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보는 한국사 (1)

인류가 화폐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1. 인류가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오늘 이야기 하려는 부분은, <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부터 광복이후 현대사회까지의 돈들을 보면서 <돈>으로 역사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돈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요?

일반적으로 <화폐>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곳은, 세계 4대 문명 지역이었습니다. 즉, 최소한 청동기 시대이후, 돈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화폐라는 것이 등장하려면, 일단 화폐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마을은 존재해야 하고, 그 마을들간에 장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죠? 또, 장사를 할 때,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은, 마을 전체를 세력권으로 삼아서, 강제적으로 화폐를 써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세력이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화폐라는 것을 사용한 지역을 보면, 역사상 최초의 문명지역이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국가들, 황하문명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 이집트 지역과 소아시아 국가들, 그리스와 로마 문명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답니다.

그럼, 돈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당시에 살아보지 않아서 확실한 이유는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인류는 국가가 생기기 이전부터, 서로에게 필요한 물품을 물물교환 하였을 것입니다. 콩과 물고기를 바꾸기도 했을 것이고, 동물 가죽과 기름을 바꾸기도 했겠죠. 생활에 필요한 물품이 서로 부족했기 때문에, 거래를 통해 서로 원하는 물품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4대 문명에서, 문명, 도시, 국가라는 것이 출현하면서, 이러한 물물교환 체제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보통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물품을 교환하였겠지만, 일부 지배자 계급은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재산을 축적할 목적으로 물건을 모을 때, 물물 교환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답니다. 부피가 크거나, 빨리 썩어 버리는 물건은 물물교환으로 적합하지 않고, 보관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개껍질과 같은 유사화폐를 사용하기도 하고, 금이나 보석과 같은 광물을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죠.

특히, 조개껍질은 단단하면서도 모양이 아름답기 때문에, 기원전 3천년전부터 화폐로 이용되었습니다. 한자에서 돈을 뜻하는 단어에는 대부분 조개 패(貝)자가 부수로 들어가 있는 있답니다. 그런데, 이 조개화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부터, 중앙아시아, 중국, 한반도까지 널리 발견됩니다. 고대에 일반적으로 쓰인 화폐였다는 증거죠. 특히, 기원전 7세기경 낙타 대상인들은 조개 껍데기를 실이나 가죽으로 100개씩 묶어서 물품 교환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단순히 화폐로만 이용한 것이 아니라, 일정 단위의 화폐로 이용한 것이죠.

하지만 이런 유사 화폐들도 큰 단점이 있었답니다. 먼저 철이나 보석은 멀리 이동할 때 너무 무거웠답니다. 만약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고 생각해보세요. 몬스터를 1000마리 때려잡고 아이템을 얻었는데, 그 아이템을 다 들고 다닌다면? 게임에서야 인벤토리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답니다.

또, 돌, 뼈, 조개껍질과 같은 유사 화폐는 오래 이동할수록 파손될 확률이 높습니다. 아름다운 모양을 가치로 하는 화폐일수록 기간이 오래될수록 화폐로서의 가치는 점점 사라지겠죠?

그래서 옛 사람들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도 아름다우며, 이동할 때 보관이 용이한 형태와 모양의 화폐를 생각하기 시작했답니다. 그것을 세계 최초로 실현한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터키지방(리디아인) 사람들이에요.

위 화폐가 바로 최초의 화폐인 일렉트럼 코인입니다. 이 화폐를 만든 왕국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고대 왕국이었던 리디아랍니다. 이 동전은 천연의 금과 은을 합급해서 만든 것인데, 금 75%에 은 25%를 섞은 합급을 <일렉트럼>이라고 불렀답니다. 이 화폐는 달걀모양의 타원형으로, 실제 크기는 강낭콩만하답니다. 화폐에는 정복전쟁을 상징하는 사자가 새겨져 있고, 금속의 무게와 비율이 적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장이 찍혀있습니다.

이 화폐를 본 고대 그리스인들이, 주조 방법과 용도에 감탄해서 화폐를 만들기 시작했고, 훗날 로마까지 화폐 주조법이 유행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동전(코인 : coin)은 리디아 화폐를 본따 만들었지만, 둥근 모양과 다양한 상징물을 넣어서 서양 동전의 원형이 되었답니다. 이들은 리디아인의 일렉트럼 기법을 사용하여 금과 은을 합성해서 동전을 만들었는데, 이 합금을 <호박금>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통,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과 함께 신성을 상징하는 조류(새), 지배자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서 알렉산더 대왕 사후, 각국의 지배자들이 스스로를 찬양하는 동전을 많이 만들었답니다.


이 헬레니즘의 화폐들이 로마로 이어지면서, 로마 제정시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집어넣으면서 로마 화폐가 황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유통됩니다. 물론, 황제가 바뀔 때마다 황제 스스로가 자신의 얼굴을 화폐에 집어 넣으면서 화폐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죠.

그런데, 로마 제정이 점차 문란해지고, 게르만 용병들이 늘어나는 시기가 되면 화폐 역시 문란해진답니다. 화폐가 민망해지는 정도로 로마 사회가 점점 타락해가는 것을 수준을 알 수 있답니다.

자, 위 화폐는 로마의 공식 화폐는 아니지만, 일부지역에서 공공연하게 유통되었답니다. 로마가 몰락할 무렵, 군인황제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화폐들이 유통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과 같은 군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3s 정책을 했었죠? 군사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sport, screen, sex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책 말이죠. 로마 사회에서도, 군인 황제 시기에 극도로 사회가 문란해지면서 이런 화폐가 등장할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했던 황제가 바로 <디오클레티니아 누스> 였죠. 이 황제는, 국가의 공식 화폐가 아닌, 식민지(속주)의 문란한 화폐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가고 있었죠.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혼란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경건하면서도 문란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체제에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사회 정화 사업을 하였답니다. 그 결과, 이런 불량 화폐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죠.

이야기를 하다보니, 서양 화폐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군요. 그럼 다음 장에서는, 우리 역사에 등장한 동전과 지폐들을 이야기하면서, 화폐로 알 수 있는 역사 이야기들을 전개해 보겠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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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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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퍼즐

  1. 기원전 3세기, 로마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법으로 효력을 지닌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법.
  2. 기원전 4세기 그리스를 정복한 나라. 필립포스 왕이 이룬 업적을 바탕으로, 훗날 알락산드로스가 대 제국을 건설한다.
  3. 마테오 리치가 한자로 쓴 천주교 교리책
  4.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 2명중 1명은 평민에서 선출한다는 법
  5. 알렉산드로스 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중간 거점으로 만든 72개의 도시를 칭하는 말. 그리스의 문화를 동방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6. 에게 해 *** 섬에서 성립한 청동기 문명. 자유롭고 생기있는 해양 문화가 발달했으며, 크노소스 궁전이 유명하다.
  7.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아닌 제 1의 시민이라는 뜻으로 칭했던 칭호. 공화정과 제정의 중간적인 상태를 대변하는 칭호이다.
  8.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과학자. 기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수학사에서 ****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원론>을 저술하여, 기하학의 원리들을 연역적으로 정리하였다.
  9.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
  10. 로마는 늦대젖을 먹고자란 ****와 레무스가 건국하였다.
  11. 그리스와 같은 문화라는 뜻으로,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서융합정책과 관련있는 용어이다.
  12. 기원전 8세기 라틴인들이 테베레 강변에 건국한 나라. 훗날 서양 고대를 상징하는 대제국이 된다.
  13. 발해는 고구려인과 **인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14. 페르시아 전쟁사의 저자. 역사학의 아버지.
  15. 원래 비잔티움이였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천도하면서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던?도시.
  16. 3세기, 제정 로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가격제 도입, 행정구역 재편, 화폐제 정비를 했던 황제
  17. 해상을 이용하고 장악할 수 있는 능력. 고대 국가들은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놓고 많은 전쟁을 하였다.
  18. 모판에서 모를 미리 기른 후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농사법
  19. 3세기 말, 로마에서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바뀌었던 시대를 일컫는 말.
  20. 고대 로마의 공화정 말기 대귀족의 토지소유형태. 로마는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을 들여왔고, 귀족들이 ***** 을 형성하여 중소 자영농이 몰락하였다.
  21.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면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저항했던 인물
  22. 헬레니즘 시대에 지렛대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인물.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나왔던 일화가 있다.
  23. 헬레니즘 시대에 정신적 쾌락주의를 추구하던 학파
  24. 황제가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 형태
  25. 조선 후기, 이름 없는 화가들이 서민들을 위해 그린 그림
  26. 고대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을 통해 발언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귀족의 관직 독점에 반발한 투쟁. 평민회, 호민관, 12표법은 모두 ** 투쟁의 결과로 본다. 대표적으로, 중장보병제의 실시확대와 성산사건 등을 예로 든다.

