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7)

<테오도시우스>의 이루지 못한 제국의 꿈

1. 게르만의 이동과 몰락하는 로마

오늘 이야기는 테오도시우스에 관한 이야기야. 우린 이 인물에 통해 크리스트교가 로마의 상징인 <독수리>를 제압하게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될 거야. 독수리는 전통신인 제우스의 상징이기도 했던거 알지?

이 이야기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였던 기원후 2세기부터 시작하지.

역사에서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4세기 무렵>이라고들 이야기하지. 그런데, 그건 대이동을 말하는 것이고, 실제로 게르만 족의 일파가 로마 사회에 진출하려고 했던 건 2-3세기 부터야.

아참, 게르만의 이동은 알고 있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르만족의 이동은 멀리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명으로 여겨지는 한나라의 <한무제>는 동아시아 전역을 중국의 지배권에 두려고 했어. 동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켜서 한사군을 설치했고, 남으로는 한서사군을 설치하는 등 지배 영역을 넓히고 있었지.

그런데, 한무제도 해결하지 못한 골치거리가 바로 북방의 <흉노>야. 흉노는 중국식 표현이고, 사실은 <훈>족이라고 부르는 민족이지. 원래 중국애들이 주변 민족을 낮춰 부르고, 자기네만 높여 부르는 <중화 사상>인지 뭔지가 강하잖아.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 이런 말들이 다 오랑캐를 지칭하는 말이듯, 흉노(匈奴)는 한자 그대로 흉약한 노예같은 넘들이라고 중화인들이 지칭한 말이지.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한무제가 결국 훈족을 토벌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한나라에서 밀린 훈족은 중앙아시아로 진출해서 월지국을 공격했는데, 그 결과 인도에 생긴 왕조가 쿠샨 왕조야... 위 표의 빈칸 (1)에 쿠샨 왕조가 들어가면 되겠지?

남하하지 않고 서부로 계속 진출한 일부 훈족들은 동유럽과 북유럽에서 놀고 있던 게르만 민족들을 공격하게 돼. 훈족에 밀린 게르만 애들은 로마로 넘어와서 용병 생활을 하게 되지. 하지만, 훗날 게르만 족들이 로마 곳곳에 게르만 국가를 세워 버리면서 서쪽 로마는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거기에 훈족의 왕까지 서로마를 협박하게 되지...

여기까지가 교과서적인 설명이야.

그런데, 사실 4세기 이전에도 게르만의 이동은 있었어. 중국 진나라의 유명한 <진시황제> 알지? 그 양반도 골치아픈 흉노족이랑 열심히 싸우다가 만리장성까지 만들잖아.

그리고 게르만 애들도 뭐 꼭 훈족에게 밀려서 로마로 갈 필요는 없었겠지... 조금씩이지만 이미 로마 영내에 게르만 용병들이 존재했거든. 실제로, 게르만 족의 무서움을 로마가 뼈져리게 느낀 건 378년 동로마와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 족의 대 전투부터야.

378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은 서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훈족의 기마부대에 밀리다 밀리다 로마 제국의 국경까지 도망쳤어. 서고트인들은 울면서 로마 황제에게 애원을 했지.

게르만인 : 제발 도나우강을 건너게 통나무라도 던져주세요. 물에 뜨는 것들을 던져주세요.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학살당할 겁니다.

로마황제 :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냐? 모두 무기를 버리고, 아이들을 로마에 맡겨라. 그럼 국경을 건널 수 있게 해주마.

게르만인 : 정말이죠? 약속하신 겁니다. 모두 무장을 해제하고 도나우강을 건너자.

그런데, 서고트인들은 속은거야. 겨우겨우 로마 국경을 넘은 서고트인들을 로마는 학살해 버렸지. 늙은이는 죽이고, 젊은이는 노예로 만들었지. 어린 소녀들은 로마 귀족에게 팔려가고 말았어.

로마의 이민족 탄압은 로마 제국 내에 용병으로 있던 게르만족들을 자극하고 말았지. 서고트족의 난민들과 로마 제국내의 게르만 용병들, 또 노예로 팔려간 게르만인들까지 반로마 운동에 가담하면서 엄청난 전쟁으로 번진거야.

378년... 동로마 황제 발렌스의 로마부대와 게르만족의 부대는 엄청난 대 전투를 벌이게 되지. 그런데 말야. 이미 로마의 국경을 게르만 용병들에게 맡기며, 탱자탱자~ 놀면서 향락에 빠져있던 로마인들이 게르만 투사들을 이길 수가 없었어. 로마를 지탱하던 제국의 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황제마저 죽어 버린 거야.

4세기... 바야흐로 게르만 용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 이 때 죽은 황제를 대신해서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것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이 사람이야. 379년의 일이지.

2. 군인 황제의 탁월한 군인 정치

349년... 스페인에서 <테오도시우스>가 태어났지. 그의 아버지 <플라비우스>는 로마의 뛰어난 장군이었어. 일단 이름이 기니깐 대충 <테오>라고 부르자.

테오는 아버지를 따라 수많은 전장을 누비고 다녔어. 특히 374년 사르마티아족을 무찌를 때는 선두에 서기도 했지. 문제는, 아버지가 너무 뛰어난 장군이라는 점이야. 테오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했지. 이 사건으로 테오는 싸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적 처세술>이라는 점을 배웠을거야.

서고트족에게 동로마 황제가 죽자, 서로마의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테오를 동로마 황제로 임명했어. 게르만 부대를 제압하려면 테오같이 전장에서 뼈가 굵은 장군이 필요했던 거지.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한 <처세술>이 그라티아누스보다 뛰어났다는 점이야.

그라티아누스 : 지금, 게르만족들 때문에 로마는 위기에 빠졌네. 자네를 동쪽 황제로 임명한다면,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테오 : 사치와 향략에 빠진 로마의 군대로서는 게르만족을 막을 수 없습니다. 로마군대와 튜튼족, 게르만족을 모두 군에 포함시키고 그들을 로마의 시민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라티아누스 : 로마인들은 게르만인들을 야만인이라고 하여 무시하네. 수많은 이민족들이 어떻게 로마인으로 융합될 수 있겠는가?

테오 : 일단, 게르만인을 <변방의 야만족>이라고 차별하는 로마인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은 뛰어난 군인들입니다. 싸움보다는 협상을, 차별보다는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로마 시민이 되었을 때, 그들을 로마로 흡수할 수 있는 공통된 사상이 필요합니다.

그라티아누스 : 그것은 무엇인가?

테오 : 바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 통합을 위해 제시했던 <크리스트교>입니다.

바로 그거야. 군인 황제는 테오는 로마인과 튜튼족, 게르만인을 모두 동등한 군인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에게 크리스트교를 통한 <로마시민 사상>을 강조하려고 한거야.

379년... 왕이 된 바로 그 해. 테오는 크리스찬들과의 관계를 해결하려고 했어. 하지만, 제우스교를 믿는 로마 군인들도 문제였고, 아리우스파, 아타나시우스파 등 다양한 크리스트교 교파 문제도 복잡했지.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아주 심한 병을 앓더니, 신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말하곤 <세례>를 받았어. 그리곤 <로마의 모든 백성은 크리스트교로 통합해야 한다>는 칙령을 발표해 버리지.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크리스트교의 국교화>야.

사실, 크리스트의 국교화와 가톨릭이란 말은 <콘스탄티누스>가 먼저일 수도 있어.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종교 공인>이라는 애매한 표현을 사용했고, 가톨릭이란 표현을 당대에 사용하지는 않았어. 후대인들이 <콘스탄티누스>가 가톨릭이란 말을 사용했다고 후대 문서에 남긴 것 뿐이지. 그래서 최초의 <국교화>, 최초의 <가톨릭>은 테오라고 말하곤 해.

381년. 테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소집해서, 문서로 만들었던 <국교화>를 공식으로 선포해 버리지. 그리고, 로마 교황 다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주교가 가톨릭 세계의 2인자라고 결정했어. 이제 서로마 동쪽의 교회는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해결하도록 조치를 취한 거야.

3. 크리스트교 수호 작전

383년. 제우스교를 숭배하는 막시무스가 서로마, 동로마 황제를 부정하면서 <정통 로마 군인> 시대로 돌아갈 것을 선언했어. 로마의 전통신인 제우스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반란군은, 로마 주변을 잠식하더니 서로마에 쳐들어갔지.

서로마의 어린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로마로 피신해서 테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그러나, 테오는 서로마를 도울 수가 없었어. 로마군, 게르만군, 튜튼군 등을 통합해야 했기 때문에 대규모 전쟁에 나갈 시기가 아니였다고 판단한거야.

기독교 이념을 보급하고, 군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한 뒤, 388년.... 테오는 막시무스와 싸우기 위해 서로마로 향했어. 그리고 대승을 거두었지.

390년... 겨우 기독교 이념을 보급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하나의 큰 사건이 생겨. 그것은 역사에서 <테살로니카 폭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지. 지난 번에 <빵과 서커스> 정책을 설명한 적이 있지? 그것 때문에 발생한 사건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런 거야.

게르만족들이 로마의 국경을 지키는 동안, 시민권을 얻어서 군대를 안 가게 된 로마인들은, 투기장에서 노예들의 싸움이나, 연극 등을 즐기고 놀았어. 저번에 이야기 했지? 3s 정책 말야.... 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3대 산업으로 하는 거...

로마인1 : 야... 오늘 김나지움 밑에서 야한 연극이랑 스트립 쇼를 한데. 같이 보러 갈까?

로마인2 : 그것보다는 검투장에서 노예 경기를 보러가자. 요즘 스태리우스가 15명을 다 죽이고, 16연승에 도전하잖아. 진짜 멋지더라. 요즘 최고 스타는 그 넘이야.

로마인3 : 야... 소식 들었어? 요새 마차 운전으로 스타된 애 있잖아. 무지 멋있는 넘. 그넘이 범죄 용의자로 끌려갔대. 아니, 왜 영웅을 끌고간거야?

로마인1 : 뭐? 그럼 우리 이번주에 경기 못보는 거야? 무슨 낙으로 살라구? 이런 미친...

마차 경주의 기수가 끌려갔다는 소식에 대중들은 그를 석방하라고 폭동을 일으키고, 난리를 피웠어. 그런데, 이민족 출신인 총독이 단호하게 거부한거야. 하찮은 이민족 출신 따위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요구를 거부하자, 로마인들은 이민족 관료들을 잡아다가 찢어죽였어.

테오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먹었지. 테오가 원한건 이민족과 로마인이 같이 화합해서 살아가는 건강한 로마 제국이었거든. 인종 차별은 테오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구.... 테오는 크게 분노했어. 이민족 군대를 이끌고, 폭도들을 찾아간 테오는, 무차별 학살 명령을 내렸지. 로마인 1만 5천명이 끔찍한 학살을 당했어.

문제는 로마인을 학살한 테오를 교회가 비판한 거야.

주교 암브로시우스 : 어떻게, 로마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할 수가 있습니까? 폐하가 죄를 참회하기 전까지는 성당에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공의회는 폐화의 행동을 탄핵하고, 참회를 요구할 것입니다.

테오 : 그것은 모든 로마인들이 평등하기를 바란 내 소망의 표현이었네. 그것은 다 교회를 위한 일이었고. 그 참사로 억울하게 죽은 크리스찬이 있다면 내 사과하겠네.

주교 암브로시우스 : 아닙니다. 교회는 폐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반성하세요. 또 반성하세요. 그리고 이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칙령을 내리세요.

테오는 몇 달동안 계속 교회에 죄를 빌었어. 교회의 용서를 받아야만 로마인과 이민족이 같이 살수 있다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고, 크리스트교를 통해 제국을 재건한다는 꿈도 이룰 수 있었거든.

테오는 교회에게 반성문을 쓰고, 교회가 원하는 칙령까지 써 주었어. 교회는 황제를 이겼다는 기쁨에 <데 라우다무스>라는 찬미가까지 만들었지. 그래도 황제는 참고, 또 참았어. 참는 것만이 로마 제국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거든. 이 사건은 크리스트교 공인 후, 교회와 황제권과의 최초의 싸움이었어. 황제가 참고 참으면서 교회를 얼르고 달랬거든...

392년. 테오는 아예 이교신 숭배를 전면 금지시켜 버렸지. 이제, 로마의 전통신들은 모두 역사에서 사라져야 했고, 소크라테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진 그리스 철학은 신학에 밀려 사라지게 된 거야. 하지만, 전통신을 믿는 장군들의 도전은 끊임없었지.

393년. 제우스신을 동경하는 전통주의자 아르보가스트가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마 황제를 죽여 버린 사건이 발생했지. 아르보가스트의 참모 유게니우스와 장군 니코마쿠스는 강력한 전통 군대를 이끌고 테오에게 도전했어.

아르보가스트는 번개창을 들고, 독수리를 날리는 제우스신의 동상을 전장에 늘어놓았지. 테오는 기독교의 순교자 성 요한네스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전쟁에 참여했어. 아르보가스트가 이교세력을 주축으로 한 군대라면, 테오의 군대는 서고트족과 반달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였어.

이 역사적인 전투에서 테오의 군대가 대승을 거두었지. 하지만, 이 큰 전투로 테오 역시 건강이 약화되어 죽고말았어.

