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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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1.25 (NO 2) 퀴즈 1 : 근대사 ~1910... 나의 상식 테스트 퀴즈 (5)
  3. 2011.01.24 (NO 1) 본문 1 : 근현대사 프롤로그 (2)
  4. 2011.01.24 2011년 한국 근현대사 노트를 1월말부터 시작합니다. (1)
  5. 2010.08.09 하반기에 정리할 글들은?
  6. 2010.05.04 근현대사노트(3) - 한국 근대사의 외부적 배경(1) (6)
  7. 2010.01.01 교육용 플래시 - 한국 근현대사 2학기 정리 플래시
  8. 2010.01.01 교육용 플래시 (중1-2)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1학기 내용 정리 플래시
  9. 2009.12.28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5)
  10. 2008.12.29 수능 근현대사 정리 14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토지개혁 (1)
  11. 2008.12.29 수능 근현대사 정리 13 :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노력
  12. 2008.12.27 수능 근현대사 정리 8 : 국권피탈 과정
  13. 2008.11.22 수능 근현대사 정리 6 : 아관파천과 이권 침탈, 그리고 개항 이후의 경제 (1)
  14. 2008.11.20 수능 근현대사 정리 5 : 의병투쟁 (1)
  15. 2008.11.18 수능 근현대사 정리 4 : 거문도 사건과 개혁의 노력 (2)
  16. 2008.11.17 수능 근현대사 정리 3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4)
  17.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2 : 개화파와 위정척사파 (3)
  18.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1 :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그리고 개항 (10)
  19. 2007.05.20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

근현대사 이야기 (NO.3)

근대, 현대라는 시대 구분을 해보자!

- 시대구분 이야기 -

자,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시대 구분에 대한 이야기야.

그런데 말이죠. 우리가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가 바로 <근현대사>잖아. 그럼,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근대, 현대>라는 용어부터 알아야겠지? 

대체, 근대는 뭐고, 현대는 또 뭘까? 대체, 누가 기준을 정한건지... 뭐,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우선 그것부터 끄적거려 볼꺼야.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오잖아?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건지 참.... 이런 거 안 정하고 그냥 역사이야기를 하면 참 편할텐데... 

자, 이렇게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이렇게 시대를 나눠두는 것을 <시대 구분>이라고 한다나 뭐래나.. 이 시대 구분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분이 바로,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이야. 하지만, 이 사람이 처음으로 시대구분을 한 것은 아니고, 그냥 가장 유명한 시대구분일 뿐이지.  

사실,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혹시, <르네상스>라는 말은 들어봤어?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나르도 다빈치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시대를 말하지.

그 시대의 사람들은 이전 시대와 자신들의 <자부심>있는 시대를 구분하고 싶어했거든. 그래서 시대구분을 시작한거야. 뭐, 한자로 봐도 딱 답이 나오네. 고대는 옛 시대, 중세는 중간세상, 근대는 지금과 가장 가까운 시대....

하지만 시대구분이라는 게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야. 역사를 살아가는 건 우리 인간들이니깐, <인간>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지금과 다른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 임의로 나누어 놓은 게 바로 <시대>라는 단어거든.

예를 들어, 내가 일기를 쓸 때에도 나의 유아기, 유치원기, 소년기, 청년기... 뭐 이렇게 나누지만, 사실 그건 내 맘대로 기준을 잡고 대충~ 정한 거잖아.

또 하나 예를 들자면,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창세시대, 아브라함시대, 유대시대, 예수시대... 등등으로 시대를 나누었어. 하지만, 이것도 크리스찬이 아니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꺼 아냐? 반대로, 르네상스인들의 시대구분은 <크리스찬>들이 보기엔 신앙에 맞지 않잖아? 뭐, 이렇게 임의적이라는 거지.

결국, 자신의 기준과 다른 시대구분은, 그냥 임의로 나눈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시대 구분은,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자기 맘대로... 하는 거니깐.

어쨌든 간에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서양의 근대인들은, 근대가 시작된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그 이전 시대인, 중세 시대에는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한번 <근대인>들의 눈으로 중세를 바라보자. 

아직... 미국이라는 신대륙도 아직 몰랐고, 아시아 애들이랑은 무역도 제대로 못했고, 종교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대....  한마디로,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운 시대.... 휴... 우리가 100년전의 시대를 지금보다 덜 발달한 시대라고 생각하듯이 근대인들도 중세 시대가 쫌~ 한심했겠지?

그런데,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어. 이제, 짜잔~ 하고 <세계화> 시대가 시작된거야.  콜럼버스가 신대륙도 발견하고, 아시아 무역권에 가서 후추도 얻어 왔어. 와~ 세상이 이렇게 넓고, 신기한 세상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이런 새로운 세상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어?

야...  르네상스, 종교개혁, 신항로 개척.... 우리 쫌 잘나가기 시작하는구나...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의 세상이 너무 현실과 달라보이기 시작한 거지. 자, 그럼 이 시대에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몇몇 인물들의 가상 대화를 통해 살펴볼까?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거든. 무식한 일반인들아, 이해되었니?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이중장부 만들어서 이 땅, 저 땅 다 나눠먹었던데...  이게 뭐야~ 대체, 교황이 판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프랑크 왕국 황제랑 서로 땅따먹고, 정치자금 대주고 이런 뒷거래 했다메? 내가 자료 다 찾았다. 뭐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 자금줄 좀 끊어놔야겠네. 그래야 존경하는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쓸거 아니겠어? 교황불신 귀족만세~~ 종교개혁 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지구가 돈다는 말도 믿을께. 지구가 둥글다는 말도 믿어볼께. 이제,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될까?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유럽인들도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는 뭔가가 필요했던거야. 이제,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한마디로!!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마련된 거야.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고, 과거와 다른 <스팩!>을 갖춘 <신유럽인>을 표현할 용어가 필요했던 거지. 

그리하여....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먼 옛날의 시대, <고대>라고 말하면서 시대를 나누었어. 그리고, 로마 제국의 유산이 사라진 시대를 <중세>로 표현한 거지.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위대한~ 시대를 <근대>로 부르게 된 거야.

그런데 말야. 문제가 생겼어. 15-16세기에 살았던 르네상스인들이 자신들의 세계를 가장 가까운 시대인 <근대>라고 표현했는데, 시간이 계속 지나니깐 19세기, 20세기가 온 거야. 헐.... 그럼 이 새로운 시대는 또 뭐라고 불러야하지???

서양의 학자들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지. 아... 산업혁명이 시작되더니, 뭔가 세상이 더 빠르게 바뀌고, <근대>와는 다른 또 다른 <신세계>가 시작되었는데, 이걸 무슨 용어로 표현해야 하냐구....

그래서, 세계 1, 2차 대전이 끝날 때쯤 새로운 용어를 찾게 된 거야. 히틀러가 자살하고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난 이후... 새롭게 변화한 세상. 미국이라는 나라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정착된 세상. 즉, 1945년 이후의 세계를 표현할 새로운 용어를 창작한거야.

그것이 바로 근대보다 더 지금을 표현할 수 있는 시기, 즉 <현대>라는 용어인거지. 그리하여.... <고대-중세-근대-현대>라는 4단계 시대구분법이 드디어 완성된 거야.

아까 위에서 마르크스의 시대 구분 보았지?

마르크스는, 이런 4단계 시대 구분법에다가 자신의 철학을 합쳐서 <마르크스식 시대구분>을 만든 사람이야. 그 사람은 노예제 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 등을 거치면서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은 사람이지. 그래서 그 사람을 사회주의자이자, 공산주의 사상의 아버지라고도 표현하곤 해.

마르크스는 고대, 중세, 근대 등등의 시대구분에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등을 짝~ 리믹스해서 자신만의 시대구분을 만들었지. 물론, 이 사람 말고도 고대, 중세, 근대 등등의 시대에 자신의 철학을 붙여 시대구분을 한 사람은 많겠지?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어. 뭐~ 19세기 이후에 서양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했거든.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 다는게 큰 문제였지.

생각해봐봐. 한국이나 중국, 일본 역사에다가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이런 단어들를 끼워 맞추려고 하니깐 안 맞는게 한두가지겠어? 한국인이 15세기 르네상스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닌데, 서양애들이 살았던 시대를 무리해서 적용하기엔 너무 안맞아서 삑사리가 나지 시작한거지.

서양 애들도 골치가 무척~아팠을 거야. 서양식 시대구분이 만능인줄 알았지만, 다른 세계에서는 적용이 안되니깐 환장하겠지.

해결책은 뭘까?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주 심플한 해결책을 내놓았어. 심플하다기 보다는 귀찮아서 대충 방법을 마련한거지. 시대구분이 애매한 아시아에다가는 몽땅 다 <중세 수준이네>를 가져다 붙여 버리면... 참~ 쉽죠.. 잉~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찌질이들~

하지만, 그나마 아시아에서는 <메이지 유신>이니 뭐니 하면서, 쫌~ 산다 싶었던 <일본> 이라는 나라가 있었어. 아시아의 다크호스~ 일본이 그 말에 바로 발끈~ 했지.

일본 : 되거든!!! 웃기지도 않네..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거든! 니네 유럽애들 발전이랑 다른 면도 무지 많거든? 니들이 <천황제도>를 알고, <막부시대>를 알아? 글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수준급으로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많이 다르네. 아시아에는 근대도 아니고, 현대도 아니지만, 독특하게 발전했다는 걸 왜 몰라주는 거야? 오 좋아.. 우리 아시아에서 독특하게 발전한 그 시대...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리하여 일본 학자들의 연구로,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그래서~ 아시아 역사에서는 바로 이 <근세>라는 말도 종종 사용하기 시작했지.  물론 우리 한국사에서도 지금 사용하고 있구.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서양식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우리랑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당연히 서양애들이랑은 안 맞는게 너무 많겠지? 도대체, 서양의 고대 국가인 로마 제국이랑 데칼코마니처럼 완전 일치하는 우리 고대 국가가 어디 있겠냐구...

그리고 우리 나라 국사 교과서도 한번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잖아~~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있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도 (교과서에는 없지만) 설명해 놓은 것들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그거라도 보면서 이야기 해보자. 다음 이야기에서는 우리 역사에서의 근현대사는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도록 할꺼야. 

