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28 -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통일 배경

이번 장에서는 진나라의 통일 배경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진에 대한 이야기는 통일배경론, 진의 정치사, 진의 제도사로 나누어 3파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유산 부분을 다루어 보죠. 그게 진나라 이해에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1. 진의 통일 이전부터 추구해온 통일사상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춘추전국시대>에는 통일론이 각 제자백가 사상 속에서 내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각 사상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 이 혼란한 세상이 끝나고, <통일된 국가>가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요. 유가는 도덕원리로서, 법가는 법치원리로서, 묵가는 겸애사상으로, 도가는 자연철학으로 그 방식이 달랐지만, 모두가 통일을 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전국시대의 통일은 이러한 혼란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바램이 이루어전 것입니다. 통일의 방식 중에서 법가사상이 가장 군주의 이상적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방식을 통해 진이 통일을 이루었던 것 뿐이죠.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보아도 초기 철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철기가 보급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와 같은 강력한 통일국가들의 통치이념이 대부분 강력한 법치주의를 통한 각종 제도 개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엄법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는 가장 잘 적용되었던 듯 싶네요.

법가사상의 가장 큰 장점은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에서 <경제력>을 통일시키기 좋다는 점도 있습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위적인 각 국가간의 관세 장벽, 화폐, 도량형의 불일치로 인하여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 계층의 불만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곧 정치적 통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일원화도 뜻하는 것이었으며, 진시황이 통일 후 바로 강력하게 화폐, 도량형, 도로 등을 통일하거나 정비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페르시아를 통일한 다리우스 1세기에도 진시황제와 거의 비슷한(똑같은 것도 있더군요) 경제 통일 정책을 실시하는데, 역시 통일 전 경제적인 단위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또 진시황의 통일은 <중화>라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고 했던 주나라 이후 중원 민족들의 일체감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반증합니다. 실제 은, 주대에는 황하강 유역만이 중화의 개념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 월, 오>라는 양자강 국가가 등장함으로서 이들 역시 <중화>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초>는 스스로도 남방의 오랑캐가 이닌 <중화민족의 일부>임을 자처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방의 오랑캐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서부의 <진>이 통일함으로서 서-중-남을 통합한 <중화>개념이 등장합니다. 즉, 중국민족이라는 보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이 너무 빨리 망한 관계로 중국 민족을 뜻하는 한족은 다음 왕조인 <한나라>에서 비릇됩니다.

또 서-중-남의 통합은 이제 북- 동부 오랑캐 정벌이라는 시각에서 중화의 영역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를 중화 외의 경계로 설정하였고, 한나라는 동부 고조선을 외부 경계로 설정하면서 이들 민족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죠. 남부로는 양자강 훨씬 이남이 이제 오랑캐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서부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더 나아갈 곳이 적었으므로 오랑캐의 개념과 함께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무역권으로 인식을 합니다.

또 하나 중국 통일의 배경은 바로 북방 <흉노>의 강성합입니다. 강력한 유목민 문화권의 흉노가 중화문화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하나로 뭉쳐 대항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국가든지 강력한 통일 국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고, 이것은 <진>이라는 오랑캐 국가가 중원을 통일했음에도 그 통일을 이민족의 침입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성립된 듯 싶습니다.

2. 그럼 왜 하필 진이였는가?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한 가장 큰 원인은 <상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법가주의 사상의 수용입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진의 변법은 1차,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국가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주변에 강국이 없는 서부의 외진 국가라는 점이 변법 수행을 차질없이 진행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변법을 통해서 진은 구세력을 일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를 완성하여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상앙의 제원전을 보면, 당시 농법기술의 발달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예로, 당시에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휴한농법이 이 때 도입되었죠.(유럽 중세에서의 삼포제가 보통 9- 10세기 정도에 정착되는 것으로 미루어 천년은 빠르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가지는 토지 사유제를 실시함으로서 국가는 엄청난 조세를 걷을 수 있었고, 이것이 철제무기를 원할히 생산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 농업의 안정은 군공수작제 등을 통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부병제를 완성시켰고, 진에서는 중국 전래의 전차전, 보병전에 유목민족의 기마전법까지 더한 강력한 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능력에 따라 재산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변법의 원칙은 국왕이 신료들을 능력별로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진의 근거지인 서방의 영토는 위수분지를 포함하는 그 서역으로서 훗날 국제적 도시 장안 등을 이루는 천연적 요새이자 동서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높았습니다. 또 진은 중원보다 후진적인 지역이라는 틀을 벗기 위해 북방문화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의 외교적인 역량도 높이 살 수 있죠. 진은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해 먼 나라와는 동맹을 맺어둔다는 <원교근공책>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진의 이 외교는 소진, 장의 등의 합종연횡 등의 제자백가 이야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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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사상 1 - 유가사상