테오는 모든 이민족들을 기독교로 통합해서 강대한 로마를 재건할 꿈을 꾸었어. 하지만, 그 꿈을 채 이루기 전에 죽은거야. 그는 죽어가면서도 훗날 로마가 이민족에 의해 분열될 생각을 하면서 슬퍼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 후손들은 테오의 꿈을 이해하고, 테오와 같이 노력했을까?

4. 이민족간의 전투

테오가 죽은 뒤 테오를 모시던 이민족들도 분열되었어. 반달족의 장군 스틸리코는 테오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힘을 합친 로마를 만들려고 했지. 스틸리코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로마 집정관이 되었고, 테오의 꿈을 이루려고 했어. 반면, 서고트족의 장군 알라리크는 로마인들을 절대 믿지 못한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어. 테오의 무덤에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남긴 채...

로마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경멸했지. 감히, 반달족의 스틸리코가 집정관을 하다니... 반달족이 훗날 로마를 공격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았어. 그런데, 그 유언비어를 퍼뜨린 장본인은 테오의 아들로서 황제가 된 <호노리우스>였지. 결국 이민족 출신의 충신 스틸리코는 로마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쓰고, 황제군에 의해서 참수 당했지.

스틸리코의 화합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게르만 출신의 장군들은 갖은 죄명을 뒤집어쓰고 학살당했지. 반달족들은 로마에 협조한 죄로, 로마를 다민족국가로 만들려고 했다는 죄로 몰살당했지. 수만명의 게르만 용병들은 로마에서 탈출했고, 결국 로마의 적이 되어 버린 거야. 테오의 아들 <호노리우스>는 아버지의 꿈을 짓밟아 버렸어.

스틸리코가 죽은 뒤, 테오의 충신 중 한명이었던 알라리크 장군이 게르만족들을 모아 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지. 알라리크 역시 모든 민족을 융합해서 강력한 제국을 이루고자 했던 테오의 이상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의 로마는 썩어빠진 귀족들밖에 없었기에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거야.

알라리크는 황제 호노리우스가 있는 곳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을 박살내 버렸지. 하지만, 테오에 대한 충성심에서 <기독교> 지역만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동맹으로 삼았어. 반면, 황제 호노리우스는 기독교가 나라를 망친 원흉이라고 생각해서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전통 로마신을 섬긴다고 자랑하고 다녔지.

알라리크는 테오를 생각해서 로마에게 협상을 요청했어. 전쟁으로 테오의 제국을 모두 불태워 버리기는 싫었는지, 로마의 황제에게 최대한 기회를 주었지. 그러나 황제 호노리우스는 이민족을 무시하는 발언만을 계속 보내왔어. 결국 서고트의 병사들은 로마를 박살내고, 시민들을 학살하였지.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지역은 기독교의 보호를 받는 지역 뿐....

로마제국은 바로 망할 것 같았어. 그러나, 로마를 최후까지 지킨 여제가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테오의 딸 갈라 플라타키아였지. 갈라는 알라리크 장군의 동생인 아타울푸스와 결혼을 한 뒤, 로마와 게르만의 다민족 국가를 만들 이상을 같이 나누었어. 하지만, 아타울푸스는 갈라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전장에 나갔다가 죽고 말았지. 갈라는 테오의 이상을 잇기 위해 호노리우스가 죽은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돼.

그리고, 테오와 갈라의 꿈을 알았던 서고트족은 전대의 인연을 생각해서 갈라 플라타키아가 여제로 있던 서로마를 건들이지 않았어.

갈라 플라타키아는 로마 최후의 현명한 여제였지. 서로마 주변에서 이민족들이 수없이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갈라의 서로마는 전쟁 대신 재건 사업이 이루어졌어. 하지만, 이미 망해가는 로마에서 갈라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 단지, 살아있는 동안 로마제국을 유지하고 주변국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 뿐이었지.

그녀는 테오가 남긴 최후의 사업을 추진하게 되지. 바로, 기독교를 보호해야 한다는 테오의 유언을 실천에 옮기는 거야. 에페소스 공의회, 칼케돈 공의회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공의회를 열고, 기독교의 공의회를 보호하는 데 전력을 다했어.

그리고, 기독교의 정신을 후대에 보급할 수 있는 <교부>들을 키워냈지. 갈라가 여제로 있는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등 다양한 계파들이 정통파로 분류되거나, 또는 이단으로 분류되었고,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가 확립한 정통 교리가 갈라 시대에 완성되지. 이 시대를 역사에서 <초기 교부>의 시대라고 해.

그녀가 죽은 뒤 얼마 안되서 서로마는 망했어. 그러나 그녀는 테오의 이상을 지키기 위해 기독교를 수호했고, 게르만과 로마인이 함께 공존하는 이상 제국을 위해 헌신한 마지막 황제였지.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그녀의 기독교 보호 정책에서 언급된 <교부>가 누구인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해보자. 그리고, 교부와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 히파티아의 불행한 최후를 통해 그리스 철학과 교부철학의 갈등관계를 짚어보려구 해.

오늘의 글은 기독교에 우호적으로 적었지만, 다음 글은 반대편 입장에서 쓸 수도 있을 거야. 비교해서 보는 게 더 재미있거든. 그럼 계속 달려볼까나....

http://historia.tistory.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2.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조창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상세보기

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부처님 나라(1 인도 중국편)(윤승운의 불교만화)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윤승운 (동쪽나라, 2003년)
상세보기

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예지각,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상세보기

하룻밤에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상세보기

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강성률 (형설, 2005년)
상세보기

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성철 (장경각, 1988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서문. 넌 대체 어느 지역의 종교니?

1. 시작은 인도였지만, 그 끝은 우리 이니라...

불교의 역사를 간략히 적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우린 불교의 창시자가 석가모니라고 알고 있다. 그는 인도 어느 부족의 왕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종교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숭배하는 신이 뭔지 딱히 알기가 어렵다. 본인이 성불한다고? 뭐, 불교에서 신은 여러 가지 있지만,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주신은 누군지 모르겠다.

그럼, 불교는 종교야~ 사상이야?

우리가 불교를 사상적으로 접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교의 역사> 때문이다. 불교는 역사적으로 진화해온 종교이다. 비록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무제 때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삼국시대 성립기 쯤 우리 역사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내려갔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종교가 아닌데다가 그 사상이 심오하고 철학적이여서 종교 성향을 한마디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에, 아주 쉬운 교리로 대중들 사이에 빠르게 파고 든 종교도 불교이다.

그럼, 불교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이 이야기는 아주 옛날 인도의 공화국 시대부터 출발한다. 석가모니는 왕자출신으로서 인도의 <공화정>을지지하는 부족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제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훗날 하나의 종파를 만들곤 하였다.

그런데, 중국에 전파된 종교는 딸랑 <불교>였다. 어느 종파, 어느 사상체계가 아닌 불교 자체가 들어온 것이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 불교의 <참뜻>이 뭔지 알기 위해서 중국인들은 나름대로 끝없이 고민한다. 그러나, 결론은 없다. 왜냐구? 그들은 석가모니를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결국 중국인들은 직접 석가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찾아 <인도>로 떠난다. 삼장법사가 손오공을 데리고... 인도로 불법을 찾아 떠났다나 말았다나.... 뭐 그런 이야기들이 유명하다.

삼장법사는 결국 책을 찾아왔다. 번역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번역서들을 보면서 더욱 고민에 빠진다. 화엄종, 법상종, 법성종, 계울종, 선종.... 뭐 저리 많어? 석가가 말한 참뜻은 이중에 뭐여?

중국도 당황하고,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도 당황한다... 뭐, 참뜻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으니 <왕>이 제멋대로 해석하고 나선다.... <왕이 곧 부처다....> 불교의 참뜻을 많이 알수록, 불교는 정치에 덜 휘둘린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오랜 세월 동안 불교는 왕권에 밀착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하려는 불교 이야기는 인도, 중국, 한국, 일본에 걸친 불교의 역사 이야기이다. 이 종교가 어떻게 시작하였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해 왔는지... 종교적 관점이 아닌 역사적 줄거리로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역사적 줄거리로서 불교를 설명하다 보면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가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화는 전체 줄거기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적어보려고 한다.

자, 그럼 석가의 시대부터 한번 출발해 볼까? 이 이야기는 2009년이 시작되면 적기 시작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고대의 전쟁이 공성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통한 전쟁 역시 항상 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영역 사이에 바다라는 것이 역사에 씌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민족과 항쟁을 벌인 경로를 보면 <교과서가 고대사에 대하여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과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지침용 3차 사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자세한 내용과 중요한 사료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교과서에 빠졌거나, 1단어만 기술되어 빠져 버린 바다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는 동해와는 달리, 서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쪽 바다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황해>입니다. 아니 왜, 동쪽 바다는 일본해도, 청해도 아닌 <우리 영토로서의 동해>이면서 서쪽 바다는 <황해>라고 해야되나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역사적인 이유만 말해보도록 하죠. 동해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지배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다입니다. 일본이 동해바다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라고 인식한 이후부터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의 경제력이 성장한 이후부터입니다. 즉, 근대 이전까지 이미 역사적으로 <동해>는 우리 영역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황해>는 다릅니다. 이 바다는 중국민족과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바다였고, 이 바다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따라 고대 천하관이 바뀌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 바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바다였죠.

실제 고조선, 고구려와 대중국 항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육로에서의 전쟁만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서해바다를 이용했고, 수,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항상 바다를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해바다라는 것은 실제 한, 수, 당이 우리 국가를 침공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나라별로 차근히 보도록 하죠.

2. 한무제는 왜 고조선을 1년간이나 공격해야만 했는가?

중국과 고조선의 치열한 항쟁이 시작된 것은 중국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진시황제도, 한고조 유방도 고조선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이후 통일된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 등 북방민족과 영역 싸움을 하였지만, 고조선과의 직접적인 큰 대립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고조선이 직접적으로 대결구도에 들어간 것은 위만조선 때부터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에 철기 기술이 도입되었고,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중개무역>입니다. 위만 조선이 시작한 중개무역이란, 한반도 남부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여 그 차액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중개무역이란 A국과 C국사이에서 B국이 물품을 운송해주고 중간에서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합니다. 중계무역이란, A국의 물건을 B국이 자국에 가져와 가공하거나, 물품 표지를 한 다음에 C국에 넘기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2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합쳐서 중간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위만이 남방국가들의 물품을 중국에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이용한 루트는 바로 <대동강>이라는 고대 상업 해상망이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 때 철기를 이용하여 정복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기사도 대부분 이 대동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동강 루트를 통한 중개 무역은 위만조선이 곧 중국의 골치거리인 흉노와도 무역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게 하는 했습니다. 보통 중국이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을 <고조선과 흉노와의 차단>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사정에는 이런 경제적 문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단순히 요동성을 중심으로 육로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육로에서는 좌장군이 침입하였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누선장군이 대동강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1년여간의 항쟁끝에 무너집니다.

3. 대동강 루트와 서해 북부를 일시 중국이 장악하다.

중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한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 한사군은 현토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이후 나타난 조선유민들의 저항으로 거의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그곳이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과 대방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고대 황해안 루트를 이어주는 상업권의 맥으로서 그 중심지가 <대동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과서와 개론서들을 보면 변한에 철이 많이 생산되는데, 그 철은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으로 수출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대가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 고구려, 백제의 협공에 망하게 되면서 <중개무역 루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지요. 즉, 금관 가야는 일본 - 가야 - 낙랑군을 이어지는 고대 상업 루트를 통해 발전한 나라였지만, 낙랑군이 망하게 되면서 그 교역 대상국을 일본 - 가야 - 백제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자극하게 되어 광개토 대왕이 일본, 가야, 백제를 동시에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게 되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대동강 무역로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지요?

4. 백제와 고구려의 초기 싸움은 강과 강을 두고 무역권을 쟁탈하려 하였다.

이제 대동강을 일시 점령했던 낙랑군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황해안 무역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낙랑군이 멸망한 것은 백제, 고구려 군의 협공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공은 곧 영역 확보와 중국 민족 축출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고대 무역권 확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낙랑이 사라져 서로 국경을 마주보게 된 백제,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끼고 큰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초기 전쟁은 한강 - 예성강, 재령강 - 대동강 이라는 황해안 루트를 두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대동강 연안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보통 삼국시대의 4세기 하면,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왜 - 황해안 - 중국 남조, 북조 - 요서 점령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상업권 확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상업권의 확보는 결국 당시 가장 중요한 고대 무역로인 대동강 연안과 황해안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5세기 이후 황해안 무역권은 대동강이 아닌 한강을 두고 벌어졌다.

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전은 이제 한강을 두고 벌어집니다. 광개토대왕은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인 한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운을 걸고 사투를 벌여 사수합니다. 대동강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선진지역이고, 평양평야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자원이었습니다. 반면, 한강 역시 백제의 중심지로서 김포평야의 농업중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가치가 말로 할 수 없었죠. 실제 황해안 유역의 금강 - 한강 -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모두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습니다. 사실 황해안 루츠를 이용할 수 없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삼국간 항쟁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 중 2- 3세기 가장 체제 정비가 빨랐던 나라가 백제인 이유도 활발한 중국과의 대외교역으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 정치제도를 빨리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한강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이제 금강이 되어버립니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가 기반은 고조선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물산이 집약된 대동강 연안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은 남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되었는데, 그 가장 선봉지역이 남한강 하류의 충주지역입니다. 즉, 남한강 하류를 장수왕이 경영하면서 한강의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이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보통 개론서들에서는 <장수왕의 충주경영설>이라고 합니다.