그런데, 이 점은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아. 여기서 시대구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는거... 기존의 모든 역사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시대 구분>을 해 놓고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어쩔 수 없이 시대 구분이라는 걸 다루는 것 뿐이지. 시대 구분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필요하면 원하는 대로 시대구분을 해 버려도 상관없거든. 자 그러면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어떻게 해 놓았는지.... 출발해볼까?

-  이 책을 참조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


북한학계의 한국근대사 논쟁 - 사회성격과 시대구분 문제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이병천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198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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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시대구분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차하순
출판 : 소화 199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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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보는 고대사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박노자
출판 : 한겨레출판 2010.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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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따라잡기 1 - 원시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개정판)
국내도서>아동
저자 : 송은명 엮음
출판 : 바른사 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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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문 1 - 원시시대
국내도서>아동
저자 : 역사신문편집위원회
출판 : 사계절 1995.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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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렇구나 우리역사 1 - 원시시대
국내도서>아동
저자 : 송호정
출판 : 여유당 2005.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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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국내도서>아동
저자 : 프랑수아즈샤팽 / 고선일역
출판 : 보물섬 200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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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세 거장
국내도서>청소년
저자 : 클라우디오 메를로 / 노성두역
출판 : 사계절 2003.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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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국내도서>아동
저자 : 김지혜
출판 : 푸른나무+(푸른나무플러스) 20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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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시오노 나나미(Nanami Shiono) / 김석희역
출판 : 한길사 200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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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퀴즈는 근대사 공부를 하기 전에 나의 기초 상식을 테스트 하는 퀴즈입니다.
개화기부터 1909년까지의 이야기들을 퀴즈로 엮어보았습니다.




테스트가 끝나면 나의 근대사(~1910) 상식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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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이야기 (1)

근현대사 이야기 프롤로그

- 시작하는 이야기 -

  한 사회가 유태인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유태인들이라는 이름은 유태인 스스로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지정해 준 이름이다. 이것이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진실이다. 식민지 사회에서 유태인들을 창조한 사람은 바로 반유대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 샤르트르, <반유대주의와 유태인> 에서, 샤르트르의 역설 -

자,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주제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랍니다..

한국근현대사라.... 역사 이야기 중에서는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이죠. 왜냐구요? 지금 정부는 역사교육보다 실용주의 교육을 더 중시하고 있어요. 대통령 취임사에서부터 <역사적>이란 말을 <실용적>으로 대체했는데, 휴.... 하지만,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서인지, 다시 <역사>라는 말을 슬며시 끼워넣기 하고 있네요.

에휴... 대체, 자국의 역사를 배우고 싶은 사람만 배우는 선택 과목으로 만드는 나라가 무슨 <역사의식>을 이야기하자는지 참 웃기네요. 그래놓고 문제가 커지자 다시 <국사는 필수과목>이라고 수습하고 있답니다.

이제 <한국사>는, 필수 과목이 될까요? 선택과목이 될까요? 아주 슬프면서도 흥미진진하군요.

암튼, 한국근현대사는 함부로 이야기 하기 힘든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어버렸답니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의 큰 이슈인 보수니, 진보니 하는 쌈박질이 이 문제를 결론 못내리고 있기 때문이죠. 또, 남북대립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보수니, 진보니 하는 사람들미다 너무나 생각이 다르거든요.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교과서를 좌파 교과서라면서 새로운 <우파 교과서>를 만들어 내질 않나요. 또 한국 근현대사를 민족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경제성장으로 보는 사람들이 백분 토론에 나와서 이백분동안 싸우질 않나요....

뭐, 결론없는 힘싸움 끝에 한가지 얻은 수확이라는 건, 어찌되었든 <한국사>를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는 거죠...

뭐, 그렇다고 지금부터 이념이나 특정 사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랍니다.  오히려, 역사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을 짬뽕시켜서 비빔밥을 만들어놓을꺼에요.

뭐, 읽는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서 알아서 해석하겠죠. 요즘 사람들이 <포스트모던>을 참 좋아하죠? 누가 무슨 의도로 글을 쓰던 건에, 알아서 자신만의 논리로 해석하는 <네티즌>들의 위대한 힘.... 그게 바로 철저한 포스트모던 정신 아니겠어요? 그게 좋다는 건 아니지만, 역사에서는 그런 것들도 필요하거든요.

하지만, 일단 큰 틀을 정해보죠. 내가 적으려는 한국근현대사 이야기는 <우리>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내가 쓰려는 건 <한국사>를 쓰려는 것이지, 교과서의 제목인 <국사>를 적으려는 것이 아니거든요.

<국사>라는 제목은, 세상의 중심을 <우리 나라>에 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쓰려는 <한국사>는, 미국사, 영국사, 중국사, 일본사와 같은 뜻으로 쓴 <한국사>랍니다. 다른 나라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역사 속의 이야기들과 <우리 역사>를 동등하게 쓰려는 것이죠.

에구구구... 그런데 말이죠. 우리 근현대사를 다른 역사와 동등하게 이야기 하려고 하니깐 문제가 생기는군요. 우리의 근현대사는 너무 너무 다른 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역사거든요.

뭐... 우리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대부분 국가들이 강대국, 보통 제국주의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에게 침략을 당한 일이 너무 많잖아요? 또, 서양 세력이 만든 문명을 근대문명이라고 생각한 아시아 국가도 많았구요..

자, 그래서.... 지금부터 이야기 할 우리 근현대사 이야기엔 세계사 이야기가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답니다. 또, 우리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중국 역사, 일본 역사라던가, 아시아 역사도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죠.

아까 이야기 했죠? 우리 역사지만, 이것저것 많은 재료를 넣어서 비빔밥을 만들겠다고 이야기 한거 말이죠. 근현대사를 우리의 역사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섞어서 다양하게 만들어보는 거죠.

자... 그런데 생각해봐요. 그렇다고 우리 역사를 <세계사> 속에 집어넣고, 세계사의 법칙 속에서 움직이는 역사로 만들어 버린다면, 그건 또 <세계사>가 되는 거지 한국사라고 보기 힘들겠죠?

그래서 중요한 건 말이죠. 독창적인 우리 이야기도 함께 넣어서 적절히 버무리는 일이랍니다. 또, 자칫하면 재미없을 수도 있는 역사 이야기를 딱딱하지 않게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기술도 중요하겠죠.

사실, 역사는 어떤 <법칙>을 찾는 학문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법칙보다 더 재미있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학문이죠. 사실 과거 어느 시대의 제도, 문화에 대한 딱딱한 이야기도 역사에서는 물론 중요하기 해요. 그런 이야기도 역사 흐름을 잡기 위해 많이 넣을 거구요.  

하지만, 어느 시대의 독특한 과거 속에서도 그 시대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면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런 사람들의 개성있는 생각들을 찾아봐야 재미도 있고, 교훈도 있는 <진정한 역사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할 역사 이야기에는 종종 어떤 시대를 살아간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이런 이야기를 왜 다루나 싶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이야기도 나올 거랍니다. 뭐, 여교사 등급제를 실시하자는 이런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룰지도 몰라요 ㅋㅋㅋ

뭐, 도시락 폭탄을 던지자는 이런 분도 특이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도 함께 생각해 볼 거랍니다. 맨 위에서 <샤르트르>가 한 말 기억하나요?

- 식민지 사회에서 유태인들을 창조한 이들은 바로 반유태주의자들이다. -

이런 이야기를 역사 속에서 함께 생각해보는 거죠. 먼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커다란 이야기들을 통해 한 시대의 특징을 이해하도록 할꺼에요. 하지만, 그건 이야기를 다루기 위한 시작일 뿐이죠. 그 속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따라갈 때 진짜 사람들이 살아간 인간의 역사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읽어갈 역사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들이랍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우리를 <조센징>으로 만들고, <근대인>으로 만들었으며, <단군의 후손>으로 만든 이들은 과연 누구였는지.... 자 양도 많고 깊게 들어가지만,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운 이런 이야기들을 읽는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지..... 너무나 포스트모던적인 된 우리들이 각자의 관점으로 생각해볼거랍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이야기는 어디서 끝내고 본격적으로 <근현대사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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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2011년부터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를 올린다고 했는데,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다 보니 1월도 벌써 다 끝나가네요... 2월부터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를 일정을 잡아서 올리겠습니다. 그럼 모두 즐거운 설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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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2010 하반기 역사 이야기

무슨 이야기들을 적어볼까?

2010 하반기에 올릴 글 목록들입니다.

매번 이것 저것 잡다한 것들을 올린다고 해놓고, 개인적인 일이나, 먹고사는 일 때문에 블로그 관리는 맨날 뒷전으로 밀리는군요 ㅋ

 - 하반기에 올려보려는 글들...

하반기에 짬짬히 올리려는 목록들입니다.

1. 가로세로 역사퀴즈 <한국근현대사 편>을 틈틈이 올리고 있답니다. 연말이면 완료될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시간날 때 열댓개씩 몰아서 만들고, 시간날 때 짬짬히 올리면 될 것 같네요.

2. 돈으로 보는 한국사 - 이건 빠른 시일내에 완료될 것 같습니다.

3. 금년에 꼭 정리하고픈 자료들이 <고려사 노트> 또는 <한국근현대사 노트> 였는데, 상반기에는 손도 못대고 있었네요. 정리해놓은 자료들은 있는데, 정리해서 업로드할 틈이 없었어요. 틈틈이 업로드 하렵니다.

4. 하나퀴즈, 매일퀴즈 처럼 틈틈이 올리던 퀴즈도 시간이 되면 올려볼 거랍니다.

5. 틈틈이 플래시로 만든 학습 동영상을 올릴 거랍니다. 연말이면 아마 2-3개쯤이나 될런지...

 - 도톨이와 새싹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글을 적어보았는데요. 어려운 문체로 적기도 하고, 매우 쉽게 써보기도 하고, 인터넷 용어로 적기도 하고, 경어체로 적기도 하고....