1. 유가 사상의 특징

유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공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자들인 맹자, 순자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간을 정치, 사회, 역사의 주체로 놓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윤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자연속에서 진리를 찾는 도가적인 관찰자 역할을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법가적인 강압주의는 인간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이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가사상가들은 자연과 강압의 가운데에서 <중용>을 통해 윤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곧 정치 윤리로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치국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유가주의자들의 논의는 상당히 지배계급의 이상적 당위성과 치국의 방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내적인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주시대의 봉건적 질서와 예작제도를 중시하였으며, 그 원리에 따라 예법을 만들고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군주는 덕치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군주가 지켜야할 행동가짐은 예치로 규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중용의 논리와도 일통합니다. 즉, 예치, 덕치, 중용에 입각한 덕치주의, 예약정치, 왕도주의는 군주의 필수 항목으로서 이러한 항목을 군주가 지켜가야 혼란한 시기를 구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유가주의는 당시 공자 이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중삼-자사-맹자 계열, 자하-순자 계열의 사상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인간이 예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유가의 핵심 원리는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패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계열이 갈리게 됩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 사상입니다. 어질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어진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효, 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 - 효 - 제라는 핵심 도리를 말함으로서 이 도리가 가족윤리적임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부장권을 옹하하면서 그 가족제도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국가적으로 확장하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국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가족을 감싸듯이, 덕으로서 백성들을 위무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이렇게 인 - 효 - 제를 지켜가면서 윤리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군자란 우애와 효도를 통해 <수신제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이상적 군자의 모범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그는 군자란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로서, 교양을 갖추되, 그 교양의 바탕에는 올곧은 지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소인배들을 군자로 끌어올라는 것이 곧 목표입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을 4등론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성인 - 현인 - 군자 - 소인이 있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되는 것이 곧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인은 군자의 단계를 넘어선 지식과 정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선천적으로 성인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이 4등론은 한나라 시대 한고가 인간유형을 9등으로 다시 세분하였고, 훗날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관인을 선발할 때의 기준으로 쓰입니다.

공자는 내적인 윤리(덕)와 외적인 예(예절)이 균형잡힌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지식과 정신의 겸비를 다시 강조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와 정을 고루 갖추어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은 관용과 타협정신을 가진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시함에 있어 격식에 맞게 행하는 것은 서주의 예에 맞는 것으로, 예악정치도 강조합니다.

3, 맹자의 사상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일단 인간 윤리에 대한 전제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 처음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본성을 지키는 것이 곧 유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여된 4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사단이라고 합니다. 4단은 측은지심(인), 수오지심(의), 사양지심(예), 시비지심(지)입니다. 그리고 이 4단이 발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 때문인데, 이것을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4단에 맞추어 인간은 다섯 가지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이라는 5륜입니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이론으로는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왕도주의란,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한점 부끄럼도 없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야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4단 중에서 <수오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의 = 정의를 뜻하는 것이지요.

제왕이 수오지심에 의거하여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면, 천명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하늘이 스스로 제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명은 곧 하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군주가 정치를 한다면 이것은 하늘의 정의를 버리는 일이고 백성들은 새로운 하늘의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상 속에는 <혁명론>의 근거가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혁명론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살아생전에 크게 존경받으면서도 군주들이 꺼려하는 유가사상가였습니다. 또, 이러한 천명의 변화라는 개념은 후대 <선양>이라는 선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법가사상가들은 맹자의 사상은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4.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유가주의이면서도 기존의 학설과 많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성악설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공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족윤리를 주장할 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절을 통해서 억눌러야 된다며 맹자를 적극 비판합니다.