6. 고구려의 무역권 독점과 반고구려 체제의 형성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영토 확장으로 대동강 무역권, 한강 무역권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북방으로 넓힌 영토를 통하여 말갈, 거란, 돌궐 등에 대한 무역로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패권주의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의 핵심 내용은 한강 무역권의 탈환이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적대 이유는 흉노 이래 중국이 지배해오던 조공경제 무역 질서를 고구려가 빼았아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거란, 말갈, 돌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북아시아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확보한 광대한 상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 부산물을 차기 하기 위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고, 수나라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요동성 등 공성전과 함께 대동강을 통한 바닷길 싸움도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청천강에서 크게 대패하고 맙니다.(살수대첩) 이후 수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대군은 육로였지만, 실제 큰 격전지는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등 강 하류에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전쟁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수가 망해 버리자, 당나라는 고구려보다는 고구려와 무역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서역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돌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거란과 말갈족의 주요 상업 중심지를 당이 장악하면서, 당은 다시 중국식 조공 경제 무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하여 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은 고구려의 동북아 상권과 황해안 상권마저 빼앗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안시성 싸움의 패배등으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7. 신라가 지키려고 했던 대동강 까지의 확보

당은 이후 나당동맹을 통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당동맹에서 신라가 요구한 것은 <대동강 유역까지의 영토 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대동강까지 진출하여 황해안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게 대동강은 절대 줄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신라 전체를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으로 <나당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끝까지 사수하여 대동안 연안을 확보하였지만, 당은 이후 150년 이상 <대동강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동강 연안의 황해를 자국의 근거지로 생각합니다. 실제, 대동강 연안에서 중국의 동부지역까지는 많은 신라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부아시아의 가장 활성화된 무역로로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신라의 영토로 당이 인정한 것은 신라 성덕왕 때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무역권을 인정한 이유는 발해 때문이었습니다. 발해가 북방 상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로 성장하자 당은 신라를 회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 해상왕 장보고의 상권 확보

그러나 8세기 이후 안사의 난 당으로 당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동북아의 상권과 황해안의 상권은 점차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중국 - 신라 - 일본과의 해상 루트를 장악하고 거대한 상권 루트를 재건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일본 - 신라 - 중국 동부의 상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인들은 중국 동부 해안가에 무역로를 개척해두고 있었고, 장보고가 중국, 신라, 발해의 약세를 틈타 그 무역로를 완전 장악하여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 속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은 곧 고대가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은 송으로 넘어가 중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건국되어 중세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후 중세시대로 넘어갔으며, 고대의 영광을 재현한 발해도 이 무렵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 상업권에 대하여 쭈욱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상업이라는 한쪽 시각에서만 적은 글이라 편협하긴 하지만 그냥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글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주세요.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기존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있거나, 숨어있는 한줄의 문장이 눈에 띄면 정리해서 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서의식, 강봉룡 지음, 2003, 솔출판사
  8.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1992
  9. 한국역사입문 제 1권,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도서출판 풀빛, 1979
  10. 한권으로 읽는 중국의 사상, 권순우 편역
  1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1993)
  12.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글 내용중에 잘못된 내용, 오탈자가 있으면 댓글을 주세요 by history>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4장. 위진남북조에 불교가 유행하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이제 중국으로 넘어간 불교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인도 불교는 4세기 까지가 주요 흐름이었고, 중국 불교는 2세기부터가 본격적인 불교시작부분입니다.

1. 왜 위진남북조에서 불교가 유행했는가?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전한 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에서 흥미로 들어온 것이 기원입니다. 그러나 한나라의 불교는 한무제의 <유교국교화> 정책에 의해 억압받았고, 후한이 망할 때까지 불교사상이 중국에서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었습니다.

실제 중국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민족 왕조인 5호 15국 시대 부터입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관심은 학문적인 심오한 철학에 대한 것이 아니였고, 단지 혼란한 사회상에 불교의 <윤회, 내세>라는 부분이 중국인들에게 공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치열한 혼란은 중화사상이 쇠퇴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중화의 이념은 이제 <이민족도 중화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호한병립의 사상으로 바뀌었고, 어떤 이민족의 종교나 관습도 국가에 따라 인정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불안한 난세에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불교의 교리에 흠뻑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불교의 윤회삼생사상은 <죽은 뒤 내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처를 제공합니다. 지금 현세에서의 고난과 나의 수행이 곧 전생에서 내려온 것이자, 내세에 영향을 주어 <3생>이 결정된다는 이론은 <혼란기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에서 백성들을 구원하기 딱 좋았던 것이죠. 윤회, 삼생, 인과응보론은 곧 <업>사상과 연결되어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됩니다. 위진남북조에서는 불교, 도교 등의 신비주의적 사상이 크게 유행한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죠.

2. 호국불교로서 자리잡은 중국의 초기 불교

또 하나 불교 유행의 이유는 바로, 인도에서부터 전개되어 온 <호국불교>사상의 영향입니다. 아쇼카왕의 <전륜성왕>사상으로 대표되는 불교의 호국 개념은 <국가통치이념>으로 딱 맞아떨어졌습니다. 중국 대륙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각국의 왕들은 불교의 주술적인 측면을 최대한 이용하여 백성을 현혹하고, 왕법이 곧 불법이라는 이론을 내세워 백성들을 통치하는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활용한 것입니다.

인도에서의 불법은 카르마(정법관념)로 이루어집니다. 샤크라란 세속세계와 불법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란 뜻인데, 이 고리는 현실과 이상을 연결해주기는 하나, 서로간의 간섭은 배제하는 고리였습니다.

쉽게말하자면, 카르마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활의 기준이자, 정치의 기준이고, 인간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고리입니다. 하지만, 국왕권이 이 카르마의 법을 변형할 수는 없고, 단지 카르마의 정법에 따라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인도에서는 왕권이 불법에 간섭하는 경우가 없었고, 불법은 곧 카르마와 공존하면서 지상 세계에 자비와 관용을 베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알지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위진남북조의 국가들은 단지 불교가 <전륜성왕>의 이념을 가진 호국적 성격의 이민족 종교라는 것만을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불법은 왕법이 간섭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불법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왕들은 <불교를 왕권으로 지배>하려고만 하였습니다. 불법이 본래 이론을 내세워 왕권에 대항하려 하면, 국왕은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해 버리면 그만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에 전래된 초기의 불교는 국가종교적인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국가는 대사찰, 대법회를 열어 불교를 장려했지만, 그 목적은 국가지배자의 위상을 높이고, 권력의 지원을 확보하여 호국사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특히, 이민족 왕조인 북조는 철저하게 불교를 이용하려고만 하였습니다.

3. 불교의 참뜻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였다.

초기 위진시대의 불교는 불교 본 뜻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격의불교>였습니다. 위나라의 정음시대 학자들은 불교에 대하여 논의하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논의한다고 하더라도 불교를 <도교사상>에 끼워 맞추어 논의하는 정도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당대 청담사상도 그 내용이 대부분 도교 사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불교에 대해서도 도교적인 수준에서 해석하는 것에 머물렀습니다. 사실 당대학자들이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에 대하여 아무런 자료도 없이 그 참 뜻을 알아낸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요.

정음시대 하안, 왕필은 노장사상에 불교 이해를 때려 맞추었습니다. 노장사상에서 대표적인 이론인 <무위자연>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한 것이지요. 석가모니와 공자 등의 성인들은 모두 노자가 주장한 <무위, 도>를 터득하였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들은 불교, 유교, 도교는 모두 하나의 이론이라고 생각하면서 불교의 난해한 사상들은 모두 도교의 논리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로 불교에서의 <공사상>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도교의 <무>로 이해합니다. <열반>은 깨달음을 얻어 자연으로 귀속한다는 뜻으로 도교의 <무위자연>로 이해합니다. 불교의 <보살>은 도교에서의 <도>로 이해하며, <진여>는 <본무>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불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단지 불교사상의 부분적인 부분들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이해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참 뜻은 알 수도 없었고, 실제 불교의 참 뜻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인도로 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진시대 중반이 되어 <북위정권, 남조안정기>에는 적극적으로 인도에 진출하거나, 서역의 고승을 중국으로 모셔오는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무엇인지를 아주 조금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국가정권은 불교이해도와는 상관없이 불교를 국가정책으로만 이용하려 하였고, 그 결과 <여러번의 폐불사건>을 경험하면서 불교가 정착되어 갑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실제 불교교리를 이해하려고 한 사람들과 남북조 시대의 불교 이해정도에 대하여 포스팅하고, 인도불교와 비교해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위진남북조의 토지제도 분석 :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균전제

이번 장에서는 북위의 토지제도인 균전제도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북위의 균전제도는 이후 포스팅 될 당나라의 <균전제도>와 비교해서 파악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하네요. 이후 당나라의 <균전제도>에서도 북위 균전제를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1. 중국 전통의 <공유, 균분 정책>은 계속되어야 한다.

북위의 토지제도를 다루기에 앞서 한나라 멸망 후 토지제도의 변천을 간략히 다뤄보겠습니다.

한나라는 한무제의 <억상정책>으로 상인들이 <토지를 사서 이익을 챙기는> 호족화 현상이 심화되었습니다. 실제 후한은 지방의 토지와 군사를 가진 호족들이 연합한 <호족연합정권>이었고, 왕망의 신이 멸망한 것도 <호족들의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후한말 황건적의 난의 원인도 <호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 되었고, 이 황건적을 진압한 자들도 <무장한 호족>인 조조, 원소, 동탁 등이었습니다.

중국의 토지 제도의 역사는 이 <호족>들의 토지 소유를 축소하기 위한 국가의 총체적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는 호족의 대토지 소유 자체가 국가의 위협이자, 조세원의 감소였으므로 철저한 <중농정책>과 함께 <한전책>을 실시합니다. 한나라 애제 때의 한전책부터 시작한 이 <토지소유제한> 정책은 중국 전통의 토지정책으로 자리잡습니다.

중국 전통의 토지 제도는 주나라 때의 <정전제>가 모델입니다. 정전제도는 <주나라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이 제도는 900무의 땅을 8가가 100무씩 나눠갖고, 중앙에 남은 100무를 국가를 위해 경작한다는 <공유와 균분>의 원리로 이루어진 토지제도입니다. 중국의 한전제, 둔전제, 점전제, 과전제 등 모든 토지제도는 공유, 균분의 정신을 이념상 원칙으로 하고 있고, 호족의 <대토지 소유 제한>을 실제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공유와 균분, 토지소유의 제한>을 완성한 토지 제도가 바로 북위 - 수당으로 이어지면서 완성된 균전제도입니다.

2. 조조의 토지제도 : 유민을 먹여살리고, 전쟁을 준비하라!

삼국을 통일한 조조, 조비 일가의 <위>는 통일을 위한 정책으로 <둔전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둔전제도는 <위나라> 포스트를 참조하세요.

둔전제의 가장 큰 목적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조세원과 군역원을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조조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화북 지방에서 어떻게 하면 <세금과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까 고민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조는 <진나라> 시기 상앙, 진시황이 실시하였던 법가적인 <변법책>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중 핵심적인 것이 <군공수작과 분가정책>이었죠.

조조는 주인이 없는 황무지를 강제로 유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이사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들 유민들은 황무지의 둔전민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유민들은 둔전민이 되어 황무지를 개간하고, 먹을 것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조조는 처음에는 적은 세금을 걷었지만, 점차 개간지가 넓어지자 5-6할의 세금을 걷어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민들은 절반의 세금에도 불구하고 개간된 땅에서 나오는 수입이 <유민생활>보다 훨씬 윤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유민들은 전시에는 교대로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조조는 전쟁에 참여한 유민들에게 아주 적은 보상을 하였습니다. 군역에 대한 <보상>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은 유민들의 사기를 높여주었습니다. 이 둔전이 있는 지역에 따라 <청주병, 유주병, 진병> 등으로 불린 유민들로 인해 조조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자영농 육성이 국내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막는 데 효율적인 <명분>이었다는 점입니다. 조조는 둔전으로 유민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면서, 군사력을 마련함과 동시에 <반항적인 호족>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는 효과도 얻었습니다.

3. 서진의 토지제도 : 토지소유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정하라!

서진의 토지제도는 둔전제도를 더욱 발전시킨 제도입니다. 서진에서는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부과>하여 <호족이 대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는 방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즉, 자영농 육성으로 호족의 성장을 억제하는 것이죠. 이러한 서진의 토지제도는 점전제와 과전제도가 있습니다.

점전제도부터 볼까요?

점전제도는 결혼한 가족에게 100무의 땅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일단 성년남자에게는 모두 70무의 땅을 지급하는데, 부인이 있으면 30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따라서 한 가족은 100무의 땅을 지급받습니다.

또 관등이 있는 자는 관인 품계 1품관당 5경정도의 토지를 추가로 가질 수 있습니다. 9품관은 10경, 1품관은 50경의 토지를 가질 수 있죠. 어떻게 보면 관직있는 자가 토지를 많이 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것은 관직이 많은 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조치입니다. 즉, 가장 높은 직관을 가진 관리도 50경 이상 토지를 못 갖는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이것은 중국 전통 토지제도인 <한전책>을 의미합니다. 점전제는 쉽게 말하자면, 토지, 전객에 대한 소유의 상한선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의 한전책이라고 하면 보통 <토지 상한선의 규제>를 뜻하는 한전책입니다.

다음으로 과전제도를 볼까요?

