한국 근
한국사 편지 세트(전5권)(사진과 그림으로보는) 상세보기
박은봉 지음 | 웅진닷컴 펴냄
※ 이 도서를 구매하신 고객 분께 알립니다! [한국사 편지 세트] 일부 품목에서는 별책부록인 '역사 여행을 떠나요'가 발송되지 않았습니다. 별책부록을 받지 못한 고객 분에게는 별도로 별책부록을 보내 드립니다(출판사로 연락해 주시면 바로 발송해 드립니다). 문의전화 : 웅진주니어 편집부 02-3670-1590, 영업부 3670-1501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학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역사책 친근한 글로
갑신일록 상세보기
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이조말의 김옥균이 그가 주동한 갑신정변의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처인 일본 땅에서 정변의 전후를 회고하면서 적은 기록으로 당시의 정세와 정변의 실상을 생생 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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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 조선책략과 조선의 개화정책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실시하게 된 계기와 그 내용입니다. 개화정책은 민씨정권(명성황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그럼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해서 간단히 다뤄볼까요?

1. 수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다.

수신사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합니다. 강화도조약 저번에 다루었죠? 강화도 조약 2조에 보면 <일본정부가 15개월 뒤 사신을 파견한다>는 항목이 있었고, 11관에 보면 6개월 이내 양국이 다시 통상장정, 조일수호조약 조규부록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도 일본에 협상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의 개화수준을 시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1차 수신사로 김기수 등 98명를 파견합니다. 1차 수신사인 김기수는 <수신사 일기>에서 <일본이 부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래 글을 볼까요? 양반 유생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조선 관료가 일본에 가서 느낀 점을 역설한 글입니다.

기교(技巧)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火輪)으로써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바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의 유람을 막은 사람이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했는데, 나는 그 옳은 말을 쫒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유람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가? 기기음교(奇技淫巧)도 말로는 이것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한다고 하니, 이용후생이라면 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김기수, 일동기유 -

일본은 1차 수신사가 다녀간 이후, 조선에 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요구합니다. 이 때 협상으로 부산, 원산은 개항되었지만, 실제로 중요한 관세문제, 미곡문제 등을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추진중이었던 이홍장은 수신사를 파견하는 조선에게 일본이 침략 의도가 있다며 경계하라고 합니다. 우리 정부는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고 2차 수신사로 김홍집 등 58명을 파견하였습니다.

2차 수신사의 목적은

1번째, 인천을 개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해 개항하지 않는 쪽으로 협상할 것

2번째, 일본인에 의해 쌀이 유출되는 문제를 강력히 항의할 것,    이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목적 자체가 아니라 2차 수신사가 파견됨으로서 수많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처방전같은 책인 <조선책략>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2. 조선책략이 유입되다.

2차 수신사들에 의해 유입된 조선책략은 중국인 황준헌이 쓴 외교방략서입니다. 그 내용을 한번 볼까요? 바쁘신 분들은 밑줄 부분만 읽어보세요.

지구의 위에는 막대한 나라가 있는데, 아라사(러시아)라고 한다. 그 너비가 광대해서 3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 정예병이 백여만이고, 해군 거함이 이백여척이다. 다만, 나라를 북쪽에 세워서 하늘은 차고 땅은 척박하였다. 고로 빠르게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선세로부터 표트르대제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이전보다 10배가 넘었다. 지금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팔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으로 중아세아에 있는 위구르의 모든 부족을 잠식하여 거의 다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뜻이 작지 아니함을 알고 왕왕 합종하여서 서로 항거하였다. 투르크 한 나라를 러시아가 오랫동안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여 유지해 나감으로 러시아가 끝까지 굳세게 그 뜻을 얻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서양의 여러 대국들, 독일·오스트리아·영국·이탈리아·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모두 호시탐탐 결단코 한 척, 한 촌의 땅이라도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토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세이고,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시아에서 뜻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세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구라파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동·서·북이 러시아를 등지고 경계를 잇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형세가 아시아주에 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는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이 된지 이미 천년이 지났으되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의 대청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을 정벌해서 2백여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사랑하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왔다.