인간에게는 4단이라는 윤리가 내제한 것이 아니라, 절대 악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악을 누르기 위해서 예악정치,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은 유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 패도적인 법가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 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면, 순자는 아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체벌과 정신교육, 토론을 계속 할 것입니다.

또 순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효제라는 가족윤리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자는 가족 윤리는 작은 것이며, 이 작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윤리가 있는데, 이것은 곧 <의>를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소속한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헌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순자의 견해를 <충의론>이라고 합니다.

5. 유가를 비판하기 시작하다.

그럼 여기서 순자 외에 공자 사상을 비판한 수많은 제가 백가들의 비판 내용을 한번 볼까요?

도가에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도덕관념에 너무 얽매여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모순덩어리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교사상이 인간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국왕권과 밀착된 현생문제에만 몰두하여 인간이 가진 내면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가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소국과민>을 추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도가는 국가의 단위는 최소한 작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유가는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면서 지배층의 이념만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사상을 허무한 형이상학적 이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가 사상은 도덕과 윤리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여서 과연 그것이 정치이념이 되었을 때, 실제 전쟁으로 굶고 있는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이야기 합니다. 실제, 유가 사상은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묵가사상가들은 가장 신랄하게 유가를 비판합니다. 유가가 왕권이 강한 중원지역의 학맥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가장 남방의 초나라 권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유가가 중원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원리를 정당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묵가는 크게 반발합니다. 묵가는 유가의 인-효-제의 가족윤리는 자신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윤리이고, 그것을 확대한 가부장적인 군주관은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는 지배층만의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묵가는 가족애는 <차별애>이므로, 만민이 모두 평등할 수 있는 <겸애>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유가에서 말하는 <예절과 예악>은 허례허식일 뿐이며, 그런 절차가 과연 무슨 생산력 발전에 도움을 주느냐고 비판합니다.

묵가 사상가들이 유가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은 너무 많습니다.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차별적인 관습이다, 3년상은 허례허식이다, 예악정치는 낭비이다, 가족윤리는 차별애이다, 또 현세적인 유교적 치국주의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생활상과 맞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도가, 법가, 묵가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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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1. 제자 백가 사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제자 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정리해 볼까요? 우선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이 모두 제자백가사상의 등장 배경입니다.

일단, 당시 농업혁명에 의해 발전된 농업경제는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것과 맥락이 닿습니다. 이 서민층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사> 계급에 새롭게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사>란 원래 귀족 주변의 사적인 종자 성격으로서 일종의 <가신 계급>으로 성장한 계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사회변화와 맞물려 성장하면서 지식인, 군사, 관료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층에 포함되기를 원하였고, 그 대가로 군공을 세워 기존 제후층에게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실제 <사>라는 용어를 보면 무사계급인 사족으로 <국인>층에 포함된 하층무사라는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 체제에 맞는 입신출세를 원하였고, 군주를 보좌하면서 군주가 원하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계층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맞물려 당시 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도시국가들이 영토국가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군현제적 영토국가의 성립은 곧 사상과 지식, 학문적 논의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전쟁을 통해여 그 지식의 범위가 확대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건질서의 붕괴는 곧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이 일반 서민계급과 황하강의 중원을 넘어 양쯔강의 이남 지역인 오랑캐 지역까지 파급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폭발적인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회적 요건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당시 각국가들이 혼란기를 맞이하여 각자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각 국의 군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인재를 우대하였고, 이것은 사상이 다양해지고, 다양한 학설이 각국에 전파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들은 각자 사학적인 학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사상들은 <사> 계층을 중심으로 고유한 사상체계로 <부국강병>의 근본적 방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학자를 우대하여 다양한 사상이 모여 토론하던 곳이 제나라에 <직하의 학사>입니다.