이 제도는 의무적으로 모든 성년 남자에게 50무의 땅을 강제 경작시키는 제도입니다. 만약 부인이 있다면 20무를 추가하여 총 70무를 경작하여야 합니다. 이 제도는 사실 <점전법>에 포함되는 제도입니다. 점전제도에서 이미 남자 70무 + 부인 30무를 통해 100무를 주었는데, 그 100무 중에서 남자 50무와 부인 20무인 70무는 받기 싫어도 강제로 받아서 경작해야 함을 뜻합니다. 결국 점전제도가 자영농민의 특권이라면, 과전제도는 자영농민의 의무경작을 규정한 제도입니다.

이 제도가 생긴 이유는 어떤 백성이라도 토지를 일정량(70무)이상 경작하게 함으로서 <유민을 방지하고, 국가 조세원의 최소량 이상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식으로 하자면, 토지의 <하한선>을 정해 최소한의 영업전을 보장한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즉 서진의 제도는 토지 상한선 제한의 점전제도와 토지 하한선 제한의 과전제도를 합친 <한전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제도는 국가 권력이 직접 모든 민, 토에 개입하여 <토지소유에 대한 국가 간섭>을 확립함으로서 <균전제도>의 기초를 닦아 놓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4. 북위의 균전제도가 시작되다.

북위의 균전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둔전제, 점전제와 과전제 등의 토지제도의 장점들을 따온 것입니다. 이 제도는 중국 전통의 <공유와 균분 원칙>을 이민족 왕조가 지키려고 노력한 토대 위에서 <지배층의 대토지 소유를 철저하게 억제>하는 기본 정신이 포함된 제도입니다.

특히 북위는 이민족 왕조로서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유목민족의 성향을 농민사회 성향으로 개조할 필연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 영토의 절반이상을 차지한 북위로서는 세수원의 확보가 절실하였는데, 유목기반의 제도로서는 세금을 공정하고 꾸준하게 걷을 방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북위는 조조의 <둔전법>을 강력 적용합니다. 유민들에게 일정한 토지를 주어 강제 경작 시키고, 그 제도를 <과전법>처럼 의무적으로 실행합니다. 이렇게 되면 조세원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둔전병을 얻게 되어 국가 조세와 군사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제도는 이미 조조 이래 계속된 화북지역 개간을 가속화하여 북방사회의 안정을 가져오고, 발전하는 남조 경제력에 대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제도였습니다.

균전제도는 북위 이래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논란이 많습니다. 일반적인 통설은 북위 이래 당나라까지 300년 이상을 계속 시행되면서, 각 왕조의 사정에 맞게 일부 내용만 수정되어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중서성>에서 입안만 되었을 뿐, 귀족들이 <문하성>에서 봉박권(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제도가 호족 세력이 약한 일부 남부지역에서만 시행되었다고도 주장합니다.

하지만, 균전제도가 시행되면서 북위사회의 제민지배체제가 성립되었고, 농민사회가 안정되었으며, 화북 경제력이 유지되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는 듯 합니다. 또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서 선비족의 유목사회는 농경사회로 전환되어 북위 정권이 남조를 능가하여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균전제도는 효문제의 한화정책에서도 핵심적인 정책이었습니다.

5. 균전제도의 내용 - 북위 편

초기 북위의 균전제도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제도는 이후 300년간 지속적으로 변화였고, 당대에는 상당히 달라지므로, 북위 효문제기를 기준으로 한 사료상의 균전제도의 내용입니다.

1. 노전을 지급하다

노전은 곡식을 심는 땅입니다. 쉽게 말해 서진시대의 <점전제, 과전제>에서 주었던 토지를 말합니다. 이 토지는 매매와 세습이 불가하므로 사망하거나 70세가 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며, 살아 생전에만 경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15세 이상의 남자들(정남)에게는 40무를 경작하도록 토지를 지급합니다. 그러나 부인이 있으면 20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즉 60무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황무지를 개간한다면, 이 황무지를 2포작이나 3포작으로 경작할 것을 국가가 배려하여 2배로 노전을 지급하는데, 이렇게 2배로 노전을 주는 것을 <배전>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노전에 지급할 남자에 <노비>가 포함된다는 점입니다. 노비에게도 똑같이 1명당 40무를 지급하며, 소도 노동 가치를 인정하여 소 1마리당 30무를 더 지급합니다. 단, 소에게 지급되는 토지는 120무로 제한됩니다. 이 노비와 소에게도 토지를 준다는 점이 바로 북위 균전제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즉, 토지는 <사람> 기준이 아니라 <노동력>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될 경우 가장 큰 이득을 보면서 대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노비 등 일가를 거느리고, 많은 우마를 가진 <대호족>입니다. 즉, 북위의 균전제가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했지만, 이 제도 역시 대토지 소유 호족을 실질적으로는 인정하는 제도라는 점이 한계점으로 작용합니다.

2. 상전과 마전을 지급히다.

상전은 뽕나무 밭을 말합니다. 15세 이상 남자(정남)는 20무의 상전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은 국가가 사망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연립을 인정하여 자손에게 상속할 수 있습니다.

마전은 삼을 심는 땅으로 10무를 남자에게 지급하는데, 부인이 있으면 5무를 추가 지급합니다.

원택지는 호당 3인마다 1무, 노비 5인마다 1무를 지급하는 땅입니다.

공전은 관리에게 지급하는 <수조지>입니다. 관리들은 관품에 따라 일정량의 땅을 받는데, 이것은 <직역의 대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죽으면 반납해야 합니다.

6. 수나라에서 바뀐 균전제의 내용

수나라의 균전제는 북위와 달리 부인, 노비에 대해서는 급전이 없어집니다. 즉 성년 남자 위주로 균전을 주기 때문에 <호족>에 대한 특권이 점차 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수나라가 통일왕조로서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모든 관리들에게는 100결 이하의 영업전을 지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00결 이하>라는 점으로 이 <영업전>이 지급됨으로서 관료들이 <대토지 소유>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 제거합니다.

또 통일왕조인만큼 균전제를 화북에서 화남으로 점차 확대하여 토지 개간에 힘쓰고, 대운하 완공으로 화북 - 강남의 경제적 연결을 시도하였습니다.

7. 당나라에서 바뀐 균전제의 내용

당의 균전제는 당의 경제제도를 포스팅 할 때 아주 자세히 다룰 것이므로 여기서는 변화된 부분만을 간략히 다뤄 보겠습니다.

당의 균전제는 북위, 수와 비교할 때 경제적으로 한층 발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생활의 안정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황무지도 상당히 줄어들었으며, 수대 대운하 완공과 개간사업으로 조세원이 늘어났습니다. 당대의 균전제는 호족적 특권이 거의 사라져 갑니다.

그 내용을 보면, 18세 이상의 남자에게 구분전을 지급하였는데,, 60세가 되면 절반 반납, 사망시 모두 반납을 원칙으로 합니다. 또한 여자에게는 원칙적으로 지급하지 않았으나 실제 과처첩이나 불구폐질자에게는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균전은 원칙적으로 임의처분을 할 수 없으나 예외 경우를 두어 처분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균전제도는 시행과정의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이 당의 균전제에서도 귀족, 대관의 대토지 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호족의 토지소유를 그대로 둔채 시행되었습니다.

또 개간 가능한 황무지, 토지를 국가가 보유하고 농민에게 주어야 하지만 인구증가, 귀족의 미개간지 점유를 토지가 부족해지고, 사원전의 증가, 관전의 사유화로 인한 토지사유화가 촉진되었습니다. 게다가 불법매각으로 지배층 토지사유화가 심화되었고, 당대 후기에는 이 제도가 원할히 운영되지 않아 결국 송대 형세호라는 새로운 <대토지 소유자>가 출현하는 역사적 변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에서 호족의 개념과 성립 배경

이번 장에서는 호족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 후한 말기부터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다뤄보겠습니다. <호족>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사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일족을 거느린 대토지 소유자>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중국사에서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이 짧은 개념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알기 위함입니다.

1. 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세력화 하다

한 무제가 강력한 경제 통제책을 사용하여, 국가 재정과 황실 재정을 늘려나가자, 대상인들은 그들이 가진 부를 <토지>로 돌려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토지>가 곧 재산이라는 인식이 늘어나서, 대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무제기에는 장건의 서방 실크로드 개통,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오수전 등 국가 신용화폐제도의 성립 등으로 상업이 발전하였고, 상홍양 등 대상인이 정계에 진출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무제가 강력한 경제통제로 상업을 통제하자, 결국 상인들은 상업의 이익을 <토지투기>로 전환하여 일반 백성들의 땅을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한무제의 신하였던 동중서는 대토지 억제책을 내놓지만, 대토지를 가진 지주와 상인 관료들이 반대하여 그 뜻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후 애제기에는 토지제한법은 <한전법>을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사전과 노비 소유에 상한선을 두어 토지소유자를 견제하려고 한 것인데,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이렇게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자신들의 일족을 이끌어 나가는 지방세력을 호족이라고 합니다. 이 호족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영농은 몰락하고, 한나라 시기에는 점점 농민 반란이 많아집니다. 실제, 후한이 망할 때, 장각의 태평교도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주 공격대상은 원소, 조조 등의 대토지 소유 호족들이었습니다.

부자의 땅은 천백경에 이르는 데,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도 꽂을 땅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 한서 식화지 -

농업으로 얻는 부는 가장 휼륭한 것이고, 상공업은 다음이지만, 불법으로 거두어 들이는 부는 최악의 것이다.

- 사기 식화지 -

2. 호족은 대토지를 점점 더 늘이는 방법을 찾다

호족들이 토지를 늘이는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일정 수확을 보장하는 토지를 직접 매입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귄력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불법적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농민들은 강제로 토지를 빼앗기거나, 강제 매매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민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책정하여 토지를 빼앗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둘째는, 호족들이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자신의 재력을 투입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상인들이 직접 돈을 투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신의 권력을 동원하여 농민, 노비 등을 사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호족>들은 토지를 늘여갔습니다. 전한 말기가 되면, 이 호족들의 세력이 중앙의 외척, 환관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방 권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외척과 환관들은 중앙에서 투쟁할 때 호족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힙니다. 왕망이 신을 건국할 때 왕망은 외척이기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밀려 낙향했을 경우에는 호족과 같은 행세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후한이 건국할 때 광무제 역시 화북의 남양 호족으로서 <호족연합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후한은 실제 호족 세력이 중앙에 진출하여 이끌어간 호족정권으로서, 외척, 환관과 함께 국가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들은 지방에서 교양학문으로 소양을 닦았는데, 이것은 곧 한대 관료 등용제도인 <향거리선제>와 직결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중앙 관계와도 연줄이 닿게 되고, 위진남북조 사회의 혼란기로 넘어가면 그들이 곧 중앙의 <귀족>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또, 그들은 대토지라는 경제력 위에서 사병을 먹여살릴 능력을 보유한 만큼, 토지가 많을수록 개인 병사가 많아지고,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식객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병과 식객들이 곧 호족 가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곤 하죠.

3. 호족의 역사

호족은 전한기에 대토지를 사요하면서 발전한 재력가이자, 대토지 소유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일족을 거느리고, 사병을 가진 무력가입니다. 따라서 호족 구성의 3요소를 말하라면 <대토지, 무력 소유, 일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한을 창업한 왕망은 이들 호족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려는 주례체제적 통제 정책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성장하는 호족 세력에 커다란 반발을 사게 되어, 왕망 정권은 20여년의 짧은 왕조로 단명합니다. 이후 호족들은 <한>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호족연합정권인 <후한>을 창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 경제의 주체세력이 되어 엄청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등 민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호족들이 지방에서 세력화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한>나라 시기에는 아직 호족이 중앙의 핵심에 이르지는 못한채 지방에서 호족 연합적 성격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조조, 조비 일가는 후에 왕조를 창업하면서, 호족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호족이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화>된 것은 바로 위진시대 이후였고, 수에 의해 중국이 <강력한 황제지배체제>로 통일될 때까지의 사회는 곧 <귀족화된 호족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한나라시기에 지방호족이 관료화되고, 중앙관료가 대토지 호족화되는 현상이 시작된 이래, 후한에서는 지방 유력자인 호족이 호족을 추천하는 <향거리선제>가 정착되어 호족의 관료화가 심화되었고, 위진남북조에서는 호족에 의한 사회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7차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호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1. 한의 왕실이나 귀족 중 분가하여 지방에 내려가 대지주가 된 자
   2. 농촌의 자작농이나 지주 중에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자
   3. 무제의 억상정책으로 상인들 중에 토지를 사서 대지주가 된 자

4. 호족 내부의 구조

그렇다면 호족들은 어떤 내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호족의 구성원은 <종족, 영호, 노비>라는 3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종   족

종족은 호족 사회의 중심이 되는 <가문>으로 독자적인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말합니다. 종족은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조 - 부 - 손> 등의 친족 가족집단을 말합니다. 호족의 토지는 <종족 소유>로서 관혼상제, 전쟁, 천제지변 등이 있을 경우 <종족>들이 뭉쳐 그 일을 해결합니다. 쉬운 말로 우리 나라의 <뼈대있는 족보>를 가진 가문집단 같은 것입니다.

영   호

영호란 <종족>들을 모시던 하부 계급들을 말합니다. 원래 주인과의 친분을 빌미로 주인의 장원에서 <예속민>으로 사는 <객>, 호족과 사제관계이거나 호족의 행정업무를 보던 <문생>, 호족과 연결된 관료들과의 친분으로 이루어진 <고리>, 호족의 사병인 <부곡> 등을 말합니다.