강희·건륭조를 당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상문하지 않은 것이 없이 내지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가 같고 정의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연접하여 신경(북경)을 껴안아 호위함이 마치 왼팔과 같다. 서로 휴척을 같이하고, 서로 환란을 함께 하였으나, 저 월남(베트남)의 소원과 면전(버마)의 편벽과는 본디 서로 떨어짐이 오래됨이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서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속국은 곧 이 예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성원이 스스로 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 형세가 외롭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한 나라는 맹부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이리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한번 변고가 생기면 구주·사국이 또한 일본의 차지하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의 형세에 놓여있다.

한·조·위가 합종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촉이 서로 결합하자 위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획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구교를 닦고 외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해는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조선을 동해로부터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그 근본은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백년 전에 화성돈(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사람의 학정을 받기를 원치 않고 발분 자립하여 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십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례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연병을 권유하고, 약속을 고칠 것을 도와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로써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시초는 영국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으므로 고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항상 소원하였다. 그 인종은 실은 유럽과 동종이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국세는 대동양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는 호로 대동양에서 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거하고 무사하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리 대양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가히 구원을 얻고, 가히 화를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는 것은 조선의 믿는 바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장차 믿고, 장자 의심할 것이다.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즉 조선이 심히 의심할 것이다.

                                                                                         - 황준헌, 조선책략  -

자 밑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글의 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1번째, 개화를 통해서 부국강병을 해야 하니 서양과 통상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라

2번째, 러시아의 남하에 방어해야 하니 조선은 개화를 하되,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외국과 만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뜻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이 책을 만든 청나라의 의도입니다. 청나라는 당시 러시아와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재하면서도 <조선의 종주국은 청나라>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 책을 적은 것입니다. 미국과 연합하라는 제의는 곧 미국의 힘을 끌어들어 동아시아 구도를 바꿔보겠다는 청의 의지입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들어옴으로서 흥선대원군 시기 억눌려 있던 개화파의 목소리가 봇물터지듯 나오기 시작하였고,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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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선책략의 유입을 필두로, 80년대 조선 정부는 개화라는 파도에 휩싸입니다. 개화파 신료들은 고종에게 정부가 앞장서서 개화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조선책략에 쓰여진대로 미국과 연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조미수호조약, 1882)

해국도지, 영환지략과 같은 세계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책들이 들어와 우리의 눈이 넓어졌고, 만국공법 등 서양의 보편법이 유입되어 합리적인 법질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지요.

3. 미국과 수교를 맺다.

조선책략으로 맺은 첫 번째 결실은 미국과의 수교입니다. 미국과의 수교는 <조선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조선책략을 유포한 청나라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조선이 조약을 맺는 중간자로서 청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청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종주권을 암암리에 묵인받게 되고, 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에서 미국의 원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고, 조차지 설정을 승인한데다가,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서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용어들이 어렵죠? 강화도 조약에서 했지만, 다시 한 번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이번엔 표로 정리해볼께요.

<불평등 조약의 일반적 내용들>

협정

내용

영사재판권

다른 나라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타국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은 외국인이 재판한다는 것이지요. 예로, 우리 젊은 여중생들을 미국 탱크가 밀어 죽였어도 미국병사들은 미국가서 재판받고, 국내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잖아요? 그것과 유사합니다.

관세협정권

관세는 해외에서 물건이 들어올 때 세금을 메기는 것입니다. 관세가 높을 수록 세금이 많이 책정되므로 물건값이 비싸지고 잘 안팔리지요. 관세협정권이란, 관세를 낮게 책정하거나, 아예 관세없이 자유무역을 하여 자국의 물건이 잘 팔리게 하는 조약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FTA를 해서 자유무역을 하려고 하고 있죠? 바로 이것입니다.

