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속의 역사

드라마 선덕여왕 :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정리해 봅시다.

1. 뭐가 있어야 말을 해보지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덕만>이가 <성골>이라고 나온다. 그리고 미실이는 자신이 <골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국인이라면, 신라에 품, 진골, 성골로 구분하는 신분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런데, 덕만이가 <성골>이었다는 것은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아니, 진골, 성골과 같은 용어 자체를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당시 신라의 골품제도를 알 수 있는 사료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등 뿐이다. 너무나 적은 자료이지만, 그나마 그 적은 자료에서도 성골이 무엇인지, 진골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해 놓은 부분은 없다. 신라인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적을 필요가 없었던 것 일까?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용어일 뿐이다. 그럼 그 얼마 안되는 자료를 가지고,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나온 <구분법>들을 총정리 해보도록 하자.

2. 신라의 건국과 <신성한 탄생>

자, 그럼 성골, 진골이라는 표현 방식부터 생각해보자. 성골(聖骨)이라는 말은 말 그래로, <성스러운 뼈대>라는 뜻이다. 진골(眞骨)이야 뭐, <진짜 뼈대>라는 뜻이겠지. 일단, 이 단어들은 모두 <뼈대 있는 인간들>을 말하는 <지배층>의 단어인데, 그 시작은 어떻게 될까?

먼저, 신라의 건국 시대로 올라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이민족인 혁거세를 기존의 신라 집단이 받아들여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이야기 역시 <화랑세기>의 내용을 근거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데, 일단 화랑세기의 사료는 조금 조심스럽게 다뤄보려고 한다. 일단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의 원본이 없고, 일제시대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 필사 원본도 지금 존재하지 않으며, 사본만 남아있는데 그 사본도 지금 위작 논란이 되고 있다. 문제는 <박창화>라는 사람이 일제시대에 음란소설이나 위작도서를 만들면서 생계를 유지했던 아마추어 소설가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박창화>라는 인물의 생애와 글쓰기 능력 자체가 논란이 되어, 화랑세기를 역사적 사료로 다루는 데 상당히 신중한 편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이야기를 다루려고 한다.

일단, 사로국(신라의 초기 명칭)이라는 나라는, 고조선의 건국처럼 절대 강자가 등장해서 세운 나라가 아니다. 신라의 전신인 삼한 시대의 진한에는 <여섯 마을(6촌)>이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를 각각 <간>이라고 불렀다. 그 중 고허촌의 촌장을 <도리>라고 부르면서 공동으로 마을의 일을 결정하는 <철기 연맹체 국가>였다.

철기시대에는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사회가 크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섯 마을의 지배자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맞게 국가 체제를 개편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여섯 마을이 같이 뭉쳐 세운 연맹체가 <진한6부> 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신성한 사람>이었기에, 공동의 왕으로 추대 했다고 한다. 혁거세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박(朴)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 용(계룡)이 나타나 여자 아이를 낳으니, 그녀의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짓고, 왕비로 삼았다. 왕비가 계룡의 우물(계정)에서 태어나서, 나라 이름을 <계림>이라고 지었고, 사라,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는 혁거세가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

이렇게 성스로운 하늘의 기운을 받아 신라의 시조가 태어났기 때문에, 신라에서는 <신성한 인물>이 왕이된다는 관념이 있었고, <신성한 왕, 왕비, 그 직계 혈족>을 성스러운 존재(성골)로 여겼다고 한다.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은 <골>이라는 말 자체가 최상위 지배층을 말하며, 성골이라는 관념은 이후 <계림>에서 후대 왕들이 <신성함>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3. 진한6부가 <골>의 시대로...

초창기의 진한6부를 다스렸던 세력은, 여섯 마을의 지배자였던 <간>이었다. 삼국사기를 통해, 박혁거세를 <거서간>이라고 부른 것은 <간들 중에 대표적인 왕>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신라의 초창기에는 <간>들이 돌아가면서 지배층을 이루었다.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는 사실에서 진한6부가 <연맹체 국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국사 교과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거서간-차차웅-이사금 등의 군장, 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던 6부의 지배자가 <내물>시대에 <마립간>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김씨만이 왕위 세습을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마립간>은 교과서에서는 <대군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간들을 지배하는 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진한6부는 <국가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기존의 <간>들의 마을을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국왕의 신하로 복속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서라벌>이라는 협소한 지역을 벗어나 주변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무 자료가 적어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신라 시대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가 서서히 등장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골품제가 등장했는지는 기록에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한가지 명확한 것은, 골품이라는 제도가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정해진 신분제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또는 필요에 따라 계속 변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이다. 그럼, 일단 신라의 <골품제도>부터 한번 정리해 볼까?

4. 골품 제도의 변화와 <진골> 용어의 등장

골품제도는 말 그대로 <골족>과 <품족>을 나눈 제도이다. <골족>은 일반적인 학설로 본다면, 신라 초창기 지배자들인 화백회의 6부족의 지배자, 즉 <간>이라는 마을의 지배자를 최고지배층인 <골>로 인정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6부족의 관료층이나 행정실무층들은 그 능력에 따라 <품>으로 규정하고, 1,2,3,4,5 품의 5단계를 기준으로 <품>을 주었다. 그것이 바로 <골품제>이다.

그런데, 골품제는 초창기 진한6부의 지배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서라벌>에 거주했던 진한6부의 <간>층과 그 일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라는 관등을 12등급으로 나누어, 골족과 품족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한계선을 명확히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골품제가 <지증-법흥-진흥>으로 이어지는 변혁기에 많은 부분이 손질된다. 지증왕은 국호를 <신라>로 정한 뒤, <왕>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사회 질서를 꿈꾸었다. 법흥왕은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를 공인하면서 골품제를 다시 만든 왕이다. 그리고, 진흥왕은 선왕들의 유지를 받들어 영토를 확장하면서 드라마에 나오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하려고 했던 왕이다.

특히, 법흥왕 때의 변화가 주목할 만 하다. 법흥왕은 불교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를 다시 개편하려고 했던 왕이다. 그는 12관등이었던 신라관등제도를 17관등으로 넓히고, 신라의 왕이 곧 <부처의 일족>이라는 성스러운 개념을 신라사회에 도입하였다.

이 때 신라의 <골>족들은 1-17등급으로 분화된 신라 지배 관등 사회에서 상하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또 넓어진 신라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골>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골>족 사이의 분화가 생겨서 <진골>이라는 차별화된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존 학설은 진골이라는 용어가 내물왕 때 등장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1-5두품밖에 없었던 신라에서, 새로운 관등에 적응하고, 새로 등장한 <진골>족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품>족들이 생기면서 6두품이라는 새로운 <품>이 등장하게 된다. 신라의 6두품은 법흥왕대부터 삼국통일전쟁이 있던 시기에 새로 생긴 <품>이었다.

5. <성골> 용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 문제

법흥왕 다음 등장한 <진흥왕> 때에는 새로운 사회 변화에 맞춰 <국왕의 신성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 무렵, 진흥왕이 거칠부를 통해 편찬했던 역사서가 바로 <국사>였다. <국사>에서는 <성골>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칠부는 모든 신라왕들을 <성골>이라고 규정하고, 성골들에게는 어떤 <신성함>이 있었는지를 서술하였다. 즉, 국왕은 새로 등장한 <진골>이라는 계층보다 우월하며, 신성한 존재라는 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고대 왕들의 <신성관념>이다. 즉, 왕들은 성스러운 <성골>인데, 이미 성스러운 신분이기 때문에 왕에 등극했다는 것이다. 김춘추 이후의 진골왕들이 알게 모르게 강조한 <왕이기 때문에 신성하다>라는 개념과는 반대의 개념인 것이다. 삼국사기는 성골과 진골의 차이점을 인정하고 있고, 최초의 진골왕인 김춘추를 기준으로 <신라의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성골>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정의를 하나 하나 살펴보자. 역사학자들은 어떻게 성골과 진골을 구분해 두었을까?

6. 전통적 주장 : 실증주의 사학

가장 전통적인 주장은, 실증주의 사학의 대표자이자, 과거 한국 사학을 이끌어갔던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병도는 이렇게 주장했다.

골품에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왕족의 혈통에서 구분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성골이면 성골, 한쪽만 성골이면 진골로 골품이 내려간다는 것이다. 지금 20대 후반의 나이라면 모두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 공부했을 것이다. 교과서 자체가 이병도 사학의 주장대로였으니까... 왠만한 백과사전에도 이 주장이 실려있다.

솔직히 말하면, 가장 근거없는 주장이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맞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성골인 진지왕의 아들 용수공이고, 어머니는 성골인 천명공주이다. 그럼 김춘추는 성골이여야 한다. 이병도는 진지왕이 패악한 군주였기 때문에 김춘추의 신분이 강등되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따지면, 진지왕과 혈연관계에 있는 모든 신라 성골이 다 진골이 되어야 한다. 논리가 너무 빈약하고, 맞는 부분이 거의 없지만 한국 사학에서는 이직도 이 분의 파워를 무시하지 못한다.

7. 진흥왕의 직계라는 관점

이 주장은 지증-법흥-진흥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산물로 <성골>이 등장했다는 주장이다. 특히, 진흥왕이라는 강력한 왕이 등장하면서 진흥왕의 직계 후손과 방계 후손을 구별하기 위해, 진흥왕의 직계 후손을 <성골>이라고 부르면서 신성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진흥왕의 태자는 동륜이었는데,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었고, 동륜의 손녀가 선덕여왕이다. 진흥왕의 적통이었기 때문에 <성골>이라는 것이다. 반면, 진흥왕의 다른 손자로 왕이 된 진지왕은 폐위되었고, 그의 아들인 용수와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는 성골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화랑세기에서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의 계통을, 진골정통이란 진흥왕의 모후인 지소태후 김씨의 계통을 말한다.

여기서 화랑세기에 의하여 또 하나의 직계, 방계 구분이 나온다.

대원신통이란, 어머니가 신을 모시는 신당의 여사제 출신일 경우를 말한다.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왕후 박씨가 바로 대원신통이며,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인 미실이도 대원신통(신녀) 출신이다.

반면, 진골정통이란, 신당의 족속이 아닌 <골>족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지가 않다.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합치는 대충 이런 결론이 나온다.

성골은 아버지가 왕족인 왕의 자녀이고, 진골은 어머니가 왕족인 공주출신의 자녀를 말한다. 물론, 성골과 진골은 화랑세기의 구분으로 모두 <진골정통>이다. 보통 왕은 <성골>출신에서 나오고, 왕비는 <진골>출신과 신당의 <대원정통> 출신에서 나온다고 한다.

8. 혼인 규율을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왕족 내부 근친혼에 근거한 주장이다. 신라시대에는 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왕족끼리의 혼인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이때 성골은 왕족 내부 집단에서 혼인했을 때 태어난 왕족을 말하며, 진골이란 왕족이 다른 일반 귀족(품족 등)과 결혼해서 태어난 집단이라는 견해이다.

예로, 무열왕은 왕족 내부 근친혼을 어기고, 가야계 김유신의 누이와 혼인을 하였기 때문에 성골에서 밀려 족을 강등당했는데, 왕이 되었기 때문에 진골로 긍정되어 인정받았다는 내용도 들 수 있다.

9. 왕위 계승권 분쟁에 관련된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정치적 투쟁의 결과라고 보는 주장이다. 즉, 왕족 자체가 근친혼이었으므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국왕의 직계 계승자와 왕권에 오를 수 있는 순위권의 친족을 성골이라고 부르고, 그 외에 왕위 계승권이 없거나, 소외된 집단의 귀족들을 진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성골은 왕위계승권을 확정해 두어서 이후 분쟁의 소지를 아예 없애 버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골로 왕이 된 김춘추는 오히려 가장 확고한 전제왕권을 확립했고, 가장 강력한 후기 신라 사회를 이끌어갔으며, 김춘추의 후손인 무열왕계가 왕권을 독점하였다.

이것은 더 이상 <성골>이라는 개념이 필요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성골>은 왕권이 미약할 때 왕위계승분쟁을 없애기 위한 장치이므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김춘추 이후에는 <성골>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없이 <골>이라는 명칭만으로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결국,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성골의 개념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것은, 성골의 특징을 몰랐기 때문이다. 성골은 사실 중앙집권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한 법흥왕, 진흥왕의 과도기 때부터 여왕집권기로서 정권이 흔들렸던 선덕여왕, 진덕여왕 때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삼국사기에 성골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사용된 용어이다.

10. 중국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관점 

이 주장은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의미없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골과 진골은 사실 큰 차이가 없는데, 중국의 황제 체제의 영향으로 왕을 <성골>로 신성화시켰다는 주장이다.

특히, 성골이라는 관점을 외교적인 측면에서 찾는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으면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상을 격상시키기 위해 <성골>이라는 신성한 개념을 도입하여 당나라 등 주변국의 <황제> 개념에 맞먹는 개념을 창출했다는 것이다. 예로, 법흥왕과 진흥왕은 신라사회에서 보기 힘든 <연호>를 사용했다는 점도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열왕 때에 성골 개념이 생겼다는 주장도 연결된다. 무열왕은 이전 여왕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여왕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명분을 찾았는데, 그 결과 그녀들을 <성골>로 추존하면서 왕권이 신성하다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뭔가 더 찾아내려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의견도 내놓는다. 선덕여왕, 진덕여왕이라는 여왕통치가 중국 중화사상에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여자 황제를 부인한다. 당나라의 <측천황제>도 <측천무후>로 강등시키고, 여자 황제의 통치기간을 <암흑기>로 만든 것이 중국의 역사이다. 신라의 여왕 통치기를 중국이 조롱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성골> 개념을 만들어 <여왕통치의 정당화>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11. 성골은 유동적인 신분이라는 주장

이 주장은, 최근 많이 인용되는 주장으로서 이종욱이 쓴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에 실려있는 주장이다.