노   비

노비는 <종족>의 경제권을 보장하기 위해 호족의 가사와 잡역을 담당하는 가내노비를 말합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대토지를 늘려가면서 노비들은 점차 장원의 생산에 투입되었으며, 노비 노동은 소작농 노동과 함께 호족 장원의 생산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당시 노비는 너무 비싸서 그리 많은 편이 아니였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호족이라는 개념을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국사, 일본사를 할 때는 다른 각도에서 호족의 개념을 정리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호족이라는 용어는 <대토지 소유 개념, 일족 개념, 사병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을 동아시아사에서는 <호족>이라고 정의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5호 16국 시대의 개막 - 5호가 내려와 진을 몰아내다

이번 장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5호의 중국 진출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5호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을 말합니다.

1.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다투다

5호는 고대 사회 이래 중국이 선진 문물을 수용하지 못한 미개민족으로 분류한 <오랑캐>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대 <중화사상>의 기틀이 마련된 이후 <황하문명>에 소속되지 못한 비문명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양자강 유역의 오, 월, 초 등이 중화문명에 소속되었고,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화 문명권은 서방의 진 ~ 남방의 양자강 ~ 북부 황하유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명권을 벗어난 지역은 모두 <오랑캐>의 지역이라고 규정하였고, 진시황, 한무제 등은 오랑캐 문화권인 북방 흉노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이 흉노 원정이 국가 멸망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진의 만리장성 축조, 한무제의 무리한 흉노 정벌 등은 당시 통일된 중화 제국에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강력한 중국의 통일왕조도 이들 유목문화권을 완전히 정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즉, 만리장성을 두고 북방문화권의 유목민족과 중화문화권의 중국왕조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강력한 왕조가 있던 시기에는 두 문화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후한의 멸망 이후 서진 시대의 혼란한 중화민족의 사회상은 이 두 문화권의 주도권이 완전히 북방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북방 문화권의 유목민족들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서 따뜻한 농경사회로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비, 조조 등의 이민족 이용 정책으로 중화지역에 진출한 유목민들은 용병으로서 활약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진 시기에는 이제 대놓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화지역에 터전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민족의 중화진출에 신호탄을 쏜 민족은 가장 치열하게 중화민족과 대립하였던 <흉노>민족이었습니다.

2. 후한기에 이미 장성을 넘은 이민족들이 많았다.

5호의 진출이 후한 멸망 이후에 본격화 되었지만, 실제로는 후한기에 이미 5호가 중국 내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전한의 멸망과 신의 건국 및 멸망으로 지방분권적 호족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던 한 제국은 후한기에 접어들면서 이민족의 중화 거주에 대하여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흉노가 중국에 복속하면서 만리장성 이내에는 오랑캐 민족이 거주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삼국시대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남방을 괴롭혔던 강족은 회유책으로 중국내 거주를 인정받았고, 저족도 중국내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저족과 강족이 중국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관중일대에 정착하면서 이민족은 쉴세없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강통과 같은 지식인들은 이민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어 훗날의 화근을 막아야 한다며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통 <사융론>이라고 하지만, 당시 혼란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이민족을 이용해야 했던 국가세력은 이러한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즉, 이민족은 5호 민족이 중국내에 거주하면서 한민족과 이민족이 섞여 이민족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됨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됩니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호한체제 : 오랑캐와 한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실제 이후 중국사에서는 당, 송, 명과 같은 중국 전통 왕조와 요, 금, 원, 청과 같은 이민족 왕조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형국으로 흘러갑니다. 실제 중국사에서 절반은 이민족 왕조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이러한 이민족 왕조를 자국사로 편입하여 <중국사 내의 소수민족 시대>라고 규정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도 동북공정, 서북공정, 티벳정복 등의 중국 역사 왜곡과 맞물려 <중화 중심 세계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네요.

3. 5호는 국가를 세우다

5호란, 중국문명권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 북방을 점령한 이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5호는 <흉노, 저, 갈, 강, 선비> 등 유목민족을 말합니다. 이 5호의 국가들이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각각 16국을 건국하는데, 이 시기를 북방 5호 16국 시기라고 합니다.

5호 16국 시기의 시작은 316년 서진이 망하여 동진 정권으로 이동한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중국 왕조인 서진은 흉노 추장의 반란(영가의 난)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이민족들이 북방의 정권을 잡아 각각 다양한 왕조를 건설하였으며, 439년 북위가 북방을 완전 통일할 때 까지의 시기가 5호 16국 시기입니다.

먼저 5호 중 주도권을 잡은 것은 흉노의 한족입니다. 흉노는 중국 영토에 선이주한 흉노 지배층과 결탁하여 <한화된 흉노>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나라를 건설합니다. <한>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중국 한나라의 민족을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진의 멸망으로 선비, 저족 등이 중국에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서진이 망한 뒤 사마예는 사마씨의 2번째 정권인 동진 정권을 양자강 유역에 건설하여, 중화 민족은 남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한>이 내분으로 망한 뒤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은 갈족의 <전조>였습니다. 전조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남조를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하려고 했지만, 내분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저족의 <전진>이 화북을 통일하였고, 이 전진의 위세는 남부 중화 국가를 바로 토벌하고 중국을 통일할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진의 유명한 황제 부견은 어이없게도 <비수의 전투>라는 역사상 유명한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부견은 유리한 위치에서 기습, 야습, 매복 등으로 쉽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싸움은 정당해야 하므로, 평지에서 정당하게 군사력으로 싸워야 한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다가 패한 것이지요. 결국 부견은 전쟁에 지고 이후 살해됩니다. 부견의 <전진>이 망한 다음 북방 이민족 국가는 북위, 후연, 후진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여 5호 16국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이 5호 16국 시대가 북방에서 지속되는 동안 남방의 중화국가들은 동진 - 송 - 제 - 양 -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 시대를 열어갑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동진 정권부터 시작해서 5호 16국 시대의 남방 정권들을 살펴보도록 하죠.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이후에는 5호 16국이 끝났으므로, 북위 vs 남방정권의 <남북조>시대라고 부릅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나라 : 유교를 국교화하여 체계를 정립하다

이번 장에서는 한나라 시기의 가장 큰 업적인 한무제의 유교 국교화를 중심으로 한나라 시기 유교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1. 한나라 초기의 유교 사상

한의 초기, 건국자인 유방은 유교에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건국집단인 유협집단도 수준낮은 의리, 충성 등의 기초적인 이념만으로 뭉친 협객집단이었습니다. 따라서 건국초의 유방은 저명한 학자인 <육가>에게 학문적 교양을 배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육가>는 유명한 말을 하면서 유방에게 유교이념을 받아들일 것을 권합니다.

<말 위에서 천하를 달리며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육가의 말을 듣고 공자묘를 만든 유방도 아직 유교이념에는 무지했습니다. 그리고, 유방이 죽은 뒤 세력을 잡은 유방의 부인 여씨 일족은 유교를 왜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초기의 한에서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도가가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도가에 있는 신비주의 사상이 유행하여, 신선이라던가, 불로장생 등의 미신적인 부분이 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흔히 이러한 신비주의적 도가사상을 황로사상이라고 합니다. 또, 왕조 개창의 이념이었던 음양오행설 사상(음양오행의 순환으로 새로운 왕조가 개창되었다는 믿음)이 민간에 유행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운명과 자연에 맡기는 경향도 많았습니다.

실제, 한 초기 문제, 경제의 태평천하도 이 음양의 순환 원리에 잘 따랐기 때문이라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한 문제 시절의 <가의>는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해야지 미신으로 풍속을 교화할 수 없다며 황제에게 유교이념을 수용할 것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가의의 노력으로 일단, 유교가 한나라 사회에 침투할 수 잇는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아직도 한에서의 유교 수준은 미흡했습니다.

2. 한무제 : 강력한 유교주의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다

이러한 미신적인 풍조를 일시에 정리하고, 유교주의에 입각하여 황제지배권을 강화한 사람이 바로 한무제입니다.

한무제는 군주권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을 받아들이고, 법가적 유교정치를 완성합니다. 또, 유교를 관학화 하여 오경박사, 효렴과, 태학 등을 정비하여 유교질서에 입각한 현실적인 관료군을 육성합니다.

그리고 효제 도덕을 중시함으로서 지방 권력자들에게 일정한 제약을 줌과 동시에, 촌락을 유교 윤리 공동체로 이념화 하여 국가 권력에 대한 충성을 강조합니다.

이 한무제의 유교 관학화 정치는 국가가 유교를 보호하여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윤리는 동아시아 문화의 성격을 유교주의로 만들어 버리는 대 사건이었으며,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가정윤리가 동아시아 사회에 정착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3. 유교주의의 시작 : 동중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은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이제 지겨울 때가 되었네요. 여기선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천인상응설은 하늘(천)을 중심으로 하여, 지상의 황제(인)을 끌어들인 정치도덕론입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황제는 천의에 따라 정치를 행하므로, 황제가 도가 있다면 하늘이 감응하여 황제의 권위를 신성화 시켜줄 것이고, 황제가 도가 없다면 하늘이 알아서 심판할 것이라는 <천과 인간의 상응>입니다.

이것은 음양의 순환에 따라 왕조와 천자가 바뀐다는 음양오행설을 황제권에 대입한 유교원리로 한무제의 <천자 권위 확립>에 큰 역할을 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음양오행설이 맹자의 <혁명론>을 인정하여 왕조교체를 긍정적으로 보았다면, 동중서의 이론에서는 <황제권을 심판하는 자는 하늘>이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서 혁명이나 비정상적인 왕조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신하와 백성은 유교이념상 아버지인 황제를 벌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부도덕함은 하늘이 심판할 뿐입니다.

또, 이러한 유교사상의 이념 속에서 동중서는 태학(중앙), 군국학(지방) 등을 정비하고, 스스로 교수가 되어 5경 중심의 유교학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학문기관의 발달과 함께 인재 등용의 방법도 바꾸기 시작합니다. 원래 한 초기에는 낭관이라고 하여 궁정에서 일하는 관인 후보들을 관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는 부호가 재산을 납부하면 관료로 채용하는 자선제도도 있었습니다. 황제는 수시로 특명을 내려 현량한 자를 1인씩 추천하라 하여 관료로 쓰기도 했습니다.

동중서는 이러한 제도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일합니다. 즉, 천거와 선발에 가장 효율적이고, 능력중심적인 방안으로 <효렴과>를 제시했습니다. 효렴과는 지방관이 효렴한 자를 지방에서 1인씩 추천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을 동중서가 다시 재편하여 향거리선제라는 제도로 정착했습니다. 이 제도는 추천과 시험을 병용하는 제도로서 지방관이 관료를 선발하고, 현량, 효람한 향촌 자제를중앙에 천거할 수 있게 한 제도입니다.

시험을 봐야 하므로 유교적 소양이 필요하나, 실제는 추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여, 지방관은 유력 집안의 호족들을 천거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훗날 9품중정제로 이어져 호족이 호족을 추천하는 관례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4. 금문학파와 고문학파가 등장하다.

초기에 한대 유학을 연구할 때 학자들은 전국시대 이래로 구전되어오던 경전들을 한나라에서 사용하는 예서체로 필사하여 작성한 후 연구하였습니다. 이것은 한나라의 관학으로서 한무제 이래 후한말까지 한나라 유학의 주요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고대 문헌을 한대 글자로 필사한 문헌을 <금문경>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왕망의 신에서는 공자의 옛 터에서 발견된 경전 등 춘추시대 이래 당시 고문체로 쓰인 고본을 직접 연구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이렇한 고문을 <고문경>이라고 합니다. 이 고문경 연구는 후한 시대 <금문경>의 관학과는 달리 <민간>에서 연구되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고대 학파의 두 파를 정리하여 완성한 사람이 곧 <정현>입니다. 고대학파(훈고학)은 정현에 의해 사상적 통일이 되었고, 이것이 당나라 시기에는 공영달의 <오경정의>로 완성됩니다. 오경정의란, 고대에 중요한 5경을 정리하였다는 것으로 최소한 당대 이전에는 4서보다는 5경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구학의 연구는 <고문경>이든 <금문경>이든 책의 자구 해석에 주력하는 경향이 강하여, 철학이나 사상으로 발전하기 보다는 어문학에 가까웠습니다. 이것은 그 해석된 문구를 그대로 믿어 버리는 폐단을 낳아서 유학이 획일화되고, 합리적이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국가가 관학화 한 금문경은 고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서 동중서의 천인상응설, 왕망의 찬탈이론, 참위설과 음양오행설의 유교화 등의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딱 좋았습니다.

이러한 유학의 미신화, 정치화에 반대하여 유학도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학자가 <왕충>입니다. 그는 논형이라는 저서에서, 동중서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즉, 천인상응설이라는 개념에서의 천은 하늘과 인간이 상응하는 주체라고 동중서가 주장했는데, 왕충은 그것이 바보같은 소리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하늘은 우주라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이 인간의 선악에 관여할 수 없고,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황제권이 하늘에서 왔다던가, 신이 존재한다던가하는 말들은 모두 인간이 유교를 이용하여 지어낸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사라질 뿐 내세도, 지옥도, 천국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그는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공자, 맹자마저 평범한 인간임을 주장합니다. 공자를 성인화하여 그의 말을 모두 <신성화>한다면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신이 탄생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학문이라는 것은 과학적, 합리적인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은 위진남북조 시대에 타락한 유학을 비판했던 청담사상 등의 체제비판 사상과 연결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이야기 41 - 한무제의 국가재정 장악 정책

중국 한나라의 이야기는 절반 이상이 한무제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고대 사회에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유교, 불교, 율령, 한자 체제를 정비하여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틀을 잡았습니다. 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에서 중국 고대의 전통을 정리하고, 이후 중국체제의 기반을 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들을 알면 중국 전반의 제도와 사상이 눈에 잘 들어옵니다. 이번 장에서는 간략히 한무제의 재정 장악 정책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황실재정은 국가 재정에 포함되지 않는다.