이제는 도톨이와 새싹이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만들 글들은 이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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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노트 (3)

한국 근대사로의 이행 - 외부적 요인

1. 외재적 요인과 내재적 발전론

자, 그럼 한국 근현대사 이야기를 전개해볼까나?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의 시작점은 2가지 이야기를 같이 다뤄야 해. 먼저, 일본에 의해 개항한 만큼 우리의 근대사는 일본이나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이 무지~ 크다는 <외부적 요인>을 이야기 해야 하지.

그런데, 이 <외부적 요인>은 의도적(?)으로 잘 다루고 있지 않아. 왜냐면, 우리 근대사가 일본의 침략적 행동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그게 근대화와 문명화의 원인이라는 것을 들춰내기엔 일본의 얄미운 발언(?)들이 좀 거슬리거든? 일본이 강제 점령한 긴긴~ 세월 동안 일본이 우리 역사를 바라보았던 관점을 한번 소설처럼 쭈욱~ 나열해 볼까?

조선애들이 무슨 단군이니 뭐니 시조를 말하는데, 호랑이랑 곰이 달래먹고 놀다가 인간이랑 결혼하는 게 말이 되냐? 일단 그건 뻥이니깐 패스~ 그러다 보면 결국 조선에서 말하는 조상신이니, 뭔 신이니 하는 건 다 일본 황국의 신을 베낀거 아냐? 결국 한반도 고대사에는 금속 시대도 없고, 석기시대, 신화시대만 있었던 거잖아? 뭐, 청동기도 없었고, 철기는 중국애들이 전파해 준거고... 한반도 남부는 우리 히미코(신공황후) 여제가 임나일본부 세워서 문명 전파좀 해주다가 발전한거구..

<단군이 뻥이면 이 인간은 어찌 되는 건가? 일본 극장 24부작 상영남인데... >

결국 한반도는 중국, 위만, 한사군, 일본 같은 외세 세력이 다 먹여 살린 거잖아? 결국 조선애들은 여진족한테 휘둘려, 거란한테 휘둘려, 몽골한테 굽신거려... 결국 얘들은 한반도에 갖혀서 역사의 주체로 나선 적이 한번도 없어. 결국 종주국인 중국을 모방만 하다가 발전도 못하고 당파싸움만 하던 애들이잖아.

그러니깐 우리 일본이 얼마나 고마워? 중세 수준의 한반도를 근대화시켜줬지. 철도 깔아주고, 문명 전파해줬지. 일본의 지배가 한반도의 복이야.. 복받은 거지 암....

   바로 이런 거다. 에도황국기원설, 일선동조론, 임나일본부설, 단군허구설, 만선사관, 반도사관, 사대주의국가론, 당파싸움론, 한반도 타율성론, 정체성론 등등 외우기도 지치게 이것절것 나열하는 일본 때문에 우리가 근대화의 <외부적 요인>을 말하기 껄끄러워 하는 거지.

일본이 워낙 헛소리를 나열해 두다 보니, 우리 교과서는 우리 근대사의 <내재적 요인>만 열심히 부르짖는거야.

일본 니들이 없었어도 우린 근대화 잘했고, 잘먹고 잘 살았을 건데, 니들이 와서 재 뿌린 거거든? 우리도 나름대로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이 있었고, 외국이랑 교류도 했었고... 암튼, 일본 니들이 빼았아간걸 생각해볼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근대화가 가능했다는 <내재적 요인>을 교과서에 폭발적으로 나열해놓고, 밑줄 쫙쫙 친 뒤 열심히 외워서 지금까지도 수능 기출 1순위~ 용꼬리 용용~ 돼지꼬리 땡땡~ 투스타 레이스~~ 하면서 별표를 2개, 3개 마구마구 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내재적 발전론>은 할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일단, 잘 다루지 않고, 껄끄러운 근대화의 <외재적 요인>을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외재적 요인을 이야기하려면 중국, 일본과 관련된 19세기 침략이야기까지 두루 나열해야 할 것 같아. <내재적 발전론>은 다음 장부터 시리즈로 쭈욱~ 고고~~

2. 첫 번째 <제국주의>가 배달되었어요 :  로드 암허스트호

지난 시간에 <제국주의>가 뭔지 자세히 이야기했었지? 자, 오늘 이야기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아시아에 와서 무슨 짓거리를 했고,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는 거야. 그럼 시작해 볼까?

니들은 신을 믿니? 내가 믿는 신은 말이야... 아프리카라는 땅을 온통 영국의 색으로 칠해도 된다고 인정한 신이야. 우리 영국이 믿는 하나님은, 영국인들을 위해 아프리카에 물건도 팔고, 돈도 벌 수 있게 인정해 주셨거든? 문제는 같은 신을 믿는 자들이 서로 땅을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거야. 결국 모두가 자신들의 지도를 색칠하기 위해 제국주의자가 되는 거지...

뭐, <세실로즈>라는 영국산 케이프타운 총독이 위와 같은 말을 나불거렸단다. 건방진 말 같지만, 이것이 바로 19세기 현실이었지.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 많은 영토와 자원을 차지하고, 더 많은 제품을 팔아서 온 지구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고 싶어 했으니깐...

<세실 존 로스>

이 아저씨는 유명한 사람이야. 원래 남아공에서 다이아몬드 캐던 사람인데, 사업 수완이 뛰어났지. 영국을 위해 사업서를 내고 광산을 독점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어. 그 후 케이트타운 식민지 정치를 좌지우지 하면서, 수상에 올랐고, 아프리카의 실세가 되었지. 영국이 전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믿은 아저씨였어. 하지만, 보어전쟁이 일어나자 수습하려고 뛰어다니다가 건강이 악화되서 전쟁 중에 죽고 말았어.

자, 그럼 동아시아에는 영국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꼼수로 접근하기 시작했을까?

기분 나쁜 이야기 같지만, 서구, 북미 열강들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고 싶은 나라 1순위는 <중국>이었어. 자원 많지, 인구 많지, 땅떵어리는 크지.... 뭐, 중국이랑 비교해보면, 조선이나 일본은 어따 써먹어? ㅋ

그리고, 유럽 애들도 19세기 중반까지, 아시아 끝에 있는 국가들을 일일이 신경쓸 처지도 못되었지. 뭐 굳이 이유를 나열하자면 이런 거야.

프랑스 : 저기, 루이 나폴레옹 때문에 재정 파탄 났구요. 겨우 7월 혁명으로 시민의 왕이라고 뽑아놓은 자식이 우리 상인들 선거권 안준다고 하네요. 우리 배 운전 안해유... 파업이랑께요.

독일 : 우리는 빈체제인가 뭣인가 그거 끝까지 사수하다가 혁명나고 뭐하고... 오스트리아랑 세트로 정신없거든? 19세기 중반부터 아시아 진출하려고 하긴 하는데, 될랑가 모르겠네. 또 뭔넘의 노동자들은 파업이 이렇게 많아? 사회주의자들 언제 청소한다냐...

미국 : 우린 카우보이들이 총들고 서쪽으로 뛰어다니기 바빠요. 요새 노예들도 말을 안들어서 조만간 남북전쟁이 터질거라고 하던데... 우리도 좀 여기저기 수습되면 그 때 진출할께요.

러시아 : 말도 마세요. 땅떵어리가 얼마나 큰지, 여기 저기 남하 정책을 다 해야 되는데... 유럽에 가면 영국애들이 시비걸지, 중국이랑도 청나라 때 국경 조약 맺어놓은게 있어서 당분간은 직접 부수러 가진 못하고, 때를 봐야죠.

이탈리아 : 저기... 통일한지 얼마 안되서 멀리는 못가요... 당분간 아프리카에서 놀아야 될 것 같거든요?

19세기 중반에, 유럽애들도 나름 사정이 있어서 <영국>을 제외하고는 좀 몸을 사리는 편이었거든. 그래서인지, 19세기 초반에 동아시아까지 와서 시비를 걸었던 나라는 영국 정도밖에 없었어. 그럼, 영국이 뭔 짓을 하고 다녔는지 살펴볼까나?

영국은 인도쪽을 점령한 뒤에 동아시아의 <중국 시장>을 노리고 있었지. 그리고, <1+1 행사>를 하듯이 덤으로 조선에도 와서 <장사하자!>라고 한번 외치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바로 1832년 <암허스트호의 통상요구>였지.

<로드 암허스트호>는 조선과 1:1 조약을 맺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였지. 말했잖아? <1+1 행사>에 걸리면 좋을 거 같아서 왔다고... 원래 동인도 회사의 상선이었는데, 동쪽에는 뭐가 있을까 하고 탐사를 한번 해본거지. 그래서 목적지를 중국에서 시작해 대만, 일본, 조선으로 잡아본거야.

<다른 지역이 너무 쉽다보니... 그 때는 조선도 너무 만만했니... 나중에 큰 코 다치지만...>

근데, 이넘의 배가 뭘 알고나 온건지... 하필이면 충청도에 있는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했지 뭐야. 간신히, 조선 국왕에게 편지를 전달해서 <통상 조약>을 맺자고는 했는데, 당시 세도정치를 하던 정부에서는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한마디를 했지.

미안한데, 중국 황제 허락 없이는 외국과 장사할 수 없거든요... 저기 편지랑 선물 다시 가져가세요~~~

뭐, 그랬답니다. 즉, 서양 국가들은 우리와 1:1의 동등한 관계에서 무역을 하지고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아직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국제질서의 핵심으로 이해했던거야. 19세기 중반까지, 우리는 영국의 통상체계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들은 우리를 중국의 부속품 국가쯤으로 여겨 무역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었지.

그리고 나서, 30년 넘게 당분간 서양의 통상 압력은 없었어... 어떤 나라가 커다란 중국 놔두고 조선에 신경쓰겠어?

자, 그럼 유럽애들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 다음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진행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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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 시대구분은 누가하는 거야?

한국 근현대사 낙서장 첫 이야기이다. 근데 말이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용어부터 맘에 걸리네. <근현대사>라니... 그럼 근대, 현대라는 건 뭐고, 누가 기준을 정한거야? 먼저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끄적거려보자.

뭐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사실 말이지.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 알지?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말야.

서양의 근대인들은,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그 시기는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웠잖아.

