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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원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 더보기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존속한 <부>라는 체제 외위가 페지되고 국왕 근친들은 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1. 외위의 폐지 외위는 앞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히 정리합니다. 에 대한 글을 읽으시려면 필수적으로 경위와 외위에 관련된 앞 포스트를 읽으셔야 이해가 가능합니다. 신라가 통일되면서 신라의 국왕들은 진골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독자적으로 주던 라는 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국통일 후 왕권을 강화해야하는데, 지방의 외위제라는 독자적 관등제도가 왕에게는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외위를 없애면서도 왕의 종친에 해당되는 근친 진골들의 특권까지 제한하기에는 무리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 후 신라에서는 근친 진골들의 지방 지배을 인정해야 했고, 근친 진골들에게 국가유공자 성격의 을 토지로서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식읍.. 더보기
헌덕왕 대의 국가 위기 - 김헌창, 김범문의 난 헌덕왕 대의 위기 - 김헌창, 김범문의 난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 7월 왕의 숙부(叔父) 언승(彦昇)이 그 아우 이찬(伊瑗) 제옹(悌邕)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궁안에 들어와 난을 일으켜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體明)도 왕을 시위(侍衛)하다가 함께 해를 입었다. (《三國史記》 10, 新羅本紀 10, 哀莊王) - 삼국사기 10, 신라본기 10, 애장왕 - [헌덕왕(憲德王)] 14년 3월, 웅천주(熊川州) 도독(都督) 헌창(憲昌)은 그 아비 주원(周元)이 앞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國號)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건원(建元)하여 경운 원년(慶雲元年)이라 하며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주(沙伐州) 등 4주의 도독(都督)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 더보기
원성왕의 즉위와 원성왕계의 시작 원성왕의 즉위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니 휘는 경신(敬信)으로 내물왕의 12세손이었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비는 김씨 신술(神述) 각간의 딸이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들이 발호할 때 선덕(宣德)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있으면서 임금 측근의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자 경신이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그는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이 후사(後嗣)를 의논하여 왕의 족자(族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니 어떤 이가 말하되 "사람이 임금의 큰 자리에 즉위한다는 것은 진실로.. 더보기
김헌창의 난 - 신라의 골품적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의 족적 변동, 사회적 변화, 골품제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회 내부의 반란'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가 붕괴되어가자, 진골 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지요.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에 오른 이후 이제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진골 내부에서는 누구나 실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선덕왕 대에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다음 왕에 오르며 원성왕계를 형성한 것이 그 예이죠.. 더보기