한무제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물론, 이전부터 진시황이 시도한 정책이긴 하지만 진시황은 실패했었고, 실제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한 사람은 한무제입니다.

한무제는 황제전제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이 필수였지만, 중앙집권을 확립하면서 <전매제도, 균수-평준법> 등의 국가통제정책으로 엄청난 국가재정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재정을 뿐 황제 개인의 재정은 아닙니다.

그는 황제 지배체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하려면 국가재정의 확보와 함께 황실재정도 독자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황실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재정과는 별도의 다양한 제도를 마련합니다. 이 제도는 사기의 화식열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2. 황실재정을 뒷받침하는 기구

황실재정이란, 국가재정과는 다른 황제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사적 재정을 말합니다. 한무제는 국가재정을 담당하는 기구는 9경 중 <대사농>에게 맡기었는데, 황제 개인의 재정을 관리하는 부서는 9경 중 <소부>에게 맡기어 재정을 2원화 하였습니다.

실제 국가 세금중 물품세(토지세 : 전조), 인두세(산부, 경부, 산자) 등은 국가 공공 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지 외의 상공업에서 나오는 세금은 황제 재산으로 간주하였고, 미성년자에게 받는 인두세(구부)도 황제 개인이 관장하였습니다.

또한 산림, 하천 등의 자연 물산은 모두 황제 개인의 재산이라는 유교적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자연에서 나오는 산물은 모두 황제의 재정으로 귀속시켰습니다. 따라서 자연 물산을 유통시키는 도시의 상인들과 관계된 세금은 황제의 것이었죠. 또 지방 제후들에게는 천자에게 제사지낼 금을 바치라고 하면서 막대한 금을 걷었는데,(주금률) 이것도 황제의 재산이었습니다.

한무제는 오수전 등 화폐도 독점주조하여 황실재정을 늘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부 외에 <수형도위>라는 기관을 만들어 화폐를 전담하게 하여 황실재정을 늘렸습니다.

3. 조세 금납화를 시작하다.

아시아에서 고대 사회의 세금은 대부분 인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인두세>입니다. 하지만, 이 인두세가 기본인 것이지, 다른 세금을 걷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물품세는 토지, 상업, 어업, 광업 등을 구분하여 걷었습니다. 인두세는 성인, 아이를 구분하여 걷었습니다. 또 요역을 대납할 경우에도 엄청난 세금을 걷었다고 합니다.

한무제는 여기에 더하여 <재산평가세>도 걷었습니다. 이것은 무제 이후 재정 고갈이 심해지면서 더욱 강화되는 세금 제도로, 무제 이후에는 강제 징수 등의 항목이 강화되어 백성들을 괴롭혔고, 이것이 한의 망국을 초래하는 경제적 요인으로도 작용합니다.

한무제는 이러한 모든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하여 조세의 금납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화폐납이 일반화된 당 말기 이후 <양세법> 이전의 고대 사회에서는 아주 특수한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한무제 시기 엄청난 농업, 상공업의 발달로 가능했던 일이었으나, 이 화폐제도는 아직 고대라는 사회체제의 발전단계로 볼 때 무리수였던 듯 싶습니다. 중국사회가 고도로 발전하던 한무제기에도 실제 이 제도가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화폐를 사용하게 되면, 결국 물품 유통의 수요와 공급이 원할해지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국가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인들이 화폐제도를 통해 급성장하였고, 그들은 상업기반을 바탕으로 <토지매입>에 더 열을 올렸습니다. 결국, 후한과 위진남북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 토지를 가진 대상인들이 <호족>으로 군림하면서 이후 귀족 사회의 주체가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중국의 농민반란이나 왕조 교체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황의 왕조 다음에는 적의 왕조, 이후 청의 왕조 이런 식으로 오행의 순환을 반란 이론으로 대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도가사상과 맹자사상의 혁명론이 가미된 것이 중국 전통의 농민반란 성격이었죠. 적미의 난과 함께 녹림의 난도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적미의 난에 호족과 지주들은 적극 가세하여 <신>의 멸망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남양과 하북지방의 호족 세력을은 한의 유씨 혈통인 유수를 중심으로 뭉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한>왕조입니다.

후한 왕조는 그 탄생부터 <호족>들의 지원으로 탄생한 호족연합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한의 유방이 천민적 성격의 유협집단과 함께 호족적 성격인 항우를 물리치고 집권한 것과는 정반대의 집단입니다. 후한은 건국주체 자체가 대토지 사유화에 적극 찬성하는 세력으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호족이 주체가 된 정권입니다.

이것은 전한과 후한을 나누는 큰 기준이 됩니다. 전한이 한무제로 대표되는 개별인신적 황제지배체제의 국가라면, 후한은 호족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나가는 호족연합적 전제지배체제의 사회입니다.

2. 광무제의 중앙에서의 중앙 집권 정책

후한을 창시한 유수(광무제)는 천도하자마자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낙양을 중심으로 한 하북정권을 성립합니다. 이것은 광무제와 그 건국주체가 하북의 기반을 이러받은 대토지 소유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광무제는 즉위 후 고민한 것이 호족연합으로 탄생한 정권인만큼, 호족들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방에서 호족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중앙에서 만큼은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실시한 정책이 중앙의 외조인 3공의 권한을 약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후한 대의 상공은 거의 명예직이었고, 실제 정무는 황제가 상서를 통해 하는 한무제기의 상서 정치에 가깝게 실시하였습니다. 즉, 상서대를 만들어 그 하부조직으로 상서령(장관), 상서복야(차관), 6조(행정실무)의 부서를 두었는데, 이로서 상서대 등 대각(내각 : 내조)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또 황제를 보필할 수 있는 측근 세력으로 <환관부>를 설치하여 환관들을 황제 측근으로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후한 대 환관이 발호하는 계기가 되어 후한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3. 광무제의 지방에서의 호족 연합 정책

광무제는 중앙에서는 왕권을 강화했지만, 지방에서는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한의 성립 근거 자체가 호족 연합적 정권으로서 <국가통제>를 실시하는 신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광무제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할 수 있는 <국가통제체제>의 명문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방 통제를 위해 전한기에 실시했던 13주 자사제를 계승하여 지방을 감찰하는 정도로 지방을 통제하였습니다. 또 사례교위를 신설하여 수도 및 가까운 지방의 정무를 순찰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황제의 녹을 먹는 중앙 신하들의 감찰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지방에서의 정책은 <호족적인 성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광무제는 대토지 소유자에 대하여 전혀 손을 쓰지도 못하였고, 노비 해방령을 내리긴 했지만, 노비매매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합니다. 후한에서의 지방관리나 태수는 호족의 자제로 선발하였습니다.

이 때 관리 선발은 군내 인재를 유교적 교양에 의거하여 중앙에 추천하면, <여론>에 의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교양은 명분뿐이었고 실제 선발은 유력한 호족의 자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유력한 호족 가문에서 태수를 하고 있는 관계로, 지방의 실제 운영은 <호족>세력에 의한 것이었고,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기존 호족이 새로운 호족을 천거하는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호족 성향의 지방 관료가 새로운 호족 관료를 선발함으로서 호족간의 유대는 깊어지고, 태수는 봉건영주와 같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태수 아래의 하급관료들은 태수를 위하여 충성하는 <군신관계>적인 성향을 보였고, 후한의 지방 세력은 곧, 유력한 호족과 그 하위 호족들의 상하관계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함으로서 후한의 호족은 단순한 토지 소유 호족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관료적 호족이 많았고, 이러한 호족들이 낙양을 중심으로 호족적 문화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4. 유학은 계속 퍼져나가다.

후한시대에도 유교는 계속 되었습니다. 광무제 역시 전한의 이념을 본받아 태학, 오경박사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한무제 이래 유교 관학화의 이념을 계승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숭유정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였고, 덕치주의 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명제, 장제의 전성기 시대에는 공평한 조세 부과와 무리한 징병제도의 폐지, 사학의 융성 등을 통해서 유교적 애민정치의 토대를 닦았고, 미신적이던 전한 시대 동중서의 참위론을 몰아내고 <공자>의 참뜻을 읽기 위한 고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5. 중앙 세력은 부패하고 호족세력은 중앙에 도전하다.

후한시대가 호족연합정권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족세력들이 대토지를 사유화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호족들은 지방을 근거지로 중앙과 지방 정계에 진출하고, 독자적인 봉건영주처럼 군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족들은 중앙 관직에 올라가면, 외척이나 환관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 정치의 파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특히 후한기에도 어린 황제의 즉위가 많았던 관계로, 외척의 발호, 환관의 외척견제, 호족의 중앙진출이라는 세 가지 맥락이 후한의 정치질서를 이끌어 갔습니다.

중앙에서의 혼란은 곧 지방에 큰 파급을 미치게 됩니다. 태수를 임명할 때의 부정부패와 청탁 정치, 파벌 싸움은 곧 사회문제로까지 번집니다. 황제권이 약하면, 외척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려고 하고, 황제권이 강하면 황제가 환관을 이용하여 외척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중앙 파벌싸움은 끝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충성과 명예, 도덕, 중용 등을 숭상하는 관료지식인들과 재야 호족들은 중앙의 더러운 파벌 세력을 비판하게 됩니다. 특히 이들이 비판한 세력은 황제를 등에 업고 설치는 <환관> 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재야에서 태학 등을 중심으로 환관을 비판하는 깨끗한 세력을 <청류>라고 하며, 기존 환관에 기대에 정치를 하는 더러운 세력을 <탁류>라고 합니다. 청류가 탁류를 비판하면서 맑은 정치를 하자고 주장하는 운동을 <청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응과 태학생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환관>세력들의 부패함을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환관파에 의해 주살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을 제 1차 당고의 금이라고 하죠.

1차 당고의 금 이후, 호족 출신의 대장군 두무, 진번 등은 환관을 주살하고 청류파 세력이 정권을 잡으려 정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것도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어 청의파들은 모두 주살당하였습니다. 이것을 제 2차 당고의 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야 세력들은 부패한 중앙세력에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관파의 부패한 정치는 극을 달려나갔고, 이것에 반발하는 청의운동은 더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의 멸망 후 위진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은 이 청의 운동을 주도했던 호족들이 귀족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호족들은 아직 환관세력을 누를 정도로 중앙 정치에 깊숙히 개입되지 못한 지방세력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탁류파의 승리로 후한은 이제 재기불능의 부패한 사회로 타락해갑니다. 이렇게 되자, 이젠 나라의 밑바탕인 농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황색의 신앙으로 무장한 황건군들이 농민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농민봉기를 국가가 수습하지 못하고,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 진압을 떠 넘김으로서 후한은 스스로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이야기 35 - 한 무제 사후 내외조의 대립과 전한의 멸망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가 죽은 직후 황제권의 약화와 전한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보죠.

1. 한무제가 만든 외조, 내조의 문제점

한무제는 자신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기존 국가 지배 기구인 진시황제 이래의 외조를 통제하였습니다. 즉, 황제권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외조 기관인 3공을 통제한 것이지요. 따라서 승상(재상), 어사대부(감찰), 태위(군사)라는 삼권은 이전보다는 상당히 약화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반면,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에서 일할 수 있는 비서기관인 상서, 중서라는 기관의 <시중>의 권한을 느렸습니다. 무제는 자신들의 측근인 조신(상서, 중서, 중시)들과 국사를 의논하여 처리하였고, 이러한 황제 측근 기관을 흔히 <내조>라고 합니다. 한무제의 <내조정치>는 강력한 황제와 그 측근 비서들로 이루어지는 정치로, 외조인 승상 등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정책집행기관 정도의 역할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한무제가 죽은 뒤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내조, 외조로 나눈 정치는 황제가 내조, 외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할 경우, 내분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는 점을 한무제가 간과한 것이지요.

2. 염철 논쟁

이제 어리석은 황제, 나이어린 황제들이 한무제의 뒤를 잇게 되면서 전한 특유의 내조, 외조 다툼이 시작됩니다.

그 첫 시작이 바로 유명한 <염철논쟁>입니다. 염철논쟁은 한무제가 죽은 바로 뒤, 내조의 인물들이 외조를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내조의 곽광은 외조의 어사대부 상홍양이 한무제 시절에 실시한 전매제도, 평준법, 균수법 등의 모든 조치들이 상공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폐단이 많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내조의 곽광은 상업가들과 귀족세력의 지지를 바탕아로 자유 경제를 주장하였고, 귀족의 토지소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한무제의 신임을 받았던 상홍양은 전매제도와 국가통제정책들이 한무제 시기 국가 부강의 기반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사업들은 꼭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이 염철 논쟁은 처음에는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부 전매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학문적 성격도 가진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와 외조의 주도권 싸움이었습니다.