세로 퍼즐

  1.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등 유명한 말을 남겼다. 1차 삼두정치를 이끈 장본인.
  2.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폴리스를 바탕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세계의 문화로 이전되어 나타난 의식을 지칭한다.
  3. 옥타비아누스 이후 200년간의 로마의 평화시대를 일컫는 말
  4.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었던 칭호. 원로원이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내렸다.
  5. 도로, 법률, 건축 등이 발달한 로마의 문화를 ***문화라고 한다.
  6. 예수가 유대교를 모체로 창설하여, 베드로, 바울을 통해 로마에 전파되고, 세계종교가 된 종교
  7.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했던 유명한 철학자.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유명하다.
  8. 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제국을 만든 사람.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문화를 윱합하였다
  9. 로마 제정 시기 천동설을 주장했던 인물
  10. 기독교를 국교화했던 로마의 황제
  11. 로마 제정 말기, 노예 유입 감소로 생산력이 약화되자, 토지를 분할하여 노예나 농민에게 주는 방식으로 농장을 경영했던 제도. 일종의 소작제도이다.
  12.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직접 경작하여 먹고사는 농민
  13. 게르만족의 본산지인 갈리아 지방에 대해 적은 카이사르의 저서
  14. 고대 아테네에서 독재자가 될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6천표 이상인 인물을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
  15.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던 해전
  16.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황제
  17. 로마 호민관으로서 자영농민층의 안정과 라티푼티움(대토지)의 제한을 주장했던 형제. 귀족의 반대로, 형과 동생이 차례로 암살당하였다.
  18. 알렉산더 제국은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아시아의 ***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19. 알렉산더의 제국은 왕이 죽고 나서, ***, 이집트, 마케도니아로 분열되었다.
  20.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비되는 학파로, 헬레니즘 시대에 일체의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억제하면서 이상을 이루려던 학파
  21. 기원전 264-145.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중해 해상권 쟁탈 전쟁
  22.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조선 후기의 정책
  23. 조선후기, 미륵신앙이나 토속신앙처럼 민간에서 유행하던 신앙을 말합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① 마케도니아
  원래 마케도니아는 아테네 보다 내륙에 위치해있었던 하나의 폴리스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거쳐 테베가 폴리스들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을 때 마케도니아는, 필리포스 2세 때 통일 왕국을 결성하였고 끝내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는 이제 동방으로 눈을 돌려 원정에 나섰다. 그는 (아카메네스 조朝) 페리시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인더스 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을 동방에 이주시키고, 자신의 병사들과 원주민들을 결혼시켰으며, 중요한 도시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지명을 붙여 제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려 노력하였다. 또한 오리엔트의 특징이었던 전제군주제를 도입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단명하여, 결국 짧은 시간에 팽창된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분열되었다가 훗날 그 나라들은 다시 로마에게 멸망하였다.

② 헬레니즘 문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은 아테네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계통을 잇는 학자로 인종 차별과 노예제도를 지지하였으나,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가르침을 뛰어넘어 결혼정책 등을 통해 제국을 단결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합쳐지게 되는데 이를 헬레니즘 문화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는 개인적이고, 세계 시민주의적인 모습을 띠었는데, 이는 철학과 미술에서 잘 나타난다. 철학에서는 금욕주의를 표방하는 스토아학파정신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학파가 각각 소크라테스소피스트의 계보를 이어갔다. 미술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인간의 관능이나 격정을 드러내는 현실적인 미를 추구한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상 등이 있으며, 이러한 추세가 훗날 인도의 간다라 미술에 영향을 끼쳤다. 자연과학 또한 발달하였는데,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에라스토테네스는 지구의 자오선 측정을,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 중심설을, 아르키메데스는 물리학,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Posted by 비회원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4화. 인도 불교의 대중화 - 대승 불교 이야기

1. 일반민에게 친숙한 석가 - 석가의 불상이 만들어지다.

자, 이제 한반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대승 불교쪽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소승불교나 티벳 불교는 우리와 큰 상관이 없으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핵심을 짧게 정리하자면 <만민구제>, <속가불교>, <보살신앙>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 하나 하나 정리해볼까나? 대승이란 말 자체가 <큰 수레>라는 뜻이다. 그럼, 소승은 <작은 수레>겠지?

석가시대의 불교는 출가자들이 문답을 통해 진리를 얻고, 수양과 고행을 적절히 섞어 깨달음을 알아내는 불교였다. 불교를 믿는 출가자들의 목표는 <자신의 구제>였다. 즉, 깨달음을 위해 정진을 계속하고, 그 결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가의 이념을 인정한 마가다 왕국이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역시이러한 불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는 <호법왕> 역할을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기 불교 자체가 <소승 불교>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쇼카 왕의 석주 : 정법실현>

<석주 머릿기둥>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무렵, 소승 불교는 성격이 바뀌게 된다. 당시에는 새로운 사회사상으로 힌두이즘의 바크티 사상이 유행하였다. 바크티란,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총>이란 뜻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신의 은총이 내린다는 초기 힌두 사상이었다.

불교도들은 이 사상이 자극을 받았다. 석가는 출가자와 일반 신도를 차별하지 않았는데, 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출가자들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을 얻기 힘든 일반인들은 <도솔천>에 오르기 힘든 것인가?

거기에 계속 유입되는 철학들도 불교의 폐쇄성과 대립하였다.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도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는데, 불자들은 왜 출가자들만의 <열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해결한 것이 바로 <대승 불교>였다. 붓다는 더 이상 선택받은 출가자들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교가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함께하는 구원이었다. 기원 전후로 인도에는 안드라 왕조가 성립하여 이민족을 몰아내고 인도 남부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왕조는 브라만교를 신봉하면서 바르나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했다.

불교도들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혼자만의 <열반>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한다는 명분이 필요할 때였다. 자신의 깨달음의 결과를 많은 이들에게 돌려 수많은 <불도>들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수많은 중생들을 <불제자>로 만들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석존의 가르침에 앞서 석존의 인격과 신성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원래 초기 불교에서는 석탑이라는 것이 없었다. 부처조차 죽음(입적) 후에는 화장을 하여, 몸에서 나온 다비를 세는 정도에서 죽음을 정리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석가의 유물들로 각지에 불탑을 세워 보호하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은 그곳을 찾아와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닌 일반인 중심의 불교가 시작됨을 뜻한다. 일반인들은 복잡한 불교의 가르침보다는 석가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 석가의 불상 조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석가의 불상 조각을 처음 만든 것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인도를 접하게 된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석가라는 인물을 합리적으로 알기 위해 어떤 형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모방한 형태로 석가의 불상을 조각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치던 인도 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간다라 미술)

<간다라 미술의 불상들>

2. 부처의 비서실장 - 보살들의 등장

다음, 불제자 양성 프로젝트는 <보살>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초기 소승 불교의 <개인 구제> 방법은 듣고, 고행하고, 깨닫는 방법이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암송한 뒤, 석가의 고통을 스스로 느껴보고, 석가의 깨달음을 명상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언제 암송하고, 고통받아보고, 한가로이 명상하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열반>에 들어간 석가가 다시 나와서 <전 중생>과 일일이 악수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살>이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다니는 예비 부처들이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행을 쌓아야 하는데, 선행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일반민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야만 했다. 이 수행자들은 부처의 사상을 알리는 홍보실장과도 같았다.

<보살>들의 수행방법은 <육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이것은 6개의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 불교의 최초 경전인 <반야경>의 핵심이었다. <반야>란, 6개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를 말한다.

육바라밀 : 보시(베풀어 주는 것), 지계(바르게 사는 것), 인욕(참고 사는 것), 정진(노력하는 것), 선정(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반야(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이 6가지를 실천하면서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곧 보살들인 것이다. 보살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자비로움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인물들이었다.

대표적인 보살은 <미륵>이다. 미륵은 석가시대부터 존재했던 보살이다. 많은 역사서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던 보살이다. 미륵은 당대 실존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장 부처에 가까운 보살로서 인간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보살로 알려졌다. 미륵은 언젠가 중생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다시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보살들이 등장했다. 자비로움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세음보살>은 훗날 동아시아에서 <아미타불>과 연관된 대중적 보살이 되었다.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반야경>과 관련있는 <문수보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살이 되었다. 죽은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지장보살>, 티벳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자정하는 <집금강보살> 등도 시기는 달리하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원래 보살은 수행자를 뜻한다.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원에서 수행을 하면 보살이 될 자격이 있다. <보살>은 불교 대중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반인들 자체가 보살이 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사원을 세울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보살은 수행자가 아니라, 숭배자가 되었다. 백성들은 미륵보살, 관세음보살과 같은 이들을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로 보고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힘들 때마다 <보살>들이 바쁜 부처를 대신하여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과 종말>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대중 스스로가 부처가 된다는 인식은 이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든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니까...

<관세음보살 : 불상화>

<문수보살>

<미륵보살 입상>

3. 대승불교의 아버지 - <용수>

대승불교의 철학인 육바라밀 사상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3세기 용수(150-250)였다. 용수를 범어로 <나가르주나>라고 하는데, <나가>는 용을 말하며, 아르주나는 그의 모친이 태어난 나무 이름이다.

용수의 핵심 철학은 보살의 육바라밀 중 <반야>에서 출발한다. 다른 것은 다 실천하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지혜(반야)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가? 지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머리 속 구조와 관련있는 인식체계이다. 용수의 이 질문으로 대승불교는 수백년에 걸쳐 인간의 인지구조(지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용수가 생각한 지혜란 <공>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 등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여기서 부처의 철학을 다시 복습해보자.

부처는 인간의 번뇌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의해 돌고 돌기 때문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무상), 나란 존재도 결국 순간적인 변화물의 일부로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것(무상)이라고 말한다.

고대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생명(아트만)은 우주의 본질(브라만)과 같은 것으로 영원 불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는 본질이란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데, 확고한 본질이라는 것이 어디있는가? 모든 것은 순환 과정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연기설)

부처의 이 교리를 용수는 <공>으로 해석하였다. 부처가 말한 돌고 도는 인연(연기)는 결국 아무 본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공>을 말하는 것이다. 세속 세계는 부처 세계와 인연으로 닿아있어서 두 세계는 돌고 돈다. 세속이 없으면 부처 세계도 없고, 부처의 은혜가 없으면, 세속 세계의 아름다움도 없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공>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두뇌와 눈, 코, 입, 장기, 손, 발 등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인간의 절대적 본질은 없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이며,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눈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각각의 기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란 본질은 무의미해진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일 뿐이다. 언어로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지 그 본질은 각각의 연결점을 떼어놓고 설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전생의 업에 의해 다른 무엇인가로 윤회한다. 어찌 인간의 절대적 본질이 있을 수가 있는가?