520년,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다시 정비했다는 점을 위에 적어두었다. 그 때 법흥왕은 불교 전파와 관련하여, 신라의 왕을 <성스러운 석가의 일족>이라고 격상하게 된다. 따라서 성골은 원래 신성하기 때문에 왕이며, 왕은 원래 <성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왕과 그 가족, 형제 등의 직계 친족들은 모두 <성골>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제외된 이들은 진골이 되는 것이다. <성골>로서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새로운 왕의 가족과 형제 등을 포함한 새로운 <성골>이 등장하는 것이며, 그 외의 친족들은 <진골>이 된다는 주장이다. 즉, 성골이란 현재 왕의 직계 후손들이 <성골>인 것이다. 현재 성골이더라도 다음 왕과 혈연관계가 멀어지면 족적 강등을 당하게 되며, 왕위 순위에서 밀리게 된다.

이 때 성골들은 황궁에 거주하면서 그 신분을 유지하고, 후대 왕을 선출하는 등 강력한 왕권을 뒷받침하게 된다. 즉,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진골은 황궁이 아닌 수도에 거주하면서 차별화 된다. 또한, 가야계(김유신계)라던가, 타국의 왕족이 흡수되었을 경우, 신라에서는 진골 신분으로 대접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출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삼국사기는 이 시기를 <성골남진>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는 더 이상 성골집단을 만들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김춘추를 예로 들자.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었으므로, 진지왕이 계속 왕이였다면 성골이다. 그러나 진평왕이 즉위할 때는 그의 직계 진척이 아니므로 진골로 격하된 것이다. 신라는 예외없이 선왕의 후손인 <성골>이 다음 왕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상태에서 즉위했으므로, 진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12. 신라의 불교 공인과 성골의 연관성

이 주장은 성골이라는 관념이 불교전파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다. 거칠부의 국사를 보면 모든 신라왕들이 <성골>이라고 씌여져 있으나, 그 주장은 진흥왕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편찬했기 때문일 뿐이며, 사실 성골은 법흥앙-진흥왕대의 창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신라 왕의 신성함을 <미륵부처의 신성함>과 동일시 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이전 신라 시대를 지배했던 <신권>보다 강력한 힘을 불교에서 찾게 된다. 이 관념이 <성스러운 부처 일족>이라는 불교 설화와 맞물려 <성골>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원래, <골>은 모두 <진골>이었다. 그런데, 진골 중 일부가 <우리는 석가를 믿는 족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성골>이 등장했다. 즉, 불교의 융성과 <성골> 개념의 등장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전파한 이후,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모두 진골의 진(眞)자를 이름에 두고 있는데, 이것은 불교의 진정한 석가모니 족속(진종설 : 眞種說)이라는 것과 일치한다. 진흥왕은 스스로를 불법왕인 전륜성왕이라고 생각했고, 신라를 석가의 불국토에 비유하기도 한다.

선덕여왕 드라마에서 진평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백정>이고, 그의 부인이 <마야부인>인데, 이것은 모두 석가의 부모 이름이며, 신라 왕실의 성골들은 석가의 친척이름을 차용하였다. 즉, 다른 왕족과 다른 신성한 석가 일족이라는 의미에서 성스러운 족속(성골) 개념이 창출되었다는 것이다.

13. 결국 성골이란 무엇인가?

위의 내용들을 정리해서 성골이라는 족속을 정리해보자. 위의 주장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결국 성골이란 <왕이 될 수 있는 왕위 계승권>과 관련있는 자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성골>은 하나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왕위 계승권>이 있는 자인가를 허가하는 <허가증>같은 것일 수도 있다.

신라에는 <갈문왕> 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왕위 계승>에 대비한 <보험>같은 것이었다.

왕은 다음 왕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책봉한다. 그런데, 왕이 자식이 없을 경우엔?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왕의 동생도 <성골>신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의 동생마저 죽어서 동생의 아들만 있다면?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아들이 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왕의 동생도 미리 성골로서 인정하고 <왕>으로 책봉을 해 놓아야 <왕의 동생의 아들>이 훗날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동생을 책봉한 것이 <갈문왕>이라는 제도이다. 즉, 갈문왕 제도는 성골이 <왕의계승권자>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라의 제도이다.

성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역사책이 발견되던가, 성골과 관련된 신라왕의 무덤이나 비석이 나오지 않는 한, 성골의 실체는 영원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 뿐이다.

최근 학설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자.

최근 학설은, <골>이라는 것을 김씨 왕권이 세습되기 시작한 내물마립간 시대에서 찾는다. 내물왕의 후손들은 <김씨>로서 박씨, 석씨와 다른 자신들만의 우월함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다른 진한6부의 <간>층, 즉 <골>들과 다른 진짜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어했고, 그래서 <진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이 지증왕-법흥왕-진흥왕대에 와서 왕권에 충돌하기 시작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불교를 공인했으며,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던 시기의 왕들은 <왕위계승권>자인 왕의 직계들과 다른 <진골>들을 구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왕의 권위를 위해 불교의 <석가모니 족속>이라는 이데올로기, 국왕은 원래 성스럽고 신성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왕권 세습을 정당화하고, 왕권이 신성함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삼국통일을 이룰 무렵 진흥왕이 생각했던 <불가능한 꿈>을 이루낸 무열왕 김춘추의 후손들은 <성골>이라는 타이틀이 없이도, 삼국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서 백년간 신라의 전성기를 만들어냈다.

묻혀있던 새로운 역사서들이 나타나서 더 정확하고, 확실한 <성골>의 개념을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남기고 오늘 글을 정리한다.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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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5화. 평생을 불교와 싸운 유학의 아버지 - 한유

1. 맹신적인 종교가 국가를 망치는 것이다. 

중국 불교를 마무리 하면서 어떤 상징적인 이야기를 꺼내야 쉽게 이해될까 고민하느라 포스트가 지연되었다. 오늘 이야기는 불교를 배척하면서 평생을 살아간 <한유>의 이야기로 중국 불교편을 정리하고자 한다.

중국 당나라 시기... 불교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국가 권력과 밀착한 화엄종, 천태종 등 교종 종파 뿐 아니라, 백성에게 직접 뛰어들어 불교의 대중화를 이끈 정토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불교천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의 힘이 너무 강해질 때마다 중국 황제는 종교에 태클을 걸었다. 그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다. 국왕이 불교를 용인하는 것은 불교가 왕권 강화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제에게 불교, 도교, 유학의 구분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종교가 황제권을 넘어서려 한다면 그 종파를 찍어 눌러야만 했다. 특히 유교, 도교, 불교라는 세 종파가 공존하던 중국 고대 사회에서 황제의 선택권은 넓었다. 황제가 불교에 위협을 느낄 때마다 유교,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탄압하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몇몇 <폐불사건>으로 알려진 것이다.

링크 : 불교편 9화. 서로 우위를 점하려던 도교와 불교의 한판 승부

특히 유교는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대세는 불교와 도교였고, 특히 불교는 당나라 측천황제(측천무후)의 불교 중흥 노력으로 최강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당 말기부터 불교의 위세는 꺽이게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황제 이후, 불교가 사회를 지배하였다. 황제는 미륵의 화신으로 생각할 정도였고, 귀족들은 스스로가 보살이라고 여기며 성불을 기원했다. 천태종과 화엄종의 <경전>은 귀족들의 교양지침서였다.

공식적인 당나라의 통일 사상은 유학의 일종인 <훈고학>이었지만, 훈고학은 옛 성인들의 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수준이었다. 백성들은 불교를 믿고, 집집마다 향불이 올라왔다.

2. 유학자들의 반격

유학자들은 불교 세력이 성장하자 불교에 대한 비판을 공론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황제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첫째, 불교 사원을 짓는다는 것은 막대한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종교 사원은 세금을 내지 않는 특권을 누린다. 그것은 왕권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죽은 뒤 내세가 기다리며, 내세는 현생의 죄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과응보>에 대해 국가적 차원으로 비판하였다. 유학에서는 현실 사회에 대한 모순을 파악하고, 현실 개혁과 사회 안정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뒤 영혼이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현실성이 전혀 없으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왕으로서 당연히 막아야 되지 않겠는가?

셋째, 불교가 왕권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전의 불교는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가 심화되어 강력한 <종파>가 생겨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불교가 석가모니의 참 뜻을 내세워 중국 전통 사회의 윤리에 도전한 것이다. 유학에서는 충성, 효도를 강조하지만, 불가에서는 출가릃 하여 부모와 국왕을 떠나는 것마저 허용하고 있다. 세금을 내야할 백성들이 줄어들고, 전통 윤리에서 멀어지는 것을 국가가 보고만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넷째, 불교 교단의 승려들이 <국사>가 되어 정치적 힘을 갖게 되었다. 왕권이 약해지는 시점에서는 이것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백만대군보다 무서운 것이 종교적 힘을 가진 백만 민중 아니겠는가?

결국 당말기 폐불사건은 남북조시대 이후 계속 되어온 왕권과 불법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남북조와 수나라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폐불을 당해본 불교였지만, 당말기에 대놓고 진행된 폐불에서는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경전으로 중심으로 귀족층과 밀접했던 <교종>은 교단이 박살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간략한 선법 수행과 <믿음>을 강조했던 <선종>은 그 피바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살아남은 불교 교파는 <선종>이었고, 결국 선종이 후대 중국 불교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불교 자체가 위축된 만큼 불교의 힘은 떨어졌다.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신유학인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고, <교종> 교파는 송대 이후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었다.

3. 불교도 싫어, 귀족도 싫어...  NO 만을 외치던 <한유>

당송팔대가의 으뜸이라 불린 한유는, 중국 사회의 문제점을 <불교>에서 찾았다.

백성들이 죽은 뒤 <윤회>를 생각하면서 현실을 암흑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과, 귀족들이 불상앞에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적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모두 <불교>탓으로 여긴 것이다.

특정 종교에 매달려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생긴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문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종교가 <종파>적 철학까지 잃고 지배층이 맹신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

한유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신유학>을 제시하였다. 노장사상은 허무주의이며, 불교는 현실이 아닌 <내세>의 종교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다.

한유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나 스스로 제자백가를 독서하고 과거에 합격한 뒤, 특출한 학식으로 승승장구 승진하던 엘리트 관리였다. 하지만, 지배층이 숭배하는 <불교>에 정면 도전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 덕종에게 지배층의 문란함을 비판하였다가 귀향을 갔었지만, 뛰어난 학식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시 지배층의 사상을 비판하여 귀향을 가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일생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귀향갔다 돌아왔다, 또 귀향갔다 돌아왔다....

특히, 한유가 미움을 받은 것은 당나라 헌종 때 <황제>의 불교 숭배를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 헌종이 법문사라는 절에서 석가의 손가락 뼈한마디를 구해 궁궐로 가져온 뒤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그것을 본 지배층 인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그 뼈한마디를 찾아가 난리를 치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그 뼈마디에 기부했고, 백성들을 생업을 포기한채 뼈마디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어찌 인도에서 죽은 석가모니란 인물이 중국 사회 전체를 흔들어놓는단 말인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는 석가의 썩어 문드러진 뼈조각이 국가를 망친단 말인가?

한유는 헌종에게 <불교를 신봉한 군주들은 모두 단명했다>는 글을 올리며, 황제를 직접 비판하였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당나라의 지배층들도 비판하였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며, 남작, 백작, 자작 등 작위를 받고 살아가는 지배층들은 개념(槪念)이 없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는 지배층들의 문학인 <시문학>까지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사륙변려체 등으로 구절을 맞추어 술자리에서 돌려말하는 싯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아무 의미없는 유흥일 뿐이다. 문학이란,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하며, 진정한 <도>를 깨닫기 위한 노력 속에서 나와야 한다.

당나라 지배층이 쓰는 화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요즘으로 따지면 원더걸스나 빅뱅의 노래가 귀에 착 붙게 반복적인 멜로디로 구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뜻은 아무 의미없는 것과 같다. NOBODY를 백번 외쳐봐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고문들을 회복시켜 아무 의미없는 당나라 지배층의 문학을 부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한나라 이전의 고문으로 돌아가자는 고문부흥운동(古文復興運動)을 전개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가 한나라 이후에 성행했기 때문이고, 유학이 한나라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지배층 성향을 가진 한유.... 그 결과는? 오랜 시간 귀향살이었다. 그러나, 인생의 절반이 중앙정권에서 배제된 그였기에 백성들과 직접 만날수 있는 기회도 많았고, 많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으며, 성리학의 토대가 된 저서들도 적을 수 있었다.

4. 불교를 비판했으나, 유학도 내 버려두지 않은 한유

한유는 불교, 노장사상 등을 비판했고, 그것을 신봉하는 지배층과 무지한 백성들을 동시에 비판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옛 유학을 그대로 옹호하지도 않았다.