이 주도권 싸움에서 내조가 승리함으로서 한나라의 정치는 <내조>가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선제 등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외조>에 힘을 실어주면서 외조가 내조와 동등한 위치를 갖게 되기도 하였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전한은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3. 내조정치가 학자들의 기관이 아니라, 환관의 거처가 되다

한나라 시대에는 한무제 사후에 이상하리만큼, 나이어린 황제들이 즉위하게 되면서 외척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이 외척 세력이란, 황제의 어머니(모후)를 중심으로 외가 세력, 황제의 부인(황후)를 중심으로 한 처가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황제가 나이가 어릴수록 외척인 외조부, 외삼촌 등의 입지가 강해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실제 한나라에서 황제들의 절반은 외척세력이 득세하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황제들은 나이가 들어 스스로 정치할 시기가 되면 이 외척세력들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그 때마다 내조에 <환관>들을 측근으로 심어 외척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궁정에 외척이 득실대므로, 황제가 이들 외에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자들은 거세당한 채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환관>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한나라 후기에는 내조와 외조의 싸움 이외에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거리로 대두하였습니다. 실제 황제 측근인 내조를 환관이 장악하면, 국가행정기관인 외조를 외척이 장악하면서 서로 다투는 형세였던 것입니다.

실제 전한기에는 외척이 환관보다 강했지만, 후한이 건국된 이후에는 환관이 외척보다 강했습니다. 따라서 전한은 외척에게 멸망하였고, 후한은 환관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대에는 아직 군신윤리라는 유교덕목과 한무제 이후 황제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남아있던 시기라 외척이나 환관이 황제를 마음대로 폐립하고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을 건국한 왕망도 황제를 폐립하고 한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천명하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보면 전한의 멸망은 한무제의 내조정치 때문에, 이후 외척과 환관이 외조, 내조에서 대립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결국 외척 왕망에 의해 국가가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즉, 최고의 전성기였던 한무제의 강력한 정책은 한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정책이 된 것이지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이야기 34 - 한 무제의 황제지배체제 완성

이번 장에서는 한무제에 대한 이야기만 다루겠습니다. 한무제의 업적을 내치, 외치, 유교정치, 동중서라는 관점에서 나눠 다루겠습니다. 상홍양 등에 관련된 경제정책은 다음장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1. 한무제의 황제지배체제의 배경

한무제의 정치체제는 중국 역사상 <황제지배체제>를 현실적, 이념적으로 완성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계속적으로 이용할 황제지배체제를 논리적, 현실적으로 완성하였고, 실제 그 이념에 따라 가장 고대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첫 번째, 앞에서 설명한 문제, 경제가 이루어놓은 업적 때문입니다. 역대 유명한 정복군주 중에서 홀로 잘나서 유명해진 왕은 거의 없습니다. 광개토-장수왕에게는 소수림왕이 이룬 불교-율령 체제가 뒷받침 되었고, 진흥왕에게는 지증-법흥왕의 체제 개혁이 뒷받침되었죠. 중국 역대 황제들도 마친가지입니다. 한무제의 앞에는 문경지치라는 중국 역대 역사로 볼 때 가장 안정된 평화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토지제도와 사회안정으로 인해 축적된 정치, 경제적 역량이 한무제를 통하여 빛을 발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군현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정비하였고, 유교를 관학화 함으로서 그 전제체제를 사상적으로 정비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사상적 체계 정비에는 동중서라는 걸출한 학자의 역할이 매우 지대하였습니다. 동중서는 법가적인 황제지배체제 사상에 대한 <이념적 윤리>로서 황로사상, 음양사상, 유교사상 등을 총원하여 체계적인 황제지배체제의 이론을 완성하였고, 이것이 유가적 덕치주의를 포함한 <천인상응설>로 귀결됩니다.

세 번째로 그의 황제지배체제는 <중화사상>의 완성으로 주변 <이민족>에게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겠다는 유교적 조공-책봉 관계 속에서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를 원할히 하기 위하여 한무제는 동,서,남,북으로 엄청난 원정을 감행하고, 정복전쟁을 시도합니다.

2. 연호와 역법에 관심을 두다

한무제는 황제권 강화를 위하여 상당히 많은 제도를 만들었고, 구래의 제도는 수정하였습니다.

일단 수용한 제도를 보면, 진시황제의 군현제를 부활한 것, 통제경제체제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러한 진나라의 제도에다가 유교적 이념을 더함으로서 법가와 유가를 혼합한 황제지배체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는 일단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연호>란 황제가 정한 일종의 <달력>을 말합니다. 예로 한무제가 즉위한 지 첫 해에 <건원>이라는 연호를 쓰면 그 해부터가 건원 1년이 되어 날짜계산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황제는 역사적 상황이 변동할 때마다 여러 연호를 바꾸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지 시간개념을 넘어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강대국이 연호를 사용하면 그와 연관된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연호를 수용해야 했고, 따라서 <연호>라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황제의 칭호로서 천자국이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고구려 역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연호를 사용하는데, 이렇게 연호가 등장함은 그 나라가 천하의 중심이며, 천자국이라는 <자국중심의 천하관>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훗날 신라에서는 체제가 정비되는 법흥왕기부터 연호가 등장합니다.

한무제 때는 또 역법을 중히 여겼습니다. 연호와 달리 역법을 사용한 달력은 따로 있었는데, <역법>이라는 것은 연호와 같이 천자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역법은 하늘의 변화를 관측하여 천자가 하늘의 뜻을 파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역법에 따라 국가의 대사를 정하는 것은 천자의 임무였습니다. 동중서는 이것을 하늘의 뜻과 천자의 뜻이 서로 상응하는 것을 관찰한다고 하면서 <천인상응설>의 이론적 근거로도 활용하였습니다.

3. 내조정치를 시작하다.

한무제기에는 진의 제도를 본따 중앙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데, 이것이 중국 전통 행정제도의 바탕이 됩니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3공제를 받아들이지만, 이중에서 행정권을 가진 승상의 권한을 약화시킵니다. 대신 황제의 개인 비서인 상서, 중서를 중용하여, 상서 중서가 적극적으로 황제를 보필하면서 정치에 참여합니다. 이것을 보통 <내치주의>에 입각한 정치라고 합니다. 중국사 전체에서 보았을 때는 <내조정치>라고도 하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국왕권을 보호하는 비서기관인 시중, 중상시의 권한이 상당히 강해지고, 이것이 한무제 사후 한나라 멸망으로 이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한의 중앙제도에 관해서는 제도사 파트에서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만...

4. 지방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다.

한무제는 강력한 군현제를 실시하여 지방의 제후들을 감시합니다. 일단 군현에 파견하는 관리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하였습니다. 또, 군현을 총체적으로 감시하여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가 군현에 내리는 명령을 전달하는 관리로서 <자사>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자사는 위진남북조 시대로 가면 군현과 함께 하나의 행정구역화됩니다.

한무제는 지방 제후를 약화시키기 위해 철저한 입법에 의한 <법>으로서 통제하여 감히 황제에게 덤비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제후왕을 감독하기 위한 법으로 추은령, 주금률, 좌관률, 부익률, 아당률 등을 제정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볼까요?

추은령 : <추은>은 은혜를 나누어 가지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이 죽으면, 제후왕의 땅은 1명이 아닌 여러명의 자식들에게 분할 상속하게 합니다. 따라서 제후왕의 영토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규모로 쪼개지게 되고, 결국 황제에게 다시 귀속되게 되는 것이지요.

주금률 : <주금>은 금을 만들어 바치라는 뜻입니다.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종묘제사를 하는 8월이 되면 제후들은 제사에 필요한 황금을 진상해야 합니다. 만약 황금의 양과 질이 떨어지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좌관률 : <좌관>은 품위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들은 황제의 허락없이 백성들과 절대 군신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부익률 : <부익>은 더 이상의 노역을 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제후왕은 황제의 허락없이 황제가 정한 조칙에 위배되는 부역이나, 잡세, 토지세를 일체 걷을 수 없다는 법입니다.

아당률 : <아당>은 자신의 당을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약 파견된 관리(자사 등)가 제후왕의 죄를 알면서도 한패가 되어 죄를 황제에게 보고하지 않은 경우 파견된 관리의 죄를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법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제후 통제는 곧 제후들이 봉토조세자로 전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무제 이후 지방의 제후들은 왕권에 반항할 힘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한무제 사후의 정치투쟁은 중앙에서 한무제가 키운 내조와 환관끼리의 다툼이었습니다. 반면, 지방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경제적 힘을 키워나가게 되는데, 이러한 경제적으로 성장하여 정치세력화되는 세력이 훗날의 <호족>세력입니다.

5. 유교를 관학화하다

한무제기에 유교가 관학화 되면서 국가 사상으로 발전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이유를 들라면, 한초에 유행한 황로사상 때문입니다. 황로사상은 도가적 색채가 강하여 무위자연적인 성격을 내포한 사상입니다. 보통은 신선술을 내포한 사상이라고도 여겨지죠. 한나라 건국 자체가 유가에 무식한 유협집단과 지방세력에 의한 것인 만큼, 한 초에에는 미신적인 도가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도가는 현세를 부정하고 은둔과 자유를 추구하는 협객집단의 이념과 많이 맞았습니다. 그러나 인위적 정치를 배격하고 <자연으로 돌아가 편히 누려라>라는 사상은 중앙집권적인 한의 통치이념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에서는 더 체계적인 통치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이 때 가장 체계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이 바로 중용을 바탕으로 하는 유가였습니다. 유가의 이론은 현실적이고 왕권옹호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또 수신제가와 치국평천하라는 국가윤리는 발췌하여 사용하기 딱 좋았습니다. 거기에 유가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할 수 있는 <경전>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경전은 필요한 부분을 구미에 맞게 편집해서 쓸 수 있는 학실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유가 중 공자, 맹자, 순자 등등 원하는 사상가를 원하는 만큼 원하는 때 이용하기 좋았으니까요.

실제로 유가의 사상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여 독특한 유가논리를 펼친 사상가가 바로 <동중서>입니다. 동중서는 한무제의 학사가 되어 현량과(효렴과)를 통해 어진 관리를 추천으로 뽑아 그들과 함께 유교사상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대표적인 그의 사상은 <천인상응설>로 대표됩니다. 이것은 하늘과 인간은 그 5행의 흐름에 일통하여 서로 감응한다는 설인데, 여기서의 감응 주체는 곧 천자인 황제와 자연의 주제자인 우주입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천자의 권위를 신격화하는 논리로서 이용됩니다. 이 논리는 천자의 권위를 5행과 연결시킵으로서 극대화됩니다. 하 - 은 - 주의 3대는 각각 오행중 화, 목, 토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그 이후 한 왕조는 천명을 물려받은 5행의 연속이자, 천지신명의 뜻이므로 누구도 도전할 수 없다는 논리로 귀결됩니다. 따라서 천자는 하늘의 뜻을 항상 살펴야 하는데, 이 하늘의 뜻을 살피기 위해 마련된 것이 <역법>입니다. 그리고 5행은 또 다시 끊임없이 화,목,토,수,금으로 돌고 돌므로 이 천인상응의 논리는 <참위설, 예언설>과 같은 미신적 방법론과도 연결됩니다.

실제 이 사상은 비과학적이고 너무 신비주의적이다라고 하여 크게 비판받았고, 중국 과학사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미신적인 사상으로 취급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왕망이 전한을 찬탈하고 신을 건국할 때 이 사상을 근거로 5행의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고, 그는 동중서의 천인상응설과 유교주의를 인정하기도 하였습니다.

6. 유교주의를 위한 제도

한의 유교에서 몇가지 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유교 연구를 위해 5경박사를 두었는데, 5경박사란 오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은 한, 당 대에는 오경, 이후 송 이후에는 사서가 유교저서에서 강조됩니다.

또 한 대에는 지방의 군에서 청렴한 청년들을 인품에 따라 등용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효렴과>라고 합니다. 효렴과는 지방에서 추천된 청년을 중앙에서 천거하여 관리로 임용하였습니다. 또 유교 교육을 받은 자들을 관료로 삼기 위한 학교 제도로 <태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에도 후대 태학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한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도 합니다.

이 유교적 제도가 완성됨으로서 거칠었던 법가적 황제지배체제가 유가적 이념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 집니다. 이 모든 제도들은 유가 이념을 반영하는 것으로 후대 당나라에서 더욱 정교하게 제도화됩니다.

7. 한무제의 외정

한무제의 외정은 동, 서, 남, 북의 <오랑캐>을 모두 <중화>라는 민족 아래 둠으로서 중국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중국 외부의 국가들에게 <봉건적 제후>로서의 권한을 준다는 의식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실제면에서 보면 흉노 등의 이민족에 시달렸던 중국이 그 고질적인 폐단에서 벗어나기 위한 면이 더 강합니다.