2. 제자백가의 성격

제자 백가는 일단 사학적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학단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책은 다양한 군주윤리와 사회윤리를 제시하였고, 그 윤리들은 각각 창시자로부터 구전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부족했으며, 아직 한자라는 통합적인 글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문자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단의 교육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고, 질문하고, 암기시키는 <도제적인 지식전달과 질문법에 의한 사고력 향상>이 제자백가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백가는 개인적 사상체계라기 보다 개인이 속한 <학단>의 사상체계로 정착된 듯 싶습니다. 물론, 그 학단내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고, 분파마다 약간 다른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 백가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 학풍이 관료제적 국가 운영체제 및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은 지배층의 윤리와 지배층의 정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제자백가의 논의가 있음으로서, 주나라 까지의 천명사상과 신정정치에 의한 미신적 정치관은 일단 탈피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신과 자연의 문제보다 선행된 문제로 인식되어 중국인 특유의 현실적 세계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또 지나치게 부국강병에 얽매인 철학 사상은 개인적 측면의 사상보다는 군현제적 체제에 부합된 국가윤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후 학문과 정치라는 것이 일원화 되어 <관료가 학자이고, 학자가 곧 관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현실 정치가들이 논하게 되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문제도 부국강병이나 치국에 맞는 변법적 측면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한계를 말하자면 국가주의적 윤리관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인간행복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규칙에 종속시켰다는 점을 일단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추구하는 내세적이고, 열정적인 가치관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네요.

제가백가는 중국의 철학이 사학적 성격의 철학으로 출발하여,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 도, 음양, 겸애, 태극, 오행, 법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은 진나라에 의해 법가주의적으로, 한나라에 의해 유가주의적으로 일원화됨으로서 다양한 사상들이 획일화되어 음지에서 퍼졌다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3. 제자백가의 형성 지역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 사상은 서주문화권에서 많이 퍼졌습니다. 공자 자체가 노나라 사람으로서 중화권이었고, 유가는 중화의 근원지인 진, 위, 제나라 등에서 유행했습니다.

반면 유가를 차별애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겸애를 주장하였던 묵가사상은 중원을 벗어난 남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5패 7웅에 속하였던 남방의 최강국가 <초>에서 묵가사상이 가장 유행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이념적인 대립 뿐 아니라 중원과 변방이라는 지역적인 대립도 심하였습니다.

도가는 원래 남방의 <초>에서 시작되었으나, 제나라 <직하의 학사>에 유입되면서 남북지역에서 고루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무위자연이나 소국과민의 주장은 당시 <부국강병>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도가의 이념은 현실적인 정치이념보다 이상적인 관념 수준으로 유행한 듯 합니다.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내용 때문에 전국시대 각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원래는 <한, 위, 조> 등 주왕실의 근거지인 국가들이 신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초, 제, 진 등 변방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각국의 변법 추진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던 각 제자백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상호 융합되어 각 지역별로 사상들이 서로 경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국 통일을 이룬 것은 진나라의 <법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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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변법운동 1(변법운동의 이유)

1. 변법운동이 필요한 이유

춘추전국시대에 변법이 필요했던 이유는 중국사 15장에서 설명했던 내용들이 전부 다입니다. 즉, 춘추시대 중기 이후 이제 각 국가는 기존의 씨족공동체와 봉건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전통과 씨족적 관습, 봉건제적 혈연성을 모두 버리고, 반발하는 구귀족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또한 날로 넓어지는 새로운 영토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제와 새로운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군현제를 확대하여 영역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것은 엄격한 법을 적용하여 구 세력을 모두 죽이고, 법가주의적 중잉집권과 모든 인, 민에 대한 제민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죠. 변법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모든 백성과 모든 토지를 국가가 지배하고 세금을 걷는다는 <제민지배체제>의 실현입니다. 이것은 봉건제도 속에서 존재하는 구귀족의 지배방식을 중앙집권적 국가 지배 방식으로 바꾸어 영토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변법을 실시하였던 각국의 재상들

위나라의 이회는 상당히 유명한 변법가였습니다. 그는 구귀족의 모든 봉록을 몰수한 다음에 구귀족 역시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명한다는 파격적인 변법을 실시합니다. 또 농업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진토력을 시행하였고, 물가안정책으로 평조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위의 서문표는 이러한 정책의 영향으로 대규모 관개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초나라의 오기는 군주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누르기 위해 봉토된 귀족은 <3대>에만 한하며, 그 이후의 특권은 없다는 것을 법제화하였습니다. 왕의 친척이라 하여도 세습의 특권은 없게 하였습니다. 왕권에 위협을 주는 귀족들은 <강변정책>을 실시하여 강제로 변방에 이주시켜 버립니다.