한유는 한나라 이전의 유학들도 비판하기 시작한다. 공자와 맹자의 말씀부터 시작된 고대 유학을 당나라에서 <오경정의>로 압축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과거시험의 명경과를 보기 위해 <오경>을 공부해서 암기해야 했다.

하지만, 한유는 그것을 비판한다. 왜 공자와 맹자의 사상을 단순히 암기해야만 하는가? 그들의 사상이 절대적이라고 맹신한다면, 불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이들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떤 사상에 대한 맹신은 결국 교조주의일 뿐이다.

한유는 불교 자체가 나쁜 것이라 말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불교의 교조주의적 성향을 비판하기 위해 평생을 불교와 싸우며 살아갔다. 그의 역사관은 이렇다.

중국의 전설시대에는 인간 윤리를 지키며 살아간 태평한 시기(태평성대)가 있었다. 그러고, 중국인의 전통 윤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유학>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한나라 이후 불교라는 외래 종교가 유입되어 황제들이 단명하고, 국가의 전성기도 단축되었다. 위진남북조의 긴 혼란기가 불교의 전성기였으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불교를 견제하면서 국력을 낭비하였다.

따라서 고대 유학을 부흥해야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만큼 새로운 유교 철학이 필요하다. 한유는 새로운 유학 철학을 <성선설>에서 찾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성을 인, 의, 예, 지, 신 등으로 구분한 뒤 본성이 착한가를 따지는 철학이었다. 반면, 한유는 성선설, 성악설을 모두 보완하면서 인간의 성품은 3가지로 나뉜다고 말한다.

성 상품

  태어나서부터 선한 성품

성 중품

  선과 악 어느쪽으로나 갈 수 있는 성품

성 하품

  태어나서부터 악한 성품

한유의 책 중에서 널리 알려진 책은 <진학해, 원도, 원성>이라는 3권의 책이다. 진학해는 자서전으로 불교비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실려있고, 원도는 유학의 나아갈 길과 불교의 문제점이 실려있다. 원성에서 성삼품설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5. 불교의 시대가 가고 성리철학의 시대가 오다.

당나라 말, 한유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된 성리학의 태동은 불교의 입지를 비좁게 만들었다.

한유의 벗인 유종원은 한유의 철학마저 비판하면서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역사 발전의 핵심을 <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공자, 맹자와 같은 성인이 역사를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 그대로 성인이거나 종교인일 뿐이다. 우주나 음양오행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우주는 단순한 음과 양이 모인 기(氣)일 뿐이다. 기(氣)는 살아있지도 않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따라서 우주의 기가 인간행위에 벌을 내린다거나, 복을 준다는 말 자체가 미신일 뿐이다. 결국, 인간 세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역사를 이끌어가려는 <힘있는 인간 집단>일 뿐이다.

유종원과 한유의 후학인 이고는 스승 한유의 철학에 선종 종파의 <수련법>까지 더하였다. 선종계열의 불가에서는 인간이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가 인간의 성이 모두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부처 역시 누구나 착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든, 군자든, 평민이든 모두가 선할 뿐이다. 단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외부(기 : 氣)의 영향을 받아서 훗날 선과 악으로 갈릴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선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의 수련법인 <선>을 행해야 한다. 선종의 명상법과 수양법, 좌선과 대화는 학문과 종파를 넘어서 모두에게 유용한 수련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말기, 새로운 유학 사상가들은 불교를 비판하면서도, 옛 유학의 참뜻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 하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유학은 당나라 귀족층들이 농담따먹기 하듯 적어내는 의미없는 글귀나 고사모음이 아니라 인간과 우주의 본성을 연구하는 <뜻>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이 고문부흥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고문부흥운동은 화려한 문구의 시를 벗어나, 현실생활과 관련된 문제들을 철학적 명제로까지 끌어내려는 노력이었다.

당말의 유학자들은 국가 권력이나 지배층과 밀착된 교종 종단을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신유학 역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뜻을 찾는다는 점에서, 선종 교단의 수련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였다.

6.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성리학의 <태극>으로 합쳐지다.

당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송나라에서는 성리철학의 틀이 완성되면서 사회 지배철학으로 자리잡은 시기였다.

그 역사적 철학을 <태극>으로 정리한 이가 바로 <소강절>과 <주렴계>였다.

절에서 거주하면서 불교철학과 유학을 두루 공부한 소강절은 불교, 도교, 유학의 철학을 두루 정리하여 태극(太極)이라는 불변의 원리를 만들어내었다.

태극이란, 절대 불변하는 우주의 진리로서, 성리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같다. 태극은 불변하지만, 그것을 알아채는 인간의 정신(神)이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기(器 : 물질)리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과 기는 돌고 돈다. 세상에는 시작점이 있는데, 이것이 정신으로 표현되며, 또 물질로 표현되며 물질이 소멸되면 다시 정신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이론과 비슷하다.

또, 돌고돌아 물질이 자연으로, 정신으로 돌아간다는 점은 도가의 무위자연과 추연의 음양오행설과 유사하다.(실제, 소강절이 불교, 도가의 철학을 의도적으로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돌고돈다는 법칙 자체는 변하지 않고 불변하는 진리로 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태극>인 것이다. 태극은 모든 자연과 인간,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이 사상을 정리한 이는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인 <주렴계>이다. 그는 선종 선승들과 직접적인 교분이 있었고, 선종의 수양법으로 자신을 단련하면서 살았던 인물이다. 주렴계는 모든 현상의 근본 법칙인 태극에게 2가지 속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움직이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정적인 것을 음(陰)이라고 하는데, 이 음과 양이 돌고 돌아 우주의 법칙을 회전시킨다는 것이다. 음과 양은 오행(화,수,목,금,토)의 상극을 만든다. 양은 남성, 태양 등을 뜻하며, 음은 여성, 달 등을 뜻한다. 불(火)이 양이라면 나무(木)가 음이 된다.

그리고, 이 양과 음이 상호작용하면 우주가 돌게 된다. 만물의 생성을 주도하는 것이 건(乾)이고, 받아들이는 것이 곤(坤)이다. 하늘과 남자가 건이면, 땅과 여성이 곤이다.

주렴계의 철학은 결국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서 파생되었다. 선종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과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 사상 등의 철학을 유가 형식에 맞춰 <태극>으로 정리한 것이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불교와 도가에서는 존재의 근거가 되는 불변의 진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논리적인 정신적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주렴계는 <태극>이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님자, 여자, 하늘 등의 명칭을 가진 물질이라는 점에서 <유물론>적인 관점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태극의 실체를 리(理)라고 말하고 있다. (태극도설)

7. 선종 철학을 벗어나 이기론으로 향하는 성리학...

동시기를 살았던 장제는 좀 더 세밀하게 불교 철학과 성리학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불변의 본질인 태극 자체를 리(理)라고 말하면서, <리>는 단순히 변화의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라고 말하였다. 실제 우주를 구성하는 실체는 기운(기 : 氣) 인데, 이것이 바로 눈에 보이는 존재자라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장제가 주장한 <주기론>은 불교사 입장에서 보면 아찔한 것이 된다. 불교의 <공>사상이나, 도가의 <무> 사상이 전면 부정되고, 우주에 실제 존재하는 기운(氣)이 명백히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장제의 입장에서 <기>란, 우주의 생성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이며, 지금 이순간에도 변하고 있는 모든 사물인 것이다. 더 이상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어려운 말은 통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우주의 기운(氣)를 받아 생겨나서 살아가다가 사라질 뿐이라고 말하면 끝이기 때문이다. 내세도, 윤회도 이젠 없다. 기운(氣)은 살아있을 때 활동할 뿐이며, 죽은 뒤 사라질 뿐이다.

동시대를 살았던 정이천, 정명도 형제는 장제의 <기> 사상을 우주와 만물의 일치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모든 만물에 기운이 있고, 그 기운은 우주에서 내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고, 모든 중화인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주의 기운(氣)은 불변하는 원칙인 이치(理)에 의해 움직이므로, 모든 우주의 기운에는 이치가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일물일리론 : 一物一理論)

이 이론을 정리하여 성리학을 완성한 이가 바로 성리학의 아버지 <주자>이다. 주자는 이치(理)와 기운(氣)의 상관관계를 정리하고, 그것을 중국민족의 우월성과 정당성으로 규정하면서 새로운 정치철학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 와중에 불교의 교종 철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정치철학으로 성리학에 지배권을 빼앗긴 불교는 이미 당나라 지배층이 무너지면서 정치적 실권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제 불교는 민중속으로 파고든 선종과 정토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송나라를 넘어 명, 청 시대로 이어지면서 서민 불교로 자리잡아간다. 그리고, 송나라 이후 역사적 변환점에 새롭게 자리잡게된 철학은 <유학>이었다.

자, 그럼 이 쯤에서 중국 불교이야기도 끝내고 한반도와 일본의 불교로 넘어가보자.

한반도의 불교는 인도, 중국 불교의 연장선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고조선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조계종까지의 불교를 역사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그리고 일본의 불교는 우리 역사와 비교해서 다루면 좋을 것 같다. 이야기 했듯이 티벳이나 동남아 불교는 동아시아 역사와 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관련 부분만 조금씩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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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4화. 달마 이야기 : 지식은 권력층만의 것이 될 수 없다.

1. 선(禪)이란 본래 수행방법이었다.

선(禪)은 원래 인도 불교의 수행방법으로서 <요가의 명상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선은 범어로 드야나(dlhyana)를 번역한 것인데, 원 뜻은 <집중하여 생각한다> 이다.

그런데, 이 수행방법이었던 선이 어떻게 동아시아 불교에서 가장 큰 위상을 차지한 <종파>로 거듭나게 되었을까? 오늘은 선 사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국에서의 <선종>은 보리달마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데, 달마가 중국에 건너오기 전의 <선>을 교학선이라고 한다. <교학선>이란, 소승불교에서 개인 수양을 위해 적어놓은 <호흡법> 등과, 대승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요가수행법 등을 바탕으로 한 <명상법>을 말한다. 경전을 바탕으로 하는 여러 <교종> 종파들이 책을 읽은 후 수행법으로 익힌 것이다.

따라서 <교학선>은 독자적인 선종 종파로 볼 수 없다. 교종의 진보적인 스님들이 수행법을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이 스님들도 선종과 관계없이 그냥 <선사>라고 부를 뿐이다. 원래 <선사>란, 종파와 관계없이 선법을 익힌 모든 스님들을 칭하는 호칭이었다.

그럼 선종(禪宗) 조사는 누구일까? 말은 많지만, 대부분이 <달마>를 조사로 인정하고 있다. 원래 인도에서의 선은, 신비주의적인 <도술>과 같았다. 숨쉬기를 통해 <공중부양>을 한다는 요가법을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중국인들이 종교로 인정하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래서 처음 달마가 중국에 선을 소개했을 때, 불교인들은 달마를 인정하지 않았던 듯 싶다.

지금이야 무협지에서 장풍을 쏘고, 축지법을 쓰고 난리도 아니지만... 무협지의 기본 배경이 되는 불교 종파가 바로 달마를 시조로 하는 선법 계열이다.

달마에 대해 남겨진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에 그는 소림사에서 장풍이나 날렸던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달마가 지었다는 <이입사행론>이나 그의 철학인 <일심사상>도 후대인들이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마의 저서가 후대작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그 책으로 그의 철학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2. 달마 : 마음으로 경전을 읽을 수는 없는가?

달마는 극심한 혼란으로 어수선한 남북조 시기의 <남조>에 건너왔다. 당시 중국 남부를 지배하고 있던 양나라의 무제는 <불법의 수호자>를 칭하는 인물이었다. 양조는 달마대사가 오자,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기 시작한다. 평생 절을 짓고, 경전을 번역하고, 승려들을 공경한 자신을 자랑하며, 자신의 공덕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남조의 왕은 스스로를 미륵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귀족들은 미륵을 보호하는 보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공덕을 많이 쌓으면 부처가 될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경전을 읽고 있었다. 백성들은 글을 모른다. 사후세계의 주인은 <지식을 독점>하고 있는 귀족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달마의 대답은 왕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당신은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마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서 선종의 선사상이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과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선종은 가진 자들이 <스스로를 위해> 공덕을 베푼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공덕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간성>을 먼저 아는 것이며, 본래 내가 누군가를 아는 것이다.

달마의 사상은 <이입사행론>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의 핵심은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理)는 깨달음(이치)를 말하는 것이고, 행(行)은 실천을 말한다. 즉, 깨달음을 얻고, 실천하라는 것이 이입사행인데, 깨달음의 핵심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성>을 아는 것이고, 실천의 핵심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을 말한다.

보리달마는, 남조의 왕이 <공덕>에만 욕심을 내고,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조의 지배층은 공덕을 무시하는 달마를 배척하였다. 달마가 쫓겨난 것인지, 수행을 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간 면벽 수련을 한다.

그런데, 면벽(벽관) 수련이란 어떤 수행법일까? 용어 그대로 벽을 보며 외부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수련을 말한다. 이것은 사방이 차단되어 아무런 번뇌도 나에게 들어올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었다.

3. 경전을 버려야 하는가, 경전에서 참뜻을 구해야 하는가?

중국 불교 초기에 선사상이 <교학선>이라면, 달마와 그 후계자들로 이어지는 선사상을 <여래선>이라고 한다.