용수의 대승철학의 핵심은 <공>이다. 용수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를 <중관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논리는 철학적 논쟁을 낳게 된다.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들은 무엇인가? 이름뿐인가? 본질이 없는 것인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에서 기원후 10세기가 넘어 유명론과 실제론의 논쟁이 가속화되었다면, 불교에서는 5세기 무렵,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훗날 <공유논쟁>으로 불붙어 대승불교가 전파된 인도와 중국, 한반도 등 전 지역에서 논쟁거리가 된다.

<나가르주나 : 용수의 불상화>

4. 용수의 이론에 대한 제자들의 논리 논쟁

3세기 용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기본 <공>사상은, 5세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어떻게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것인가? 철학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중관학파>의 내부에서는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사물의 본질이 <있다, 없다> 자체가 인간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럼,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대승 불교는 <논리>가 핵심 주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논리를 따지면서 등장한 학파를 <논증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 사상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에 대입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 속에서 느낀 깨달음들을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규명하여 <공> 사상이 일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귀납법이라고 할까?

반면, 논리적 철학 체계보다는 오류의 수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들은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굳이 앞장서서 논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완벽한 철학도 오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완벽해졌다고 믿지만, 그 속에서도 잘못된 오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보완해준다면 자연 <공>사상은 점점 완벽한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파로 분리되었지만, 용수의 기본 철학인 <공>사상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던 분파였던 것이다.

5. <공>사상의 라이벌인 <식>의 등장

기원후 5세기,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맞선 또 다른 대승불교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식> 사상이었다.

유식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대승불교의 중관파 학자들이 공 사상을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를 말하는 것인가? <공>이 단순히 있고, 없고의 문제인가?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 형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바뀌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은 우리의 머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유식론>의 입장이다.

어둡고 무서운 곳에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을 보면, 사람들은 귀신으로 여기고 소리를 친다. 그것이 귀신인가? 마음이 귀신을 느낀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밧줄을 보면, 뱀인 것처럼 느끼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밧줄이 뱀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원효 대사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맛있게 먹었지만,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핏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정말 깨끗한 물이었지 않는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뿐이지, 물질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유식론>의 기원은 최고의 보살로 추앙받는 미륵에서 시작된다. 미륵은 <유가사지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식론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실존인지 전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훗날 미륵이 도솔천에 올라가 보살이 되었을 때, 제자인 무착이 대중들에게 <유식론>의 <마음 : 식>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럼 유식론의 핵심 사상인 <식>을 자세히 알아보자.

불교의 핵심인 업설과 윤회설을 유식론은 어떻게 이해할까? 윤회란, 전생의 업을 바탕으로 한다. 전생에 착한 일을 하면 인간으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축생으로 태어난다. 그럼, 나쁜 짓의 정도를 어떻게 알까?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달린 것이다. 나쁘다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므로, 업은 착하고 나쁘게 살았던 자신의 행동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각이란 <순간>적인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감정이 다르고, 마음 가짐도 다르다. 따라서 <한>이란, 주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탐욕과 번뇌는 가슴 깊숙히 쌓인다.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주머니에 모인 <죄업>들은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숨어있다. 당장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릿 속에 기억이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때 그 사건을 이야기 해주면 기억 날 수 도 있는 것들이 <아뢰야식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이 깊을수록 <한>에 의해 지배당할 확률도 높다. 내가 공포에 지배당했다면 가로등도 귀신으로 느낄 수 있다. 숨어있던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현상은 외부로부터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외부적인 관점이 아닌 <인식>의 작용인 것이다.

그럼 번뇌는 왜 생기는가? 보이는 사물을 실제 사물로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유심조>를 안다면, 완전한 세계인 <진여>의 세계로 다가갈 것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5.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

유식학파의 근본원리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식>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식>의 원리를 보는 관점에 따라 2개의 종파가 생겨난다.

철저하게 모든 것은 마음이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는 이론이 무상유식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종파는 <섭론종>이다. 섭론종은 <밧줄을 보고 놀래서 귀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실제 현상을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학문 체계로 정리하려는 유식학파의 정통 학자들이 있다. 진나에 의해 창시된 이 유샹유식론은 인간의 머리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인간은 감각의 단계 - 지각의 단계 - 자각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그 다음에는 사물의 실체를 느끼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지각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그 사물의 실체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결국 <마음> 속으로 느낀 것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결국 사물의 실체에 집착한 중생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 인식론은 훗날 현장(삼장법사)의 노력으로 중국(당)으로 넘어가 중국 <법상종>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 이제 딱딱했던 인도 불교 이야기를 접고, 인물 중심의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음 편 부터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가져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해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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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3장. 세계법왕이 등장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불교 전파 개념과 이후 인도불교가 중국 불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간략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기원전 4세기 - 전륜성왕이 등장하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받던 인도의 불교는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가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또 하나의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마가다국과는 다른 규모의 북인도 전체 통일왕조였습니다. 따라서 석가가 주장한 연기설 정도의 부족단위 통합 논리는 이제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국가와 민족을 통합할 통일왕조의 이념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통일왕조의 이념은 기원전 4-3세기로 접어들 때 즉위한 3대 아쇼카왕 때 <소승불교>이념으로 정립됩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으로 정복전쟁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정복전쟁은 잔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하면서 독특한 세계제왕의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이 때 나타난 불교적 왕자관이 바로 <전륜성왕>사상이었는데, 이 전륜성왕 사상은 고대 인도 왕권 강화의 핵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원래 초기의 인도 도시국가에서는 <국왕>에 대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개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브라만교에서지지하는 입장으로 <왕권신수설>의 입장입니다.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의 정통성이 곧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믿는 사상으로, 국왕권과 브라만의 제사권이 견고하게 결합된 입장이었습니다.

반대로, 부처와 같이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왕권을 <사회계약설>적인 입장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입장은 초기 씨족공동체였던 사회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씨족구성원 전체의 합의에 의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입장으로, 석가의 <공화제론>의 근본 이념이었던 입장입니다.

이 두 입장은 석가가 죽은 후 하나로 융합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제왕>사상입니다. 불도에서는 이 세계제왕을 <전륜성왕>이라고 합니다. 전륜성왕이란, 세계제왕으로서 왕에 오른 자는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무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자입니다. 전륜성왕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세계를 교화하기 위한 법왕으로, 정법(샤크라)에 의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이상적인 도덕으로 불심자들을 교화하는 법왕입니다. 즉, 불법의 내용이 왕권의 정당성과 의무를 규정하면서, 왕권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이 전륜성왕을 돕기 위하여 미륵불이 출현하여 백성을 교화한다는 하는데, 이 미륵불이 하늘에서 하생하는가, 아니면 귀족들이 미륵으로 환생하는가 등의 논의에 따라 미륵불 상생신앙, 하생신앙이 등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륵은 곧 전륜성왕을 돕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하늘의 수호자들입니다. 이 논리는 곧 왕은 전륜성왕, 귀족은 미륵불이라는 개념으로 도식화되어 이후 중국, 한국, 일본에서 왕권 강화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전륜성왕의 개념

산스크리트 어로는 akra-vartirajan. cakravartin이라고도 씁니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세계의 통치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산스크리트 cakra(輪)와 vartin(轉)이 합성되어 파생된 말로서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말합니다. 전세계를 통치한다는 전륜성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아소카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경전 및 기념비에 나타납니다. 이 세기의 불교와 자이나교의 사상가들은 보편적 군주관에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라는 측면을 부각시켰습니다. 전륜성왕은 속세에서 석가모니와 같은 존엄을 지닌 존재로서 32상(相)등 석가모니와 공통되는 다수의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 등의 문헌에서는 전륜성왕에 4종을 구별하여, 금륜왕은 수미4주(須彌四洲) 곧 전세계를 통치하며, 은륜왕은 3주를, 동륜왕은 2주를, 철륜왕은 남염부주(南閻部洲) 1주를 통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왕경 仁王經〉 및 〈보살영락본업경 菩薩瓔珞本業經〉 등에서는 이러한 설을 더욱 발전시켜 4종의 전륜성왕을 보살의 수행 단계에 배당했으니, 곧 철륜왕은 십신위(十信位), 동륜왕은 십주위(十住位), 금륜왕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배당했습니다. 이러한 전륜성왕의 개념은 왕권 강화 및 호국불교사상의 고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전륜성왕에 대한 다움 백과사전에서 발췌 -

실제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불법이 전파되면서, 이 아쇼카왕을 전륜성왕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 전륜성왕의 세계제왕 관념을 각국이 받아들어 <부족사회를 초월한 보편적 지배원리>를 체계화 시키기도 합니다.

2. 기원 후에는 대승불교가 발전하게 되다

기원후 1-4세기 인도 남부에서 성장한 쿠샨 왕조는 아쇼카왕으로 대표되는 마우리아 왕조의 <소승불교>보다 더 대중적인 <대승불교>로 나아갑니다.

