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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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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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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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삼국의 통치제도 정리

1. 통치체제의 개요

삼국은 모두 부체제 형태의 국가로 시작합니다. 부 체제란, 삼국이전부터 각기 영역을 가지고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각 부가 중앙왕실에 귀속되었지만, 각 부 귀족들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독자적으로 영역을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은 모두 부가 있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5부, 신라는 중앙 6부가 있었죠. 이들 독자적인 부 중에서 힘이 있는 부에서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부체제를 보통 역사에서는 <연맹왕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각 부는 중요한 일들을 각 부의 연합회의(귀족회의)에서 결정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제가, 백제의 정사암, 신라의 화백 등은 삼국 초기의 부체제를 상징하는 회의들입니다. 국왕은 어떤 명령(교, 칙)을 내릴 때에도 각 부들과 상의하여 명령을 전달합니다. 대표적으로 신라의 <공동하교>는 국왕도 어느 부에 소속되어 명령을 내릴 때는 소속부를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관등제도가 정비되고, 각 부의 귀족들은 왕의 신하(관료)가 됩니다. 각 부들은 점차 행정적인 <부>로 전환됩니다. 국왕은 불교, 율령 등을 수용하면서 중앙집권적 제도를 정비하였고, <공동하교>는 점차 왕의 단독하교로 전환됩니다.

즉, 관등제도는 종래 족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다양한 독자세력들을 <국왕권 밑으로 신속>하면서 생긴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관등제도에는 초기부터 국가권력을 독점하던 부의 독자세력들은 중앙집권이 정비되면서 왕권에 복속함으로서, 자신들의 특권을 계속 보장받는다는 의미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족장적 특권이 귀족적 특권으로 전환된 것이지요. 예로, 신라 골품제도는 이벌찬, 아찬 등 족장계열의 <찬> 계열이 계속 특권을 향유하였고, 고구려의 관등도 대대형, 태형 등 족장계열인 <형>계열의 관료군들이 지배층으로 특권을 향유하였습니다.

2. 삼국이 관등을 정비하다.

삼국의 관등제도는 이렇게 초기 족장세력들을 국왕권으로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특권을 부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관등제도와 관직체계는 본래 족장 세력의 규모와 세력에 따라 <등급>을 매겨 주는 것이었고, 이러한 <포상적 의미>의 관등제도는 곧, 관등제도가 <신분제도>의 제약을 받음을 의미합니다.

삼국의 관등은 능력이 아닌 족장세력의 우열로 결정됩니다. 고대 사회의 특징인 <신분이 곧, 관등을 결정한다>는 것이지요. 신라의 초기 골품제를 보면, 간층, 5두품, 4두품이 올라갈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습니다. 법흥왕 이후 개선된 골품제도에서도 진골, 6두품, 5두품의 상한선은 명백합니다.

이러한 관등제도의 또 하나의 특징은 <관품>이 곧 <관직>을 결정한다는 점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관품(품계)와 관직(수행하는 관직)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고려 이후에는 정 3품이니 종 2품이니 하는 관품에 따라, 관직인 어사대부 등을 하사하였지만, 이 시기는 관품이 곧 관직입니다.

그리고 관품이라는 것도 특정 족장세력의 가문들에게 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등급을 부여함으로서 <세력에 따른 특권의 차등적 부여>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유력가문이 유력관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신라, 통일신라>사회를 고대적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3. 삼국의 관등

고구려는 이러한 관등제를 10여관등으로 정비하였고, 최고 관직은 대대로였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1-5관등으로서 최고 귀족이 참여하는 관등의 상한선이 바로 5등급 관등이었습니다.

고구려의 특징은 형과 사자라는 계열을 분화한 것입니다. 과거 유력한 지방 족장이었던 세력은 형계열, 유력 족장 세력의 수취인과 행정관료 출신인 사자계열로 구분하여 관직에 차별을 두었습니다. 초기 위지에서는 10관등만 보이지만, 중국의 사서가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 관등을 많이 적어놓습니다. 후기에는 14관등까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됩니다.(사이트 내 참고사료 검색 : 주서, 수서, 당서, 한원 등의 동이전 참조)

고구려 역시 관등이 곧 관직이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전왕족과 왕비족에 대한 예우가 있었는데, 이들은 <제가> 중에서 상위의 <가>라는 뜻의 <고추가>를 하사하였습니다.