여래선은, 부처라는 인격을 절대적으로 보려는 기존 교종 사상과 차별되는 사상이다. 여래선에서는 기존 경전보다 <능가경>에 나오는 <여래선> 사상을 강조한다.

보리달마가 가장 중요시한 <능가경>에는 4가지 선사상이 나온다.

1단계 : 우부소행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

2단계 : 관찰의상선

모든 것이 무(無)라는 것을 알고 사물을 바로 알아가는 단계

3단계 : 반연진여선

진여(사물의 실제)를 알기 위해 경전의 진리(반야)에 집착히지 않는 단계

4단계 : 여래청정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위해 실천하며 살며,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

능가경은, 수행과 깨달음을 위한 선을 4단계로 분류한 뒤, 여래선이 최고의 선이라고 규정하였다. 달마 이후 선종 조사들은 스스로의 선을 여래선이라 불렀는데, 그 핵심은 <마음>이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죽고 사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음>이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마음은 인간이었던 부처와 다를 바가 없다. 마음은 모두 같은 것이기에, 부처의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여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우선인 것이다.

손을 하나로 모으는 <합장>은 악수와 다르게, 내 스스로의 마음이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수화이다. 사실 우리의 모든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다.

<밥 먹을 땐 밥을 먹고, 이야기힐 때는 말하고, 차를 마실 때는 차를 마신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 마음이 시키는 하나의 행동이란 것을 중생들이 모를 뿐이다. - 보조국사 지눌 - >

여래선에서 말하는 마음은 크게 2가지이다. 진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마음을 <진여문>이라고 하고, 죽음이 덧없음을 아는 마음을 <생멸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진리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렸으니, 부처가 되어 <성불>하는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능가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부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마음>으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종에서는 <경전의 말씀>만 강조한다. 그러나, 경전으로 깨닫는 것은 <지식의 독점>일 뿐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심오한 철학을 접할 시간도 없는 일반민에게 성불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달마의 사상은 획기적이면서도, 지배층에게 배척당할 수 밖에 없는 사상이었다. 그리고, 달마의 후계자들 중에 <마음>을 강하게 강조하는 이들일수록 탄압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달마의 직계 계승자>들이었다. 그 이야기를 계속 해보려고 한다.

4. 이심전심(以心傳心) : 선종의 시조 마하가섭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보자. 선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화는 마하가섭의 이야기이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씩~ 웃으며, 나는 석가모니의 뜻을 알 것 같은데요... 하는 표정으로 석가를 쳐다보았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마음으로 마음을 깨닫는 경지를 이심전심이라고 한다. 그 후로,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이 일화를 <염화시중의 미소>라고 말한다. 이렇게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을 인도 선법의 시조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종의 역사를 정리한 <능가사자기>는 마하가섭을 시조로 달마를 중국선조(2대조)로 기록하고 있다.

달마는, 이렇게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그 실천사상이 담겨있는 <능가경>을 핵심경전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시조 달마 이후 2조 선사부터 5대 선사까지의 시대를 능가경에 의지한다고 해서, <능가종>이라고 부른다.

1대 달마는, 기존 교종처럼 지식의 유무를 테스트하여 2조를 선택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하여 후계자를 뽑은 것이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옷(가사)와 지팡이를 말하는데, 이 두가지를 전수받은 제자가 종파 조사가 되는 것이다.

달마에게는 <혜가>라는 제자가 있었다. 혜가는 면벽수련을 하는 달마에게 법을 구했으나, 제자가 되지 못하였다. 정성을 다하여 달마를 모시고, 성실하게 생활하였으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혜가는 입실 허락을 기다리다가 다시 달마에게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다. 달마는 혜가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불안한 너의 마음이 무엇인지 가져오너라.>

혜가는 스승의 눈빛을 이해한 뒤, 칼을 뽑아 왼팔을 끊어 달마 앞에 보여주면서,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 달라고 하였다. 달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널 편안하게 해 주어야겠구나.>

그리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조사를 넘겨주는 선종의 전통이 생긴 것이다. 시조 달마에서 5대조 흥인까지는 이렇게 이심전심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능가경>을 경전으로 선사상을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6대조 혜능에 이르러 <능가경>조차 버리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럼 선종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혜능>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5. 혜능과 신수 :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선문의 5대조는 흥인이다. 흥인은 양자강 쌍봉산에서 <선>을 실천하고 있었다. 아직 선종이라는 종파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모임을 <동산법문>이라는 문파로 부르고 있었다. 이 종파는, 달마의 면벽수련과 정토종식 염불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흥인 역시, 부처와 인간의 심성은 동일하며 누구나 부처가 되어 성불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중국의 오랜 분열시기가 끝나고, 수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된 시기였다. 그 때문인지, 흥인은 안정적으로 불법을 설교할 수 있었고,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흥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신수, 혜능, 법지였다. 신수는 가장 뛰어난 제자로 흥인의 후계자로 지목받았던 인물이다.

반면, 혜능은 남조에서 가난하게 태어나 흥인을 만나고자 일부러 찾아온 인물이었고, 절에서 방앗간 허드렛일이나 하는 자로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신수는 평소 자신의 사상을 5언률의 게어로 지어 스승이 지나가는 길목에 자랑스레 붙여놓았다. 모든 이들이 신수의 학식에 감탄했으며, 스승 또한 선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며 칭찬하였다.

몸은 곧 보리수이고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다. 때때로 힘쓰고 털어내어서 번뇌가 다가오도록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러나, 혜능은 신수의 게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선>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무를 깨닫고, 결국에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이다. 보리수와 거울의 비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혜능은 글을 모르기에, 다른 사랑에게 부탁하여 글을 적었고, 자신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여두었다.

보리라는 나무도 본래 없는 것이고, 맑은 거울이란 것도 그 본질이 없는 것이다. 본래 아무 것도 없는 사물일 뿐인데, 어느 곳에 먼지가 쌓인단 말인가?

혜능의 게어를 본 흥인은, 진정한 선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은 혜능에게 옷과 지팡이를 전해주고, 선문 6대조로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신수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혜능을 남쪽으로 피신시켰다.

30살을 갓 넘긴, 혜능은 남쪽으로 내려가 16년 동안 평민들과 어울려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는 것을 보고 난 후, 그의 토론하여 그를 <마음>으로 제압하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출가하여 <남종선>을 개창하였다.

혜능의 선사상은 달마의 수행법인 좌선수행을 벗어난 것이었다. 혜능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선문답>이었다. 혜능의 6대조부터 선종은 <여래선>을 벗어나 <조사선>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아시아 선종은 바로 이 <조사선> 계통이 된 것이다.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혜능이 6대조가 되어 <남종선>을 연 동안, 정통 제자로 여겨졌던 신수는 무엇을 했을까? 신수와 그를 지지하는 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하였다. 훗날, 북종선이라 불린 신수의 선종 문파는 경전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승불교의 여러 교단을 선종의 이론으로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원래 유교와 도교의 이론에도 정통하였던 신수는, 당나라 무측천(측천무후)의 신임을 얻어 대통선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국가가 인정하는 최고의 선종 고승이 된 그는, 대승불교를 <마음>의 관점에서 통합하려 했지만, 그가 죽은 뒤 교단 자체가 힘을 잃게 된다. 당나라의 지배층 입장에서는 <마음> 따위를 강조하면서 <불교>를 평민들과 <공유>하려고 한 그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또한, 혜능의 진보적인 교단이 남부지방을 석권하면서 신수 일파의 북종선이 일방적으로 비판당했기 때문이다.

신수, 혜능과 같이 흥인의 제자였던 법지는 아예 독립적인 교단을 차려 나갔는데, 그가 주장했던 것은 염불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종파를 <우두종>이라고 하지만, 염불을 강조한다는 교단 성격이 정토종과 비슷하기 때문에 곧 잊혀지게 되었다.

6. <직지인심>을 계승한 선종

일자무식이라 여겨진 혜능이 선종을 <종파>로 만들어 버린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혜능부터 <조서선>이라 불린 선종은 이론적으로 현재의 선종과 유사해졌다.

불립문자

문자에 의지하지 않음

교외별전

경전을 절대적으로 여기지 않음

이심전심

마음을 통해 마음으로 전함

직지인심

사람의 마음(본성)을 한번에 깨달음

견성성불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마음을 타고 났으므로, 부처가 될 수 있음

선종의 가장 큰 특징은 <마음>인데, <마음>은 결코 경전으로 알 수 없다. 일상속에서 깨달을 수도 있으며,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문자에 의지할 필요도 없으며 서로의 마음을 공유한다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혜능은 이러한 것들을 체계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오랜 시간의 면벽(좌선, 참선)보다도 선문답을 통한다면 더 빠른 깨달음이 가능하다고 말하였고, 어느 순간 단번에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돈오견성)

또, 혜능은 수행을 통한 번뇌 해소보다 깨달음을 통해 바른 성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원래 번뇌와 지혜는 하나이다. 참과 거짓도 수행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에서 중요한 것은 선문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것을 <돈오>라고 하자. 깨닫기 위해 문제를 파악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을 <화두>라고 한다. 그리고, 큰 <화두>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것을 <공부>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요즘 이슈가 되는 <화두>는 이거야... 대학갈려면 <공부> 안할래?... 이렇게 단어들은 모두 선종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불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들이다.

혜능이 말한 <조사선>은 자신이 알아야 할 <화두>를 열심히 <공부>해서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는 <돈오>에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그것은 기존 <지식>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기존 교종의 입장은 <경전>을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성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화두>가 그것인데, 왜 <공부>만 시키려 드는가?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달은 안보고 왜 손가락만 보는가?

선종에서 말하는 비유는 위 문장과 같다. 석가가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교종은 석가의 손가락만 보면서 찬양하고 있다. 석가의 <마음>은 이미 달로 향했는데, 교종은 마음이 아닌 석가의 <손가락>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첫 번째 할 일은 석가의 손가락을 떠나 석가의 눈을 보면서 그가 향하고 있는 <마음>을 같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심전심이다.

7. 선종 문파의 창궐...

혜능 이후, <남종선>은 중국을 대표하는 <선종>이 되었으며, 동아시아 각지에 전파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선종은 그 영향력 만큼이나 종파가 너무 다양해서 이름만 듣고서는 너무 생소할 정도이다.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 유입된 선종 종파들의 이름이기 때문에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보자.

혜능의 문하에서 배출된 큰 종파는 마조도일의 <홍주종>과 석두희천의 <석두종>이다. 특히 혜능의 사상이 선종문파로 활성화 된 것은 <홍주종>의 영향이 크다. 홍주종에서는 마음으로 깨닫기 위해서는 <평상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마조도일의 제자인 백장회혜는 선종의 계율을 만들었는데, 함께 수행하고 선문답하며 자급자족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규율이 불가에서 중요시하는 <백장청규>이며, 이 때 부터 선종이라는 종파가 독립적으로 사원을 짓고, 규율에 맞춰 생활하게 되었다.

선종은 <경전>과 <문자>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마음>을 중요하기 생각하기 때문에, <규율>이 강한 편이다. 또, 경전을 대신해서 선조 조사들의 <어록>을 경전과 같이 소중히 다룬다. 신약 성경이 예수의 말을 모아둔 제자들의 이야기라면, 선종의 <어록>은 선종 조사들의 이야기를 모아둔 <성경>이다.

선종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마하가습부터 달마, 혜능 등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부처의 <직계 사상 계승>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부터 현재까지의 조사들의 말씀은 곧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후, 마조도일의 홍주종에서 위앙종, 임제종이 나왔다. 석두희천의 석두종에서는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이 나왔는데, 이들 5개의 종파를 선종5가라고 말한다. 또, 송나라 때 임제종에서 황룡파, 양기파가 나와 이 때는 선종7종이라고 부른다.



위앙종

  무위무사 : 마조도일의 평정심 강조, 마음을 평안히 하면 번뇌가 사라짐

임제종

  임제의현의 개창, 황룡파와 양기파 배출, 즉시 깨달음을 강조, 간화선 강조



조동종

  설법과 언행이 중요함을 강조함, 묵조선 강조

운문종

  운문어록에 적힌 적은 글자 수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간결한 깨달음 강조

법안종

  화엄의 일심사상을 바탕으로 선을 받아들여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강조

선종은 고려 이후 한반도에서도 주류 불교종파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 중 법안종은 고려시대 초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 통합을 시도하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임제종은 불교가 침체되고 성리학이 유행했던 조선시대에도 명맥을 이어나갔다.

특히, 선종 5가 중에서 임제종과 조동종은 중국 송나라 시기 라이벌 관계였다. 그것은 간화선 사상과 묵조선 사상의 차이 때문이었다.

<간화선看話善>이란, 선종 조사들이 남긴 <어록>들을 공식 문서로 만들어 참고 자료로 활용한 다는 뜻이다. 만들어서 보고(看), 선조들과 대화하여(話) 자신의 본질을 알고, 바로 깨닫는 것이다. 간화의 <화>란 앞서 말한 <화두>의 약자이다.

<묵조선黙照禪>이란, 묵묵히(黙) 자신을 찾는(照) 수양법이다. 즉,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서로간의 토론을 통해 자신을 찾는 방법이다. 묵조의 <조>란 자신을 안다는 지(知) 자의 다른 표현이다.