특히 2세기 카니슈카왕 대에는 중국, 이란, 인도를 연결하는 통상로를 인도가 장악하여  상세와 통행세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발달은 곧 서아시아,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파되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이 때의 불교는 개인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과거의 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중구제를 염원하는 대승불교적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가 <사회적, 정치적> 성격까지 지니게 된 것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남은 <헬레니즘의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적극적인 동서교류 및 아시아 내부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간다라 미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카니슈카왕은 간다라 미술을 완성하여 동서문화의 융합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융합된 문화를 동아시아로 적극 전파하였습니다. 이 당시가 바로 불교의 전성기였고,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사상을 초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인도편에서의 불교서술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왜냐면, 4세기 이후 북인도에서 인도민족 고유 왕조인 굽타왕조가 등장하면서, 다시 고대 인도 문화가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굽타왕조의 찬드라 굽타는 가장 이상적인 아리아 문화를 추구하였고, 인도 고전의 황금기로서 <힌두교>를 국교화 합니다. 이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전통을 확인하는 종교로서 철저한 바르나 제도를 추구하였고, 마누법전,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같은 인도적 문학과 종교를 완성하므로서 점차 인도 내에서 불교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후 7세기 북인도의 바르다나 왕조 등이 불교 보호에 노력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힌두교에 포섭되어 소멸되었고, 13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왕조가 인도 곳곳에 성립함으로서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 vs 이슬람교>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4세기 이후의 불교는 인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인도 불교를 여기서 마치고, 인도 불교의 중국 전파 과정과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 부분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매우 짧았네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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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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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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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의 사회 문화 구조

1. 비잔틴 제국의 황제

비잔틴 제국의 정치하면 왕중의 왕이라는 <바실레우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황제가 모든 것을 총괄하며 교회와 주변국의 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황제교황주의>가 비잔틴 제국의 특징이지요.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관료제를 계승했지만, 그 지배사상은 동방의 신성정치를 연상케하는 절대군주체제였습니다. 즉, 동방적 제정일치, 신정일치적인 성격이라고 볼 수 있죠.

황제는 관료제와 상비군을 지배하면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때가 전성기였지요. 관리들도 환관을 등용하여 황제의 측근으로 활용하는 동방적 궁정정치의 성격이 강하였습니다. 황제 자리는 원칙적으로는 선출제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세습되었습니다.

황제는 귀족출신의 장교들을 중무장 기병으로 활용하여 국가수비를 맡기였는데, 실제 주력부대는 국가로부터 둔전을 받아 경작하는 자유농민이 다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귀족기병들이 대토지 소유를 확대한 8c 이후에는 둔전민이 귀족의 사병화 되는 현상이 심해져서, 군관구의 귀족관료가 국가에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 둔전민 밑에는 물자수송과 말의 사육 등을 담당하는 종자가 있었고, 귀족 - 둔전병 - 종자라는 계급적 군질서가 곧, 비잔틴 제국의 행정질서와 일원화되어 있었습니다. 둔전병들은 뛰어다니는 경보병과 방배를 들고 무장한 중보병이 있었는데, 특히 무기를 마련할 수 있었던 중보병들이 주력부대였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주변의 적들이 워낙 많아서 전투를 통한 국력 유지보다는 주변국과 협상하는 외교술이 상당히 발전했습니다. 비잔틴 제국이 1000년을 버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처세술입니다. 6c 까지만 해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토확장으로 엄청난 대국이였지만, 8c 이후 둔전병의 약화로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서방교회, 북방이민족 등등의 관계를 원할히 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도 결국 보면 이슬람의 침입에 대하여 서방교회에 구원을 요청한 것에서 비롯되었지요.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철저한 <황제교황주의>를 채택하여 모든 교회의 서임권을 황제가 갖고 있었습니다. 서유럽에서 서임권 문제로 카노사의 굴욕부터 시작하여 엄청난 정, 교 대립이 있었던 것과는 반대이지요. 비잔틴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수좌대주교 임명권, 종교회의 소집권, 회의내용 결정권 등을 황제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잔틴의 강력한 황제권은 때로 서방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성상숭배금지문제, 네스토리우스파 논쟁, 노르만의 이탈리아 진출 등의 문제로 결국 서방교회와 등을 돌려버립니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리스정교>, 서방교회에서는 <카톨릭>이 크리스트교의 주 종파로 자리잡습니다. 그리스정교는 이후 러시아정교, 세르비아 정교, 루마니아 정교 등 각 국가의 정교가 되어 동유럽의 크리스트교가 됩니다.

2. 비잔틴의 국가 통제 경제

비잔틴 제국은 제정 로마 말기의 관료체제와 사회체제를 물려받은 만큼, 경제 역시 로마 말기의 통제경제정책을 계승하였습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은 통제무역과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동서무역을 주름잡았습니다.

<통제무역>의 특징은 조합에 의한 물품의 독점생산입니다. 즉, 국가가 안정된 생산물목 수요를 유지하기 위해 공업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생산은 안정적이나, 기술적인 향상은 적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비잔틴의 문화가 이미 로마 문화의 화려함을 뛰어넘어 진보한 단계에 있었고, 동서문화의 요충지에 있었던 만큼 비잔틴 제품은 서유럽에서 칭송하고, 모방하는 <신의 문화>였다고 합니다.

비잔틴에서 곡물, 견직물 등은 모두 국가의 전매사업이였고, 국가는 동서 각종 상품을 집산하여 세금으로 부과했습니다. 그 결과 비잔틴 제국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국가였습니다. 이러한 국가통제정책으로 비잔틴 제국의 유명한 문화적 산물은 대부분 국가의 계획에 의해 탄생한 경우가 많습니다.

3. 비잔틴의 문화

비잔틴 문화는 동서 문화의 융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일단, 비잔틴 제국의 위치 자체가 과거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적 헬레니즘 문화에 동방에서 넘어온 문화를 가미하고, 그리스 정교를 이끄는 황제에 의해 규제되는 절제된 문화가 비잔틴 문화입니다.

일단, 국가와 교회에 의한 고전연구, 필사, 주석 작업 등으로 그리스 문화가 상당수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의 보존은 이후 초기 이슬람, 중세 유럽, 르네상스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서유럽 역사가들은 비잔틴을 로마보다 처지는 제국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이 비잔틴 제국의 문화는 당시 서유럽, 북유럽, 중앙아시아, 이슬람을 통털어 어느 문화보다도 화려함과 진보성을 보입니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 서유럽, 이슬람의 모든 문화를 흡수하고 융합하여 나름대로의 독자적 문화를 완성했습니다. 실제 주변 민족이 이 비잔틴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특히 동유럽의 슬라브 세계는 이 비잔틴 문화의 영향이 상당했습니다. 동유럽의 독자적 문화 기반을 보면 그 생성과정에서 그리스 정교와 비잔틴의 사회구조가 상당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투르크 족이 유럽에 진출하자 발칸 반도의 동유럽 국가들은 이 비잔틴 제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이반 3세는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를 자청하기도 했으며, 모스크바를 제 3의 로마로 칭하기도 합니다.

미술이나 건축에서는 <비잔틴 양식>이 유명합니다. 비잔틴 양식의 특징은 내부의 모자이크와 외부의 둥근 돔입니다. 성 소피아 대성당,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 등이 유명하죠. 이것은 그리스적인 문화에 동방문화인 시리아, 팔레스타인 문화가 융합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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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쿠스 형제, 마리우스, 시저,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1.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지금까지 포에니 전쟁 이후 평민 계층이 급속하게 몰락하면서 로마 공화정에 위기가 찾아온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평민대표인 호민관들은 다시 자영농민을 육성하고, 평민에게 땅을 돌려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것은 로마 공화정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호민관으로서 로마 공화정을 개혁하려고 했던 사람은 그라쿠스 형제였습니다. 이들의 개혁목표는 자영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 사회불안을 막고, 로마 군사력을 다시 강하게 만들겠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은 평민층에게 혜택을 줌으로서 기득권층인 귀족들과 충돌하여 결국 실패합니다.

먼저,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만들어, 개혁을 추진합니다.

농지법의 중요한 내용은, <리키니우스법>에 근거한 토지개혁입니다. 과거 로마의 평민들이 성장할 때 만든 리키니우스법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 귀족들은 이러한 리키니우스법을 무시하고, 대농장(라티푼티움)을 경영하여, 평민층 몰락을 가속화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부자들의 공유지 점유면적을 제한하고, 그로 인한 잉여 토지를 빈민에게 분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영농 육성을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였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티베리우스의 개혁은 기존 벌족파(귀족파)들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결국, 로마는 티베리우스 중심의 평민파와, 원로원 중심의 벌족파가 대립하는 혼란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이 와중에 암살당합니다.

얼마 후,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다시 호민관에 선출되었습니다. 가이우스는 형의 개혁 실패 원인을 <농지법>을 지나치게 추구한 것에서 찾았습니다. 즉, <농지법>으로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평민에게 분배한다는 개혁은, 벌족파의 반발이 크다는 것을 안 것이죠. 따라서 가이우스의 개혁은 <농지법>보다는 <곡물법>에 치중한 개혁이였습니다.

가이우스는 농민들이 몰락한 원인 중 하나가 속주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물값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귀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평민에게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가이우스는 빈민들을 카르타고와 같은 식민지로 이주시켜 그곳의 땅을 주고, 생산된 농산물을 싼 가격에 빈민에게 분배하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곡물법>에 의해 카르타고에 가난한 시민을 이주시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이 속주에서 징세를 하거나, 무역을 할 수 있는 계층으로 <에퀴테스> 계층을 택합니다. 에퀴테스는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죠? 이들은 기존 귀족인 <노빌레스>와 차별화되었습니다. 가이우스는 이들 에퀴테스에게 속주의 징세권, 법정의 배심원자격 등의 특권을 부여하고, 특별한 신분이라는 표시까지 해줍니다.

이러한 가이우스의 <에퀴테스> 밀어주기와 속주 물품의 싼 값 제공은 또 다시 벌족파 원로원(노빌레스 계급)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원로원은 가이우스와 대립하였습니다.