그런데,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신항로 개척이니 하면서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거야.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였지.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단다.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해 쳐먹은 거 많던데, 이게 야~ 대체, 교황이 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랑크 제랑 따먹고, 치자금 주고 이런 거래 다메? 료 다 았다.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을 좀 죽여놓아야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쓰실거에요. 교황불신 귀족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그 말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돼?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어 본 거야.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고대>라고 기준점을 잡고,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박살난 시대를 <중세>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로 파악한거지. 이 시대 구분법이 여러 서양의 역사 학자들을 거치면서 <현대>라는 살까지 더해서 4단계 시대구분법이 나왔어.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지. 뭐 19세기 이후에 서구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하긴 했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일본 : 되었네 이 사람아..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었고, 니네 발전이랑 조금 다른 면이 많거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안 맞는다. 우린 근대랑 현대 사이에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거든? 오..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하여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일단, 한국사 교과서부터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거든.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많으니, 그걸 참조로 근현대사가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자.

2. 한국 근대와 현대의 기준점

자, 그럼 한국사에서 근대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밝혀보자.

사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서양인들이 구분하는 기준과는 완전 달라. 서양애들의 근대 기준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시기야. 뭐,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가 기독교인들은, <돈 잘 벌어도 천국가유~>라고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는 말을 했다나 뭐래나... 또 로마제국의 울타리에서, 교황의 울타리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잡고 절대왕정이라는 걸 만든 것도 바로 이 <르네상스> 이후야.

아시아의 <근대 기준>은 사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언제 생겼냐는 거야. 근데, 아시아는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거나, 강제로 개항했잖아.

따라서 아시아의 <근대화>란, 거의 대부분 유럽인들이 협박~해서 강제로 <자본주의>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근대란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제적인 개방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서 <민족의 생존>을 생각하게 된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어.

뭐, 유럽과 좀 다른 점이라면, 걔네들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민족의 영광을 널리 알리려는 거고, 아시아인들은 꼴보기 싫은 유럽민족들이 식민지를 넓히자, <니들 짱난다~>면서 저항했던 민족주의라는 거 정도지.

자, 그럼 한국사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준이 감잡히지? 정치적으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립>이 바로 근대화의 기준인 거지.

그럼, 민족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대체 언제야? 이걸 가지고 많은 학자분들께서 싸웠는데, 뭐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거야.

18세기 주장파 : 일본이 안 쳐들어왔어도 우린 스스로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거든? 특히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파들 중에 <북학파> 있었잖아. 우리 민족이 강해지기 위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사람들. 특히, 조선후기에 영조, 정조 시기를 봐봐. 거의 서양의 루이 14세 안 부러울 도로 대군주잖아. 그 때 자본주의가 발달할 딱... 찬스였는데. 박지원의 양반전 보면 양반이 장사하는 방법도 나오구...

흥선대원군기 주장파 :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격파, 미국 격파하고 침략전쟁을 다 막았잖아요... 일본, 청나라 간섭도 다 막아 버리고... 그것만큼 민족적인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대원군기에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서울 등 근기지방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하잖아요?

강화도 조약 주장파 :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이거든? 그 조약으로 우리가 비로소 세계사에 눈뜨고, 자본주의가 먼지 경험하게 된 거잖아. 비록, 일본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조선이 개항하고 자본주의를 배운 건 1876년이야. 또, 일본 덕분에 외세에 저항하려는 <민족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갑오개혁 주장파 : 강화도 조약은 그냥 문서일 뿐이구요. 실제로, 양반, 싱민, 노비같은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건 1894년 갑오개혁 아닌가요?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죠. 솔직히 조선시대에 노비가 <우리는 같은 민족, 평등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겠냐구요.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정치, 사회 개혁이 선행되야 근대화든 뭐든 하죠. 그리고 갑오개혁 때 조세 개혁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국가권력이 성립된 거 아닌가요?

음... 다 조금씩 맞는 말인거 같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나 일반 서적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같다. 뭐... 강화도 조약을 챙기려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략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짜피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럼 현대의 기준은 어디지?

그건, 만장일치야.... 일본이 핵무기 꽝~ 하고 맞아서 망하고, 아시아 전체가 이 날만 되면 모두 모두 기념하고 행사를 치루는 1945년 8월 15일.... 즉 광복절 날이지.

현대가 되려면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국가의 발달>이나, <독점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거잖아. 뭐... 친일파의 국가라면 모를까.... 혹... 요즘 친일을 애국으로 바꿔주시는 뉴라이트 분들이라면 새로운 시대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ㅋㅋ

자, 그럼 재미없는 시대 구분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본격적인 근현대사 낙서에 돌입해보자. 그럼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입과 독자적 발전을 이루려 했던 조선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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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대한민국의 수립
 1) 모그크바 3국 외상 회의과 좌/우 대립
  미국,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라고 한다. 회의의 결과는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를 지원할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강대국들에 의한 5년 이내의 신탁 통치 실시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론을 통해 신탁 통치에 관련된 내용만이 부각되었다.(물론, 이를 부각시켜 선동한 언론은 조중동이다. 너무 당연한가?) 이에 좌익으로 대표되는 조선 공산당초기에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나, 후에 신탁 통치가 점진적으로 한반도 독립을 위한 길임을 깨닫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반면, 김구,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은 열렬하게 반탁을 지지하였으며, 후에 반탁 운동이 신문사 등을 통해 반소련, 반공산당 운동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2) 대한민국의 건국과 분단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협의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은 1차 미 / 소 공동 위원회를 만들고(1946. 3), 한반도 신탁에 대해 논의하였다. 소련은 신탁에 찬성한 세력(좌익)만을 참가할 것을 원했으며, 미국은 좌 / 우익의 모든 세력이 참가하길 바랐다( * 참고 :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소련과 미국 둘 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친소, 혹은 친미적 정권 탄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모든 세력의 참가를 원했다는 것이 결코, 우리나라를 위해서였다는 생각은 버리자. 근현대사에 나오는 외국인은 착할지 몰라도, 외국 국가 자체는 착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에 이른다. 이를 지켜본 (또라이 쌍 간나ㅋ)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의사를 어렴풋이 전하는 정읍 발언(1946. 6)하기도 하였다.
  분단은 한반도를 위한 것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에 중도 세력이었던 중도 좌익의 여운형과 중도 우익의 김규식이 손을 잡아 좌우 합장 운동(1946. 10)에 앞장서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김구, 이승만 등의 우익과 공산당 등의 좌익이 합작 운동의 불참하고, 여운형 마저 암살당하면서(* 여담 : 미스터리라지만, 이승만의 하수인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 이승만의 '데쓰노트'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고 만다.
  2차 미 / 소 공동위원회(1947. 4)에선 미국이 완전 결렬을 선언하면서, 해체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당시 미국의 입김이 강했던 UN으로 넘겼다. UN은 한반도 정부수립을 인구비례에 의거한 투표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남한 대 북한의 인구비율이 2 : 1정도 되는 상황에서, 소련에게 압도적으로 분리한 것이었으며, 소련과 북한은 총선거를 거부하였다. UN은 어쩔 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곳(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가 결의되었고(1948), 이는 분단의 시작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에 두 손을 들고 기뻐하였으나, 김구는 이에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좌익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들은 38선을 수없이 넘나들며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으나, 수구 우익은 이러한 김구 일행을 좌익으로 몰았으며, 김일성은 김구 일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또한 좌익을 비롯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무장 봉기하였다.(1948 제주 4.3사건) 이로 인해 제주도에서 선거가 이루어지기로 했던 3곳에서의 총선도 한 곳 밖에 하지 못하였으며, 행해지지 못했던 지역은 1년 후에나 선거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제주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남한 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김구나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과 중도계열의 인사들은 출마를 하지 않았으며, 출마한 것은 이승만,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에 불과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 참고 : 광복절과 정부수립일이 같은 것을 광복의 의미를 되세기기 위해 정부수립을 광복절에 맞춰서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지지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은 대다수를 차지했던 무소속과 한국 민주당과 손을 잡고 정책을 시행해갔다. 하지만, 이런 굳건하지 못한 동맹은 권력 분배과정에서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느슨해졌으며, 이승만은 이러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제주의 무장봉기를 제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시켰던 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하고자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일대를 점령하는 여수, 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Tip. 대한민국 건국 과정의 이해
이승만의 정읍발언 - 분단 조장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 - 통일 노력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 - 분단 조장
제주도 4.3 사건, 남북 협상 - 통일 노력
5.10 총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 분단
여수 순천 10.19 사건 - 통일 노력

31. 북한 정권의 수립
  실제로 북한이 수능에 나오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내가 선생님께 언뜻 듣기로는 여태까지 한 문제정도 출제되었다고 하는데ㅡ 교과서에서 할애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으나, 실질적으로 나오지 말라는 보장 역시 없기 때문에 일단은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시 가장 많이 부각되는 것은 광복 이후에 이루어진 남북한의 토지 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그것은 뒤에 팁으로 엮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광복 이후에 북한은 소련의 군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북한은 그 나름대로의 자치 활동이 가능하였는데, 1946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발족시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과, 친일파 숙청을 단행하였다. 북한에 남아있던 주요 공장(즉, 일제가 남기고간 군수공장 따위)들이 이 때 국유화 되었다. 하지만, 분배된 토지는 사유재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으로,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가 도입되지 않았음을 유의하자.
  이후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여 사회주의 계열을 통합하였으며,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위원회를 개최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이념을 지닌 두 개의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즉 분단되었다.)