   간화선이든, 묵조선이든 후대 선종 종파들은 한가지 같은 고민을 안고 있었으며, 그 고민을 풀기 위해 각각 자신의 종파 이론이 달마의 뜻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안고 있던 고민은 조사 달마에 관한 것이였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도대체, 달마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온 까닭은 무엇인가? 그가 중국에 남기려고 한 선법은 석가모니의 인도 선법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그러나, 달마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그 정답은 누구도 알지 못하였다. 달마에 대해 남긴 기록들은 후대의 제자들이 남긴 이야기일 뿐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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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잡하고도 어려운 선종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중국 불교에 대해서도 거의 정리된 듯 싶다. 중국 불교는 이제 끝이 났다. 왜냐면, 중국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이라는 신유교가 사회 전반을 자리잡게 되면서 불교 이야기가 역사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음 장에서는 중국 불교가 유학에 밀리는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한국 불교로 넘어가려고 한다. 한국 불교 이야기는 딱딱한 불교 교리 설명이 거의 없을 듯 싶다. 중국 불교에서 다 짚고 넘어간 듯 싶으니까...

한국에서 불교가 유입된 배경과 불교와 관련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논리들, 몇몇 새롭게 등장한 독자적인 종파들을 설명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불교 이야기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처음 시작할 때 이야기 햇듯이 티벳과 인도 불교는 우리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필요할 때만 가끔 언급하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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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2화. 여황제 측천과 법장의 뜻이 딱 맞아 떨어진 이유는?

1. 모든 철학을 녹여 버리는 화엄의 철학

자 지금까지 우리는 <불교의 참뜻>을 알기위해 동분서주한 중국 불교의 혼란한 역사를 보았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겪으며 성숙해진 불교는, 현장법사의 구법여행을 통해 <유식> 사상까지 포괄한 진정한 불교 교리를 모두 알게 되었다.

그럼 이제, 그 많은 불교 교리들을 통일해야 할 때가 왔다. 통일된 당나라에서, 통일된 종교 교리를 내세우는 종파가 있었으니, 바로 <화엄종>이다. 자, 그럼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화엄종은 <화엄경>을 최상위 경전으로 규정한 뒤, 불법을 이야기하는 종파이다. 그럼 화엉경은 무엇인가?

화염경이란, <대방광불화엄경>의 약자로, <대>는 크다, <광>은 넓다는 뜻이다. <불>은 부처겠지? 한마디로 크고 넓은 부처들의 이야기이다.

화엄경은 보살 수행을 거쳐 부처가 된 <비로자나불>이라는 분이 <말씀하시는> 경전 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하나의 티클에 모든 세계가 들어있으니, 모든 세계는 즉 하나이고, 하나는 곧 전체인 것이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

무슨 말일까? 심오한 교리이지만, 역사적 배경 정도로 설명해보자.

혹시 양쪽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을 본 적이 있는가? 없으면 해 보시라. 거울을 일정거리에 두고 서로를 비추면, (ㄱ)의 거울에 (ㄴ) 거울이 비친다. 그런데, (ㄴ) 거울도 (ㄱ) 거울을 비추고 있으므로, (ㄱ)의 거울안에는 (ㄴ) 거울이 비추고, 또 그 안에 (ㄱ) 거울이 비치며, 또 (ㄴ) 거울이 비친다.

결국 (ㄱ) 거울 안에 (ㄴ) 거울, 그안에 다시 (ㄱ) 거울.... 이런 식으로 점점 작아지는 거울이 끝없이 비춰진다. 그러나, (ㄱ)의 맞은 편에 있는 (ㄴ) 거울을 치우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ㄱ) 거울은 다시 평온해진다.

우주가 그런 것이다. 거울이 거울을 비추듯, 우주란 어떤 사물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ㄱ)이라는 거울 안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거울 안에 또 다른 거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본질은 (ㄴ) 거울인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가장 방대한 근원에서 출발하며, 그 카다란 근원이라는 것도 거울 안에서는 너무나 작은 존재일 뿐이다.

한마디로 하나(개체)는 전체(본질)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상>인 것이다. 이렇게 거울 속에 거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것을 <인드라망>이라고 한다. 뭐 그 당시는 거울이 아닌 구슬 속에 구슬이라고 했지만...

이 거울이 비추는 세계는 4가지 세계이다. 먼저 거울이 비춘 현상세계(사법계), 거울 본체의 세계(이법계), 현상과 거울의 관계를 아는 세계(이사무애법계), 현상 세계에서 비춰진 각각의 사물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세계(사사무애법계) 이다.

우리는 거울 본체가 아니라 거울 안의 현상 세계에서 보이는 것이 진리라 믿고 살기 때문에 <사사무애법계>를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현상의 세계는 인연(연기)로 이루어진다. 육체는 태어나고 소멸된다. 흙은 땅이 되고, 비는 물이 되며, 흙과 물이 곡식이 된다. 곡식은 인간의 식량이 되고, 인간이 먹은 식량으로 새 생명이 탄생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이고, 하나는 모든 원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현상을 비추는 것은 거울이라는 본체이다.

예로, <인간의 모습>을 들어보자.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절대 분리될 수 없다. 떼어놓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기관들이다. 각각의 기관이 뭉쳐야 인간이 되는 것이고, 하나 하나가 스스로를 고집한다면 인간이라는 본체는 아무 의미 없다. 눈, 코, 입 등은 모두 각각의 것들이지만, 인간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하나일 뿐이다.

이대로 대입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물들은 각각이지만, 그것을 비추는 큰 거울 앞에서는 하나와 같다. 결국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본질을 알면 모든 것이 결국 <본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지(티클)가 거울이요, 거울이 티클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사물을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리를 찾는 것, 깨달음을 찾는 것, 수행을 하는 것, 말씀을 찾는 것, 노력하는 것....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거울>이 비추는 다른 모습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한다는 화엄의 사상을 <원융사상>이라고 한다.

이 화엄의 철학이 수, 당 나라의 통일국가에서 체계화 된 것은 한 두사람이 어쩌어찌 정리하다 보니 탄생한 우연이 아니다. 화엄의 철학은 가장 통일 국가의 철학에 걸맞는 사상적 이념을 제공해 준 것이다. 한반도와 왜에서도 화엄종은 통일 국가 시기에 융성하였다.

왜 화엄은 통일 철학일까?

간단하다. 모든 것은 결국 하나의 근원으로 통한다는 것은, 모든 분열된 국가가 <통일된 왕조>로 귀속된다는 정치 이념과도 딱 맞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이 말을 정치적으로 해석해보자.

<하나>란, 국왕을 뜻한다. <전체>란 백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국왕은 곧 국가이고, 국가는 곧 백성들의 모임이다. 백성은 곧 국왕으로 귀속되고, 국왕은 백성의 평안을 위해 노력한다. 불가의 화엄 사상이 유교의 <덕치주의> 사상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북한 김일성 일가가 불교도였다면, 제일 먼저 화엄 철학부터 북한 주체사상에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또, 통일된 국가에서는 통일된 종교 사상을 원한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처럼 수많은 종파가 난립할 경우, 국가로서는 골치 아프다. 국가 철학을 지지해 줄 핵심 사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편하다.

그런데, 화엄경은 모든 불교 사상을 화엄 철학으로 녹여 버릴 수 있다. 열반경에서 말하는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화엄은 인정한다. 우주가 비추는 거울 안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 비추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인간은 불성이 있는 것이다. 단, 불성은 인간만 있는 것이기에 무생물에는 없다고 말하여 차별을 둔다.

법상종에서 말하는 <마음> 역시 화엄경은 받아들인다. <마음>도 <거울> 속에 비치는 것이 아닌가? 단, 화엄종에서의 <마음>은 인간의 번뇌와 고통이 아니라, 거울이 비춰주는 <깨끗한 마음>이다. 화엄종은 인간의 본질이 우주와 같이 때문에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성선설>쪽을 좀더 비중있게 말하는 것 같다.

수나라의 통일 철학인 천태종은 지식(교)과 깨달음(선)은 같은 것이라는 교선일치를 말한다. 화엄종은 이것 역시 받아들인다. 단, (교)와 (선)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선후논쟁은 계속 전개한다.

모든 철학을 받아들여 녹일 수 있는 화엄의 <원융사상>은 통일된 왕조에서 통일된 철학으로 받아들이기 좋았다. 그럼 구체적인 화엄 철학을 한 번 볼까나?

2. 화엄의 교판 논쟁과 성기품설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 화엄종도 초기에는 <도사>들과 싸우는 학단에 불과했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하나요, 하나란 모든 것이다>라는 이론을 도사들이 트집잡았던 것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인 내가 꿈에서 인간이 된 것인가> 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느낄 수 있는 장자의 철학은 이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니, 자연 속에서 하나가 된 내가 진짜 나이지 않을까? 결국 내가 만물 속의 하나이기에, 만물은 나이고, 나를 포함한 만물은 모두가 평등한 것이다. 진정한 평등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만물이고, 만물이 곧 나인 것이다.>

도사들은 장자사상과 화염 사상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격의 불교>시기엔 화엄종도 도교 이론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화엄학파는 <도사>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가장 먼저 열반종의 <불성>을 받아들인다. 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은 결국 우주의 본질이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든 우주의 본질인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품>이라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 수양을 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 자체를 <성기품>이라고 하며, 그 수행 방법을 10가지로 나눠 놓은 단계를 <십지품>이라고 한다.

그와 동시에 <화엄경> 격상 작업이 시작된다. <화엄 철학>은 도교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종교보다 화엄경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5개의 종교와 열 개의 종파를 모두 순위를 매긴 후 <화염경>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화엄종은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 산에 수많은 동물들(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산 그 자체이다. 바다에 수많은 생물(각 종파)가 산다면 화엄종은 그 모든 생물들을 끌어안고 생명을 주는 바다 자체이다. 그리하여, 흩어진 모든 종파는 화엄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는 것이다.

3. 법장과 측천무후

초기 화엄경은 두순(557-640)에서 시작한다. 두순은 도교의 도사들이 <화엄경>을 <노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래서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열반종 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그가 화엄종의 시조이다.

2대조 지엄은 화엄경의 주석서인 수현기를 저술하면서, <유식사상>을 화엄종에 포함시켰다. 전통 <공> 사상과 다르게 <마음>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마음이다>라는 사상도 화엄철학과 같다는 것이다. 지엄에게는 2명의 특출난 제자가 있었다. 한명은 한반도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이었고, 또 한명은 화엄학을 완성시킨 <법장대사>였다.

의상은 우리나라 사람이니, 우리 이야기에서 다루고 지금은 <법장>이야기를 해보자.

법장이 살았던 시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중국 여황제였던 <무측천>의 시대였다. (유교사학자들은 보통 측천무후라고 부르며,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측천무후는 당 태종기부터 활동하여 당 현종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역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여자의 난> 시기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데, 당나라 전성기를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당나라 역사의 1/4을 차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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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무측천의 시기는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한 시기였다. 무측천은 당 태종의 후궁으로 <무미랑>이라고 불린 여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거대한 자금을 가진 개국공신으로서 산둥지방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그녀의 집안 사정 문제로 무미랑을 멀리했다. 무미랑은 당시 황태자였던 <고종>을 사랑한다. 한 여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유교주의 입장에서는 상상 자체가 안되는 일이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고종의 왕비인 왕황후가 이쁜 첩들을 모함하기 위해 <무미랑>을 일부러 고종에게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까? <무미랑>은 훗날 고종의 총애를 얻어 왕황후를 비참하게 죽여 버린다.

그러나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다. 그녀는 고종이 늙었을 때,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왕으로 두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직접 여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였던 중국에서 여자만의 힘으로 여황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창업공신과 남북조 시대 구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다. 당나라 창업공신은 <관롱집단>이라 부르는 세력으로 북위 이래 이민족 집단에서 비롯된 인물들이었다. 무측천은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산둥귀족>들을 끌어들임으로서 창업공신 집단을 말살하고 새로운 나라인 <주>를 세웠던 것이다.

황제가 된 무측천은, 기존의 모든 사상과 종교를 새롭게 제시하였다. 창업공신의 특혜를 무시하고, <과거제도>라는 시험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였다. 장안 대신 낙양을 새 근거지로 하였고, 토지제도와 세금 제도를 고대 <주>나라의 제도로 복원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새바람이 불었다.

당나라가 건국되고 국교는 <도교>였다. 남북조 시대 북위에서 구겸지가 <도교>를 창립한 이후, 도교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왔다. 불교 역시 철학체계와 교단, 종파를 두어 도교의 라이벌이 되었지만, 당을 건국한 이연은 도교에 좀 더 힘을 실어주었다. 

여황제가 즉위하자 국교인 도교와 달리 정권에 충실한 통일 종교 철학이 필요하였다. 이 때 법장이 등장한 것이다. 그동안 쌓인 중국 불교 이론을 집대성하여 <화엄학>을 완성하고, 그것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여황제에게 직접 설명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가 바로 <금사자의 비유>였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무측천은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물론, 법장이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했을 것이다. 이 말 뜻은 이렇다.

금사자를 볼 때, 우리는 당연히 <금사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금사자가 본질일까? 아니다. 녹여서 다른 동물로 만들어 버리면 바뀐다. 금고양이, 금호랑이도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든 그 본질은 <금>이다.