이 외에도 초의 공중운, 한의 신불해, 제의 추기 등은 유명한 변법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변법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사나이는 뭐니뭐니 해도, 통일국가 진의 기틀을 마련한 <상앙>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파트를 나누어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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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춘추시대 - 춘추5패와 회맹적 국제질서란?

1. 회맹적 국제질서란?

희맹적 국제 질서란 춘추시대 초기에 나타는 <패자>를 중심으로 한 연합 질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형식상 주왕실을 받는다는 명문을 가진 패자가 힘이 없는 주 왕실을 대신하여 오랑캐를 무찌르고 <중화질서>를 지킨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질서입니다. 춘추초기의 과도기적 사회에서 보이는 특이한 질서이지요.

이 질서는 당시에도 존재했던 원시적인 주술관과 봉건제도의 혈연성을 벗어나지 못한 제도입니다. 즉, 주왕실에게 봉토를 받았던 하늘의 후예들이 연대하여 공동의 중화 질서를 지키고, 동일 조상신을 통해 같은 핏줄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민족을 무찌를 수 있는 강한 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이렇게 주 왕을 받들어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사상을 <존왕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춘추시대 초기 패자들은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종묘사직>은 보호하고 지켜주었습니다. 병합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패자들의 원칙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기 국가병합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과 그와 관련된 씨족질서는 계속 유지하면서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국의 지배층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과 결맹을 맺어 대국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회맹>이라고 합니다. 회맹은 맹주에 대하여 소국들이 병력을 <부세>로서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패자가 점령한 소국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경우 소국은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패자에게 저항하는 <반맹>현상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인정을 받고, 소국은 대국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며 등장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외교가가 바로 <자산>입니다.

2. 춘추 5패의 등장

춘추 5패는 이러한 회맹적 질서를 보이며 등장한 춘추시대 5명의 패자를 말합니다. 춘추 5패는 제, 진, 초, 오, 월을 말합니다. 원래 초기의 패자는 중원지역인 황하유역의 제, 진 나라 등이 영토전쟁을 하면서 패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철기를 통한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초, 오, 월 등의 남방국가들이 패자로 등장합니다. 초기의 중원국가들은 남방국가들은 오랑캐로 생각하여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춘추 5패로서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자 후기에는 이들도 같은 중화민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춘추 시대 후기에는 북방의 진과 남방의 초가 대립하면서 남북적 대립현상이 보입니다. 어떻게 본면 춘추 5패의 판도는 제, 진의 북방 중화질서 유지와 초, 오, 월 등 남방국가의 중화 진출 시대의 한 판 장이라고도 보여집니다.

3. 춘추 중기 이후의 멸국치현 현상

춘추 시대 중기 이후 남방과 북방의 대립이 심해지고, 각국의 부국강병이 절실한 시기가 오자 이제 <중화>라는 개념으로 싸우기보다 <남북간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춘추시대가 전개됩니다. 이 때는 주왕실을 받들어 소국의 종묘사직을 인정한다는 명분은 점차 희석되고, 소국을 멸망시켜 자국의 행정구역인 <현>으로 만든 뒤 세금을 부여하는 <멸국치현>현상이 발생합니다.

국가를 멸망시키고, 현을 성립시킨다는 <멸국치현>은 지배자를 제가하고 소국의 종묘사직을 파괴하였습니다. 각 국은 국력 강화를 위해 군대를 모아야 했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패자는 절대적인 가부장적 군주로 변신하게 되고, 각 국은 <변법>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법과 이념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이 춘추 중기의 현상은 곧 <읍제국가>수준의 지배형태를 <군현제적 중앙집권국가>로 변환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나가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춘추 5패가 서로 항쟁하는 부분의 고사들(와신상담 등)은 따로 정리하여 사료방에 넣어두겠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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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