또 가이우스는 이탈리아 동맹시에게 로마 시민권을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영토가 넓어지고 제국화로 가는 전환기였기 때문에 가이우스는 이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여 동맹국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권의 확대는 가이우스를 지지하는 평민파들마저 가이우스를 떠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평민파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시민권의 확대는 로마 귀족층의 권리 제한으로 느낀 것 같습니다. 가이우스 역시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그 반대세력의 주장

<평민파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주장>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진 것이라고는 공기와 햇볕밖에 없으며, 집도 안식처도 없이 처자를 이끌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부귀와 사치를 위해 싸우다 죽지만 한 뼘의 땅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벌족파인 키케로의 주장>

평민파임을 자처하면서 토지 점유자들을 내쫓기 위해 농지법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자들은 공화국의 주춧돌을 깍아 없애고 있다. 귀족은 기사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

2. 군벌시대의 출현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로마의 지배층은 벌족파(옵티마테스)와 평민파(포풀라테스)로 완전 분열됩니다. 벌족파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유지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반면, 평민파는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자영농민에게 토지를 돌려주자라는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습니다.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세력을 키운 것은 다름 아닌 군벌들이였습니다. 군벌들은 원로원이 사회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부패와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자, 그 틈에서 성장합니다. 당시 벌족파와 평민파는 상호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장군들의 협조를 받아 상대파를 꺽으려고 했습니다. 이 속에서 성장한 장군들은 각각 벌족파, 평민파를 대변하면서 실권을 잡습니다.

가장 먼저 정권을 잡은 장군은 평민파의 <마리우스>장군입니다. 그는 몰락한 평민들에게 직업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무직자, 무산자들을 지원병으로 모집하여 직업군인을 모으는 것이였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모병제도이죠. 이것은 2가지 효과가 있습니다. 빈민들은 일정한 수입을 얻는 군인이 될 수 있고, 마리우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병>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마리우스는 전쟁에 참여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주고, 두둑한 보상금을 주며, 퇴직후에는 노후보장까지 해주었습니다. 사병들은 로마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리우스를 위해 목숨걸고 싸우게 됩니다. 마리우스는 이 사병들을 데리고 이민족과 반란군을 격퇴하였으며, 로마 영토 확장에도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도했다가 실패해서 암살당한 계기가 된 <로마 시민권>확대를 시도합니다. BC 91년에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시민권>을 요구하면서 동맹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마리우스는 그것을 기회로 모든 이탈리아 반도 안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에게 시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마리우스는 이러한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살육했습니다. 피의 살육을 통해 마리우스는 평민파가 추구하는 정책들을 하나 하나 실현하였고, 그라쿠스 형제가 하려다 실패했던 정책들도 다시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벌족파들은 마리우스에게 대항했습니다. 특히, 벌족파 장군은 슐라는 마리우스와 계속 대립하였고, 결국 마리우스를 제거합니다. 이제 로마는 벌족파인 슐라가 종신독재관으로 취임하는 군사 독재 시대가 열립니다. 로마사 2편에서 이야기 했듯이, 로마는 독재관이여도 6개월 이상 독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슐라가 이러한 로마의 국가 원칙까지 무시하면서 집권했기 때문에, 로마는 이제 법이 아닌 군부가 다스리는 국가로 넘어간 것이지요. 로마 공화정의 국가 체제는 이로서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어졌습니다.

3. 3두 정치와 카이사르

슐라가 죽은 뒤 슐라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벌족파들이 집권을 합니다.

특히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벌족파 원로원들의 묵인 속에서 동시에 정치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것을 역사에서는 <제 1차 삼두정치>라고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 토벌을 통해 성장하였고, 스파르타쿠스의 난 이후 남아있던 노예검투사들을 토벌하면서 유명해진 장군입니다. 크라수스는 슐라 밑에서 재정업무를 보면서 성장한 로마 최대의 부자였는데, 그는 스파르타쿠스 토벌에 재산과 군사력을 지원함으로서 원로원의 인정을 받은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카이사르(시저)는 갈리아를 정복하면서 로마 제국의 대외적 영향력을 독점하였고, 로마문화를 유럽대륙에 전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자였습니다. 사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같은 위대한 장군이 2명이 존재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크라수스가 가운데에서 이 둘을 잘 견제하였기 때문에 삼두 정치가 가능했었죠. 그러나 크라수스가 동방에 머물다 죽게 되면서, 삼두 정치는 깨지게 됩니다.

원로원은 확실한 벌족파 귀족출신인 폼페이우스와 평민파 성격을 가진 사병들을 거느린 카이사르 중에서 폼페이우스를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갈리아에서 돌아오라고 소환합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군대를 몰고 로마로 진격하여 폼페이우스와 벌족파 원로원 멤버들을 제거하고 군사력으로 로마를 장악합니다. 또, 벌족파와 손을 잡고 있던 이집트를 격파합니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이 사건 이후 로마 역사에 깊게 관여하게 되지요.

카이사르의 독재는 흔히 <빵과 서커스 정치>라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두환 시절에 3S 정책이 있었죠. 국민들이 군사독재정권에 반항하게 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를 국가적으로 보급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도록 한 정책이죠. 카이사르는 이 정책의 원조입니다. 그는 클로디우스를 등용하여 <빵과 서커스 정치>를 로마에 뿌리깊게 박아높았습니다. 특히 대외원정을 오랫동안 하면서 헬레니즘 성격의 동방문화를 많이 접한 카이사르는 <향락적이고 관능적인 헬레니즘 문화>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었죠.

클로디우스는 정복사업에 대한 보상으로 빈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합니다. 빈민들에게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무상배급했죠. 그리고 경기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무료라고 선언합니다. 자유로운 성(sex)의 개방화도 추구합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로마 시민들은 카이사르 독재에 대한 반항이 거의 없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종신독재관>이였습니다. 그는 평민파의 입장에서 로마의 재건과 공화정의 개혁에 착수합니다. 평민들이 억울하게 진 빚을 탕감해주고, 곡물 무상배급, 대외 식민지 건설 등을 통해 로마라는 나라를 세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특히 카이사르는 자신의 점령지였던 북이탈리아와 갈리아 지방에도 라틴시민권(참정권이 없는 시민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시민권을 분배합니다. 이것이 카이사르의 정책이였지요.

4.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시민권은 확대되다

로마 시민권은 3편에서 자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여기서는 카이사르 전후를 토대로 시민권의 확대 과정을 더 첨부해볼께요. 초기 로마시, 동맹시, 식민시에 차별적으로 적용했던 시민권은 공화정 말기 점차 확대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권이란 로마시민권(참정권이 있는 시민권)이 아니라 라틴시민권(참정권은 없이 시민으로만 인정되는 시민권)임을 명심하고 읽으세요.

BC 91년 동맹시 전쟁으로 이탈리아내의 동맹시에 시민권이 발급됩니다.

카이사르 시기에 이탈리아를 넘어 갈리아, 북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시민권이 발급됩니다.

로마 제정기(AD 3C)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는 로마 제정의 궁핍을 극복하기 위해 전 로마제국내의 모든 민족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로마 시민권의 역사입니다. 이 시민권 확대에 맞추어 로마의 법도, 만민법, 자연법 단계의 법으로 확대되어 간답니다.

5. 2차 삼두정치

카이사르의 독재는 영원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밉니다. 카이사르의 양자인 브루토스를 이용하여 카이사르를 제거한 것이지요. 카이사르는 결국 가장 믿었던 양아들에게 제거 당합니다. 카이사르를 제거한 이후 로마의 실권은 당시 유력자 3인에게 다시 넘어가 제 2차 삼두정치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레피두스의 중재 속에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가 연합한 삼두정치입니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를 비롯한 동방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시저가 남긴 유산인 갈리아를 비롯한 서방지역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삼두정치는 오래가지 않았고, 곧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역사를 건 한판 대전을 벌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악티온 해전>이죠.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의 지원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유럽에서 사병집단을 구성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맙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정적들을 제거한 후,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실제로 독재체제를 구축해나가는 이른바 <원수정>이라는 정치체제를 만들어 로마의 제국화를 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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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과 속주체제, 그리고 에퀴테스의 등장

1. 1차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변화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은 이미 멈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귀족들과 평민들은 더 많은 영토가 필요하게 되었고, 어떤 기회만 있으면 로마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지요. 특히 로마는 서지중해로 진출하여, 해상무역을 완전히 장악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근처에 많은 섬들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이 때 시칠리아에서 그리스 식민지인 <메시나>가 시라쿠사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남쪽으로는 카르타고, 북쪽으로는 로마에 각각 구원군을 요청합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이것을 구실로 지중해 패권을 놓고 엄청나게 큰 전쟁을 치루게 되는데,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포에니 전쟁>입니다.

카르타고는 당시 아프리카 북부와 지중해를 총괄하는 맹주국가로서 고대 오리엔트의 페니키아인들이 해상무역을 위해 설치했던 해상 기지에서 출발한 국가입니다.

로마는 <시칠리아섬> 쟁탈을 위해 카르타고와 1차 포에니 전쟁을 했는데, 이 1차 전쟁은 미리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한 로마의 승리였습니다. 사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보다는, 북아프리카의 맹주국 카르타고의 전력이 훨씬 우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차 전쟁을 로마가 이김으로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대등한 전력을 보유하게 됩니다.

로마는 시칠리아를 거점으로 강력한 해군력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시칠리아의 풍족한 곡창지대를 이용하여 시칠리아에 <라티푼티움>이라는 대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시칠리아를 속주로 만들어 1/10의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합니다.

이 <속주>라는 체제는 이제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수준의 국가를 탈피했음을 의미합니다. 과거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 전 로마는 점령지를 완전히 장악할 수가 없어서 <동맹시> 관계로 점령지를 보유하려 했습니다. <동맹시>는 로마에게 자치권만큼은 획득하였죠. 그러나 속주는 완전히 로마에 편입되는 식민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는 이 속주에서 착취를 하기 위해 <징세청부업자>제도를 도입합니다. 이 <징세청부업자>는 로마사회에서 새롭게 신흥계급으로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2, 3차 포에니 전쟁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철저하게 준비하고 나와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전쟁입니다. 카르타고는 1차 전쟁의 패배가 자국의 안일함으라고 생각하면서 철저한 정신무장을 하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은 로마의 거대한 해군력과 지중해에서 피터지는 격전을 치루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니발은 엄청난 숫자의 코끼리 부대와 보급부대를 이끌고 아펜치노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고, 유럽을 한바퀴 돌아 로마의 북쪽 롬바르디아 평원 쪽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대군이 알프스를 넘어 공격에 들어갔다는 자체가 발상의 전환이자, 커다란 모험이였지요. 하니발은 칸네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위풍당당하게 로마로 진격합니다.

