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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시조

조선의 건국 - 태조 이성계 조선의 건국자로 이름은 성계, 호는 송헌이다.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함경도 영흥)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1. 집안 내력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 더보기
고려시조 - 태조 왕건 ■ 출생과 초기의 이력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 충주, 청주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 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 더보기
발해 - 고왕 대조영 본명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의 영주(營州)지방에 그 일족과 함께 옮겨와 거주하였다. 696년 이진충(李盡忠)· 손만영(孫萬榮) 등이 이끈 거란족의 반란으로 영주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대조영은 말갈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그 지역에 억류되어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각각 이끌고,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동으로 이동하였다. 당나라는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는 허국공(許國公)을 봉하고 회유하여 당나라의 세력 아래 다시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그것을 거부하였다. 당나라는 거란군을 격파한 뒤, 성력연간(聖曆年間, 698∼699)에 추격군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에 항복한 거란족 출신의 장군 이해고(李楷固)가 이끈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오자, 걸사비우의 말갈.. 더보기
건국시조 - 신라 박혁거세 거서간 ☞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신라 박씨(朴氏)의 시조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박혁거세라고 지칭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설화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서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가보니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 더보기
건국시조 - 백제 온조왕 온조왕 (溫祚王) ■ 백제 1대왕 ■ 재위 서기전 18-서기28 엄밀한 의미에서는 위례성(慰禮城)에 토대를 둔 백제 왕실의 시조이다. 현존 문헌들에는 백제의 시조로 전하는 인물들이 여러 명이며, 온조는 그 중의 하나이다 백제 초기에는 북쪽에서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남하한 부여족의 여러 집단들이 연맹체를 결성하고 있었다. 그들 중 먼저 미추홀(彌鄒忽: 현재의 인천 부근으로 추정)에 정착한 집단이 먼저 큰 세력으로 대두하였고, 그에 뒤이어 패권을 잡은 것이 위례성(현재의 서울 부근 또는 廣州 부근으로 추정)의 집단이었다. 그리고 미추홀에서 일어난 집단의 시조로 전하는 것이 비류(沸流)이고, 그 뒤에 권력을 장악한 위례성 집단의 시조가 바로 온조이다. 《삼국사기》 등에는 온조의 아버지를 동명(東明)이라 하는 .. 더보기
건국시조 - 고구려 동명성왕 ▶ 주몽설화 관련기록 성은 고씨(高氏). 이름은 주몽(朱蒙) 또는 추모(鄒牟),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中牟), 중모(仲牟), 도모(都牟)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즉 《국사 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는 성이 고씨, 이름은 주몽이라 하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추모’ 또는 ‘상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와 모두루 묘지에서는 ‘추모왕’이라 하였다. 또 백제에서 시조로 모신 동명에 대하여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 등 일본문헌에는 ‘도모(都慕:일본음 쓰모)’라고 하였다. 이들 일련의 한자(漢字)표기는 모두 동명을 다른 글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편 중국문헌인 《위략 魏略》, 《후한서 後漢書》 부여전, 《양서 梁書》고구려전에는 부여의 시.. 더보기
건국시조 - 김수로왕 일명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이다. 탄생과 치적에 관하여는《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전해지고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직도 나라가 없던 시절에 가락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3월 어느날 하늘의 명을 받아 9간(九干:族長) 이하 수백명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고 춤추고 노래하자 하늘로부터 붉은 보자기에 싸여진 금빛그릇이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태양처럼 둥근 황금색의 알이 여섯개 있었다.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남아가 차례로 태어났는데, 그 중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이름을 수로라 하였다고 한다. 주민들은 수로를 가락국의 왕으로 모셨고, 다른 남아들은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 이때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