결국 사물의 본질은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못 보는 것 뿐이다. 그럼 사물의 본질을 보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은 형식일 뿐, 그 실체는 <마음>으로 알아야 한다.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ㄱ)이라는 거울이 (ㄴ)이라는 거울을 비치면, (ㄱ)이라는 거울에는 수많은 (ㄱ) (ㄴ) 거울들이 점점 작아지면서 무한으로 서로를 보여준다.

거울과 거울은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그 안에 비친 모든 사물들도 서로 의존하고 보완되어 있다. 사물의 본질이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거울이라는 본질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이다.

무측천은 생각했다. 여자들을 무시하는 유교는 필요없다. 개국공신들과 밀착된 도교도 필요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화엄종이야 말로 시대가 원하는 철학이 아닌가?

무측천은 여황제의 귄위 강화를 위하여, 법장은 불교의 힘으로 도교를 누르기 위해여 서로 힘을 모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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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지금까지 불교와는 사뭇 다른 철학과 역사를 가진 종파 불교이다. 중국 정토종, 선종의 이야기를 한 번 다뤄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초기화엄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오다 겐유 (불교시대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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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손에 넣고 중국을 치마폭에 담다
카테고리 자기계발
지은이 장석만 (부표,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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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초등역사교사모임 (늘푸른아이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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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계 안에서의 나눔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안형관 (이문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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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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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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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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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초보 불교 박사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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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석지현 (민족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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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선의 사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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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전윤 (신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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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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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측천무후를 역사 흐름 속에서 분석해보자!

측천무후는 영화, 책으로도 많이 나온 중국사의 재미있는 소재거리입니다. 중국의 유일한 여황제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고, 잔인하면서도 영특한 면모를 지닌 요부로 나오기도 합니다. 절세미인이자, 절세요부로 평가된 이 측천무후... 하지만 절세의 미모 하나로 중국 전체를 호령하면서 82살까지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나라까지 건국하였다는 점에서 뭔가 다른 것이 하나 쯤 있지 않았을까요? 이번 장에서는 당나라 3번째 포스트로 측천무후를 다루되, 영화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 관점에서 한 번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당 고조 - 당 태종 - 당 고종 - 당 중종 - 당 예종 - 측천무후 - 당 중종 (복위) - 당 예종 (복위) - 당 현종 - 당 숙종 - 당 대종 - 당 덕종 - 당 순종 - 당 헌종 - 당 목종 - 당 경종 - 당 문종 - 당 무종 - 당 선종 - 당 의종 - 당 희종 - 당 소종 - 당 애종

(표) 당 왕가에서 측천무후의 등장 및 영향력과 관련된 시기... 거의 1/3의 시기에 이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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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젊은 시절, 고령의 시절 사진화>

1. 베일에 쌓인 그녀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보통 중국 당나라 2대 태종의 후궁이자, 3대 고종의 황후이자, 중종과 예종의 어머니이자,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여자를 측천무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왜 무후? 무후란, 스스로 황후임을 인정하는 칭호입니다.

그녀의 칭호가 측천무후인 것은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을 스스로 <황제가 아닌 황후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측천대성황후>라고 일컬은 것이 명칭의 유래라는 설이 가장 다수설입니다. 또, 그녀의 아들 중종이 어머니를 <측천대성황제>로 부른 것도 있구요.

실제 그녀의 이름은 스스로 <조>라고 말했기 때문에, <무조>라고 불리며, 그녀가 주나라를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측천무후의 아버지는 거상인 무사확으로서, 무사확은 수나라 시절, 당의 시조 이연에게 군자금을 제공해주고 성장한 상인이었습니다. 무사확은 이연을 밀어준 대가로 개국공신이 되어 세력을 떨치게 되었죠.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무사확이 산둥지방(옛 북제시절 귀족들의 본거지)과도 연계된 세력이라는 점입니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아내인 장손왕후가 죽자, 후궁으로서 총애를 받습니다. 물론, 측천무후가 눈부신 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강조되지만, 그녀의 신분이 개국공신에다가 여러 세력에게 도움을 준 자금력이 탄탄한 상인집안이었다는 점도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태종은 그녀를 <무미랑>이라고 부르며 매우 아끼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태종은 측천무후의 미모를 상당히 아끼다가 어느날부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와 연계된 세력들이 당 개국공신들과는 차이가 있는 구귀족 세력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예로, 당시 집권층이자 개국공신 집단들은 <궁 내 여자의 기가 너무 강하여 문제가 심각할 지경이다. 이후의 세상은 무씨 여인의 천하가 될 것이다.> 등등의 소문 등을 이유로 무미랑을 적극 견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측천무후는 결국 황제의 총애를 잃자 황태자인 진왕 이치(이후 고종 황제)에게 접근하여 그와 사랑에 빠집니다. 즉, 태종의 비였던 그녀가 고종의 여자로서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불륜이 가능했던 이유는 2가지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이 전통 중화제국을 표방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북방민족으로서 중국을 지배하였던 남북조 시대 북위, 북주 등의 풍습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사랑한 여자, 여자로서 황제를 꿈꾸는 여자는 중국 전통의 가부장적 윤리관으로서는 절대 수용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북방계통의 유목사회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일은 아니였고, 이러한 북방적 관념이 당 초기까지는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두 번째는 이러한 불륜적 상황을 인정해줄 수 있는 지지기반으로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의 지지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고종에게는 정식 왕후인 왕황후와 고종이 사랑하는 여자인 소숙비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고종에게서 소숙비를 떼어놓기 위해 <무미랑>을 고종에게 붙여놓은 것입니다. 왕황후의 이러한 선택은 훗날 자신이 처참하게 죽게 되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2. 왕황후파와 측천무후파의 대결은 정권 다툼이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당 초기 건국 상황에서 <관롱집단>과 <산둥귀족>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관롱집단이란, 북방민족도, 전통 한족도 아닌 관중지방의 의협집단으로 북위가 분열된 이래, 서쪽 지역에서 성장한 서위 - 북주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지연적 집단임을 말했습니다. 이 관롱집단이 곧 수, 당을 건국한 지배세력이었고, 이들의 성격상 과연 당나라가 전통 중화제국인가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었습니다. 관롱집단은 서위 우문태 장군부터 시작한 공신집안들로 구성되었고, 당의 개국공신으로서 역대 왕과 왕후들에게 충성하면서 자신들을 특권을 공고히 하고 있었고, 고종의 황후인 왕황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하였던 집단이었습니다.

반면 산둥귀족은 북위가 분열된 이래 동위 - 북제 - 수 - 당으로 이어지는 동안 명맥을 이어온 낙양 명문가를 비롯한 전통 귀족 집안입니다. 수, 당의 건국세력인 양견, 당고조 이연은 관롱집단으로서 양견과 이연 자체가 이종사촌간입니다. 따라서 산둥귀족은 상대적으로 권위가 약화되었고, 정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북제 출신 귀족인 이 산둥귀족이 곧 측천무후를 지지하면서 개국공신 집단을 견제하려던 세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왕황후가 소숙비를 견제하기 위해 데려온 측천무후는 소숙비의 10배 이상되는 강적이었습니다. 역사상 사료에는 왕황후가 착한 여인, 측천무후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여인으로 후대에 평가됩니다.

예로, 자식이 없던 왕황후는 측천무후의 딸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합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딸을 죽인 뒤 슬피 울면서 딸을 죽인 범인으로 왕황후를 지목하여 그녀를 축출합니다. 그래서 측천무후는 <정권에 대한 욕심으로 혈연도 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묘사되곤 하죠.

이 사건으로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가 됩니다. 그리고, 측천의 책봉은 곧 관롱집단의 몰락 및 장안, 관중 세력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과거 북제지방의 산동지방, 즉 낙양중심의 관료군이 새롭게 떠오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나 당 고종은 당나라 최전성기의 왕이었습니다. 직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시베리아 남부, 파밀 고원, 고구려 정복 등등 당의 최대 영토를 회복한 왕이었죠. 측천은 당 고종이 건재할 때는 감히 황제의 꿈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이 약해지자 자신의 아들과 남동생인 중종, 예종을 입맞에 따라 왕위에 올리면서 전권을 행사하다가, 아예 아들들을 폐위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를 다스립니다. 이 나라의 이름은 <주>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천을 옹호한 집단은 당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잃었던 구귀족들이었습니다.

3. 황후 옹립사건과 중종폐위 사건

측천무후가 황제가 되기 까지의 중요한 사건들은 크게 3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왕황후 일파를 몰아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황후를 몰아낸 사건이 아니라 개국공신인 관롱집단을 숙청하고, 구귀족인 산동 귀족들을 등용한 사건입니다.

2번째 큰 사건은 중종폐위 사건입니다. 무후는 자신의 아들은 중종을 폐위해 버리면서 중종과 연결된 당의 종실 제왕들과 대신들을 대거 숙청합니다. 이 사건이 갖는 의미는 종래 측천무후를 지지하였던 산둥귀족들도 일부 숙청당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무후는 거의 전무후무한 전권을 휘두르게 되며, 자신의 새로운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신진관료 육성에 힘쓰게 됩니다.

마지막 사건으로는 스스로 여제가 된 사건입니다. 여제가 된 뒤 무후의 업적을 간략히 개관해 볼까요?

4. <주> 제국의 건설

측천무후가 새로운 칭호로 건국한 <주>나라는 중국 하, 은, 주 시대의 고대 <주나라>를 뜻합니다. 이것은 고대 주나라의 이상으로 돌아가서 주나라의 제도를 통한 이상적 국가 수립을 이루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국호입니다.

고대 주나라의 이상적인 체제들을 역사에서는 <주례체제>라고 부릅니다. 측천무후가 생각한 고대 주나라의 주례체제의 핵심은 정전제를 이상으로 하는 <경자유전 : 농자짓는 자가 토지를 가지는 것이 옳다> 이념의 토지공유제도, 국왕을 중심으로 신료들과 합의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합좌제도> 등등의 이상적인 이념들입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의 최초의 황제로서 스스로를 <황제>라 부릅니다. 따라서 측천무후가 아닌 <무측천>이 맞는 용어겠네요. 그녀의 새로운 나라 건국으로 당제국은 일시 중지되고, 당의 수도이자 관롱집단, 개국공신들의 중심지인 장안대신 산동의 구귀족 중심지인 낙양이 새로운 수도가 됩니다. 낙양은 이제 중국의 정치, 군사적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르게 됩니다.

측천무후는 개국공신에 대한 특혜를 대부분 없애 버리고,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합니다. 즉, 중국 역사상 과거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확대된 것이 바로 이 <주>나라 때입니다. 그리고, 나라의 정치이념으로 법장의 화엄경을 중심으로 한 불교를 채택하여 국가주의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불교로서 국가 통합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실제, 당 건국시기부터 건국이념은 구겸지의 도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측천무후기에는 도교가 탄압받고 불교가 융성하게 됩니다.

실제, 측천무후기에는 당 건설 이후 확대된 영토와 안정된 사회 기반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아주 크게 경제력이 급상승한 시기입니다. 농업은 발전하였고, 이미 건설된 수나라 때의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이 서로 원할하게 교차 수송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의 혈맥이 뚤리고 건강한 피들이 온 몸을 돌던 시기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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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건릉 사진 : 입구>

5. 무후의 꿈을 꾸는 자들이 등장하다.

무후는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중국 대륙을 호령한 여걸중의 여걸이었습니다. 그러나 무후 말년에는 상황에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먼저 중종의 왕비인 위후와 그 딸 안락공주는 또 다른 <무후>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위후와 안락공주는 남편이고 아버지인 중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또 다른 여제가 되어 여제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측천무후와 같은 정치적 지략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녀들은 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와 대립하다가 태평공주 세력에게 처참하게 무너집니다. 태평공주는 조카인 예종과 함께 그녀들을 제거하였지만, 나중에 당 현종에게 정권을 빼앗기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여인천하는 끝나고 맙니다. 당 현종은 무후가 남긴 유산들을 가지고 당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그러나, 당 현종 후반에는 그 유산들을 모두 탕진하여 당 제국이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 현종 때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 바로 양귀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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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건릉 앞 석상>

6. 역사는 여자들의 세상을 여화의 난이라 적다.

중국 전통 역사에서는 측천무후와 같은 여걸들의 평가가 아주 부정적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한 남존여비 사상은 여자들을 비하함으로서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지배 사관을 계속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남성들의 잘못된 업적, 국가적인 제도상의 미비점들을 여자로 인한 문제로 만들어, 이것을 <교훈으로서의 역사>로 삼으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로 하, 은, 주나라의 멸망을 달기, 포사 등 미녀들 때문이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주색>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지요. 달기가 국가를 망하게 하기 위해 <미녀와 함께 술로 담근 연못에서 마시고 놀며, 고기를 걸어놓은 나무에서 배를 채운다>는 주지육림의 이야기도 여자의 미색을 조심하라는 교훈이고, 포사가 <웃지 않는 미녀>가 되어 왕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여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나라의 시조 이연이 새로운 국가를 새운 이야기도 수양제의 후궁과의 연정 문제였다고 하거나, 당태종의 현무문의 변이 동생의 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하거나, 측천무후가 등장한 것도 고종이 그녀의 여색에 빠졌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 위후와 안락공주가 무후의 뒤를 이어 여인천하를 만들려고 한 것을 독한 여자들의 쓸데없는 욕심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현종의 몰락을 양귀비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던가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당나라의 역사에는 여자의 여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의 역사를 기록한 송나라가 철저한 유교중심의 사대부 국가였기 때문에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실제 무후의 시기에는 중국 역사가 발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개국공신등의 구세력들이 몰락하면서 새로운 과거 관료들이 등장하여 중국 사회가 점차 능력 위주의 사회로 정착되던 시기였습니다. 실제, 과거제도가 합리적으로 개편되는 것이 바로 이 무후기이니까요.