Tip. 남한과 북한의 광복 후 정책 비교
 1)토지 개혁 :
  남한(1949, 농지 개혁법, 유상몰수 유상분배)
  북한(1946, 무상몰수 무상분배)
 2) 친일파 청산
  남한(1948, 반민족 행위 처벌법 재정) -> 실패
  북한(1946) -> 성공

32. 좌절된 친일파 청산
  나름 잘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특히나 요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대중 매체에서 보도되므로, 출제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 같다.(물론, 간도나 독도 문제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다.) * 참고 : 이명박 정부에 들어보면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주제 중의 하나. 이명박에겐 청념이니 과거사 청산이니 하는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전에 다루었던 것처럼, 미군정 시기에 미군정이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친일파 청산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부를 수립한 남한은 미군정 때 제쳐두었던 친일파 청산을 해야만 했다. 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재정하여, 반민족 행위를 했던 사람에 한정하여 법의 불소급 법칙을 깨고, 친일 행각을 소급하여 따지기로 하였다.(법과 사회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원래는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행했던 범법행위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친일파에 한해선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제정된 법에 의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반민족 행위 특별 검찰부, 반민족 행위 특별 재판부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과거에 걸출한 친일행위를 했던 이광수, 최남선 등의 친일파를 체포, 조사하였으나, 과거 친일 행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친일 경찰)에게 위원회 건물이 파괴 되는 등 실질적인 조사와 같은 위원회의 활약이 많이 제한되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단단하지 않아 친일파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대해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반공 우선 정책을 핑계 삼아 친일인사를 다시 등용하고,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면서(1949. 8. 국회 프락치 사건), 조사 위원회의 의원들이 전원 사퇴를 결의하였다. 결국 반민족 행위 처벌법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와 더불어 친일파 청산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사료1) 미군정의 포고문
 제2조 정부, 공공 단체 및 기타의 명예 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사료2) 이승만의 특별 담화문(반민 특위 해산 관련)
 반민 특위 사업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가장 심했던 자만 처단하고 나머지는 관대히 할 것이 인정을 펴고 인심을 수습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벌하려는 것이 아니요, 반민족 정신인 죄를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니 이 정도의 처단으로 족히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38도선이 그대로 있고 시국이 혼란하고 인재가 부족한 이 때에 반민족 행위 처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33. 토지개혁
  보기와 문제, 답지로 많이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다. 사실 배우는 것은 현대사 부분에서 배우게 되지만, 문제가 나올 때는 동학 농민 운동(아... 왠지 내가 생각해도 까마득하다)과 더불어 오답의 답지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따위로.) 속지 말도록 하자.
  북한은 이미 1946년에 토지 개혁을 단행한 바가 있다. 하지만, 남한 같은 경우는 북한에 비해 뒤늦게 행해졌다. 사실, 정부가 주체적으로 개혁하였다기보다는, 북한의 토지 개혁을 지켜본 민중이 지속적으로 정부에 토지개혁을 요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한의 토지 개혁은 기본적으로 유상매입, 유상분배이다. 즉, 3정보 이내의 소유 규정을 넘어간 토지들을 국가에서 사들여, 농민에게 돈을 받고 분배하는 것이다. 이 때 농민은, 농지 대금을 평년작의 1.5배로 지불하게 되는데, 일시불이 아닌, 5년간 분할 납부하는 것이다.(* 참고 : 말이 어렵게 된 것 같은데, 토지의 가격은, 그 토지에서 1년 동안 수확할 수 있는 값어치의 1.5배라는 것이고, 그 땅을 사들인 농민은 전에 그 땅을 가지고 있었던 지주에게, 토지 가격을 5년간 분할하여 낸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자영농이 증가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지주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농민들 같은 경우에 농지 대금을 다 갚지 못하여, 다시 땅을 팔고 소작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토지개혁 중간에 6.25전쟁이 끼는 등 개혁이 시간을 끌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미 대다수의 지주는 몰수될 땅을 미리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또한, 지대의 분할 상환은 농민뿐만 아니라, 영세한 중소 지주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고, 중소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면서 정부가 발행하였던 지가 증권을 헐값에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후에 정부는 이러한 지가 증권을 많이 소유한 지주에게 일본이 남겨두었던 공장들을 분배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성장한 기업이 오늘날의 삼성 등이다.
  탈 많았던 과정 중에서도 의의를 찾자면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농민들이 그토록 주장하였던 토지 개혁이 이 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농민이 땅을 갖는(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확립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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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에 의해 빼앗긴 빛을 되찾아왔다. 광복과 독립, 우리 민족이 약 34년 동안 갈망해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사의 역사 구분에 의거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를 근대사(近代史)로, 8. 15 광복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현대사(現代史)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편의를 위한 구별이며, 단순히 딱, 하고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8.14은 근대이고, 8.15는 현대로,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사적 특징에 해당하는 민중의식의 성장 등은 이미 근대 후반에 나타나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Tip : 역사는 흐르는 것으로 칼로 무를 자르듯이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한 유명한 중국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는 연대표에 '/' 대신 '~' 으로 연대를 구분했다고 한다.

29. 대표적인 건국 준비 운동의 성향과 건국 구상
  광복 이전부터 여러 독립운동 단체나 임시정부 등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질 나라에 대해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하 노력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단체들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김두봉의 조선 독립 동맹, 그리고 국내에서 여운형 등이 결성한 조선 건국 동맹들을 꼽아볼 수 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위기를 구한 김구가 결성한 1940년에 결성한 한국 독립당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국 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1941)하고, 이듬해인 1942년 나머지 조선 민족 혁명당의 군대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가담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앞서 설명하였다.(* Tip : 무장독립투쟁 참고)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보통 선거(정치적 평등),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경제적 균등), 의무 교육(교육적 균등)을 주장하였다.

 2) 조선 독립 동맹
  중국 국민당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북상하여 화북지방에 있던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어서 조선청년연합회를 근본으로 화북에서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의 산하 군대인 조선 의용군(1942)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공화정)을 수립하고, 일제가 관리했던 재산과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관리하며(국유화), (하루) 8시간 노동제, 의무 ․ 무상 교육을 주장하였다.

 3) 조선 건국 동맹
  조선 건국 동맹은 국내에서 여운형이 결성하였다(1944).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재빠른 활동이 가능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하여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일제의 망령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해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 참고 : 사회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독재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과도기로 인식한다.)
  이들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이러한 자주적 건국을 위한 노력에 미군정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또한 지도부가 좌익 중심으로 선출됨에 따라 대다수의 우익인사는 단체를 떠나기도 하였다.

Tip. 건국 준비 주요 단체 주장의 공통점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제 정부 수립
주요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료1)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2.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여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 아동 전부의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 선거 제도가 구석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이하 생략)
  6.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 정책을 집행함.
   가. 대생산 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 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城市), 공업 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혹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함.

(사료2)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선언과 강령
  (전략) 조선 전 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 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이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30. 광복과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1) 광복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 전부터 많은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일제로부터 독립을 여러 차례 협의한 바가 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최초로 거론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그 의견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독립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자주적인 방법(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광복에 대하 수동적인 입장이 될 것이라던 김구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견해는 후에 미 군정기에도 맞아떨이지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무수한 노력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의 조선 건국 동맹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되어 자체적으로 질서유지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이 광복 이후에도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구실로, 소련과 협의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을 제안하였고, 소련도 이를 승락하였다. 이는 훗날 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2)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각각 점령하게 된 미국과 소련은 군정(軍政)을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판이하게 다른 통치양상을 보였다.
  우선 남한에 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일체 부정하였다.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한 조선 인민 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미국은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열의 인사들은 정부단체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면, 미군정은 앞서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였던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여, 온갖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 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겪고 있는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에 불씨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친미파로 변모한 친일 인사들(친일 기업가, 지주 : 송진우, 김성수 등) 등으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을 지원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남한에는 우익세력 이었던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들을 무시당하였다. 특히 조선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으로 개편 등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하였다(고는 하지만, 거의 식민통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직속기관인 ‘신한회사’를 만들어, 그동안 일본인에게 소유되었던 재산을 관리하였다.( * 참고 :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한회사는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던 토지들을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1/3의 값싼 소작료에 지급하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과 소작료의 추가 인하, 그리고 금납제를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갈등은 겪었다.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 등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 시장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상인과 지주들에 의해 매점매석으로 인해 미곡과 물가가 폭등하였다. 후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여 쌀을 거둬들이려고 하였으나, 춘궁기에 생산비도 안떨어지는 허접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인다는 그들의 방침은 농민들과의 갈등을 커져만 갔다.
  또한 실업자의 증가 등의 문제로 미군정의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9월 미군정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대구 등 여러 민중 봉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쌀 공출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 토지 개혁, 미군정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군정은 미군정에 비해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것은 아니여서, 조만식 등이 있던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해야만 했다. 대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결성(1946)하고, 이 인민 위원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할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정기에도 많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었다. 이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 반대를 하였던 유산가 계층은 남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무상분배 된 토지는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요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였으며, 남녀 평등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북한은 이 무렵 친일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Tip. 정치 양상
좌익 : 박헌영, 김일성
중도 좌익 : 여운형, 김원봉
중도 우익 : 김규식, 안재홍
우익 : 이승만,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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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권 피탈
과정 : 조약의 순서, 내용 등을 알아두자.


1) 한일 의정서(1904)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군용지 조차를 요구하였고, 정부는 이에 응하면서 일본의 합법적인 토지 약탈을 허용하게 된다. 

2) 제 1차 한일 협약(1904)
 
  일본은 이 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내정에 고문을 파견하여 관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외교고문으로는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과 경제고문인 메가타가 이 때 파견되었다. 

3)
을사조약(1905)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영향을 미칠만한 서구 열강(영, 미 등)과 사전에 협약을 마치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을사조약이라 하겠다. 을사조약의 주된 내용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대한 간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제 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조선의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요,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 2조 
 (전략)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격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않기를 서로 약속함. 

제 3조
 
 (전략)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한 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경성에 주재하고..... (후략)

  이에 우리 민족은
의병활동(을사의병)을 통해 저항하였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訪聲大哭)」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다. 민영환 또한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써놓고 자결하였다.
 

4) 한일 신협약(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밀비로 일본은 한일 신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에 있던 일본의 통감부의 기능이 입법, 사법, 행정 전반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문제를 폐지시키고, 조선의 중요직 등은 통감부가 일본인들을 추천하여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각 부의 차관들이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를 '차관정치'라 한다. 그리고 군대 마저 해산시킨 것도 이 조약의 핵심 중 하나이다. 

제1조 대한 제국은 시설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대한 제국의 법령 제정 및 주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4조 대한제국의 고등 관리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대한 제국은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할 것 

 이후 일본은 기유각서(1909, 사법권 박탈), 6월 각서(1910, 경찰권 박탈) 등을 통해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었다.
 