백제는 고이왕 대 상좌평 이하 6좌평제로 정비하였는데, 기본 관등은 16관등이었습니다. 백제의 관등에서는 초기적이지만, 문무의 구별이 보인다고 합니다. 중국식 관등은 6좌평제도(중국의 6조제도)가 보이며, 자색, 비색, 청색의 관복에 따른 신분 차별이 보입니다. 관직은 <1. 좌평과 솔, 2. 덕, 3. 무명>이라는 3단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대에 12등급인 골품제도를 17등급으로 개편하였습니다. 1-5관등은 <간층>으로서 전직 족장계열로 우대하였습니다. 이들은 간이라는 어원을 가진 <찬>이라는 계층으로 편제되었습니다. 이벌찬, 사벌찬, 아찬 등의 호칭을 사용하였죠. 신라는 <찬, 사, 지> 등의 관직으로 구분되었는데, 관직에는 골품에 따른 절대적인 상한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골품의 관직은 모두 경위인만 대상으로 하였고, 외위는 해당하지 않는 관직명입니다.

또, 왕이 되어야 했는데 되지 못한 성골, 아들이 왕에 오른 자 등은 <갈문왕>의 칭호를 주어 왕족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전왕족이나, 왕비족 중에서도 왕위 계승권이 있고, 실제 후손 중 왕을 배출하였으면 갈문왕이 됩니다.

4. 가장 미숙한 신라의 중앙 관직 제도

삼국 중 <샴국사기>등의 기록에 의거해 가장 많은 중앙관직관련 사료가 많은 국가가 신라입니다. 그러나, 사실 신라가 중앙집권을 이룬 것은 6세기가 넘어서이고, 신라의 체제는 삼국 중 가장 후진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체제 정비가 늦었다는 점도 있고, 지리적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라의 중앙 관제는 당의 6부체제에 영향을 받았지만,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관직은 사회발전정도에 따라 상황에 맞게 필요에 따라 설치하였습니다. 즉, 정복사업이 본격적으로 시도되면서 병부가, 그것을 관장하기 위한 재정부서로서 창부, 예부가 설치되는 등 너무도 허술한 체제입니다. 그리고 정복사업 확장에 따라 병부, 창부가 거의 모든 전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또 귀족 대표자 자격으로 상대등이 설치되었으나, 이것은 중대 이후 집사부의 설치로 인하여 그 역할이 애매했었습니다.

신라의 관직 개편 과정

1. 유리왕 : 사로 6촌을 6부로 개편, 12등급의 골품제 기반 마련
                   대보 - 정무와 군사를 담당하는 부서 / 이벌찬, 아찬 등이 화백회의를 통해 업무를 총괄
   2. 법흥왕 : 골품제를 17등급으로 개편 , 상대등 병부의 설치 - 군권 기구 등장
   3. 진흥왕 : 조세를 담당하는 품주를 설치 - 조세 기구 등장
   4. 진평왕 : 위화부, 조부, 예부 설치 - 인사 기구도 등장
   5. 진덕여왕 : 품주를 집사부, 창부로 이원화(행정총괄기구 등장) , 좌이방부와 우이방부 설치(형법기구 등장)

다음 포스트에서는 신라의 지방 통치 제도를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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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서 참고자료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단 가져가실 땐 꼭 댓글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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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지배층 - 가, 호민, 하호, 간

1. 가란 무엇인가?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을 논할 때 우선 알아야 할 단어는 <가>입니다. 가란, 북방 유목민 사회에서 전파되어 온 개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 유목민 사회에서는 지배자(족장)를 가한이라고 불렀습니다. 가한이란 큰 추장이란 뜻이라고 하네요. 흉노에서는 지배자를 <선우>라고 부르는데, 이 선우도 그 원 뜻은 <가한>이라고 한답니다. 중국에서 유목왕조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당나라도 이 <가한>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지배자라고 자처하기도 했답니다.