그러나, 로마는 <동맹시>들의 활약과 전쟁에 패한 장군에게도 예우를 해 주어 사기를 올리는 등 견고한 단결력으로 카르타고의 대군과 격전을 벌였습니다. 스키피오 장군은 오히려, 군사력이 비어있는 상태인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는 작전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스키피오 장군이 지마의 결전에서 승리하고,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서 로마는 서지붕해 패권을 차지하고 카르타고를 <동맹시>로서 편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다는 것에 분노하며, 다시 한번 로마에 저항하였습니다. 로마는 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완전 파괴하고, 카르타고를 <속주>로서 로마영토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3. 마케도니아 전쟁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아프리카 진출 및 서지중해 정악과정이였다면, 마케도니아 전쟁은 로마의 소아시아 진출 및 동지중에 장악과정이였습니다. 로마는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을 정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떠나 마케도니아의 거점지인 코린트를 파괴하고, 그리스의 폴리스들을 해방시켜줍니다. 그리고 코린트를 속주로 편입합니다.

이 마케도니아 전쟁은 로마에게 또 다른 변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선, 마케도니아를 정복함으로서 로마는 속주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어 제국화되어 갑니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아프리카>라는 속주를, 코린트를 점령함으로서 <아시아>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습니다.

또, 로마에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면서 로마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가 그리스 및 동방문화와 합쳐저 문화가 한층 성숙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이 향락적이고, 관능적인 부분이 많아서 로마인의 생활태도와 습관이 사치적, 향략적으로 변한 부분도 많았습니다. 로마의 대표적 보수주의자인 카토는 이것을 <로마인의 건전한 기풍이 망가져가는 과정>으로 보기도 합니다.

4. 새로운 지배층이 등장하다.

포에니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 등으로 로마에 <속주>가 생기자 이 <속주>에서 나오는 잉여생산물을 관리해야 하는 새로운 지배층이 로마에 등장합니다. 이들을 소위 <에퀴테스>라고 부르죠.

<에퀴테스>는 로마의 세력 확장과 더불어 무역, 상업, 금융에 진출하면서 형성된 새로운 세력입니다. 이들은 부유한 평민층이 대부분을 이루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정말 다앙합니다. 해상에서의 무역, 징세청부업자, 속주에서의 토목공사, 군용물품 납부자, 군대 수송 담당자 등등 속주 관리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합니다. 로마의 지배층은 이들을 법적인 신분으로 인정하고, 속주를 관리하기 위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점차 대지주로 변모하며, 거대한 장원은 <라티푼티움>을 경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점은 로마에는 이미 신흥귀족층인 <노빌레스>가 있는데, 이들은 뭘 하길래 또다시 신흥귀족이 탄생하냐는 점이겠죠? 이전 단원에서 전술한 노빌레스는 로마의 반도 통일기에 평민세력의 성장과정에서 성장한 부유한 평민층으로 구성된 신흥귀족집단입니다. 이들은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 등 정치적인 평등권을 주장하면서 구귀족들과 투쟁하였고, 그 결과 일정한 정치집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과 최고 귀족집단들은 신흥귀족인 <노빌레스>가 더 이상 성장하는 것은 로마 지배층의 동요를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빌레스는 정치분야에 진출한 배타적인 소수 정치 집단으로서, 이들이 <속주>에서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것은 로마 사회에 있어 권력의 집중현상을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노빌레스의 정권독점과 대토지 확대는 로마에서 법령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노빌레스는 새롭게 영토로 획득한 속주가 있을 경우 그곳에서의 무역, 징세청부, 토목공사, 금융법 등의 경제적 역할은 전혀 할 수 없게 제한한 것이지요. 노빌레스는 이제 단순히 대토지(라티푼티움)을 소유하여 농지를 경영하거나, 정치를 담당하는등 귀족적인 소수지배집단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노빌레스는 거의 원로원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하게 됩니다. 정치 외적인 부분은 <에퀴테스>가 담당하게 되는 것이지요.

5. 자영농민이 급속도로 몰락하다.

자, 포에니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평민들은 보상으로 토지를 받고, 더욱 성장해야겠죠? 그러나, 포에니 전쟁 등 <속주> 체제가 등장하면서 로마의 자영농들이 급격하게 망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하지 않지만, 몇 가지 키워드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전쟁을 통해서 농지가 많이 황폐화 되었습니다. 따라서 농산물 가격이 치솟고, 농산물의 질이 별로 좋지 못한 상황이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에퀴테스들은 <속주>에서 아주 값싼 가격으로 곡물을 유입하기 시작합니다. 로마의 모든 사람들은 농민들의 물건을 사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의 자영농민들은 급속히 몰락할 수 밖에 없죠.

또, 전쟁으로 아주 광대한 <속주>라는 땅이 눈 앞에 놓이자, 유력 귀족과 노빌레스, 에퀴테스 들이 먼저 덤벼들어 토지를 선점하고, 공유지를 차지해버렸습니다. 좋은 땅은 그들이 먼저 차지해버린 것이지요. 특히, 속주는 이탈리아 반도와는 다르게, 지중해나 에게해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였습니다. 자영농민들이 개간하기에는 너무 먼 그림의 떡이였지요.

따라서, 속주에서의 땅은 유력한 귀족들이 대토지를 선점하여 <라티푼티움>이라는 대농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은 귀족이 대토지를 혼자 소유할 수 없으며, 평민에게 분배해야 한다는 <리키니우스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평민들이 성장하면서 귀족들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법이 이제는 지켜지지도 않는 것이지요. 이제 유력한 노빌레스와 에퀴테스라는 귀족들은 엄청난 전쟁 노예를 동원하여 전형적인 고대적 생산방식으로 토지를 경영하기 시작합니다. 서양에서는 시대구분을 할 때, 전쟁 노예를 동원한 대토지 경영을 전형적 고대시대의 특징으로 보곤 합니다.

이렇게 <속주>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로마의 자영농민은 몰락합니다. 농민이 몰락하니, 전쟁에 참여할 시민은 부족해지고, 빈부차이는 심해져 로마인이라는 일체감도 사라집니다. 또, 헬레니즘 문화의 유입으로 로마 귀족들은 점차 향략적인 생활로 변해갑니다. 이제 로마의 공화정은 뭔가 대수술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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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헬레니즘 사회의 융성

헬레니즘 시대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는 제 지식이 짧기에,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과 키포인트로 여겨지는 몇몇 사실들을 위주로 정리해 볼까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이라는 사실은 전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헬레니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중심으로 다뤄볼께요.

우선 헬레니즘 사회는 알렉산더의 동방 이민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2가지 효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을 차단하며, 그리스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2번째는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연결한 거대한 교역권과 경제권을 성립시키고, 그 무역의 주체를 그리스인으로 삼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나게 확장하였지만, 그 경제력을 알렉산더 제국의 경제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적인 고대 문화유산을 동방에 전파하는 동시에 금, 은의 약탈 등을 통하여, 동방의 자원을 착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앗티카(아테네 지방) 주화가 화폐로 통용되었고, 앗티카 방언이 공용어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그리스어가 제국의 언어가 되어 상업, 제조업, 광업 등의 모든 교역산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의 진출로 인하여 그리스적인 형태의 도시가 제국 곳곳에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70여곳이나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죠. 또, 아시아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안티오크도 이 당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동서양의 거점에 위치한 로도스섬, 델로스섬도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알렉산더 제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는 <노예노동>을 통한 대규모 농업경영이라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공업, 수공업, 농업 등에 <그리스적인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였죠.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원주민과 이주 노예>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적인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이 원주민과 자주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국은 원주민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통치함으로서,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빈주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노예노동과 원주민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경제번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그리스적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원주민과 노예>를 기반으로 합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는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국의 물질적 자원과 풍부한 인적 기반이 새롭고 발전된 제국의 기반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소모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알렉산더 제국이 로마제국에게 힘없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 때문이지요.

2. 헬레니즘 문화를 정의내리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결국 동서문화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평등한 입장에서의 융합은 절대 아닙니다. 전술했듯이, 원주민 착취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까요. 이것은 그리스적인 입장에서의 문화가 폴리스 단위를 넘어 세계적 단위로 탈바꿈한 정도의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도시국가적인 문화는 오리엔트의 거대한 전제적이고도 전체적인 문화를 만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보편적,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문화로 나아갑니다. 특히 철학, 문학, 예술 분야는 그리스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동양적인 문화 색체를 가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이 문화는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제국인만큼, 로마, 이슬람, 간다라, 중국 등 당대 모든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대표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예술 분야를 살펴볼까요?

3. 헬레니즘 철학 - 스토아 학파

헬레니즘 시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기 때문에 철저한 금욕을 통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이 중요한 점은 거대한 제국 질서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진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분립주의적 성격을 넘어선 <초폴리스적인 세계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철학은 알렉산더 제국과 같은 세계국가란, 자연법과 보편적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국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법>이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자유와 평등을 원칙적으로 지켜줌으로서 정의가 살아있는 법을 말합니다. 세계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한 시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모든 시민들은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평등한 시민입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구속에서도 해방되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해방된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세계국가이며, 이 세계국가에서의 시민이란 철저한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원자적인 개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은 철저히 받아들이면서도, 실제 정치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반이 그리스적인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국가와 같은 이상국가의 이념은 지배층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의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적인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이였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토아 철학의 논리는 훗날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세울 때, 그대로 받아들였던 논리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념을 수용하여, 시민권의 분배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적절히 하였습니다. 단, 제정 후기의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논리보다는 점차 향락에 빠짐으로서 제국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키포인트입니다.