5) 당시의 국제 정세
   
  가쓰라-테프트 밀약(미-일, 1905.7)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 또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

                 ↓

  제2차 영일동맹(영-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

  포츠머스 조약(러-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조선 내의 러시아 이권을 전부 일본에게 양도

  (러일 전쟁 이후, 제2차 영일동맹 이후)

                 ↓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조-일, 1905. 11)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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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국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과거 개화파였던 사람들의 이념을 계승, 발전 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주로 교육과 산업, 언론 활동 등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실력을 양성하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정치단체이지 애국계몽단체로 분류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애국 계몽단체는 아래와 같다

1) 보안회(1904) :
  일본이 러일전쟁 때 군용지 조차, 철도 부설 등의 구실을 내세우고, 오랜 전통이었던 개간을 통한 경작권(耕作權 : 농사지을 권리, 실질적으로는 소유권)을 획득하려 하자,
농광회사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보안회의 농광회사는 몇몇 안되는 성공사례이니 꼭 알아두자.


 2) 헌정연구회(1905) -> 대한 자강회(1906) -> 대한 협회(1907)

헌정(憲政), 즉 헌법정치를 주장한 단체다. 고종이 살아있었음으로 그 때 당시의 헌법정치는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헌법을 통한 국민의 민권 확대를 주장하였다. 헌정연구회는 대한 자강회로 이어졌다.

대한 자강회는 고종 강제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통감부의 강제로 해산되었가 대한협회로 다시금 계승되었다.


 3) 신민회(1907 ~ 1911)

안창호, 양기탁 등이 평안도 중심으로 조직한 공화정을 처음으로 주장한 조직이다. 아무래도 그 때 당시에도 고종은 건재했고, 순종 또한 왕위를 이어받은 상황이었음으로 공화정을 주장한다는 것은 대한제국으로부터도 곱지 않은 눈길을 사게 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비밀결사로 활동했다고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퍼져 상당한 규모의 단체에 이르르게 된다. 그들은 여타 애국단체와 같이 태극서(점(書店))관, (도)자기회사 등의 회사를 경영하였고, 대성, 오산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민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타 애국 계몽단체와는 달리 무장독립투쟁에도 상당히 호의적이어서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의병활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신민회는 1911년, 안중근의 사촌형제였던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일본경찰에게 잡혔고(안악사건), 일본은 조작된 총독 암살을 조작하여 평양도에 있던 배일(일본을 배척하는) 지식인들 105인을 잡아들이게 된다(105인 사건). 공교롭게도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민회의 멤버였고, 더 이상 비밀결사의 의미가 없어지자 해산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해산하였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독립군 기지 건설은 엄격히 말하자면 전(前) 신민회 멤버들이 했다는 것이지 신민회가 직접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하겠다.


14. 일본과 청의 경제 침탈

 1) 무역

  개항 직후의 무역은 크게 3분기로 나눌 수 있다. 개항(18760),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이 그것이다.


 가) 개항(1876), 시장점유정도 : 일 > 청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개항시킨 일본은 우선 경제적인 침략부터 시작하였다. 개항 직후에는 일본인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개항장 주변 10리로 제한(거류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개항장 주변에서의 경제적 침략이 두드러졌다. 그 당시 일본의 공업이라는 것도 한심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로 영국산 면제품 따위를 상하이, 홍콩 등에서 영국상인들에게부터 구입하여 국내 시장에 중계하여 팔아넘겼다.(중계무역) 하지만, 일본인들의 활동범위는 거류지로 제한되어 있음으로 일본상인들이 사들인 영국 면제품들은 토착 상인(여각, 객주, 보부상) 등을 통해 국내에 널리 유통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 - 여각, 객주, 보부상 - 조선인 소비자'의 형태를 중계무역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서 말한 '영 - 일 - 조선', 이러한 형태를 일본이 중계무역 했다고 하는 것이다. 수입품은 면제품이었음으로, 우리나라의 면화생산, 가내 수공업등은 큰 타격입게 된다.
( * 주의 : 지주는 개항이 되었어도 수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거류지의 일본인들은 고리대나 선대제(혹은 입도선매(立稻先賣 : 곡물 따위가 논에 서있(立)을 때 미리 사들임)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쌀을 사갔다. 이러한 형태를 '약탈적 무역' 이라 한다.

   

나) 임오군란(1882), 시장점유도 : 일 ≒ 청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인해 청나라 상인들의 내지(內地, 조선 내지) 통상이 가능해지자, 중간과정인 객주, 여각, 보부상 따위를 거쳐갈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객주, 보부상, 여각과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상인들은 차차 몰락하게 되거나 그들끼리 힘을 합쳐 근대적 상인으로 도약하게 된다.(황국협회 -> 공진회 -> 황국중앙총상회(1898) 등) 청 상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상인들까지도 내지 통상권을 얻게 되는데, 이후로는 청 상인과 일본 상인들의 본격적인 대결구도가 성립되게 된다.

   참고로 황국중앙총상회가 거의 10년 뒤에나 생기게 된 것은 민중의식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 청일전쟁(1894) 이후, 시정점유도 : 일본 독점

청일 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는 상인들의 대립에도 영향을 끼쳤다. 종이 호랑이임 드러나게된 청나라와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에서의 입지가 곤란하게 되어 물러갔다. 삼국간섭에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는 일본이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때부터 거의 일본의 지배는 굳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 수출입 경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항 이후에는 산업혁명의 상징인 대량의 면제품이 일본상인들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쌀, 콩, 쇠가죽과 같은 원자재(1차 산업에서 얻어진 결과물)을 수출하게 되는데, 개항 직후 같은 경우는 쇠가죽의 수출량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점점 일본이 산업화에 성공해 감에 따라, 수출에 있어서도 일본 자국의 면제품의 비율을 높이고, 영국산 면제품의 비율을 점점 줄여간다. 당시 산업사회로 거듭나고 있던 일본은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폈으며, 그러므로 인해 리나라에서 사가는 쌀의 양도 개항 직후와 비교하여 압도적인 차이를 나타내었다.(수출량의 50%, 혹은 그 이상정도.)


2) 이권침탈

이권 침탈은 아관 파천 이후 최혜국 대우 조항의 악용으로 가속화 되었다. 주로 눈여겨 볼 것은 철도, 산림 채벌권, 광산 채굴권 등이 있는데, 철도 같은 경우 철도 부설권을 맨 처음 누가 얻었던 간에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고, 산림 채벌권러시아의 독점으로,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등의 산림을 채벌할 수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자, 포츠머스 강화조약(조선에서의 모든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하고, 신경 끄기로 함.)에서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광산 같은 경우 '노다지'로 유명한 운산 광산 정도를 미국이 관리였다는 것만 알아두면 될 것 같다.


3) 토지 약탈

토지약탈 역시 무역처럼 개항 직후, 청일전쟁 후, 러일 전쟁 기간 3분기로 나눠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개항 직후는 거류지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므로, 거류지 안에 있는 조선인들을 상대로 하여 고리대를 하여, 그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땅이나 집 등을 빼앗아갔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거류지 제한도 없어지고 라이벌이었던 청을 몰아냈음으로 최대의 곡창지역이었던 전주, 나주, 군산 일대에 대규모의 농장을 손쉽게 경영할 수있었다. 러일전쟁 기간에는 철도 부지와 군용지(軍用地, 한일의정서(1904) 내용 中)를 명으로 대규모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4) 화폐 정리 사업(1905, 2006 수능)

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가 시작됨으로써, 일본인 제정 고문 메가타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이 외교고문으로 일본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제정 고문인 메가타는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와 유통 구조가 구시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면서 화폐와 화폐의 유통을근대화 시킨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 사업을 시작하였다.(1905) 화폐정리사업은 당시 유통되고 있던 조선의 상태를 고려하여 백동화를 제일(Not 現 제일, 일본 은행) 은행권으로 교환하였는데, 대부분의 백동화가 상태가 좋지 않다(이른바 악화, 惡貨)는 구실로 교환을 주지 않아, 실질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제일은행권(이른바 양화, 良貨)이 귀해지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2006 수능). 그와 함께 국내 은행과 각종 민간 회사 등이 모두 도산하기도 하으며 우리나라가 발권력(돈을 뽑아내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경제적인 예속이 심화되었다.


Tip. 고문들

 1.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왔던 고문

  1) 마진창 : 청인

  2) 묄렌도르프 : 청이 파견한 독일인. 외교고문. 후에 한러 통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 한일협약(1904)

  1) 메가타 : 일본인, 화폐정리사업

  2) 스티븐슨 : 친일 미국인. 끝내 전명훈, 장일환 의사에 의해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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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항일 의병 전쟁

항일 의병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특징과 유명했던 의병장들은 꼭 알아두자. 또한 EBS나 여러 모의고사 중에 활빈당 관련 지문이 나온 적도 있으니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을미 의병(1896.1)

 을미 사변과 단별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주로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유인석, 이소응과 같은 의병장들이 대표적이다. 아관 파천(1896) 때 고종의 해산권고로 해산하였다.


2) 활빈당

 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 의병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의병이 해체되고 난 뒤에 별도로 조직한 조직이다. 이미 양반 유생들은 고종의 해산권고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농민들로만 구성된 단체였다. 주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격이며, 반외세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 을사 의병(1905)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을사 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하자, 이에 항의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 의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반 의병장(최익현)을 비롯하여,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평민들 역시 의병단체를 만들어 항일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4) 정미 의병(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제가 알아차린 이후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자 민중들의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군대 마저 해산하여, 해산된 군대가 무기 등을 가지고 의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의병은 보다 조직적인 작전 전개가 가능하였으며 화력적인 면에서도 눈에 띄는 증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이 극에 달했을 무렵,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실행(1908)하지만, 당시 지위를 맡고 있던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하자, 부친상을 치루고 오겠다며 이인영이 떠나버리자 뜬구름처럼 흐지부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5) 남한 대토벌 작전(1909)

 일본는 남한 지방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의병들을 탄압하였다. 대다수의 의병장들과 의병부대가 이 때 일제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등 의병활동은 시련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실질적인 의병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의병장들의 대다수가 북쪽으로 향해 만주 등에 거주하면서 게릴라적인 소규모 부대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6) 의병 운동의 의의와 한계

 의병 투쟁은 1920년대부터 주를 이루게 되는 무장 독립투쟁으로의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반면, 의병 운동은 주로 그동안 지식층인 유생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행하여졌으며, 그로 인해 봉건적인 계층 구조, 명분에 대해 탈피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의병장들 대부분은 거의 유생이었으며, 그들은 신돌석과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거의 무시하다 싶이 하였다. 또한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을 담당했던 이인영 역시 명분에 의해 행동하였으며, 그 결과 의병 활동에 어려움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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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문도 사건과 중립화론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고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당시 청의 외교고문이었던 뭴렌도르프와 러시아 외교고문으로 친러파를 양성하고 있었던 베베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하게된다.(1884)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함경도 경흥을 조차지로 요구하고 정부는 그것을 승락하게 된다. 이로써 러시아의 오랜 바람이었던 부동항의 확보는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러시아를 늘 주시하고 있던 영국의 눈이 뒤집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에 이른다.(거문도 점령 사건, 1885 ~ 1888)
  이에 부들러와 유길준 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중립화론을 내세웠으나 스위스와 같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하는 큰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들이 서로 보전하는 정략될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같은 아시아에 관계 있는 여러 나라들과 화합하고 우리나라를 참석시켜 같이 중립 조약을 체결토록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익도 될 것이고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 것이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ㅡ 유길준, 「중립화론」

 


11.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 을미 개혁

 악명높고 출제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순서, 주체, 개혁 내용들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하자.
 