이 <가>라는 말은 남방에 내려와서 삼한 사회에서 <간, 한>이라는 용어와 같이 쓰였습니다.

우선 가가 들어간 말들은 고추가, 대가, 소가, 제가 등 북방계통의 국가가 많이 사용했습니다. 고구려, 부여에서 많이 나오는 용오들이죠. 신라에서는 마립간, 이사금, 거서간 등의 파생어가 있는데, 여기서의 간 역시 <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용어는 공통적으로 추장, 족장, 군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용어는 <왕>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국의 군장을 뜻하는 용어로서의 <가>이기 때문에 이 용어가 사용된 시기는 연맹왕국 단계의 초기 철기 시대가 주류를 이루는 듯 싶습니다. 제가 역시 이 <가>라는 용어에서 파생된 작은 영역의 지배자로 해석하면 무난할 듯 싶네요.

그러나 초기 철기시대를 넘어 삼국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가> 계급은 중앙세력에 편입되어 관등제도 속으로 포함됩니다. 예로, 고구려의 초기 나(노)집단은 주변 씨족 사회를 통합하여 연노, 절노, 순노, 관노 등의 <가> 사회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계루부 중심의 부로 통합되었고, 씨족적 부는 고국천왕대에 행정적 부로 재편됩니다. 그리고, 가들은 중앙관위 속에 편제되어 고추가 - 대가 - 소가라는 3중적인 서열로 재편됩니다. 즉, 가들은 읍락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고, 왕권에 신속한 신하가 되는 것이지요. 이들은 왕권 밑에서 읍락과 하호를 통제하는 행정관 성격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부체제적인 <중층적인 이중 구조>의 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일원적 구조>로 바뀜을 말합니다.

2. 호민이란 무엇인가?

호민은 원래 가에 속한 가층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고, 정복사업이 많아졌으며, 철기시대가 진전되면서 이 호민층은 가층에서 갈라져 나온 중간 계급의 성격을 갖습니다. 원래 호민은 소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예로 옥저, 동예, 삼한 등에서는 뚜렷한 지배자가 없이 다수의 읍군, 삼로, 장수, 후 등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더 큰 대국에 점령당하면서 대국에 편입된 호민층으로 자리잡았다고 합니다.

호민은 초기부터 자신의 지배영역을 가지고 있던 소국 족장으로서, 대국에 통합된 이후에도 읍락의 점유권 등을 바탕으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 지배층이라고 보시면 무난할 듯 싶습니다.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호족>세력과도 비교가 되네요.

3. 경, 대부는 무엇일까?

경과 대부는 중국 서주시대사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필요하신 분들은 검색해보세요. 서주시대로..) 대부은 원래 제후 밑에서 봉토를 부여받고 군사와 공납을 담당하던 <국>의 지배층이었습니다. 경은 제후 옆에서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실권자인 대부를 말합니다.

우리 역사에서는 기자조선 시대에 경, 대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의 경은 한 지역의 국사를 맡던 관직으로 <조선상 역계경> 등에서 보여지듯이 독자성을 가진 이름입니다. 대부란, 일정 가문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배층 귀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이들 경, 대부들은 각각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고, 상위 지배집단이 동요할 때에는 스스로 <가, 간>을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는 했습니다. 삼한 70여개국이 정확한 명칭을 알 수도 없고, 그 영역도 잡거 형태이며, 생몰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에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경, 대부에게 일정한 관직을 주고, 영역를 인정하여 지역을 통치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왕에 신속하면서 중앙정치에 참여한다던가 지역통치에도 관여했을 것입니다. <조선상 역계경>을 예로 보면, <상>은 국가에 신속한 관리를, <경>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임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두가지가 동시에 명칭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네요. 이러한 경, 대부라는 직책은 위만 조선에서 보입니다.

4. 제가란 무엇일까?