또 스토아 학파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세계시민사상은 유대교가 배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 크리스크교 초기의 구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민족성을 과시하던 부분이 있어서 타 민족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상이 크리스트교 사상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만나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4. 헬레니즘 철학 -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학파라 불리며, 스토아 학파의 반대선상에 있는 철학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저급하고, 더러운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제정 로마 후기 사회적으로 퇴폐하고 문란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생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본 철학은 <정신적 쾌락과 개인적 세계>를 위한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일단 국가라는 기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각 개인들이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즉,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면 국가는 필요없는 기구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로크의 저항권이나, 근대 시민권의 개념이 이들에게서도 보입니다.

또 이들은 개인이 철저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즐거운 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즉,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들이 실제 쾌락적인 삶을 산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쾌락 이전에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로,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인데,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지요. 즉,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두려운가? 신이란 무엇이며,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등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는 것이 곧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은 언뜻 보면 난잡하고, 쾌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토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시민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사상이 로마 제정 초기에는 그 근본정신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말기에는 난잡하고 문란한 쾌락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미술이 감각적, 향락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바로 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추구의 영향이 큽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이 금욕을 하던, 수양을 하던 간에 이들은 쾌락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니까요.

5. 헬레니즘의 예술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 예술을 봅시다. 이들의 예술은 그리스적인 가치관, 즉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현실미를 추구합니다.

헬레니즘에서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을 넘어서서 인간육체가 얼마나 관능적인 미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니케상은 승리의 여신이 자유롭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오콘의 군상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며, 정신적 쾌락을 방해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코린트 양식>입니다.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 이야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갈께요. 헬레니즘 건축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혼합된 것 처럼, 고전적인 공공건물과 세속적인 건축 양식이 동시에 보입니다.

5. 자연과학의 발달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시민주의가 발달하면서, 보편적으로 탐구되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명제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명제에 호응하여 발달한 분야가 자연과학 분야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 유클리드의 물리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오선 측정과 지구둘레의 계산 등은 이 당시 자연과학이 최첨단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곳곳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국가가 처음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투자한 시대입니다. 실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의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과 과학의 대부분을 스승이 지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뤄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도서관으로 바로 바로 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생전에 절대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인문과학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해설을 다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기록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겨우, 로마편에 입문하겠군요. 로마편은 제가 유럽 고대사 중에서 그나마 책을 좀 많이 읽은 부분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적을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전개해보겠습니다. 그럼 로마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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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 이야기 1 - 그리스의 멸망과 헬레니즘

1. 그리스의 멸망과 펠리포 2세

헬레니즘의 시작은 그리스 폴리스의 분열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그리스 이야기 후반부에 이야기했듯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 그리스 사회는 분열되었고, 그 분열은 곧 그리스의 멸망을 초래합니다. 또, 식민운동의 중단으로 그리스의 주력부대인 달리는 중장보병(팔랑크스)가 사라지고, 용병이 나타나면서 그리스 사회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였습니다.

그리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의 군주가 바로 펠리포 2세입니다. 예전에 극장에서 <알렉산더>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배작 영화라기 보다는 대작 다큐멘터리 수준이더군요. 영화가 망한 이유가 한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영화라 느끼지 못했으니... 거기보면 펠리포 2세는 상당히 독선적인 폭군으로 나오며, 그 부인을 학대하고, 부하들까지 괴롭히는 약간 사이코(?)로 나옵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기록으로만 보면 그는 독재자적 기질은 있었다고 하네요.

펠리포 2세는 그러나 문화에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정책은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리스 지역을 마케도니아에 효율적으로 흡수하였고, 마케도니아와 폴리스의 씨족 기반을 각각 인정함으로서 균형있는 통일제국을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가 폭군으로 묘사되는 이유는 마케도니아 본국의 귀족들을 그리스 귀족과 동일시함으로서 독선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던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때로는 회유정책으로, 때로는 강압적 진압으로 폴리스들을 규합하였고, 대 제국 건설을 위해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측근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맙니다.

펠리포 2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알렉산더에게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혼자 잘나서 세계정복한 왕은 징기스칸 외에는 없습니다. 다 이전 왕들이 차분히 뭔가 준비해 놓은 것들이 있죠.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제국건설에는 소수림왕의 체제 정비가 있었고, 진흥왕의 삼국통일기반에는 법흥왕의 체제정비가 있었으며, 근초고왕의 동아시아 상권 수립에는 고이왕 대의 율령정비가 뒷받침 됩니다.

알렉산더의 세계제국 기반도 펠리포 2세의 기반을 바탕으로 합니다. 즉, 펠리포 2세는 엄청난 숫자의 상비군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비군은 오합지졸의 군대가 아니라, <항상 준비된 군대 = 상. 비. 군>입니다. 즉, 국왕에게 귀속되어 국왕이 지급하는 재물를 받고, 목숨걸고 싸우는 충성심 강한 군대이지요. 알렉산더의 세계정복에는 선배이자, 친구이자, 동생들인 상비군 대장들이 가장 큰 활약을 합니다.

상비군의 구성은 소농출신들의 보병밀집대(팔랑크스)인데, 이것 역시 펠리포 2세가 무리해서까지 그리스를 통합하여 기반을 만들어놓은 유산이었습니다. 또, 가장 화려한 기병대 역시 대귀족 지주와 왕의 전우들로 구성된 단합된 군대였습니다. 이러한 기반을 가지고 알렉산더는 반항하는 반마케도니아 그리스 세력을 완전 분쇄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하지 못한 동방원정을 시작하여, 페르시아와의 대격전을 벌이고 승리합니다. 그는 승승장구하며 동방진출을 하였고, 젊은 나이게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원정은 복수를 위한 것이었고, 인도진출은 세계정복을 위한 것이었죠. 이 알렉산더의 제국은 약 300년간 이 지역을 경영합니다.

2. 헬레니즘 문화의 성립

동방진출을 통해 거대한 영역을 차지한 제국으로 발전한 알렉산더의 제국은 그리스식의 문화를 동방에 심어놓기 시작합니다. 먼저 그리스식으로 건축된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계 곳곳에 만들어 놓게 되는데, 이 도시의 숫자만 70여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식 건물로 치장한 제국은 전형적인 그리스 문화를 동방 곳곳에 심어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문화가 세계화>된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즉, 그리스식 건물을 지은 뒤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였고, 그리스어(아테네 앗티카 벙언)를 공식어로 하여 그리스 문화를 찬란하게 세계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동서문화를 융합하기 위하여, 정치체제만큼은 그리스식 민주주의가 아닌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동서문화의 융합을 위해서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이주한 그리스인과 마케도니아인은 오리엔트인과 적극적으로 결혼을 장려하기도 합니다. 즉, 알렉산더가 구상한 통일제국은 폴리스적인 문화를 세계에 심어놓으면서도, 정치만큼은 전제적, 오리엔트적인 신의 대리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초월적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그리스적 세계국가입니다.

따라서 알렉산더는 원주민들에 대하여 아주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그리스 시민들의 민주정치기반이 <노예노동>을 통하여 생산된 수입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알렉산더 제국 안에서 동방으로 이주한 그리스인들은 가혹한 <노예노동>을 통하여 대규모 농업경영을 하였고, 이것으로 경제력을 마련하여 지배층으로 군림한 것이니까요.

3. 선주민 문화에 대한 가혹한 착취

알렉산더 제국의 탄생으로 동방과 서방의 교역권과 경제권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습니다. 특히 동서방의 무역을 중계하는 도시로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도스섬, 델로스섬은 큰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죠.

그러나 이주민이 늘고, 평화가 시작되자 인구증가로 인하여 식량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리스인들은 상공업과 수공업을 확대하면서 이러한 모든 업종에 선주민을 노예로 활용하는 노예노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농업분야의 노예노동은 인권을 무시한 착취수준이었지요.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은 선주민을 무시하기 시작하였고, 철저한 원주민 탄압책을 통하여 <빈부격차>를 크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알렉산더 시기의 엄청난 경제번영이 착취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방인>과 <동방인>이 합리적으로 공존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감을 키웠다는 점입니다. 또, 왕실은 계속된 정복전쟁을 추진하였으므로, <경제번영으로 인한 이득>을 사회에 재투자 하지 못하고, 소모하기만 하였습니다. 만약 이 제국이 계속 같은 상태로 간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4. 알렉산더 사후의 제국

그러나 알렉산더는 세계 정복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습니다. 그가 인도의 간다라 지방을 넘어 중국까지 가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하여 여러 학설이 분분한데, 대표적인 학설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었다는 학설이 요즘 유력한 것 같습니다. 이 알렉산더라는 30도 안된 젊은 세계 제왕이 죽자 제국은 그의 신하이자 친구들인 귀족들에 의해서 산산조각납니다.

그의 친구들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로 국가를 나눠 각각 통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알렉산더의 이념과 통치방식을 잘 이해하였기에, 알렉산더의 정책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스식의 도시는 계속 융성하였고, 그리스인들은 계속 이주하였습니다.

이 알렉산더의 제국이 각각 망하는 것은 <로마>가 공화정 시기를 끝내고 제정시기를 맞이하면서입니다. 그 유명한 악티움 해전(옥타비아누스 vs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가 망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이 제국이 해체되어 로마에 통합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지요. 알렉산더가 남긴 국가들은 점차 정복되어 역사에서 잊혀지게 됩니다.