  1) 동학
 
동학은 1860년 서학에 반발하여 최제우가 유불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민간 신앙과 통합하면서 생겨나게된 종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학(西學)에 반대하였다하여 그 이름도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사해 평등주의와 '사람은 곧 한울'이라는 구호 아래 남녀노소의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 입장을 가진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과 백성을 혼란캐(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였으므로, 1863년 최제우는 처형당했고, 동학교도들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평민들에게 있어서 동학이 내세운 평등 사상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었기에 몰래몰래 믿어나가다 정부의 탄압이 많이 줄어들었을 무렵, 전에 처형당한 교주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집회를 벌였다.(삼례 집회, 교조신원운동, 1892) 이는 종교적인 집회라 하겠다.
  이듬해 동학교도 이외에도 많은 농민들이 참여한 보은 집회에선 '보국 안민(保國安民,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편한캐 함)', '제폭 구민(除暴求民, 폭정을 없애고, 민중을 구함)' 등의 구호를 내걸며 지극히 사회 개혁적, 정치적인 집회로 바뀌어 나갔다.

 2) 1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황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ㅡ 전봉준의 격문
 

1894년 1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이라고도 불리우는 동학농민운동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당하고 가혹한 수탈(만세보 등)에 항거하여 전봉준 등이 항거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전몽준 등에게 돌리자 분노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1894년 3월 남접의 강경한 동학교도(비교적 남쪽이라는 것이다. 호남 등의)들이 운동을 일으켰다. 1월 고부 민란의 정봉준 등의 지도부를 온건히 계승하여 반봉건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한양을 향하지 않고, 세력확장을 위해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황토현, 완산을 거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교도들이 전주 이씨 종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자, 당황한 정부는(당시 왕들이 전주 이씨였으므로) 청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없던 그들은 출병하게 된다. 그에 따라 1884년 갑신 정변 이후 일본은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남자어린이의 날, 코이노보리 등에 두발 뻗고 잘만 놀고 있던 일본군은 청군이 출발한 다음날인 5월 6일에 출정하게 된다. 청과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정봉준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와 크게 빗나가자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고, 폐정 개혁안을 발표하여 그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 갓은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개가(改家)를 허용한다

 => 5, 6, 7 반봉건적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수취제도 문란

 9. 관리 채용에는 지벌(地閥 ; 지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倭)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반일적 성격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 토지 제도 개혁 요구

ㅡ 폐정 개혁안 12조

3) 갑오 개혁, 2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을미 개혁(1895)
  그렇게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막을 내리고 정부는 정치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체적으로 교정청을 설치한다. 하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둘러싸고 교정청을 폐지할 것을 협박하였다. (일본 경복궁 포위)
  동학 농민 운동이 자체적으로 끝이 나고, 조선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 일 양군은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전쟁이 나기에 이른다. (1894. 6. 23. 청일전쟁)
  이윽고 일본은 교정청을 폐지시키고 군국기무처를 설치시켜 개혁을 단행하도록 한다. (1894. 6. 25. 1차 김홍집 내각, 1차 갑오개혁)
  하지만 당시 일본은 청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간섭도 적어 주체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그러하여 10년 전의 갑신정변의 내용이나 동학교도들의 요구가 대다수 반영된 개혁이기도 했다.


 1. 이후 국내외 공사(公私)문서에 개국 기원( = 단기)를 사용한다.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 신분제 폐지, 동학 농민군의 요구 반영

 4. 죄인 자신 이외의 일체의 연좌율(連座律)을 폐지한다.

 6.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7.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8.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 1.2.4.6.7.8 봉건적 악습철폐

18, 퇴직 관리의 상업 활동은 자유 의사에 맡긴다.

20.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ㅡ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법령


  나름대로의 개혁은 성사되었지만, 한반도는 남의 나라(청, 일)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에 동학교와 농민들은 다시 한번 반외세의 깃발하에 모두 모여(남+북접) 운동을 일으켰다.(척왜양창이)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힘을 잃고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만다.

  같은 11월, 갑신 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을 빽으로 삼아 돌아왔다. 김홍집 - 박영효의 온건 - 급진 연립 내각(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영효가 2차 갑오 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입김이 어느정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튼, 2차 갑오개혁에서는 헌법적 법률인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 교육입국조서(2005 수능) 등을 발표하였다.


 

 1. 청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기초를 확고히 세울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과 종실, 외척의 구별을 밝힐 것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혼합하지 아니할 것

  => 왕권 약화, 내각 중심(입헌 군주제가 아니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할 것

 6. 인민에 대한 조세 징수는 법령으로 정하여 명목을 덧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이 관할할 것

10. 지방 관세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할 것 => 사법권 분리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하는 법을 사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가 군제 개혁하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1895년 4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자(삼국 간섭) 12월,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러한 강한 모습을 보고 민씨정권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청을 저버리고 친러파가 되었고 7월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친러적인 내각을 구성하였다.(3차 김홍집 내각) 이에, 일본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러파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명성황후를 낭인들을 통해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우게 된다.(4차 김홍집 친일내각, 을미개혁 : 연호(건양) 제정, 친위대(서울), 진위대(지방) 설치, 태양력 사용, 단발령) 

 4) 동학 농민 운동(1894)의 의의와 한계
  동학 농민운동은 대내적으로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어 사회체제에 항거하고 갑오 개혁 때 그 뜻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외세적 성격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해 미완의 운동으로 끝맺은 안타까운 '운동'이기도 하다. 

 5) 갑오(1894) 을미(1895) 개혁에 대한 평가

  온건개화파 중심으로 정부의 주체적인 근대 개혁이라는 것과 앞서 갑신 정변의 급진개화파나 동학농민운동의 농민층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권력을 가진 소수층의 위에서부터의 개혁이었고, 토지 개혁도 하지않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강요 속에 이루어졌다는 씁쓸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6) 개화 운동의 비교
  공통점 : 신분제 폐지, 인재의 고른 등용, 조세제도 개혁
  차이점 : 재정의 일원화, 반청적 경향(갑신정변, 갑오개혁) 
              토지제도 개혁, 반일적(동학 농민운동)


 7) 아관파천(1896)

  을미개혁엔 태양력과 특히 단발령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종을 필두로하여 머리를 잘리고 그 이하의 양반 유생, 평민을 비롯하여 남자들의 상투를 잘리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1896년 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 보초가 경복궁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고종은 조선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독살에 대한 히스테릭으로 일절 가공품은 입에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오로지 허기를 달랬던 것은 서양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던 캔으로 포장된 연유 까먹는 것과 생 달걀을 직접 깨뜨려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다 그는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결정한다.(1896, 아관파천)
  갑작스럽게 러시아 공사관 창문을 통해 나타난 고종은 을미개혁(특히 단발령)의 무효를 선포하고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자 의병들은 해산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몇몇 이권을 러시아 공사에게 넘기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 최혜국에 관련된 모든 국가가 이권을 빼앗아 가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인 침해를 입기도 하였다.


 8) 독립협회(1896 ~ 1898)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갑신 정변의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그 역시 급진 개화파에 속했다. 그는 갑오 개혁이 위로부터의 좁은 개혁임을 반성하고 독립협회(1896 ~ 1898)를 조직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유인권 및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고 만민 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들의 의식을 높이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폐쇄 등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그 대상은 러시아에 한정되었을 뿐, 미국, 일본 등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역시나 급진 개화파 출신답게 입헌 군주제의 전신격인 중추원 관제(의회 기능정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뒤에 나올 광무개혁 이후, 황제제일을 주장하는 광무정권과 정치적인 마찰(경제, 사회적인 마찰은 없었다.)을 이루어 황국협회와의 패싸움을 구실로 해산하게 된다.