그러나, 무후의 시대가 끝나면서 중국 사회는 더욱 더 급격히 보수화되어 갑니다. 당나라 하면 떠오르는 개방주의적, 귀족주의적 성격의 국가는 태종기부터 무후 전후의 시기를 말합니다. 무후 사후, 중국 당나라에서는 북방적인 진보성은 사라져가고 점차 보수적이면서 전통 중화주의적인 사회로 급변합니다. 특히, 현종 후반기 탈라스 전투의 패배, 안사의 난 등이 발생하면서 더욱 사회는 경직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당 현종의 시기와 양귀비의 이야기를 다뤄보겠습니다. 이 시기는 무후 이후 전개된 당나라 최대의 전성기이자, 당의 몰락기가 동시에 보여지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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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 측천무후의 릉과 고종의 릉>
     <우 : 측천무후의 이름이 새겨지 있지 않은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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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제국은 중국 왕조인가, 북방 왕조인가?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당나라의 건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지난 포스트에서 중국 수나라를 대운하라는 키워드로 한번 살펴보았죠? 당은 그 수나라의 건국 이념과 제도를 거의 대부분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실제, 수나라와 당나라는 유사성이 참 많습니다. 앞 왕조를 무너뜨린 나라가 앞 왕조와 거의 유사한 체제를 가지고 시작하다니... 이유가 뭘까요?

1. 당이 과연 중국 왕조인가?

사실 5호 16국 시대 말기 북주에서 시작되는 지배집단은 당까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관롱집단>이라고 부릅니다. 지도에서 서위 - 수 - 당으로 연결되는 부분을 자세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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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이란,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혼란한 중국 사회에서 탄생한 <이단아>입니다. 이들은 전통 중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북방에서 넘어온 오랑캐도 아닙니다. 이들의 핏줄은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관롱집단은 핏줄로 이루어진 집단이 아니라, 북위 말기부터 서위, 북주를 거치는 동안 위수지역을 중심으로 뭉친 의협집단에서 출발했으니까요.

북위를 멸망시키고, 동위, 서위로 중국 북조가 분열되었을 때 서위의 우문태 장군은 서방 중심지로 위수지역의 관중 지방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문태 장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강력한 군부가 필요했는데, 이 때 관중지방에서 뭉친 협객들이 바로 관롱집단입니다. 보통 <서위 8주국과 그 후손들, 서위 12수호신>이라 불린 장군들이지요. 실제 수나라를 세운 양견도 이 관롱집단출신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관중지방이 원래 선비족의 본거지로서 선비족과 연결되는 지역이라는 점입니다. 북위가 처음 나라를 개창하고 북조를 통일하였을 때, 이 관중지방에 많은 선비족들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북위가 효문제의 한화정책으로 중국화되어가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이 관중지방의 선비족들은 한인들과 어울려 남겨 되었습니다. 이들은 낙양의 선비족처럼 귀족화되지 못하고, 단순히 서방을 지키는 관리나 향리, 또는 장원 소유자가 되어 지방의 실세가 되었죠.

서위 멸망 후 북주의 중심지가 위수지역이 되자, 북주 총관 양견 등 관롱집단의 인사들이 대거 관료군화 되어 기용됩니다. 양견이 수를 세우자 관롱집단은 건국공신으로 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이 관롱집단은 결국 귀족이나 호족도 아니고, 화북의 북방민족도 아니고, 순수한 중국인도 아닙니다. 이들은 관중이라는 지역을 매개로 뭉친 의협집단으로서 혈연적 측면은 상당히 약한 집단입니다. 실제, 수나라의 마지막 왕인 양제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모두 관롱집단의 협객 또는 무인 집안으로서 이 둘이 <이종사촌>간이었습니다. 즉, 수와 당의 교체는 어마어마한 왕조의 교체라기 보다, 수의 멸망이 필연적임을 안 관롱집단들이 왕조 교체를 통해 지배체제를 계속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또, 이 관롱집단의 성격상, 수와 당 제국이 과연 순수한 중국인의 제국인가에 대한 의문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며 남조의 한인, 북조의 이민족 사이에서 통일한 수는 북조를 중심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이미 이 당시 중국에는 한인, 북방인의 경계가 무너진 상황이었지요. 따라서 수, 당의 중국 왕조 건설은 핏줄상의 중국왕조라기 보다는, 건국 지역 및 건국 이념상의 중국왕조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네요.

강좌중국사나, 중국사개론, 동양사개론을 보면 이런 식으로 정리해 놓고 있더군요.

<효문제의 한화정책 이후 북위 이래 선비족들은 한인화되어 혼혈이 증가하였다. 관롱집단도 결국 선비족의 피가 흐르는 집단으로서, 장안으로 중심으로 중국식 통일 왕조를 건설하였다.>

2. 당의 건국까지 남북 관계의 변화상

그럼 당 건국까지 중국 남북관계를 간단히 볼까요? 순수한 한인이라는 개념은 중국 주나라에서 비롯됩니다. 보통 중국 은나라는 천명사상을 가진 동이계통의 민족이 세웠다고 하며, 이 은을 물리친 나라는 역성혁명의 사상을 처음으로 보여준 주나라입니다.

주나라에서는 황하를 중심으로 하여 양자강 이북까지를 순수한 중화로 규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양자의 험한 지역을 당시의 석기로 개간할 수 없어서 미개발지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 중국의 중화란, 개간이 가능한 황하 - 위수 동쪽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상호 항쟁이 가열되고 금속기가 등장하면서 양자강 이남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의 진이 통일하면서 진시황 때의 중화 개념은 서방 관중지방, 남부 양자강 지방까지로 확대됩니다. 진시황은 북방문화권의 패자인 흉노를 인정하지 않고, 무리한 정벌을 감행하였는데, 이는 북방문화권을 중화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철기를 사용하는 농경 문화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우리는 중국 문화권, 인도 문화권을 이야기하면서 문화권의 기준을 농경으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으로 보면 농경문화권 보다 북방 문화권이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상 유명한 5호 16국시대, 인더스 문명의 파괴, 징기스칸의 원정, 게르만의 이동 등등 흉노를 비릇한 북방 문화권의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교과서에 이 북방 민족 이야기가 너무 적어 아쉽군요.(날 잡아서 북방 민족 변천사를 한번 정리해봐야 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진한시대 중화라는 개념이 완성되고 만리장성 등 경계가 확실해 지면서, 중화족과 북방족의 항쟁은 천년보다 긴 시간동안 계속됩니다.

한무제 때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중화족이 흉노정벌을 통해 북방족을 밀어내면서 강력한 중화질서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한나라 전체를 걸쳐 북방 민족은 서서히 중국 내부에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후한 이래 중국 내부의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북방 민족들을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 북부를 북방족이 차지하면서 <호한체제>를 시작하였습니다. 호한이란, 오랑캐와 한족이 공존한다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호한체제를 종식하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자가 수문제입니다. 문제의 아들 양지는 다시 중국의 천자임을 이념적으로 내비치며 북방에 대한 공격과 고구려 공격을 시도합니다. 이 때부터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남북조, 유연, 돌궐, 흉노, 고구려 등 다원적 질서에서 중국 왕조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개편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수에서는 마지막 원정인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여 체제 전환에 실패하고 말죠.

당나라는 수의 실패를 거울 삼아 확실히 중화족이 우위에 서는 세계질서체제로 국가체제를 개편합니다. 즉, 외부민족에 대한 봉건제도와 조공체제를 실시하게 되는 것이죠.

3. 당 태종 이세민부터 시작된 세계국가의 추구

당나라를 창업한 당고조 이연은 사실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이연의 조부 이호는 서주 8주국의 8대신으로서 서로 친인척관계로 얽힌 집단의 후손이었습니다. 또 당의 건국자 이연과 수양제도 이종형제입니다.

여기서 서위 8주국의 대신들이란? 서위 8주국은 서위의 창업자인 우문태와 당시 실력자인 당나라 시조부 이호를 중심으로 연결된 집단을 말합니다. 특히 당시 유명한 집안은 독고씨의 독고신은 3명의 딸이 있었는데, 세 딸을 북주의 왕 명제의 왕비, 수문제의 황후, 당시조부 이연의 부인으로 보내어 모든 가문들을 친인척 관계로 얽어 버렸습니다.

당나라 시조 이연은 사촌은 수의 양제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고, 반란 진압도중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배신을 때려 국가를 창업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통일하기 위한 정책으로는 진시황제가 사용했던 <먼나라와는 일단 친하고, 가까운 지역부터 치고 들어간다>는 <원교근공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연의 아들인 당의 태종 이세민은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있었습니다. 그는 천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무참히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현무문의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 당태종, 조선의 태종 등등 살육을 통해 왕위에 오른 왕들이 국가를 정말 잘 다스렸다는 점은 재미있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이세민은 신하들의 직언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정관의 치>라고 부를 정도의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하죠. 자신이 죽인 형 이건성의 신하인 위징을 심복으로 등용했다는 일화도 유명합니다.

정사에 적힌 이세민과 관련된 미담 중에 사형수들을 풀어준 미담도 있습니다. 이세민이 390여명의 사형수들을 1년간 집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사형수들이 1년 뒤 모두 돌아오자 이세민이 감동을 받아서 이들 사형수들을 모두 방면해 준 것입니다. 이세민이 태평성대를 구가했다는 일화이지요. 그러나 구양수의 <종수론>을 보면, 이세민이 사형수들에게 1년뒤 돌아와야 모두 방면한다는 약속을 모두 한 뒤, 세상을 속여 명성을 얻으려 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건 이 이세민 시기의 중국은 그동안의 호한체제를 버리고 중화 중심의 세계주의 체제로 돌아섰다는 점입니다. 이세민은 자신의 심복인 방현령과 자신이 죽인 형의 심복인 위징에게 나라의 경영 방략을 물었습니다.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이 중요하므로 창업기반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업론을 말하였고, 위징은 <창업도 중요하나, 창업된 나라를 지키는 것은 더욱 어럽다>라는 <수성지난론>을 말합니다. 이세민은 수성지난론에 따라 국가를 경영하였습니다.

이세민은 신하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공치주의>를 실시한 왕으로서 신하들과의 국정 운영의 내용을 책으로 정리하였는데, 이 책이 유명한 <정관정요>입니다. 이 책은 후대 제왕학의 교과서이자, 국주와 신하의 유교윤리, 정치윤리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습니다.

태종기의 <정관지치>라는 태평성대의 내용을 볼까요? 그 내용의 핵심은 <호한체제를 넘어서서 중화제국의 세계화 기반>을 닦는 다는 것에 있습니다.

먼저 이세민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일 뿐 아니라 모든 유목민의 군장으로서 아시아의 왕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천가한이라고 부릅니다. <한>이란 징기스칸의 칸, 흉노의 선우와 마찬가지로 북방 민족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죠. 자신 스스로가 <천가한>이 된 이세민은 직접 주변 민족들을 정복한 후 정복지의 왕과 추장을 중국 지방관으로 임명합니다.

이세민은 자신이 살고 있는 경기지역은 <부>라 부르고, 지방의 중요지역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이민족 지역을 정복한 후 <도호부>라 불렀습니다. 삼국시대를 보면, 신라 통일기에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 등등이 당나라에 의해 생기죠? 도호부는 이민족 지방의 정복, 도독부는 당의 직할지 정복을 뜻합니다.

즉, 당태종의 업적은 주변 이민족을 철저히 중국에 끌어들이는 정책입니다. 정복사업을 끊임없이 떠나고, 고구려와는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은 스스로 칸으로 추대받는 정책이지요.

특히, 정복한 지역은 중국이 직할지로 편제하지 않고, 도호부로 편제하여 제한적으로 자치를 인정하고, 그 지역 추장보고 다스리라고 합니다. 자치의 대가로 그 지역 추방은 중국을 도와 다른 민족 정벌을 떠나야 하죠. 이렇게 오랑캐에게 자유를 주어 자치를 인정하는 정책을 기미정책이라고 합니다. 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정벌하겠다는 것을 역사에서는 <이이제이>라고 부르죠.

<기미정책>으로 중국에 협조하게 된 민족들은 중국과 봉건제도의 관계를 맺습니다. 중국이 왕, 오랑캐족은 신하국가가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신하국가는 중국에 매년 조공과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따라서 중국 전통의 대외관계를 <봉건질서에 입각한 조공질서>라고 부릅니다.

이 기미정책과 이이제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2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첫째는 태종 때 있었던 일로서 서돌궐과 동돌궐의 내분을 이용하여 서돌궐을 지원하면서 동돌궐을 무너뜨린 정책입니다. 돌궐의 내분은 북방에서 당나라에 맞설 나라가 백년이상 사라져 버렸음을 뜻합니다.