동으로는 고조선을 정복하고 한4군을 설치합닏, 서로는 하서4군을 설치하고, 비단길을 개척하여 서역 무역의 활로를 열었습니다.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여 남해9군을 설치합니다. 북으로는 흉노와 끊임없이 격전을 벌입니다. 이러한 광대한 동,서,남,북의 정벌을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제, 경제 시대의 광대한 경제력과 상업통제로 인한 이윤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서역에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흉노를 막기 위해 흉노와 적대적인 관계의 국가들(월씨국, 오손국)과 동맹을 맺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서역 이동으로 비단길이 개통되었고, 동서문화의 교통이 열렸으며 중국인들은 서역이라는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세계관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서역과의 비단 무역을 중국이 직접 주도함으로서, 비단 중계무역을 하던 흉노가 경제적 타격을 입게되었고, 결국 비단길의 개척은 무력이 아닌 경제력으로서 흉노를 압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흉노는 이후 고조선과의 연계를 통하여 세력을 동으로 확장하려고 했고, 고조선 역시 대동강 중계 무역을 통해 남방과 흉노, 중국을 연결한 무역 네트워크를 만들려했습니다. 결국 한무제는 고조선 정벌을 집중적으로 시도하였고, 이에 고조선이 멸망하면서 흉노의 세력은 더욱 갈 곳을 잃게 됩니다. 이후 흉노는 계속적으로 중국 국경을 넘나들며, 중국을 괴롭혔고 한이 망한 뒤 5호 시대에 중국 영토 안에 안주하여 중국 국가로서 한 때를 보내게 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한무제 시기 경제와 관련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자야겠네요... 이만...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이야기 33 - 한 왕조의 건국

이번 장부터는 중국 한 나라 시대에 대한 역사를 간략히 개관하겠습니다. 한 왕조는 건국기, 한무제기, 한무제 이후기로 역사를 나눠보고, 그 후에는 경제사, 제도사, 사회사를 다뤄서 쭉 정리하는 식으로 할께요. 자세한 한의 세부적인 역사는 이후 중국사 시즌 2, 시즌 3을 정리할 때 다룰 예정입니다.

1. 한 왕조의 건국과 유방

한의 역사는 진이 멸망한 이후 <초한지>에 나오는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의 싸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초한지를 보면, 힘이 장사였고 귀족집안 출신이었던 항우에 비해, 유방의 세력은 미약했고 그를 돕는 자들도 의리로 뭉친 의협집단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유방이 더 통솔력이 뛰어났고 시세를 잘 파악하여 항우를 물리치고 건국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승자의 관점에서 적은 기록이겠지만, 이 초한지는 중국 역사상 아주 드라마틱한 소재로 많이 이용됩니다. 예전에 패왕별희를 연극으로 본 적이 있는데, 중국인들의 사고에는 이 한의 건국이라는 것이 중국 역사에서 진시황의 최초 통일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루는 듯 싶더군요.

항우가 건국에 실패한 원인은 너무도 시대의 흐름을 못 읽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나라의 유산인 아방궁을 태우고, 진이라는 통일국가를 원수처럼 적대시한 것은 당시 새로운 집권층에게는 신 세력이라기 보다 <초적>세력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또, 지배층을 위한답시고 주나라의 이상 정치인 <봉건제도>를 시행하려 했던 것은 너무 역시대적 발상이었지요. 거기에 진의 근거지인 관중지방을 완전히 무시한 것도 실책입니다. 진은 망했지만, 진의 유산으로 계승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정치적 역량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었으니까요. 항우는 강남의 팽성에 도읍을 정함으로서 중국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역량을 모두 버린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한의 고조 유방은 한을 건국한 이후 진의 멸망을 거울삼아 법가주의적 통치를 계승하면서도 군현제가 아닌 <군국제도>를 통해 지방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수도도 진의 근거지인 함양와 가까운 장안으로 정했구요.

유방의 창업공신들은 항우와는 달리 능력으로 유방을 도와 건국까지 달려온 <유협집단>이었습니다. 솔직히 건국기 한나라는 유교가 뭔지, 예절이 뭔지도 모르는 협객들이 오로지 능력과 의리로 뭉쳐 달려온 집단이었습니다. 유방도 유교사상에 무지했습니다. 유방에게 가의와 같은 유교사상에 능통한 신하가 없었다면 유방 역시 건국 후 어떤 변수를 맞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교 사상이 한나라에 정착될 쯔음 유방의 창업공신 중 일부가 제거되고, 일부는 유교적 사상을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든든히 할 기틀을 마련합니다.

유방은 건국 후 <군국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군국제도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제도입니다. 유방이 보기에 봉건제도란,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쟁을 양산한 산만한 제도였고, 항우가 주장했다가 실패한 시대역행적 제도였습니다. 그렇다고 군현제는 진시황제가 실패한 정책으로, 봉건제와는 달리 국가 기반이 약할 경우 황제권을 보호해줄 든든한 혈적이 없어 위험한 제도였습니다. 결국 유방은 경기지방(장안인 수도 근기)은 군현제로서 황제가 직접 다스리고, 지방은 유씨 일족과 공신들을 분봉함으로서 봉건제도로 다스리는 절충안을 내놓는데, 이것이 군국제도입니다.

또 건국초기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유방은 흉노와 화친정책을 시도합니다. 진시황의 몰락 중 하나의 원인이 지나칠 정도로의 무모한 흉노 정벌과 만리장성 축조 등 인력 착쥐에 있었다고 생각한 유방은 흉노와의 평화를 통해 내치에 주력하고, 법가사상을 가미한 유교사상으로 국가 이념을 완성하려 했습니다.

또, 건국 후 유방은 이성제후들을 제거하고 동성제후(유씨)들에게 특권을 주는 정책을 점차 확대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창업의 일등공신인 한신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사냥감을 잡은 뒤에는, 필요없어진 사냥개를 사냥한다>라는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죠.

그러나, 유방은 무지한 촌부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탓에 유교적 지식이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곁에는 항상 유교적 학식이 뛰어난 학자들이 많이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특히 육가는 건국초기 유교사상 완성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진나라의 제도를 계승하여 법가주의적 통치제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위에 예악, 법률, 문화에 있어 유교적인 색채를 가미하는 법가적 유교정치의 실시를 유방에게 건의합니다. <창업은 마상에서 이룰 수 있어도, 수성은 마상에서 이룰 수 없다>는 말은 유명한 말이죠.

2. 문경지치의 시대

한을 세운 유방이 죽은 뒤 한나라는 한차례 건국 홍역을 치릅니다. 보통 유명한 제국들이 건국시조가 죽은 뒤 왕위계승과 외척 다툼으로 한차례 위기를 넘기고 더 단단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한이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유방이 죽은 뒤 부인인 여씨는 유방이 아끼었던 다른 부인들을 모두 주살합니다. 특히 미인이었던 두씨 부인을 죽인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여씨부인은 두씨의 눈을 파고, 얼마 뒤에는 손을 자르고, 또 얼마 뒤에 벙어리로 만들고, 또 얼마뒤 다리를 자른 뒤 변소간에 버렸습니다. 보통 옛 시대의 변소간에는 사람의 변을 받아먹고 사는 돼지들이 있었는데, 여씨부인은 자신이 평소 질투하던 아름답던 부인들을 <인간 돼지>로 만들어 죽지도 못하게 한 뒤 고통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유방이 통일할 때, 여걸로서 1등공신을 뽑으라면 부인인 여씨였습니다. 그녀는 중국을 통일하는 것을 우습게 알 정도의 베포 큰 여장부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유방은 그녀만 보면 무서워서 벌벌 기었다는 자료도 많이 보입니다. 그녀는 여씨 일족을 국가 주요 자리에 앉히고, 국정을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씨 일족은 문제 시대에 대부분 제거되고, 황제권이 다시 강해집니다. 정권은 여씨에서 유씨로 돌아온 것이지요. 이후 문제, 경제 시대는 중국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라고 하여 <문경의 치>라고 부릅니다.

문경지치는 문제와 경제의 중국 전통의 검약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문제는 가의의 <치안책>을 받아들여 유교식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덕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이 당시에는 미신적인 황노사상이 유행하였는데, 황노사상은 도교와 음양기적 색체가 상당히 강한 무위자연적이고 음양오행적인 사상입니다. 문제, 경제는 이러한 황노사상의 영향을 받아 무위자연의 순리와 우주 오행의 순리에 맞추어 국가 운영을 하였다고 합니다.

문경시대의 업적은 토지세의 감면이 가장 큰 업적입니다. 국가가 긴축재정을 하면서 백성들에게 토지세를 1/30만 받았고, 이것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또 연좌제와 육형제도를 폐지하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서 진시황제의 시대와는 다른 보다 <민본적인> 사회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또, 중국사에서 유명한 한무제 시기에 흉노정벌 등 엄청난 대규모의 원정이 가능했던 점, 그리고 그러한 원정이 진시황제와는 달리 국가 체제 위기까지 가지 않았던 점은, 이 문경시대에 만들어놓은 축척된 경제력이 뒷받침된 것입니다.

3. 오초 칠국의 난

그러나 경제 후기에는 다시 국가 수입이 줄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생산력의 증가로 조세가 늘어나야 정상이지만, 한고조 유방이 실시한 군국제로 인하여 지방의 봉건제후들이 조세를 제때 내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자 생산력의 증가는 곧 지방 세력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 되어 국가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하인 조조는 제후국의 영지를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강간약지정책) 즉, 군국제의 모순으로 동성제후들이 중앙권력을 이탈하기 시작한 만큼, 그들의 권한을 줄이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이었죠. 이에 대해 지방 제후들은 7국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여차하면 중국이 다시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갈 판이었죠.(이렇게 봉건제도를 실시할 경우,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 꼭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국사에서 특이한 점입니다.)

비록 영지삭감을 주장한 조조는 죽었지만, 결국 7국의 난은 진압하였습니다. 이후 한의 황제들은 철저하게 지방의 제후왕들을 탄압하면서 중앙집권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국가체제를 전환합니다. 이것이 곧 한무제 시대의 <군현제>로 귀결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위만 조선의 발전과 멸망의 역사

1. 위만 조선의 발전

철기 무기를 사용하여 정권을 잡은 위만조선은 준왕을 월지국으로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자 우거왕 때에는 발달된 철제 기술을 확보하면서 남부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대동강 유역의 무역권을 이용한 중계무역으로 성장합니다.

위만조선은 진국과 압록강 중류의 예족(예군남려) 세력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위만조선의 압박으로 예군남려는 한나라에 투항해 버리기도 합니다. 한나라는 예족의 땅에 창해군을 설치하고 예인을 이용하여 위만조선을 압박하려고 했으나, 예인들은 오히려 한나라의 강압정책에 반발하여 창해군은 몇 년 안가 소멸됩니다.

당시 중국의 패자인 한나라의 한무제는 흉노와 맞써 싸우는 일에 주력했었습니다. 초기의 한무제는 위만조선과 대립하려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흉노를 무찌르기 위해 서역 월지국과 동맹을 맺으려 한 한무제가 장건을 파견하면서 비단길이 열리고 서역과 적극적인 무역로가 개통되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흉노는 중국과 서역의 직접 무역으로 비단값이 떨어져 경네난이 유발되자, 위만조선과의 연합을 추진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무제는 흉노 세력을 약화시킨 후 서방 9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에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의 중계무역을 독점하고, 흉노와 조선의 연결을 막기 위해 대동강 무역권을 강탈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1년여에 걸친 한과 조선의 처절한 전투가 시작되었죠. 그러나 위만조선에서는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장군 왕협 등이 한나라에 투항하고, 이계상이 우거왕을 피살함으로서 멸망의 길을 걷습니다. 대신 성이가 계속적으로 항전했지만, 결국 기원전 108년 조선은 멸망하고 맙니다.

2. 한나라의 분열정책

한은 조선의 땅에 한4군을 설치하여 감시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적극적으로 주도 세력 성장을 방해하여 그 땡을 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츰 군현의 주변지역까지 경제, 문화적으로 흡수하면서 옛 조선의 영토는 심각한 사회분화 현상을 겪게 됩니다. 조선 멸망 이전부터 소국으로 존재하였던 예, 맥, 한족들은 소국으로 분립되어 상호 항쟁하게 되었고, 토착사회는 60여개의 법으로도 모자랄 정도로 사회가 분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화는 2가지 문제점을 가져옵니다. 첫 번재는 곳곳에서 일어나는 족장 세력들을 통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자기 지배 체제로 끌어들이는 문제, 두 번재는 중국문화에서 벗어나려는 다른 새외 민족과의 충돌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살아남은 국가들이 고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주체가 됩니다.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사회분화 속에서 살아남은 초기 국가들을 살펴보도록 하죠.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글을 퍼가실 땐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인터넷 문화의 기본입니다.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사군의 설치

원봉(무제) 3년이 되어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 임둔 현도, 진번 4군을 나누어 두었다. 소제 5년에 이르러. 임둔, 진번을 없애고 낙랑, 현도를 합쳤는데, 현도는 다시 고구려로 옮겨졌다. 단단대령으로부터 동쪽에 있는 옥저와 예맥은 모두 낙랑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땅이 너무 넓고 멀다고 해서 다시 영동 7현을 떼어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

- 후한서 동이열전, 예 -

사료해석 : 한사군의 설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한사군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로서 그 위치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민족주의자인 신채호, 정인보 등이 제북설을 주장한 것과 달리, 싫증주의자들은 재남설을 주장하였죠.

한사군은 낙랑군을 중심으로 고조선인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중국계 지배계급은 토착민과 유리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학자들은 차별적인 이중구조였다고 합니다. 또 한사군은 기존 조직을 해체시킴에 있어 읍락단위로 집단적 예속을 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토착세력의 공동체적 유제가 살아남아 훗날 한사군에 대한 반항의 기초가 됩니다.

한사군의 설치는 한단계 앞선 중국문물의 일반적 침투로 인하여 많은 사회적 변화를 초래합니다. 한인들의 공적인 침탈과 더불어 개인간 한인들의 수탈적 상거래가 만연하였는데, 염사치 사화 등이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예맥한족들은 이러한 정치적 압박에 대하여 저장과 선진문물 수입이라는 2가지 자구책 속에서 고대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