제가란 용어는 부여에서 나옵니다. 제가란, 한자로 보아 <가>들을 두루 다스리는 큰 가란 뜻일 겁니다. 제가는 왕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큰 족장 세력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읍락에서 수백, 수천가를 다스리며, 좌식자(앉아서 먹고 노는 계급)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호를 착취하여 막대한 조세를 걷었죠.

부여는 <제가평의>를 통해 행정에 참여하였는데, 이미 1책 12법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보아 제가평의는 법의 제한을 어느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들은 그들의 특권이 존재하는 만큼 어느 정도 법의 제한에서는 벗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제가는 하호를 지배하는 실제적인 영역의 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마음대로 관료를 임명하고, 임명한 관료의 명단만을 왕에게 통보하는 형식으로 영역을 다스렸습니다. 예로, 고구려의 대가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을 스스로 임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여의 제가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 왕을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들은 독자적인 군사력도 막강하여 왕위계승분쟁이 있을 경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전쟁시에는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만큼의 자제적 군사력과 전술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볼 때, 부여나 초기 고구려 등의 5부족 연맹왕국은 2중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국왕이 제가를 통솔하나, 제가 역시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관료조직을 가지고 읍락을 지배한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부체제에서 말하는 <중층적 구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5. 하호는 무엇을 하였나?

하호에 관련된 유명한 사료는 <제가에게 고기, 소금>을 날라다 준다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혹한 수취로 하호들을 다루었으며, 하호가 노예적 성격을 가진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부여의 순장, 인두세 등은 노예제 사회임을 강력하게 증명해줍니다. 그러나, 실제 하호가 노예인가, 농노인가, 씨족사회 일원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학자들간에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6. 지배체제에 대해 정리해보자.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지배계급은 가, 한, 간 등의 족장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본래 독자적인 소국의 왕을 칭하던 가, 한, 간 등은 소국이 대국에 굴복함으로서 대국에 귀속된 계층으로 전환됩니다. 고구려의 가(고추가, 대가, 소가), 백제의 한(가한), 신라의 간(거서간, 마립간 등)의 질서를 볼까요?

고구려는 보통 형제적인 질서를 보입니다. 태대형, 대형 등 <형>의 계열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초기 고구려 지배층은 소국과의 관계가 같은 예맥족에서 출발함을 암시하는 듯 싶습니다. 대형은 큰 세력, 소형은 작은 세력을 말하는 듯 합니다.

신라는 지방 간층의 지배세력을 신지, 험측, 범예, 살해, 읍차라 부르며 등급화하였습니다. 이것은 중앙지배세력으로 포섭된 이후에도 이간, 파진간 등 <간>의 칭호를 달리하여 세력을 등급화하였습니다. 초기에는 12등급, 법흥왕 이후에는 17등급으로 정비하면서 이것이 곧 골품제와 연결되는 <간군관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관등이란 것은 원래 국가 업무에 참여하는 자들을 <등>이라고 하여 주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지배층의 높낮이를 구별하는 용어로 쓰입니다. 국왕 밑에 신속한 관리는 <대등>, 그들의 우두머리는 <상대등>, 간층 귀족들이 차지하는 관등은 <간군관등> 등으로 쓰이죠.

7. 이 지배체제는 <부체제>로 정리될 수 있다.

결국 초기 철기시대의 국가들의 특징은 각 소국의 지배자(가, 간, 한)들에게 영역을 인정해주고, 백성 지배를 인정해 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국의 지배자인 족장, 군장들은 각각 자국의 지배층들과 국가 중대사를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이것을 <귀족 회의>라고 합니다. 국가 중대사는 거의 이 회의체가 결정하였습니다. 국왕도 이 회의의 결정을 때를 수밖에 없었으므로, 왕권이 전제화되지는 못한 듯 합니다.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회의, 신라의 화백회의 등은 이런 역할을 수행한 면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초기의 지배층은 왕의 도읍에 거주지를 마련한 후 정치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고구려의 5부, 백제의 5부, 신라의 6부 등은 이런 정치집단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층 중에 가장 강력한 집단이 왕이 되었고, 그 다음은 왕비족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계루부 정권에서 절노부가 왕비족으로 군림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집단도 일정 세력을 가진 자치권이 있었습니다. 예로, 고구려 소노부는 계루부에게 정권을 넘겨준 부였지만, 자체 종묘사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왕 밑에서 각 부들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형태의 구조를 <부체제>라고 합니다. 부체제에서의 부들은 상호 후원자적 성격으로서 각 부는 자신의 이익을 지킴과 동시에 외적에 대해서는 공동방어를 추구했습니다.