개항장

설치권

개항장은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첫 입구인 항구근처를 말합니다. 개항장은 외국이 자유무역을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거주 세력 범위를 정하는데, 이것을 <조계>라고 합니다. 특히 조계는 외국들이 자신들의 독립된 영토로서 <조차지>를 설장하기 때문에, 그 지역이 외국의 땅으로 넘어가버리는 <반식민지 지역>이 됩니다. 일본과 미국은 이 개항장은 10리, 50리, 100리로 넓혀갑니다. 조차지가 넓어지고, 개항장이 넓어질수록 해상무역은 점차 육지 무역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이지요.

화폐통용권

화폐통용권은 개항장에서 외국의 화폐가 통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국이 자국의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김으로서 우리 경제를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최혜국

대우권

최혜국 대우권은 통상, 항해, 관세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3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로, 일본이 우리에게 원산을 개항했다면, 미국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으로서 일단 원산은 자동 개항하고 나머지 부분의 개항을 추가 합의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나라와 맺은 조약이 이후 조약 또는 이전 조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청과 맺은 조청상민무역장정에서 <내륙지 무역을 허가한다>라는 조약이 있습니다. 이 조약은 최혜국 약관에 의해 모든 나라가 우리 내륙에서 무역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 조약이 체결된 1880년 중반에서 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모든 나라가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고 받고를 시작하죠.

3. 민씨정권은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시도하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공공연한 명분을 얻게 되고, 개화파는 이제 양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1880년대의 개화정책의 특징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정부주도의 개화정책과 온건개화파의 득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개화정책이란, 서양의 모든 문물을 다 받아들이는 정책이 아닙니다. 조선 정부는 개화의 성공 사례는 일본을 본받으려 했지만, 개화의 원칙에 았어서는 청나라, 특히 양무운동의 이홍장에게 많은 자문을 얻게 됩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개화정책 사상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되, 중국의 정신을 유지한다>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나라 개화도 이 중국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의 성격을 본받아 <동양의 도를 존중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는 <동도서기>의 개화였습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위 글은 윤선학이 주장한 동도서기론입니다. 즉, 이홍장의 양무운동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민씨정권은 <동도시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구와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효율적인 문물 수용을 위해 청에는 김윤식 등 영선사를 계속 파견하고, 일본에는 수신사 대신 조사시찰단을 파견합니다. 조사시찰단은 정부 관료 중심이 아니라 젊은 관료와 기술자,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진보적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숫자도 상당히 많이 늘렸습니다.

이러한 외국 문물의 조사를 통해 통리기무아문과 12사라는 행정기구를 신설합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부, 12사는 각 부와 차관급이 되겠네요. 또 <국>을 신설하여 국가 기술력 향상을 추구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박문국으로서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합니다. 또 중국 양무운동기의 기기국을 모방하여 기기창이라는 무기 제조부를 만들고, 신식 군대도 양성합니다.

신식군대는 왜별기라고 하여 양반자제로 구성하였습니다. 원래 흥선대원군 시기에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극복하면서 무위영, 장어영의 2영체제가 확립되고 군권을 국왕이 장악하였는데, 민씨정권에 들어서면서 이 구식군대를 활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대원군기 구식군대는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신식군대를 육성함으로서 이것이 훗날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4. 조선책략은 룩론을 분열시켰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정부가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을 흔히 정을 수호하고, 사를 몰아낸다는 <위정척사운동>인데, 80년대 위정척사운동의 내용은 <민씨정권에 대한 개화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책략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일부를 한 번 볼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미국과 연합해고, 러시아를 물리쳐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생들은 아무 근거없이 개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의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보이는대로 불태우는 운동을 하면서 개화에 대하여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위정척사운동을 대원군기부터 명성황후기까지 시기별로 모아서 정리해보겠습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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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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