 9) 광무개혁(1897)

  드디어 1년의 고요 끝에 그가 돌아왔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아이돌이 컴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무백관과 독립협회의 간청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고종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의 잔재라고 한다.)으로 러시아 공사관의 바로 건너편이다.(언제든지 도망가기 쉽도록. 전에 경복궁 포위 때 호되게 고생한 고종이기에;;) 환궁한 고종은 원구단(* 참고 : 환구단이라고도 한다. '원구단'도 일본의 잔재라는데.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황제로 즉위한 곳이니 '환구단'이 맞는 말인 것 같다.)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Tip  : 인기만화 「궁(宮)」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도서기와 비슷한 입장이다.)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황제의 전제적인 권한(정치적인 면)만 제외하면 모두 근대지향적인 (경제, 사회)개혁이었다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선 안정적인 조세를 걷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했고, 지계(地契 : 땅문서)를 발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근대적 공장과 회사 등도 이 개혁 때 생긴 것이다. 교통, 통신, 의료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교육입국조서와 같이 고종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각종 실업, 기술 학교를 세우고, 유학생도 파견하였다.
  갑오 을미 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한만 광무개혁이었지만 역시 황제의 유일한 권한만을 강조하였음으로 복고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가 가장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한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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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오군란(1882)
  임오 군란은 표면상으로 본다면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반발에서 빚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화 이전부터 계속 되어오던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의 하나의 표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구식군인 : 당신(대원군)이 집권할 때는 이런 일(차별 대우)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흥선대원군 : 그럼 내가 다 책임질테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위와 같은 뒷이야기가 있는걸 보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구식 군인과 별기군의 대립과 더불어 그들 배후에 있는 흥선대원군과 민씨정권의 간접적인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사실 임오군란 자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나라의 군대가 지금의 용산에 주둔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1882)했다는 것이다. 청나라 군대가 국내에 주둔하게 되고 청이 고문을 파견하였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내지 통상권과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화되었다.   반면 임오군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어 제물포까지 불이나케 꽁무니를 빼버린 일본을 또 우리 정부가 열나게 제물포까지 쫓아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인들의 자위를 위한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게 된다. (제물포 조약, 1882)


9. 갑신 정변(1884)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의 등에 올라타 권세를 누리게 된 명성황후는 개혁을 중단하고 보수화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반을 회수해가고(라도 해도 아직도 서울엔 1500명 가량의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은 보수정권을 타도하고 개화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일본군 150명ㅋ)을 지원받기로 약속하고 우정국 축하연을 기회삼아 정변을 일으킨다.(갑신정변, 1884)   그들은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발표하여 정치, 재정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3일만에 정권을 접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들의 어설픈 정변은 오히려 청을 다시금 자극하여 청의 내정간섭을 보다 심화하였다. 게다가 급진 개화파의 다수는 해외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개화정책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청의 조선 내정간섭이 점점 더 심화되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정치적인 담판을 짓고 서로의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한다.(텐진조약, 1884)
  갑신 정변은 최초의 근대국가를 향한 노력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후 갑오 개혁에도 이들의 주장이 일부 반영되고, 서재필이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등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보여 계보를 잇고 이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으며 극소수의 급진 개화파들만이 지지를 했을 뿐,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뿐더러, 토지 개혁에 소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4개조 개혁안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 신분제 폐지

3.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 지조법(地組法)은 토지세(土地稅)이지, 토지 개혁이 아니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 내의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 의회적 요소(입헌 군주제적 요소),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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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개화 세력의 대두와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파의 뿌리는 박지원, 박제가를 축으로 하는 북학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청을 왕래했던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로부터 신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인들도 통상개화론의 주연들로 등장하게 된다. 통상개화론자들 이후로 개화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양무 운동(洋武運動)를 모델로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문명 개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적(變法的)인 개화를 모색하는 급진 개화파가 그것이다.
 온건 개화파 같은 경우 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중심으로 깔아둔 양무 운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청나라와 친하고 상대적으로 일본과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도 서기(東道西器). 즉, 동쪽 나라의 도리와 서양의 기술이라 함은, 우리 나라는 성리학적 윤리로 도(道)는 완성에 이르렀으나 아직 기술 문물이 발전하지 못했음으로 서양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부국 강병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개항 이후 1880년대의 주된 개화 운동(통리기무아문, 박문국, 기기창, 우정국, 별기군 등)와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기술, 농업, 학교 설립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문명 개화론에 의한 개혁을 추구했던 급진 개화파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을 개화된 문명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자인 일본을 반 개화된 상태로 보고 미개화 상태인(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깊은 관계를 갖고, 청을 무시하였다. 동도 서기론자들과 달리, 그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들과 함께 그들의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도 개혁에 힘썼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들이 시행했던 갑신 정변과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적인 제도를 지지하고 제도적 변화를 모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위정 척사 운동
  위정 척사(爲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성리학)을 위하고 사악한 것(서학 : 기독교)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당시 선비들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제사를 모시지 않고 조상신을 귀신으로 모는 등 유교 윤리에 정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여기어졌다. 굳이 말해본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개화, 보수의 두 축으로 보수쪽이라 할 수 있다. 크게 10년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860년대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은 강력하게 통상 반대를 주장하였다. 물론 척화주전론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정책과 맞아떨어져 큰 호응을 얻었다.(유일하게 정부정책과 위정척사론이 일치한 경우이다.)
  "(전략) 사학(서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케 하소서." 

- 이항로, 「척화주전론」


  1870년대
최익현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면서 통상 개화가 불가능한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가면서 5불가론(소)으로 반대하였다.

"우리들의 물화는 대부분이 땅에서나는 것으로 유한한 것이고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야비하고 음란한(?♡_♡?)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양이 무궁무진합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敵)입니다." 

- 최익현, 「왜양일체론」


  1880년대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쭌센으로부터 받은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 청의 말도 안되는 외교정책에 이용당하는 설움을 영남에 있는 만명의 선비의 (상)소를 통해(지금으로 보면 서명운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하였다.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보건데 온몸에 털이서고, 눈앞이 흐려집니다.(중략) 원교(遠交 : 여기서는 미국과의 통상을 뜻한다.) 핑계로 근린(近隣 : 러시아)를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오랑캐입니다.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만손 외. 「영남만인소」

   
  1890년대 을미개혁으로 인해 단발령이 내려지고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로부터 시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략)... 국모의 원수 ... (후략)" 
 
  위정 척사의 의의는 통상 수교 정책처럼 반외세, 반침략에 대해 국권과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단점 또한 통상 수교 정책과 같아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단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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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시 한 번 시작하며ㅡ
  올해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수능대비용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며,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께도 공부가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란 일부를 추려내고 몇몇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서술한 내용과 히스토리아의 다른 필자분께서 집필하신 내용이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의견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특히 수능에서만 통용되는 '시험대비용'에 불과하며 다른분들이 공부해서 작성한 것과는 그 질에서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한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약화와 그에 따른 조세 제도의 문란(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이앙선이 출몰하여 민심은 동요케 하고, 천주교가 확산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등,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폭넓은 인재 등용과 세도 정치의 중심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게 되면서 세도 정치를 혁파하였고, 재상 회의기구였던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법전을 편찬(대전 회통)하고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좀더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확장시킨 것을 정리한 것을 대전회통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합병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던 서원을 철폐하고, 각종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하였다.


 Tip. 삼정 개혁 : 전(田)정, 군(軍)정, 환곡(環穀) 개혁

 전정 : 양전, 양안 사업(토지 조사), 토지 겸병을 통한 개혁

 군정 : 호포법(號~,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해 양반에게도 군역 부여

 환곡 : 환곡제를 폐지하고 양심있는 양반의 개인 창고(사창)에서 곡식을 꾸도록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 : 양반들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해서 내는 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으로 인프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경복궁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력의 징발 또한 가혹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Tip. 인민들의 반대
  
양반이 반대한 것 : 서원 철폐, 호포제, 원납전

농민이 반대한 것 : 당백전, 노동 징발


2.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순서, 인과 관계, 관련국(중요),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1) 병인박해(1866) 
  러시아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게 러브콜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시를 했다. 러브콜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흥선대원군은 이로 인해 기존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참고로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 수정사항)

 2) 제너럴 셔면호 사건(1866)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왔다. 물이나 식량을 구걸하는 등의 연극을 통해 평양에 들어왔지만, 시내를 향해 공격하자 이에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3) 병인 양요(1866)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로 곧바로로 가는 길을 알게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통해들어왔다. 문수, 정족 산성 등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통해 들어와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장서들을 쌥쳐가서 현재까지 외교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예산)에 위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뒤늦게 알고서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의 보복을 한 사건이다.  그들 역시 대동여지도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미국과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차이가 났고 미국은 대포 몇 번 쏘다가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을정도이다.

 
6) 척화비
  이래저래 서양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갖게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소위 쇄국정책)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주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 지지만, 그만큼 근대화와 세계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3. 강화도 조약(1876)
  최익현의 도끼 상서로 실각하게된 흥선대원군의 바톤을 민비가 이어받아 민씨 정권을 수립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및에서 억눌려왔던 개화론이 박규수 등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위로부터 원샷 개혁(메이지 유신) 성공한 일본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투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征韓論 :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이론) 내세우기 시작한다.(원래는 신생 일본의 발전 발판으로써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곧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꼬투리 잡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 일 수호 조규, 1876)가 맺어지게 된다.

 주요 조항 분석

1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

5관 조선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락한다.

  => 본래 부산(동래)는 왜와 통상하던 항구였으므로 경제적 항구였던 부산러시아의 
        
남하 견제를 위해 군사적 목적을 띈 원산의 개항,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항을 개항하므로써
       
서울에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관 조선은 일본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연안의 자원, 항로 확보와 유사시 효율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9관 양국 관리는 약국 인민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 더 많은 물량을 가진 일본 상인에게 유리

10관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경우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

 * 주의 :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조항이 없다


부속 조약

1) 조일 수호 조규 부록

 4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제한한다 => 거류지 제한

 7관 일본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 => 일본의 화폐 유통 허용하여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된다.


2) 조일 통상 장정

 제 6조 조선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훗날 방공령으로 방어)

 제 7조 일본 선박은 선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자국 산업을 보호 불가(마치 현재 FTA라고 보면 됨.) 


4. 다른 나라와의 수교

 1)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 2차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 전한 황쭌센의 「조선책략」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다. 청은 자신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종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사실 청의 본 뜻은 청 - 조선 - 미국의 한 축을 구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주요 조항 분석

 제 4조 (전략) 미 합중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선 인민을 때리거나 재산을 훼손하면

        (중략) 미 합중국 법률에 따라 체포하고 처벌한다 => 치외법권

 제 14조 (전략) 본 조약에 부여되지 않은 어떠한 권리나 특혜를 다른 나라에 허락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미국 관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 최혜국 대우, 아관 파천 이후 이권침탈에 악용되었다.

 

  그 외

  거중 조정 조항 : 위험할 때 서로서로 도와준다.

  => 형식적인 조항이다. 이후 일본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정면적으로 위반된 조항이기도 하다.

 2) 한러 통상조약(1884)
  조선 정부는 국내에서 청, 일의 간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러시아는 외교 고문인 베베르를 파견하여 친러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에 조차지를 확보하였다.


5. 외교 사절
  민씨정권은 개화한 이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신 문물과 신 제도를 수용하였다. 에는 영선사를, 미국에는 보빙사를,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각각 귀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하지만 형식적인 보고서에 실망한 고종은, 밀서를 내려 비밀리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 근대화에 대한 다향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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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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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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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