두 번째는 신라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한 것입니다. 고구려의 멸망은 수백년간 동북아시아의 상권을 지배해온 국가를 무너뜨림으로서 대동강부터 북방에 이르는 거대한 무역로를 중국이 장악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당나라가 삼국통일 당시 신라에 요구한 것은 대동강부터 이북을 당에 넘기라는 조항이었고, 신라는 아주 착실히 그 조항을 이행하였죠. 신라의 삼국통일은 거대한 동방무역권이 당나라에 넘어가는 것도 의미합니다. 당에서는 이 무역로를 이용하여 거대한 동방이익을 차지합니다. 이후 한반도에서는 일본, 남해, 중국을 잇는 새로운 해상 무역로를 개통하게 되는데 이 무역로를 통해 거대한 부를 차지한 자가 바로 중국 정사에 등장하는 <장보고>입니다.

3. 고종기의 중화제국의 확장

태종의 아들 고종은 아버지의 화려한 업적을 뒤이어 손쉽게 세계제국 건설의 기반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당 고종기의 업적을 한번 볼까요? 지도에 표시된 도호부들이 당나라의 6도호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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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기 당나라 영토는 보통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당 전성기 영토라고 보면 됩니다. 점령한 지역을 표시해보죠.

동부 : 한반도 북부 점령(백제, 고구려 멸망)

서부 : 중앙아시아 진출, 파미르 고원 동쪽 지배(천산남로의 도시국가 경략)

납부 : 인도차이나 반도 진출

북보 : 시베리아 남부 진출

지금 이 지도를 외우기 위해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만큼의 영토를 당이 차지하면서, 점령한 지역의 주민들이 <기미정책>에 의해 당에 동화되었다는 점이지요. 당은 동화된 민족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의도적으로 전파합니다. 또는 한반도와 같이 이미 문화가 전파된 지역에서는 당의 문화체계가 쉽게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문화권>이 성립되게 됩니다. 보통 한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파된 한자, 율령, 불교, 유교 등의 중국 사상이 문화권 전체에 더 크게 파급된 시기가 이 시기지요.

다음 장에서는 당나라 2번째 이야기로 당나라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를 한번 다뤄 보로록 하겠습니다. 측천무후와 양귀비 등등 당에서의 여걸 이야기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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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8장. 당나라 종파불교의 발전

지금까지 전개한 위진남북조와 수대의 불교사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이 가져와서 그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기도 전에 왕법에 의해 불법이 위축되었던 시기의 불교를 포스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당나라 시기의 불교는 다릅니다. 당이라는 나라 자체가 국제적이고 귀족적인 문화를 가진 개방성을 큰 특징으로 하는 만큼, 불교에 대한 입장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불교는 이제 왕법에 의해 탄압받기만 하는 호국불교를 뛰어넘어 불법의 참 뜻 자체를 연구하고, 불법에 따라 석가의 모든 사상을 이해하고 중국식으로 완성해가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포문을 연 사람이 바로 현장법사(삼장법사)입니다.

또 당나라 이전 불법에 대한 대탄압인 <폐불사건>을 여러번 거치면서 불교계는 이전 단계보다 많이 성숙해져 있었습니다. 불교계는 호국적인 성격으로 왕권에 봉사하는 자신들을 반성하면서, 불법의 독립성과 불교계 혁신운동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불법의 본 뜻인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체계적인 불법을 만들어가는데, 이러한 불법 완성 속에서 여러 교단 종파가 탄생하게 됩니다.

1.수많은 종파가 과연 진정한 석가의 참 뜻을 아는가?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는 사실 모두 석가의 참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우물안에서 싸우던 개구리들아였습니다. 우물에서 바라본 하늘이 어떤 하늘이고, 어떤 크기인지 알 수 없듯이 중국 내부에서 바라보는 석가의 삶과 불법의 참뜻을 아는 자는 없었습니다. 7장에서 자세히 다룬 지의의 천태종은 수많은 불교종파를 통합하여 하나로 융합하려 노력하였고, 그 결과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방 불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태종 역시 대립하는 불법을 융합하려는 시도의 종파였지, 불법의 참 의미를 찾던 종파는 아니였습니다.

실제, 당 초기까지 어떤 종파도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석가의 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석가의 경전을 번역하여 읽는 것만으로는 그 심요한 원리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석가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서역이나 인도로 가서 불법을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선진국에 유학가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죠. 서울에서 아무리 혼자 영문법책을 읽어도 영어발음이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석가의 참 뜻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채 경전만을 읽고 석가를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던 것이죠.

따라서 당대에는 서역의 불경을 번역하는 작업보다는, 직접 서역에 가서 불법을 공부하고, 불법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 사명을 다한 것이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현장법사)입니다.

2. 현장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에서 불교의 전성기가 시작되면서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 수많은 종파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파들은 각각 자신들이 말하는 경전을 석가의 참 뜻이라고 주장할 뿐,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내지 못합니다.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에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문파를 오가며 불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불경이 너무나 부족하고, 사상적인 체계도 완벽하지 못하며 불경의 해석도 제 각각인 것에 실망하였습니다. 현장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중국 불교를 믿을 수가 없어서, 인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인도에 가는 것은 너무도 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국외로 출관하는 중국인을 처벌하였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장은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라고 말하며, 인도로 향합니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소설인 <서유기>의 시작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인도로 가는 동안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죽을 위기를 겪기도 하고, 고승으로서 환대를 받기도 합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불법을 생각하다가, 인도 난타사에 머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습니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여 구마라왕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16년간의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저술하였습니다.

또한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구라마습과 현장의 불경 번역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여, 구라마습 이전의 경전을 고역경, 구라마습이 번역한 경전을 구역경, 현장이 번역한 경전을 신역경이라고 말합니다.

현장이 완성한 불법의 요체는 <나의 본체와 불법의 본체는 모두 머릿속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며 그 실체가 진실한 존재가 아니다. 실체는 실제 존재하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따름이다. 우리는 머릿속에 그린 아집과 법집을 깨뜨리고, 진정한 실체를 발견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견해를 불교에서는 <유식론>이라고 합니다.

유식론의 특징은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과 대립하는 <유식사상>으로, 부처의 진정한 말씀은 <아무것도 없다는 공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존재한다는 유사상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현장의 교리는 <법상종>이라는 종파로 체계화되고, 현장은 법상종의 시조가 됩니다. 이 법상종은 오랜 기간동안 종래 <공사상>에 기반을 둔 다른 종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을 훗날 <공유논쟁>이라고 합니다.

현장은 일대 유학생이라고 보기에는 인도,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큽니다. 인도에서도 수백년에 나올까말까한 고승으로 추앙받았고, 중국에서는 진정한 불법을 전파한 종파 불교의 아버지격이었으니까요. 명나라 오승은인 이러한 현장의 유학 생활을 소설로 발전시켜 <서유기>를 저술하였습니다.

3. 선종이 등장하다.

(이미 전에 선종을 설명했지만, 당대 혜능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한번 포스팅 합니다.)

선종은 원래 석가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석가가 인도에서 전도할 때, 어느 날 아무 말 없이 꽃 한송이를 여러 사람에게 보였습니다. 모두가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 할 때, 마하가섭이라는 제자가 석가에게 웃음으로 그 뜻을 이해했음을 알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석가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정법과 원리가 이미 가섭에게 전달되었구나"

이렇게 이심전심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눈빛만으로 그 뜻을 깨닫는 설법이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심전심의 깨달음으로 창시된 종교가 선종이고, 마하가섭이 바로 인도 선종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즉, 선종이란 내적 관찰과 자기 성찰로 등장한 불교 종파입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합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부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으로 와 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불심종(佛心宗)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인간이 본래 지닌 성품이 부처의 성품이라는 것만 알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중적인 희망을 던지는 종교였습니다.

선종에서는 복잡한 문자도 필요없으며, 단지 깨달음만으로 모든 선을 강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종은 묵가식의 노동을 중시하고, 유교식의 수양을 강조하며, 도교식의 민중화를 추구하는 다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섭 이후의 선종은 그 후계자 전법에 있어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몇 마디 말로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 몇 마디 말을 <게어>라고 합니다. 게어란, 어떤 경전으로 정해진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뜻을 전하기 위해 짧막하게 적은 <작은 심어>를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은 무이고, 공이다>와 같이 짧은 언어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하므로, 사람마다 알아듣는 이해도가 각각 다릅니다.

선종에서는 게어를 이해한 사람에게 의발을 전함으로서 후계자를 뽑습니다. 의발이란, 중들이 입는 가사와 바릿대로 달마가 제자에게 이 두가지 물건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로서 선종의 후계자의 징표를 상징합니다.

선종은 28대 조사인 보리달마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습니다. 보리달마는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을 하고, 혜가라는 제자에게 의발을 준 뒤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도 인도에서처럼 말로 전법을 전하였기 때문에 초기 선종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무협지에 많이 나오는 듯 싶죠. 몇십년을 수련한 강호의 고수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바로 달마대사로 나오니까요.

4. 혜능에 와서 북종선, 남종선이 완성되다

선종의 5대조인 흥인선사기에 제자를 뽑기 위해 제자들에게 <게어>를 적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가장 총명한 제자인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라는 게어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방앗간에서 일하는 소공인 혜능이란 자가 이것을 보고는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다. 명경 또한 집이 아니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어디서 티클이 생간단 말인가?>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혜능은 글을 모르는 무식한 소공인 관계로 글을 아는 자가 이 말을 옮겨적어 게어로 만들었습니다.

홍인선사는 혜능의 말에 감동받아 그에게 선종 6대조의 의발을 물려주었습니다. 선종이 비록 이심전심과 불립문자를 통해 이루어진 <마음 수양만을 강조하는 종파>라고는 하지만, 글을 모르는 소공이 선종 조사가 된 일은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후 선종은 가장 총명한 후계자였던 신수의 북종선과, 글을 모르는 소공출신인 혜능의 남종선으로 갈리게 됩니다. 북종선은 선종교파 중에 비교적 지식을 강조하는 종파였고, 남종선은 오로지 <마음 외에는 없다>라는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파였습니다. 북종선은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 정권에 협력하면서 성장하였고, 남종선은 글을 모르는 대중속으로 파고들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종 중 대중적인 남종선은 우리 나라 선종에 큰 영향을 줍니다. 나말 여초의 호족세력과 6두품, 그리고 반신라 지식인들의 종교가 선종이었고, 고려 불교의 큰 흐름도 왕권의 교종과 민중적인 성향의 선종이 대립하며 주도해 나갑니다. 이 혜능의 남종선은 훗날 <심성수양>을 강조하는 성리학에도 영향을 주며, 시문 등 감정이 필요한 문학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남종선은 마음으로 믿는 다는 실천도덕이 지배층에도 환영받았으며 행사규칙인 백장청규를 마련하여 대중적 토대를 확실하게 합니다.

5. 법장의 화엄종 : 모든 것은 하나의 진리 세계로 통한다.

법장은 당나라 최고의 여걸 여황제 측천무후기에 활동하면서 <화엄종>이라는 교단을 완성한 고승입니다. 화엄종은 법장이 주장한 <진심>이라는 단어를 모든 것의 근원으로 보는 종파입니다. 이러한 진심을 정리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법장은 현장의 <유식론>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실체는 다르고, 실체는 있으나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실체가 아닐 수 있다>라는 말이 무엇인가?

법장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하나의 <진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우컨대 이 금사자의 본체는 금이라고 하는 질료이고 사자의 모습은 현상에 불과합니다. 금사자의 형상은 허무하여 실제가 없고 변동합니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한 무더기의 금 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똑같은 한 무더기의 금으로 고양이나 개, 호랑이의 형상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바로 오늘의 홍안이 내일의 백발로 되어 버림을 우리가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지, 수, 화, 풍 등 네 개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현상으로서의 사건은 비록 변할지라도 볼질로서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사자의 모습이 늙어갈지라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은 그 현상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사자의 형상이 없다면 그 존재마저도 알 수 없음과 같지요. 마찬가지로 육체라고 하는 껍데기가 없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정신도 발휘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과 그 원리는 상호 의존하고 보완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위 말은 법장이 화엄의 원리를 측천무후에게 설명한 글입니다. 즉, 금사자의 눈도, 코도, 입도 금사자라고 부를 수 있고 금사자 전체를 금사자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 금덩어리라는 본질로 이루어진 실체이며, 녹으면 본질인 금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금이라는 <진심>은 영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살덩어리이지만, 그 본질인 영혼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의 원리 속에 흘러갑니다.

예로 산이 있으면, 그 산에 나무가 있고, 토끼가 있고, 돌맹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봅니다. 나무를 본 사람은 나무가 진실이고, 토끼를 본 사람은 토끼가 진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불법을 설명하면서 종파를 만듭니다. 그러나, 산 전체를 보고 산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흘러가고, 산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며, 그 변화에 따라 나무와 토끼는 어떻게 될 지를 포괄적으로 보는 종파가 바로 화엄종입니다. 화엄이란, 모든 것을 하나의 둥근 원 속에서 파악한다는 <원융 사상>의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당대 이러한 종파 불교의 성립이 중국사 전체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이후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되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불교가 중국에서 단절되듯 침체되고, 한반도에서 융성하게 되는 과정을 포스팅하겠습니다. 이제 한국 불교사로 넘어갈 때가 된 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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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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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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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건릉 사진(encyvber.com)

측천무후 건릉 사진 앞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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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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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릉과 고증의 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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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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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