모든 부는 왕 이하 평등관 관계로 이루어졌습니다. 실제 신라 진흥왕기 이전의 삼국을 보면, 왕이 하교를 내릴 때, 왕도 왕의 명칭 앞에 소속부를 붙었으며, 그 하교가 왕과 여러 부의 공동하교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왕은 군사권, 인사권, 재정권, 세습권을 가지고 있지만, 각 부는 자치권, 제사권, 방아권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상호 평등한 관계를 유지함을 알 수 있네요.

그리고 각 부에서는 귀족 대표를 스스로 뽑습니다. 고구려는 삼세일역이라고 하여, 삼년에 한번 신하들 가운데 실력자를 대대로로 선임하였으며, 백제는 서너명의 재상 후보들이 다투면 왕이 마지막에 선택하였고, 신라의 상대등은 6부 귀족들이 만장일치로 합의하여 선발했다고 합니다. 부체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따로 <부체제>라는 파트를 만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무지 길거든요.

8. 부체제는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부체제는 국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각 부의 독자적 영역과 세력이 약해집니다. 부는 행정구역으로 변하게 되고, 각 부의 <간>층은 관등에 속한 관료계급으로 전환됩니다. 이 때, 부가 국가의 행정구역으로 변하면서 <간>층은 유력한 혈연 귀족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혈연을 뜻하는 단어인 <골>입니다. 특히, 내물왕 이후 골들은 자신들의 유대관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진정한 골(진골)이라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왕위 후계자가 될 진골들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혈통이락 하여 성스런 골(성골)로 규정하기도 하죠. 이 부분은 다음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영일냉수리비와 울진봉평비를 보면, 신라 초기에는 공동하교를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냉수리비에서 지증왕(지도로갈문왕)은 아직까지도 여러 부의 왕들과 함께 교를 내리고 있습니다. 울진봉평비에서 법흥왕은 노인법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서 <간>층이 임의로 지배했던 피지배층(노인)을 국가체제로 흡수하는 과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들 왕은 아직도 <부>를 장악하지 못하였고, 각 지방에서는 <부>를 다스리는 <간>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이러한 부를 확실하게 누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중앙집권화와 영토확장을 과감하게 실시한 왕이 바로 <진흥왕>입니다. 진흥왕의 단양적성비에는 모든 부를 제외하고 왕 혼자서 명령을 내리는 <단독하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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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백 회의

일은 반드시 무리와 더불어 의논했다. 이를 화백(和白)이라 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통과되지 못했다.

- 신당서 220, 열전 145, 동이 신라 -

큰 일이 있으면 여러 관료들이 모여 자세히 의논한 후 결정한다.

- 수서 권 81, 열전 46, 신라 -

사료해석 : 초기 신라의 만장일치회의인 화백회의의 사료입니다. 초기 신라의 귀족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으로, 백제의 정사암, 고구려의 제가와 함께 만장일치적 귀족사회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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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암 회의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4명의 이름을 적어서 상자에 넣고 봉해서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보고 그 이름 위헤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이라고 하였다.

                                                                                         - 삼국유사 -

사료해석 : 삼국 초기 화백, 정사암, 제가 회의 등 귀족 회의가 존재하였다는 증거사료입니다. 왕권을 제약하는 귀족 세력의 합의 기구로서, 위 사료는 정사암 회의 자체에서 백제의 정치가 논의디고 수상이 선출되었던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귀족합의 기관의 존재는 삼국의 중앙집권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을 의미하며 삼국의 정치가 국왕 중심의 귀족 정치였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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