특히, 알렉산더 각 제국들은 내분도 심하였습니다. 제국 중에서 <시리아>는 과거 페르시아 지방인 관계로 제국에 가장 반항을 많이하였고, 그리스적 요소들을 싫어하였습니다. 또 그리스에서는 아직도 폴리스 상호간에 갈등이 많았으며, 때로는 마케도니아에 반항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전체적으로는 알렉산더 제국의 후신인 마케도니아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스파르타 등 강대한 군사국가들은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여,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특이한 사실은 이러한 폴리스와 마케도니아의 분열을 이용하여 성장한 섬이 있는데, 이 곳이 마케도니아, 그리스, 시리아의 딱 중간지점에 위치한 <로도스> 섬입니다. 로도스 지방은 당시 폴리스가 아카이아 동맹과 에톨리아 동맹이 상호 대립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양쪽에 무역을 하여 돈을 벌었고, 마케도니아가 폴리스를 장악하려고 할 때마다 그것을 이용하여 돈을 벌면서, 동서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로도스에 가서 무역에 도전하면 성공한다는 설화가 떠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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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명이 드디어 통일되다.

1. 아시리아의 통일

길고 긴 오리엔트의 분립과 분열은 아시라아에 의해 최초로 통일됩니다. 때는 기원전 12세기였죠. 아시라아가 오리엔트를 통일한 원인을 찾으라면,

첫째는, 동서 무역의 요충지인 서아시아 지역에서 중계무역에 충실했기 때문에 탄탄한 경제력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지역 자체가 동서양을 연결하는 요지이므로, 이 지역의 모든 통일국가가 탄탄한 경제력은 다 기본이었기에 이 부분은 별로 부각되지 않습니다.

둘째 이유는, 철제무기를 가장 잘 활용하였다는 점이죠. 히타이트가 오리엔트에서 처음으로 철제 무기를 사용한 이후, 많은 국가들이 철제 무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시리아는 철제 무기의 성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안으로 기마전술을 활용하였습니다. 철제무기를 든 중무장한 기마병의 등장은 이 당시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겠네요. 주몽에서도 보면 철제 기마병이 나오기는 하던데, 사실 그건 허구입니다. 당시 한나라에는 철제무기로 무장한 기마병은 없었으니까요. 있었으면, 흉노 기마병 때문에 한무제가 그렇게 골치아프지 않았겠죠. 다 쓸어 버리면 되니깐....

암튼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아시리아는 건국하자마자 얼마 안가서 망합니다. 그 이유는 철제 무기를 통하여 피지배민족들을 가혹하게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아시리아는 미탄니에서 철기를 배운 뒤 독립한 작은 국가였는데, 정복국가로 발전하면서 피지배민족이 자신들의 민족보다 많아진 것을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전체 오리엔트 통일이 너무나 빨랐다는 것에 놀랐을 정도이니까요. 그들은 오로지 때리고, 죽이는 가혹한 정치로 정복당한 민족들을 학대하였습니다. 결국 아시리아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로 분열되었고, 이렇게 4국으로 분열된 이후에는 신바빌로니아가 오리엔트를 주도하며 어느 정도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갑니다.

2. 페르시아의 재통일

아시리아가 망한 뒤 다시 오리엔트를 통일한 것은 그 유명한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는 꽤 오래 가며, 훗날에도 같은 왕조가 나타나기 때문에, 이 때 통일한 페르시아를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라고 부르며, 왕조명을 붙여줍니다.

페르시아의 특징은 아시라아와는 달리 통일에 대하여 준비된 정책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정책을 한국사검정시험에서 답으로 물어본다면 아마 <관대한 통치>라고 하면 될 것 같네요. 페르시아는 그리스 지역의 에게해에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의 인더스강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확장한 거대한 통일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민족간의 분쟁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피지배민족의 전통과 신앙을 최대한 존중해주었습니다. 또 고대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페니키아의 카르타고 지역의 무역도 보장해 주면서 무력이 아닌 세금을 징수하는 정책으로 피지배 민족을 다스립니다.

특히 유명한 다리우스 1세는 통일 후 강력한 아시아적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합니다. 군현제도 정비, 도로역전제 정비, 감찰관의 파견, 세금제도 정비, 화폐제도 개혁 등의 업적은 중국을 처음 통일했던 진시황제의 정책과 거의 흡사합니다. 단, 진시황제와 같은 법가적 무력통치가 아닌 관대한 통치라는 점만 다르네요. 다리우스 1세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상업발달과 무역 및 외교를 장려합니다. 진시황제가 분서갱유로 유학자들을 다 때려죽인 것과 반대로, 다리우스 1세는 모든 종교의 화합과 단결을 주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한편, 관대한 통치 속에서도 제국의 단합을 위하여 국민적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정비하였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고대 세계에서 보기 드문 이원론적 종교라는 특징을 갖습니다. 불을 숭배한다는 의미에서는 배화교라고도 하죠.

용어를 좀 설명하자면, 고대 사회에서 유일신 여호와를 믿는 헤브라이, 유대, 이스라엘은 <일신교적> 종교라고 합니다. 신이 1명이기 때문이지요.

다양한 신을 가진 수메르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다양한 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신들의 성격이 선함 1가지로 규정되어 있어서 <다신교>이면서도 <일원론적> 종교라고 합니다. 일원론적 종교란 선한 신이 세상을 통치한다는 단순한 관념을 가진 종교적 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조로아스터교의 신은 하나의 신이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가진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이 종교는 조로아스터가 세상을 지배하는 신을 2명으로 규정하였는데, 어둠의 신이자 악신은 아리만이고, 그와 싸워 세상을 구원하려고 준비하는 신은 아후라마즈다입니다.

이 종교는 선과 악이라는 뚜렷한 문학적 대립구조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가 쉽습니다. 또, 동서 요충지라는 점에서도 전파하기가 쉽습니다. 이 종교는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의 선, 악 사상에 모두 영향을 주는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또 마니교 역시 이 종교가 동방문화와 융합되면서 탄생하며, 힌두교와 융합하면서는 시크교의 교리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줍니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몰락은 그리스 세계와의 치열한 전쟁이었던 페르시아 전쟁에 패하면서 서서히 시작됩니다. 결국, 그리스 세계를 통일하고 동방진출을 하던 알렉산더 제국에 망하게 되죠.

3. 이 지역은 너무나 개방적이였다.

페르시아가 망한 뒤 역사를 쭈욱 살펴보면 이 지역의 역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 너무 벅찰 정도로 어지럽습니다. 동서 요충지인데다가, 개방형 평야지역이므로, 이민족의 침입이 너무 쉽죠. 인도문화가 수도 없이 유입되고, 유럽에서는 쉴틈없이 쳐들어오는 지역입니다.

수많은 나라가 많지만 이 지역에서 그나마 가장 강한 나라들로 역사를 잡아보겠습니다.

오리엔트 문명 - 아시리아의 통일 - 페르시아의 통일 - 헬레니즘(알렉산더) - 로마제국의 지배 - 파르티아 - 사산조 페르시아 - 이슬람의 점령(헤지라) - 셀주크투르크의 시대(십자군 전쟁) - 몽고제국(일한국) - 오스만투르크 - 터키

..... 대충 중심 국가들로 역사를 잡아도 이렇습니다. 정신없지요? 너무 이민족 국가의 침입이 많아 역사가 하나의 줄거리로 잡히지 않는 지역이죠. 그래도 전통 국가인 파르티아, 사산조 페르시아는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나머지 국가는 각각 그 지역 역사를 하면서 공부하셔도 될 듯 하니까요. 국가만 수십개인데.... ㅋㅋㅋ

4.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이 지역은 전술했듯이 동서무역의 요충지라서 동서문화가 쉴틈없이 섞이고, 나뉘어지는 곳입니다. 하지만, 동서무역의 요충지라는 건 상업적 마인드만 있는 국가라면 언제든지 팍~~ 발전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런 이점을 최대한 이용한 국가입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전통과 헬레니즘(동서문화의 융합)의 장점을 잘 살려서 동서문화를 나름대로 조합하였고, 그 조합된 문화를 동서로 다시 재전파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 강국이 되었던 국가들입니다.

일단, 여기서 아셔야 할 것은 전에 오리엔트를 통일했던 페르시아가 이란계 계통이라는 점입니다. 이슬람(아랍계)이 본격적으로 서아시아에 들어온 것은 마호메트가 활동하던 시기인 헤지라(632) 사건 정도에나 가능한 일이니, 그 이전의 통일국가들은 대부분 이란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파르티아는 이란계 유목민족이 세운 국가인데, 이 국가의 특징은 중국의 한나라와 로마제국의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큰 이득을 챙기던 국가라는 점입니다. 중국 한나라가 흉노족이 이 지역에서 비단을 싸게 파는 것을 보고, 흉노족을 견제하기 위해 비단길까지 개척하여 이 지역에 왕래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그런데 파르티아의 특징은 동서문화의 요충지 답게 문화도 그리스 문화와 이란 문화를 동시에 존중하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반면, 사산조 페르시아는 국가 명칭에서부터 과거 오리엔트를 통일한 페르시아의 성격을 닮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페르시아의 전통으로 완전 복귀하여 민족적인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였습니다. 이들은 그리스신이나 이교도들 보다는 민족적인 것을 수호하려교 노력하였지요. 그러나, 이들도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서문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불교, 크리스트교(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조로아스터교가 혼합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 동서종교를 조로아스터 입장에서 융합한 마니교라는 종교가 탄생하였습니다.

파르티아와 페르시아는 결국 귀족적이면서도, 국제적이고, 화려하면서도 동서융합적인 성격을 가진 국가였습니다. 이들은 국제적이면서도 화려한 예술 속에서 동서 문화의 융합을 시도하였고, 그 시도는 동방과 서양에 큰 영양을 주게 됩니다. 예로 마니교가 동양, 서양에서 다 같이 숭배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입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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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